Thursday, March 1, 2012

만행 나의 도반 대봉스님

만행 나의 도반 대봉스님

대봉스님
대봉스님은 현재 계룡산 국제선원장이시다.
대봉스님을 처음 만나면 모르는 사람도 이내 그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에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천사가 안 되고는 못 배길 정도다. 스님은 원래 ‘도문’이라는 법명을 받으셨는데 지난 여름 숭산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아 새로운 법명을 받으셨다. 우리는 그를 이제 대봉스님이라 부른다.
대봉스님은 유태인으로, 미국 펜실바니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미국의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세대다.
국방성 앞에서 반전 데모를 하기 위해 세 번이나 친구들과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시위를 했다. 그 세 번의 시위는 모두 미국 역사에 기록될 만한 규모였는데 매번 약 50여만 명이 참가하는 대 집회였다. 두 번째 집회까지는 시위대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져 아주 평화적으로 진행 됐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 번째 시위 때는 시위를 주도한 지도부끼리 의견이 갈라져 시위 전략과 방법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서로 싸우고 헐뜯고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와 싸우기 위해 모였는지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지도부 중 한 명이었던 대봉스님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평화를 위한다고 했지만 혹 우리들 마음엔 또 다른 욕심이 자리했던 것은 아닐까. 平和와 終戰을 외치는 우리가 이처럼 분쟁과 전쟁을 계속하다니...... . 극도의 좌절과 환멸이 그를 짓눌렀다.
당시 그는 반전운동을 하는 평화단체에 속해 있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그 단체에서 나왔다.그리고 좀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일이 정신병원 상담사.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는 일단 자신의 전공을 통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정신병원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바로 이 경험이 그의 인생을 뒤흔들 큰 의문을 가져다 주었다. 정신병원에서 그는 수많은 정신 질환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바기 몸을 물어뜯는 자해를 하고 밤이고 낮이고 소리를 질러댔다.
의사들은 그런 환자들을 동물 다루듯 했다. 그는 소위 배웠다는 똑똑한 의사들이 아무리 미친 사람이라도 그렇지 하찮은 벌레 다루듯 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의사보다는 덜 배우고 지위도 낮은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성심 성의껏 대했다.
대학 다닐 때의 반전 데모와 정신병원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는 삶에 큰 의문을 갖게 된다. 돈을 받고 명예를 얻는 일이 어쩌면 나만의 이기적인 삶을 위한 선택은 아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부딪쳤다.
그는 소위 자신의 먹물 근성을 빼고 싶어 공장에 취업했다. 그런데 어떻게 일자리를 알아보다 보니 하필 핵 잠수함 만드는 공장에 취업하게 된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지금껏 자기가 만났던 소위 먹물들보다 덜 배운 사람들인데도 훨씬 착하고 인간적이었다. 남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무기 만드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책감은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뉴헤이븐에 있는 큰스님 젠센터에서 수행하는 공장 동료와 친하게 지내던 그는 동료로부터 큰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듣게 된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찾아왔던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큰스님의 제자가 된다.
유태교는 종교적 뿌리가 깊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의사인 아버지는 불교 수행을 하는 장남인 그를 탐탁지 않아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을 나와 공장에 취직한 아들 때문에 늘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일까지 그만두고 아예 잰센터에 눌러앉아 사는 그가 못마땅하게 여겨지신 것이다. 그와 부모님 사이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스님이 필라델피아로 법문을 하러 가는 길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 큰스님은 필라델피아가 대봉스님의 고향인 것을 알아차리고 법문이 끝난 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함께 인사를 드리자”고 제안하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스님은 집에 연락을 했다. 스님의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조부모님을 비롯하여 친척이란 친척을 다 불러모았다. 큰스님을 상대로 종교 논쟁을 벌이겠다는 심산이셨다고 한다.
이윽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조부모님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유태교와 불교 사이에 한바탕 격전이 치러진 것이었다. 장시간의 토론을 마치고 조부모님들과 부모님들은 대봉스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숭산스님이 가시는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지 않은 것 같으니 너의 수행을 허락한다.”
대봉스님은 뛸 듯이 기뻤고 그 후 더욱더 수행에 정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 출기를 하게 된 대봉스님은 요즘 큰스님과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신다.
대봉스님은 숭산 큰스님이 계룡산에 짓는 국제선원의 총 감독관이라 현재 계룡산 공사장 조립주택에 살고 계신다. 대봉스님은 자신의 온 열정과 에너지를 계룡산 국제선원 공사에 쏟아 붓고 계신다
계룡산 국제선원은 아주 역사적인 곳이 될 것이다. 이제 비로소 한국불교를 배우고 한국 전통에따라 참선수행을 하고 싶어하는 서양인들의 공간이 한국땅에 생기는 것이다. 물론 서양인들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도 무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큰스님은 계룡산 국제선원이 완공되면 참선수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문호를 개방해 가르침을 전하실 예정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수행하고 싶어도 장소가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요즘엔 한국 동안거에 참여하려면 1,2년씩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계룡산 국제선원이 완공되면 수행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전세계에 위치한 숭산 큰스님의 젠센터에서 수행하는 세계인들은 계룡산 국제선원의 완공을 손꼽아 기다리고있다.(1999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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