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9, 2012

만행 나의 도반들

만행 나의 도반들
우리 국제선원 승가 안에는 재미있는 스님들이 많다. 전세계에서 오신 분들이고 대부분 자유로운 서양에서 나고 자라 속세 경험도 다양하다. 그 지난한 삶의 역경 속에서 진리의 길, 도의 길을 찾아 떠만 그들의 삶은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어떤 때는 솔직히 피를 섞은 나의 가족들보다 더 깊은 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부모님.
숭산 큰스님은 나의 또 다른 부모님이시다. 부모님은 내 몸을 주셨지만 큰스님은 내 정신을 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그의 가르침,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그의 대자대비심은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사랑보다 값진 것이다.
내가 큰스님께 드리는 존경과 사랑은 신격화나 미화가 아니디. 그의 고단했던 삶과 그 고통 속에서 행했던 무서운 수행정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워 올린 위대한 깨달음, 그리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지혜……
나는 숭산 큰스님 때문에 수행을 시작했고 비로소 내 삶의 나침반을 가진 것이다. 만약 큰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고통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큰스님은 나를 비롯한 모든 수행자들을 하루하루 깨여 있도록 만드는 위대한 수행자이시다.
1993년 어느 날, 뉴욕에서 내 동생 그랙에게 숭산 큰스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첫 장면에서 모든 승려들이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는 모습이 나왔다. 그랙은 다짜고짜 나에게 “아니 어떻게 똑 같은 사람에게 저렇게 몸을 숙여 절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그랙은 다큐멘터리 내내 숭산스님 법문을 다 듣더니 “이제서야 삼배를 올리는 심정을 알겠다”고 말해 나를 흐믓하게 한 적이 있다.
나는 한쪽 어깨에 숭산스님을 또 다른 어깨에 내 부모님을 짊어진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의 아름다운 형제들은 소개하겠다.
무상스님
그는 나의 도반들 중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스님이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보살이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고 걸어온 길이 비슷해서 서로 만나자마자 친한 친구가 되었다.
무상스님은 196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고대 문학으로 그리스철학은 물론 러시아 문학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러시아어는 물론 불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에다가 한국어까지 안다. 그는 걸핏하면 고대 시나 소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인용,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한다. 쇼펜하우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물론 고대 희랍 비극, 세익스피어의 시와 소설 등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무상스님은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는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남부인 앨러바마와 미시시피로 내려가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 그 당시 이슈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그 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 몇몇은 백인 자상주의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무상스님은 그때 그곳에 계셨다. 독자들 중에도 〈미시시피 번닝〉이라는 미국 영화를 보신 분이 있을 텐데, 이 영화가 바로 당시 이야기를 재연한 것이다.
무상스님은 1년 동안 흑인 인권운동에 헌신한 뒤 예일 대학 법대대학원(law school)에 입학했다. 약자를 보호하고 돕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우선 법을 공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예일 대학원이었을 때 지금 미국 대통령 부부인 클린턴과 힐러리가 1년 후배로 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최근에 나는 무상스님에게 요즘 클린천 대통령이 왜 그렇게 많은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예일 대학원에 있을 때 클린턴은 한번도 나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없었거든”(하하하)
무상스님은 정말 재치가 있으면서도 지혜가 많은 분이다. 그의 머리는 고성능 컴퓨터 그 자체다. 한번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적이 없는 탁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데다 숫자에 관해서도 거의 無不通知다. 우리는 그를 ‘걸어 다니는 계산기라고 부른다.
나는 그와 함께 한국, 홍콩, 중국, 폴란드 등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할 때 제일 골치 아픈 게 돈 계산이다. 환율이 나라마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무상스님은 환율 계산하는데 거의 천재적 이었다. 우리는 무상스님에게 우리가 바꾸고 싶은 달러 액수만 얘기하면 그는 1, 2분 안에 그나라 돈으로 계산을 해낸다. 그것도 그날 그날 바뀌는 시세를 고려해서 말이다. 놀라 자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계산기처럼 완벽한 실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깨나 듣고 자란 나도 ‘워든지 못하는 게 없다’고 자부하지만 계산만큼은 자신이 없다.
나는 무상스님의 암산실력이 하도 신기해서 장난기를 발동해 몇번이나 그를 테스트한 적이있다. 그는 그때마다 순식간에 계산을 해냈고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 걸어다니는 컴퓨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리라. 그의 삶은 오직 진리를 향한 끝없는 구도의 길이었다.
예일 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그는 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법을 공부하면서 오히려 더욱 큰 의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법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법이야말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라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니 법이란 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제하는 강력한 방편에 불과했고 명예나 돈벌이 같은 개인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법을 공부하는 것이 정의나 진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힘과 엘리트주의를 구현하는 삶의 다름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삶과 진리와 정의에 대해 수많은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쫓아다니며 물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1975년 예일 대학으로 법문을 하러 오신 숭산 큰스님을 만난 것이었다. 그때 강의실에는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과 교수님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해는 큰스님이 미국포교를 시작한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미 미국에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자리에 모인 교수님과 학생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졌다. 숭산스님은 아주 쉽고 생생한 언어로 대답을 했고, 게다가 앚주 유머러스하기까지 하셨다. 무상스님은 그때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는 그때 일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큰스님 법문을 들은 그날 밤, 나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환생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큰스님의 가르침 방식은 완전히 소크라테스식이었다. 큰스님의 언어는 책에 있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지혜의 언어였다.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결코 그 누구에게도 그런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답은 주지 않았다.
그 다음 날로 그는 숭산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무산스님의 부모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백만장자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예일이라는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증서들을 모두 팽개치고 스님이 되였던 것이다.

Tuesday, February 28, 2012

병을 고칠 수 없는 6가지 경우

병을 고칠 수 없는 6가지 경우 현정일 칼럼

한의학 벌상지인 중국에는 전해오는 명의들이 많이 있다. 그렇게 많은 명의들 중에서도 편작과 화타는 신의와 성의로 불리우고 있다.
화타는 탁월한 의과수술 능력을 갖고 있었던 전설의 명의다. 동한시대에 태어나 삼국시대 위 나라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로 마비산이라는 마취약을 만들어 복깅 종양절제 수술과 위장절제봉합 수술에 성공할 정도로 외과에 뛰어난 명의였다.
편작은 화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 사람으로 한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이다. 편작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이 전해져 온다. 그 중에서 제나라의 환후에 관한 일화는 아직까지도 전설같이 전해져 온다. 편작이 제나라를 지나다가 환후를 만났을 때의 알이다.
환후를 본 편작은 환후에게 “병이 주리에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깊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환후가 말하기를 본인은 병이 없다라고 말했다.
편작이 물러간 후 환후가 좌우에 있던 중신들에게 의사는 이익을 좋아 하는도다, 병 없는 사람을 치료하여 공명을 도모하는구나 라고 했다. 5일이 지난 후 편작이 환후를 뵙고 말하기를 환후 께서는 병이 혈맥에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면 깊어질까 두렵다고 했으나 환후는 과인은 병이 없다고 하고 편작이 돌아간 후 기분이 나빴다.
다시 5일이 지난 후 편작이 다시 뵙고 말하기를 귀하께서는 병이 장위 사이에 있으니 치료하지 않으시면 깊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 대꾸하지 않자 편작은 물러갔다. 다시5일이 지난 후에 편작이 환후를 뵙고는 환후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다. 환후가 사람을 시켜 그 연고를 알아보니 편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이 주리에 있으면 탕위가(찜질요법) 미칠 수 있고, 병이 혈맥에 있으면 침석이(침술요법) 미칠 수 있고, 병이 장위에 있으면 약술이 미칠 수 있지만 골수에 있으면 사명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이제 병이 골수에 있으니 신은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5일이 지난 후 환후는 병이 들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 편작을 불렀지만 편작은 이미 도망해 버렸다. 환후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 편작은 투시를 통해 환후의 질병을 투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의보감〉에 보면
“편작 가라사대 병에는 6가지 불치의 경우가 있다.
1. 교만하고 방자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경우요.
2. 몸의 건강보다도 재물을 소중히 여기는 경우요.
3. 먹고 입는 것이 적당치 않을 때이고
4. 음양이 조화되지 못하여 내장의 기능이 고르지 못할 때이며,
5. 너무 쇠약하고 말라서 액을 복용할 수 없을 때이고,
6. 의사를 믿지않고 무당과 미신을 믿는 경우니라”라고 했다.

편작 같은 명의 조차도 6자지의 경우에는 치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방치하다가 병이 골수에까지 스며든 다음에는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나약해 보이는 사람이 장수하는 이유가 약하기 때문에 만사에 조심을 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옛말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한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기역해야할 명언이다. 현정일 박사 (213 386 3367

Monday, February 27, 2012

만행 불교의 세가지 보물

- 만행 불교의 세 가지 보물
출가하기 전 나는 다양한 경험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원, 뉴욕 생활, 그리고 홍콩 ∙ 프랑스 ∙ 독일 ∙ 이탈리아 ∙ 아일랜드 등 여러 나라에서 겪은 내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나는 그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만 다를 뿐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인간관계의 기본 코드는 경쟁이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오직 생존을 위한 룰(RULE)만 있을 뿐이다. 마치 수영장에서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수면위로 머리를 내놓고 팔다리로 물살을 사정없이 기르면서 물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지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아름다운 차, 아름다운 연인, 아름다운 집을 얻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결코 만족이 없다. 오직 투쟁과 쟁취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나의 출가 전 생활의 결론이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 나는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불교에는 佛 • 法∙∙•∙僧이라는 세 가지 寶物이 있다. 이 세가지 보물은 삶이라는 거대한 폭풍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배와 같은 것이다. ‘佛’ 이란 곧 부처이다. 부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다. ‘法’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갖고 부처님 말씀을 나누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과 ‘법’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세 번째 보물인 ‘僧’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스님 사회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승’이란 사실 이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다. ‘승’은 출가를 했든 안 했든 지혜와 진리를 찾고 싶어하는 큰 개념의 사람들을 가르친다. 아니 더 깊은 의미로 이 세상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따라서 이 세상 우주에 살고 있는 생물 중에서 ‘僧’에 속하지 않는 것들은 없다.
매일매일 스님들과 함께 살면서 수행하는 승려의 삶이야말로 불 • 법 • 승 삼보의 요체를 사는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출가 이후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다.
물론 스님들도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속가와 같이 질투와 시기가 있고 다툼이 있다. 사람들는 그런 승려들의 다툼을 볼 때마다 ‘머리 깎은 중들이 속세 사람들보다 더 욕심이 많다’고 손가락질한다.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겸허히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승가는 기본적으로 속가와는 룰과 방향이 다르다 승려사회의 룰과 방향은 깨달음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간순간 모든 중생을 잠에서 깨워 대자대비심으로 중생을 도우며 살겠다고 서원한다.
나는 출가를 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더 큰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가족은 근본적으로 내가 태어난 가족과는 다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본래 나는 형제 자매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제 내 형제 자매들은 결혼해 아이들을 낳아, 내게도 조카들이 많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점점 대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마음속엔 ‘우리만의 사람들’이라는 의식이 있다. 가족은 점점 더 커졌지만 여전히 다른 가족, 다른 사람들과는 분리된 것이다.
물론 승가 안에서도 모든 일원이 한마음인 것은 아니다. 같은 혈통의 한 가족 안에서도 나와 친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가족도 있고 폭넓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가족이 있는가 하면 아주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가족도 있고 하듯 말이다.
그러나 승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다. 스님이 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본성을 찾아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더 마음을 열고 도와주고 격려 한다.
내 미국 가족들은 각자 구성원이 우선 자기 삶, 자기 가족의 삶을 위해 산다. 나는 때때로 부모님, 형제 자매들로부터 전화나 편지를 받는데 그들과의 대화란 늘 똑 같은 걱정, 똑 같은 관심사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승려 가족들은 ‘자기’를 넘어서 자기와 남이 하나되는 삶을 살려고 한다. 180도 방향이 다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얼마나 많으냐, 평생 동안 한쪽 어깨에는 어머니를, 한쪽 어깨에는 아버지를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좁은 의미의 보은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가슴에 닿는 말이다.
비록 크리스마스 같은 큰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에 참석을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수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삶으로써 부모님의 은혜를 갚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까?”
그러나 나는 가족을 버린 게 아니다. 나는 더 큰 가족의 일원이 된 것뿐이다.
http://blog.daum.net/hirimaloka/6046692

Sunday, February 26, 2012

나의 전생 이야기

나의 전생 이야기

사람들은 또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티벳 불교도 있고 중국 불교도 있고 일본 불교도 있는데 왜 한국 불교를 선택했느냐. 그리고 나를 아는 분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느냐고 감탄을 한다.
사실 그분들은 외국인인 내가 한국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그런 말들을 하시지만 실제로 나는 이곳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외국’에 나와 있다거나 ‘고향’을 떠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국에서 김치와 된장찌개를 처음 맛보았을 때,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법수스님 방에서 한국 사찰 사진이 실린 달력을 처음 보았을 때,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한국의 모든 것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금 형제들∙친구들∙ 부모님들이 편지를 보내 “언제 ‘집’에 오느냐”고 재촉하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미국 집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안는다. 물론 나는 내가 태어난 미국땅과 가족들을 사랑한다.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살고 자라면서도 한번도 조국에 대한 애톳함이나 가슴 뿌듯함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산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그런 것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러나 고향 같다고 느낀 아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 다음으로 독일이 좀 친근했다고나 할까.
나는 한국인들이 남의 나라 사람 같지가 않다.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황병기씨의 가야금 연주 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면 조선시대의 최고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정선의 그림을 보시라. 아니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을 들어 보시라.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호떡을 먹어보시라. 인사동 낡은 찻집에서 쌍화차를 마셔보시라. 아니면 〈서편제〉 CD를 사서 들어보시든지. 특히 비 오는 가을 날 듣는 〈서편제〉 소리는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감정, 이런 느낌, 이런 경험, 이런 의식이 내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한국 불교에 대한 인연도 참 묘하다. 미국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싶어했을 때 뉴욕의 내 집 옆에는 뉴욕 젠 센터(Zen Community of New York)라는 아주 유명한 젠 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정말 수행을 하고 싶어졌을 때 그곳을 찾았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일본 젠 센터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숭산스님이 운영하시는 케임브리지 젠 센터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들어갔던 것이다.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동양이라면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참선수행에 그렇게 걸신들린 듯했으면서도 일본 젠 센터는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또 한국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면서도 케임브리지 젠 센터에 들어갔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나는 내가 전생에 한국인이었음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것말고는 나와 한국에 대한 인연을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전생’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90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큰스님 밑에서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에 들어갔다. 안거가 끝나고 나는 수유리 삼각산 화계사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마치고 절 뒤뜰을 거니는데 대웅전 앞을 오르려다 갑자기 어느 스님 방에서 울려 퍼지는 웬 음악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그 음악의 멜로디가 내 발길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완전히 충격에 사로잡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스님 방 앞으로 발길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멜로디를 계속 듣는 동안 내 안에서는 아주 벅찬 느낌이 솟아 올랐다. 슬픈, 아니 슬프다기보다 애잔하다고나 할까. 목구멍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심지어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노래 한 곡에 그렇게 내 감정이 울렁거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스님 방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노래가 아마 한국의 오랜 전통 민요이거나 농부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오는 판소리 가락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그 동안 참선수행을 너무 열심히 해서,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국에 대해 무슨 콩깍지 같은 게 씌워져서 좀 이상해졌나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동 안거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었고 내 기억속에 노랫가락도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다시 그 노래를 만난 게 1995년 여름이었다. 이미 출가를 해 화계사에서 살고 있는데 동국대에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불교경정을 영어로 강의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내 강의 스타일은 좀 독특하다. 가능하면 교실 밖을 벗어나 식당이나 잔디밭에 둘러앉아 노는 것인지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편하게 한다. 어떤 날은 식당에서 떡국이나 라면을 함께 먹으면서 수다를 떨 듯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8월 15일이었다. 그날이 광복절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원래 그날은 공휴일이라 휴강일 이었으나 학생들 중 몇몇이 강의를 원해 우리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큰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미침 8 ∙ 15광복절 50주년 기념식이 생방송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 퇴역군인들, 광복인사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어떤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장중하지만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는 저 가락,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아주 깊고 무거운 것이 가라앉는 느낌이 생겼다.
한 학생이 내 얼굴을 보더니 “아이고, 현각스님이 우시네, 현각스님 왜 우시는 거예요?” 하며 놀려댔다. 나는 너무 창피해 뛰다시피 화장실로 갔다. 휴지를 집어 들고 눈물을 닦으면서 바로 그 노래가 5년 전 화계사 스님 방 앞에서 들었던 ‘그 노래’ 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노래지? 무슨 노래인데 들을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그해 겨울이 돌아왔다.
나는 경주 남산의 작은 암자인 천룡사에서 혼자 백일 기도를 했다. 작은 토굴에서 매일 2천배를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잤다. 밤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열한 시까지, 그리고 새벽 한 시 반에 일어나 세 시 반까지 새벽수행을 했다. 끼니는 아침과 점심만 먹었다.
천룡사 2백 미터 아래에는 작은 집이 하난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노 보살님 한 분이 내 아침과 점심공양을 챙겨주셨다. 그 보살님은 천룡사를 관리하는 분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묵언수행을 할 때라 보살님과는 그저 눈인사만 나누었다. 내가 매일 앛침, 점심공양을 먹으러 그곳에 갈 때마다 그 노 보살님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옆방에서 다리미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셨는데 항상 TV를 켜놓고 계셨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밥을 먹다가 이내 숟가락을 놓고 다시 암자로 향했다. 토굴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 노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참선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냐. 유행가냐. 영화 음악이냐. 한국의 전통 노래 같긴 한데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점심공양을 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TV소리가 커지더니 보살님이 바깥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빨리 와 텔레비전을 보라고 난리를 치셨다. 나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 보살님 방으로 건너가 TV를 보았다. 북한에서 일가족이 귀순해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또 울려 퍼졌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지만 묵언수행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백일 기도를 마친 후 나는 남산을 여기저기 오르다 남산의 한 암자에서 소행하는 나이든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 스님은 암자에서 수행만 하면서 사셨다. 마침 젊은 스님 한 분이 옆에 계셨는데, 그 스님께 이것저것 전해주기 위해 들렸다고 했다. 그분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갑자기 젊은 스님이 나이 든. 스님을 가리키며 ‘이 분은 전생을 아주 잘 보시는 스님’아라고 소개했다. 나는 마침 지난 기도 기간 내내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며 그 스님에게 여쭈었다. 걸망에서 영한사전을 들고 한국말을 이어갔다.
“스님, 제가 한국에 와서 어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막 나왔어요. 목과 가슴에서 막 슬퍼요. 이런 일 나에게 한번도 없었어요.”
“무슨 노래야?”
“몰라요.”
“제목이 뭐예요?”
“잘 몰라요..”
“가사가 뭐예요?”
“잘 몰라요……
“멜로디 알아요?”
나는 잠시 멈추었다 노랫가락을 애써 기억해냈다.
“……딴 따아아아따따 따 안…… 따 따딴
내 허밍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스님들이 웃어댔다.
“그거 애국가 아냐, 애국가.”
“애국가? 애국가가 뭐예요?”
“우리나라 국가, 나라 노래 말이에요.”
나는 사전을 뒤졌다.
‘국가 =National anthem.’
“아, 나라 노래! 그런데 저는 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 막 흘러요? 그리고 목. 가슴 막 아파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나는 아주 잘 보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그 스님에게서 확인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하도 신비한 경험이라 나 혼자만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었다. 언젠가 큰스님께 여쭤볼 기회가 있으면 여쭙기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 여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하안거를 할 때 드디어 큰스님께 나의 전생에 대해 여쭐 기회가 생겼다. 매일 아침 큰스님은 국제선원에서 아주 짧은 법문을 하셨는데 법문 후 질의 응답이 있었다. 나는 모든 스님들 앞에서 큰스님께 궁금증을 털어 놓았다.
그동안 화계사, 동국대, 남산에서 겪었던 일을 다 얘기했다.
“큰스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지요? 한국 사람들조차 애국가를 들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 왜 저만 그렇게 유난스러울까요?”
큰스님은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스님의 업을 알고 있어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독립군이었읍니다.”
“예?”
“전생에 스님은 일본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한국인이었다. 이 말입니다. 스님은 한국이 일본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에 나가 열심히 싸워 일본군을 많이 무찔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군인의 총탄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을 때 스님은 너무 한이 맺혀 ‘아 나는 다음 생에는 아주 강한 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큰스님은 이 부분에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국을 위해 살겠다고’’고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겁니다. 스님은 한국과 아주 강한 업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전생에 나라를 찾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독립군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한국 사람들보다 애국가를 들을 때 더 강한 느낌을 갖는 게 당연하지요,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큰스님 말씀을 듣고 놀랐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로서 가슴속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미 내가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던 내 전생을 큰스님으로부터 확인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독립군이라…… 아아!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전생 경험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이 한 가지 더 있다.
작년 11월초 나는 지리산이 있는 전남 구례 천은사 위 상선암 옆 토굴에서 백일 기도를 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를 하느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스님들 동안거 때에 맞춰 나는 혼자 토굴수행을 한 것이다. 천은사 주지스님과 당시 상선암 주지스님이었던 지인스님(현재 전남 곡성 관음사 주지)의 가르침과 도움이 없었다면 그 수행은 불가능 했다.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해야 했다. 1백 일 동안 나는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면서 묵언수행을 했다. 매일 1천3백 배를 했고 ‘신묘장구 대 다라니’ 염불수행을 했다.
기도르 시작하고 이틀 가량 지났을까. 내 맘은 점점 밝아졌다. 그런데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에 몰두해 기도를 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구에서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서 들리는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은 환청이었다.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어보면 지나가는 바람밖에 없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귀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들렸다. 이상한 것은 내가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할 때만, 특히 한밤중 염불 때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흘, 나흘이 지나자 그 소리들은 점점 명확해졌다. 울음소리, 비명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들이 들릴 때마다 몇 번이나 목탁치는 것을 멈추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휘잉 자나갔다. 그리고 다시 염불을 하면 여지없이 그 비명소리, 외침,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무서웠다. 일단 어둠이 내리면 방안에 촛불 하나 켜놓고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구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쭈삣쭈삣 곤두섰다.
그렇게 정확하게 3주일이 지나 기도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 순간에 그 소리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내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아무런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성당에 다닐 때 천사들이 부르는 성가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수행이 끝나고 지인스님께 여쭈었다. 지인스님은 곰곰히 생각을 하시다 뜻밖에 지리산의 빨찌산 역사를 이야기 하셨다. 나는 그때 지리산도 처음이였거니와 지리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리산에 얽힌 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들으면서 너무 놀랐다. 그리고 이념으로 부모와 형제가 나뉘어 이 지리산 자락에서 총구를 겨눴던 슬픈 역사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때 지인스님 옆에는 화엄사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내 기도 경험을 들으시면서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누군가 아주 열심히 염불을 해주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면서 아마 나의 염불기도가 빨찌산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스님의 말씀을 내가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일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나와의 강한 인연의 끈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때때로 나는 ‘인연’이나 ‘전생’이 실제로 있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전생이니 인연이니 업이니 하는 것을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기억수행’이라는 독특한 수행을 통해서 각자 ‘이전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른바 ‘회상’(anamnesis)이라는 깊은 기억과정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과거 삶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 환생이 사실이며 우리 존재의 실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과 휘트먼 같은 전설적인 시인들도 전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들은 전생이라는 것을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지어낸 관념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직관이라고 말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로서 불교 경전을 자주 인용했다.
현대 과학에서는 신경정신학계를 중심으로 전생 경험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들이 있다.
일례로 몇 년 전에 미국에서는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Many Lives Many Masters)라는 책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이 책은 1997년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의 저자인 브리이언 와이스 박사는 미국 정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지독한 악몽과 공포증에 시달리던 젊은 여성 캐설린을 치료하면서 의외의 상황에 직면해 혼란에 빠진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최면상태에서 유아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법을 시행하는 도중 뜻밖에 그녀의 전생과 만난 것이다.
황당하게만 들릴 게 분명한 비정통적인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명성과 경력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잇음을 잘 알고 있었던 브라인언 박사는 그러나 신념과 용기를 갖고 이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책은 전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생에 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Thursday, February 23, 2012

만행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만행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삶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스님생활이 어렵고 힘들지 않느냐. 속세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이것저것 지켜야 할 게 많은 스님 생활을 계속 할 것이냐”고 묻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약간 당혹스러워진다. 스님생활이야말로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인데 말이다.
나는 승려의 길을 선택한 것이 내 일생 최고의 선택이었으며 그런 이년을 가진 것에 대해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스님이 되기 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가질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었고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큰집에 살면서 주말이면 차를 몰고 피크닉을 가고 저녁이면 맛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달콤한 속세의 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었느냐고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그것들은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꿀’이 아니라 ‘독’이라고나 할까.
스님이 되기 전 내 삶은 항상 무언가 좇는 삶이었다. 명예를 좇고, 지위를 좇고, 욕망을 좇고, 사랑을 좇고, 돈을 좇고, 직장 상사를 좇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생각을 좇고, 친구들의 뜻을 좇고, 기회를 좇고…… 끝없이 좇고 좇고, 또 좇는 삶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조차 말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다. 머리가 좋고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더 이런 상황에 내몰리기 쉽다. 그게 세상이다. 한국이든 마국이든 다를 게 없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잠자리에서조차 무언가를 얻으려고 아둥바둥하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설사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순간이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버드와 예일에서 공부할 때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님들로부터 배웠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의 꿈이란 바로 그런 교수님들처럼 사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회를 움직이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이란 피곤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스물네 시간 온통 일, 일, 일, 일에 휩싸였고 항상 무언가를 좇고 있었다.
다른 삶들이 자신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내놓을까봐 두려워했고 그들의 질투 때문에 괴로워 했다. 혹 실수라도 할까봐 두려워했으며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견딜 수 없어 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꿈을 이뤄 교수가 된 친구가 많다 교수가 되는 순간 그들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일에 둘러싸였고 선재 교수님들로부터 받는 압력, 학생들의 요구에 시달렸으며 참가하기 싫은 학회 무임에 억지로라도 참석 해야 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술과 여자에 의지했다. 말로는 진리를 얘기했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달랐다.
현대사회는 소비사회다.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쓸모 없는 인간이다. 이 사회는 계속 우리에게 뭔가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사야 한다고 말하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의 운영코드는 우리 머릿속에 입력되어 우리 역시 계속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얻어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중국 선사들은 ‘무위’無爲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라. 나뭇가지는 움직인다. 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무가 고통스러워하는가. 나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 흘러가는 물도 마찬가지다. 한 방울 물이 바위를 뚫기도 한다. 물의 힘은 무한대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무위다. 무위란 바로 빈 행위 (empty action)를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마음과 행동은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처한 현실과 내가 원하는 마음은 분리되어 있다. 그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종종 우리는 이 순간을 살지 않고 과거나 미래에 산다. 지금 이 순간을 잊어버리고 지난 일에 대한 우회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흥분과 기대로 산다. 밥을 먹으면서도 운전을 하면서도 생각은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이쪽 저쪽을 돌아다니다. 단 한 순간도 만족하는 법이 없다.
스님의 삶이란 매 순간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삶이다.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완벽한 삶이다. 진정한 자유인의 삶이다.
나는 집도 없고 옷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고 차도 없다. 하지만 행복하다. 매일매일 자유롭고 하루하루 새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뺨을 스치는 바람, 귓가에 들려오는 새소리, 코에 닿는 향냄새,혀로 느끼는 차의 맛, 바로 이 순간의 삶이 진리의 삶이다.
그러나 스님의 삶이 나만의 자유를 위한 삶인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먹는 밥, 내가 자는 곳. 내가 입는 옷,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왔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 나에게 준 것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순간순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는 삶을 통해 일체 중생들을 제도해나가는 삶만이 그들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다. 또한 내 능력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Wednesday, February 22, 2012

만행 어디에 있던지 그리운 한국

만행 어디에 있든지 그리운 한국

어느 날 큰스님께서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서울 화계사 생활이 4년째로 넘어가던 1997년 3월경 이었다. 큰스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부르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사뭇 긴장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현각스님, 우리 미국 본사인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 자리가 비었습니다. 나는 스님께서 이 주지일을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요.”
프라비던스 젠 센터는 큰스님이 미국에 세운 첫 번째 절이다. 미국에 큰스님이 세운 젠 센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절이다. 커다란 선방이 세 개나 되고 주변에 땅도 아주 넓으며 절 입구에는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크고 높은 7층 목탑이 있다. 아주 아름다운 절이다. 그 절 주지가 된다는 것은 관음선종, 즉 숭산 큰스님 패밀리에서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큰스님의 제의에 깜짝 놀랐다. 내가 그곳 주지 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우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직을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큰스님은 기쁜 얼굴로 나에게 제안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큰스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도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현각스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큰스님, 저는 아직 너무 어려요.”
내가 하도 완강하니까 큰스님은 좀 실망하시는 눈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나는 모처럼 내게 하신 큰스님의 청을 거절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런데 며칠 후 큰스님이 또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주지일을 권하리라. 아니나다를까.
“현각스님, 프라비던스에는 젊은 스님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현각스님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다른사람은 할 수 없어요. 현각스님만이 할 수 있어요.”
참으로 난감했다.
왜 큰스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실까. 큰스님께서 나에게 주지 일을 부탁하셨으나 내가 거절했다는 소식이 화계사 국제선원에 쫙 퍼지자 스님들은 저마다 부러움 섞인 한마디씩을 던졌다.
“와, 현각스님 대단하다. 큰스님이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맡겼다고? 와, 큰 스님이 얼마나 현각 스님을 믿고 계신지 알 수 있는 증거야, 좋겠다, 현각스님.”
그런데 정작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두 번째 제의를 받던 날 나는 마치 마음속의 큰 비밀을 털어놓는 듯 비장하게 말씀 드렸다.
“큰스님, 저는 미국에 갈 수가 없읍니다”
마음속은 찢어지는 듯했다. 큰스님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의아해하셨다.
“이건 현각스님에게 큰경험이 될 수 있어요. 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래,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
“큰스님, 사실은 정말 한국을 떠나고 싶지않읍니다. 제 일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큰스님께서 무릎을 치시며 웃으셨다.
“아이고, 그런 일이면 됐어 됐어. 난 무슨 큰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영원히 미국가서 사는 것 아닌데 뭘 그래요. 당분간 떠나 있는 거에요. 당장 짐 싸세요.”
“큰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전 정말 한국을 떠나기 싫어요.”
나는 완강했다. 큰스님은 좀 놀라는 눈치셨다. 잠시 후 ‘알았다’며 나가보라고 하시는데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조용히 방을 물러나왔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들이 “현각스님, 왜 그런 좋은 제의를 거절하세요? 아주 훌륭한 일이에요. 미국으로 가세요” 하며 재촉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큰스님이 나를 또 부르셨다. 나는 만약 이번에 큰스님이 제의를 해오시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큰스님이 그렇게 권하시면 갈 수 밖에 없지.
나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스님은 다시 나에게 주지직을 맡으라고 권하셨다.
“현각스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는 서울 화계사 다음으로 중요한 절이다. 미국에 세워진 숭산스님의 국제교구 본사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나를 보내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간청을 하시는데 어떻게 또 거절한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2년만 하면 안 될까요? (보통 주지가 되면 5, 6년은 일해야 한다.) 2년 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동안거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럼, 현각스님이 주지니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마침내 1997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한국에서 다기섿트, 참선 방석, 서예작품, 한국 미술품 등을 가지고 가 젠센터를 완전히 한국식 전통 사찰로 꾸몄다.
어느 정도 주지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한국가는 꿈을 꾸었다. 가슴속은 너무 슬프고 답답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내게 많은 한국 선물을 보내줬다. 김치는 물론 한국 과자, 뽕짝 ∙ 가야금CD를 비롯해 그림, 염주, 김, 녹차,책, 잡지 등 한국에 관한 것은 모조리 보냈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듣고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친구가 CD 두 장을 보내왔는데 <서편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패> CD 였다. 나는 CD 플레이어에 그것을 올려놓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느 날 조각가인 쌍둥이 동생 그랙이 주말에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뉴욕 아파트로 초청했다. 동생 친구들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해 저녁에는 그들도 만나보기로 했다.
나는 동생과 시간을 보내다 저녁 약속 시간이 돼 나갈 준비를 하다 갑자기 CNN 방송에서 나온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다. 곧이어 아홉 시에 〈 북한의 실상〉 (inside North Korea)이란 제목으로 북한을 취재한 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이었다. 안내 방송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 사진이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랙에게 아홉 시에 저 프로를 꼭 봐야 하니 밥 먹다가 시간이 되면 일어나겠노라고 말했다. 그랙은 친구들이 얼마나 형을 가다렸는데 말도 안 된다며 마음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나는 동생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기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일어날 시간이 되자.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서운해하는 눈길이 등뒤에 꽂혀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랙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내 TV를 지켜보았다.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아이들, 퀭한 눈들, 몸은 완전히 말라붙어 머리만 기형적으로 큰 아이들, 너무 슬퍼 눈물이 흘렀다. 저들도 한국 사람 아닌가. 그런데 왜 저들에게 저런 천형과 같은 고통이 내리는 것일까.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본 적은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그랙이 들어왔다. 그랙도 내가 걱정이 됐는지 친구들과 그냥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형?”
“저것 좀 봐라. 저런 고통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형, 저건 우리나라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저 나라가 바로 내 나라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형이 완전히 미쳤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터는 미국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주지 생활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 해 11월에 화계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 〈아라랑〉 국제방송에서 외국 스님의 만행기를 촬영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다는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의논한 결과 현각스님이 적격인 것 같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와 촬영에 임하라는 말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좀 당황했지만 일단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내심 너무 기뻤다. 더구나 이번 일이 국제 선원을 홍보하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해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 또 큰스님께서도 좋은 일이라며 허락하셨다고 하니 금상첨화였다.
나는 드디어 그 해 10월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의 땅 냄새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아…… 이 그리운 냄새와 공기.
제작진들과 만나 한국의 산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힘들었지만 한국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돌아가 짐을 풀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 IMF가 터져 온 나라가 6∙25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신문, 방송을 끼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틀어놓고 전날 밤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점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날이 갈수록 경제는 약화되고 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욕 타임스〉 1면에 난 사진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기를 업은 한국의 아줌마,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은 할머니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친 사진이었다. 그 사진아래에는 한국이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는 설명과 함께 전국의 한국인들이 아기 돌 반지며 결혼반지까지 내놓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슬픔에 복 바쳐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라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이 착한 사람들.
미국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도나도 한마음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때문이야. 내가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라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들, 마음 한 켠에선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IMF 위기조차도 그들의 이런 순수한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는 마음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나는 그때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큰스님께 전화를 했다.
“큰스님임……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으로 보내주세요.”
아마 내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큰스님에게 이런 어린애 같은 간청도 가능했으리라. 한국의 승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쨌든 나의 간청에 큰스님도 어쩔 수가 없으셨는지 어느 날 미국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좋다, 지도법사를 한 분 구했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로 당장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때가 1998년 1월 말이었다.

Tuesday, February 21, 2012

만행 부모님전 상서

만행 부모님전 상서 萬行 父母任 前上書

나는 지금까지 큰스님에게 두 번 혼찌검이 난 일이 있다. 모두 스님 생활 초창기 때의 일인데, 그대 어떻게나 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나는 큰스님 일행과 함께 미국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돌아왔다. 처음엔 스님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 동안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스님이 되니까 사람들이 ‘이것은 안 돼’ ‘저건 하면 안 돼’ 하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기 위해 스님이 된 것인데 사람들의 그런 간섭이 좀 참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만 스님이 되였지 마음속은 아직도 ‘나’ 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만심 말이다.
며칠 뒤, 큰스님의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마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스님들과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들어오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닌가.
“갓 출가한 승려가 뒤로 앉아야지, 어떻게 감히 다른 스님들과 함께 앞자리에 앉는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뒤로 물러가 앉으면서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스님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치료하려면 그 쓴 약도 먹어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에게 한없이 되뇌었다.
또 한번 혼찌검이 난 것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과연 내가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리지 못하고’ 고통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도반스님 중 한 분이 내 고통을 눈치챘는지 큰스님께 여쭈어보면 뭔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용기를 내 큰스님을 뵙기로 했다.
어느 날 밤, 큰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침 큰스님께서는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두루마기를 벗고 계셨다.
큰스님은 베개를 제자리에 놓으며 나를 맞이하셨다.
“무슨 일이지요?”
한밤중에 난데없는 방문이기도 했고 내 얼굴이 무척 안돼 보였는지 큰스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 부모님 문제를 말씀 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스님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부처님은 가족과 왕궁을 다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 가셨읍니다. 오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케이?”
그리고는 일어서서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런 큰스님의 꾸지람에 당혹스러웠다. 주무시는 시간을 방해한 것도 죄스러운데 잠을 마다하고 방을 나가버리시니 이런 큰일이 어디 있는가 방문 닫히는 소리가 얼마나 무섭고 컸던지 나는 기절할 뻔했다.
큰 스님으로부터 받은 그 꾸지람은 그때 두 번이 다였지만 어떤 말씀, 어떤 위로보다 더 큰 가르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큰스님의 꾸지람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내 마음속에 주저와 안일한 마음이 일 때면 큰스님의 그때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버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부모님 가슴을 면도날로 슥슥 긋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에 빠질 부모님 머리 위에서 잔인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저는 지금 중국에서 한 달 동안의 수행을 막 끝내고 돌아온 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재미있고 신비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다시 뵙게 돼 기뻐요. 지난 여행은 아주 행복한 여행이었고 그 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정말 행운아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모님께 몇 년 동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저는 스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미 지난 달 9월 7일 중국 남화사라는 절에서 숭산 큰스님 밑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라실지, 두 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행동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출가를 생각해왔으니까요.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평생을 종교 수행자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제 결정은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이제 비로소 저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를 결정하기까지 제 마음속에 가장 큰 부담은 부모님과 여자친구였어요. 만약 그녀와 결혼을 하면 수도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았던 거지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겠지요.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여자입니다. 지난 3년동안 저희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연인 사이보다 완벽한 동반자 관계였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훌륭한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결국 ‘나’에 갇히고 맙니다. 내 아내, 내 자식들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저의 머릿속에는 지금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이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가득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결혼을 한다 해도 가족에게 온전히 몰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자신을 모르고서 지금 누군가와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를 만난 이후 표정이 더 밝아지고 짜증도 덜 부린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녀라고 믿고 계시지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저의 변화는 맑고 강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다름아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하루하루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저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젠센터에 갔던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본성을 깨달아 이 고통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결심에 따라 ‘수행’을 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물론 저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고 지난 3년간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편안하고 열정적이며 완벽한 연인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생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들은 계속 남아 있었으며 더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지난 며칠 동안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님이 되겠다는 제 결심을 어떻게 부모님과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나 그녀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녀는 지금 강연 차 유럽에 가 있읍니다.
저는 불교나 숭산 스님 때문에만 출가한 게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 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한 것입니다.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점에서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길은 무엇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저는 그것을 찾고 싶습니다. 사회나 남들이 저에게 규정하는 기준이나 잣대에 따라 로봇처럼 살지 않고 제 본성을 찾아 살고 싶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종교 수행자가 되는 것까진 좋은데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를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인 승려 밑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느냐고 기막혀하실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의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결국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참선수행이야말로 제 마음을 알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가장 강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들도 참선수행을 하신답니다.
저는 제 스승이신 숭산 큰스님이 저를 가장 잘 알고 제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읍니다. 큰스님은 오직 제가 저의 본성을 찾기를 바라고 계시며 이미 많은 가르침을 주셨읍니다. 제가 오직 참된 나를 찾을 때에라야만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저의 작은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
‘스님’이란 말을 듣고 당혹스러우시겠지요.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은 속세와는 좀 격리돼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합니다.하지만 불교수행자들은 약간 다릅니다.
불가에서 얘기하는 ‘스님’이란 ‘스승’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살며 서로 돕습니다. 스님이란 신도들에게 그저 길을 안내해주고 함께 일하는 동반자들일 뿐입니다. 일반 신도들과 다른 점이라면 매일 보다 열심히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특히 제가 출가하려는 ‘관음선종’에서 스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마다 변호사 ∙의사∙목수∙회사원 등 직업을 갖고 있듯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겉의 직업은 달라도 내면의 직업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본성을 찾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이란 직업은 아주 특별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세속에서 얘기하는 돈이나 사회적 명예,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다른 사람을 돕는 생활에 일평생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생은 물론 다음 생, 다음 생, 世世生生 이 세상의 고통과 함께 부대끼면서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순간순간에 이런 맑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아주 혹독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풋내기 스님으로서 이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집중적인 수행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에 가져온 의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평생 깊은 산속에 쳐 박혀 그저 바윗돌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하늘을 응시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돕는 거시입니다.
옛 선승이 하신 말씀을 하나 옮겨볼게요.

인간의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삶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구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 우리 인생의 오고 감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게 하나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맑든 게 있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 저는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제가 가는 이 길이 두 분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열심히 살아서 저의 본성과 진리를 찾으면 저는 중생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안보여 벌써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두 분 가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제가 가는 이 길이 그렇게 고생해서 저를 키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길이라 하더라도 저의 겉 모습에 너무 괘념치 말아주세요. 저는 죽을 때까지 두 분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살아갈 것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시잖아요.
스티브, 존, 태드…….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부모님은 하나같이 이혼했어요. 그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는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얼마 전에 에이즈로 죽은 조지는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마약에 손대 결국 에이즈에 걸린 거예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렇게 화목합니다. 저희 형제들은 커갈수록 더 우애로 뭉치고 있고요. 이 모든 행복은 두 분의 작품입니다. 저희 아홉 형제에게 두 분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헌신, 희생으로 저희들은 이제 이렇게 사회의 훌륭한 일원으로 성정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다 갚아야 할지요.
방법은 ‘단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평생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귀한 존재가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길이기도 하고요.
거듭 밀씀드리지만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안은 하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저는 항상 두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아들 폴 올림
몇 년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편지 첫 구절을 읽고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다 읽기는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뭔가 이해하고 계셨다. 평소에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런 나에게 ‘너는 특별한 아이’라고 격려해주셨다. 만약 수도사나 신부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아주 기뻐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라니, 더군다나 부모님은 내 여자친구를 딸처럼 생각 하셨는데 그녀까지 잃을 생각을 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부모님은 나의 삶에 대단한 격려를 보내신다. 그리고 불교가 점점 더 미국에서 영향력을 얻고 있다 보니 나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신다.
출가 후 몇 년 동안은 집에 가서도 가족들과 불교에 대해 전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엔 나에 대한 배신감이 가득 차 있는데 내 말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가 편집한 숭산 스님의 영어 법문 집 두 권을 보내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읽으시더니 아주 감명 깊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광이다, 역사, 철학, 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주 넓은 상상력을 가지신 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아주 높은 가르침이다. 이제야 네가 출가한 이유를 알겠구나. 이 선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의 종착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대해 이렇게 높은 가르침을 몬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는 애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면서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 라고 말씀하셨다.
아 ! 위대한 나의 어머니.
빈손으로 가는 게

Monday, February 20, 2012

돌이킬 수 없는 일

돌이 수 없는 일
스님이 된지 2개월쯤 뒤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때까지 기다릴게요.”
나는 그네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잡겠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요? 우리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데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요?”
나는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버리는 것이 아니야. 나 자신을 모르면 나는 당신조차 사랑할 수 없어, 아니, 이 세상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의 고통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것 인가. 그녀의 사랑 없이는 난 하루도 못 살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구나. 순간 마음속으로 요동을 쳤다. 이렇게 소중한 사랑을 버리고 내가 찾는 길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거 완전히 미친 것 아니야?
그녀와 겪은 이별의 고통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예견한 바였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도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크다 할지라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정작 내가 놀랐던 것은 내 가슴을 찌르는 칼을 바로 내가 잡고 있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심장을 찌르는 것은 다름아닌 내 손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고통을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내 가슴에도 고통을 만들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벽한 사랑과 편안함과 달콤함이 보장된 길을 거부하고 고통의 가시밭길을 가라고 내 등을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 순간, 내 마음을 바꾸면 이 아름답고 훌륭하고 지혜로우며 특별한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저 찰라적인 것이었다.”
스님이 되겠다는 결정은 이미 오래 전에 한 것이 아닌가. 수 년동안의 세월을 오직 머릿속에 스님이 되고 싶다, 아니다 하는 마음으로 싸워왔고 미침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헛되고 쓸모 없는 경쟁과 마음의 고통을 안고 위선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결론 말이다. 그리고 이미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종교적 가르침이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은 내 안에서 진리에대한 탐구라는 불을 피우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그런 모든 고민과 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을 바꿀 수 없다. 진정 내가 이 여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길로 돌아올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여자와 결혼을 한다면 분명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오하고 학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겪을 고통은 나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녀와 내 자식들이 함께 짐져야 할 고통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게 그런 고통을 줄 수가 있는가.
설서, 내가 정말 완벽하고 행복한 나만의 세계를 가진다 한들 인생이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허덕이는 다른 사람들은 어쩔 것인가. 나 혼자만이 행복하고 나 혼자만이 즐거운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고통의 본질에 대한 이 심오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그 수많은 철학책,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던 종교는 나 에게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혼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수행하면서 각자 서 있는 곳에서 열심히 살자.”
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나를 지나쳐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제라도 늦지 않아 그녀를 붙잡아, 얼른 뛰어가 그녀를 안으란말이야’ 하고 서리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쾅’
순기, 온 세상의 소리와 시간이 다 멈춘 듯 정적과 침묵의 세계에 나 홀로 놓여졌다는 진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이제야 모든 것을 벗어 던졌다는 홀가분함도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방안에 홀로 서 있었다.
이제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더 이상 붙잡을 것도 더 이상 주저할 것도 더 이상 미련이 남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 나의 사랑은 끝났다.
http://blog.koreadaily.com/hankw2010/509427

Sunday, February 19, 2012

만행 '현각'으로 대시 태어나다

만행 ‘현각’으로 다시 태어나다
우리가 갈 곳은 남중국 조계산에 있는 ‘남화사’라는 절로서 六祖 혜는대사 638~713가 살고 수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한 곳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의 선종 일조인 達磨大師, ?~528로부터 6대가 되는 선사다. 속세에서 그는 그냥 노씨라고만 불렀다. 지금의 광동성 조경부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날마다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장터에서 어느 스님이 자나가면서 외우던 《금강경》소리를 듣고 마음에 열린 바가 있었다. 그는 그 스님을 따라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 황매산에 가서 五祖 弘忍大師를 뵙고, 그가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만 찧으면서 행자생활을 했다.
오조스님이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올렸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므로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을 본 노행자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을까”하고 화답했다.
오조스님은 마침내 그에게 법을 전하고 부처님의 법통을 상징하는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가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 비로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소양의 조계산에서 선법을 크게 일으켜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76세로 입적하였다.
남화사는 바로 육조 혜능대사가 살면서 수행하시던 곳이니 중국선종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절인 데다 그곳이 위치한 조계산의 아름을 따 대한불교 조계종이 탄생하게 되니 이만저만 역사가 있는 절이 아니다. 남화사에는 혜능대사의 시신이 대웅전 법당 제단에 참선하며 앉은 자세를 그대로 미라로 보관돼 있다. 그런 유서 깊고 역사적인 절에 숭산 큰스님이 방문한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외국 스님의 방문을 허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당시 국교도 이뤄지지 않은 나라의 사람을 초청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고 가르친 곳에서 큰스님이 가르침을 펴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우리의 스승이신 큰스님이 중국 선종의 뿌리가 되는 절에 가셔서 중국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펴시다니 정말 기쁜 일이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입국해 마침내 남화사에 도착했다. 남화사는 아주 크고 웅장한 절 이었다. 그렇게 큰 절은 처음 보았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곳에 계신 승려들이 모두 나와 마치 부처가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큰스님이 이렇게까지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떤 스님들은 멀리서 큰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뛰어와 땅바닥에 그대로 앉아 절을 했고 큰스님이 법당으로 들어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은 같은 중국 땅 안에서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스님들은 숭산 큰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남화사까지 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저 한마디라도 큰스님께 여쭈어 법문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남화사 주지는 중국 안에서 가장 존경 받는 스님이라고 했다. 주지스님은 큰스님이 마치 외국의 대통령이라도 되는 듯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 승려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셨다. 중국 승려들의 이 같은 환대는 정말 상상 밖이었다.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즉시 대웅전으로 가 큰절을 올리고 육조 혜능대사 앞에도 큰절을 올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열반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래커와 방부제로 보존된 얼굴과 손, 참선하는 모습으로 붉은 가사를 입고 그대로 앉아 계셨다. 우리 모두가 지금 참선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이 위대한 스승 앞에 우리는 천천히 삼배를 올렸다.
물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몸이다. 방부처리된 미라에 불과하다. 신성하다거나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존경과 감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삼배를 올리며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우리는 남화사 큰 선방에서 3일간의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중국비구, 비구니∙ 신돋,f까지 우리일행에 동참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안장 있었다. 미국인 스님인 도안스님은 중국 스님들 에게 공안인터뷰를 하시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매우 재미 있었다. 여기 육조 혜능대사의 땅에서, 우리가 현재 수행하는 참선수행의 길을 열어주신 분들 중 위대한 성인 한 분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곳에서 그의 중국인 제자들이 서양에서 온 푸른 눈 스님한테 가르침을 받고 공안수행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역사적인 광경인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국적도 자만심도 모두 버리고 배우려 하는 중국 스님들을 보면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심’下心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3일 용맹정진에 참여해 다른 비구와 비구니들과 함께 선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중국 스님이 나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죽비치는 소리가 세번나고 우리는 참선에 들어갔다.
참선수행 규율이 중국은 약간 독특했다. 선방을 주관하는 입승스님은 죽비를 치면 선방문을 일단 잠가버린다. 따라서 늦으면 선방에 들어올 수 없고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조용히 참선을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있었다. 왜 출가를 주저하느냐.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 어깨에는 아직도 바위처럼 너무 큰 짐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참선에 전진하면 할수록 고통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한 시간 참선하고 10분동안 절 주변을 도는 걷기 명상을 하는 식으로 3일동안 수행을 했다.
이튿날이었다
느는 여전히 내 안에 큰 물음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선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그날 오후쯤이었다. 나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내 맘이 ‘확’ 하고 열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길이 내 앞에 열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잡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몸에는 힘이 솟았다. 이것을 생각 이전의 원점인 상태라고 하는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분노도 자책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감이 차 올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종의 깊은 바라봄이라고 할까. 나의 모든 고통은 환상이며 착각이라는 느낌과 함께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명상이 1초처럼 지나갔다. 입승 스님이 쉬는 시간을 위해 죽비를 쳤는데도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영원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다음 한 시간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그 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어떤 행복감, 만족감보다 큰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시간이 끝나자 옆의 승려 한 분이 나를 톡톡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런 경험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나와 사물에 대한 깊은 자가, 깊은 완성…… 이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성큼성큼 큰스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그때는 스님들이 아무나 큰스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큰스님께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하셔서 굳이 큰스님을 뵈려면 비서스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똑똑똑.
“누구세요?”
“접니다. 하버드 학생입니다”(그때 우리 일행들은 나를 하버드 학생이라고 불렀다.)
“오, 들어오세요.”
큰스님은 방에 편안하게 앉아 계셨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잠시 보시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신 듯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큰 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큰스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지만 이미 내 얼굴만 보시고는 뭔가 이해하신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계셨지만 뭔가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이 도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다 일고 있으시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큰스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직 그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겠습니다.”
“원더풀, 원더풀,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모래 受戒式이 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아주 잘됐어요.”
그 수계식이란 본래 남화사 중국 스님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계를 받았는데도 숭산 큰스님 밑에서 다시 계를 받고 싶다고 전해와 수계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선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六祖 慧能大師가 계셨던 절에서 1백 명 중국 스님들과 한 명의 미국인 스님이 계를 받는다니, 아주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하하하.”
드디어 이틀 뒤 受戒式 날.
수염과 머리를 깨끗하게 깎았다. 나의 사형스님인 도문스님이 도와주셨다. 나는 비로소 스님이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런데 도문스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자신이 처음 삭발할 때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어찌나 재미있게 말씀해주시는지 스님과 이야기하면서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마침내 1992년 9월 7일.
조계산 대웅전. 육조대사의 몸 바로 옆에서 나는 숭산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폴 뮌젠’에서 ‘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Thursday, February 16, 2012

만행 큰스님과의 면담

만행 큰스님과의 면담
큰 스님은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훨씬 전부터 알고 계셨다. 하버드를 졸업하기 6개월 전에 프라비던스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특별 면담을 신청해놓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만남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 큰 스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심지어 그의 방문에 노크했었을 때의 내 심리상태와 노크소리까지도 죄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큰스님께서는 가부좌를 틀고 아주 편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얼굴은 아주 맑고 빛이 났다. 피부는 마치 아이처럼 부드럽고 깨끗했다.
많은 도반들은 저마다 큰스님과 처음 가진 개인 만남을 추억처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큰스님의 말고 빛이 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깊은 눈에 반했노라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얼굴과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하버드나 예일에서 만난 그 어떤 천재적인 철학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학자들의 얼굴은 노소를 막론하고 찡그려져 있었으며 어두웠다. 그들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진리와 빛을 가르쳤지만 정작 그들은 지옥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큰스님의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저 얼굴, 저 눈, 저 분위기로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내가 삼배를 드리자 그는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오! 잘 있었어요?”
“예, 큰스님.”
그는 나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래, 무슨 질문이 있읍니까?”
늘 그렇듯 따뜻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큰 스님의 가르침을 새기면 새길수록 삶에 아주 깊은 변화가 옵니다. 수행하면 할수록 스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순간, 나는 큰스님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무척 좋아하시리라 생각했는데 그분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기쁜 표정은 고사하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뭔가를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큰스님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短珠를 만지작거리기 시작 하셨다. 그 모든 일이 단 2, 3초 안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나에게는 한 시간처럼 길었다.
마침내 그분은 내 눈을 그윽하게 쳐다 보셨다. 더 이상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나를 제자로 받지 않으시려는 모양이구나. 내가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 이를 어쩌지.’
그러더니 갑자기 이렇게 물으셨다.
“남자 형제가 몇인가요?”
도대체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이람.
“다섯 명입니다.”
“아아 그래요, 하하 하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스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은 다시 밝아졌고 눈은 빛났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방안 가득 던지셨다.
“오! 댓츠 원더풀, 노 프라불럼.”(Oh ! That’s Wonderful, No problem.)
나는 영문도 몰랐지만 큰스님의 웃음에 적이 안심이 되어 같이 따라 웃었다.
잠시 후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형제가 없이 자랐읍니다. 내 아버지도 그랬고 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스님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것은 바로 대를 끊는 것이었지요. 한국에서는 대가 끊기면 엄청난 불효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3대 독자가 스님이 되겠다고 했으니 부모님 충격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불효 중에서도 가장 나쁜 불효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형제가 많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원더풀 원더풀 노 플라불럼.”
그는 다시 웃었다.
나는 큰 스님의 큰 뜻을 그제서야 알아듣고 그의 세심한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그런데 큰스님, 저에겐 다른 큰문제가 있읍니다.”
나는 여자친구 얘기를 했다. 그녀는 큰스님도 잘아는 제자였다. 나는 큰스님께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출가를 할 수 있을지 여쭈었다.
그러자 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상태에선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저 수행만 열심히 하십시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희가 올 겁니다. 서로 많은 말을 해봐야 도움이 안 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어떤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알겠지요?”
나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대답했다.
“예, 알겠읍니다. 큰스님, 그렇게 하겠읍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소를 머금고 계시던 큰스님은 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씀하셨다.
“스님이 되는 일은 좀더 빠른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읍니다. 읿반 사람들 역시 깨달을 수 있지요. 하지만 어렵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요. 수행하면서도 마음속은 엄청나게 싸움을 해야 합니다. 아내나 남편을 갖고 아이들을 갖게 면 아무래도 돈도 벌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지지요. 그리고 가족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고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빠른 길로 들어섰읍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하하 하하.”
승복을 빌려입고 중국으로
액크 교수에게 제출할 보고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스님이 되는 데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지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무상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1992년 8월이었다. 무상스님은 숭산 스님의 비서 업무를 보고 계셨다.
무상스님은 며칠 후 중국 승려들이 숭산 큰스님을 초청해 가르침을 듣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다음주에 일행들이 떠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 행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과 남한 사이에는 어떠한 외교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공산주의인 중국 땅에서 남한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행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국 승려들이 세계 모든 위대한 선사들 중에서도 특히 큰스님을 유난히 따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 승려들 몇몇이 홍콩이나 대만, 싱가포르에 갔다가 그곳에서 행하신 숭산 큰스님의 법문과 가르침을 듣고 감동해 본국으로 돌아가 이를 널리 알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면서까지 큰 스님의 영어 법문집을 밀수해 읽기도 했다.
“그럼요, 가야지요.”
무상스님의 제의에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그 달 30일 도안스님, 도문스님 두 분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LA로 떠났다.
나는 비록 그녀와 나 사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비행기를 타면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올지 어림짐작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약속한 2주일 후에 꼭 돌아오라고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LA에서 무상스님과 만났다. 그리하여 나는 세 미국인 스님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LA를 떠나기 전 무상스님이 내게 삭발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고 제안 하셨다. 그는 스님이 되고 싶어 하는 내 마음과,그러면서 질긴 인연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이번 중국 행이 나에게 뭔가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줄 역사적인 일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다. 나는 흔쾌히 스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완벽한 삭발은 아니었다 .군인 스타일로 머리카락을 약간 남겨놓았다.
무상스님은 내게 승복을 빌려주셨는데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자 기분이 좀 묘했다. 스님이 되는 길로 한발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은 내게 잿빛 승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즐거워하셨다. 나는 정말 승복이 편했다.
신기한 것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님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내 마음속에 그렇게 끈질기게 자리했던 욕망, 미련, 머뭇거림이 싹 가셨다는 것이었다. 좀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 까. 머리 깎고 승복을 입으면 구속을 받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리고 스님들이 정말 가족 같고 형제처럼 다가왔다. 전보다 훨씬 더 가볍고 자유로운 사람이 된 듯했다.
우리는 마침내 서울 화계사에서 큰스님을 뵈었다.
며칠 동안 화계사에 머물면서 용맹정진 수행을 했다.폴란드 비구 스님 또 다른 미국 비구와 비구니 스님, 독일 비구니 스님들이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우리 모두는 일단 홍콩으로 갔다. 그리고 홍콩에서 하루 쉬면서 향후 중국 일정에 대해 들었다.
나는 홍콩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 전에 큰스님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싶었다. 이번 중국 여행이야말로 내가 스님이 되는 결정적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 삶의 도약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몯든 것이 명확해졌다. 아직까지도 모든 의심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밖에는 없었다. 그 동안 내가 걸어온 삶은 출가를 위해 한발 한발 다가선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했던 모든 고민들은 모두 바보 같은 일일 뿐이었다. 더 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스님이 된다는 일, 특히 미국 사회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다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다가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승가생활로 들어가는 일은 엄청난 결심이 서지 않고서는 안되는 일이다. 항상 똑 같은 옷을 입어야 하고 머리도 삭발을 해야 한다. 마음은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과연 애 몸이 잘 따라줄 것인가. 내 업은 매 순간 이를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침내 큰스님의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셔요.”
우렁차고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스님께서는 의자에 앉아 계셨다.
“한가지 사의 드릴 게 있는데요.”
“그래요? 뭐든지 말해보세요.”
나는 신발을 벗고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큰스님에게까지 들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몇 달 전 제가 출가하고 싶다는 말씀, 혹 기억하시는 지요. 이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무릎위에 놓인 내 두손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방안에는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건만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오, 댓츠 원더풀. 스님이 되고 싶다 구요.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구요. 댓츠 원더풀 베리 베리 원더풀.”
그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흘렀고 얼굴은 미소로 환하게 빛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스님이 얼마나되고 싶으세요. 90퍼센트? 99퍼센트? 아니면 100퍼센트?”
큰 스님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계셨다. 그 눈빛이 너무 강해 그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약간 두려웠다.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 99퍼센트쯤 됩니다. 큰스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큰스님은 내 입에서 ‘99퍼센트’라는 말이 떨어지기 훨씬 전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그는 이미 내 마음을 보고 계신다. 다만 애 마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 입이 얼마나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지 시험하고 계신 거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어려운 선택의 상황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많은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지막 한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니. 그러나 나는 이미 서원을 했다. 내가 내리는 이 결정은 마지막이고 영원한 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습관을 버리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가.
나는 그 1퍼센트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다.
“으음…… 99퍼센트는 좋지 않아요.”
“…….”
“ 스님이 되는 것에 단 1퍼센트라도 주저함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이 1퍼센트가 나중에 당신을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 1퍼센트는 나머지 99센트보다 강합니다. 1퍼센트는 점점 자라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주무를 것입니다. 그러면 포기를 하고 다시 돌아갈 겁니다. 99퍼센트가 명확해져 완전히 100퍼센트가 될 때 나를 다시 찾아오세요.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큰스님.”
나는 일어서서 그에게 절을 올리고 신발을 신고 방을 나왔다.

수영장에 가서 다이빙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러면 당시 내 마음속에 일었던 주저와 머뭇거림을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빙하러 올라갈 대는 얼마나 자신감에 차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이 이는가. 그러나 일단 다이빙 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와 물 사이에 거리가 느껴지면서 갑자기 두려움이 일지 않는가. 와아 ! 저 먼 곳을 어떻게 떨어지나…….당시의 내 마음은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일단 스님이 되면 돌아와서는 안 된다. 다시 승복을 벗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스님을 만나고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부끄러웠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찾고 묻고 생각하고 방황해 결국 여기까지 왔건만 이렇게 여지없이 흔들리다니.
이제 마지막 문만 열면 되는데 이렇게 머뭇거리다니, 이 방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앞으로 완전히 다른 코드로 살게 될 내 앞날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내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아니면 부모님에게 끼칠 불효에 대한 걱정인가.
물론 나는 내 스승의 가르침을 100퍼센트 믿는다. 그의 가르침과 삶의 지혜는 예일이나 하버드에서 수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철학공부보다 더 위대했던 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다녔던 진리였다
그런 강한 확신 속에서도 내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이 방해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인가……
못난 폴, 못난 폴……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파고들고 싶었다.

Tuesday, February 14, 2012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나는 마침내 하버드를 졸업했다.
하버드의 졸업식은 아주 대단하다. 전세계 사람들이 졸업식에 온다. 졸업생과 가족 모두에게 하버드의 졸업식은 매우 뜻 깊은 가족행사이다.
3백여 년을 쉬지 않고 매년 치러진 그 졸업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자신이 지금 미국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갖는다. 졸업식장에는 미국은 물론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졸업식사는 언제나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다. 하버드의 졸업식에 참가하는 일은 이처럼 의미 있는 일이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 역시 매우 좋아하셨다.
졸업생 가족들에게는 단지 두 장의 무료 티켓만이 제공되기 때문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야 한다. 서로 티켓을 사려고 난리이기 때문에 표는 일찌감치 매진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이미 석사 논문을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졸업식까지 무려 3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논문 수정작업 때문에 그것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미 지도교수로부터 통과를 받은 나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 즈음 참선수행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논문이 통과하자마자 프라비던스 젠 센터로 달려가 한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식을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7잔 25절~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불빛이 타올랐다. 예수님은 나를 항상 진리의 길로 이끄는 등불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들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예수님이 납치를 당했다고나 할까. 예수님 가르침을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된 갈을 걷고 있다고 믿는 인간들에 의해 교회라는 집단, 종교라는 틀, 혹은 제도에 갇혀버렸다.
현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따라 평생 살겠다는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철학의 길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출가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부처님 때문에만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진리를 찾고 싶다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남아 떠나질 않았다.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가족이라는 둥지 안에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신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들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치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그것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아니 운이 아주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었으며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소위 말하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버드 졸업장이란 내 부모와 친구들에게 그런 내 삶의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운 졸업장을 거머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특히 부모님은 얼마나 뿌듯해 하실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졸업식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소중한 수행의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단지 졸업식 참여만을 위해 허송세월을 해야 하는가. 그 동안은 할 일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집중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 길에 나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읽고 생가하고 계산하는 일은 그만두자 .나는 위대한 숭산 대 선사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는 살아있는 스승이고 그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지혜는 결국 고통에 신음하는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시작이다. 논문 제출을 마쳤으니 이제 액크 교수 보고서를 위한 연구를 하기 전에 집중적인 용맹정진 수행을 통해 큰스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몇 년 전 내가 예일 대학을 졸업할 때 우리 식구들 전부가 그 졸업식에 참석해 출하해주었다. 폴이 드디어 예일 대학 동문이 되었다며 부모님 누나, 형, 동생들이 얼마나 기뻐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날의 캠퍼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에도 내 마음속엔 늘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하지 않았나. 그리고 결국 숭산 큰스님을 통해 해담을 얻지 않았나.
나는 가족들 생각이 날 때마다 예수님 생전의 일화를 상기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강연을 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냐?” 하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보아라,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 땅에 부모, 형제, 자매 아닌 이가 누가 있는가. 이 세상에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보스턴 지하철 역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잠자는 사람들, 거리의 거지들, 삶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방황하는 혼란에 빠진 남녀들, 거리의 택시 기사들,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도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 식당 웨이터들, 배달부들, 그리고 변호사 자신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고 형제들이었다. 내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즈, 셀리, 키즈, 휘트먼 등등 그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음악의 성인 베토벤, 구스타프 말러의 가르침 아닌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나는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부모님은 완전히 놀라 자빠지셨다.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느냐. 돌이킬 수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딴생각 하지 말고 똑바로 가야 한다,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건 바로 그 다음날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그리고 프라비던스 젠 센터 옆에 있는 다이아몬드 힐 젠 선방에서 한 달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내 남은 인생에 큰 획을 긋는 귀중한 결정을 앞두고 나는 좀더 강해져야 했다.
수행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아주 빡빡하게 하루 일정을 짰다. 매일매일 1천 80배를 하고 열 네 시간씩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에 생식가루만 먹기로 했다. 자다가도 밤에 일어나 절을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그때는 초여름이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수행 첫 주는 아주 힘들었다. 아침에 침대를 빠져 나올 수가 없는 날도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는 부모님 얼굴이 계속 떠올랐고 지금’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형제들과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옆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나는 그녀가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용맹정진 동안 묵언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전화통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출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면서 우리는 같이 수행하며 남들을 돕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숭산 큰스님의 제자였고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는 한편 내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첫 주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쉼 없이 절을 하면서도 참선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밤에는 어둠 속에서 뒤척였다. 아침이면 베개가 마치 물에 젖은 듯했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고통스러워 다 때려치우자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 지금 그만둬도 괜찮아, 이 전도면 충분하잖아, 1주일 정도 했으니 할 만큼 한 거야. 이제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살면 돼,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것이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일하면서 주말이나 휴가 떼 젠 센터에서 틈틈이 수행을 하면 될 거야. 부모님들은 돌아온 아들을 보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반겨 하실까. 그들은 나를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나는 그들 어깨에 지워드린 큰 짐을 내려놓게 하는 효자 노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2주가 흐르자 내 마음이 서서히 맑아지고 잡생각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침안개가 햇살에 걷히는 것처럼 모든 의심과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 출가를 하자.’
용맹정진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기도를 하는 동안 결국은 자기 곁으로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내가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더 굳히고 오자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액크 교수에게 보고서를 내야 했기 때문에 수행을 끝낸 뒤 바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나의 미래를 얘기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년동안 내가 결국엔 스님이 되는 것으로 결론 지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와 이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출가에 대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해봐야 나를 더 약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만 더 안겨다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더욱 집중했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적절한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Monday, February 13, 2012

만행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 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 과 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을 영어로 엮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 마사토시 지도교수
드디어 대학원 석사 코스를 마치고 논문을 쓸 차례였다. 이미 지도교수인 마사토시 교수와 함게 의논을 해 한국의 불교와 숭산 큰스님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했기 때문에 준비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작업이었다. 나는 큰스님이 20여 년간 미국 전역에서 행하신 영어 법문을 죄다 모아 녹음기로 녹취를 했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았다.
그 무렵 아주 입맛이 당길만한 제의가 들어왔다.
하버드 종교학과 학과장인 액크 Eck 교수가 ‘미국에 일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는데 내가 한국 불교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나를 찾은 것이었다.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종교학자와 철학자로 명성이 높은 분이었는데 비파사나 명상수행을 하는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액크 교수는 인도의 문화와 문명, 철학에 대해서도 박식해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도 전문가였다.
교수님의 계획은 미국 회사로부터 연구 지원비를 받아 미국내 새로운 종교현상에 대해 연구를 하고 그 자료를 다 모아 책과 CD로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거친 후 교수님 밑에 한국 불교를 연구하는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먼저 논문부터 마무리 해놓고 그녀의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몇 달 후마침내 논문을 써서 마사토시 교수께 드렸다. 교수님은 아주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나에게 박사과정에 들어가라고 강력하게 권하셨다. 내가 아주 훌륭한 학자가 될 것이라고 격려해주엇다. 구구절절 고마운 말씀이지만 나는 학자 생활이란 게 내가 겪어야할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물론 한때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정중하게 교수님 제안을 거절했다. 교수님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다. “언젠가 마음이 바뀌면 나에게 찾아오라는”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일단 침을 꿀꺽 삼키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 불교가 이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귀중하고 소중한 문화라고 느끼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공부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 살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읍니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매일 매일 듭니다.”
교수님은 잠시 나를 처다보더니 담배 한 대를 피워 무셨다. 추억에 잠긴 듯 아무 말씀이 없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스님이 되고 싶었단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굳이 후회할 것까진 없지만 내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련한 미련 같은 건 있지.수행자의 길은 어렵겠지만 아주 훌륭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너의 용기있는 결정이 존경스럽다.
교수님은 정말 솔직하게 나이어린 제자 앞에서 당신의 심경을 털어놓으셨다.교수님의 겸손함과 진솔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좀 슬퍼졌다. 마시토시 교수는 하버든 내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으로 존경받고 있는 분이며 학계에서는 이미 거붕이된 분이었다. 몇 년 후면 정년퇴직을 해야 할 나이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평생 끝도 없는 논문 마감과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과제에 시달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있었다. 내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뜻밖에 교수님으로부터 “나도 한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 돌아오자,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해 주고있다는 동질감보다 웬지 모르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마사토시 교수는 모든 훌륭한 가르침을 다 알고 있었다. 저작도 엄천나게 많이 남겼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하지만 이러한 직업 때문에 정작 자기마음, 자기자신을 공부할 시간은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나에게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얼굴에는 얼핏 지난 생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게 엿보였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 것이다. 저토록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노교수가, 이제 모든것을 이뤄냈으리라는 충족감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나이에 아직도 뭔가 아쉬움에 한쪽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어전함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교수님께 고개숙여 깊이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리고 웬지 그날의 만남이 교수와 제자로서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스님이 되면 교수님과 나는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물론 교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걸어오신길—학문하는 사람이 걷는 예측 가능한 길 말이다.—을 계속 가실 것이지만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던 니는 이쯤에서 헤여져야 한다. 나는 학문이 아닌 道의 길을 가려 하는 것이다.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나는 좀 산란했다. 교수님은 내게 불교로 가는 문을 처음 열어주신 분이다.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 그를 먼저 만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나의 첫번째 스승인 셈이다.마음 한구석에서 그로부터 계속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가 나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로부터 한 6, 7년쯤 지났을까. 재작년에 미국 프라비던스 홍법원 주지로 있을 때 아주 슬픈 소식을 들었다. 마사토시 교수님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
교수님은 불교국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셨다가 미국에 가기 직전 불국사 석굴암 관광을 가셨다고 한다. 워낙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오셨던 교수님은 미국에 돌아가는 일이 급했는데 한국 스님과 교수들이 하도 권해서 따라나서신 모양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왜 그관광에 동행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한국 불교에 대한 당신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교수님은 당신께서 한국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꽤 부끄러워하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내가 한국 불교에 대해 여쭈어보면 그는 대체로 답을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 교수님은 “아이고, 나는 바보야, 한국 불교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쩧게 불교를 가르치는 교수 노릇을 하고 있나” 하면서 농반 진반으로 푸념을 하셨다.
이유야 어쨋든 간에 그는 불국사 관광 때문에 한국 체류를 잠깐 연장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사고로 이어졌다. 한국인 교수님이 운전을 하셨던 모양인데 약간 미숙했던 모양이었다.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길이 워낙 꼬불꼬불한 데다가 마주오던 큰 관광버스가 회전을 하면서 교수님 일행이 탄 승용차를 미쳐보지 못하고 덮친 것이였다.. 다행히 버스를 피하기는 했지만 운전기사는 핸들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 차가 옆으로 처박혔다고 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다른 사람들은 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마사토시 교수는 한 달간이나 한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겨우 몸을 운신할 정도로 회복이 된 후에야 미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프라비던스에서 만난 동창생들에 따르면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그때 그 상처 때문에 고생을 하신다고 하니 마음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사고 때문에 정년까지 앞당기셨다고 하니 말이다..

만행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 까지 2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재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과「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을 영어로 역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현재 화계사와 계룡산 국제 선원에서 구도자로서 수행정진하고있다. 1999년 10월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1991년 9월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시 복학했다.
나의 여자친구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 마음상태를 금방 알아차렸다. 이미 하버드를 졸업하는대로 한국으로 다시 갈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여자의 육감으로 눈치챈 듯했다.
나는 한국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한국 사찰에서의 수행생활도 잊혀지지 않았다. 학교에 복학한 후 젠센터를 나와 아파트를 따로하나 빌려 살았는데 방에 큰 석굴암 불상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다.
어느 날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교수님 한 분이우연히 내 아파트에 왔다가 그 사진을 보시더니 너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한국 미술을 처음 접했다며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다고 기회가되면 한국에 가복 싶다고 까지 하셨다. 그는 미술을 보는 안목이 세계적인 분으로 하버드 안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ㄴ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한국가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김치. 깍두기, 김 등 각종 반찬을 사다 먹었다. 내가 그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나 손님들은 흘끗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가게 손님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는데 웬 껑충한 미국인이 들어와서 김치, 고추장 등 매운 것을 사가니까 매우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호박죽이었는데 인스턴트 가루이긴 했지만 틈날 때마다 사다가 만들어 먹었다. 친구들에게도 가끔 해주었는데 참 좋아했다. 돈이 좀 생기면 케임브리지 젠센터 옆에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되장찌게, 돌솥비빔밥을 사먹곤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의 ‘뽕짝’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고속도로 휴계소, 택시 안, 편의점 가게에서 그런 가락의 노래들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을 ‘뽕짝’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흐느적 거리는 가락이 너무 좋아서 테이프 몇 개를 사갔다. 가사도 모르는 채 그냥 가락만 듣고 있어도 마냥 좋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운전할 때나 청소할 때마다 그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미국인 찬구들도 아주 재미있어 했다. 심지어 자기들도 듣겟다며 복사를 해간 친구들도 있다.
뽕짝은 아주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좀 슬프기도 했기만 너떤것은 아주 기분이 좋아지게도 했다.
나는 아중에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의 ‘한’ 恨이라는 정서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한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도 깊이 전해져왔다. 어쨋든 뽕짝이 한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얘길 듣고 내가 왜 그렇게 뽕짝에 반했는가. 신비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직후 마음속에 큰 다짐 하나를 했었다. 바로 한국말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하버드에 복학하자마자 한국어 강좌에 등록을 했다.
교수님은 김남희 선생님니신데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부인이셨다. 와그너 교수는 하버드에, 아니 미국학계에 처음으로 한국학을 소개하신 분이다. 와그너 교수는 당시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내가 신청한 한국어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수업이 있는 집중강의였다. 수강생은 약 40명 가량 됐는데 미국인은 나와 다른 여학생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재미교포 2세, 혹은 3세 글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자유분망했고 어른들 앞에서도 거리낌는게 없었다. 완전히 마국 신세대였다. 겉은 한국인 이었지만 속은 미국사람 같다고나 할까.
나는 사실 한국어 강의를 신청하면서 말은 물론이고, 내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수업시간에 만난 한국인들은 나처럼 까막눈들이 많았다. 어떤 학생들은 듣는 것은 좀되는데 쓰기난 말하기는 업두도 못 냈다.
학생들 중에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명이 안 됐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저 부담이 안 가는 가벼운 강좌를 듣겠다는 의도로 수강하고 있었다. 또 일부 학생들 중에는 부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ㅂ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수강생들 대부분은 아예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거나 갔더라도 어릴 때 잠깐 다녀와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이목구비는 한국인이었지만 전형적인 미국인이 도고 싶어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스타일을 지니치게 쫓는다든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곧바로 따라하고 싶어한다든지, 부모와 할아버지ㆍ할머니 세대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엿보였다. 수업시간빼고는 그들이 하는 대화는 한국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미국의 속어와 비어들을 섞어가며 오직 영어만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교포들 중 많ㅇ은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치 몸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상실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 좀 슬펐다. 다만 나는 그들이 한국어 감좌에 올때마다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교포자녀라는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마치 한가족이라는 느낌이 들 전도로 수업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여느 강좌에서 보여지는 경쟁이라든지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예일대 법대, 하버드 법대나 의대 등 내로라 하는 대학을 다니는 수재들이었는데 한국말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쨋든 나는 1년 동안 하버드를 한국말을 배우는 재미로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 공부는 더이상 흥미가 나지 않았다. 일단 이학은 했으니 학위를 따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만 있을 뿐이었다.
김남희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한 다큐멘타리 영상물과 시진을 많이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학교안이나 밖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행사도 마련하셨다.학생들 각자가 집에서 준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김 교수님이 직접 미역국, 된장국, 두부, 잡채 등을 만들어서 우리를 먹이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ㅇ에게 “조상의 나라를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는냐”면서 그들에게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어하셨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테니 준비를 해오라”고하지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건 여학생듦만 하면 되지요? 순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남학생은 한국말 수업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아 인기가 좋았다. 교수님도 함께 웃으시더니 이렇게 받아 넘기셨다.
“아니, 평소에는 완전히 미국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갑자기 전형적인 한국남자가 되었네요.”
그러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학생들이 종이를 무쳐 그에게 던지면서 놀려대기도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교수님이 그에게 물었다.
“학생은 한국 남자예요? 미국 남자예요?”
진지한 선생님 물은에 그 남학생 얼굴이 빨개졌다.
교실안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지요.”
사실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좀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한국문화와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나부다도 관심이 넚었다. 어떤 학생들은 애써 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소홀하게 여기기도 했다. 한국에 관한 한 그들은 나와 똑같은 외국인 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경험을 통해 이런다짐을 했다. 내게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온 한국 문화, 그리고 숭산 큰 스님이 가르쳐주신 한국의 정신, 이것이 얼마난 소중한 것인지 그들에게 알려주리라. 이미 내 삶은 큰스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므로 나는 한국 문화에 일종의 빛을 진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Thursday, February 9, 2012

만행 아! 스님이 되고싶다




만행 아! 스님이 되고 싶다

미침내 90일간 겨울 안거가 끝났다.
깊은 산 깊은 절에서 90일 동안 참선수행 경험에서 얻은 것을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교육받고 주로 도시만 여행했던 내게 계룡산 신원사에서의 그 체험은 너무 큰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경험이 나에게 아주 친숙했다는 점이다.
신원사 법당 앞에는 아주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데 그렇게 오래된 듯한 나무는 처음보았다. 그런데 그런 나무하나조차도 내게는 낯설지 않았다. 미국에는 나무들이 다 싱싱하고 쭉쭉 뻗어있다. 그런데 한국 나무들은 다 비틀리고 꺾었는데도 보면 볼수록 애정이 갔다.
90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새로운 획을 그어줄 사건이 될 것임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안거가 끝나고 화계사로 올라왔다., 한 달 동안 화계사에 있으면서 안거수행에 참여했던 미국인 친구와 함께 숭산스님의 법문집을 영어로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 그 미국인 친구는 오랫동안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접한 친구였는데 나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해서 혼쾌히 참여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10여일 전, 나는 그 친구와 함께 한국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 친구도 한국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여서 둘 다 어디를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화계사 스님 한 분이 경주를 가보라고 했다. 무작정 서울역으로가서 경주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금히 따나온 길이라 여행 안내 책자하나없이 내려갔다. 그저 화계사 스님한테 경주에가면 남산에 들렀다가 불국사에가서 자고 오라는 얘기만 듣고 내려온 상태였다.
우리는 물어물어 남산이라는 곳에 닿았다. 남산으로 들어서서 다섯시간, 여섯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나는 남산을 올라가면서 주변마다 곳곳에 새겨진 석불들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깜짝 놀라고 흥분했다. 남산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만 로마는 하나의 도시이기 때문에 남산같은 안온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차원이 다른 것 이었다. 너무나 인상적 이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마침내 우리는 큰 석상앞에 도착했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에 놀라 서 있었더니 찬구가 앉아 참선을 하자고 제안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우리는 산속 참선수행을 하고 108배를 했다. 수행을 마치고 산을 더 올라갔더니 작은 암자가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큰 논이 펼쳐졌다. 저멀리 산능선들이 겹쳐 보이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꼭 한국에 다시 올 거야.”
우리는 그 작은 암자를 한참 둘러보다 산을 내려왔다.
남산을 내려온 우리는 불국사 석굴암으로 향했다. 불국사 석굴암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로마에서 한 달간을 산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수도원을 차례로 방문한 적이 있다. 매일 루브르 박물과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독일에서는 아름다운 고성들도 많이 가봤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의 아름다움은 그 세계적인 문화재들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불국사 석굴암을 보면서 나는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로마, 파리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아 들었건만 어떻게 한국의 이토록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서는 한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을까. 도대체 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저 불상과 굴을 만든 사람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드 다빈치에 버금가는 천재적 장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에대해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을까. (나는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해 나중에 그 불상의 얼굴을 숭산스님 영어법문집 《선의 나침판》의 표지로 썼다.
나는 마치 비밀의 성을 탐사하는 사람처럼 경주의 모든것에 놀라고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불국사 대웅전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는 내 마음속에 이번에는 간절한 다짐하나가 피어올랐다.
‘아 ! 스님이 되어 한국 땅에서 살고 싶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 내가 정말 스님이 되어서 마침내 한국에서 살게되었을 때, 어느 해인가 백일기도를 하기위한 토굴을 찾고 있었다. 마침 동국대에서 만나 친하게 된 원각스님이 나에게 암자 하나를 소개해 줬는데 경주 남산에 있는 천룡사라고 했다.
나는 천룡사를 찾아 남산을 걸어올라가면서 매가 그날 그자리에서 기도하고 참선했던 불상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었다. 그런데 천룡사는 그 불상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산등성이에서 멀리 마을들을 굽어보며 한국에 다시오겠다고 다짐했던 그 암자가 바로 천룡사였다. 정말 묘한 인연이였다.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나라에서 세우고 지원한 護法國寺였다.신라시대 때는 중국승려, 학자들까지 합쳐 1천여명이 먹고 자면서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소개가 된 절이다.
지금은 절은 불타고 사라진 채 돌기둥만 여기저기 남아 있는 페사지에 작은 암자만 서 있다.
나는 스님이 된 후 백일기도를 위해 천룡사에 들어서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경주방문, 남산 등산, 전혀 계획하자않았던 남산 석불 앞에서의 참선수행과 그곳에서의 다짐, 그리고 몇년 후 다시 예기치 않았던 천룡사에서의 백일 기도, 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불국사 경내를 거닐면서 출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출가를 생각하자 얼른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형제와 누나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니의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백하자면 출가하기 전 나에게는 아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다닐무렵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숭산스님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지도법사였다. 머리가 아주 좋았다. 그녀의 삶은 온통 참선수행 뿐이었다 모든일에 두려움이 없는 강한 여자였지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나는 어느날 그녀를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소개시켰는데 부모님들은 아주 좋아 했다. 부모님은 우리 두사람이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그동안 나는 남자친구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교훈을 여러 여자친구로부터 얻었다. 사랑이란 내 삶에 많은것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많은 가르침을 가져다준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마침내 그녀를 만나면서 완벽한 영적 파트너(soul mate)를 만났다고 믿었다. 우리는 같이 수행하고 삶의 진지한 문제들을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었다.
나는 불국사 대웅전을 빠져나와 스님들이 내준 절 방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이 생각 저생각으로 잠을 못 아뤘다. 나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받아만 왔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받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 이 고통에 빠진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위해서 였다.마음 한구석, 늘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갈망으로 목말라 했다.
그런데 이제 비로서 나의 길을 찾았다. 문만 열고 들어서면 내 앞에 진리의 삶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둘이 걷는 길이아니라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물론 훌륭한 짝을 만나 같이 수행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오직 ‘나’만 생각하게된다. 수행과 결혼은 양립하기 힘들다. 젠 센타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보아왔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때문에 예불시간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인데 결혼을 하면 과연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가족들을 다 버리고 그 살을 저미는 외로움을 감수하면서 출가를 하는 전통이 2천5백 년이나 이어져 오는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생각을 하면서도 무섭게 도리질을 쳤다. 내가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해, 못해.
그러면 또, 나는 어떻게 살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과 일상에 묶여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다시 돌아누웠다. ‘그래, 결혼하지 말자, 출가하자.’
나의 이런 결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까.
내게도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다가오리라. 그러나 내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아니,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갖고있었던 진정한 바램을 이제야 발견한 것뿐이다.
나는 정말 스님이 되고 싶다.
불국사에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몸은 한국을 떠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졋다.
미국에 돌아가자 부모님과 친구들은 내 얼굴이 완전히 바뀌였다고 놀라워 했다. 너무 맑아지고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 다시등록하자 저으기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사간 날 때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에대해 얘길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갖고 내 얘기에 귀를 쫑끗 세웠다.
나는 또한 한국에서 재미있는 선물을 많이 사갔는데 친그들과 부모님은 그것들울 받우며 기뻐하셨다. 그들에게 원앙새 한쌍, 산수화 그림등을 주면서 한국이 얼마나 오랜역사와 문화적 전통응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자랑했다. 불교 신자인 친구들에게는 단주와 불상이 그려진 탱화를 선물했다. 오늘날까지도 내 하버드 친구들 중에는 그때 내가 주었던 염주와 단주를 손에 차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그 단시만 해도 미국에는 불교용품 파는 가게가 별로없고 기껏해야 LA나 뉴욕같은 대도시에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아주 싼 물건이어도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강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이밖에 한국에서의 사찰경험, 고승들을 비롯한 승려들의 생활, 숭산스님 이야기, 벽암스님 이야기, 같이 수행했던 전세계에서 온 숭산스님의 제자들 이야기 휴지가 날아다니는 화장실 이야기, 우리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보살님 이야기등, 하버드 친구들은 내가 이야기 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하고 손뼉을 치며 입을 헤에~~벌리고 들었다.
하버드 친구들과 젠센터 도반들 중 몇몇은 내 얘기에 자극받고 이듬해 한국 신원사에서 동안거를 하기도 했다. 1권 끝

Wednesday, February 8, 2012

만행 오케이 원더풀 인터뷰

만행 오케이 원더풀 인터뷰

신원사에서 수행한지 한 달 반가량 지난 어느날, 아침공양 후 안거를 지휘하는 입승스님(Head monk) 이 “오늘 아침에 숭산 대선사님이 이곳에 오십니다. 법문 후에 여러분 모두를 다 개인적으로 만나실 겁니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미국포교를 마치고 오늘 아침 아홉시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하셔서 바로 이곳으로 내려오십니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흥분과 설렘에 부풀었다. 청소도 더 열심히 하면서 대 선사님 맞을 준비를 했다.
나는 지난 한 달 반 동안 수행을 아주 열심히 했다. 쉬는 시간도 남들처럼 누워있지 않고 대웅전으로 가서 1천배를 했다.(거의 수행에 걸신이 들려 있었다.) 물론 어려웠지만 어떤때는 아주 행복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좋은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좋은 경험에 대한 기억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분노, 두려움, 나쁜기억, 행복, 의심, 욕심, 갈망 같은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왔다갔다 하는 생각들 뒤에는 뭔가 좀더 맑은 것, 좀더 순수한 뭔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행을 하면 할 수록 나는 내 마음이 깨끗해지고 맑아지고 그래서 내얼굴 표정이 바뀌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자동차 유리에 서리가 가득끼어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서리 때문에 바깥이 잘 보이진 않지만 서리를 벗겨내면 바깥풍경이 어떠하리라는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내 대선사님이 도착하셨다. 그의 에너지와 우리의 에너지가 합쳐져 방안에는 놀랄만큼 활기찬 기운이 넘쳐 흘렀다.
그날은 나와 큰스님과의 네번째 만남이었는데 스님을 만날 때마다 나는 큰스님의 에너지의 맑고 깊음에 감동을 받는다.그의 에너지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보통 인간에게서 풍겨나오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선방에 모두모여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는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아주 큰 목소리로 “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하면서 우리 얼굴을 차례차례 돌아보시며 “얼굴이 아주 좋아요, 하하하”하고 웃으셨다. 이 大人, 큰 깨달음을 얻으신 대선사가 어쩌면 저렇게 아이같은 미소를 지우실수 있을까.
그후 우리는 선방으로 다시 돌아가 참선수행을 하면서 큰스님과의 개인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면담은 선방 옆 방에서 행해졌는데 가끔 흘러나오는 큰 웃음소리에 우리는 수행하면서도 그소리에 귀를 쫑끗 세우고 있었다. 면담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마다 아주 환하고 밝은 미소를 띤 채 선방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내차례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일어서려고 하니 사뭇 다리가 아파왔다. 나는 긴장이 되었다. 매번 큰스님을 만날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그렇게 긴장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실제로 이번 인터뷰는 수행을 시작한 뒤 이뤄지는 본격적인 첫번째 공안 인터뷰였기 때문에 나는 더욱 흥분과 설렘에 몸이 떨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태양이 방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환한 미소와 달덩이 같은 얼굴, 빛이나고 있었다. 강하고 맑으면서도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큰스님이 물으셨다.
“질문이 있으면 어떤 것이든 좋으니 해보셔요.”
나는 고개를 저우며 별로 없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너무 긴장이 돼 무엇부터 여쭈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오 케이, 그럼 내가 하나 질문을 할게요. 당신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미국에서 왔읍니다.”
순간 큰스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케이, 하나더 묻겠읍니다. 부처란 무엇이지요?”
나는 손다닥으로 바닥을 쳤다. 탕.
“오케이, 원더풀, 그다음은?”
“벽은 하얗고 선사님 눈이 갈색입니다.”
“좋아요, 좋아요, 원더풀.”
큰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아주 행복한 표정이 되셨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다.
“왜 하늘은 푸르지요?”
“……이이돈…노우.”
“좋아, 좋아, 그런 마음을 갖고 정진하세요. 온리 고 스트레이트 돈 노우 (Only Go Straight Don’t Know)>”
그는 항상 주장자(긴 지팡이)를 들고다니시는데 주장자로 내 단전을 가볍게 치셨다.
“이 센터가 튼튼해져야 해요. 지금은 좀 약해요. 오케이?”
“예, 알겠읍니다. 선사님”
나는 내친 김에 말을 이어나갔다.
“선사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자 제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선사님의 가르침은 저를 비롯한 우리모두에게 가장 위대한 복음입니다. 저는 지금 록펠러보다도 더 부자 같읍니다.”
그는 박장대소 했다.
“텡큐, 텡큐, 하지만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읍니다. 당신 자신안에 이미 수백만 달러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모를 뿐입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나는 스님 방을 걸어나오면서 너무 너무 행복했다.
큰스님을 만난 뒤 내 수행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벽암 큰스님
나는 이 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신원사 조실스님이신 벽암 큰스님이다.
벽암 큰스님은 이틀에 한 번씩 우리에게 법문을 하셨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 스님이 옆에서 통역을 해주셨다.벽암 큰그님은 신원사의 큰스님인데 한국 조계종단에서 매우 존경하는 큰스님 중 한 분이다.
벽암 큰스님은 법문 때마다 우리에게 “여러분들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스승에게 뭘 배우려면 먼 길을 걸어 스승이계신 깊은 산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선사는 여러분이 수행하는 곳으로 직접오신다. 이 얼마나 영광되고 행복된 일이냐. 이 기회를 절대 낭비하지 말아라”고 강조하셨다.
그는 60대 후반이 다 되어가는 노스님이었는데도 각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철처럼 강했다. 벽암 큰스님에 대해 한국 스님들은 아렇게 말씀들을 하셨다. 그 노스님은 매우 어려운 분이라고
어느 날 벽암 큰스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조계종에서 교육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어요. 당시 나는 한번도 웃은 적이 없었지요. 많은 스님들이 나를 두려워했습니다. 무섭다고 피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무서운 표정으로 일을 했지요. 그게 스님의 도리에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ㅏ. 한국 불교 사회는 유교사회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많이 웃는 사람을 실없다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숭산 큰스님을 뵈었는데 활짝웃고 아주 행복한 얼굴이더라 이겁니다. 여러분들 모두 아시다시피 그는 위대한 선사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선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하고 선사님 주변에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요.
그래서 나는 약간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내 스타일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서점으로 뛰어갔지요. 그리고는 《웃음의 미덕》인가하는 제목을 발견하고 선뜻 그 책을 샀읍니다. 무슨 항공사 스튜디어스인가가 쓴 책이었다고 가억되는데 아마 예절교육이나 그런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책은 미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는데 나름대로 나에게 인상적이었지요. 그 후 나는 ‘미소 수행을 하기로 결심했읍니다. 웃기 싫어도 억지로 미소를 띄려고 노력한거지요. 그런데 그후로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르기 사작했읍니다. 숭산스님에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벽암 큰스님의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벽암 큰스님은 늘 그렇게 우리에게 ,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무릎에 앉혀놓고 얘기하시는 것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주셨다. 삶에서 우러나오는 그이 이야기와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어느 날 누군가 벽암 큰스님에게 이렇게 여쭈었다.
“50년간 스님 생활 하시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르침 하나를 주십시요.”
그러자 큰슨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화장실에서 이빨 닦을 때 물로 입가심하면서 서서 하지말고 앉아서 하라는 것 왜냐하면 입가심하고 나서 물 벧을 때 옆 사람에게 물이 튀니까.”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그의 어린아이 같은 맑고 순수한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Tuesday, February 7, 2012

만행 꿈의 화계사

꿈의 화계사

마침내 화계사에 도착햇다. 와, 드디어 숭산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꿈에그리던 화계사, 위대한 선사 고봉스님이 돌아가신 곳 마치 성지 순례를 온 수도자처럼 가슴속에서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가와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밖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는 무심스님의 재촉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계사 경내로 걸어 들어서면서 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뭔가 퀴퀴하다고 할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공항에 내릴 때 부터 내 코를 자극하던 냄새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연탄 냄새’였다. 그때가 1990년이었는데 그때만해도 서울의 난방재료는 연탄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연탄이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불과 10녀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화계사에 방 하나를 배정받고 몸을 눕혔다. 옆에는 나와 미찬가지로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양사람이 이미 잠든 상태엿다.
그날 밤, 나는 몸이 피곤했는데도 흥분과 감동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그러다 살프시 잠이 들엇다. 그러나 곧 너무더운 열기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몸 한쪽이 불에 데인 것같이 뜨거웟다. 온돌의 열기 때문이었다. 나는 덮고있던 담요를 접고 바닥에 깐 뒤에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화계사의 기상시간은 보통 세 시었다. 그런데 나는 두 시 반에 눈을 떠 영 잠을 자지 못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왔더니 룸메이트도 깨어 있었다. 알고보니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 만난적이 있었던 닐잉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큰스님이 지금 이 절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다른 가와집 빌딩을 가리키면서 ‘저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붋빛이 새여나오고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 40분 이었다.
닐이 나의 놀란표정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방에는 항상 두시에 불이켜져.”
“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녀서 1천배를 하신대.”
나는 감동과 존경심으로 할말을 잃었다 잠시 큰스님이 계신 곳의 불빛을 바라보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는 나말고도 약 2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 폴란드, 캐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에서 동안거를 하기위해 온 사람들과 1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었다.
드디어 숭산스님이 법당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삼배를 올렸다.
큰스님은 늘 그러하시듯 하나하나 우리얼굴을 찬찬히 살피셨다..
오! 하버드 스튜던트. 원더풀 원더풀. 하우 아 유 (Oh Wonderful, Wonderful How are you).”l
와 ! 세상에, 큰스님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단 한번 면담을 하고 두어번 예불시간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같이 염불하고 참선수행하고 발우공양까지 마쳤다.
나는 며칠 뒤부터 있을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를 기다라며 서울구경을 했다 .조계사도 가고 승복도 샀다. 동안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내일이면 신원사로 향하는 날.
그날 밤 나는 화계사 큰방에서 나처럼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온 10여 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마침내 삭발을 했다.
아마독자 여러분들은 출가하지도 않은 일반신도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깍고 동안거를 하는 전통이 다소 의아할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전통에는 그런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숭산스님의 전통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숭산스님이 그런파격을 하신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불교가 점차인기를 얻고있고 동양의 선사들이 존경을 받는다해도 불교의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서양만의 불교전통은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승려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 불교를 접한다. 절에가서 뭐뭐뭐 해달라고 빌기위해 불교를 접한다는 이야기다.
큰스님은 열린마음을 갖고계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 미국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읽고 그에 맞춰 불교전통을 만들어오셨다. 오히려 선방스님들은 젠센터에서 별도의 일들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단 승려가 되면 안거수행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비해 신도들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을 낼 수도 있고 출가를 하지 않고도 안거수행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또 미국에는 당장에 절을 많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 신도들이나 비구니들 만을 위해 따로 공간을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큰스님은 동안거, 하안거 때 승려와 신도들이 같이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때 신도들은 스님들처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
본래 숭산스님이 지도하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첫 동안기 수행은 1984년경 수덕사에서 이루어졌다. 큰스님이 젊었을 때 수덕사에 살면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그곳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큰스님의 스승이신 고봉대선사, 경허대선사 역시 수덕사에서 살면서 수행하셨다.
그런역사 깊은 사찰에서 비구,비구니, 일반 남녀 신자들이 같은 선방에서 함께수행을 하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일이였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숭산스님의 이런행동이 한국불교를 오엽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스님들은 숭산스님에게 대놓고 ’한국불교를 망친다’고 항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별 도리가 없었다. 많은 푸른 눈 제자들이 한국에가서 수행하고 싶었는데 그들을 따로따로 수영할 공간이 없었다. 또 비록 출가는 안 했다 하더라도 진정 수행을 원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하셨다.
결국 숭산스님과 수덕사의 오랜인연으로 당시 수덕사 방장스님이셨던 원담 큰스님은 숭산스님의 푸른 눈 제자들이 수덕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매년 안거에 참여하는 미국사람들이 늘어났다. 큰스님은 ‘한국에 가면 한국 참선불교 전통의 뿌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미국사람들은 일단 한국에서의 동안거 경험을 필수코스로 여겼다.
사람이 갈수록 늘어 더이상 수덕사 선방에서 수용할수 없는 지경까지 되자 동안거는 1989 계룡산 신원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 뒤인 1992년 마침내 화계사에 국제선원이 따로 만들어지면서 화계사에서도 안거가 가능 해졌다.
요즈음 매년 1백 명이상의 전세계사람들이 큰스님의 지도아래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 참가한다. 그들중 일부는 출가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다.

신원사 동안거
신원사 안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깎아야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어도 스님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규율이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내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어도 출가한 스님은 아니기 때문에 스님들 앞에서는 모든 예를 갖춰야 한다. 안거기간 중 개인 물건은 사과박스 두 개 이외에는 허용이 안 된다. TV, 전화는 물론이고 편지왕래도 안된다. 일체 묵언을 해야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만 빼고는 90일동안 절을 떠나서는 안 된다. 신원사는 아주 오래된 절이다. 공주와 가까운 계룡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선방은 아주 작다.
미국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공간의 부족함이 없이 살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대해 유난히 다른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여긴다. 처음 경험하는 한국사찰 생활의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화장실 경험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화장실은 처음보았다. 선방에서 60여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경험은 나에게 완전히 충격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문짝이 목 부근까지만 닿기 때문에 앞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이라 주저앉아서 일을 봐야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추운날씨에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매번 화장실에가고 오는 일이 아주 귀찮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엉덩이가 추워서 오래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볼일을 마치고 버린 휴지가 바람에 밀려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처음격는 일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그 일을 격고 난 뒤 부터는 휴지가 날릴까봐 손을 좀더 구멍에 깊이 넣는라 애를 쓰고 했다. 화장실에 가는일이 고역이긴 했는데 나는 안거 기간동안 나오는 한국음식이 너무 맛있엇서 매번 과식을 했고 따라서 화장실에 자주갔고 갈 때마다 좀 오래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화장실을 보면서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런 문화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아주강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신원사에서 살면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개록새록 가지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내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원사 주변에는 농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워해 밖에 나왔다가 한 초로의 농부가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가냘픈 할아버지가 저렇게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실까. 그 옆에는 아저씨들 몇몇이 힘을 합쳐 바위를 옮기고 계셨다.
안거 생활 1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는 쓰레기를 묻기위해 신원사 뒷마당에 큰 구덩이를 팠는데 그날 함께 일을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아랑곳없이 하루종일일을 했다. 아저씨들의 몸이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모든 일을 해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고 난 뒤 건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전엔 ‘건강’ 혹은 ‘강하다’는 것이 우선 근육질 몸매에 체구가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저씨나 농부들이나 다들작고 비쩍마른 체구였는데도 엄청난 힘을 냈다. 몸은 비록 미국인보다 작고 가날펐지만 거기서 나오는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것이었다. 진정 강한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처음보았다. 거기에 비한다면 미국인들은 몸이크고 강해 보일지 몰라도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었다. 진정 강한 것이란 무엇인가.
또 신원사의 법당안은 불을 때지않아 완전히 얼음속 같았다.
신원사는 가난한 절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땔감을 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도들은 아침저녁으로 그 추운법당안에 모여 열심히 절을 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 얼음장 같은 법당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어느나라, 어느민족에게서도 이런 강인한 에너지를 느끼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동안 너무편하게 살아온 게 아니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이런’ 할수있다’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절안으로 들어왔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쓸 땔감인 것 같았다.
그는 나무가 가득 든 지게를 옆에세워두고 잠사 땀을 식혔다. 나는 마침 쉬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 지게를 한번 져보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아저씨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지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와 ! 이렇게 무거운 것을 나보다 약해보이는 저 아저씨가 저렇게 잘도 졌단 말인가. 나는 스물다섯의 혈기왕성한, 힘이 넘치는 젊은이였는데도 이 노인에 가까운 아저씨가 지는 지게를 못 지다니, 아저씨는 낑낑 거리는 나를 보고 한참 웃으셨다.
나는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나이를 여쭈었다. 예순다섯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그는 허허 웃으시면서 다시 지게를 지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한 손에 담배대까지 쥐고 말이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하는 묘기 대행진이라도 보듯 그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이쯤 되면 쓰레기통 옮기는 것조차도 귀찮아 하는 살찐 미국노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친 김에 부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부엌 안에는 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었는데도 공양주 보살님들이 부엌에서 장갑하나 끼지않고 일을하고 계신것이 아니가.
아니, 세상에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을까, 와 한국사람들 정말 파이팅, 파이팅이다.
그런모습을 볼 때마다 나은 내 마음속에 아주 큰 다짐을 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것쯤은 이겨내야 한다.’
그럴수록 아주 열심히 참선수해에 전념했다.
안거기간 중 매우 인상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이었다. 보살님들은 땅콩버터와 빵, 과일, 야채, 케이크, 호박죽, 양말, 속옷 등을 가득싣고 오전 열 시경 신원사에 도착했는데 신원사까지는 버스가 직접 못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내려가서 그 짐을 다 가지고 올라왔다.
그때 일은 한국불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경험한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던 시람인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도 머리 깎은 우리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고 뭐 하나라도 도울 것이 없을까 하고 분주했다.더구나 우리는 모두 다른나라 사람들 아니가. 그런데도 그들이 베푸는 사랑과 애정은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것이었다.
보살님들은 새벽 네 시에 서울을 출발해 버스에 시달린 피곤한 몸이었을 텐데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미역국, 찰밥 등 우리를 위한 점심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선방으로와서 우리에게 삼배를 올렸다. 나는 스님도 아니데 그들에게 스님 대접을 받는것 같아 미안하고 계면쩍었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보살님들과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묵언 때문에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말 없이도 우리는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당시 나는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면서 들은 말 중에 ‘여보세요’라는 밀이 쉽게 외워졌다. 아마 인사말인 것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신원사를 떠나는 그들을 향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몇몇 보살님들이 내 말을 듣고 좀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박장대소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이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은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그런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친절한 마음,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한테, 그것도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마치 어머니 같은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Monday, February 6, 2012

돌 사람의 웃음

돌 사람의 웃음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이르시되
一二三四五六七
大方廣佛華嚴經
우리 얼굴에 두 눈과 두 귀와 콧구멍 둘과 입까지 합하면 일곱문이 되니 이것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요. 우리의 일상생활이 華嚴法門이요,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화엄경을 항상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손가락이 열이요 발가락이 열이요 얼굴에 일곱구멍과 대ㆍ소변 보는데와 배꼽을 합하면 열이니, 이것이 곧 화엄경 가운데 十信, 十住, 十行을 설하는 요긴한 것이다.
불멸후佛滅後 육백년이 지난 뒤 서천 이십팔조 가운데 제 십사대조사 용수보살이 세간의 모든학문을 일시에 설렵한 뒤 발심하여 용궁에 들어가서 화엄경 상본, 중본, 하본의 삼본 장경을 모두 보았다.
상본은 十三千大千世界 미진수게微塵数偈와 一四千天下 微塵數品이 있고, 중본은 사십 구만 팔천 팔백 게偈와 일천 이백 품이 있고, 하본은 十萬偈와 四十八品이 있는데, 서천에서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팔십권경 三十九品을 나누어서, 칠처칠회七處九會에 설한 법문이다.
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大意는 만법을 거느려서 한 마음을 밝힌 것이다.
大方廣은 중득한 바의 법이요, 佛華嚴經은 능히 중득한 사람을 말함이다.

大자의 意旨는 極한 허공을 가히 헤아리거나 그당체가 가가 없으니 당체를 지적하여 이름을 얻음이요, 항상 두루하는 뜻이니, 마음의 體性이 가가 없다는 뜻이다.
크다는 大 것에 열 가지뜻이 있으니, 당체가 크고, 모양이 크고, 응용함이 크고, 결과가 크고, 인연이 크고, 지혜가 크고, 교화가 크고, 경계가 크고, 결과가 크고, 인연이 크고, 지혜가 크고, 교화가 크고, 경계가 크고, 업이 크다.

方자의 의지는 푸른 바닷물을 다 마시더라도 이 법문은 다 설 할 수 없는 뜻이다.

廣자는 미진微塵세계를 다 부수어 그 숫자를 셀 수 있더라도, 이 경의 應用은 능히 측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너르다는 것에 열 가지 의지가 있으니 널리 끊는 것, 초월하는 것, 포옹하는 것, 아는 것, 파괴하는 것, 다스리는 것, 널리 살리는 것, 널리 덕을 베프는 것, 널리 의지하는 것, 널리 법을 설하는 것 등의 뜻이 있다. 여기에 널리 끊는다는 말은,심의식 心意識으로 사량思量해서 능히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널리 파한다는 것은 일체의 장애되는 것을 파하여 남김없이 한다 는 뜻이다.
불ㅈ자는 깨달음과 깨달은 바를 떠나서 모든 법의 그윽한 곳을 밝게 하는 뜻이다.
十義佛이 있는데 法界佛 ㆍ 本性佛ㆍ 涅槃佛ㆍ 隨樂佛ㆍ 成正覺佛ㆍ 願佛ㆍ 三昧佛ㆍ 業報佛ㆍ 住持佛ㆍ 心佛 등이다.
祖師宗門에서는 삼 서근이 부처요, 마른 똥막대가 부처요, 흙덩이가 부처요, 十字路頭가 부처요, 돌소가 부처요, 장림산아래 대나무 뿌리로 만든 채찍이 부처요, 중생의 몸을 부처라 한다.
華지는 보살의 萬行을 향기롭게 흐트러지게 베풀어 모든 공덕을 영광스럽게 빛내는 뜻이다.
열 가지 意旨가 있으니 열매를 머금어 있 고, 빛이 맑고, 미묘하고, 쾌적한 즐거움이며, 聖果에 인도하며, 단정하며, 물듦이 없으며, 오묘함을 이루며, 향기로우며, 모든 것을 베푸는 의지이다.
嚴자는 덕행이 원만하여 열 가지 몸을 장엄한다는 뜻이다. 열가지 뜻이 있는데, 華자와 뜻이 같아 한 부처님을 장엄함으로 이 화로 앞에 법게를 능히 정엄하여 저 열 가지 부처를 이름으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곧 장엄이다.
經자는 玄妙를 꿰고 거두어서 참된 광명의 문채를 이룬다는 의지이다. 열가지 뜻이 있으니 용솟음치는 샘물, 무엇이던지 내는 것,낮추어 보임, 먹줄, 관철함, 거두어 가지는 것, 법, 항상됨, 典籍, 지름길 등의 뜻이 있다.
이 경제목 일곱자는 일부 경전의 넓은 벼리가 되니 다함이 없는 법문의 과반수를 차지하였다.
사람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이 화엄법계華嚴法界요, 원래로 청정하여 물듦이 없는 자리요, 분별과 能所가 없고 본래 不動智의 부처요, 곧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다.
이렇게 이름하는 것도 허물이다.
頭頭物物眞如體 온갖 만물이 진여의 당체요
水水山山太古情 푸른 산 흐르는 물은 태고의 뜻이다. ,

華嚴經 삼십구품의 대의.
一, 世主妙音品으로부터 如來現相品까지 二品의 대의.
利劍當空斬薄浮 날카로운 칼에 떠다니는 머리칼도 베어지고
隔墻見角便知牛 담너머 뿔이 보이니 소가 있는 줄 안다

二. 普賢三昧品으로부터 菩薩問名品까지 八品의 대의
掬水月浮水 손으로 물을 움키니 弄花香滿衣 꽃을 희롱하니 향기가 옷에 가득차네

三, 淨行品으로부터 十住品까지 五品의 대의.
龍蛇幷隱機輪脫 용과 뱀이 함께 숨으니 기틀이 잦아지고
雷電全施計略荒 우뢰와 번개가 치니 계략이 황망해지도다

四, 梵行品으로부터 夜摩天宮偈讚品까지 四品의 대의.
葉落春風花未開 봄바람에 입이 떨어지고 꽃이 피지 않더니
花開又被風吹落 꽃이피자 또 봄바람에 꽃이 지네

五, 十行品으로부터 阿僧祗品까지 七品의 대의.
織塵有障雲遮日 가는 티끌만큼이라도 거리끼면 구름이 해를 가린듯 하고
毫末俱亡月映秋 터럭 끝까지도 다 잊어버리면 가을 달이 비추도다

六, 如來壽量品으로부터 入法界品까지 九品의 대의
雲散洞潜山岳靜 구름은 흩어지고 동구는 잠기고 산악은 고요한데
落花流水滿長安 장안에 떨어진 꽃이 가득히 흘러가네
한 입을 크게 버려 시방세계를 다 집어 삼킴면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만약 이렇지 못하면 점점 수행하여 문으로 아아가야 한다.
화엄경에 信, 解, 行, 證의 네 가지 문이 있으니 팔십권 가운데 십 일권은 중생을 위하여 信門을 개발 란 것이요, 사십 일권은 解門을 개발함이요, 칠권은 行門을 개발함이요, 이십 일권은 中門을 개발한 것이다.
화엄경의 위의 의지가 모두 사람마다 낱낱이 자기몸에 다 있고 일상생활하는데 다 있으며 밥 먹고 옷 입고 보고 듣는데 항상 화엄경을 설법하고 있지만 아는 사람이 적다.

鴛鴦繡出從君看 원앙새를 수 놓아 보일지언정
莫把金針渡與人 바늘을 주어야 소용이 없네
雖然如是 莫錯會 莫錯會 비록 그러나 그릇 알지말고 그릇 알지 말지어다

萬古碧天空界月 만고의 푸른 하늘 허공의 달을
石人猶自笑呵呵 聻(이) 돌 사람은 오히려 껄껄 웃는다네 저것을……
할 일할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한 손가락 禪
법좌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朝來共喫粥(끽죽) 아침에 함께 죽을 먹고
喫了洗鉢盂(발우) 먹고나서는 발우를 씻네
且問諸禪客 또한 묻노니 모든 선객들이여
還曾會也無 여기에 불법이 있음을 도리어 아는가

어느 스님이 趙州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도입니까?」
「아침 죽 먹었는가 ?」
「예, 먹었읍니다.」
「발우를 씻어라.」
이말에 활연히 깨쳤다.
불법이 먼데 있는것이 아니라 옷 입고 밥 먹는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여덟가지 괴로움을 말씀하셨는데, 그 가운데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큰 괴로움이다.
태어나는 것이 왜 큰 고통인가.
우리가 태어날 때 태중에서 주먹을 꼭 쥐고 열달동안 꼬부리고 있다가 나오는데 어머니가 찬 물을 먹으면 한빙지옥寒氷地獄의 고통을 받고 뜨거운 물을 먹으면 화탕지옥火湯地獄의 고통을 받는다. 이런데도 태아의 고통을 어머니들은 잘 모른다.
우리가 그런 고통을 받다가 나왔는데 늙는 것도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데는 ㄱ드것이 그냥되는 것이 아니다. 오만갖지 걱정을 다 해야되고 자기의 근심만 해도 복잡한데 남의 걱정까지 해가며 늙는다.
다음은 병의 고통인데 사백네가지 병 뿐 아니라 수효를 헬 수없이 많은 질병을 않다가 죽는다.
죽을 때는 온통방안을 헤메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뿌득뿌득 갈면서 죽는사람도 있고 똥을싸서 온 집안식구들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 청매조사靑梅祖師가 입적入寂할 때 똥을싸서 온통 벽에다 바르고 기둥에다 바르니 구린내가 나서 사람들이 곁에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피해 달아니고 부목을 잡으며
「너는 도인의 최후열반하는 모습을 지켜보아라.」
조사가 열반에드니 똥칠했던 집안에 향취가 진동했다.
청매조사는 고요한데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장에가서 사람많이 모인 한편구석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 어린아이 어른 할것없이 뭇 사람소리가 겹쳐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공부가 장애없이 잘된날이면 오늘 장 잘보았다. 하고 공부가 순일하지 못했으면 장 절못보았다. 하여 자기의 공부를 시험했다 한다.
여덟가지 고통가운데 다섯째는 사람하는 사람끼리 서로 헤어져야하는 괴로움이다.
살아서 이별하는 아품도 있고 죽어서 아주 떠나버리는 이별도 있다.
미운사람과 함께 살아야하는 괴로움 이것도 여간 큰 고통이 아니다.
물질이나 명예등 무엇을 구하는데 뜻대로 안되는 것도 큰 괴로움이다.
그ㅡ리고 五陰이 치성하는 것도 큰 괴로움이다.
이러한 여덟가지가 인생의 큰 괴로움인 것이다.

다음은 여덟가지 바른길이 있다.
첫째는 正見이니 바르게 보아야 한다. 재물이 있으면 병들어 구차하게 사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또한 충실해야 하며 부모에게 공ㅇ경하며 남에게도 친절함이 모든것을 바로보는 것이다.
둘째는 正思이니 사고방식이 바르게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가. 도는 진리이니 우리 인간의 생명을 찾는 것이다.
사바세계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뒤섞여져 있는 곳이니 잘견디어 참는 수양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세상을 보람되게 살수있고 진리와 올바른 도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세째는 正語이니 이는 바른 말 고운 말이다. 망녕된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속이는 말, 남에게 이간붙이는 말 험한 욕설을 하지않는 곳을 말한다.
또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부리고 아이들을 나무랄 때도 곱게 나무랄 것을 욕을하고 고함을지르고 한다. 우리가 문화민족의 전통을 살리자면 우선 말부터 고운말로 품위를 찾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절실히 느껴진다.
네째는 正業이다. 무엇이 바른 업ㅇ;ㄴ기 히면 살생과 도둑질을 하지않고 전조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했다고 하지만 남이야 죽건말건 자기의 욕심만 차려서 비진리적으로 재물을 모아서 자손에게 물려주면 인과는 틀림없는 것이여서 마치 호열자균을 묻혀서 전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섯째는 正精進이니 무엇이 올바른 정진인가하면 수행하는 것을 정진이라 하는데 예술 미술 철학 종교 등등 모든 일상생활에 정밀하게 철저히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본래 갖춰져있는 큰 거울같은 지혜, 평등한 성품의 지혜,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 모든일을 그때 그때마다 잘 처리하는 지혜등을 말한다.
이 정진의 구경목적은 삶과 죽음이 없는, 삶과 죽음에 물 안들고 거기에 해탈하는 열빈의 경지이다.
일곱째는 正念이니 망녕된 생각과 삿된 생각이 없어서 바른 도와 바른 진리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여덟째는 正定이니 자기생각의 자세가 바르게 정해져야 한다.
개구라가 멀리 뛸려고 하면 앞으로 가다가 제몸을 주춤해서 가다듬어 가지고 훌쩍 뛴다.
셈이없는 청정한 禪定이 정정이다.
우리사는 세게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해보자.
수법數法에 일,육은 물인데 북방에 머물고, 이칠은 불인데 남방에 머물고 삼 팔은 나무인데 동방에 머물고,사 구는 금인데 사바에 머물고, 오 십은 흙인데 중앙에 머문다.
밝지못한 바람이 불어서 풍륜세계風輪世界를 이루었는데, 우리가 살고있는 이 토륜세계는 풍륜세계가 받치고 있다.
굳센 고집으로 말미암아 금륜세계金輪世界를 이루고, 번뇌가 치성함으로 화륜세계火輪世界가 되고, 정과 사랑이 농후함으로 수륜세계水輪世界가 되는데 사랑은 물에 속하기 때문에 누가 죽든지 하면 눈에 눈물이 흐른다.
장애로 말미암아 토륜세계가 이룩된다.
이 五輪世界가 중생의업연業緣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
꿈의 종류가 많이 있는데 신령한 꿈도있고, 실된 꿈, 헛된 꿈, 요란한 꿈, 망상의 꿈, 잡스러운 꿈, 놀라는 꿈, 슬픈 꿈, 길상의 꿈, 기뿜의 꿈, 악한 꿈, 등등이 있다. 이 모두 마음으로 좇아 꾸게 된다.
망상이 없으면 꿈이 없는데 하루종일 이생각 저생각한 것이 밤에 꿈으로 나타난다.
하루종일 일을하고 밤에 푹 자야할 텐데 자다가 꿈 가운데 도둑에 쫓긴다든지 매를 맞는다든지 불이나서 고함을 지른다든지 하여 잠도편히 못자고 소동을 벌이는데 이 모두 마음가운데 망상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음을 잘 비워야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바탕 잘 할 수 있다.
망상 번뇌를 비우고 참된생각, 바른생각, 밝은생각, 오묘한 생각을 지녀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꿈은 좋고 나쁘고 간에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Sunday, February 5, 2012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미국내에 있는 숭산스님의 모든 젠센터는 순전히 한국식으로 운영된다. 식사 때마다 김치 깍두기는 물론 된장찌게, 두부, 김 등 한국 음식이 많이 나온다. 물론 미국음식도 나오지만 말이다. 일단 젠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채식주의자인 탓도있고 사찰에서는 술,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채식 위주로 된 한국음식은 정말인기가 좋다. 특히 두부는 인기 ‘캡’이다. 식탁에 나오기 무섭게 동이난다. 매일 옥수수차, 보리차를 마신다. 김치도 인기가 좋다. 김치는 매일 모자란다. 특히 라면에 먹는 김치맛은 아주 일품이다.
내가 처음 김치맛을 보던 날, 나는 그때부터 김치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맛보기 전에는 그 시큼한 냄새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감히 맛보기조차 꺼려했다.
케임브리지 젵센터로 처음이사를 해서 도반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식탁에 김치가 나왔다. 나는 냄새때문에 거둘떠 보기도 싫은데 다른 친구들은 너무 잘 먹는 거였다. 친구들은 나에게 한번 시도를 해보라고 재촉했다. 몇 번 망설이다 드디어 밥을 한 숟기락 가득 입에넣고 김치한쪽을 입에 넣었다. 와! 그때 경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독자 여러분에게 김치에대한 첫경험을 기억해내라고 하면 아마 자신이 없을 것이다. 워낙 오래 전 부터 먹어온 것일 테니 그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 이미 성인이 다 된 다음에 맛본 것이다. 그 느낌이나 그때 맛, 모든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았다.그중에서도 특히 인도 음식을 좋아했다.
그런데 김치를 처음 먹었을 때의 경험은 말로표현할 수 없는 강한 것이었다. 나는 김치를 한입 베어물고 는 너무 맛이있어서 그날 김치 한 접시를 다 비워버렸다. 그 뒤부터는 식사 때마다 김치를 먹었다. 친구들은 내가 김치에 완전히 중독이 되었다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말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매일 김치와 밥을 먹었다. 오히려 빵과 수프는 가끔 먹을 정도 였다.
어느 날 법수스님은 ‘된장국이라는 것을 식탁에 내놓았다. 김치에 이미 자신감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된장국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정말 맛있었다. 김치경험보다 더 독특한 것이었다. 김치가 강한 맛이라면 된장은 깊은 맛이라고나 할까. 독자 여러분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마치 고향음식을 먹는듯한, 아주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렀던 동요를 듣는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습관 같은 것 말이다.
나중에 전생에 대해 얘기하겠지만 김치나 된장국의 맛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다. 나는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어서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나는 그 해 여름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다시 큰스님을 빕고 싶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내내 큰스님은 한국에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숭산스님의 영어 법문집 두 권을 거의 외우다 시피 열심히 읽었는데 하나는 이미 소개한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라는 책이었고 다른하나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라는 책이었다.《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는 197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숭산스님의 영어법문집으로 큰스님의 책으로서는 고전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하버드대에 다닐 때 마사토시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을 받은 이후 큰스님을 만난 뒤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무렵에는 아예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이 서양에 소개된 동양불교책으로는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책은 마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한 책이며 보면 볼수록 의미가 새겨지는 책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부분 불교책들은 부처니 마음이니 법문이니 생각이니 의식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큰스님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큰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대로 ‘고통은 생각에서 온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책에서 설명을 해봐야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더 많은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다. 더 많이 설명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불교속에서 또 하나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대신 큰스님은 제자들이 큰스님에게 짊문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제자인 마음속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의 고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순간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리’ 혹은 ‘부처’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빠진 우리에게 자기마음을 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을 들어미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너의 이 순간 마음이다.
그 맑은 거울이란 바로 큰스님의 깨달음의 거울이다. 혹독한 수행을 통해 그가 얻은 깨달음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베프는 것이다.
큰스님은 ‘마음공부’ 오직 ‘마음공부’ 하는 것만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상조하셨다. 요즘사람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공부하기 때문에 책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했다.
큰스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눈을 감기 바로직전, 죽는 순간에 아무리 1천개의 박사학위가 있어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냐”
나는 그 여름 큰스님의 말씀을 새기다보니 새록새록 감동이 넘쳐흘렀다.
큰스님은 “내 말을 믿지마라, 너 스스로 너 자신을 알아야한다. 오직 수행하라 나는 단지 여러분의 본 성품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찾아줄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쇼펜하우어조차도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 생각에 대해 ’얘기’ 하고 삶의 의지WILL에 대해 언급했지만 자기의 가르침으로부터 독립해 그것을 어떻게 각자 자기의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생과 사에 완벽하게 설명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철저히 검토하여 그것의 진리를 재발견하라.”
“나는 너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너회들의 몫이니라.”
부처님의 기르침은 부처 당신이 추구하던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설명하는 가이드 북 같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를 하나의 신이아닌 길잡이로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기고 부터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도그마가 아니라 길道인 그의 기르침, 즉 불법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공동체, 그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반자들의 집단에 귀의 하는 것이다. 불교는 주인의 승낙없이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큰스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내 말은 충분하지 않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면 불교 경전이나 성경, 이 세상 진리를 가르친다는 모든 가르침은 악마의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각과 집착을 끊고스행을 통해 ‘오직 모를 뿐’ 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오면 모든 가르침, 불교경전, 성경이 완벽히 그대로 진리가 될 것이다. 진리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창 밖에 자동차소리, 얼굴에 스치는 바람소리 이 모든것이 진리다. 우주는 언제나 항상 매순간 우리에게 훌륭한 법문을 준다. 말과 언어는 여러분을 가르칠 수없다. 오직수행, 수행하라”고하셨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책을 한쪽으로 치우고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책 없는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가르침보다 귀중한 것아었다.
드디어 서울로
드디어 한국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 절에가서 수행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은(당연히)펄쩍 뛰셨다. 그분들의 실망과 충격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 학교를 휴학했느냐. 그것도 1년씩이나. 뭐? 한국엘 가겠다고? 그것도 절에가서 수행을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1년넘게 젠센터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늘 걱정을 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늘 나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여 주셨건만 그 부분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역정까지 내시면서 꾸짖으셨다.
그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마침내 “1년 휴학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그것도 절이냐”하고 물어오셨다.
독자여러분들이 좀 깁분 나쁘게 생각하실지 모르겟지만 한국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은 88올림픽 전후였다. 우리 부모님도 구세대이시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별로 아시는 게 없었다. 아니, 동양 전체에대해 잘 모르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마치 달나라나 화성이라도 가는 것처럼 놀란표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그 수많은 친ㆍ’인척 중에서 오직 한 분만이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그분은 외삼촌 즉 내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다.
외삼촌은 군인으로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그것도 한국에 주둔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으로 무기를 공수하는 일을 맡았었다고 한다. 몇 달간 부산에 살았던 적은 있지만 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쨋든 나는 1990년 11월 27일 마침내 뉴욕 존 에프 케네디JFK 공항에서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에 대한 부담과 한국에서의 수행에대한 기대감이 섞인 채 말이다.
그때가지도 나는 이 춟발이 내 인생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또다른 출발이 되리라곤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안에서 한국관광 책을 읽다가 잠이들었다. 문득 잠이 깼을 때는 일본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랍고 흥분되었다. 아, 드디어 내가 태어난 곳 지구의 반대편 동양나라에 가까이 왔구나, 이 지구상에서 몇 안되는 오랜역사를 가진나라로 가고 있구나.
비행기가 일본을지나 한국에 가까이 가고있다는 스크린자막을 보면서 흥분에 가슴이 설렜다. 바깥은 어스름 저녁, 나의 온 신경은 오직 한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 창 밖으로 불ㅂ빛들이 보였다. 작은 도시같았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지금 막 부산으로 비행기가 들어섰읍니다. 발 아래 보이는 불빛이 부산 땅입니다.
나는 ‘부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외삼촌을 떠올렸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발 밑에 보이는 곳은 광주 땅입니다.”
‘광주, 광주...... 아하...... 광주...... 바로 광주항쟁이 있었던 곳이겠구나.'
나는 비행기의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항쟁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의 흔적을 그 먼곳에서 찾아내보기라도 해겠다는 듯 비행기 밖 불빛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한국 절을 지나고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케임부리지 젠센터 법수스님의 방에서 보았던 그 사찰 사진들, 푸른산, 안개, 그 평화로운 절의 모습.......
나는 밤의 그 어둠의 땅을 내려다 보면서 그때 그 사진에서 본 산들이 어디있을까, 절의 불빛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창 밖이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탄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너무 설렜다.
시계를 보니 한국시간으로 저녁아홉시 50분.
아마 이 나라 스님들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지금 절에서 주무시고 있겠구니.
"비행기가 곧 착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요."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비행기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전세계 많은 도시들을 여행하고 수십 번씩 비행기를 타고 내렸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점차 고도를 낯췄다. 아, 마침내 큰스님 땅에 닿고 있구나. 그리고 큰스님인 고봉대선사, 또 고봉대선사의 스승이신 만공대성사, 그리고 한국 선승의 위대한 스승 경허대선사...... 그분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가르침을 펴신 이 땅에 드디어 내가 발을 딛는구나. 참선수행의 나라, 아름다운 불상이 있는 나라, 고풍스런 기와집과 깊은 산에 사찰들이 있는 이 나라를 마침내 내 발로 찾는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표정일까. 아마도 모두 부처님의 모습일 거야. 모두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일 테니 말이야. 아, 사람들 표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행기 바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밖으로 혹시 절 지붕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완전히 창에 박고 있었다. 내눈에 처음 발견되는 절의 불빛은 어느 절 불빛일까.
드디어 차츰 고층빌딩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네온사인이 화려했다. 멀리 희미하게 빨간 점 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가만있자 저게 뭘까. 비행기가 점점 지상가까이 내려가자 그것이 무엇인지 뚜렸하게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빨간 점이란 다름아닌 십자가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 수백 개에 달했다. 오둠 속에 빨갛게 점점이 박혀있는 십자기 네온사인.
나는 그동안 여러나라를 여행했지만 그렇게 십자가가 많은 나라는 처음보았다. 더군다나 밤에 빛나는 네온사인 십자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 이거 불교의 나라 한국 맞아? 아마 스튜어데스가 안내 방송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서울이라고 잘못얘기한게 아닐까. 어떻게 사찰과 불교의 나라인 한국에 이렇게 십지가가 많을 수가 있어? 그래 아마 비행기가 주유 때문에 필리핀에 들렀다가 서울로 가겠지'
드니어비행가가 땅에 닿으면서 바닥에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알고보니 눈이었다. 필리핀은 눈이 안 내리는 곳이잖아, 서울이 맞긴 맞는 모양이네.......
다음순간 , 안내방송이 나왔다.
"엘컴 투 김포 에어포트 서울 코리아."
내 마음속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서둘러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어떤 나라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리면 모든나라에는 그 나라마다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냄새가 있다. 예를들면 몇 년전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릴 때 그 냄새는 좀 이상했다. 그렇게 상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홍콩과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나라 냄새는 나를 좀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아주 낮익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와본나라같지 않았다. 열다섯 시간동안 좁은 비행기좌석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선 대지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내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기 시작했다.
몸이 좀 떨렸다. 그건 단지 추워서만 아니었다는 것이 내 오랜 여행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적 직감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무심스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스님은 숭산스님 밑에서 출가한 미국인 스님으로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스님의 차를타고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비치는 처음보는 서울의 모습,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때가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가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오후 세 시만되면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기 때문에 밤에는 거리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 이 많은 학생들이 학교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니.......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24시간 가게문을 열어놓고 열심히 일하던 뉴헤이븐의 한국수퍼와 식료품점, 한국사람들을 떠올렸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로구나. 학생들까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니.......'
존경심이 일었다.
김포공항에서 수유리 화계사로 가는동안 무심스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말씀을 건넸는데 시실 나는 처음보는 서울 창 밖 풍경에 사로잡혀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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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2, 2012

만행 하버드란 동굴

만행 하버드란 동굴

큰스님과 면담이끝난 뒤 짐을 꾸려 다시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으로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오직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직 수행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책은 더이상 관심이 없어졌다. 글쓰기나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만약 내 본성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철학 책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그것으로부터 얻은 그 수많은 지식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나는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비친 내모습, 여전히 혼란 스럽긴 했지만 뭔가 결연해 보였다. 나는 이미 내 남은 인생동안 숭산 큰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스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나중 문제다. 큰스님은 마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침술사처럼 내가 어디에 병이 있는지 진맥만 짚어보고도 아시는 것 같앗다. 내눈만 보고도 나에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동안 나에게 그런확신을 갖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리하고 직접적이면서도 따뜻했다.
나와 그의 인연은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것일까.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는 내 니라 사람도 아닌, 잘 얼지도 못하는나라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이 아닌가. 혹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과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내 남은 인생은 이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에 더 무엇이 나를 만족시킬 것인가.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교슈님들의 가르침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시간 낭비야. 시간낭비. 이런 생각만 자꾸 일었다.
그전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고 노트하는 열성적인 학생 이었다. 그런데 숭산 큰스님과의 만남뒤에 접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열심히 교수님들의 생각을 받아적는 친구들이 오히려 로봇같아 보였다.. 왜 남의 지식을 복사하는 거야. 우리는 정말 우리자신의 생각이 뭔지 알아야 하잖아.
교수님들도 마참가지였다.
‘진리란 누구누구에 따르면 뭐뭐뭐고 찰학이란 누구누구가 말한바에 의하면 이러이러한 것이고…….”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교수님의 애기를 그대로 적고 있었다. 왼쪽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앉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뒷자리 친구도 보나마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히는 이 친구들이 단지 지식 복사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아주 성능좋은 복시기에 다름아닌 것 아닌가.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찾기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경험이 필요하다. 여태까지도 그런 가르침을 찾기위해 책을뒤지고 교수님들을 찾아다녔지만 도움이 안 되었지 않는가. 그런식으로는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들이 동굴에 갇혀있다고 했다. 그리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진짜 자기모습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큰스님을 만난 뒤 나는 하버드애말로 그 동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칠판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실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누군가 그려놓은 다른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1년 내내 하버드를 억지로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90년 5월에 기말숙제를 모두 제출하는 동시에 1년동안 휴학계를 냈다. 켐퍼스를 걸어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나는 학교를 휴학하자 마자 공사판으로 뛰어들었다. 공사판일은 내가 여름방학 때마다 간혹했던 아르바이트일이라 익숙했다. 우리 부모님은 대학 1학년 때 내 등록금을 보조해주긴 하셨지만 워낙 형제들이 많아 내게 계속 등록금을 대주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혼자서 돈을벌며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동안 식당 종업원, 출판사 일, 사무실에서 자료정리, 복사일,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져 나르고 페인트칠 하는 일 등을 방학 때마다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 가기위한 돈을벌기위해 공사판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매일아침 저녁으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했다. 나의 수행은 점점 더 깊어갔다. 일 때문에 아주 피곤했지만 곧 한국에가서 집중수행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한편,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 한국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 관한책은 그리많지 않았다. 읽을만한 책도 없었거니와 겨우 손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책들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국불교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전에 한국에 대해 오직 두 가지 경험만 했다. 80년대 중반 예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해도 한국에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예일대학은 미국에서 일곱번째로 가난한 뉴헤이븐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원래 백인들이 많이 살고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백인들이 모두떠나 가난한 흑인들만 사는 슬럼이 되어버렸다. 예일대학교수들 중에는 뉴헤이븐을 떠나 먼 곳에서 출퇴근하는 분도 계셨다. 이처럼 완전히 죽은도시였기 때문에 활기도 없었고 이렇다할 가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작고 깨끗한 구멍가계와 식료품점들이 눈에띠기 사작했다. 간판도 아주선명하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비깥에 내놓은 과일, 야채,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들이 신성하고 깨끗했다.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었다.
슬럼가는 밤이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상가들은 서터를 내리가 바쁘다. 그런데 유독 한국가게만큼은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어떤가게들은 24시간 영업을하는 곳도 있었다. 자정이 넘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하다 배가 출출하거나 혹은 파티를하다가 맥주기 떨어졌거나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가게에 가면된다’고 생각하고 새벽 한 시건 두시건 그들은 우리의 가대에 어긋나지 않게 문을열어 놓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기말고사를 준비하다 문득 맥주생각이 나 친구들 몇명과 함께 학교앞에있는 한국수퍼를 찾은적이 있었다. 주인인 듯한 남자와 한 젊은이가 과일과 야채를 다듬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나는 주인 남자에게 저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인데도 묵묵히 열심히 아버지의 일을 돕는 아들의 모습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가게는 또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으면서도 손님들이 찾는 물건이 없으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내일 반드시 그 물건을 갖다 놓겠다”고 약속했고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미국에서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정이 넘치는 가게를 본적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예일대학교수, 학생들이 모두 한국가게 단골들이었고 한국가게는 나날이 번창했다.
그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변호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1987년 5월 어느 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그날 〈뉴욕 타임스〉를 보다 1면 중앙에 실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는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오기 직전으로 한국에서의 데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중무장을 한 두명의 경찰이 경찰봉으로 누군가를 가로막고 있었다. 상대편은 다름아닌 스님이었다. 당당하면서도 밝고 순수한 얼굴을 한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자신이 들고있던 우산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중무장을 한 경찰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스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겨우 우산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당당한 표정일 수가 없었다. 누가 막는 자이고 누가 제지를 당하는 쪽인지 얼핏 분간이 안 되었다.
나는 그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오려 네 배로 확대복사해 친구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의 신문에는 한국의 데모소식이 많이 실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비록 광주항쟁을 고등학교 때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 미국의 신문에는 전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내전이 보도된다 — 내게는 광주항쟁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나 같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광주항쟁이 그저 남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시위와 별다른 게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데모대나 시위대 사진들 중에서 그날 1987년 5월 무장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그토록 당당한 스님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승려의 위엄과 두려움없는 표정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렇다고 얼굴에 적의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당함, 그 자체였다. 정작 온몸을 무장한 경찰들이 멈칫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도 먼저 접했던 책들이 인본 불교 책이었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도 한국불교에 관한 책은 전무했다. 장서보유고가 세계적인 하버드 대학의 도서관만 해도 그 당시 일본 불교에 관한 책이 5천여 권 티벳 불교에 관한 책이 2천여 권에 달했는데 정작 한국 불교에 관한 책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집 다섯권 정도가 전부였다. 원효ㆍ서산ㆍ경허대사 같은 한국의 위대한 고승들의 책은 하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겠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다 숭산 큰스님을 만나면서 비로서 한국과 한국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들은 한국말은 아마도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들었던 한국말 염불이었을 것이다. 뜻도 하나도 모르는 말을 발음기호만 보고 따라했지만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었다.
그러던 내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국인 한 분을 아주 가까이서 뵐 기회를 만났는데 그분은 젠센터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던 법수스님이라는 분이다. 법수스님은 하버드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계셔서 내가 영어를 가르쳐드리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그 스님은 아주 선심이 두텁고 친절하고 천진한 분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 닐 스님이 출타한 것을 모르고 스님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남자가 사는 방이 그렇게 깨끗하고 깔끔한지........ 그렇게 정리를 잘하고 사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성격도 깔끔한 분이었다.
방을 나오다 벽에 걸려있는 큰 달력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한국의 사찰들이 사진으로 실린 달력이었다. 열두 장에 담긴 한국의 사찰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사진을로 접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운문사 쌍계사 등 한국의 유명 사찰들이었다.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면서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진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부끄러운 듰 얹혀있는 기와지붕, 아름답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건물의 선, 아침 안개 사이로 보일 듰 말 듰 엿보이는 절집..........아 저곳에 한번 가보았으면....... 내눈으로 저 아름다운을 꼭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음 한 견에선 반드시 그런기회가 오리라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열두 장의 사진이 끝나자 너무 아쉬웠다. 더 많은 사진이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법수스님에게 내가 방안에 있는 한국 사찰 달력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했더니 아주 좋아하시면서 사찰 사진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인쇄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역시 감명깊게 보았다. 그런데 그 책의 글이 모두 한국말이어서 갈증만 더 일어났다.
서점과 도서관에가서 한국문화와 관련된 책을 뒤졌다. 그런데 만족할 만할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는 많은 동양문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일본이나 중국문화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미술이나 한국문화에 대한 소개는 전혀 없었다. 나는 좀 당혹스럽기도 했고 실망감도 들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니, 더군다나 한국불교에 대한 것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오직 이 달력? 이 사진집? 이 정도 뿐인가.
얼른 납득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젠센터에와서 그것도 한국 스님이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 달력을 못 보았다면 한국사찰에 대한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영원히 없었을 것 아닌가.
나는 법수스님에게 한국사찰에 대한 사진을 더 찾아내라고 졸라대면서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법수스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나를 가르치려 했지만 영어가 서툴렀던 관계로 그다지 도움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법수스님의 삶을 통해 살아있는 한국불교의 생생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가난과 청빈의 삶이었다. 법수스님의 짐이라곤 간단한 걸망 하나가 전부였다. 옷도 한두벌에 불과했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도 스님의 얼굴은 아주 맑았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찬절했으며 뭐라도 생기면 홀라당 남에게 다 줘버렸다.
나는 점점 더 불교에 관심을 갖게되어, 젠센터에 살면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 사실 법수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님이란 직업은 좀 별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카톨릭 수사난 신부와는 완전히 다은세계의 사람, 미국인의 눈으로보면 좀 히피성향의 사람들이 스님이 된다고도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법수스님을 통해 승려생활을 보다 가까이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무소유이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살아가는 저 충만함, 저 여유로움, 나는 점점 불교 수행자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 스님으로 사는 것도 아주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가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목탁소리를 따라 홀린 듯 소리를 쫓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인가 세시였던 한밤중이었는데, 법수스님이 혼자 법당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계신 것이 이닌가.
나는 문간에 기대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맘아있던 온갖 찌꺼기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태초에 어디에선가 울려퍼지는 원시의 목소리가 물결을 타듯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했다. 오직 두 개의 양초 불빛에 기대어 염불하며 앉아있는 스님의 모습에서 원형질의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의 염불소리는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고대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 했다.
그때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진한 향수라라까, 내가 태어났으나 기역하지 못하는 어머니 자궁같은 세계, 그런세계로 내 몸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한국도, 미국도, 아프리카도 아닌, 어쩌면 이 지구에는 없는 어떤 별에서의 여행자 같은 느낌, 언제인지, 어느 곳인지 도대체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없는 그런 곳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주 친숙하고 낯익은 곳, 그러면서도 너무 신비한 곳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보니 한 시간 가량을 그 소리에 취해서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다음낭 아침예불을 위해 기산목탁소리가 울려퍼질 때까지 잠을 아루지 못했다.
그 ㅟ 몇 차례 나는 법수스님의 새벽예불에 초대받지 않은 관객이었다. 그런 날 밤이면 잠자리에 돌아와서도 어김없이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반드시 법수스님을 찾아가 어제하신 염불이 무엇이냐 하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달마 게이트' Dharma gate라는 말이있다. 자기자신을 불가의 세계로 이끈 안내자라고 할까. 부모님은 내 몸을 주신 분이라면 달마 게이트는 내 정신을 새로 태어나게 문을 열어준 문이다. 숭산 큰스님이 법, 즉 달마 그 자체라면 법수스님은 나에게 달마 게이트였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든지 달마 게이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작년에 지리산 상선암에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그 법수스님이 경상도 어느 절에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밤낮을 눈물로 지샌 적이 있다.
그 맑고 고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오직 극락왕생만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