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31, 2012

마음에서 마음으로

지혜의 향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원익 불사모 회장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지 1,600년이 넘다보니 알게 모르게 불교스런 것들이 한국 문화에 많이 스며들었다.
우리가 쓰는 한국말에도 그런 것들이 많은데 일례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다느니 하는 표현도 실은 선불교에서 내세우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풀어서 한 말이다.

한 때 이 사자성어를 비틀어서 '누구 마음이 바로 누구 마음이다' 며 빈정거리는 우스개도 유행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누구하고 무슨 텔레파시가 통했다느니 하는 말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뭐든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할 수가 있고 그것도 정확히 무한정 전달이 된다면 많은 것들이 절약 될 것이다. 구태여 말을 안 해도 되니 소리로 들을 일도 글로 옮겨 쓸 일도 없어서 책이나 음향기기,
영상물 전송도 일체 필요 없어진다. 전화나 문자 메세지를 안 해도 된다. 꿈같은 얘기만은 아니다.

그런데 꽃이피면 꽃바람이 부는 건가, 옛날 중국에서도 선불교가 꽃필 때 기존의 세력들은 이 새로운 사조를 못 마땅해 하며 흔들어 댔다. 경전에 어디 그런 가르침이 있는냐면서 확실한 전거를 대라고 다그쳤다.

이에 선불교에서 대꾸하길 그런 것은 글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따로 전해져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에 있는 그런 가르침들의 바깥에서 별도의 통로로 은밀히 전해져 왔다 [敎外別傳] 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은밀히 전해져 왔다는 말인가 ? 이에 그들은 깨달음의 족보를 내밀었다.
부처님의 맏제자 마하가섭을 1조로 삼고 중국에 선불교를 전한 28조 달마대사에까지 이어진 선맥이었다.

부처님 바로 밑자리에서 부터 전해져 왔다니 할 말이 궁해진다. 그래, 그렇다면 그대들은 도대체 어떤방식으로 그 가르침을 전하고 깨달음을 전하는가? 민심을 어지럽히는 사술이 아니라면 납득할 만한 방법을 보여다오.

좋으신말씀! 우린 우선 문자를 내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
먹물도 필요없고 (야호! 본토박이에게도 턱없이 어려운 그 한문, 안 배워도 된단다!) 가방끈도 따지지 않는다. 이력서 도 얼굴도 보지 않으며 법랍도 문중도, 누구의 추천서도 챙기지 않는다. 기여입학제 같은 거 물론 없다.

이렇듯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도 인종도 가리지 않으니 1,000년도 훌쩍 넘은 세계화요 학력파괴며 평준화다. 이런 혁명적이고 반체제적인 집단이 어떻게 살아남아 종교계의 주류로 꽃필 수 있었을까? 문화대국의 저력이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깨치려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무슨 수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르침을 전하며 미혹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끈단 말인가? 그냥 가만히 눈 감고 있으면 된다는 말인가 ?

그렇진 않다. 고요히 관조하는 묵조선과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법이 주를 이루지만 어쨋든 구질구질하고 어지러운 설명과 논리전개가 아니라 삶의 마음을 바로찍어 가르킨다.[直指人心].

보시오, 저 깃발이 흔들리고 있지 않소? 아니오, 깃발을 스치는 바람이 흔들릴 뿐이요. 둘 다 틀렸다 ! 저 깃발을 바라보는 그대들 마음이 지금 흔들리고 있느니라.

Monday, July 30, 2012

실중삼관

실중삼관• 室中三關 (高峰禪師)
Zen Master Ko Bong's Three Gates

杲日當空 無所不照 因甚被片雲遮却
밝은해가 허공에 높이 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찌하여 조각구름 하나가 해를 가리는가 ?
The sun in the sky shinees everywhere, Why does a cloud dbscure it ?

人人有箇影子 寸步不離 因甚踏不着
사람마다 모두 그림자가 있어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그것을 밟지 않을 수 있는가 ?
Everyone has a shdow following them. How can you not step on your shadow?

晝大地是箇火坑 得向三昧 不被燒却
온 세계가 불구덩이다. 어떤 삼매를 얻어야 타지않겠는가 ?
The whole universe is on fire.
Through what kind od samadhi can you escape being burned?

오래전 고봉[高峰]선사 문하에 들어가면 누구나 세 개의 관문을 거쳐야 했다.
첫 번째 관문은 '밝은 해가 허공에 높이 떠 비추지 않는곳이 없는데, 어찌하여 조각구름 하나가 해를 가리는가?' 이다.

왜 조각구름이 태양을 가리는가. 조각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그림자가 나타난다. 다시말하면 청정본연의 혜일[慧日]이 번뇌의 구름에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를 생각으로 풀려고하면 결코 답을 얻지 못한다. 완벽히 생각을 끊으면 답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눈 두개, 콧구멍 두개, 귀 두개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입은 하나만 가지고 있다. 눈, 귀, 콧구멍은 두 개씩인데 한가지 일만 한다. 그러나 입은 하나이면서 네 가지 일이나 한다. 말도하고 맛도보고 숨도쉬고 먹기도 한다. 입은 바쁘다. 그러나 입이 하나인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바로 고통과 업이 입에서 오기 때문이다. 험담을 하고 맛난 음식을 좇고 때때로 욕심을 내서 과식을 하면 탈을 만들기도 한다. 너무 많은 욕심을 갖는다. 과식을 해서 종종 병이 나기도 한다. 입이 두개였다면 문제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하느님과 부처님이 인간에게 단지 한개의 입만을 주신것은 얼마나 다행인가.(하하하)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것이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태양이 하늘에 떠 있다. 구름이 그 앞에 나타나고 지나간다. 그러나 왜? 그것이 바로 이 공안이 묻는 것이다. 그것이 본성이다. 우리는 눈 두개, 콧구멍 두 개, 그리고 단지 하나의 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본성이다. 과연 당신은 이 본성을 알겠는가?

다음관문은 사람마다 모두 그림자가있어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밟지 않을 수 있는가?'이다. 어떻게 해결해갈 수 있는가 하는물음이다. 선은 어떤 것도 점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면 우리는 언제나 문제를 만들어낸다. 당신이 이 관문에 어떤 적절한 대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은 진리로부터 1천마일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관문은 '온 세계가 모두 불구덩이다. 어떤 삼매를 얻어야 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즉,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어떻게 헤어나올 수 있겠는가이다.

결국 이 전 우주는 불이다. 어떤 삼매를 통해 이 불타는 우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삼매는 아주 깊은 명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명상과 삼매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온 우주가 불에 타고 있는데 어떤 종류의 명상 수행이 당신을 살아 있게 할 것인가.

여기 열쇠가 하나있다. 신은 뭔가를 하고 있을때 단지 그것을 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배고풀 때 먹을 뿐이다. 피곤하면 잘 뿐이다. 목마르면 마실 뿐이다. 아주 명쾌하다.

Sunday, July 29, 2012

본래얼굴

본래얼굴 Original Face

山堂靜夜坐無言 고요한 밤 말없이 절집에 앉아 있으니,
Sitting in silence in a mountain temple in the quiet night,

寂寂寥寥本自然 한없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본래 성품 그대로이다.
Extreme quiet and stillness are our original nature.

何事西風動林野 무슨일로 서풍에 숲이 움직이는가 ?
Why then does the western wind shake the forest ?

一聲寒雁唳長天 겨울 하늘 기러기 소리 장천을 울린다.
A single cry of cold-weather geese fills the sky.

이것은 전향적인 선시의 아주좋은 예이다. 진정한 선시는 장식적인 스타일의 시가 아니다. 예술적인 어떤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선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표현하는 말과 단어를 사용하며, 오직 가르침에 사용될 뿐이다.

사람이 날때 나서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을 때 죽어 삶을 욕되게 하지않기도 어렵다. 삶과 죽음의 가림길에 서 있는 인생이 만일 이것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어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선사는 절에 살면서 밤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절 집은 고요한데, 오가는 손님하나 없는 절에 고요히 앉아 있는 스님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적적하겠는가? 그 적요는 만들어서 지어진 寂寥가 아니라 본래의 자연 그대로 였다. 누구나 본래의 순수한 마음은 파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람이 왜 불어 정적을 뒤흔드는가? 어디서 바람이 오는가? 왜 나타나는가?
대아를 얻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와 같이 맑다.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하늘을 나는 새소리, 날개치는 소리, 기러기가 구구구 우는 소리, 그것이 본성이다. 단지 듣는 것. 보는 것이 불성이다. 진리이다. 만물이 완벽하다.

이것이 선시가 언제나 가르치는 것이다. 수많은 문장들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나 같다. 첫 문장은 어떤 반대의 관점이나 생각을 표현한다. 다음문장은 큰 의문을 준다. 혹은 때때로 어떤 정적의 지점을 표현한다. 세 번째 문장은 신비의 관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진리는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있는 그대로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한다.

어느 것이 생사를 벗어난 것인가

어느 것이 생사를 벗어난 것인가 如何是 能死能活 之 一句麽
Which of the Following Four Sentences is Freedom from Life and Death?

海底泥牛 啣月走 바다 속 진흙 소가 달을 물고 가고
Under the sea, the mud cow eats the moon.
岩前石虎抱兒眠 바위 옆 돌 호랑이가 애기를 안고 잔다.
In front of the cliff, the stone tiger sleeps, holding a baby in his arms.

鐵蛇鑽入金剛眼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데,
The steel snake drills into the eys of a diamond.
崐崙騎象 鷺鷺牽 코낄리 등에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간다.
Mount Kun-Lun rides on the back of an elelphant pulled by a littles bird.

도솔 스님은 다시 앞서 적은 네 구를 놓고 여기서 어떤 글귀가 산 것인고 어떤 글귀가 죽은 것이지 가려내라고 하였다.

중국에는 주로 산에 살면서 어떤 특별한 수행을 통해 특별한 에너지를 얻는 많은 도교와 유교 선사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을 날고 호랑이로 변할 수도 있다. 연기도 만들 수 있다. 소위 마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주 에너지와 당신의 에너지가 하나가 된다. 소위 말하는 기(氣)라는 것이다.

매일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공기를 마신다. 당신의 에너지를 호흡에 집중하면(공기) 우주 에너지와 하나가 되고(啣氣) 당신은 대기, 즉 큰 에너지를 얻는다. 이 에너지만 있으면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몸을 바꿀 수도 있고 날아다닐 수고 있다. 기적과 신비를 행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나, 나의, 나를(I, MY, ME)' 이라는 이 '나'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나'라는 것을 가지고 수행하면 큰 에너지, 우주에너지, 장신 자신의 에너지가 하나가 될 수 없다. 신비와 완벽히 자유로운 나의 영역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앞의 네 문장은 모두 그영역에 관한 것으로, 젠 서클의 270도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각 문장은 당신이 실제로 이 절대 존재의 영역을 깨닫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함啣의를 가지고 있다. '바다 속, 진흙 소가 달을 몰고 간다.'

아주 이상한 말이다. 어떻게 진흙 소가 달을 몰고 간다는 말인가. 아이들 만화에는 동물이 얘기하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아이들은 이런 만화를 보고 좋아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 마음은 고정되어서 정해진 이름과 모양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270도의 영역에서는 이름과 모양에 자유롭다. 그것이 자유의 생각이다.

'바위 옆 돌 호랑이가 얘기를 안고 잔다.'
돌 호랑이가 얘기를 안고 잔다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다.'
다이야몬드는 철보다 강하다. 이것은 말이 되는가.
'코끼리 등에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 간다.'

곤륜산은 중국에서 가장 큰 산이다. 이 거대한 산이 코끼리 등을 타고있다. 또 백로가 끌고 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열심히 참선수행을 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Saturday, July 28, 2012

도솔삼관

도솔삼관• 兜率三關 Zen Master To Sol's Three Gates

撥草叅玄 只圖見性 번뇌의 풀을 헤치고 도의 깊은 뜻을 참구하여 단지 자성을 보라.
Cutting ignorance grass ans sitting Zen is wishing tosee true nature.
卽今上人 性在甚處 지금 그대의 본성품은 어디에 있는가?
The where is your true nature now?
識得自性 方脫生死 자성을 알았다면 생사를 벗어나야 할 텐데,
You already understand your true nature and pass beyond life and death.

眼光落地 作麽生脫 죽을 때 어떻게 태어날까?
When you die, how theen will you be reborn?
脫得生死 便知去處 생사를 벗어났다면 갈 곳을 알 것인데,
You already have freedom from life and death, and also inderatand where you return to.
四大分離 向甚麽去 지수화풍 4대가 분리되면 어느 곳을 향해 갈 것인가?
When the four elelments didperse, where do you go?

도솔삼관이란 1천여 년 전 중국의 선사이셨던 도솔 스님이 내놓은 세 가지 화두 이다.

위에 적은 첫 본째 관문인 '번뇌의 풀을 헤치고 도의 깊은 뜻을 참구하여 단지 자성을 보라. 지금 그대의 본성품은 어느 곳에 있는가? 라는 말은 '당신의 본바탕은 어디에 있소?
라는 질문이다. 도의 깊은 뜻을 참구한다는 것은 진여한, 맑고 깨끗한 마음의 궁전으로 들어가는것, 즉 참선하는 것을 말한다. 참선하는 것은 견성, 우리 본래의 마음 바탕을 보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은 '자성을 알았다면 생사를 벗어나야 할 텐데, 눈빛이 떨어질 때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생사탈출의 방법을 묻는 것이다. 자성이란 자기 불성이란 말이다. 자기 불성을 알고나면 바야흐로 생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니, 생사 따위에 걸리지 않게 될 때, 눈빛이 없어졌을 때, 즉 사람이 죽을 때 그때 어떻게 해탈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집에 도착하면 당신은 차에서 내린다. 다음날 이침 다시 타고 사무실까지 간다. 일을 마치고 다시 집에 들어간다. 또 다음날 아침 다시 차를끌고 사무실로 간다. 여기저기 앞으로 뒤로 오고간다.
그러다 어느 날 교통사교가 났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았지만 차가 박살났다. 그러나 사고 전에 미리 보험에 들어놓았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제 새 차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자동차란 것은 우리의 몸에 비유할 수 있다. 미국산, 러시아산 일 수도 있고 다음 번에 타게될 차는 한국산, 중국산, 독일산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것은 차의 기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차가 어떤 종류인지는 그다음 문제이다. 차가 부서지고 없어지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사가 누구인가. 그것을 아는가. 그것을 똑바로 이해할 때에만 비로소 우주와 당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관문인 '생사를 벗어났다면 갈 곳을 알 것인데, 4대가 분리되면 어느 곳을 향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갈 곳을 묻는 것이다. 생사를 벗어나 완전히 죽었다면, 깨달은 것이므로 어디로 가는지도 알 것 아닌가. 그러면 '지수화풍 4대로 되여있던 이 몸이 다시 지수화풍으로 각각 흩어져 사라질 때 어디로 가는 것이오?' 하는 것이다.

모두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이 도솔삼관은 무문관 48칙 가운데 47칙으로 널리쓰이고 있는 화두이자 문답이다.

죽을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몸은 삶과 죽음을 갖지만 본성에는 삶과 죽음, 가고 옴이 없다. 우리 몸은 네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땅, 공기, 불, 물이다. 몸이 죽을 때 이 네가지 요소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면 당신의 주인(몸을 통제하고 있는것)은 어디로 가는가.

기억하라 가고오는 것도, 머무르는 것도 없다. 우주적 실체와 우리의 실체가 하나가 된다. 말과 단어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다. 오직 보여주는 것만이 표현할 수 있다. 이 점을 깨달으면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적어도 하루에 10분씩이라도 매일 참선 수행을 해야한다.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나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모르겠다." " 어떻게 내가 다시 태어날까------ 모르겠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데 네가지 요소가 사라지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르겠다. 이것에 맑게 대답한다면 당신은 도솔 선사의 세 가지 관문 중 마지막 문을 통해 무애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Thursday, July 26, 2012

어느 곳으로 가는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어느 곳으로 가는가• 去甚麽 Where are you going?

古佛也 伊麽去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ancient buddhas went like this.
今佛也 伊麽去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가고 Present buddhas go like this.
汝亦是 伊麽去 당신도 이렇게 가고 You go like this.

我亦是 伊麽去 나 또한 이렇게 갈것이니 I also go like this.
何物不敢壞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가? Wha is the thing that is not broken?
是誰長堅固 누가 길이 견고할 자인가? Who is it that is eternally indestructible?

諸人還知麽 그대들은 아는가? Do you understand?
( 打 住杖 云) 스님은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했다. (The Zen stick held overhead, and hit on the ground.)
輿三世諸佛 一時成道 과거, 현재, 미래 삼세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성불하고
In the three worlds, all buddhas of pst, present, and future simultaneously attain enlightenment.

共十類群生 同日涅槃 10류 군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들었다. On the ten levels, all beings on the same day into nirvana.
其或未然 着目下句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음 글에 주목하라. If you don't understand this, check the following.
有眼石人 齊下淚 "눈 가진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The statue has eyes and tears silently drip down.

無言童子 暗噓噓 말 없는 동자는 어둠 속에서 코만 훌쩍거린다.

여러분과 나는 겉모양은 다르지만 실제는 똑같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 실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해 얘기했다. "탕!" 그것이 나의실체이고, 당신의 실체이고, 모둔것의 실체이다. "탕!" 보살의 실체이고 , 동물위 실체이며, 차의 실체, 바위의 실체, 물의 실체이다. 그것은 또한 신의 실체이며, 악마의 실체이다. "탕!"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가?'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한다. 만물은 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변하고 변한다. 하늘, 땅, 나무, 산, 강, 인간, 동물, 차, 모두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나타나고 사라진다. 어떤 것들은 아주 빨리, 어떤 것들은 아주 오랜 억겁의 시간이 걸릴 뿐이다. 하루만 살다가 죽는 곤충들도 있으며. 수천 년 동안 지각 변동을하며 모양을 바꾸는 대륙도 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잠시동안 머물고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 그것들모두는 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조차 종국에는 사라질 것이고 태양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법이 나타난다. 법이 나타나면 이름, 모양, 가고 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것이 나타난다. 하지만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사라진다. 법이 사라지면 이름과 모양, 가고 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탕!"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고 깨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의 실체이며 만물의 실체이다. 그것을 찾고 깨달을 때 참 자유를 얻는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일시에 생불한다."
만물이 동시에 부처가된다. "탕!" 실제로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단지 생각에서 온다. 과거가 어디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 보관해놓고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과거는 단지 꿈이다.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 미래가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거에 일어났던일,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분노하고 걱정하고 행복해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생각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현재만큼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있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라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엄밀히 따져보면 이미 지난 시간이다.

과거란 말이다. 현재는 없다. 우리 생각이 현재를 만들고 과거와 미래를 만들 뿐이다.
생각을 하면 시간과 공간이 생기고 시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이 시간이란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단지 생각에서 나온다. 시간은 우리 지신의 생각하는 마음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이 순간만 갖는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일어난다. 이 순간은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말하는 또 다른 길이다.

"삼세 부처님들이 일시에 성불한다." 는 말은 그대가 성불하면 삼세제불이 언제나 성불속에 살고 있는것을 볼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이미 시간 이전에 그들은 성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것이 순간의 마음이다. "탕!"순간에 과거 , 현재, 미래가 있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뒤집어 말하면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 있다는 얘기이다. 순간에 모든것이 있다. 민약 당신이 이 순간을 깨달으면 당신은 모든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순간이고 순간이 당신이다.
앞서 소개한 시의 다음문장을 보자. 아주 재미있다.

"10류 군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들었다."
10류 군생이란 부처에서부터 보살, 아라한, 성문, 천국, 아수라, 인간, 동물, 아귀, 지옥이다.
10류 군생은 모든 사람의 마음안에 다 있다. 보살부터 지옥까지 다 우리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신은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동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길을 걸어보라. 그러면서 지나치는 얼굴들을 보아라.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얼굴을 갖고 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의식 밑바닥에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망음이 맑으면 쉽게 그것을 알 수 있다. 이건 단지 비유가 아니다. 바깥형태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안의 의식은 동물에의해 지배된다. 아마 그들의 20%는 인간이고 80%는 개나 뱀 혹은 사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강한 '지옥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 경험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ㅇ은 또 '보살 의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얼마나 부처의 마음을 갖지고 있고 지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99%가 '뭔가 원하는 마음' 을 가지고 있고, 단지 1%만이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 부처의 마음, 보살의 마음, 아라한의 마음, 인간의 마음, 동물의 마음, 혹은 지옥의 마음----- 이것이 바로 지금 당신의 삶, 이 순간 당신의 삶을 만들고 다음 생도 만든다. 10류 군생은 우리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맑음 마음을 갖게 된다면 10류 군생의 모든존재가 동시에 열반에 들어간다. 부처, 지옥, 보살, 아귀, 인간, 모든 동물들도 동시에 열반에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전우주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순간의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모양과 이름,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 것이 하나가된다. "탕!"" 아주 단순 명확 하다.

시간과 공간이 완벽히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당신은 지금 이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로 되돌아가얌만 한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은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위해 대지대비심을 쓰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선원[禪圓]을 설명하면서 270도의 영역에대해 얘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앞에 보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염불기도를 하고 있는데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어. 관세음보살님이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하라고 하셨어."
이런 경험은 270도 영역이다. 만약 당신이 관세음보살님을 믿는다면 관세음보살님이 당신앞에 나타날 것이다. '나는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이 필요해. 관세음보살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면서 열심히 절하고 염불을 외면 아마 많은 관세음보살님을 볼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교 신자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예수나 마리아를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주 많다. 예수 상이 피를 흘리고 계셨다느니,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 확인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실제 병을 고쳤다며 자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마리아가 보고 싶어'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강한 신념이 생겨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적을 보고 싶어.' '예수님이 내 병을 고쳐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강열한 의식이 어떤 경험을 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생각의 영역이고 완벽한 자유생각의 영역이다.

"불상이 눔물을 흘린다." 이 문장은 그러한 경험의 영역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것이 아니다. 단지 기술이다. 이런 기술에 집착하면 그것은 업, 의 악마가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순간의 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삶을 바로 만들기 위해 이 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가고 당신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나와 너가 있는 영역은 젠 서클(Zen circle)의 90도로 표현한다. 다음, "영원히 사라지지않는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이 주장자로 책상을 "탕!"치면 이 지점은 모양도, 이름도 없어서 만믈이 실체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것은 젠 서클 180도를 대표 한다.

"삼세 부처님들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다. 10류 군생의 모든 중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든다"는 점을 깨달으면 이름과 모양이 사라진다. 과거, 현재, 미래 불이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은 시간의 영역을 의미한다. 10류 군생의 모든중생은 각기 다른 공간의 영역을 말한다. 0도에서부터 180도에는 사간과 공간이 있다. 하짐만 180도를 넘으면 실제로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된다. 그것이 절대의 세계이다.

그다음이 270도의 세계이다. 신비하고 기적의 영역인 270도의 세계이다. 어떻게 이 순간의 마음을 쓸 것인가. 배고픈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느냐. 마음이 맑다면 순간순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 그 마음을 쓸 일이다. 그것이 큰 사람, 큰 자비이며 대보살행이다. 깨달음의 일이다.
"소년이 어둠 속에서 코를 훌쩍거린다."
우리가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고 듣게되면 우리의 자비심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돕고 싶은 사람과 연결된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를 지나 180도 가 된다. 180도네서는 말도 없고 단어도 없다. 업을 여는 것조차 실수이다. 그러고 난 뒤 우리는 270도로 간다. 어떤종류의 말이 나타난다.

"눈을가진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같은 것 말이다.
수행을 통해 이런경험을 소화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그단계가 바로 360도 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영역이다. 똑같이 0도 이다. 이 점에서 비로소 젠 서클의 모든 각도가 사라지고 원이 사라진다. 원은 단지 하늘이고 아무가 아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눈이 예리한 스승이라면 더 나아가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는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이 점에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없다. 모든것이 완벽히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모든 행동은 단지 다른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대보살행이다.

Monday, July 23, 2012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참 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다.'내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미음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우리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부처님과 위대한 조사들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이런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마음, 마음,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얼만나 큰가? 무슨 색인가? 딱딱한가, 부드러운가? 둥근 것이ㅣ가. 네모난 것인가? 우리는 단지 '마음'이라는 단어만 이해한다. 그러나 철학 책이 수만 권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모른다. 내 팔 안에? 내 위장 안에? 도대체 마음은 어디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머물게 만들고 어디로 가는가? 미음이란 것이 도대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무엇이 마음인가?

이런 질문을 절실하게 한다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오직 모를 뿐' 이다.
한반 테스트 해보자 . '마음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들고 잇는 주장자와 당신의 마음이 다른가, 같은가? "같다"고 말하면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치겠다. 다륻다고 말해도30방을 치겠다. 이 주장자, 이 마음이란 단지 빈 이름일 뿐이다. 이 이름들은 본성이 없다. 당신이 참나를 모르면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름과 모양이라는 이 지엽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머리가 좋은 동물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강이고 저것은 산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란 단지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짜 생각이 아니다.

"하늘은 푸르다"라고 말하지만 결코 하늘 스스로 "나는 푸르다"고 얘기한 적이없다. 나무역시 "나는 초록색이다"고 말한적이 없다. 개, 고양이 역시 '나는 개다. 고양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인간이 이 모든 이름과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것에 집착한다.

예를 들면 개가 짖는것을 한국에서는 '왕왕'. 중국에서는 '워워'. 미국에서는 '우프우프'라고 표현한다. 어느 것이 맛는가? 왕왕도 아니요,워워도 아니요, 우프우프도 아니요, 하우하우도 아니다. 인간들이 각자 다른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개의 모습니다. 어떤 개도 이것들을 말한적이 없다. 사실 개는 결코 자신을 '개'라고 한 적이 없다. 개한테 가서 물어봐라. "너 정말 개냐?" 아마 개는 당신한테 좋은 대답을 줄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도 만들고 '푸르다'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초록색'도 만들고 '개'도 만든다. 우리는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와 아오이데스"라고 한다. 모두 다른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은 진리가 아니다. 실제로 없는, 가짜 생각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만물이 우주처럼 맑은 지점을 의미한다. 미음이 우주처럼 맑으면 우주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분리도, 생각도, 주체도, 객체도 없다. 눈이 천천히 열리고, 귀가 천천히 열리고 ,코가 열리고, 혀가 열리고, 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맑다. 그러면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와 하나가 된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와 하나가 된다. '멍멍' 설탕과 하나가 된다. '달다' 그것을 표현하는 이름이 바로 진리이다. 아주 단순하다. 진리란 무든것이 너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늬 수행은 진실로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옳은 방향, 진리, 바른 삶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본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있다.

그러므로 부처의 모든 영역을 이해하고 싶으면 '무엇이 부처인가?' 하는 큰 의심을 가져 먼저 당신의 마음이 우주처럼 맑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생각도 없고 욕심도 없다. 여기서부터 당신의 마음은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아무런 장애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ㅈ종종 근본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원점(primary point)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자신에게 아주 깊이 "내가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불으면 된다. 모르는 마음을 간직해라. 그러면 우리 생각은 점점 더 맑아진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진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이란 자연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부처, 보살, 악마 조차도 그 점에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하나씩 하나씩 각자가 완벽하다. 하나씩 하나씩 각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좀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실제로 아주 단순 명쾌하다. 만물은 똑같은 우주적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실체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예를 들면 여기 과자 공장이있다. 그곳에는 과자 반죽으로 가득찬 큰 방이 있다. 그러면 과자 제조자들은 이 반죽으로 하나씩 다양한 형태를 만든다. 비행기, 차, 인간, 탱크, 악마, 보살도 만든다. 개, 새, 고양이도 만든다. 과자들은 모두 다른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똑같은 반죽에서 아온 것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다. 전건 비행기 과자이고, 이건 개 과자이다. 다 다르다"라고 하겠지만 그것들을 한 입에 넣어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아, 똑 같은 맛이로구나." 그래서 사의 맛, 하늘의 맛, 부처의 맛, 보살의 맛, 하느님의 맛, 악마의 맛, 너의 맛, 나의 맛이 모두 같다. 이 우주의 모든것이 똑같은 실체이다.
이 시는 똑같은 점을 말하고 있다. 우주, 태양, 별, 달, 나무, 너의마음, 나의 마음, 모든 것이 똑같은 우주적 실체에서 나온다. 모든것의 이름과 모양이 다 다르지만 실체는 똑같다. 태양, 달, 지팡이, 너와 나 모두 같은 실체이다.

"하나씩 하나씩 각자 완벽하다. 하나씩 하나씩 각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一一當當 一一俱足)"
만물은 똑같은 실체이다. 지옥과 천국도 모두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지옥과 천국도 모두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신과 악마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반죽이고 똑같은 맛이고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또 당신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오직 모양과 이름만이 다를 뿐이며, 이 모든 것들은 생각에서 나온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만물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각자각자가 완벽하다. 하나하나 각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 낱낱이 티끌이 서로 통하고 일체 만물이 서로 드러난다." 우리의 실체와 모든 것의 실체는 이미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겐쇼'라고 하며 부처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미 당신은 이 소리(책상 치는소리) 를 명백히 듣는다. 그것은 이미 맑고 명백하다. 그러면 (책상위에 컵을 가리키며) 이 컵의 본질은 무엇인가. 컵을 보아라. 부처의 본질이 아닌 것이 있는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모든것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물이 흐른다. 향냄새가 난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모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것, 맛 보는것, 만지는것, 생각하는것, 이 모든 것이 부처의 본질이다.
한 제자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생각을 멈츨 수가 없읍니다. 어떻게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요? "아주 쉽다."
"아니요, 너무 어려워요. 앉아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없어요."
"좋다 5달러만 있으면 너의 생각을 없앨 수 있다. 극장가서 표를 사라." "무슨 말씀이세요?"
"ET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르 타고 하늘로올라갈때 너는 그때 다른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아니요."

"영화를 보는동안 너는 지나주에 겪었던 일에 대해, 혹은 각종 고민거리에 대해, 또는 은행에 돈이 얼마 있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을 안 한다. 이이들이 하늘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한다. 이 마음은 완벽하게 집착이 없는 생각이다. 집착이 없는 생각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너도 행복하다. 주인공이 죽으면 슬퍼진다. 악당이 주인공과 싸울때면 사람들은 똑같은 마음이 된다. 일어나, 어서일어나 저 나쁜 사람을 때리라고."

단지 보라. 들어라. 냄새 맡아라, 맛보라, 모든 사람들은 영화를 볼때 이런 마음 상태에 있지만 영화관을 떠나자마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여기저기 점검하고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것은 생각에 집착하지않는 것이다. 단지 생각이다. 그림이나 아름다운 음악들은 우리에게 잠깐동안 생각이 없는 똑같은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생각과 욕심을 떨어뜨리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마음 닦을 것도 없이 당신은 이미 완벽하다."

만약 당신이 모든것을 내려놓고 공허한 마음을 유지하면 볼 때, 들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너와 모든 것은 결코 분리 되지 않는다. 만물은 언제나 하나이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이다. 설탕을 맛볼 때 설탕과 하나이다. 소가 '음매'하고 가면 바로 그때 소와 하나이다.

설탕의 단맛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중요한 것은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를만들지않는 것이다. 그러면 결코 다른 어떤 것과도 분리 되지 않는다.
본성을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본성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벽은 하얗다. 마루는 갈색이다. 바깥에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이것이 너의 본성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을 때 만물은 이미 맑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한낱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좋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내 보겠다.

"이미 당신은 분명히 보고 , 분명히 듣고 있다. 그러면 (주장자를 "탕!"치며) 이 소리와 당신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만약 같다고 대답해도 나는 당신을 이 주장자로 때릴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때릴 것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이 깨달음은 이미 우주처럼 맑아서 머떤 말이나 단어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어떤 이분법적인 개념이 없다. 당신 혼자 고스란히 겪는 절대 경험의 영역이다. '똑같다' 혹은 '다르다'고 말하는것은 이미 이분법적인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리서 입을 열어 이 점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미 그것은 큰 실수 이다. 어떤 종류이든 보여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임제 선사는 다만 '할' 하고 소리를 질렀고, 덕산 선사는 때렸고, 그지 선사는 단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자! 다시 묻겠다. 임제 선사의 '할' 덕산 선사의 방망이, 구지 선사의 손가락이 같은 것인가 , 틀린 것인가. 같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을 이주장자로 때리겠다. 다르다고 얘기해도 때리겠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다. 어떤 종류의 보여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오직 이것 뿐이다.(책상을 친다) "탕!"

아주 단순 명쾌한데도 복잡다단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앞서 소개한 시의 마지막 문장은 아주 재미있다. 3 곱하기 3은 9이다. 이 문장은 '할' 혹은 책상을 "탕!" 치는 행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만물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벽은 하얗다. 하늘은 푸르다. 승복은 희색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 완벽한 세계로 돌아온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3 곰하기 3은 9이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특별한것이 아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모든것을 얻는다. 이미 완전하다. 그것이 불성이다.

Sunday, July 22, 2012

미국의 지금은---?

미국의 지금은---?

Estados Unidos de America, a donde?
우리는 지난달 한국의 6.25 전쟁 60주년을 되새겼고, 엊그제는 미국의 독립 236 주년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가지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고 잊어서는 안될 역사적 사건과 교훈이 대대로 전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점차 잊혀가고 있는 점이다.

1776년 7월 4일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시의 체스넛(Chestnut) 거리에 있는 독립기념관 (Independence Hall)에서 13개주 대표 51명이 모여 토마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이 기초한 '독립선언문' (Declaratioon of Independence / Declaracio'n de la Independencia) 에 서명하고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 "Proclama la libertad en la tierra a todos los habitantes" 는 성경 레위기 25장 10절에 새겨진 "자유의 종" (Liberty Bell) 종소리를 높이 울렸다.

미국 독립의 導火線은 "Boston Tea Party"라는 영국에서 들여오는 터무니 없는 비싼 차茶 값을 성토하던 미국인들이 상선에 실려있는 수입차를 불태운 사건에서 시작되였지만 기실其實 독립운동의 원동력은 미국의 가독교 "제 1차 대 각성운동"[大覺醒運動]에서 불 붙어오른 애국심의 발로였다는 사가[史家]들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미국의 200 여년 역사속에서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어 기도했다. 그때마다 백악관 국회에서 조차 온 국민들에게 특별 기도요청을 공표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제2차 대전 때도, 한국전쟁, 월남전쟁 때도 심지어 인공위성을 띄워 놓고도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와 강대상에서 외치는 설교를 들으면서 애국심을 다지고 기도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정과 나라가 위기를 만났을 때, 젊은이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갈때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를 돕는 구제활동을 시작한 곳도 언제나 교회였다. 미국 사람들에게 교회는 생활의 정신적 보금자리였고 사회봉사의 센터가 되었다. 그때만해도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 세워지는것을 반대한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그 당시 대다수의 평범한 미국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교회가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불과 50여년 전, 적어도 1960년 이전 까지의 숨길 수 없는 미국의 모습이었다.
지난 7월 4일,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자유를 쟁취한 독립기념일에 미국의 기독교 현주소를 진단하는 평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 크리스천들의 자유는 과연 얼마나 존중되고있느지 돌아봐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세계 기독교 박해 국가들의 실태를 파악하는 오픈도어 선교회의 칼 뮬러 회장은 "자유는 쉽게 얻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값으로 세워진 나라"라며 "그저 폭죽놀이와 바베큐로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위해 그리고 종교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슴을 바친 이들에게 감사를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패트릭 헨리(Ptrick Henry, 1736~1799)가 "우리들에게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Dame libertad o dame muerte"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어 "이 위대한 국가는 종교주의자들이 아닌 크리스쳔들에 의해 세워졌고, 종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워졌다. 이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도 예배의 자유가 주어지게 된 것" 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기독교 정신을 잃고 오히려 기독교가 박해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우려를 사고있다. 일부공립하교에서는 타종교관련 수업은 정규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성경공부나 기독 클럽은 제한내지 아예 허용하지 않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작년 말 캘리포니아 주 에서는 집애서 진행한 성경공부를 이웃이 신고해 벌금을 물게한 경우도 있었다.
이길소 선교사 VISION INTERNATIONAL UNIVERSITY LAIMA + MISSION 714-726-4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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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ly 17, 2012

보는자가 여래다

보는 자가 여래다• 卽見如來 Just Seeing is Buddha-nature


若人欲識佛境界 만일 그대가 부처를 알려고 하면
If you wnat to understand the realm of Buddhas,


當淨其意如虛空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맑게 해야 한다.
Keep a mind that is clear like space.


遠離妄想反諸趣 모든 생각과 욕망을 놓아버리고
Let all thinking and external desires fall away.


令心所向皆無碍 마음가는 곳에 걸림이 없게 하라.
Let your mind go anywhere with no hindrance.


還當淨其意如虛空麽 자, 그러면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했는가?
Then what is keeping a mind that is clear like space?


其或未然 更聽註脚 此正覺覺性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에 하는 말을 잘 보라. 이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성품이다.

If your mind is not clear, listen to the following, It is enlightenment nature.


上至諸佛 下至六凡 위로는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6도 중생에 이르기 까지

Above is the dwelling place of all Buddhas Below are the six realm of existence.


一一當當 一一 俱足 각각 완전한 존재이며 각자가 일체를 갖고 있다.
One by one, each thing is complete. One by one, each thing has it


塵塵上通 物物上現 낱낱의 티끌이 서로 통하고 일체 사물이 서로 드러나니,
It and dust interpenetrate, It is already apparent in all things.


不得修成 了了明明
마음 닦을 것도 없이 당신은 이미 완벽하다. 분명하고도 분명하다.
So, without cultivation, you are already comlete. Understand, understand, clear, clear.


(拈柱杖云 ) 還見麽 (주장자를 들며 ) 이제 보이는가 ?
(Holding the Zen stick) Do you see?


(打柱杖云) 還聞麽 (주장자를 치며) 이제 들리는가?
Hitting with the Zen stick) Do you hear?


旣了了見 旣丆丆聞 이미 당신은 분명히 보고 분명히 듣고 있다.
Already you see clearly, Already you hear clearly.


畢竟 是個甚麽 同耶 別耶
그러면 이것들이(그대의 마음, 주장자, 이 소리) 같은가, 다른가?
Then what are this stick, this sound, and your mind?
Are they the same? Or different?


同也 打三十棒 같다고 해도 이 주장자로 30방을 때리겠고
If you say same' I will hit you thirty times.


別也 打三十棒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때리겠다.
If you say 'different' I will hit you thirty times.


何以故 喝 三三九 왜인가? 할! 삼삼은 구
Why? Katz! 3x3=9

Saturday, July 14, 2012

인생선

인생길•人生線 The Human Route

空手來 空手去 是人生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이 인생이다
Coming empty-handed, going eempty-handed, that is human.
生從下處來 死向何處去 날 때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When you are born, where do you come from?
When you die, where do you go?
生也一片浮雲起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Life is like a floating cloud that appears.

死也一片浮雲滅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네.
浮雲自體本無實 구름 자체는 본시 실체가 없어
The floating cloud itself originally does not exisit.

生死去來亦如然 삶과 죽음, 오고 감, 이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Life amd death, coming and going, are also like that.
獨有一物常獨露 하지만 언제나 맑게 유지되는 단 하나가 있으니.
But thereis one thing that always remains clear.
愖然不隨於生死 그것은 순수하고 맑으며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
It is pure and clear,not depending on life and death.

愖然這一物麽 자, 그러면 순수하고 맑은 하나는 무엇인가?

참으로 명시다. 이 시는 본성에 대한 것이다. 아주 유명한 성시이다. 이 시에서 노래한 대로 몸은 하늘에 떠다니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같은 것이다. 여기 내 손이 있다. 내 머리가 있다. 내 몸이 있다. 사실 몸은 '나'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몸에 어떤 병이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들 자신이 뭔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몸이 '나'라고 생각한다.
"오, 나는 아프다, 무척 아프다."

이것은 옳지않다. 이 시는 몸이 어떻게 하늘에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타나지도 ,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돈, 권력, 음식, 여자, 술 등 원한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젊은 왕자는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슬펐다. 왜 모든 중생이 나서 늙어 병들어 죽어야 하는지 그는 의문으로 가득찼다.

"인간은 왜 사는가? 왜 죽는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이 무엇인가?"
의문은 점점 커졌다.
"나를 포함한 모든 중생이 괴로움이라는 수레바퀴 속에서 나고 죽고, 나고 죽는다.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왔는가 . 왜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가?"
젊은 왕자에게는 화려한 궁중생활도 즐겁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그는 왕궁을 빠져나와 산으로 간다. 시종에게 아름다운 옷을 벗어주고 당시 높은 지위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도 잘랐다. 그리고 6년 동안 고행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보리수 아래서 동쪽하늘에 떠오르는 별빛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젊은 왕자는 마침내 부처님이 된 것이다. 생과 사로 부터 자유로운 대자유인이 된 것이다. 육체의 몸은 생과 사를 갖지만 본성은 결코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몸은 일정기간 나의 것이지만 '나'는 아니다. 몸이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때때로 몸은 병이나거나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나' 는 결코 아프지 않다. 진정한 '나'는 결코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본성은 몸의 고통에의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다양한 종류의 물이있다. 맑은 물, 더러운 물, 빗물, 온천, 코카콜라. 사이다, 물은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맛도, 모양도 모두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H2O로 같다. 모양, 이름, 맛, 향기는 다르지만 본질은 모두 같은 것이다.

물, 꽃, 색깔, 냄새, 산, 강, 나무, 마음 어떤 종류의 사물이든지 이와 같다. 그 실체는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실체, 우주의 실체, 산의 실체 어느 것의 실체도 마친가지이다. 바깥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않고 움직이지않는 것이 하나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맑고 밝아서 모든 중생을 돕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면서 맑고 순수한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모든것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면 지구가 내일 멸망한다 해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맑고 순수한 무언가 하나는 건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Thursday, July 12, 2012

여여한 경지

여여한 경지• 如如地 The Realm of Truth Like This

春來草自生 Spring comes, grass grows by itself. 봄이 오면 풀은 살아나오고
靑山自不動 The blue mountain does not move. 청산도 움직이지 않으며
自雲自去來 White clouds float back and forth. 하얀 구름도 바람따라 이리저리 흘러간다.

360도의 영역은 진리의 영역이다. 우리는 매 순간 진리의 세계에 살고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생각에 집착해서 지기들만의 사고의 견해를 유지하고 이 세계의 실상(진리)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생각을 끊으면 우주와 하나가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거울처럼 맑아진다. 빨간것이 거울 앞에 나오면 빨간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나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불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고 있는 그대로를 반영한다. 하늘은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나무가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개가 짖는다. 그것 또한 진리이다. 봄은 온다. 풀은 스스로 자란다. 푸른 산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흰 구름은 왔다갔다 흐른다. 그것이 모두 진리이다.


맑은 거울은 진리를 비춘다. 결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본래 거울에는 초록색도, 흰 구름도, 푸른 산도 없다. 공허한 얼굴을 담고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구름이 거울 앞에 나타나면 구름을 반영한다. 구름이 거울 앞에 더 이상 비치지 않으면 그들은 거울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장애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빈 거울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것도 밀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완벽한 자유이다. 거울에 어떤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든것은 진리이다.

우리 마음의 본질도 이와같다. 맑고 공허한 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 세계의 진리를 반영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생각만을 좇아 고통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 세상의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기 때문에 마음은 끊임없이 여기저기로 끌려다닌다.


이른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본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 우리 본성은 완벽한 공허이며,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대이다. 오직 습관적인 생각과 개념적인 생각이 그것의 표면을 가린다. 완벽하게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게된다 구름이 오면 구름과 하나가 된다. "아, 구름이 하얗다." 봄이오고 풀이 자라면 봄과 하나가 된다. "풀이 초록색이다." 산을 볼 때 산과 하나가 된다. "산은 푸르다." 이름하여 진리이다. 진리를 찾으면 이미 바른 길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 the realm of truth like this)이다.



돌이켜 보라• 廻光返照 Looking Within, You Perceive Mind's True Light
喫茶去 Go drink tea. 차나 마셔라.
照親脚下 Watch your step 발 밑을 보라.
禪圓에서는 모든각도가 사라진다. 우리는 단지 원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한 지점을 만들면 0도, 90도, 180도, 270도, 360도가 모두 나타난다.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않으면 각도가 없고 단지 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것이 이미 완벽하다. 이것이 우리 일상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른 길이며 진리이며 바른 삶이다.


간단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뭔가를 특별하게 만들어서 조주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말들로서 조주는 우리가 어떻게 바른 기능을 통해 평상심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기 때문에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승려가 한 번은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스님, 나는 이미 차를 마셨읍니다."
"차를 마셨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그 스님은 말이 막혀서 더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스님, 얼굴이 노랗습니다." 또는 머리를 숙여 반배 하고 "스님 건강하십니까>" 이것은 스승의 말을 붙잡지 않는 것이며, 어떤 종류의 상황이나 가르치는 기술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단전이 강하면 결코 어떤 종류의 법이나 가르침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법을 소화하고 앞에 어떤상황이 닥쳐도 진리를 얻는다.


수행을 계속함으로서 이 진리는 우리 삶을 맑고 자비롭게 할 것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면 물을주고, 배가고프다면 밥을 주어라. 그것이 바른 길 이요. 진리요, 보살행이다. 바로 이것이 조주의 "차나 마셔라'가 의미하는 큰 사랑, 큰 자비, 큰 보살도인 것이다. 무언가를 할 때 순간순간 그냥하라. 그것만이 전부이다.


어느 날 마조 스님이 제자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제자가 마조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조는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자는 "물론 나도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그때 마조가 땅바닥을 가르키며 "발 밑을 보라"고 해서 제자가 내려다보니 독사 한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그는 매우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순간 제자의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은 푸르다'는 마음은 사라졌다. '나무가 초록색이다'라는 것도 소용이 없어졌다. 마조의 '발 밑을 보라'는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해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할 수 없다.


순간순간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맑은 마음을 유지해 무언가를 할 때는 그냥하라. 루른 하늘, 푸른 나무가 진리라는 것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순간 순간 맑은 마음을 유지하지 못할 때 이 이해는 옳게 기능하지 않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순간순간의 마음이 아주 중요하다. 바로 지금의 마음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다. 단지 모든 중생을 돕는 이 순간에 맑게 기능 할 뿐이다. 그것이 큰사랑, 큰 자비, 큰 보살도이다.

Wednesday, July 11, 2012

세 가지 물건

세 가지 물건• 三般物 Three Prajna Things


無陰陽地一片 The ground that is not dark or light 빛과 어둠이 없는 땅
無根樹 The tree that has no roots 뿌리 없는 나무
無叫響山谷 The valley that has no echo 메아리 없는 계곡


부처님이 살아 계실 당시 아주 사이 좋은 일곱 여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요즘처럼 관음회니, 지장회니 하는 회를 만들어 절에도 같이 다니고 염불과 수행도 함께했다.어느 날 그들의 친척 중 한 사람이 죽어 큰 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장에 가보니 근처에 아주 깨끗한 뼈가 한 무더기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살아 있을 때 이 뼈들은 살과 피로 덮이고 좋은 옷으로 치장 됐을텐데, 남은 것은 결국 먼지위에 썩어가는 저 하얀 뼈들 뿐이로구나. 이 몸의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그들 중 한 명이 뼈 무더기의 해골을 지적하면서 "여기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명이 하늘을 가르키면서 "저리로 갔다"고 했다.
이 말에 일곱 명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하늘로부터 신비한 빛이 쏟아지더니 꽃비가 내렸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일곱 명의 여자는 그대로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하늘나라에 살고있던 인드라라는 왕이 이렇게 물었다.
"훌륭하구나. 내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어느 것이든지 말만하면 다 들어주겠다.

그러자 한 여자가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빛이나 어둠이 업는 땅[無陰陽地一片]을 원합니다.
둘째, 뿌리 없는 나무[無根樹]를 원합니다.
세째, 메아리 없는 계곡[無叫響山谷]을 원합니다."
왕은 뜻밖의 대답에 당혹스러웠다.

"모든 땅은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모든 나무는 뿌리를 갖고 있다. 모든 계곡은 메아리를 갖고 있다. 어떻게 빛과 어둠이 없는 땅 , 뿌리 없는 나무, 메아리 없는 계곡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세가지를 찾기위해 왕은 3천 대천세계를 바쁘게 돌아다녔은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부처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했다.

"문수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은 모두 이것들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낮은 수준의 보살이어서 찾을 수 없다. 수행을 좀더 열심히 하면 곧 이 세 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다."
인드라 왕은 깊이 절했다.

이 세 가지 지혜는 신비하고 '자유로운 나'의 영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우리는 앞서 원에서 270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돌로만든 개가 매일 짖는다. 누가 이를 이해 하겠는가?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나무 닭이 동쪽에서부터 와서 서쪽으로 향 하면서 하늘을 난다."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고 싶으면 먼저 세 가지 지혜 뒤에 있는 경험을 깨달아야만 한다.

세 가지 지혜는 180도와 270도 사이의 영적인 깨달음의 영역이다. 완벽한 空에서 부터 신비하고 자유로운 생각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가르치는 말일 뿐이다. 이 말에 집착하면 그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 본성을 지적해서 그것을 찾아내도록 도와줄 뿐이다.

우리 본성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높고 낮은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 이것도 저것도 없다. 그래서 이름도 모양도 없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말항 수 없다. 민약 무언가 말하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 말이 아니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설명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 가지 지혜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누군가 증권시장에 가서 돈을 내고 주식의 일부를 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친구가 주식 매매인들의 혼잡스런 한가운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서 있다.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매우 시끄럽다. 거래가 성사되년서 이 두 친구는 매매에 관해 의사소통할 필요를 느낀다. 그들은 주식을 사기에 혹은 팔기에 언젠가 좋은지 서로 충고할 필요가 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다 알기 때문에 아주 비밀리에 해야만 한다.

아무도 그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 손을 들거나 혹은 신문을 말아쥔다. 주먹을 만든 뒤 손가락 세 개를 집어들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의 의미를 이해 하지 못한다.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 이해한다. '팔기 전에 우선 기다려 , 가격을 금방 변할 거야.'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연결되었다고 얘기한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북한이 남한으로 간첩들을 내려보낼 때 그들은 남한에서 활동중인 공작원들과 접선을 원한다. 당연히 비밀스럽게 해야만 한다. 북한에서는 사전에 지령을 내린다.

'서울에가면 남대문이란 곳이 있는데 그 앞에 서 있어라. 정확히 오후 1시에 담배를 꺼내라. 피우지는 말고 불만 붙여라. 그리고 땅에 버린 뒤 구둣발로 세 번 밟아 꺼라. 그러고 난 뒤 기다려라. 그러면 누군가 나타나서 너에게 말을 것 것이다. 만약 그가 '하늘'과 '하나'라는 글이 써있는 명함을 건네면 그는 우리편이다."
간첩은 비밀리에 남한에 파견된다. 그는 그가 만날 사람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접선이 이뤄지면 두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연결된다. 남들은 전혀 이 비밀스런 몸짓과 언어를 알아 차리지 못하지만 말이다.

본성을 깨달으면 '빛과 어둠이 없는 땅' . '뿌리가 없는 나무'. '메아리 없는 계곡' 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지혜가 가르치는 핵심 사항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본성의 비밀단어라고 부른다. 본성울 깨달으면 세 가지 지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얻게 될 것이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Tuesday, July 10, 2012

어떤 것이 불성인가

어떤 것이 불성인가• 如何是佛性 What is Buddha-nature?


佛設一切皆有佛性 Buddha said that all things have Buddha-nature .부처는 모든 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趙州狗子無佛性 Joju said that the dog does not have Buddha-nature. 조주선사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다.

如何是是耶 Which one is wrong? 어느것이 그른가?

萬法歸一 The ten thousand Dharmas return to the One.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一歸何處? When does the One return?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禪이란 말이나 단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면 본성을 이해할 수 없고, 불성도 얻을 수 없다. 어떤것도 얻을 수 없다.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없다' '있다' 는 생각에서 나온 언어이다. 절대가 아닌 모두 상대적이고 분별적이고 개념적인 생각들이다. 부처는 모든것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그 세대에 살았던 승려들은 경전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단어에 집착해 있어서 부처가 가르키는 즉각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을 놓쳤다. 깨달음과 불성에 대해 단지 토론만 했고, 중생이 과연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논쟁만 했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개에게도 불성이 있겠구나. 그러면 개도 부처가 될 수 있나?'

스님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오로지 경전만 읽고 수행은 하지 않아서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개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개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주 어려운 문제로구나.'

그리하여 결국 조주 선사에게 묻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 날 사람들은 위대한 스승들이 말과 단어에 집착하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禪病을 가지고 있다. 조주의 말에서 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도 그것이다. '無란 무엇인가?'

'이 無라는 것이 나와 같은가, 다른가?'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일본 선방에서 많은 학생들은 하루종일 '無'를 찾는다. '무우우우------' 하고 생각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나는 無가 돼야 해.'

'나는 사라져야 해.' 그런 종류의 수행은 뭔가를 만드는 수행이다.

'無'를 만드는 것이다. 조주 선사가 처방한 좋은 약을 써서 나쁜 병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조주의 '無' 자 공안에 대해 여쭈었다.

"스승님, 조주 선사가 말씀하신 '無'의 의미를 알고 싶은데요."

"아주 쉽다. 선원 뒤 정원에 서 있어 봐라. 거기에 아주 많은 무가 있다."

만공이 얘기한 무란 먹는 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아주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다. 만공은 이 사람에게 無라는 것이 뭐 특별한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無'안에서 어떤 깊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는 것이다. 따지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조주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라.

"왜 無인가? 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결코 무를 이해하지 못하며, 본성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여전히 무를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시장에가서 무를 보아라. 많은 무들이 너를 가르칠 것이다. 그것들이 선사들의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다.(하하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그렂자 조주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가사를 하나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나 나갔다."

아니,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왜 조주 선사는 그런 대답을 했는가.

만약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할'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마룻바닥을 "탕!" 하고 쳤다면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이다'. 혹은 책상 위 연필을 들고 '이것은 연필이다.'라고 말해도 그 역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조주 선사는 전혀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왜 그랬을까. 조주 선사는 제자가 어떤 특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여기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야. 그런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나. 여기에 감춰진 의미가 뭐지?' 제자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제자의 이 생각하는 마음을 뚝 자르는 큰 의심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일곱근이나 나가는 옷이란 있을 수가 없다.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주 선사의 말은 무자 공안과 마찬가지로 질문한 이에게 큰 의심을 던져주고 있다.

'도대체 스승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고 의심해보는 이것이야말로 조주선사가 지니고 있는 가르침의 기술이다. 그는 제자들의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말과 단어라는 칼을 사용한다. 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편 조주 선사는 말에만 집착하여 답이 틀렸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면 선사가 이미 당신을 몽둥이로 30방 때렸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불성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할 수 도 있다.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곱근의 가사라고 말할 수 도 있다. 이 모든 형태의 대답들은 불성을 지적하는데 좋고 나쁘고가 없다. 이 밖에 얼마든지 다른 대답들이 나올 수 있다.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 중 한사람인 유마 거사의 관련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 거시는 부처님 생전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사람이다. 한번은 그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부처님 귀에 들렸다. 많은 승려와 보살들이 유마거사의 집에 모였다. 서로 문안인사가 오간 뒤 자연스럽게 법거량이 벌어졌다. 누군가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이 아닌 것[不二中道]이 무엇입니까?"

서로들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느라 애쎴다.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고고 가는것이 다른게 아닙니다."

위대한 문수 보살도 입을 열었다.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아주 훌륭한 생각"이라며 감탄했다. 마침내 사람들이 유마 거사에게 물었다.

"신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유마 거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정답이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깊은 대답이었다. 입을 열면 이미 두 개를 만드는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면 입을 열지 말아라.

말과 단어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입을 닫으면 나와 우주는 하나가 된다. 둘이 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라, 그러면 내가 神임을 알게 된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라고 말한다. 불성도 이와 같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불성을 알고 싶으면 먼저 하나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기억하라.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첫번째 코스이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임제 선사는 누가 질문만 하면 '할' 하고 소리를 질렀다. 덕산 선사는 방망이로 때렸다. 구지 선사는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입을 열면 이미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말과 단어는 거기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어떤 행동만이 가능하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Monday, July 9, 2012

선원 2

선원 2

묘향산에 가면 보현사[普賢寺]라는 절이있다. 보현사에서 인호대[引虎臺]를 거쳐 싱원사까지 가는 길에 이름난 폭포수가 있다. 규모와 아름다움이 손꼽히는 폭포이다.
서산 대사가 어느 날 제자인 사명 대사와 함께 묘향산의 이 폭포를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폭포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폭포수를 바라본 뒤 발길을 돌렸다.

서산대사는 키가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겼다. 누가 보아도 타입이 단정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사명 대사는 군인 출신으로 몸이 장대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키도크고 어깨도 넓었다. 사명 대사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 삶에 의문을 가져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후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다 서산 대사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두사람은 상원사로 향했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앞서 걷는 스승의 모습이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스승의 얼굴과 몸이 작긴 정말 작구나, 여자처럼 걷고 있잖아, 저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한심해, 아까 본 목포는 장대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내 스승의 모습은 저토록 초라하기 짝이 없다니------. 저런 사람이 과연 나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사명 대사의 귀에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폭포가 거꾸로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물이 땅에서 부터 솟아올라 하늘 끝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너무 놀랐다.
"스승님, 스승님, 저것 좀 보십시요."
사명 대사는 앞서걷는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서산 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스승님, 어떻게 물이 거꾸로 올라갑니까?"
서산 대사가 툭 한마디 던졌다.
"네 마음을 닮았나 보구나."

순간 사명 대사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스승님이 나의 생각을 읽으신 게로구나.'
폭포수를 솟구치게 한 이는 다름아닌 스승인 서산 대사였던 것이다. 사명 대사는 스승에게 참희의 절을 했다.
"스승님, 이 나쁜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그것은 더이상 실수가 아니다.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너의 업도 비워진다.
"예, 만물이 처음으로 제 마음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읍니다. 이제 저의 진정한 길을 찾기시작했읍니다."

사명대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폭포수는 다시 예전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서산 대사는 제자의 마음을 꿰 뚫ㅇ어본 것이다. 제자가 '나'라는 이상[我相]에 가려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과 단어로는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도력을 사용 함으로서 제자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맑은 가르침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는 스승을 밎게되고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바보 같았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닫힌 생각을 열게 하기 위해선는 때로 이처럼 초능력이라는 사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면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스승을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만을 보여준다면 그 스승은 단지 도를 부리는 사람일 뿐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업이 벗겨지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신비와 기적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에 집착하게 되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에 집착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신도없고, 부처도 없고, 인간을 통제하는 어떤것도 없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에 대한 집착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내 옆좌석 남자가 '금연'표지를 보고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넌지시 한마디했다.
"차안에서는 금연입니다. 저기 금연 표지가 안 보입니까?"
그러나 담배를 피워 문 남자는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담배피는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며 계속 피워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뒷자석의 남자가 그의 빰을 갈겼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반격을 가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왜 때리는 거야."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때릴 자유가 있으니까요."
180도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공함에 집착하게 된다. 270도의 영역에 멈추면 '자유'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음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지막 360도의 영역은 만물이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만물은 진리이다. 진리는 바로 이와 같다. 여여[如如, truth like this] 이다. 이 점은 0도의 ㅇ우치와 같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출발 지점이 종착지가 된 것이다. 0도와 360도의 차이점은 0도는 집착하는 생각인 반면 360도는 집착하지 않는 생각, 즉 무애[無碍]인 것이다.

360도의 영역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안과 밖이 하니가 된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가 된다. 나무를 볼때 나무와 하나가 된다. 볼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과 우주가 완벽히 하나가 된다. 이것을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른다. 한 순간에 무한의 시간이 있고 무한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에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이 있다. 이때 행하는 실천이 대보살행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생각에 집착하면서 차를 운전하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어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맑다. 운전할 때는 그냥 운전할 '뿐' 이다. 진리도 이와 같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본능적인 행동이란 욕심이나 집착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빨간것이 나오면 빨간 것을 비추고 흰 것이 나오면 흰 것을 비추는 것이다. 보살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삶이다.

0도는 '작은 나(Small I)'이다. 90도는 '업을 가진 나( Karma I)' 이다. 180도는 '나가 없는 나(Nothing I)'이고 , 270도는 '자유로운 나(Freedom I)'이다. 그리고 360도는 '큰 나(Big I)'이다. '큰 나' 란 시공을 초월 한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단지 모든 중생을 구하고 돕고 싶을 뿐이다. 나와 너는 하니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사람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禪 修行은 바로 이 360도에 도달하는 것이다. 360도에 도달하면 실제로 원도 사라진다. 원이란 단지 선을 가르치는 도구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여기 책과 연필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가, 같은가.
0도 에서는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90도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책은 연필이고 연필은 책이다.

180도에서는 모든 생각이 끊어져 말도 단어도 없다. 따라서 가장좋은 대답은 (책상을 "탕!"치며) "탕!" 바로 이것이다. 270도 에서는 완벽한 자우의 상태이므로, 책이 화나고 연필이 웃는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360도에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의 영역이므로, 안은 밝고 밖은 어둡다. 3 곱하기 3은 9이다.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각 영역에서 대답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답인가? 여러분은 대담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 답을 주겠다. 앞서 말한 다섯개의 답은 다 틀렸다. 왜? (잠시 침묵한 뒤) '할!'
책은 푸르다. 연필은 노란색이다. 만약 이말을 알아듣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안다고 말하면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다. 모른다고 말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왜? (잠시 침묵한 뒤) 오늘 바깥 날씨가 아주 춥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를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실용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360도에서 우리 마음은 우주처럼 맑다. 거울처럼 맑다. 빨간것이 오면 빨간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이 우리의 할 일인가. 나 또한 배가 고프다고 해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목이 마르다고 해야 하는가. 과연 그것이 진정한 대자대비심이러고 할 수 있는가.

禪과 명상 수행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깨달음, 즉 실체와 실상만을 강조한다. 순간순간 진리의 올바른 실천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같이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는 게 돕는 것이다. 목마른 삶에게는 같이 갈증이 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선불교의 가르침도 그와 똑같다.

우리는 올바른 길[實體]을 찾아 진리[實相]를 얻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순간순간 올바른 삶[實用]을 살아야 한다.
'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만물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360도에 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꽃은 붉고 벽은 하얗다. 나와 이 세계가 언제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 오직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된다. 큰 사랑과 큰 자비로 오로지 중생을 돕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이다. 자, 그럼 옛 스님들의 공안을 몇가지 인용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보도록 하자.

이명박 정부의 외교 참사

이명박 정부의 외교참사

중앙시평 박명림 연세대 교수 정치학

일본과 군사정보협정은 일본 역할 키워주고 한국이익 침해한다. MB정부 외교 실패 반복 공동체에 치명적이다.

한•일 점보보호협정을 울러싼 논란이 뜨겁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단계에서의 철저한 비공개 추진은 정부 스스로 내논의 휘발성과 민감성을 알고 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게댜가 협정의 명칭마저 본질을 담고 있는 '군사' 용어를 생갹하여 은폐를 기도 하였다.

의회 동의 여부 역시 해답은 분명하다. 이 협정은 한국의 주권을 침탈한 적이 없는 여느 국가와의 군사협정이 이니다. 한국의 국가 주권을 부인•침탈•병탄했던 국가와의 '군사' 협정 체결 문제가, 헌법 제60조가 규정하고있는 국회의 체결•비준 동의권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실질적 차원에서 금번 협정 체결로 한국이 얻을 실익은 무엇일까? 한 • 일이 미국•중국•유럽에 관한 군사정보를 교류하여 공통이익을 증진시키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북한 문제'에 대한 정보 공유와 교류 정도일 것이다. 실익이 거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문제에 관한한 한국 스스로 갖고 있거나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정보를 넘어, 일본으로부터 얻을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명박 정부 들어 악화된 남북관계가 한•일 군사 밀착을 초래하였다면 더욱 문제다. '양자관계' 차원에선 건국 이래 모든 한국 정부가 분리하여 접근했던 '남북관계'와 '한•일 관계를 연동시킨 최초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통일•평화•안보•주권 문제에 일본을 '직접' 연루시킨다는 것은 어떤 한국정부도 시도하지 않은 금기였다.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한•일 '관계정상화'를 거부하였고 박정희는 한•일 '경제' 협력에 한정하였다. 또 노태우의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 제안 이래 김대중과 노무현은 동북아 협력기구나 6자회담을 통해 한국의 안보•평화•통일 문제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허용하였으나 '다자 기구와 다자틀' 의 범위에서였다. 건국 전후의 '반공' 과 '친일', '빨갱이 타도'와 '친일세력 부활' 사이의 연쇄고리를 연상시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증오와 대일 밀착 연동은, 한ㅂ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하지하책인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국의 역할증대와 대북 압박을 위해서라도 한•일 군사협력은 득책이 될 수 없다. 중국-소련-북한의 사회주의 진영이 현재의 중국-북한 양자 협력체제보다 훨씬강했던 냉전시대에도 없었던 한•미•일 군사협력•동맹체제를 추구한다는 것은 미•중 G2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국가책략이 아닐 수 없다. 한•일 협력과 한•중 협력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균형외교 요소이기 때문이다. 독도, 위안부, 교과서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식민 통치 배상과 같은 인권•역사•영토 문제에서 일본의 태도는 안보협력의 중대한 고려 요인이 된다. 이 문제들에서 극우세력및 군국주의 향수파들이 바로 일본의 군대보유, 해외 팽창을 추구하는 세력이라는 점은 금번 협정 체결시도가 일본의 평화세력과 극우세력 누구를 이롭게 하는지, 한•일 연대와 동북아 평화에 정녕 도움이 되는지를 숙고하게 한다. 이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바른 한•일 연대를 향한 교정 능력을 보여주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미국의 구상 역시 냉정히 촌탁해야 한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을 기축국가로 삼는 동북아 안보질서를 추구해왔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한•미•일 군사협력•군사동맹체제를 거부한 이유는 일본의 대두만큼 악화될 한•미동맹 체제 때문이었다. 냉전시대 한국에 한•미 '동맹'은 단순한 '북한저지'를 넘어 '중국봉쇄' '소련봉쇄'와 '일본 견제'를 위한 다층적 안보협력 구도엿다. 비밀문서들이 보여주듯 한•미 동맹을 촉진•강화시킨 한 요인 역시 미•일 접근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압력으로 인한 일본 '군사' 역할의 증대는 한국인으로서는 과거 악몽의 재현에 가깝다.

한국민들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일반명령 1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독도 문제, 동해표기 문제 등에서 미국이 일본 이익을 위해 한국 이익을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온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한국민들에게 미국이 주도하는 오늘의 '일본대두' '한•일 접근'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적 근거다.

이명박 정부는 다른 정부에서는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외교 참사에 가까운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쇠고기 협상, ARF 의장성명 파동, 남북 정상회담 준비 비밀 접촉공방, 계속 드러나는 자원외교 실패 사례, 그리고 한•일 정보보호협정 서명 보류에 이르기 까지 한국 규모 국가로서는 '외교'라고 하기조차 부끄러운 국제관계를 반복하고 있다. 국가경영에서 외교 실패는 공동체에 치명적인 유산을 남긴다. 대통령을 포함한 담당자들은 잦은 참사 앞에 깊이 숙고하고 거듭 성찰하길 당부드린다. 참사를 막는 최고의 현책은 바로 국민에게 묻는 것이다.

Sunday, July 8, 2012

절차 무시한 한일정보협정추진

절차무시한 한일정보 협정 추진
노재원 시카고지사 편집국장

국민정서 고려하지않은 정부의 밀실처리는 부끄럽고 이해봇할 행동

7세기 중반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한 채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중국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당나라까지 얽혀 이들의 외교 ·군사 경쟁은 더욱 치열했다.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한 신라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렸다. 서기 642년 백제군에 의해 대야성이 함락될 때 성주인 사위와 딸을 잃은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가 백제를 치기위한 군사지원을 요청, 당태종으로부터 이를 약속 받았다.

신라는 백제의 계속된 공격이 두려웠고 당나라는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된 북쪽 강국 고구려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군을 구성해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켰다. 그후 신라는 한반도 지배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왕의 7년간에걸친 힘겨운 싸움에서 승리해 676년 삼국 통일을 마무리 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만주벌판까지 지배했던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리고 평양이남으로 우리영토를 제한 했다는 것이다. 또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시비의 대상이다. 일부에서는 이 때문에 고구려 유민들이 재배층을 형성했던 발해와 통일 신라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 신라의 통일은 이후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단일국가의 시원이 됐다.

21세기 한반도는 신라-발해 이후 1천 여년 만에 다시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다. 해방 직후 외세와 이념·사상의 차이에 의해 분단된 남과 북은 1948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후 경쟁 아닌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의 우열은 이미 명맥하게 가려졌다. 한국은 세계속에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선 반면 불한은 지구촌 유일의 세습왕조라는 전근대성과 폐쇄성을 면치못하고 있다. 여기에다 주민들의 궁핍한 삶도 아랑곳 않는 빗나간 군사력 강화와 인권 유린은 지탄의 대상이다.

한국정부가 지난 26일 국무회의서 비공개 안건으로 상정된 한일 군사전보보호협정(GSOMIA)이 논란이 되고 있다. 핵과 미시일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면서 북한 전보를 공유할 핑요성에 따라 추진했다는 것이다. 대북 억지력을 위한 일본의 전보력과 유사시 주한미군, 주일미군이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일본과의 군사정보 교류는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라 한일 두 나라는 앞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물론 사회 동향등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이 같이 중요한 결정을 여론수렴절차도 없이 비밀리에 진행한 것은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 요청을 한 것보다 더 못 한 일이다. 위안부, 돋도 문제등 일본과의 갈등이 여전한 상태에서 국민 정서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결정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어렵다. 그예날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어쩌면 통일보다는 생존이 더 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서 존립이 우태로웠던 신라로서는 늑대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해도 당나라의 힘을 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이 북한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재개식 군사력은 몰라도 경제력이나 인구, 외교력 어느 하나도 밀리지 않는 한국이 달갑지않은 외세 일본과 손을잡아야 할 만큼 절박한 처지인가. 대통령의 외국 순방중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밀실 처리한 것은 불가피성이나 타당성보다 떳떳하지못하고 부끄러운 행위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산 너머 산'의 나라

'산 너머 산'의 나라
특별기고 피터 M 벡 아시아재단 한국대표

내가 한국에서 가장 사랑하는것 중 하나가 산이다. 마치 한국 여성처럼, 세상에서 높진 않지만 그 아름다움 비교대상이 없다. 그래서 한국어 표현 중 가장 좋아하는 말이 '산 너머 산' 이다.

우선 서울에서 시작해보자. 난 등산 친구들과 종종 어떤 산이 가장 좋은지 논쟁을 벌린다. 하지만 전세계어디에도 서울만큼 갈만한 산이 많은, 축복받은 대도시는 없다는 데 이견이 없다. 북쪽 도봉산에서 남쪽 관악산까지, 어느 동네나 15분 거리 안에 오를 만한 좋은 산이 있다.

난 인왕산 밑에 산다. 나처럼 다리가 '롱다리' 는 우리 집 문에서 성곽을 따라 정상까지 1.5km를 30분 이면 갈 수 있다. 다른 한국 산처럼 거리는 짧지만 가파르기 때문에 아침 운동으로 최고이고, 전망도 좋다. 주말엔 이 코스에 청와대 뒤 북악산을 추가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고 이영희 한양대 교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북한산을 소개해준 분이다. 도시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데, 봉우리가 10여개인 데다가 볼 사찰도 많다. 정상에서 서울을 등지고 서보면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들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등산욕심이 별로없는 사람을 위해선 산책길과 건강공원이 마련돼 있다.

등산은 우정을 다지기 좋은 활동이다. 또 아직은 고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에도 좋다. 지난 주말, 제일 친하고 오래 사귄 친구 두명과 오대산 월정사에서 템풀스테이를 했다. 스님들은 친절했고 음식과 시설은 환상적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른 사찰과 암자를 둘러보고 비로봉에 올랐다.

지난달 출장 중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의 산 두 곳을 오를 시간을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서 사방이 물인 광경을 보는것은 그 어떤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정상까지 7~8km 등반하는 게 싫으면 20여곳의 갈림길이 있는 제주도 둘레길을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높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산들!
전 세계 어디에도 한국만큼 산의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어"

울릉도 성인봉은 높이 984m로 한라산 높이의 반을 약간 넘는다. 그럼에도 아주 인상적이다. 독도까지 5시간 여행을 하면서 느낀 운동부족을 푸는데 제격이었다. 울릉도항에서 독도박물관쪽 길을 따라 오른 후 골짜기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된다. 이쪽에선 유명한 울릉도 쇠고기(약소)와 약초, 집에서 담근 고구만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북한 지도자들이 호전적인 행동을 그만하고 개혁을 받아들여 남북화해가 시작된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산 두곳을 다시 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묘향산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금강산과 백두산은 내가 오른 그 어떤 산과도 달랐다. 밥을 먹고 보라는 속담(금강산도 식후경)을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금강산의 만물상은 정말 독특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형상을 바위틈에서 찾아낼 수 있었고, 이는 인근노상 온천에서 쉬면서 하기에 딱 좋은 일이었다.

외국인 입장에서 백두산은 별로 기대가 크지 안은 산이었다. 하지만 활동을 멈춘 화산의 거대한 호수는 한라산 백록담과 미국 오리건주 크레이터 호수를 합친 것보다 커 보였다. 중국 쪽에서도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 만약 오른다면, 천지 테두리까지 걸어가라고 충고하고 싶다. 내 경우 중국 총알 택시를 타고 가다가 내 인생이 눈앞에서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기사에게 걸어서 사겠다고 말하고 내려 버렸다.

앞으로는 칠보산에 정말로 일곱가지 보물이 있는지도 꼭 보고 싶다. 요즘은 지리산에 오를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20여 년 전 임권택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을 보고 이 산과 사랑에 빠졌다. 한국에 8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올라야할 산이무수히 많다. 이직 명산 순례를 시도해 보지 않은 당신이 산에 오르지 않을 핑게는 무엇인가?

선원

선원· 禪圓 The Zen Circle

원칙 義理 Principles

진공 眞空 진정한 공함 True emptiness Nothing I attachment to emptiness

180 無我 No form, no emptiness 1000X0=0 1X0=0 (나가 없는 나)

90 존재와 비존재 有無[業我] 업을가진 나 Existence and nonexistence Karma I
attachment to thinking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orm 0=1, 1=0

0 속진(작은 나) 俗塵[小我] The common dust(clinging) Smal I
attachment to name and form 1+2=3

360 있는 그대로(큰 나) 如如[大我] The Absolute Big I
nonattachment thingking just like this 3X3=9 Formis form, emptiness is emptiness
절대적 존재 [妙有] 妙我 (자유로운 나)

270 Absolute existence Freedom I attachment to freedom thinking
Freedom form, freedom emptiness 3X3=9 1000X100=1000X9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선생님은 칠판에 큰 원을 하나 그리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회들이 오늘부터 이 원과같은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 둥근 마음은 아무런 장애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너회들은 자유로유로워질 수있다.

좋은 상황이 오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게 될 것이다. 나쁜 상황이 와도 역시 어떻게 사용하게될지 알게될 것이다. 나쁜상황이 와도 엮시 어떻게 사용할 지 알게될 것이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건 주어진 상황을 따르면 된다. 원이라는것은 완벽하게 비어있다. 즉, '나, 나의, 나를, 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와 네가 하나가 된다. 그러면 나를 위한 삶이 곧 다른사람을 위한 삶이 된다."

불교에서 원[圓]은 중요한 가르침의 도구다. 원을 신앙의 상징으로 모시는 곳도있다.
나도 때로 원을 사용해 선 수행을 설명한다. 원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 180도, 270도, 360도를 돈다 360도 지점ㅇ은 처음의 0도와 똑같다. 먼저 0도에서 90도까지 지점은 집착과 생각의 영역이다. 생각은 욕심이고 모든 욕심은 고통을 부른다. 다시말해 모양과 이름에 대한 집착의 영역(smal I)이다. 그러다 보니 분별심을 만든다. 옳고 그름, 이것과 저것, 아름다움과 추함, 좋고 싫음, 나의 것과 너의 것 등등 말이다.

이 몸은 탐 . 진. . 치, 즉 욕심과 분노와 무지를 가지고 있다. '나' 라는 이몸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고통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다. 그리하여 0도에서 90도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며 고통자체가 삶인 영역이다.

90도를 지나면 '나'라는 업의 영역(Karma I)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생각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나'라는 의식이다. 이해하는 것으로 '나'를 알고싶은 상태이다. 각자는 각자의 '나'를 만든다. "나는 교수야." "나는 아버지야." "나는 어머니야." "나는 여자야." "나는 중국인이야, 미국인 이야, 한국인이야." 0도에서 90도까지는 각각 모양과 이름에 대해 집착한다. 그래서 모든것이 다른다. 90도를 지나도 생각에 집착한다. 모든것이 같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당신은 0 이었다. 이제 당신은 하나이다. 언젠가 당신은 죽을 것이고 그때는 다시 0 이 된다. 그러므로 0 은 하나와 똑같고 하나는 0 과 똑같다. 원 위에는 모든것이 같다.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모든사물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이름과 모양이 空해서 결국 空으로 돌아간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그러나 이 영역에서는 이것 역시 지적인 생각이다.

180도의 영역은 생각이 전혀없는 영역(Nothing I)이다. '空' 을 경험하는 상태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나' 가 완전히 사라지는 진정한 공의 영역이다. 모든실체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색도없고 공도 없다.' 어떤 이들은 이 영역을 절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절대는 없다. 이 점은 생각이전의 지점이기 때문에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큰 실수이다.

당신이라면 이 영역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임제 선사는 '할'이라는 소리로 대신했고 덕산선사는 방망이로 내리쳤다. 구지 선사는 다만 손가락 한 개를 들어 모였을 뿐이었다. 이처럼 오직 행동만이 이 영역을 표현할 수 있다. 말이나 단어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영역에서는 산도없고, 강도없고, 신도 없고, 부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오직 "탕!" 이 소리만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스승님, 제가 깨달았읍니다. 만물이 空함을 깨달았읍니다."
"오 그래? 누가 깨달았다구?"
"제가 깨달았읍니다."
"누가?"
"저요."

나는 지팡이로 그를 내리쳤다. "탕!" 그러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空함의 영역에는 이 '나'라는 것이 없는데, 지금 누가 비명을 지른 것이냐?"
그러자 그는 금세 얼굴이 붉어져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정한 空함의 영역은 말도없고 단어도 없다. 그는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미국에 있을 때 심신운동훈련(EST) 운동의 기초자인 베르너 에르하르트를 소개받은적이 있다. 그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앉혀놓고 긴 강의를 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 그는 종종 '공' 에 대해 이야기 했다.
"공이란 이러이러한 것이고, 저러저러한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우연히 그가 탄 차에 동승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강의를 아주 좋아하는군요. 그런데 '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우주 쉬운 질문을 했다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 자체가 이미 어떤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진정한 공이 아닙니다."
그는 잠시 말을 잃더니 이윽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진정한 공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空의 영역에는 말이 필요없다. 그래서 이 세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탕!" '너는 어디서 왔느냐?' "탕!" 우주적 실체와 너의 실체는 같으냐, 다르냐? "탕!" '신은 무엇이냐?' "탕!" '부처가 무엇이냐?' "탕!" 이 행위는 말이나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되는 완벽한 空의 영역, 즉 완벽한 '無自我'의 영역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180도 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면 우리는 '나'가 없는 완벽한 정적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또 그 경험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우주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영역에 도달한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자유로운 '나'를 얻는 단계이다. 공간과 시간에 장애를 받지 않는 완벽한 자유의 영역이다.

어린이들은 텔레비젼 만화를 참 좋아한다. 개, 고양이, 뱀, 사자가 나와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고 차를 몰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고양이와 새가 서로 얘기르도 한다 이이들은 텔레비젼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손 뼉을 친다. 만화에서는 어떤 행동도 가능하다. 이것은 만화에서 뿐만이 아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주적 에너지 혹은 어떤 특별한 힘과 강하게 연결되어 초능력을 발휘하는 사름들이 있다. 특히 도가나 요가 수행자들 중에 많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에너지의 원리로 생각하면 된다. 만물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초능력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삶들에 불과하다.
지구는 양의 에너지를 대펴하고 하늘은 음의 에너지을 대표한다. 일상의 도처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음에도 다만 우리가 너무 익숙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석의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음극과 양극이 만나면 붙는다.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친다.

탁자위에 자석들을 올려놓아 도넛모양을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중 한 개를 연필로 툭 치면 다시 자기들끼리 다른 극들을 찾아 똑같은 모양의 도넛 모양배열을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는 우리인간이 이우주 에너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열심히 수행하면 완벽하게 공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우주적 에너지가 들어오게 된다. 절대 에너지를 얻는 것으로, 에너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양의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만약 우리 몸을 양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하면 대지와 몸은 서로 분리되므로 몸은 공중에 뜰 수 있다. 땅에 다시 내려오고 싶으면 음의 에너지를 만들면 된다. 어떤 도사들은 하늘을 떠다니거나 바위 덩어리를 들어올리기도 한다. 이 모두 '마음'을 사용하여 만믈을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얻으면 지기 몸을 뱀으로 바꿀수도 있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될 수도 있다. 또 물위를 걸어다닐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다. 이것이 270도의 영역이다.

그러나 선 수행은 이처럼 신비하거나 특별한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옛 선사들이 종종 초능력으로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깨닫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계속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Sunday, July 1, 2012

선 정진

선 정진·禪 精進 Effort in Zen

행주좌와 行住坐臥 어묵동정 語默動靜
걸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얘기할 때, 움직일 때, 침묵할 때
When walking, standing, sitting, lying down, speaking, being silent, moving, being still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At all times, in all places
무문단 無問斷 시심마是甚麽 걸림없는 이것은 무엇인가?
Without interrruption, what is this?

어디든지 어느 순간에서도 진정한 방향을 잊어서는 안 된다. 태어날 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게 인생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에 나왔다. 또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지않고 떠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를 좇으며 산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것에 집착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는데 말이다.

태어날 때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 졌다. 이생의 당신의 업은 전생에 이미 만들어놓은 업에의해 결정된 상태이다.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우리의 삶이 어떤 운명적인 것에 의해 이미 만들어졌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는 한 가지 길이 있다. 순간순간 마음을 지배할 수 있으면 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전생의 업이 만들어놓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의 에너지를 바로 지금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움직일 때, 서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얘기할 때, 침묵할 때, 언느 곳, 어느 때나 어떤 마음가짐을 간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바깥 조건과 상황들은 끊임없이 우리마음을 야생마처럼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닌다. 이 세계는 매일매일 점점 더 복잡해지고 항상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새로운 과학적, 기술적인 변화가 정신없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정보에 허덕이고, 혼잡한 도시에 살면서 영화를 보고, 춤을 추러가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계획들을 세운다. 물론 이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들이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면 우리는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서 덜컥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하나.

옛날에 종사짓고 살았던 시절에는 자연사가 많았으므로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종 질병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조차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 의문에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야말로 다른 어떤것 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어떤 종류의 경험이든 나쁘거나 좋은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각자 경험한 모든것을 잘 소화해 단전을 강하게 하고, 그것을 지혜로 만들어 다른사람을 돕는 일이다.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도록 수행해야 한다. 결코 우리의 가는 방향을 잊지말고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6䞕 전쟁 때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한 여인이 있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 보냈는데 몇 달 후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충격과 실의 속에서도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남편없는 상태에서 그 아들은 그녀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매일 그녀는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지하나로 열심히 일했다.

아들은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들이 군에 가 있는동안 월남전이 터졌다.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군과함께 파견되였다. 그녀의 아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남편이어 아들까지 전장으로 보내야 하다니, 어머니는 너무 슬펐다. 아들은 그녀의 삶의 전부였다. 아니, 그녀 자신의 삶보다 더 큰 존재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아들에게 쏟아부었다.

이 어머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아들을 전장에 보내놓고 한탄만 하고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더욱울 열심히 일했다. 아들이 돌아오면 곧 짝을 맺어줘야 할 테니, 돈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낮에는 막노동, 밤에는 삯바느질까지 했다. 집 밖에 작은 밭도 꾸며서 채소도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아가며 돈을 모았다. 그녀는 한 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내 아들을 도울 수 있을까.' 밥을 먹을 때도, 알울 헐 때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오직 아들 생각뿐이었다.

어머니의 삶의 방향은 아주 맑았다. 어떤 상황서도 그녀의 에너지는 아들에 맞춰져 있었다. 외부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왔다갔다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수행하고 싶으면 이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산다. 언제나 음식, 섹스, 돈, 오락, 명예, 잠 같은 것들에 자신을 빼앗겨버린다. 물론 이런 것들은 열심히 추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얻는다 해도 영원히 가직할 수 없다. "아!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이것도, 저것도 얻었으니까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어." 그러나 우리가 정작 찾아야 할 본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는가. 오직 찾아야할 욕심과 분노를 좇아 사는 삶은 바른 삶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바로 이순간 마음을 어떻게 가지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밥을 먹을 때나 영화를 보러 갈 때나 일을 할 땐나 벤치에 앉아 놀거나 한 순간도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본성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모를 뿐------.'

앞서 소개한 어머니와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 "내 아들, 내 아들, 어떻게 내아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생에서 뿐 아니라 다음 생, 또 다음 생에서도 말이다.

'오직 모를 뿐' 을 맑게 가져라. 모든 사람들은 일하고 돈을 벌어야만 한다. 매일매일 누군가와 약속도 해야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한다. 그리고 많은 것에 개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언제, 어디를 가든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이것이 바로 禪 수행의 중요한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