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3, 2012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불교가 서양인, 특히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면 ‘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였지만 불교야말로 어떤 경지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세계를 부정해왔다.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한다는 생각에 가반을 두어야한다. 자연세계와 영적인 부분의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이러한 내 생각과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불교는 물론 과학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의 동정심, 착한마음 등 인간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지만 그 기본 교리는 과학적 논리성과 정합성에 맥이 닿아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는 죽었다’고 말한다.
속도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인간복제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종교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신과 진리를 숭배하기에는 이 세상에 숭배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가져다 준 인간생활의 흭기적인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테크롤로지 과학에는 ‘영혼’이 빠져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이 세계를 모두 과학과 테크놀로지로만 가득채우게 될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워크맨, 노트북 컴퓨터, 게임기, 호출기, 휴대폰으로 무장(?)하고 서울 명동과 신촌, 압구정동, 신사동을 걷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그 안에서, 절저히 자기만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이 이전 부모세대들의 삶보다 발전되고 행복해졌는가? 어쩌면 부모 세대들보다 더 큰 소외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유익한 생활도구를 얻고 보다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않는 것이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장 프랑수와 르벨은 “과학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닿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이 인간의 의문들에대해 해답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냉정하게 사고 서로를 더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모든문제를 해결해 줄 도깨비 방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빚은 뒤틀림 현상은 세계곳곳, 특히 서구사회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역사는 과학발전의 역사다. 좀더 나은거, 좀더 편리한 것, 좀더 빠른 것을 위해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끝도 없는 전진을하다 어느 순간 ‘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앞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어떤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은 그저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이나 숟가락, 혹은 자동차 같은 ‘도구’일 뿐이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이주는 유익성과 해악성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한다. 우리가 만일 진정한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참된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유를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다른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해답이 나오는 것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저명한 과학자 한 분이 재미있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실천에 옮긴다면 현재 이 세계기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 희귀동물의 멸종, 쓰레기 처리, 폭력문제, 존족간 전쟁, 과잉 인구문제, 묘지 증가에 따른 토지 낭비 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불교의 인과론, 일체중생이론 등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과학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마음과 생각의 실체를 표현하는 단어나 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오직 수행을 통한 경험으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물질의 근원점을 모색해도 실체의 성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닿아있다. 거기에 인간의 영혼이 불어넣어져 비로소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숭산 큰스님이 불교와 과학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적어본다. 이 글은 최근〈물병자리〉출판사에서 변역되어 나온 큰스님의 편지글인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 한 제자가 큰스님께 이렇게 물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과학 연구와 참선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군요 과학자들은 영속적이고 반복이 가능하며 의사전달이 가능한 경험을 토대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시지만 과학자들이 만드는 세계관이란 어차피 개념적일 수밖에 없읍니다. 물리적으로 인과 관계가 뚜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고도로 이론적인 세계관과 참선의 관점을 하나로 절충할 수 있습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과학을 공부하면서 의문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우주가 115가지 원소로 생성되였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115가지 원소는 어디서 왔을까.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그것은 無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무극이란 끝이없어 텅 빈 상태입니다. 나는 선생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극을 어떻게 볼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무지개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햇빛은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방울과 접촉해 무지개를 만든다. 만일 1백명의 사람들이 무지개를 보았다면 1벡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요. 아부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무지개를 보고 있다면 네 앞에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이어 선생님은 갖가지 색이 배열된 희전판 하나를 가지고 오신 뒤 원판을 돌리셨읍니다. 원판에는 아무 색도 보니지 않았지만 원판이 멈추자 많은 색이 보였읍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도 이와 같읍니다. 모든 것이 공에서 생겨나 공으로 돌아갑니다.
초보수준의 과학자라면 1+2=3 수준에 멈춥니다.’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과학자라면 1+2=0 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바로 이 단계가 색즉시공 공즉시공의 단계이지요.
그러나 좀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1, 2, 3,과 0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색과 공을 만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數라든지, 色이라든지, 空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그리고 개념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있기 전엔 너도,나도, 색도, 공도, 없읍니다. 생각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眞空속에 있는 그대로 있을 따름입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인식 세계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식 또한 ‘무언가’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를 세웠읍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의 인식을 조종하고 과학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언가’를 찾는 것이 禪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1+2=3과 1+2=0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만일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오직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요.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가도 확인하지 마십시요. 억지로 인식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어떤것도 억지로 만들려 하지말고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과학을 터득해 생사윤희를 뛰어넘어 중생을 번뇌에서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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