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30, 2012

이상구 박사 초청 건강 세미나


이상구 박사초청 건강 세미나

초청의 말씀

유전자 의학의 발전으로 모든질병이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세포들 속에 입력된 유전자의 변질로 발생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읍니다.

그렇다면 변질된 유전자를 희복시키면 암을 비롯한 모든 질병은 치유돨 수 있지 않겠읍니까?

이 놀라운 치유의 길을 아주 이해 하시기 쉽게 제시해드리겠읍니다.



"첨단 유전자의학과 질병의 치유"

21세기 유전자 의학의 진수! 모든 질병은 치유가 가능합니다.

유전자를 알면 건강이 보입니다.





일시 : 5월 7일(일)~~~12일(토) 저녁 7:30 (단, 토요일은 오전 11시) 매일 저녁 6시부터 건강식 제공

장소 : 나성중앙교회 1666 Michigan Ave. LA. CA 90033

전화 : 626--374---9480 , 626--497---8199

후속 프로그램 : 세미나 후 채식요리교실과 부부행복세미나 등 다양한 세미나가 준비됩니다.



OC 카운티 주민을 위한 2차 세미나

일시 : 5월 13일(일) 저녁 5시 30분 시작 암예방 3차 요리전시회 후 건강 강의

14일(월)~~~19일(토0 오전 10:30, 오후 7 :30분 미일 두 차례 강연 (숙식 프로그램)

장소 : 가든 문화 교실 11711 Trask Ave. Garden Grove. CA 92843

전화 : 714--403---6273 , 714--403---6274

후속 프로그램 : 세미나 후 건강요리교실 (월~~~수) 및 매일 환자 건강식 프로그램이 실시됩니다.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대열반경

大 涅槃經

대열반경 大涅槃經 All formations are impemanent 모든것은 무상하다.

시생멸법 是生蔑法 This is the law of appearing and disappearing.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생멸멸기 生滅滅己 When both appearing and diappearing disappear.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적멸위락 寂滅爲樂 Then this stillness is bliss.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여기에 대해 공부했다. 우주 만물이 어떤 조건하에서 서로 작용하여 늘 변한다는 것 말이다. 우주만물은 공에서 나와 짧든 길든 머물다가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부처가 창조해낸 생각이 아니다. 전 우주만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우리가 이 법을 만들면 모든것은 이 법을 따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우주를 만들지 않고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법을 갖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공함을 경험한다면 본래 모든것이 이미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열반경*은 아무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는 실체에 대한 이름과 모양이 있고, 그것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적으로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체에 대해서, 또 이름과 모양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둘 다를 깨달아야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작했을 때 제일먼저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는 단순한 가르침부터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가르침의 방편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기위해 그것을 사용했을 뿐이다. 제자들의 생각이 어느정도 성숙해 졌다고 판단한 부처님은 그로부터 방편, 즉 사탕을 빼앗았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런 다음 한 단계 더 나아가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도 단지 사라짐이라고 가르쳤다. 또 여기서 한 발

짝 더 나아가 이러한 깨달음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을 구하는 데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모든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 세상 도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냄새맡을 수도 있고 맛 볼 수도 있다.그렇다면 우주만물은 '어디서' 나타나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누가 나타남과 사라짐을 만드는가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면 우리는 모든것은 결국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마음이 모든것을 만든다. 마음이 있으면 나타남과 사라짐이 생긴다. 마음이 없으면 나타남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가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이마음을 만드는가? 바로 '나'이다. '나'가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지고 이 온 우주도 사라진다. '나'가 없을 때 마음이 허공처럼, 거울처럼 맑다. 흰공이 오면 흰공을 비추고 붉은 공이오면 붉은 공을 비춘다. 이 맑은 거울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산, 강, 나무, 개, 고양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다. 나타남은 나타남일 뿐이고 사라짐은 사라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은 얻는 긍정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다.

오래전 한국의 위대한 선사 중에 효봉선사란 분이 계셨다. 이분은 우리가 어떻게 이 깨달음을 행할지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법문을 하셨다. 그는 해인사 대웅전 연단에 앉아 주장자를 세번치시더니 법문을 듣기위해 모인 스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물과 모든법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이다. 이 정적이 우주의 실체 그 자체이다. 여러분들이 실체를 얻으면 진리응 얻을 수 있다. 그런뒤 이것의 올바른 실천을 얻는것이 가능하다. 나타남과 사라짐 그자체가 진리이고 그것을 깨달은 뒤에라야 바른 실천이 가능하다. 여럽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다. 실체, 실상, 실천이 어디에서 오는가. 답하려고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고 있으면 공함에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입을 열면 이미 분별심을 만드는 것이다. 입을 닫지고 열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이 실체, 진리, 실천을 얻을 것이가?"

수많은 승려 대중들이 모였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자 스님은 "암시를 하나 주겠다."면서 갑자기 크게 '할'하고 소리를 친 귀 아렇게 말했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마셔라."

나타남과 사라짐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알 수 있다. 나타남과 사라짐이 없어지는 상태는 극락이다. 모든것이 이미 완전하다. 어디에도 모자람이 없고, 진리 아닌것이 없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이미 완벽하다. 우리는 순간의 마음moment-mind 을 표현할 때 이 '완전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단지 순간순간의 마음 나타남이 나타남이고 순간순간의 마음 사라짐이 사라짐이다. 이 순간의 마음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순간은 매우 짧고, "탕!" 이 짧은 순간에 나타남은 단지 나타남이고 사라짐은 단지 사라짐이다.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이 순간의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면 모든것이 다 망상이고 환이다. 그때 모든것은 완벽하지 않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망상속에 살면 우리는 실제로, 이세상 모든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믿는다. 만믈이가고 오고 태아나고 죽는다고 믿는다. 여기서부터 苦가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아주 어려운 가르침이어서 뭔가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경험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사물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조차 없어진단말인가?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열반경*은 매우 복잡한 것 같읍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읍니다. 불교는 너무 어렵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극장에 간다. 선인과. 악인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본다. 수많은 격투장면이나오고 여기저기서 폭팔물이 터진다. 모든것은 아주 빨리 움직이고 있다. 우리일상의 삶도 이와같다 모든것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가고온다. 우리인생이란 시리즈 영화와도 같은 것이다.

영화장면이 1초에 14컷 정도 된다고 한다. 매컷은 정지된 행동들이다. 각 컷ㅁ만 떼어놓고 보면 움직이는 것이 없다. 모든것ㅇ은 완벽한 정적(멈춤)이다. 오고 가는 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는 완벽한 멈춤이다. 영화 필름 한 컷을 집어 손에 놓고 빛을 갖다대면 완벽한 멈춤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컷의 매 순간이 완벽히 움직이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도 이와같다. 실제로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인다. 쉼이없다. 1초동안에도 아주많은 움직임과 변화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마음(바로지금)이란 셔터속도가 무한대인 시간에의해 나누어진 렌즈와 같다. 그것을 '순간의 마음moment-mind'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런경지를 얻으면 이 세계의 운동은 멈춘다. 순간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필림처럼 우리는 매 컷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정지돼 있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필름처럼 바로 지금 이순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깨달음이다. 매 컷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영사기, 즉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계속 움직여서 우리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인 생각을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마음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참선수행을 해서 우리마음의 렌즈를 멈추고보면 실제 우리삶의 각 순간이 지정으로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순간의마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언제나 완벽하다. 시간과 공간넘어서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매 순간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아는것은 매우중요하다. 그때라야만 이 *열반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옛날 6조 혜능대사 당시 한 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30년동안 매일같이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8만 4천 경전 중 아무 줄이라도 뽑아 읽으면 그 경전이 어느 부분에서 나왔는지 즉각알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경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경*이엇다. 어느 날 그는 6조 혜능 대사를 찾아갔다.

"스승님, 저는 *금강경*도 일고 *반야심경*도 일고 *법화경*도 다 이해했읍니다. 그런데 이 *열반경*만큼은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이 있는데 좀 답을 해주시겠읍니까?"

"무엇이 궁금하냐?"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것은 무상하다'고 했읍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다음 대목 입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경지가 바로 완벽한 정적, 즉 더없는 가쁨의 경지다' 하는 대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읍니다. 그러면 누가 열반에 이를 수 있읍니까? 완벽한 정적에서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모두는 두 종류의 몸이 있읍니다. 육신의 몸인 色身과 법의 몸인 法身입니다. 육체의 몸은 地水火風 네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언제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병들어 늙고 죽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아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의존재이고 정적에 도달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법신은 형태도없고 감정도 없고 인식도 없고 충동도, 의식도, 생기도 없읍니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바위나 마무와도 같습니다.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 입니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정적의 상태가 더없는 기쁨의 경지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주십시요."

혜능대서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래 , 그럼 누가 색신과 법신을 나누었냐?"

"ㅂ부처님께서 설명하셨읍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지금 질문하는 너는 색신이냐 법신이냐?"

"둘 다 입니다."

"둘 다? 누가 둘 다라고 말했느냐?"

"제가 했읍니다."

"오, 내가 했다. 이 '나'라는 것은 색신이냐 법신이냐?"

그순간 제자는 입이 딱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혜능대사가 이어 말했다.

"놓아라. 너의 개념적인 생각은 버려라. 너의 색신은 결코 한 번도 '나는 이런이런 모양을 갖고 있다'라고 얘기한적이 없다. 법신도 마찬가지이다. 네 스스로 모양과 실체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각이 나오고 지적인 욕심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너의 생각을 내려놓아라 거기에는 모양도, 실체도 없다. 알아듣겠느냐?"

제자는 깊이 절을 올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탕!" 그것을 얻으면 '사라지는것도 없고 나타나는것도 없다.' "탕!" 아주 간단하며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Saturday, April 28, 2012

숭산대선사의 가르침 반야심경

반야심경 . 般若心經 The Maha Prajna Paramita Heart Sutra

照見 五溫皆空 度一切 苦厄
Perrceiving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saves all begins from suffering.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No appearing, no disappearing, no taint, no purity, no increase, no decrease.
나타나는것도, 사라지는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涅槃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No cognition, no attainment, Nivana

正等正覺
Unexcelled perfect enlightenment---anuttara samyak sambodhi.
정등정각, 아뇩다라삼약삼보리
Gate,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반야심경*, 정확히 말해 (마하바라밀다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않는 짧은 경전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야심경*안에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8만 4천 경전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전 세계 모든 절에서 읊어진다. 서울 화계사와 계룡산 무상사의 국제선원 에서도 매일 아침 한국말로 한번, 영어로 한 번, 저녁에는 한국 말 한번, 영어로 한번해서 두번씩,
그리고 결제기간 동안에는 더 많이 암송된다. 때때로 마음이 맑지않거나 참선수행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을 읽어라. 그러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마하(Maha)라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 Prejna Paramita)'이라는 말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심셩 Heart Sutra'은 마음에 길 이라는 뜻 이다. 따라서 이것을 '지혜로 가는 위대한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땅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고. 어떤이에게는 바다가 가장 큰것으로 보일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가장 클까? 어쩌면 우주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고 무한대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한 위대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는 나의 몸을 덮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온 우주를 덮을 수 있다." ㅇ우주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사실상 아주 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라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으로 전 우주를
덮고 있는 것이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무한대적 시공간보다 훨씬 큰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반야심경*은 이 가장 큰 것, 큰 마음을 지적한다. 이 작은 경전의 제목에 '가장 크다'는 의미인 마하를 붙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과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이 세상 도처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기위한 욕심을 쫓는다. 자신들이 느끼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으며,다른 사람들에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지와 상관없이, 설사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진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다 죽게되면 고통는 사라진다. 고통은 단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ㅇ을 깨달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재앙도 존재하지 않게되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도 참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배웠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가지가 뭉쳐만들어진 무더기(五溫, skandhas)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더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집전물(五溫)일 뿐이다. 인간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에 빠진다. 이것들이 실제이고 '나'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고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 에너지의 집적물들 역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무엇이 고통을 만드는가?
이 앞에 지금 컵이있다. 여기에 주스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컵이 깨지먄 주스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무터 고통이 오는가? 우리가 오온이라는 정신적 에너지 무더기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머물 곳(컵)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으ㅢ 말대로 이 에너지의 무더기가 공허하다면 고통은 그것이 머물 컵을 잃는다.
따라서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여하다. 열심히 수행하여 *반야심경* 오온의 핵심을 통찰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욕심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러나 거둡 말하지만,
단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은 '모양 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 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이상 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나무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총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며 무상하다.'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들은 엊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몸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헐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가지거나 지킬 수 잇다.
고 하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아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은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젹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뉴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최고의 철학자였음에도 집없이 방황하는 한 마리 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늘 밖에서 노숙을 했으며 옷은 늘 헐벗었다.
그날그날 먹을 거리도 걱정하지않고 지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옷도 입지않은 채 지내는 등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자연주의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깁자기 서늘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그의 눈앞에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이 서 있는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돵대한 군사력과 지적인 우수함으로 세계를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영웅이었다. 그날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몇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과시하며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누운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알렉산더 대왕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디오게네스. 당신을 돕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소. 셀 수 없는 왕궁과 부가 내게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다 드리리다. 땅이든, 돈이든, 지위이든 말만하면 모두 당신것이요. 소원을 말하시요."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요." "말씀만 하십시요. 다 드리겠읍니다." "좀 비켜서 주시겠읍니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좀 춥군요."
"오, 미안 합니다. 알렉산더가 사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원 입니다. 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양과 공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지 햇빛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단지
"햇빛을 가리지 마시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이미 온 진리를 다 얻었다. 그는 실제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모양 역시 공해서 부나 명예, 사람, 가족, 높은 지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것은 공하다. 왜 이 공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나는 단지 햇빛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다다. 디오게네스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였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없다. 법문 또한 필요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가령 여기 3밀리리터의 물이 담긴 병인 있다고 하자 이병에 100도의 열을 가하면 물은 모두 수증기로 변한다.
0도 이하로 얼리면 얼음이 된다. 물은 이처럼 모양과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물 그자체인 H2O는 변하지 않는다. 부증불감 不增不減 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을 통해 이같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고안해 냈고,
후쿠는 화학을 통해 질량불변이라는 진리를 창출해냈다. 이처럼 불교는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은 더럽고 깨끗한것도 없다. 깨ㅔ끗한 물을 마셔도 조금있다가 더러운 오줌으로 나온다. 물은 또 개울에 있다해서 적고 바다에들어간다고 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있지 않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본성을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不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진정한 공함을 깨달으면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는 우리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단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말과 단어라는 약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이 두가지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아닌것을 설명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딱히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우리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오직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아마 이것이 말과 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그리고 공하다. 그것은 모든것을 구성하는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있겠는가.
어떻게 더러움과 순수함이 있겠는가 이모든 것은 결국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반야심경*은 생각이전의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은 공하다. 깨달음도 깨달을 바도 없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반야심경*은 '모든법은 공하다'라고 한다. 따라서 법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큰 실수다. '진정한 공' 의 경지에서는 말도, 단어도, 법도 없다. '보든 법이 공하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공'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아닌 것이다.
말과 단어를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이 지적하고 있는것을 실제로 얻어야 한다. 모든것이 공한 경지에는 인식도, 깨달음도 없다. 공이야말로 절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 나온 이말은 그저 그럴듯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얻어야한다. 아니,
사실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공'이라는 소승적 경험에서 한 다계 더 나아간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거기에는 말도, 단어도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대,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고통을 멈추게하고 삶과 죽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열반이며, 거기에ㅔ는 분별이없다. 가고 오는것도,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쁜것도 없으며, 죽고 태아남도 없다.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을 어떻게 멈추게 할수 있는가 이미 고통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가. 바로 그 때문에*반야심경* 에서는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소멸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등정각 正等正覺,

야뇩다라삼약삼보리 '아뇩다라삼약삼보리 anuttara samyak sambodhi' 눈 산수크라수트로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 다시말해 '일체만상을 두루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바로 진리를 일컫는 다른이름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그것이 열반일 뿐이다.완벽한 정적과 축복의 경험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어을 것 또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은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열반의 실천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름하여 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정한 깨달음이다.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얻는다. 우리마음은 공허해서 우주와 같이 맑다. 즉,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산을 비추면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물을 비추면 오직 물이, 붉은것을 비추면 붉은것이 있고, 흰것을 비추면 흰것이 있다.
열반는 공함을 얻는 것이고 긍극적으로는 얻는것도 업ㄱ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진리를 얻기위해 공의 경험을 실천하는것을 의미한다. 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라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대자대비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magate, bodhi svha!


한단계 더 나가보자. '공'을 얻으면 그다음 진리를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를 발견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이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곧 진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정말미에 우리는 아주 뛰어난 진언 眞言, 위대하고 밝은 진언,
최상의 진언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마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를 읊는다 그것은 '간다 간다 간다. 고해를 넘어 고통이없는 곳으로간다' 고 번역된다.
*방야심경*말미에 나오는 이 진언은 '실천'을 의미한다. 이 진언전까자 모든것은 공함과 진리를 얻는것에 대한것이다. 이 진언은 우리가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보살의 행동이다.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깨달음을 실천해야한다ㅏ. 그것은 우리가 바로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순간 고통을 바라보면서 오직 중생을 돕는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반야심경*은 정말 흥미롭다. 그것은 이분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절대의 세계로 나가고,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이끈다. 이분법적 세계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다'라는 세계이다. 절대의 세계는 空, 즉 열반이다.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이어서 완벽한 세계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진리 그자체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를 경험한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ㅛㅇ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것은 위대한 사랑과 대자대비심이 잇는 순간의 세계를 계속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중생과함께 실천을 할 때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위대한 사랑은 저절로 나타난다.
실천이라고 해서 어려운것이 아닌다. 순산순간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이 이미 세계평화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주고, 배가 고프다고하면 빵을 주면된다.
단지'......할 뿐'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있으면 아무생각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앞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없이 단지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가면 우리가 뭔가 깨달았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자.
이것이 아제아제 파라아제 아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의미이다.
한단계, 한 단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우리는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애 할지를 얻어야 한다. 순간순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오직 할 뿐이다.

Wednesday, April 25, 2012

숭산 큰 스님 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Sunday, April 22, 2012

선의 나침판 대승불교







THE COMPASS of ZEN
대승 불교 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

법체유공관 法體有空觀
INSIGHT INTO th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DHARMAS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무상개공관 無相皆空觀
Insight into the fact that there are no external tangible charateristics and that all is emptiness
(이름과 모양이 공하다는 통찰)
유공중도관 有空中道觀
Insight into existence, emptiness, and the MIddle Way
(존재와 공함, 중도에 대한 통찰)
제법실상관 諸法實相觀
Insight into the true aspect of all phenomena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사사무애관 事事無碍觀
Insight into the mutual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모든현상의 상호침투)
직사이진관 卽事而眞觀
Insight which sees that phenomena themselves are the Absolute (실제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대승불교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 중생들에게 행한 첫 번째 가르침이 소승불교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부처님은 6년 고행끝에 보리수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래서 심지어 부처님은 처음엔 아예 가르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교, 요가 등 많은 가르침들이 있었고, 스승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신 혹은 구루(영적 지도자)에 의존하지않고 얻은 자신의 깊은 통찰을 누가 과연 믿고 따라줄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때 한 브라마 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두루 찾아보시면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도 있읍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 먼저 가르치는 것이 어떠실지요."
그리하여 부처님은 보리수를 내려와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먼저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의 통찰은 너무깊고 심오하여 당시 풍미했던 가르침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부처님은 우선 무지와 욕망,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뒤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관과 이 세계는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부정관, 그리고 종국에는 나와 너가 없다는 무아관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같은 기본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친 뒤 열반을 얻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착한일을 많이하고 나쁜행동을 하지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율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맑고 순수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고통을 벗어 던져서 완벽한 축복의 세계로 가는 열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서 이름하여 소승불교라 한다. 사람들이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소승불교 사상을 먼저 가르친 것이다. 소승불교는 먼저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완벽한 공 또는 열반으로 가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 같은 가르침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대승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고통'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즉 '空'에서 시작한다. 즉, 이 세계가 완벽히 공하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 단지 고해'라는 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바깥 실체가 순수하든 순수하지않든, 좋든 나쁘든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바깥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변해서 본래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통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 역시 본래 없는 것이니까.
대승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을 향한 모든 수행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낼 것인가?" 대승불교의 수행은 마지막 한 생명이라도 고통에서 구해내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 무한한 축복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大慈大悲이다. 내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모든 중생을 위해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면 대승불교는 버스나 기차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소승불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는 나쁜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함께 가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처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지만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소승불교 사상을 펴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대승불교는 크게 여섯가지 통찰로 나뉜다.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든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나의 실체와 우주의 실체는 똑같기 때문에 자성(自性, SELF-NATURE)이 따로 없다. 모든 법의 실체는 空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자자신의 몸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않다. 중국에서는 수행의 일종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보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나는 송장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방식으로 수행하면 몸이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모든 욕심과 집착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이 몸이란 실제로 '나'가 아니다. 몸은 완벽하게 空한 것이다. 변하고 변해서 결국 사라진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몸이 空하고 결국 모든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이몸조차 언젠가 시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하면 그다음 모든 것은 아무문제가 안 된다. 죽은 시체에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실체가 이와같다. 우주의 모든것은 똑같이 하나의 실체이며, 실체는 긍극적으로 空하다. 이것이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로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름과 모양이 空하다는 통찰
이 깨달음은 실재하는 모든 이름과 모양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空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놓은 뒤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름과 모양이 바뀔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태양, 별, 산, 강, 나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일시적인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앞에서 모든 법의 실체가 '공空'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법의 이름과 모양 역시 '공空'하다.
중도 中道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중도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중도란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이다. 높고 낮음도, 가고 옴도,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중도는 단지 '空'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空은 이 우주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절대'로 향하는 길이다. 절대는 완벽하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오고 감, 삶과 죽음은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들이다.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만든다. 이것이 근본적인 망상이다.
생각은 '나'를 만든다. 또한 '나' 아닌 것'을 만든다. 우리가 이처럼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다른 중생들에게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가고 오는 것도 없다. 모든것은 이미 완벽하다.
중도란 空이라는 깨달음으로가는 또 다른길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空은 완벽한 길이다. 만물이 공하며 공은 절대 그 자체이다.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공함은 절대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공함은 전 우주의 기본적 진리이다. 여기에는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없다. 분별심이란 오로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원성이 사라지면 '절대'가 우리 앞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것은 '완벽한 실체의 세계' 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모든것은 空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절대이다. 따라서 모든것은 완벽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眞理,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것이 진리 아닌것이 없다. 해, 달, 별, 산, 강, 나무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있는 이름과 모양 또한 진리이다. 과연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소승불교는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진리는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만약 우리가 완벽하게 이 전 우주의 공함을 깨닫는다면 여기서 한 단계더 나아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옆에 벽을 가르키며) 여기 이 벽 색갈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저 창밖에 나무는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역시 진리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이것도 진리이다. (시계를 보며) 지금은 저녁 7시 15분이다. 이 모든것들이 진리이다. 이 일상의 모든것들의 진리인데도 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은 좋고 싫음을 스스로 만들고 좋고 나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대승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인 대자대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자. 소승불교의 핵심은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고통이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한단계 넘어오면 사실 모든것이 본질은 공하다. 고통조차도 본래없으며, 모든것은 절대이고 완벽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누군가 바로 당신 앞에서 괴로움을 겪고있다. 그것 역시 진리이다. 그렇다면 진리 아닌것이 있는가? 이건 박사급 수준이다. 실체와 이름과 모양은 완벽하게 공하다.
그것이 절대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이런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생을 돕기 위해서이다.
모든 현상의 상호침투
만물은 이미 진리이여서 경계없이 상호공존한다. 예를들어 내 앞에 우주가 있다고 치자. 구름은 끊임없이 오고가고 가끔 비도 내린다. 빛도 오고간다. 바람도 앞뒤로 불고, 폭풍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모든 것들이 우주공간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함에도 우주는 그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또 그 여러가지것들은 서로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이와같다. 열심히 참선수행을 함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연후엔 감정이 오고가든, 생각이 오고가든, 좋은 상황이 오고 가든, 나쁜상황이 나타났다 사라지든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생기게되고, 내가처한 모든상황을 오직 다른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행복한 때이든, 고통을 겪을 때이든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우리 앞에 닥친 모든상황,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오직 다른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데 쓸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본래가지고 있는 심성, 즉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무언가 집착해 있다는 얘기이다. 마음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떤감정, 어떤생각, 어떤문제도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긱하는 모든것이 진리이다. 우리의 행복도 진리이며 슬픔도 진리이다. 나쁜상황도 진리이며 좋은상황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은 똑같이 공하며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실체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知的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것도 방해하는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순간의 할일이 명확해 진다. 순간순간의 모든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중생의 고통과 닿아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비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 I' 라는 것은 본래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마음, 즉 절대의 길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먼저 우리는 모든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空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이 우주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어떤법칙, 어떤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무애無碍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있다. 더 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디. 이미 우리의 행동은 大慈大悲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과 모든것이 그대로 진리라는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것이 空한데 그게 眞理란 말입니까?"
아주좋은 질문이다. 답은 쉽다. 집에가서 거울을 한번봐라. 거울속엔 아무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앞에 붉은 공을 갖다대면 붉은공이 나타나고, 하얀공을 갖다대면 하얀공이 나타난다. 산을 갖다대면 산이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공을 치우면 더 이상 붉은 공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마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이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것도 아무런 장애없이 비춘다. 모든것은 이 空한 우주라는 거울앞에 서있는 그대로 왔다 갔다 하며 비춘다. 아무것도 덧붙이지도, 빼지고 않는다. 모든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傷 역시 '空'하므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역시 붉은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뒤 하얀것을 갖다대면 우리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앞에있는 하얀것은 좋지않아, 붉은것이 더 좋아, 아니야, 하얀것이 더 좋아...... 아, 잘모르겠다' 하고 '생각'한다.하얀것이 앞에있지만 우리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모든것이 空해서 결국 모든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空'해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 '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을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바도 없으며, 얻을것도 없다.'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Saturday, April 21, 2012

탄허스님 가라사대 시사만평

탄허스님 가라사대

네년은 탄허呑虛스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유불선儒佛仙에 통달한 철승哲僧이자학승 學僧으로 이름 높았던 스님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불교학회와 오대산 월정사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다음주 서울에서 열린다. 스님의 어록을 보아 엮은 책도 새로나왔다.

入寂하기 3년 전에 나온 법문집 *부처님이 계신다면* (1980)과 유고집 *피안으로 이끄는 사자후*(1997)를 하나로 묶은 *탄허록*이 최근 출간됐다. 공맹孔孟과ㄴ장 老壯은 물론이고 역학易學까지 경지에 이르렀던 스님의 예지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을 1년 전 예견하고 월정사 승려들을 통도사로 미리피신시킨 것이나,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가 몰려듥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겨 분서焚書를 막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동양사상과 주역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그의 말에 귀를 쫑긋세우게 되는 이유다. 스님은 5000년 동안 고난과 역경속에 살아온 우리민족의 불행한 역사가 머지않아 종결될 것으로 내다봤다.

오래지 않아 위대한 지도자가 나와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양극화, 세대갈등, 가치관의 충돌같은 국내무제를 해결하고 국위를 선양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새로운 문화는 다른나라의 귀감이 되어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라고 말했다.

40여 년 전 스님이 예언한 '머지않은 미래'가 언제인지 나는 모른다. 스님도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음양오행의 심오한 이치를 알 길이 없는 천학비재賤學菲才로서는 암울한 시대를 사는 중생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심모원려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스님의 낙관적 예언에 기대고 싶은 것은 나약한 凡夫의 한계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지난 500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서구 중심주의가 쇠퇴하고,구미 歐美에서 아시아로의 '세력 전이power shift'가 일어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가 새로운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화 속에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의 모순은 SNS로 상징되는 정보화의 거센 물경를 타고 지구적 차원의 권력 재편을 추동하고 있다.

북아프리카發 '재스민 혁명'과 뉴욕발 '점령하라Occupy' 시위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물경을 서울대의 전상인(사회학) 교수는 '권력의 재구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라고 하는 메가 트랜트를 배경으로 정보기술 IT혁명을 통해 영리해진 개인들이 네트웤크 방식의 단결을 통해 제도권 정치권력을 초체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계간 *철학과 현실*,2012년 봄호).

올해 대선은 이런시대적 벼와속에서 치러진다. 그 중심에 서게 될 지도자가 누가 될지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대세론의 바람을 타고 박근혜가 될지, 아니면 안철수나 문재인 대망론이 현실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되더라도 그 또는 그녀가 탄허스님이 예언한 '위대한 지도자'가 되려면 이명박 MB대통령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읽지못한 구시대의 마지막 지도자로 MB를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전상인 교수의 지적대로 MB는 세계화 . 양극화 . 정보화 . 감성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권력의 재구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마찰을 빚으며 민심에서 멀어졌다.

내가 감족하는 것은 사실 탄허스님의 예언이 아니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지도자론이다. 무엇보다 스님이 강조한 것은 신뢰다. 지도자가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법과 영이 바로서고, 나라의 기강이 잡힌다는 것이다. 국민의 말을 귀담아듣고, 허물을 지적하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추구하고, 탐심貪心을 경계하며 먹을 것이 적은 것보다 고루 나눠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10%의 선질善質을 기용해 10%의악질 惡質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해야 국민의 80%가 평안한 삶을 누릴수 있다는 말도 한다.

대중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인화를 이룰줄 아는 지도자, 철학과 도의를 아는 지도자, 나이 든사람보다 젊은 사람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ㅓㄴ 지도자라면 누가 된들 무슨 상관인가. 보수면 어떻고 짐보면 어떤가. 기다려도 '고도 Godot'는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온다는 믿음으로 나는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

Tuesday, April 17,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삼법인

삼법인 . 三法印 The Three Seals of Extenence
제행무상인 . 諸行無常印 All Compounded things are impermanent.
제법무아인 . 諸法無我印 All Dharmas are without self-nature.
열반적정인 . 涅槃寂靜印 Nirvana is perfect stillness
동양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모든 공문서에 붉은 도장을 찍어왔다. 이름이 새겨진 도장에 인주를 묻혀서 서류에 찍는 것이다. 이렇게해야 문서가 진짜라는 것이 공표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세 개의 기본 도장이 찍히는데, 이것을 三法印이라고 한다. 세 개의 도장이되는 법문의 가르침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첫 번째 도장에 대해서는 이미 배웠다. 바로 '만물은 항상 변한다 諸行無常'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것은 변한다. 모든것은 조건으로 부터 나와서 일정기간 머물다가 꿈으로 사라진다.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일에 쉽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변하지 않는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과 마음의 모든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본래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법, 원칙, 아이디어, 믿음, 인간, 개, 고양이, 나무, 산 등 우주의 모든것은 '自性' 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한다. 모든것은 공에서 나오고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므로 자아인 실체가 없다. 諸法無我'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식에 찍는 두 번째 도장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오고 가는 것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본질도, 존재도, 마음도 없다.그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불교는 모든 법, 모든 계율이 완전한 정적의 상태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반은 단지 완벽한 정적의 상태를 일컫는 이름이다.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과 소멸에서 나와 결국 공과 소멸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알게되면 마지막 도장을 받는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 생사를 윤희하는 고통을 벗어난 피안이다. 성경에서는 '침잠하라. 그러면 신이라는 것을 알리라' 고가르친다. 불교에서는 '모든 법 Dharma은 완벽한 정적에서 나온다. 고 가르쳤다. 신을 찾고싶으면, 또 부처를 찾고 싶으면, '참 나' 혹은 '절대'를 찾고 싶으면 당신은 이 완벽한 정직과 소멸의 상태를 얻어야 한다. 이 정적이란 진정한 공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의 본질이다.
14세기에 지어진 한 기독교 시는 이것을 아주 맑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깨끗하고 텅 빈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모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본성품이 되어
밝음과 어둠, 고요함과 폭풍이 된다.
The God who is pure emptiness 空
Is created as form 色
Becoming substance, light and darkness,
The stillness and the storm.
본래 이 경지에는 아름도 없고 모양色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는 분별심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공空의 상태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오고 가눈 것이 없다. 그것이 '참' 나'.
소슴불교는 이 삶도 죽음도 없는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인 열반을 얻기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승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다.

삼학 . 三學 Three Kind of Practice
계율 . 戒 Sila-Precepts
삼매 . 定 Samadhi-Meditation
지혜 . 慧 Prajna- Wisdom
소승불교의 세 가지 도장을 받고 싶으면 세가지 종류의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수행을 섞어서 제대로 조화롭게 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계 戒
소승불교 수행은 계율 戒律을 간조한다. 계울이라고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도로 표지판 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간다고 치자,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서 고속도로가 시작하는지, 어디서 돌아 나가야 하느지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많이 서 있다. 만약 이 표지판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가면 대전가는 길을 놓쳐버리고 만다. 대전가는 것은 고사하고 아니면 부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엔 '아, 나는 참 나를 찾고 싶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도우며 살고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일상에 매이다보면 이런생각은 쉽게 사라진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수 자신이 아니라 뒷자석에 앉아 있는 손님이 되는 격이다. 손님이 '이리가라, 저리가라'하고 지시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기자신을 다잡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계율은 바른 삶으로 가기위한 명확한 방향을 의미한다. 계율은 법을 의미하고 법은 우주의 바른길을 말한다. 바른 길을 갖는다는 것은 맑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전도의 정어, 정업, 정명, 수생은 이 계율 수행을 대표한다. 계율을 지키면 자신의 조건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우리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도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으면 지식도 통제할 수 없고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지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 욕심이란 것은 결국 지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생각은 욕심이며, 욕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우리감정은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항상 분별하게하고 어떤견해에 집착하게 한다. 지식이 많을수록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며, 지식이 만들어내는 '좋은것' . '나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은 항상 움직이게되고, 끊임없이 내가 가진 강한 감정들, 다른사람과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의해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이렇듯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대해 강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중심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계율이 팔요하다. 계율이란 나의 욕심과 마음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다. 계울 수행을 하면 단전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것도 가능해진다.

정 定
바른 참선수행이란 언제 어다서나 항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참선 수행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생각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참선아란 그저 앉아 있으면서 하는 어떤 강한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경우, 참선의 목적이 몰입을 가져오는 좋은 감정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참선이 항상 완벽한 정적과 축복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오, 지금 모든것이 평화로워, 너무 좋아.' 이런종류의 생각은 아주 나쁜 병이다. 그것은 좋은 상황에대한 일종의 집착이므로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수행에 집착하면 지혜는 성장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지식은 각종 다양한 상황에서 다른사름을 돕는데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다.
팔정도의 정정진, 정정 수행이 참선수행을 대표하는 실천 지침이다. 깊은 수행을 경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전할 때나 먹을 때나 얘기할 때나 일할 때나 가족과 같이 있을 때나 언제나 평정한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상심이라 부른다.
내 외국인 제자 중 한 사람은 항상 깊고 조용한 상태에서의 참선만을 원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시끄럽게 놀면 "조용히 해라, 내가 명상중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면서 화를 내고 참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집에서도 가족들은 그가 참선중이면 살얼음판을 걷듯 매우 조용히 해야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참선과 불교를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참선은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 뿐이다.매일 매일 일상을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갖는것, 그것이 진정한 참선이다. 그것이 수행의 진정한 본질이다.
혜 慧
하늘은 스스로 "하늘이 푸르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가 "하늘이 푸르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다.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생각이다.
한국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이 아오이데스" 라고 한다. 폴란드 사람은 폴란드 말로,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 말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누군가의 생각이다. 하늘이 결코 이런식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우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으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만 이 세상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이다. 그때서야 나무를 볼 때 오직 푸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설탕을 맛 볼 땐 오직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모든 것은 이미 진리이다. 우주는 이미 매 순간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이러한 진리가 바로 나의 것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반야 般若'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목표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공하다는 것을 얻으면 그 자체가 이 세상 우주, 우리모든 마음의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진리를 사용하여 이 고통스런 세계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숭산 개선사의 가르침 12 연기

십이연기 . 十二緣起 The Twelve link's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

무명 無名 Ignorance 감정 受 Sensation
정신구조 行 Mental formations(karma) 욕망 愛 Desire
의식 識 Consciousness 집착 取 Clinging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 존재 有 Existence
여섯가지 감각기관 六入 The six senses 태어남 生 Life
접촉 觸 Contact 늙고 병들어 죽음 老死 憂悲苦惱 Old age, Suffering,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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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아주 포착하기 어려운 정신 활동에서 고통을 만드는 고리를 단순화해 보여주었다. 각 고리는 이전 고리의 결과이며 그것은 조건으로 변하여 다시 다음고리를 만든다. 열심히 수행하면 순간 순간 내 마음에 사라졌다 나타나는 이 고리를 잘 볼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연기의 고리는 나타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연기의 고리는 무지무명 無知無明에서 시작한다. 무지 無知란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주 간단 하다. 이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모를 때, 즉 이새상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모를 때 우리는 모든것이 영원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무명 無明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상을 실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욕망, 감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명은 우리를 어떤 사고 혹은 정신구조로 이끈다. 이 정신구조란 이생에서 혹은 전생에서 길러진 강한 습관의 힘, 즉 업 (行, karma, mental formation) 이다. 습관의 힘을 통해 의식(識, consciousness 이 나타나는데, 이 의식이란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하는 씨와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생각과 의식은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일단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섯가지 감각(六入, six senses;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촉감(觸, contact)의 세계 혹은 이름과 모양의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受, sensation) 습관적 경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다. 거기서 욕망(愛. desire)이 나와 감각에 달라붙게(取, clinging)되는 것이다.
'나는 저것을 좋아해, 나는 이것 아니면 안 돼, 나는 더 많이 원해, 더 많이 필요해.' 이런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나'라는 것이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서 여섯가지 감각을 통해 이 새상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有, exisitence)한다'. '나는 듣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생각이 삶(生, life)를 만들고 새로병사(生老病死, old age, suffering, death)를 민든다. 그것이 고통의 세계이다. 그것이 12연기이다. 부처님은 고통을 버린다는 것은 이들 각각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단순 명쾌하다. 12연기는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모두 극도의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마음속에 무지가 나타나면 삶과 죽음이 나타난다. 내가 나의 고통을 만든다. 무지가 어디서 오는가? 무지를 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래전 스리랑카의 한 유명한 스님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선원에 와서 소승불교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2주일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했고, 12연기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강의 했다. 강의 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무지가 생로병사를 비롯해 모든것의 원인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지는 언제 그리고 왜 나타납니까?"
그러자 스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무지는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셨읍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학생은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저절로 나타납니까? 왜 저절로 나타납니까? 모든것이 모든것의 원인이 된다고 했는데, 무엇이 무지의 원인인가요?"
그러자 스님의 말문이 막혔다. 스님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동안 그가 읽었던 경정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듯 했다.(하하하)
언제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마음을 굳게먹고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면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답을 낼 수 있는가.?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무지가 나타난다.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하고 묻는 순간 나타난다. 의심을 내고 생각을 가지면 무지가 나타난다. 질문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아직은 이해가 잘 안갈 것이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여기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 . 四聖諦 The Four Noble Truths
고 苦 Suffering ㅡㅡ 일체가 모두 고통이다. 一切皆苦 All things are suffering.
집 集 Origination ㅡㅡ 십이연기순환 十二緣起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order
멸 滅 Stopping ㅡㅡ 십이연기의 순환을 끊음 十二緣起 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reverse order.
도 道 The Pathㅡㅡ 팔정도(여덟가지 바른수행 방법)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부처님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가르쳤다.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므로 인간도 결국 변하고 사라져서 空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왜 우리 삶이 많은 고통으로 채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고 苦, 집 集, 멸 滅, 도 道라는 사성제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물론 많은 종교에서도 삶이 고통스럽다고 가르친다.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이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본성을 찾는 순간 그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부처님 한 분 뿐이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가지고 있으면 여기 내놓아보아라. 이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외부조건들 때문에 끊임없ㅇ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이 어떻게 '무지'에서 비롯되는지를 가르쳤다. 무지가 나타나면 우리마음에 '나'라는 것이 나타나고 그다음 생로병사, 행과 뷸행, 태양, 달, 별 등 모든 것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순전히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부처님의 큰 의문이었다. 아름다운 왕궁에서 온갖 화려함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 젊은 왕자는 인간의 고통을 보았고, 스스로 이 큰 질문에 대답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부와 권력, 가족을 버리고 6년간 고행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는 결국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그의 본성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모든 존재가 아주 많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우리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고통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가 사라지면 삶과 죽음, 늙음, 병......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다.
부처님은 이런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깨닫고 나서야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삶의 모든면에 적용가능한 아주쉬운 수행을 가지고 어떻게 고통을 벗어버릴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 .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정견(바른견해) 正見 Right View 정명(바른 삶) 正命 Right Livelihood
정사(바른생각) 正思 Right Thought 정정진(바른노력) 正精進 Right Effort
정어(바른말) 正語 Right Speech 정념(깨어있는 상태) 正念 Right Mindfulness
정업(바른 행위) 正業 Right Action 정정(바른 수행) 正定 Right Meditation

부처님은 욕망, 분노, 무지를 버리고 '참 나'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가르쳤다. 팔정도는 우리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병을 고치기 위한 여덟가지 각각 다른 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견 正見, 바른견해
첫 번째 약은 '정견', 즉 바른 견해이다. '바르다'고 해서 무슨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견이란 '어떤 관점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보면 수십억 중생들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타고 돌고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모든 중생은 오직 그들의 분노, 무지, 욕망만 을 따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정견이란 욕심, 분노, 무지에 기반한 행동들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결국 고통으로 이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 마음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감정과 욕심을 쫓아야만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 분노, 무지에 기반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즉각적으로 이 행동이 결국 어디로 귀착될지 깨닫게 된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해서?' 이런 질문이 우리 행동에 방향을 만들어준다. 방향이 명확하면 우리 삶 전체가 명확해지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다른 중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나 자신의 욕망, 분노, 무지를 쫓아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나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정사 正思, 바른 생각
바르게 생각한다는 '정사'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종종 그것들에 집착한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조건과 상황에 매달린다. '나는 여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승려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일본인이다.' 이런 조건들에 집착하면 이 세상과 또 중생과 온전히 연결될 수 없다. 우리가 오직 이 '나, 나의, 나를' 이라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작은 틀로만 사물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정사란 어떤 관점, 어떤 견해,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생각 이전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다. 禪院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의견에 집착하지말아라.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가지고 다른사람과 언쟁하지 말아라. 의견에 집착하고 방어하는 것은 옳은 수행이 아니다. 모든 의견을 놓아버려라.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분리가 일어난다. 분별심이 생긴다.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생각 이전의 마음이 실체이고 나의 실체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실체, 나의 실체, 전 우주의 실체가 모두 하나이다. 생각이전의 마음을 얻는다면 마음은 우주와같이 맑게된다. 거울처럼 맑아 진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비추고 힌것이 오면 횐것을 비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실체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생각이 저절로 나타난다. 더 이상 이기심, 악의, 적의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것이 지혜이자 바른 생각이다.
'정어 正語, 바른 말
많은 사람들이 혀에 집착해 있다. 혀는 아주 재미있다. 우리는 두 개의 눈, 귀 , 콧 구멍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입과 혀는 아나일까? 이 입이란 것은 아주 큰 일을 한다. 먹는 일과 얘기하는 일을 끊입없이 한다. 입은 언제나 음식에서부터 술,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우리의 강렬한 집착들의 대부분이 이 혀의 욕망에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나 콧구멍이나 눈에서 오는 집착은 별로없다. 한 개의 입과 혀는 이미 하나로도 충분히 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한 개에 그친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촉감이라는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혀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선불교에서는 종종 "혀에는 뼈가 없다"고 얘기한다. 한번 밷어놓은 말도 마음 순간에 완전히 다른말로 바꿀수 있기 때문이다. 혀는 어떤 것이든 만들 수 있다. 모든 거짓말의 원천이다. 한 위대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죄악의 혀가 파멸로 이끌 것이다. 병마개를 가지고 필요할 때만 열어라."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이세상에 고통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정어' 란 이처럼 순간순간 혀가 하는 일에대해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고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혀를 사용하라는 얘기이다. 견해와 조건을 내려놓고 마음에 어떤 것도 만들지 않으면 정어는 저절로 나타난다.
정업 正業, 바른 행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 생각의 반영이다. 무처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행동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돠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탕한 관계나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통해 어떤 정신적인 습관을 만들어낸다. 악행은 나쁜 업을 만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착한 일만 하면 우리는 대보살의 업을 쌓는 것이다. 착한 일이란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정업'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 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 正命, 바른 삶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어떤 일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나가 돈을 벌고, 또 어떤 사람은 절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나 겉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이 일들이 오직 나만을 혹은 나의 가족만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일인가? 이런 의문들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의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중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죽이고 공기와 물을 더럽히는 일로 돈을 번다. 또 어떤 이들은 술과 마약, 폭탄, 총 등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오직 나쁜 업만을 쌓을 뿐 이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 비록 가족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이 세상에 고통만을 배가할 뿐이다. 단지 돈을 벌기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조심해라.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명확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고통을 부는 직업은 갖지 말아야 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누차 얘기하지만 가장 중여한 것은 '이 일을 내가 왜 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 바른 삶, 즉 '정명'은 저절로 명확해진다
정정진 正精進, 바른 노력
팔정도 중 '정정진'이라는 것이 있다. 정정ㅈ3진이란 참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얘기이다.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시간이 있거나 없거나, 또 피곤하건 안 하건 수천, 수만 년 동안 쉬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정념 正念, 깨어있는 상태
한 줄기 빛이 한 지점에서 나와 다른 지점으로 갈 때 똑바로 직선을 만들듯, 바로 이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우리 인생을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들의 생각, 분노, 욕심, 무지만을 좇는다. 그리하여 매 상황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깨어 있다면 행복을 얻는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이 깨어있는 상태를 불교에서는 '정념'이라고 한다.
정정 正定, 바른 수행
부처님은 또 바른 수행, 즉 '정정'이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가르쳤다. 바른수행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지만 항상 바늘 끝처럼 깨어있는 것이다.
어떤사람들은 수행을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러비던스 선원을 세운지 얼마 안 돼,, 한 로큰롤 밴드가 우리 선방 바로 아래층에 이사를 왔다. 너무 시끄러워 많은 핵생들이 수행을 할 수 없다며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사님, 밖이 너무 시끄러워 수행을 할 수 없어요. 그들에게 멈추라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햇다.
"조용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정적은 정적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음속에서 찾는 침묵이 진짜 정적이다. 이 로큰롤 밴드 음악가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부처님들이다."
물론 조용한 곳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수행을 할때 목적이 단지 정적이라는 경험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삶은 항상 조용한 것이 나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남대문 시장도, 심지어 감옥조차 훌륭한 선원이 된다.
사람들은 참선 수행이란 아주 힘들게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것은 완정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는 '마음'의 수행이다. 어떤 마음 자세로 앉아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나의 삶을 만든다. 마음이 맑으면 우주가 맑아진다. 열심히 참선하는 것도 좋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각의 집착을 끊고 생각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 '
선방에 앉아있지 않고도 모든 조건,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운정할 때도, 먹을 때도, 청소할 때도 참선할 수 있는가.그것이 살아있는 참선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어떤 일정한 수행 방법이 필요하다. 앉아서 다리를 꼬고 등을 꼿꼿이 세워라. 이런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없으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수년 전 프러비던스 선원에 등과 다리가 아파 누운채로 90일 동안 수행한 학생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수행했다. 식사할 때나 염불할 때, 나와 얘기할 때정도 앉아 있는 것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오로지 누워 있어야 했다.
한 선사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걸을 때나 서 있을 때, 앉아잇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항상 언제 어디서건 방해받지 않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
진정한 참선은 얼마나 오랜시간 앉아있었는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 큰 물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다. 천천히 내쉬고 천천히 들이마셔라. 내 쉬는게 적어도 들이마시는 속도의 2배는 되어야 한다. 천천히 호흡하면 좀더 쉽게 생각을 끊을 수 있고 마음에서 오고 가는것에 집착하지 않게된다. 에너지는 차츰차츰 단전으로 모여서 감정과 느낌들을 더 잘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강조하고 싶은것은 참된수행, 다시말해 정정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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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16, 2012

' 눈 건강' 노력하면 지킬 수 있다.

"눈 건강' 노력하면 지킬 수 있다.

시력을 지키는 방법 7기지 중앙 패밀리 & 리빙
나이가 들면서 가장 불편해지는 것 중 하나가 시력이 나빠지는 것이 아닐까. 평소 잘 보이던 것이 흐릿해지고, 돋보기를 쓰게되면 익숙하지않은 탓에 자칫 우울해지기도 한다. 생활정보 잡지 리얼심풀은 최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시력감퇴를 늦춰주고 눈의 건강을 지켜주는 7가지 법을 소개햇다.

*색갈이 짙은 잎채소를 먹어라

시금치,케일 등 색갈이 짙은 채소에는 루테인과 제아잔틴이라는 카로티노이드가 있어 백내장이나 시력감퇴 등의 발병위험을 낮춰준다고 에모리 의과대학 안과교수 에밀리 베드릭 그로바트 는 말한다. 점심에 시금치를 샐러드에 곁들이거나 저녁에 브로콜리와 함께 먹는 식으로 하루 두차례 먹는 것이 좋다.

*황산화제 식을 어라

베리류, 오랜지, 자두, 체리등은 유해산소에 따른 피해를 줄여준다. 유해산소는 콘택트랜스를 건조하게 만들고, 백내장과 시력 감퇴를 유발할수 있다. 아침에는 불루베리를먹고, 점심에는 오랜지를 먹는 식으로 하루 차례 먹어라.

*종함비타민을 먹어 눈 건강과 시력을 지키는 방법

미국 국립 눈 연구소는 비타민 C와 E, 베타카로틴, 그리고 연, 구리 등의 미네랄은 눈 관련 질병위험이 높은 사람들의 사력감퇴를 늦춰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최근 내과학회보에 게제된 논문에 따르면 비타민 B6, B12, 옆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한 비타민들이 백내장 발병을 늦춰준다는 다른 연구도 많다. 종합비티민을 매일 먹으면 예방할 수 있으며, 가족력이 있으면 반드시 보충제를 먹는것이좋다.

*오메가3 지방산을 먹어라

오메가3 지방산이 심장에 좋다는 것은 알려져있다. 또한 연어, 넙치, 참치 등 생선에 풍부한 오메가3 지방산은 눈물막을 보호하고, 눈의 건조를 맏아주고, 백내장도 예방한다고 미국 안과협회 대변인 루스 윌리엄 박사는 말한다. 일주일에 2, 3,번 생선을 먹고, 생선유로 만든 보충제는 매일 먹도록한다. 또한 최근 붉은 고기를 먹으면 시력감퇴를 부추긴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당근을 많이 먹어라

호박 같은 오랜지류 채소와 마찬가지로 아삭아삭한 당근에는 베타카로틴이 많아 눈의 건강을 지켜준다.

*와출 땐 항상 선글라스를 쓰라

자외선은 콘택트렌스를 마르게하고, 백내장과 시력감퇴를 조장하는 주범이다. 실제로 백내장을 지연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자외선 차단 이라고 듀크 대학교 눈 센터 안과 조교수 질 쿠리은 말한다. 따라서 밖에 나갈 때 마다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쓰면 자외선을 100% 차단할 수 있다.투리 교수는 선그라스를 써도 위와 옆으로 일부빛이 들어와 뺨에 반사돠어 눈으로 직접 들어가므로 되도록 크기가 큰 것을 쓰도록 하고, 모자도 쓰라고 권한다.

*심장박동수를 올려라

일부 연구에 따르면 유산소 운동을 면 내부의 압박이 줄어들고, 녹내장위험은 낮아진다고 한다. 하루30분씩 주일에 3번 걷기나 조깅을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도록 하라.

인기농약이 꿀벌폐사원인 재확인

과학이야기 인기농약, 꿀벌 폐사원인 재확인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농약 가운데 하나인 '이미다틀로프리드'가 꿀벌 집단 폐사를 일으킨다는 연구가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속속 발표된데 이어 이번엔 미국 하버드대에서도 이를 확인하는 연구가 나왔다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보도했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HSPH) 과학자들은 지난 2006년부터 전세계의 꿀벌 개채수를 급격히 감소시킨 이른바 '군집붕괴현상' (Colony Collapse Disorder)이 네오디코티 노이드계 농약인 이미다클로프리드 사용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특히 환경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수준미만의 농약을 사용한 실험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면서 미량의 농약만으로도 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꿀벌이 농약을 친식물의 꽃꿀을 먹거난 양봉농들이 먹이로주는 과당 성분의 콘시럽을 먹음으로서 이미다클로프리드에 노출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지만 2010년 여름 이미다클로프드가 CCD를 유발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23주에 걸쳐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양봉 농장 네 곳에서 실험을 했다.

가가의 양봉장에는 각기 다른 농도의 이미다클로프리드를 사용한 4개의 벌집과 1개의 대조군 벌집이 있었는데 이미다클로프리드 사용 후 12주 동안은 모든 벌들이 살아있었지만 23주가 지나자 농약 농도가 높은 순서로 시작해 농약사용 벌집 16군데 중 15개의 벌들이 죽었다. 즉 식량 저장소와 약간의 꽃가루, 어린 벌들을 빼고는 벌집이 텅텅 비었고 주변에 죽은 벌이 두 세 마리씩 떨어져 있었다.

연구진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CCD를 일으킨 농약의양이 농작물에 보통 사용되는 양보다 적은 양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최근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은 네오니코티노이드가 꿀벌의 길찾기 능력을 파괴하고 왕벌수를 감소시켜 벌들의 떼죽음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시작된 CCD로 지역에따라 꿀벌 군집의 30%~90%가 갑자기 사라져 농민과 양봉가, 과학자, 정책 결정자들을 다혹케 했다.

Saturday, April 14, 2012

부정관 무아관 연기

부정관 .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인생5욕 . 人生五慾 The Five Human Desires
재물욕 . 財慾 Desire for materal wealth
색욕 . 色慾 Desire for sex
명욕 . 名慾 Desire for fame
음식욕 . 食慾 Desire for food
수면욕 . 睡慾 Desire for sleep

어떤 사람들은 몸이 더럽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이 더럽다고 하다. 소승불교 수행은 몸의 더러움을 바라본 뒤 마음의 더러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 몸의 살 속에는 피가 흐른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각종 몸의 내장기관과 똥, 오줌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뼈가 지탱한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속이란 결국, 어떻게 말하면 피와 똥과 오줌의 뒤범벅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의 아홉개의 구멍에서 매일 시시각각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온다고 표현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쁘다면서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거나 비단옷을 감고 다닌다. 그러나 일단 죽으면 아무리 사랑했던 친구들도 당신의 시체를 멀리할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죽은 육체를 아홉가지 불결한 양상으로 관찰한다. 바람과 햇빛에 쏘인 시신은 먼저 부풀어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검푸른 모습으로 변한다. 결국 그것은 문드러지고, 살이 풀어져 피고름이나오고, 썩어 허물어진다. 새나 짐승, 벌레들이 와서 뜯어먹고, 뼈와 살과 머리와 손등은 부서져 흩어지고, 해골만 훤히 드러난다. 이것마져도 화장하고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날아가버린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더럽다. 왜냐하면 어머니 배 속 역시 피와 고름투성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을 애지중지하여 온갖 비싼것을 사다가 닦고, 바르고, 털고 해대니 이 정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개, 돼지의 몸이나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부정관에서는 이 같은 몸에 대한 통찰을 넘어 인간의 욕심을 만들어내는 다섯가지 더러움을 강조한다.
재물욕, 색욕, 명예욕,, 음식욕, 수면욕
가만히 보면 인간의 고통이란 것이 전부 다 이 다섯가지 욕심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니치게 재물을 탐한다든지, 명예를 좇는다든지. 색을 즐긴다든지, 또 먹는 것을 지니치게 탐한다든지, 잠만 잔다든지, 일은 하지않고 놀 생각만 하는 게으른 사람은 추잡하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은 중요하지만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마음은 금세 욕망으로 뒤덮이게 된다. 모두들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내 제자 중에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돈 욕심이 많아 탐욕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절제하고 검약하는 생활은 미덕이지만 넘치면 탐욕이 된다. 내 제자의 아버지는 자식 키우면 돈 모으기 힘들다며 내 제자를 낳은 뒤로는 자식도 더 이상 낳자 않았으며, 직장에서 월급을 타오면 마누라에게 생활비만 떼어준 뒤 장롱속에 고스란히 넣어두렀다. 돈 세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마누리를 데리고 외식하는 것은 물론 밖에 나가 차 한잔 마시는 일도 없었다. 참다 못한 마누라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야단을 했다. 부부싸움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대뜸 마누라엑게 "나하고 못 살겠으면 차라리 갈라서자"고 선언했고 결국 그의 부모는 60세 나이에 이혼을 하게 됐다. 이를 보다 못한 내 제자가 아버지에게 따졌다.
"한평생을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죽은 뒤에는 내 알바 아니다. 나는 살면서 오로지 돈 모으는 재미밖에 없다. 아들도, 마누라도 다 소용없다."
그러나 그렇게 큰소리치던 그의 아버지도 이혼 후 얼마 지니지 않아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정리하던 아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아버지가 목숨처럼 중히 여기던 금고를 열어보니 수십만 달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은행금고처럼 돈다발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결국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가막히고 화가나서 금고를 부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아니, 살기위해 돈이 없으면 안 된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돈이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좇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의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는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음양의 법칙에 따라 태어나서 또 그 법칙대로 산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혼자 살기도 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에 내가 제일 처음세운 미국절인 프러비던스 선원 Providence Zen Center 에 있을 때 웬 여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그녀는 현재 일흔일곱 번째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앞으로 남자 친구들을 더 사귀어본 뒤 장차 1백 번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알다시피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사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관계를 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려 일흔일곱 명의 남자와 섹스를 했으니 섹스에대한

집착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는 얘기이다.
나는 그녀에게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위대한 보살 바수밀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엄경]에는 모두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이 등장하는데 바수밀녀는 그중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이다.
바수밀녀는 부처님 생전에 창녀로 살았던 여자이다. 용모가 넘무 아름다워 그녀를 보기만 하면 모든 남자가 그녀와 자고 싶어했다. 바수밀녀는 어떤 때는 돈을 받고 몸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녀와 한 번 잠자리를 한 남자는 다시는 여자 생각이 안 나고 결국 수행자가 돼 깨달음을 얻어 큰 스승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수밀녀는 성[性]을 그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몸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들의 색욕[色慾]을 없애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도록 그녀의 몸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섹스가 때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읍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다. 섹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는 것이다. 바수밀녀는 그 자체로 보살이었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 섹스를 하는가?"
"그냥...... 나와 그를 위해서요."
"여전히 그대는 '나'를 갖고 있군, 그것이 문제라네, '나'라는 것을 철저히 버리게 그러면 그대의 섹스는 보살행이 될 수 있을 것이네."
1년 뒤 나는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녀가 결국 일흔여덟 번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좋은 아내와 엄마노릇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였다.
남녀의 관계는 도반[道伴]의 관계여야 한다. 도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뜻이다. 서로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의 섹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섹스를 단지 즐기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얘기지만 그럴때의 섹스는 더러운 것이 된다. 중요한것은 섹스를 어떻게 생각하는냐 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명예욕[名譽慾]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색욕이상으로 마음을 더럽힌다.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착각이다. 이름과 모양은 본래 없으며 '나'라는 것도 없다. 모두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항상 '나는 이렇다'는 착각을 키워가기만 하고잇다. '나는 훌륭한 교수다.' '나는 유명한 배우다.' '나는 이런이런 친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면 좋아하고 거기에 휘둘리기도 한다. 아마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나는 이렇다'는 믿음을 없애라고 한다면 차라리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기막힌 노릇이지만 매일매일 우리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 이 욕망이 만들어낸 고통은 단지 독재자나 법죄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나' 라는 사람을 생대방에게 각인시키기위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한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싸우고 험담한다. 사람들은 또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위해 혼신을 다한다. 이 완벽하게 공허한 것들을 부여잡으려고 온갖 부끄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
어느 한 고관대작의 부인이 제비족에게 걸려들었다. 그녀는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제비족의 위협에 시간은 물론 돈과 보석까지 갖다 바쳤다. 그러나 결국 이사실을 만천하에 공개되였고,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 여러번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례야말로 다른사람에게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예욕이란 것은 단순히 내가 훌륭하게 보이고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모두가 욕심이다. 다른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불평하며,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욕하고 질투한다. 집은 가난해도 겉으로 옷은 잘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아는 어떤 사람은 집에 생활비도 제대로 갖다주지 못하면서 좋은 차를 몰고 다니고 매일 비싼 옷만 입고 다니다.
일본이난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낳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안달을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기실 마음속에는 다른 부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껏이다.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입시에 떨어진 아이들은 부모들이 창피해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라는 기본적인 착각에서 오는 것들이다.
참선 수행을 하면 '나'라는 것이 실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안달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나보다 잘 나간다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질투의 감정도 사라진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참선 수행을 열심히해서 명예욕이라는 더러움을 씻어내야한다.
식욕[食慾]도 마찬가지인데, 혀가 가진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동네에 사돈의 8촌까지 제삿날과 생일날, 잔칫날을 일일이 공책에 다 적어놓고 그런 곳만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음식점에가면 제 것 가만 놓아두고 남의 것부터 먹었다. 아내의 음식솜씨가 아주좋았음에도 매일 식당을 찾아다녔다. 오늘은 일본 식당, 내일은 중국식당...... 이런사람을 불교에서는 '아귀[餓鬼]'라고 한다.
이 모든것은 지나친 욕심에서 나온다. 이것이 오히려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은 배부르면 더 이상 먹지않고 음식에 대한 집착도 없는데 비해 사람은 과식으로 고통을 겪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맛이 있으면 계속 먹기 때문이다. 음식이란 단지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몸을 잘 유지해서 깨닫토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부과하다. 식욕에 끌려다니면 노예나 동물과 다름이 없다.
수면욕[睡眠慾]은 또 어떠한가, 보통 잠은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정도자면 충분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무실에서, 도서관에서 '잠'과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참선 수행을 하면서 조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난밤 충분히 잤는데도 죽비만 치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잠은 자면 잘수록 더 자고싶은 것으로, 그 역시 업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부처'란 말 자체가 '깨운다'는 의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선원에서 며칠씩 참선 수행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수행때처럼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을 한다. 알람 시계까지 맞춰놓고 잠이 들지만 막상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버튼을 눌러놓고 다시 잠들기 일수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두가 꿈이라고 가르쳤다. 언제 깨어있을 것인가? 잠이 너무 많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전 한국에는 오히려 잠 때문에 깨달은 스님이 한 분 있다. 나중에 맷돌선사라고 알려진 이 스님은 앉거나 일하거나 걷거나 먹거나 계속 졸았다. 수행을 하려고 선방에 들어와 앉으면 죽비를 치자마자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참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사는 졸면서 걷다가 큰 나무에 부딪쳣다. 마침 그걸 보고 있던 한 여인이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선사는 너무 부끄러웠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버릇을 고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등허리에 맷돌을 짊어진 채 넘어지지 않도록 걷다가 드디어 도를 깨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맷돌선사가 됐다.(하하하)
대부분의 사람들은 5욕에 휘둘려 살지만 깨달으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묶지않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욕심 그 자체는 나쁜것이 아니다. 다만 이 욕심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 어떻게 쓸것이가 하는 것이다.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萬相, The charateristics of all external phenomena
成, Arising 住, Stabilty 壞, Decline 空, Dissolution
삼라만상은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心相, Aspects of the mind
生, Arising 住, Stabilty 異, Defferentiation 滅, Extinction
사람의 마음도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인 因, Cause 과 果, Effect 윤회輪廻, Samsara
원인 原因, Primary cause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결과 結果, Result
선인 善人 ㅡ 선과 善果
A good cause leads to a good result.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
악인 惡因 ㅡ 악과 惡果
A bad cause leads toa bad result.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만상은 성주괴공 萬相成住壞空
삼라만상은 생겨나서 머물고 변화를 거듭하다 결국 사라진다.
비나 눈을 보라. 처음에는 어떤 형태를 띠고 내리다가 끝내는 녹거나 증발해서 결국 없어지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산, 바위, 나무, 동물, 태양, 달, 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시간이 지나면 태양도 사라질 것이고, 모든 별은 빛을 잃고 지구와 달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空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순간이냐, 억겁이 걸리는냐의 시간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학이다.
드러나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게,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한 제자가 '스페이스space'라고 답했다. 또 다른 제자는 '유니버스universe'라고 했다. 그러나 스페이스든, 유니버스든, 결국 시작이 있다. 이 우주도 빅뱅에서 시작됐따. 따라서 사라질 수 있다. 우주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우리는 그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한다.

마음도 생주이멸 心相生住異滅
우리의 마음 역시 우주의 삼라만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마음은 끊임없이 오고 가는데, 그것이 걸리는 시간을 재본다면 1초도 채 안 걸릴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한국 속담에 '여자 마음이 부엌에서 거실까지 오가는동안 열두 번도 더 변한다'라는 게 있다. 남편이나 부모에게 상을차려 갖다주면서 온갖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맛이 없으면 어쩌지, 너무 많이 준비한 것은 아닐까. 남기면 안 되는데...... .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여자 마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이와같다. 마음이 변하면 얼굴색도 변한다. 마음이 변함에 따라 얼굴이 빨갛다가 노랗다가 창백해지기도 한다. 마음도 우주와 같아서 에너지를 얻으면 얼굴이 붉어졌다가 에너지를 잃으면 노랗게 변하거나 나무 많은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두워진다. 얼굴색이 이렇게 변하듯 우리 마음도 변한다. 이름과 모양이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므로 이름과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은 변한다. 마음이란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바로 무아관이다.
거듭 말하지만 몸이란 것은 렌터카이다. 갑이라는 사람의 렌터카가 미국산이면 을은 한국산이고 병은 일본산이다. 이 몸이 렌처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열반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아, 나의 육신은 늘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나의 손이고 이것이 나의 머리고 이것이 나의 가슴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이 몸이 덧없기 때문이다. 이 렌터카는 계속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이 마음이란 것 역시 변하고 변한다. 그러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본성 true-self이 바로 무아 non-self인 것이다.

원인 . 결과 . 연기 . 윤회 原因 . 結果 . 緣起 . 輪廻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이며, 이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이 가르침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이다. 서양 사람들이 묘즘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하는 이유도 이처럼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은 현대과학적인 관점과 많이 닮아 있다. 절대자나 신을 믿는 종교들은 이 세상이 절대자나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신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가 열심히 기도한다해도 우리가 바라는대로만 이루워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 아난다와 함께 걷고 있었다. 무처님은 길가에 떨어진 짚을 발견하고 아난다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난다는 "생선 냄새가 납니다"고 했다.
부처님은 "왜 생선 냄새가 날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아난다는 "생선을 쌋던 짚인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다.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또 얼마쯤 가다 보니 길에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그것을 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향냄새가 납니다. 아주 고급의 향을 쌌던 종이 같읍니다."
아난다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 새상 모든 이치가 이와같다. 생선을 싸면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싸면 향냄새가 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다. 크든 작든 다 끊임없이 인과관계에 얽혀있다."
인과 법칙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고 나는 왜 한국에서 태어났나?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왜 어떤 사람의 머리는 검고 어떤 사람은 노란색인가? 왜 누구는 가톨릭이고, 누구는 이슬람교도인가? 왜 누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예술에 재능이 있는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봐서 결혼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애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전생에서 어떤 조건과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이루엊진 것은 하나도 없다.모든것은 이미 우리가 전생에 행한 행동들 때문에 결정되었다. 부처님은 길을 가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수천 번 만났던 인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니 사랑하는 사람이나 결혼하는 사람과는 얼마나 많은 인연이 쌓여 있었겠는가.
이 세상일은 어떤 조건 아래있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업karma이라 부른다. 업은 단지 우리의 습관의 에너지habit-mind가 뭉친 것이다. 어떤 것을 여러 번 하거나 생각하면 정신적 습관이 되어 똑같은 것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업을 만든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반복했던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스스로 만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이다.
전생에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어떤 업을 갖고 있으므로 내가 다시 한국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내게 만약 미국, 독일, 폴란드의 업이 있다면 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죽으면 몸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 사라지지만 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 이업이 어떤 조건과 맞아떨어져 미국 사람, 독일 사람, 폴란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전생의 업과 현생에서 만나는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동이었던 모차르트를 생각해보라.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악보 보는 법, 악기 다루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는 분명히 전생에 악기를 아주 잘 연주하는 사람아었을 것이고 그것이 정신적 습관, 즉 업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음악을 좋아했다. 모차르트의 전생의 의식은 이런 조건과 만나서 어떤결과를 맺은 것이다. 아이는 이미 음악에대한 강한 업이 있는 것이고 새로운 조건과 몸을 찾으면 이 정신적 습관의 힘 mental habit force은 계속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과 운명은 어떻게 다를까. 흔히 말하는 '팔자'와 업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과나무 밑에 앉아 사고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결국 사과는 무릎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예 나무를 흔들거나 나무위에 올라가 사과를 딴다고 하자. 아때도 마찬가지로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법, 즉 나무 밑에 앉아 사과가 떨어지기를 가다라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언젠가 사과는 떨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를 흔들면 우리가 직접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내 다른 행동, 혹은 사고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 모든것은 수 없는 생에서 만들어놓은 습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생에서 우리는 인과관계를 조절할 수도 있고 총제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것은 바로 마음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매일 참선 수행하고 염불 수행해야 한다. 절하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성으로 돌아오면 우리 업을 조종할 수 있으며, 나쁜 업도 막을 수 있다. 나쁜 업을 받고 태어났다고 불평하지말라. 그저 열심히 수행하라. 계으른 마음을 버리고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한 길로 나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원인, 조건, 결과를 조율할 수 있다.
성냥을 예를 들어보자. 성냥은 각 사람속에 들어있는 원인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그것은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는 타오르지 못한다. 이때 성냥갑은 어떤 조건이다. 원인이 조건을 만나면 '불' 이라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성냥으로 성냥갑을 그으면 불꽃이 인다. 성냥갑에 종이를 그어대 봐야 불꽃은 일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우리인간의 의식속에 다양한 원인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생각이 원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원인이 어떤 조건과 만나면 장시간에 걸쳐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을 만나게 하지않으면 당연히 원인도 소멸한다. 원인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라진다. 이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것, 아니, 통제할 수있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을 통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오직 모를 뿐.'
술을 예로 들어보자. 술 먹고 싶다는 욕망은 근본 원인이고 술은 조건이다. 따라서 술이 일단 손에 들어오면 마시게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습관이 된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술을 피하겠다고 생각하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씩 사라진다. 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이 이런 조건을 만나면 결과적으로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파란 콩을 심으면 파란 콩이나오고 노란 콩을 심으면 노란 콩이 나온다. 노란 콩을 심은 데서 파란콩이 나올수는 없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르 낳는다. 불교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업과 삶을 이해하고 싶으면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좋은 일을 하면 행복해 지고, 나쁜일을 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까? 탄식한다. 하지만 인과법칙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떤 마음의 습관을 계속 만들어온 다음, 그것을 바꾸려 하거나 원인을 제가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온 것이다. 이생에서뿐 아니라 수많은 전생에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를 경험해왔다. 습관이 수없는 다시 태어남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움직일 수 없기 대문에 이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아주 많이 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아주 좋다. 그런데 어떤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공한 사람들은 전생에 이미 노력을 많아 해서 그 습관이 이생의 조건과 만나 별다른 노력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전생의 행동과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동시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되는 사람들은 전생에 만들어놓은 나쁜 업들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해도 전생에 쌓아놓은 업이 장애로 작용해서 이생에서 무르익어 노력이 열매맺기 힘들기 때문이다. 착한 마음을 가져라. 그것이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만약 사는게 힘들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내 잘못이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아니면 전생에서 이런 고통이 나올 원인이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인을 버릴 수 있으니 행복해 진다. 열심히 수행해서 중심이 흔들리지않으면 어떤것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업은 이미 전생의 생각과 행동, 즉 오랜 시간이 만들어온 마음의 습관에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생에서 순간순간 이 습관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으로서 참선 수행을 열심히하면 원인이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결과도 변하는 것이다.
사는 게 힘들면 사람들은 외부조건만 탓한다. "저 사람이 나빠 지금 상황은 나에게 좋지않아. 그가 나에게 잘못하기 때문에 내가 힘든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을 부모 탓, 배우자 탓 혹은 사회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수많은 생을 통해 만들어온 내 안의 생각과 사고에 있고,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열심히 수행해서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근본 원인이 제거돼 아무리 나쁜 조건을 만나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는 법이다.

연기 . 緣起 . Dependent Origination
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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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연기

연기 . 緣起 . Dependent Origination

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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