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30, 2012

미국에서 잘 살기 위한 6기지 조건

미국에서 잘 살기위한 6가지 조건
전문가의 코너 김창수·공인희계사

한인동포들이 미국사회에서 부리를 잘 내리려면 미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력을 길러야 한다. 특히 동포사회의 경제력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매진해야 한다.
미국에서 잘 살기 위한 조건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본다.

첫째, 영어공부다.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는데 필요한 제1장 1과는 영어실력이다.

둘째로 컴퓨터와 친해지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기술을 습득해서 일상생활과 비즈니스 운영에 이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셋째, 미국에 대한 공부다. 우리가 시는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력을 증진 시키고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기위해 고등학교 수준의 미국역사와 미국지리를 습득해야 한다. 더 나아가 미국의 청치제도와 경제체제를 잘 이해하면 동포사회의 경제적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 정치력 신장이다. 특히 연방·주·시전부의 각급 부서에 공무원으로 진출하는 한인 동초들의 숫자가 많아야한다. 미국사회의 요소 요소에, 특히 전부 쪽에 한인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야 한인 파워가 형성된다.

다섯째, 자녀 교육이다. 자식들에게는 재산을 남겨주는 일에 앞서 영어 문장력을 향상시키도록 부모들이 도와주는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에서 출생했거나 어렸을 때 이민 온 자녀라고해서 당연히 영어를 잘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지막으로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비지니스맨 들은 명실상부하게 자본과 기술이 집결된 주식회사를 결성해 대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자본을 가진 많은 수익 투자가들이 합심해 큰 자본을 형성하는 비즈니스 풍토가 싹터야 한다.

Friday, June 29, 2012

분단 현실과 매카시즘의 뿌리

분단 현실과 매카시즘의 뿌리
시론, 이길주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매카시즘(McCarthyism)은 성숙하지 못한 정치문화의 대명사이다. 모든 미성숙함이 그렇듯 매카시즘도 심리적 뿌리가 깊다. 당연히 내것이라고 믿었던 그무엇이 더이상 내곁에 존재하지 않는데서 오는 상실감이 그 뿌리이다. 상실의 충격이 불안장애를 가져왔고, 결국 그책임을 누군가에게 돌려야 하는 분노의 표출이 매카시즘이었다.

1950년 2월 위스콘신주 출신 연방상원의원 조세프 매카시는 미국의 국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그는 250명이란 구체적 숫자까지 제시했다. 이후 미국은 4년동안 붉은 마녀사냥 열기에 휩싸인다. 46년 상원이 된 매카시는 이미 문제의 인물이었다.
정치적 목적이 농후한 매카시의 선언이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자극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당연히 미국의 것이라고 믿었던 두개를 잃었다는 생각에 분노해 있었다. 원자폭탄 기술이 내부 스파이에 의해 소련으로 유출됐다는 생각과, 중국을 공산주의에 빼앗겼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화의 충격이 컸다.

수천 년을 이어온 찬란한 문화, 자원이 풍부한 넓은 땅,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인구를 가진 중국은 세 개의 M으로 세계를 유혹해 왔다. 시장(Market)· 선교지(Mission)·군사기지(Military)로서의 가능성을 말한다. 중국 내전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 미국이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은 이유다.
이 중국이 1949년 미국의 적이 되었다. 그상실감은 책임소재 파악의 광기로 분출됐다. 소위 '누가 중국을 잃어버렸나(Who Lost China?)' 논쟁이 시작됐다.

미국은 중국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마오쩌등의 표현대로 중국인들이 잠에서 깨어 일어났을 따름이었다. 중국을 일으켜세운 역사의 힘은 중국공산당이 제시한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또 결벽에 가까운 인민군의 도덕성도 큰 힘이었다. 이 노도와 같은 힘을 타락한 국민당을 통해 막으려 한 미국의 오만과 오산이 '중국상실'의 원인이었다.

매카시는 중국을 공산주의 제단에 바친 국무부 관리들, 명문가·명문대 출신의·엘리트 외교관들을 겨냥했다. 곧 미국의 정부·학계·예술계는 적색분자 색출에나선다.

상처는 컸다. 실직, 사회적 매장, 가정의 파괴가 속출했다. 미국의 월남전 비극의 원인도 매카시즘이 제공했다. 원남전에 개임하지 않을 경우 "누가 인도차이나를 잃어버렸나?" 또는 더 나아가 "누가 아시아를 빼앗겼나?"의 책임추궁이 뒤따를 것을 의식한 케네디와 존슨은 월남의 수령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매카시즘은 역사해석의 문제다. 원하지 않은 현실에대한 불안과 분노앞에 두개의 선택이 있다. 어떤 역사의 힘에 의해 현실이 도출돼었나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반면에 역사가 몇몇 악역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는 사관에 기초해 책임자 색출에 매달릴 수 있다. 근거가 약하거나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손가각질이 바로 매카시즘이다. 빗나간 현실에대한 로망이 강할수록 그 힘은 거세진다.

우리 민족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3대 세습이 상징하는 북한의 가형적 현실 앞에도 이 같은 선택이 있다. 깊은 역사적 반추의 무분별한 사상적 손가락질이다. 성숙한 선택이 요구되는 때다.

Monday, June 25, 2012

못다한 나의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며
발을굴러 땅을치며 의분~ 했던 날을
이재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도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처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Sunday, June 24, 2012

선의 3요소

참구법· 參究法

조동종 曹洞禪 Perceive silence
지관타좌 只管打坐 조용히 참선하며 앉아있다.
Sitting in silent meditation. (Shikantaza)

타성일편 打成一片 모든 생각을 끊어야 하나가 된다.
Hit all become one.

임제종 臨濟禪 Perceive kong-an
성성적적 惺惺寂寂 말을 들여다 보는것
Illumination, calming, (looking into words)

조계종 曺溪禪 Percieve don't know
'단지불지 시즉견성 但知不知 是卽見性 오직 모를 뿐' 단지 그뿐이다.
If you understand "don't know" just this is enlightenment.

禪의 전통은 달마 대사로 부터 온 것이며, 가사와 발우는 6조 혜능 대사를 통해 내려온 것이다. 6조 이후 禪 전통은 다섯 개의 흐름으로 분류된다.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 위앙종, 운문종이 그것이다. 이들은 조금씩다른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뼈대는 모두 똑같다. 조동종과 임제종만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禪이 다섯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6조 혜능 대사는 중국 조계산에서 수 년 동안 가르침을 폈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중국의 위대한 스승들을 찾아 여행했고, 몇 분은 혜능 대사와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6조의 맥은 혜능으로부터 공식 전법계를 받은 한국 스님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리하여 한국에 조계종이 생겨난 것이다.

조동종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시칸타짜라는 것으로, 이것은 앉아 있는것을 강조한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하게 생각을 끊어야 그때 하나가 된다. 그것의 이름이 타성일편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움직이지않는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지고 거울같이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산이 당신앞에 나타나면 산과 당신은 하나가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시칸타짜 수행이다.

조동종의 전통은 요즘들어 몇몇 선사들이 공안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안공부는 본래 가르치지 않았다. 임제종파의 가장 큰 차이는 공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동종 수행은 한 순간 모든 생각을 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한 시간동안 부처가 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는 푸르다. 벽은 하얗다. 개는 짖는다. 모든것이 하나가 된다. 누군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어라. 목이 마르면 물을 주어라. 그것이 전부이다.

임제종도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는 공안 수행이다. 공안수행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들여다 보는것' 혹은 '말을 사용하는것' 이다. 공안수행에서 중요한것은 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안의 진짜의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안 된다. 공안 그 자테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지적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선병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조주의 '무'자 공안에 익숙해 있다. 부처님은 만물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냐?"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무'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제자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고 하면 머릿속에 '무'를 떠올린다. 아주 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오직 '무'에 괸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은 선 수행이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잃어버린 행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조주는 불성과 불성이 아닌 것을 나누는 제자들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이 '없음'을 단지 사용한 것뿐이다. 그는 달을 가르키기위해 이 '무'를 사용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치고 말았다.

'무'는 단지 '무'일 뿐이다. '무'자 공안이 의미하는 핵심은 이미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공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안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왜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을까----- 모르겠다." 공안을 이렇게 사용하면서 생각을 완전히 끊고 생각이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말에 집착하지 말고 특별한 의미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바른 방향과 본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공안 수행이다. 조계종의 가르침은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다. 이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이런경험을 많은 이름으로 말하지만 본래 그것에는 이름이 없다. 오직 모를 뿐' 그 이상도 , 이하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산한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께서는 스승 자신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내가 모를 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오직모를 뿐'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다. 생각할 때 '나' '너'가 나온다. 그러나 모든 집착을 끊으면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내가 하나 묻겠다.(손에들고있는 주장자를 가리키며) 주장자와 여러분은 같은가, 다른가? 주의해서 대답하라. 같다고 말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칠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칠 것이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칠 것이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하하) 조계선은 모든 생각을 끊고 '오직 모를 뿐'으로 돌아가면 이미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고봉 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 본래 스승'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같다.
"스승님께서는 스승님 자신을 아십니까?"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모를뿐을 잘 알고 있다."
조계선은 이런 방법으로 가르친다.

선의 3 요소· 禪의 3 要素 The Three Essential Elements od Zen

큰 믿음 大信心 Great Faith
큰 용기 大奮心 Great Courage
큰 의심 大疑心 Great Question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큰 믿음(Great Faith), 큰 용기(Great Courage), 큰 의심(Great Question)이다.
이것은 마음공부라는 삼각형의 세변과 같다.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심 大信心
큰 믿음이란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큰 서원을 세워 노력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모든 에너지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심지어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멈ㅊ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치 너미 닭ㅇ이 알을 품듯 말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결코 다른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알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적인 생각 뿐이다. 물론 가끔 품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코 알이 차갑게 되도록 내버러두지 않는다. 만약 어미 닭이 '좀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혹은 '남자 친구닭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열심히 알을 품지않거나 아예 알을 내버려둔다면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미 닭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 조건, 상황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병아리가 알을 깨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 몰두하는 마음을 큰 마음이라 한다.

대분심 大奮心

대분심이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력할 때와 비교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쥐구멍 밖으로 몸을 기대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후 용수철을 늘린 것처럼 뒷다라를 빼고 앉아 쥐가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움켜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쥐구멍에 집중해 있다. 온 마음이 한 가지 포인트에 맞춰져 바깥의 조건이 어떤하든 똑같은 자세로 몰두하는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다. 쥐가 '이 정도면 됐어, 저 멍청한 고양이는 지금쯤 갔겠지' 하고 바깥 냄새를 맡기위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 고양이는 낚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고양이의 마음이다. 고양이는 언제, 어떤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집중을 한다. 외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맞춰진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고양이를 하늘로 던졌다가 떨어뜨리면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네 발톱을 탁 세워서 안전하게 앉는다. 사람이라면 팔다리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하늘에 던져져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고양이의 큰 용기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럴 때 마음은 바깥 조건의 변화에 따라 출렁댖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충청남도 마곡사라는 절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모든 생필품에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막중한 일이었다. 한번은 절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준비가 큰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두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며칠씩 걸려 두부를 만들어 물속에 넣어두었다. 마곡사에는 창고에 큰 나무통이 있었는데,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부를 보관해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들어가 나무통을 보니 두부가 두 덩이나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두 넝이가 없어졌다. 그 이후로 매일 두부가 한두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고 문은 항상 잠을쇠로 잠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 일이 알려지자 서로 의심하는 바람에 절 분위기까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매일 두부가 많지도 않은 딱 한두 덩이만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다 들고 갔으면 될 터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아마 나쁜귀신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내가 꾀를 하나 냈다. 창고에 앉아 밤을 새우며 도둑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나무통 뒤 기둥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누구소행인지 꼭 밝혀내고 말리라.'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고 세 시간이 지났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윽고 새벽이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창고 구석에서 들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천천히 나무통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옳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군나. 나는 숨죽이며 그림자의 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사람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고양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통 가장자리에 앉아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머리는 낮게 숙이고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물 속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있던 두부 한 덩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순간 고양이가 물밖에서 재빨리 낚아채더니 입으로 가져가서는 아주 맛있게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창고의 나무틀에 난 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내눈을 의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두부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너지를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물에있는 두부가 떠오를 정도로 온 에너지를 집중시킨 것이다. 고양이의 의식은 오직 한 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무한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것이 고양이의 대분심이다.

이런 고양이의 마음상태만 같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수행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애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가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팔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대의심 大疑心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을 보러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억어라."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주 배가고파 하늘도, 땅도, 나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며칠동안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햇빛은 따갑게 내려쬐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물' 뿐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죽을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도, 돈도, 섹스도, 명예도, 잠도 다 필요없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처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수행해야한다.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한 점에 맞춰져 바깥 상황이나 조건에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는다. 본성을 찾고 싶으면 오직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슴깊이 가져야 한다. 이런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깨달음은 멀지 않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젊었을 때는 색스, 돈, 명예를 원하고 심지어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욕심을 가지고 한다. 이것저것 가지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러다 훌쩍 나이가 들면 한 수간 당혹스러워 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도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난다. 문득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에대한 의문들이 생긴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허무감을 이기기 위해 '산다는것은 다 그렇고 그런것'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애써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과연 그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말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기전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이며 '오직 모를뿐' 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함께 기능한다. 참선한다는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츠러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려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빨간 뿔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켜지면 가면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일본 선방에서는 에너지를 모으는 방법을 주로가르친다. 즉, 용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키 로시는 종종 제자들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곤 했다. 그가 강조하는 수행은 중심인 단전에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無]라고 말해보아라."
"무우."
"더 크게, 더 힘을 줘서."
"뭉우우."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못 믿는구냐, 다시 무."
"무우우우."
"더 크게."
"무우우우우우."
이것은 사무라이들이 받는 훈련과 유사할 뿐 선 수행이 아니다. 강한 단전을 길러내는 것만이 중요시되는 잘못된 훈련이다. 용기만 강조되면 믿음이나 의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명확한 방향은 분명히 아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도착하고 싶은가. 서울? 전라도? 경상도? 금강산? 아니면 센프란시스코? 도쿄? 뉴욕? 파리?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방향을 제공해 주기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Saturday, June 23, 2012

좌선

좌선· 坐禪 Sitting in Zen Meditation

조신[調身] To control body
조식[調息] Breathing
조심[調心] Mind

좌선[坐禪] Sitting in meditation
행선[行禪] Walking Zen
와선[臥禪] Lying-down Zen

참선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참선할 때 우리는 몸, 호흡, 마음을 통제할 어떤 기술들을 사용해서 모든 생각을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 참선하면 흔히 방바닥에 양다리를 반쯤 혹은 완전히 꼬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참선은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앉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어떤상황, 조건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자세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으면 먼저 몸을 지배해야만 한다. 앉아있는 동안 일정하게 어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능하면 다리는 꼬고 등과 머리는 일직선에 놓는다. 눈은 반쯤만 열고 45도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손은 단전앞에놓고 부처님 자세로 오른손을 왼손 밑바닥에 깔고 양 엄지손가락을 맞닿아 둥글게 만든다. 그리고 배꼽아래 단전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호흡을 통제할 수 있으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쉼에 따라 생각도 천천히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에너지가 천천히 배꼽아래 단전에 모이기 시작하면 생각도 덜 복잡해진다. 참선 수행에서 마음을 두는 곳은 항상 우리의 중심, 즉 단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머리에 있거나 가슴에 모여있다. 머리는 지성의 중심이고 가슴은 감정의 중심이다. 머리에 중심을 두는 것은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에너지를 올라가게 한다.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서 내려놓아라. 단전의 의지와 행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천천히 단전에 모여 안정되면 생각과 감정도 맑아진다.

그러나 참선이 무조건 이렇게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순간순간 우주처럼 맑으면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참선이다. 운전하는 것도, 테니스를 치는것도 다 참선 수행이다. 모든것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맑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우리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운전할때 그냥 운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운전 참선이다. 먹을 때 그냥 먹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운전하거나 먹을 때 오로지 그것만 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마음은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자 친구생각, 남편, 마누라, 시어머니와 싸운 생각, 직장에서 해고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마음은 제주도에서 부터 백두산까지 야생마처럼 떠돌아 다닌다. 입으로는 음식을 씹고 있지만 생각은 천리를 달린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그것이 바로 생각에대한 집착이며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순간순간 생각에 매이지 않고 그냥 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참선 수행이다.

사람들 중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선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5분이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남들처럼 90일 참선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나는 물론 허락했다. 그는 누워서 수행을 했다. 다른사람들이 모두 벽을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동안 그는 천장을 처다보며 참선수행을 했다. 다만 나와 면담할 때만 몇분간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다시 선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참선수행이란 이처럼 꼭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의자를 써도 좋고 서서해도 좋다.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수행의 진정한 자세이다.

대오· 大悟 The Great Enlightenment
천지지천천지전 天地地天天地轉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Sky is earth, earth is sky, sky and earth revolve

수산산수수산공 水山山水水山空
물이산이고 산이물이며, 물과산이 다 비었다.
Water is mountain, mountain is water, water and mountain are empty.

천지지지하증전 天天地地何曽轉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른 바가 있었던가?
Sky is sky, earth is earth, when did they ever revolve?

산산수수각완연 山山水水各琓然
산은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earth is already complete.

대오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것이다. 자유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를 깨달아 대보살행[大菩薩行]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우리가 매 순간 진리속에서 얹제나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대붑분 사람들은 그저 흘려듣기 쉽다. 그
러나 실제 우리는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각자 상황에 집착애 욕심, 분노, 무명을 갖는다. 생각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 변하는 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 한다. 지니리를 따르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뀌는 생각을 쫓기 때문에 진리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선불교는 무명과 방황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자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그 점을 깨닫고 싶으면 먼저 각자의 견해, 조건, 상황을 놓아버려야 한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다음 단계는 실천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상황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인식해 찰라마다 올바른 실천을 하느것이다. 이것이 '대오[大悟]' , 말 그대로 큰 깨달음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아 이 세상을 돕느냐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그러나 머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모양이 '공'하고 '공'이 모양이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마음(thinking mind)' 으로 지구가 하늘이고 하늘이 지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같지만 또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모든것은 언제나 움직이니다. 돌고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모든것이 공허하므로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요",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이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여전히 생각일 뿐이다.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상태이므로 개념적인 상태이며,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완벽한 공에서는 가는것도, 오는 것도 없다. "하늘은 단지 하늘이고 땅은 그저 땅일 뿐"이다. 우리늬 마음은 변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것도 없다. 이것이 완벽한 정적의 상태이다.
진정한 공을 깨달음에따라 우리의 마음은 완전하게 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게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늘이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이것이 또 다른 이름의 순간의 세계이다. 찰라찰라가 다름아닌 세계가 진리이며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기능이 없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옳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이 진리를 통해 나와 중생, 이 세계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답은 아주 쉽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것 중의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에리한 눈을 가진 선사를 찾을 때 까지 이 스승, 저 스승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첫눈에 스승을 알아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여러 해 선 수행을하면서 많은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곧 어떤것이 옳고 그른지 알게 될 것이다. 섩탕을 맛보지 않으면 단맛을 알수 없고, 소금을 맛보지 않으면 짠맛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당신 스스로 해야한다.

많은 스승들은 자기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깨달음애도 수준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이 있고 본래 깨달음이 있고 마지막 깨달음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은 '공'을, 본래 깨달음은 '여여[如如]' 를, 마지막 깨달음은 '즉여[卽如]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 사과가 하나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과가 이니라고 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과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바닥을 "탕!" 치거나 '할' 하고 소리치면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혹은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거나 '사과는 붉고 벽은 하얗다'라고 하면 '여여[如如]'의 대답을 준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먹으면 바로 '즉여[卽如]'가 된다.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즉여' 야 말로 완전한 대답이다. 형이학상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선사는 이 세가지 깨달음을 구별해낼 줄 안다. 자유롭게 가르침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깨달음'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깨닫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선 수행을 한다. 부처님은 '모든것은 이미 깨달았다'고 설파했다.

한 유명한 선사의 말대로 '생각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행동도 바로 '즉여'가 된다. 깨달음을 얻었더고 말하는 것조차 혹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조차 생각이고 욕심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만든다.

남전 선사는 "평상심이 도" 라고 말했다. 매일매일의 마음이 이미 대오[大悟]이다. 뭔가 다른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려넣으려 하는 것과 같다.

Friday, June 22, 2012

견성성불

견성성불· 見性成佛 See Your True Nature Become Buddha

버들은 푸르고 꽃은 볽다 柳綠花紅 The willow id green, the flowers are red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烏黑鷺白 The crows are black, the cranes are white
보이는가? 들리는가? 還見ㅁ 還聞ㅁ Do you see? Do you hear ?

견성성불이란 자기의 본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본성품이라 무엇인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것이 부처님의 본성이다. 모든것이 자기의 본성품이다.
마음과 우주가 일체라면 자기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꽃은 붉으며,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이벽은 흰색이다. 책상보는 황색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방 안은 밝게 빛나고 밖은 어둡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어떤 생각도 하지말라. 그러면 우주는 이미 너의 것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다는 것은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비춰질 뿐이다. 붉은 공을 비추면 붉은 것이 비춰지고 하얀 공을 바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밖에서 개가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본성이고 진리이고 불성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하고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아주 명쾌하다.

고칙공안· 古則公案 Kong an and All Cases
1천 7백 공안 千七百公案 (拈頌)
One thousand seven hundred kong-ans 조계종曹溪宗

벽암록 碧岩錄 The Pi-yen Lu 百則 one hundred cases 임제종 臨濟宗
종용록 從容錄 The Tsung-jung Lu 백측 one hundred cases 조동종 曹洞宗
무문관 無門關 The Wu-men-kuan 48 칙 forty-eight cases 諸般

관청에서 띄우는 공문서 같은 중요한 서류에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서류의 진본과 복사본이 함께 섞어있어 구별해내기 힘들때 서류에 찍힌 붉은 도장을 보면된다. 서류의 진위여부를 알려면 도장과 맞춰보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이다. 공안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와서 자신이 이해한 한쪽을 스승이 제시한는 한쪽과 맞추는 것이다. 공안은 일종의 시험문제인 동시에 자기 성찰에 좋은 도구이다. 스승과 학생이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전법[傳法]'이라고 한다.
본래 불교에는 공안 수행이 없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만물이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욕심, 분노, 무지가 고통을 만들고 이 모든것들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어떤글도, 토론도 필요 없었고 오직 禪 수행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여러차례모임을 통해 부처님 생전의 가르침을 적어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갑론을박을 벌렸다. "내가 들은 게 옳다." "아니다. 그때 내 기억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러다 보니 부처님 밀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5백 년 전에 인도의 달마 대사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넘어왔다. 불교는 그전부터 이미 3백여 년 동안 중국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학문적이고 복을 비는 기복 불교였고, 禪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달마 대사는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똑바로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벽하는 달마 대사 앞에 혜가[慧可]라는 이름의 스님이 찾아왔다.
"대사님, 부디 저를 가르쳐주십시요."
"내가 진리를 얘기한다 해도 그대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혜가는 대뜸 그 자링에서 칼로 자기 팔을 잘랐다. 그러나 달마 대사는 한 치의 놀람도, 움직임도 없었다. 혜가는 아픔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ㅂ부디 저의 마음을 편히 해주십시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면 편히 해주겠다.
"마음이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읍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를 이은 2조가 된다. 바야흐로 禪의 가르침이 달마 대사로 부터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중국 선불교[禪佛敎] 역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분이 6조 혜능 대사이다. 혜능은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과도 없다. 그러니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느 날 길을걷던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승려와 마주쳤다.
"지금 펄럭이는 것은 깃발이다."
"아니다, 바람이다."
두 승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주장이 옳다고 우기고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지나가는 혜능 대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부끼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바로 너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부터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또 이런 질문들이 각자 수행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또 다른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제자가 혜능 대사를 찾아왔다.
혜능은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엇이 여기에 온것이냐?"라고 물었다. 제자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내가 무엇인가?'라는 공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6년 동안 부처님이 수행하면서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다. 부처님, 달마 대사, 6조 혜능 대사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것이 공안수행의 원조이다. 6조 혜능 대사가 나타날 때까지 따로 불경을 가르치는 교파가 없었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있었다. 혜능은 많은 위대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큰 비가 내려야 나무들도 크고 버섯들도 잘 자란다. 제자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혜능의 가르침을 꽃피웠다.

이렇게 해서 뻗어나온것이 다섯가지 선의 갈래이다. 임제선사의 선풍을 이은 제자들이 임제종[臨濟宗]을 만들고 법언선사의 제자들은 법안종[法眼宗을 만들고, 운문선사의 제자들은 운문종[雲門宗]을 만들고, 위산, 앙산의 문하에서는 위앙종[僞仰宗]이, 조산·동산의 문하에서는 조동종[曹洞宗]이 나왔다. 이것이 중국 선종의 5가[家]이다
이들은 각기 서로다른 면을 간조하고 있지만 뼈대는 같다. 禪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 번성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깨달음의 경험, 법문들이 쓰여져서 문집으로 만들어졌다. 선사들의 경험이 제자들의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떤 제자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스승은 그에게 앞선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험들 중 한 사례를 내놓고 묻는다. 진정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면 즉각적으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했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공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스승은 법을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람이 운문선사에게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스님은 '마른 똥막대기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승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제자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면 공안의 참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공안수행의 본질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마조[馬祖]선사는 "무엇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몇 년 후에는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옛날 공안들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지적인 요소들과 수많은 비유들이 끼어들어 말싸움이나 법문 논쟁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선은 일반사람들에게 점점 더 신비한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나무 닭이 운다." "돌사자가 하늘을 난다." "토끼 뿔을 보았느냐?" 같은 공안들은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뜬금없는 얘기일 것이다. 상대방이 황당한 대답을 할 때 '선문답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선문답'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얘기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이러다 보니 禪 수행은 점점 일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수행이 되어버렸다.
어쨋든 공안에 나온 말들이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춰진 의미를 찾아 진땀을 흘려야 했다. "불교가 무엇이냐?" 고 물을 때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자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것이다. 이런 형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선문답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고, 서로다른 禪의 전통이 때로 서로다른 공안들을 사용한다해도 진리는 하나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공안들을 어떻게 써서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을 도울 것인가, 단지 이것만이 핵심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의 생각하고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말과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것은 낚시대에 미끼를 다는 것과 같았다. 물고기가 너무 배가 고프면 미끼와 함께 바늘까지 먹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서 생각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 미끼는 잡되 바늘은 잡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물고기는 결코 바늘을 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나오는 말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안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생각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을 치료하기위한 것일 뿐이다.
공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조주의 '무'[無]'자 공안이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개에게도 물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선사는 '무[無]', 즉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니, 만물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실까. 조주선사가 깨달음이 앝아 실수를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조주는 제자의 분별하는 마음을 치료하기위해 일부러 실언을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제자 역시 부처님의 말, 책에 기록된 말에만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이것 혹은 저것, 예스 혹은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들만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을 구분하고 따지는 이원론적인 발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조주는 그 마음을 바로 알아보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공안은 아주 유명해서 오늘 날 까지 계속 희자되고 있다.
"왜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왜------. 부처님이 옳은가, 조주선사가 맞는가, 잘 모르겠다."
조중의 '무'자 공안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치료해 주는 '말과 단어로 된 약'이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공안이다. 스승이 이 공안을 줄 때 우리는 조주선사의 '실수'를 사용하여 그것을 비로 잡는다. 그러나 실제 이 공안은 '실수'인것도, 실수가 아닌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 이 공안은 상식에 맞지않는다. 조주 선사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끊으면, 집착을 끊으면 이공안은 맑다. 틀린것도 맞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안의 목적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공안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오늘 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무'자 공안에 집착해 있다. 이것저것, 예스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다.
조주선사는 이공안을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약을 먹는 환자가 약에 집착해 있으면 본래 가진 병보다 훨씬 더 나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현재 여러불교 종파는 각각의 불교전총에 따라 다양한 공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1천 7백 가지를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선문염송[禪文捻頌]이라고 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이것을 禪의 지침서로 쓰고있다. 벽암록[碧巖錄]에서는 1백칙을 들고 있는데, 현재 임제종에서 쓰고 있다. 종용록[從容錄]에서도 1백칙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조동종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무문관[無門關]에서는 48칙을 쓰고 있는데 이는 여러선종에서 함께 응용하고 있다.

Tuesday, June 19, 2012

직지인심

직지인심· 直指人心 Pointing Directly to Mind
동산선상의 삼서근 洞山先師 麻三斤
Master Dong Sahn "Three pounds of flax"
운문 선사의 마른 똥 막대기 雲門禪師 乾屎橛
Master Un Mun "Dry stick on the shit place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趙州禪師 庭前栢樹子
Master Joju "The cypress tree in the garden"

禪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더 이상 분석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마음으로 길게 들어가 잠을 깨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누군가가 한 위대한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의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어렵지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아주 어렵지."
누군가 또 질문을 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쉽지요?"
"그럼, 아주 쉽지."
누군가 또 물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
누군가 또 물었다.
"참선은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선사가 이렇게 말했다.
"물을 마실 때 찬지, 더운지는 네 스스로 안다."
이 이야기는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물 마실 때 찬지 뜨거운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어렵거나 쉬운것을 만들지 말라.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뭔가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그것이 禪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든 삶에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부처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으면 먼저 우주와같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볽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것이 진리이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가리키는가? 다음 세 가지 이야기는 禪의 가르침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지 보여준다.
동산 스님의 '삼베 서근 麻三斤'
옛날 중국에서의 얘기다. 어느 날 아침, 동산 스님이 삼베 무게를 달고 있었다. 저울이 딱 서 근을 가르키고 있었다. 순간 그는 어떤 생각도 없었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았다는 것이다. 단지 삼베 서 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가 '삼베 서 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베 서근이다."
그 말에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비추는 것이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횐것이 오면 힌것을 비춘다. 삼베 서 근이면 그냥 마음의 거울에 삼베 서 근만 비추는 것이다. 진리는 아주 쉽다. 생각을 하면 이런가르침은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없으면 모든것이 이미 부처인 것이다.
운문 스님의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
옛날 우리농촌도 그랬지만 중국 절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퇴비로 만들어 밭에 뿌렸다. 스님들은 화장실에 큰 통을 갖다놓고 거기서 볼일을 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긴 똥막대기로 저은 뒤 오물을 재에다 굴려 말리고, 똥막대기는 볕에 내놓았다.
어느 날 운문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성급한 스님 한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 다가와서 운문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운문 스님은 지체없이 이렇게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운문 스님은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 단지 볕아래 긴 똥막대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뒤 가던길을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순간 스님의 마음은 단지 마른 똥막대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볕 아래 똥막대기가 그의 생각의 전부였던 것이다.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 庭前柏樹子'
달마 대사는 禪의 초조[初祖]이다. 그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 불교는 이미 중국에 융성해 있었다. 많은 절들이 세워졌고, 스님들도 많았으며,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불교는 몇몇 왕조에서 국교로까지 인정되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에 도착한 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참선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부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드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원 성취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 불교에 충격을 주어서 그들의 잠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중국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양무제도 개인적으로 달마대사를 초청해 법문을 듣고 싶어했다. 양무제가 그에게 은근한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사람의 승려에게라도 옷을 주고 음식을 주면 극락왕생한다고 했읍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승렫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었읍니다. 경전간행도 많이 했고 절도 많이 세웠지요. 자, 제가 얼마나 공덕을 받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달마 대사는 일어지하에 "공덕이 하나도 없읍니다."라고 잘라말했다. 양무제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잘못 들었는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내쳐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신성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스러운 것은 없읍니다. 오직 '공[空]'이 있을 따름입니다. (廓然無聖)"
양무제는 완전히 기가 꺾였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달마 대사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말했다.
그 길로 달맏대사는 소림사 위 어둡고 축축한 토굴로 가서 면벽 수행을 시작했다. 무려 9년 동안 '오직 모를 뿐' 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단지 벽만보고 앉아있는 참선 수행을 한 것이다.
달마 대사는 진리를 가르치러 중국에 왔다.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으로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중국불교라는 선의 출발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설명이라도 깨달음의 경험은 나누어줄 수 없다. 배고플 때 음식 사진 1천여 장을 보여준다해서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무언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 禪 수행이 나온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입을 벌려라. 이것이 음식이다. 이것이 물이다."
禪은 비록 훌륭한 말로 가르치지 않지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닿아있다. 그래서 본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달마 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조주 선사가 살아 계실 때 禪 수행은 질문과 대답안에 감춰진 의미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승려들은 비밀스런 가르침과 이상한 설명만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조주가 절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한 스님이 다가와 물었다.
"달마대사가 왜 중국으로 왔읍니까?"
이것은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나 같은 말이다. 이때 조주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라고 대답했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조주 선사는 뜰 앞에 잣나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란 어떤 비밀스럽고 신비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앞에 이미 '있는 그대론의 진리'라는 것을 조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진리였다.
달마의 가르침과 모든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다. 제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며 진리에대한 배고품을 호소했을 때, 조주는 그에게 음식이 그려져있는 사진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 말한 것이다.
"입을 열어라,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다. 배고프면 먹어라."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교외별전

교외별전·敎外別傳 The Special Transmission

삼처전심 三處傳心 세곳에서 마음을 전함.
Three occasions of transmission from mind to mind
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
다자탑 앞에서 마하가섭과 방석을 나눠 같이앉다.
Sharing cushion with Mahakashyapa in front of the Pagoda of Many people
영산회상거고화 靈山會上擧枯花
영선에서 꽃을 들어보이다
Holding up the flower on Vulture Peak
니련하반시쌍질 泥蓮河畔示雙跌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오다.
Buddha's feet appear through the coffin

이심전심이라는 말이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동시에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고 치자. 그 두 사람은 단어나 말이 없어도 이해하고 웃을 것이다.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이는 것,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이심전심이다.
여기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은 부부 사이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생일 선물을 준다. 이내 포장을 뜯고 상자안에 담긴 선물이 아름다운 스카프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주 행복해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이처럼 두 마음이 완벽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한 순간에 두 마음은 똑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말도, 단어도 필요없다. 설명이나 이해도 필요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본성품이 어떻게 말과 단어를 넘어 왔는가에 대해 얘기 했다. 언어는 본성품을 설명할 수 없다. 생각과 언어는 우리 세계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나눈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생과 사, 오고 감, 행복과 슬픔 등등, 그러나 우리의 본성품은 우주적 실체이며 절대이다. 절대의 세계에서는 말도, 언어도 없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절대를 얻었다는 뜻이다. 절대란 말과 단어 이전의 세계이다. 부처님은 이 세계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므로 좀더 직접적인 전달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제자들에게 전할 때 말과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세 가지 행동으로 전했다.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이 세 곳에서 우리에게 실체(substance), 실상(truth), 실용(correct function) 을 가르치셨다.
다자탑 앞에서 마하가섭과 방석을 나눠 같이 앉다.
예날 인도 사람들은 여러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양반들은 첩을 데리고 살 수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마누라를 5~6명, 많을 때는 20~30명씩 데리고 살기도 했다. 그런데 20명의 마누라를 데리고 살던사람이 죽으면 그 식솔들이 150명이 넘는다. 남편이 죽으면 화장을 한 뒤 가족회의를 통해 명당 자리를 정해 그곳에 죽은 남편을 기리는 아름다운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을 다자탑[多子塔]이라 한다. 그런데 이 탑의 도량이 넓고 크다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탑 앞을 공원처럼 이용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설법을 위해 한 다자탑 앞에 앉았다. 1천2백 명 대중들이 앉아서 그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부처님께서 하실 법문은 어떤 가르침일까?"
모든 사람들이 이제나 저제나 부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부처님보다 나이가 20세나 늙은 '마하가섭'이라는 바라문이 걸어 들어왔다.
당시 그는 80세가량이나 됐지만 늦게 출가를 한 풋내기 스님이었다. 출가 전 그는 인도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불가에서는 출가한 순서대로 앉게 되어있다. 세속의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또 속세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와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하더라도 출가 순서대로 앉아야 한다. 이것은 집과 가족을 떠나 출가한 슬려들의 뜻을 높이 기려 부처님시대에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서양 절에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날, 다자탑 앞에서 대중들은 법문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마하가섭이 걸어 들어오는 순간 부처님은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 역시 부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마하가섭과 부처님의 마음이 서로 한꺼번에 이어졌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금방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아니, 출가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풋내기 승려가 어떻게 감히 무처님 바로 앞에 앉으려 하지?"
심지어 미하가섭은 무처님 바로 앞도 아니고 바로 옆자리로 가 앉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랄 일은 그 이후 벌어졌다. 부처님은 아무 말없이 당신이 앉았던 방석을 반쯤 나눠 같이 앉게 해준것이다. 모든 대중들은 깜짝 놀랐다.
"풋내기 승려이다보니 자기가 가서 앉을 자리도 잘 무르는 모양이군."
"어떻게 감히 부처님 옆자리에 앉는다는 말인가?"
그들은 아주 화가 났지만 부처님의 법은 마하가섭에게 이미 전해진 뒤였다.
이 얘기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처음 법을 전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마음은 완전히 열려 하나가 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완벽하게 똑같은 생각을 나눈 것이었다. 이 일을 통해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탑 앞에 모인 이들에게 모든 물질의 실체가 동등함을 가르친 것이었다. 인간, 태양, 달, 별, 나무, 개, 고양이, 바위, 산, 강, 등이 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이미 똑같은 우주적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님의 실체도, 마하가섭의 실체도, 이 책상의 실체도, 마루의 실체도 무두 똑같은 우주의 실체이다. 니의 본성과 부처의 본성이 다르지 않고 다 똑같다.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탑 앞에서 행한 그의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실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것이었다.

영산에서 꽃을 들어 보이다
부처님이 «법화경» 을 설하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대중들이 영산 앞에 모여 들었다. 이날 역시 1천2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날도 부처님은 산꼭대기에 앉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부처님께 무슨일이 생긴게 아닐까?"
"오늘 편찮으신 모양이야."
잠시 후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집어들었다.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대중에게 높이 처들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아는이가 없었다. 저 멀리 오직 마하가섭 혼자만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부처님이 입을 열었다.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가르침을 넘어선 특별한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한다."
이것으로 마하가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처님의 법맥을 잇는 첫 번째 법제자가 된다. 부처님은 왜 연꽃을 들어 보이셨는가? 가섭은 왜 웃었는가? 부처님은 간단한 몸짓을 통해 우리가 진리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것을 가르쳤다. 부처님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복잡한 철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사학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 진리란 말이다.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 우주가 이미 진리이기 때문이다.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 우주가 이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라. 그냥 들어라. 그냥 냄새를 맡아라. 순간순간 우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진리의 본질에 대해 아주 훌륭한 법문을 준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부터님은 오직 침묵으로서 그것을 말해주었다. 모든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것도 진리이다. 무처님은 꽃을 집어들었다. 그것도 진리이다. 마하가섭이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것 역시 완벽한 진리이다.
어떤 진리도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처님은 우리에게 '실체'의 본질에 대해 가르쳤다. 이 영산에서 바로 '진리' 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 영산에서의 가르침은 약간의 문제를 보인다.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고 단지 꽃 한 송이만을 집어들었다. 마하가섭만이 그것을 보았고 미소지었다. 모든것이 끝났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어떤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진리를 보여주었다. 훌륭한 법을 부처님과 함께 편 것이다. 하지만 그때 아마 부처님은 이 같은 말을 함으로서 약간의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진정한 법을 전하노라."
왜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 마하가섭은 미소로서 이미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표현했다. 꽃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말을 전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마치 뱀에 다리를 그려넣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이었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내가 너에게 진정한 법을 전하노라"라고 했을 때 마하가섭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치자. "부처님, 나는 이미 법을 모두 이해했읍니다. 당신의 법은 필요없읍니다."
만약 당신이 부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는가. 부처가 꽃을 집어들었을 때 마하가섭의 미소는 그가 이미 깨달았고 부처의 마음을 나누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미 부처님의 법을 모두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부처님이 말을 더한것은 아주 큰 실수였다. 만약 당신이 부처였다면 이떻게 하겠는가 또 마하가섭이 '나도 이미 법을 이해했으므로 부처님의 법이 필요 없다'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하하)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오다
부처님은 여든 살에 돌아가셨다. 당시 인도에는 1백 살이 넘어서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요가 수행을 주로 하는 요기들이나 영적인 수행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부처님이 생각보다 일찍 열반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당혹했다.
"아니, 부처님은 신비하고 특별한 에너지를 가지셨던 분인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어쩌면 그는 성인[聖人]이 아니었을 지도 몰라."
지금으로 치면 이 여든에 돌아가시는 것도 장수한 편에 속하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부처님의 이른 열반을 두고 몇몇 제자들은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부처님은 생도, 사도 없다고 하셨는데, 정작 당신께서는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
이런의심들이 승가 공동체를 뒤흔들었고,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런가운데에도 다비식 준비는 차례차례 진행되고 있었고, 큰 장작더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른 나무들이 높이 쌓였고 부처님의 몸을실은 관이 꼭대기에 놓였다. 장례식은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인 마하가섭이 주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작 다비식 날 마하가섭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자꾸 흘렀다. 사람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마하가섭은 어디 있느냐?"
"도대체 어디가서 안 오는 것이냐?"
그 무렵 마하가섭은 아주 먼곳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접한 즉시 짐을 꾸려 출발했지만 1백살이 훨씬넘은 노인이었던 마하가섭이 제때에 당도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다비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비식장에 들어섲자마자 마하가섭은 도반들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승려들은 아예 부처님 가르침마져 송두리채 의심하고 있었다.
마하가섭은 관으로 다가가 세 번 절하고는 장작더미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그는 노쇠하여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한 번 도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람들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빨리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러나 마하가섭은 계속 걷고 있었다 관 주위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돈 후 마하가섭은 부처님 발아래 세 번 절했다. 그러자 이게 무슨 일인가. 부처님의 발이 관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 의심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와, 부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구나 단지 그의 몸만이 사라졌구나. 부처님의 본성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구나."
모든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비록 그의 몸은 생과 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본성은 결코 죽거나 태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본성품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순산순간마다 일체중생을 위해 기능한다.
그러므로 이 '삼처전심'은 아주 맑고 명확한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부처님은 실체, 실상, 실용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첫 번째, 마하가섭이 부처님과 방석을 나눠 앉은것은 실체, 즉 우리의 본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가르침을 주기위해서였다. 모든 우주적 실체는 완벽히 똑같다. 계급사회였던 인도에서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보다 우수하며 영적으로도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모두 똑같이 부처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두 번째,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 말이나 어떤 더 높은 수준의 지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침묵이 진리이다. 이 꽃이 진리이다. 너회들의 의심도 진리이며, 마하가섭의 미소도 진리이다. 잠을 깨라' 고 했다. 이 전 우주는 이미 완벽한 진리의 세계이다.
세 번째, 부처님은 살아생전 올바른 수행법에 대해 가르쳤다. 그러나 열반 후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렸으므로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행동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것은 큰 실천이다. 모든 것이 똑같이 우주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 우주 안의 모든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있다. 이것들을 알면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진리(실상)를 어떻게 맑고 자비롭게 쓸 수 있는 지(실용)를 깨달을 수 있다.

Saturday, June 16, 2012

불립문자

불립문자• 不立文字 Nonattachment to Language

간경문 看經門 The Path of scriptural study
염불문 念佛門 the Path of reciting the name of the Buddha
진언문 眞言門 The path of the mantras
참선문 參禪門 The path od Zen practice

禪 수행은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는 개념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 얼마나 학위를 많이 가졌느냐에 의존하지 않는다. 禪 수행은 지식이나 명석함과는 다르다. 禪 수행은 직접적으로 우리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본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禪이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니 때로는 '반지성적 (anti-intellectual)'이라고 꼬집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禪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 고 해서 말이나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말과 단어 이전에 먼저 '마음 공부' 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과 단어를 어떻게 우리의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쓰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어떻게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쓰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본성품을 깨달은 후에야 말과 단어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공부를 해나가는 데에는 네 가지 방법, 즉 문[門]이 있다.
첫째는 간경문[看經門]으로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깨달아가는 것,
둘째는 염불문[念佛門]으로 염불을 통해 마음을 깨달아 가는것,
셋째는 진언문[眞言門]으로 진언을 외워서 마음을 깨달아가는 것,
넷째는 참선문[參禪門] 참선을 통해 마음을 깨달아가는 것이다.

물론 참선이 마음 공부의 지름길이긴 하지만 경전을 읽고 진언을 외우고 하는 것 모두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단지 문자에 집착하면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을 보는 것이 되고 염불에 집착하면 소리와 이름,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진언이나 참선 모두 마찬가지이다. 참선을 할 때도 참선에 집착하면 안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먹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배가 부르냐 하는 것이다. 마치 달을 보려하는 사람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해선 안된다.

보리수 아래서 본성을 깨달은 부처님은 그후에 많은 설법을 하셨는데, 그것을 기록한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경전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어떤 교리나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경전을 읽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 이라는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경전을 읽으면 경전은 우리 수행에 도움이 된다. 그럴 때라야 경전은 우리의 신념을 강하게 하고 우리인식을 보다 넓고 크게 만든다. 생각 이전의 마음으로 경전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따지고 집착하고 원하면 경전은 곧바로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수행 정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관념, 신념, 철학 모든것을 벗어 내려놓아라. 심지어 부처조차도 내려놓아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니고 순간순간 오직 중생을 도울 뿐이다. 경전을 읽되 한 단어에도 집착해선 안 된다.
오직 수행, 수행하라. 오직 모를 뿐!

진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절에가서 '관새움보살' 이니 '옴마니반메홈'을 왼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관세움보살'이나 '옴마니반메홈'에 집착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진언을 외우면서 뭔가를 바라서도 안 된다. '관새음보살님이 돈을 벌어다 주시겠지.' '관세음보살님이 행복을 가져다주시겠지.' '관새음보살님이 내 아들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진언을 외면 방향을 잘못잡은 것이다.

이것은 오직 '나' '내가족' 만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뭔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기위한 수행은 참 수행이아니다.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는 수행은 결국 '장애'를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고통의 바다에서 우리를 구해주지 못한다. 생과 사를 끊어놓지 못한다.

진언을 욀 때 항상 우리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지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자꾸 나로 하여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만드는가?' 이런 큰 의문을 가질 때 진언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있다. 모든 생각을 끊고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전의 우리 본성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과 물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선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禪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서 있거나 누워있고, 테니스를 치는일이 禪 수행에 포함된다. 禪 아닌 것이 있는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禪 수행에 대해 자기만의 관념을 가지고는 이것에 집착한다. 남전 스님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라고 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남전 스님이 하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변명거리로만 사용하고 수행 정진을 게을리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禪 수행이 아주 어려운 육체적 수행을 팔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군대식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방석에 한 자세로만 앉아 전혀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믿는 것이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일본에서 禪 수행을 했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다리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정도가 다르다'고 하는 스승의 말에 따라 수행을 하다 두 다리 근육이 마비되었다.이는 옳지 않다. 그것은 모양과 괴로움에 집착하는 것으로서,
자세에 집착하는 수행이라고도 할 수 없다.

위대한 중국의 선사인 마조[馬祖] 스님은 젊었을 때 아주 열심히 참선 수행을 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선방을 떠날 줄 몰랐다. 잠자기 위해 눕는 일도 없었다. 어느 날 마조의 스승이 찾아왓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냐?"
"보시다시피 참선 정진을 하고 있읍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부처가 되고 싶읍니다."
"오! 아주 훌륭하구나>"

잠시 후 스승은 아무 말 없이 뜰로 나와 벽돌 조각과 기와 조각을 서로 갈아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조 스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니, 어떻게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고 하십니까?"
"참선으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나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것이나 똑 같지 않느냐?"
순간 마조는 할 말을 잃었다.

"스승님, 제 수행에 잘못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요."
"수례를 끄는 말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채찍으로 수례를치겠느냐, 아니면 말 잔등을 때리겠느냐?"
"당연히 말 잔등을 때려야지요."
"참선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레는 나의 몸이고 말은 너의 마음이다.
본성품을 깨닫고 진정으로 네 마음을 찾고 싶으면 몸을 다그치지 말아라."

이 말에 젊은 마조는 큰 깨달음을 얻어 훗날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다.
이처럼 수행에도 방향과 물음이 중요하다. 진정한 禪이란 몸이 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앉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특별한 자세에 의존하는것이 아니다.

특히 일본 선방에서는 앉은 자세에서 나오는 어떤 강력한 에너지를 얻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때는 고함을 지르게 하기도 한다. 고함소리가 약하면 수행이 약하다고 다그친다. 그런 방법은 참선에대한 어떤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참선이 아니다. 무엇이든 집착하면 문제가 생긴다. 참선은 그야말로 긴장을 푸는 것이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지 말아라. 참선 수행을 특별하게 만들면 마음에 장애를 만든다.

부처님은 살아 계실 때 오로지 법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경전을 가르치지도, 특별한 진언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저 법을 듣고 집에 돌아가서 참선을 했다. 나무나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자기의 본성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과 그의 첫 번째 제자들이 가르침을 얻어 보존하고 우리에게 전해준 것들이다. 만약 불교 수행을 하고싶다면 어떤 말이나 단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술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 번 째 단계이다.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禪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Friday, June 15, 2012

'완장' 찬 사람들

한인사회의 '완장' 찬 사람들 사회팀 차장 김병일

한인회 선관위원 자격은 권력이 아닌 순수 봉사직 공금과용은 명백한 잘못


소설가 윤흥길의 작품에 '완장'이라는 것이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시골마을에 지역 유지가 낚시터를 하기 위해 저수지를 매입한다. 주민은 저수지에서 도둑낚시를 관리하기 위해 임종술을 고용한다. 임종술은 처음에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완장'의 매력에 빠진다. 완장을 권력으로 착각하면서 갖은 행패를 부리게 된다. 금기야 자신을 관리인으로 임명한 사장의 낚시도 금한다. 결국은 해고되고 만다.

탤런트 조형기가 열연한 TV극으로도 화재를 모은 이 작품에서 완장은 주어진 책임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주인이 하달한 임무를 수행하는 책임자를 표시하는 물건이다. 심부른꾼 이라는 표시릴 뿐이다. 그러나 이를 잘못이해하게되면 심부름꾼은 어느순간부터는 권력자로 행동하게 된다. 주변 사람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게[된다.

완장이 주어진 책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ㅇ임무가 무엇인지,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경계선을 넘으면 월권이 되고 권력남용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한인단체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를 취재하다보면 '완장' 찬 사람을 자주 발견한다. 단체장은 물론이고 실무자인 사무국장이나 사무총장 가운데도 완장을 마구 휘두르는 경우가 드믈지 않다.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던 LA한인회장 선거관리위원들을 한번 살펴보자. 이들이 자신의 생업을 제쳐놓고 니름대로 열심히 활동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인회 담당 취재기자로서는 이들이 원칙과 규정을 지키기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수많은 시간을 소비했는지 충분히 알고있다.

그런나 선관위원이라는 완장이 주는 의미를 이들은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2만800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자신들이 고생한 대가에 비하면 그 정도 비용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이들은 반문한다. 중앙칼럼

그러나 그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완장 찬 이의 교만이다. 한인회장 선관위원은 봉사직이다. 이전까지는 무보수가 원칙이었다. 만약 관례대로 내려온 무보수 활동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면 여론의 동의를 얻어 활동비나 식사비 사용을 분명히 밝히고 사용했어야 옳다.

그러나 현 선관위는 그렁게 하지 않았다. 활동비는 활동비대로 책정해놓고 식사는 식사대로 마음놓고 했다. 그 어떤 명분이나 변명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선관위는 공적자금을 과용한 것이다. 개념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아끼려고 노력한 부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애는 애대로 쓰고 욕은욕대로 먹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완장의 의미와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인회도 마찬가지다. 한인회는 선관위가 선거관리자금을 다소 과용했지만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데 한마디 상의나 경고도 없이 무단으로 선관위 자금을 전액 인출한것은 또 다른 완장의 힁포와 다를 바 없다. 최소한 결산공고까지는 기다렸어야 했다. 한인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완장 찬 사람들의 힁포가 사라져야 한다. 완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니다.

또 하나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시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관대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엄격해지자. 오히려 "내가하면 불륜, 남이하면 로맨스"라는 억지사지의 발상과 시각이 지금 한인사회는 필요하다.

Thursday, June 14, 2012

만공스님

만공스님
그러던 만공은 어느 날 화두의 모순점을 발견했다. 모든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또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이중의 의심이 화두의 걸립돌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화두를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러면 이 하나는 과연 무엇인가?"
이중의 의심을 하나의 의심으로 전환시킨 만공은 이것만으로도 탁월한 발상을 한 것이다. 화두의 방향을 이처럼 단순화시킨 뒤부터 만공은 무섭게 정진하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면서 참선수행에 몰두 했다. 이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주지스님이 어느날 만공을 불러 세웠다.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여자가 생긴게냐, 돈 쓸 곳이 생긴 게냐, 스님 생활이 싫으면 이곳을 떠나라."
"그런게 아니오라, 마음속에 큰 의문이 생겨 풀지를 못하고 있응ㅂ니다."
"무슨 의문인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이하나는 어디로 갑니까?"
주지스님은 말이 없었다.
만공은 생각끝에 천정사를 떠나기로 하고 온양에 있는 봉곡사로 거처를 옮겨 불철주야 정진에 들어갔다. 그렇게 두해가 지난 어느 겨울밤, 면벽 정진하던 만공은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쪽벽을 바라보고 화두에 침잠하고 있던 만공은 나중에는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렀는데, 갑작기 눈앞에 있던 서쪽벽이 사라지고 텅빈 허공이 되는 것이었다. 벽이 마치 유리같았다. 밖에있는 모든것이 다 보였다. 바위, 나무, 새, 구름이 보였다. 이서방이 절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김서방이 법당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약수를 먹고 있는것도 보였다.
"와 ------ 내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구나!"
그가 천장을 쳐다보았을 때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고 새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뒤를 돌아보니 소나무가 무성했다. 만공스님은 마음속에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으로 방석을 차고 나왔다.
다음 날 그는 절의 큰 스님을 방문했다.
"제가 드디어 본성을 깨달았읍니다. 그디어 깨달았읍니다."
"오 ,그래, 그럼 질문을 하겠다.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냐?"
"지붕과 벽을보니 아무것도 없군요, 모든것이 사라집니다."만공 스님은 자신있게 말했다.
:저는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읍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때, 갑자기 선사가 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악."
"이제 걸림이 없는것은 어디 있느냐?"
만공이 움칠했다. 눈은 부풀고 얼굴이 붉어지고 벽이 다시굳어졌다. 경허선사가 웃었다.
"지금 진리는 어디에 있느냐?"
만공은 풀이 죽었다.
"모르겠읍니다. 좀 가르쳐주십시요."
"네가 요즘 붙잡고 있는 화두가 무엇이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너는 그 하나를 이해하느냐?"
"아니요, 모르겠읍니다."
"네가 보았던 것은 환상이다. 그것을 간직하지 말아라, 단지 '나는 모른다' 고 하라. 이 모르는 마음이 너의 진정한 스승이다. '오직 모를 뿐'을 언제 어디서나 간직하라."
만공은 더 굳은 결심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오직 모르는 마음을 가지고 3년 동안 열심히 수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염불 시간에 다음과 같은 염불을 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그는 염불을 하면서 종을 쳤다. 소리가 널리퍼져나갔다. 그 순간 만공 스님의 마음이 섬광처럼 번쩍 열렸다. 아주 광대하고 무한대의 순간이었다. 모든 부처가 이 하나의 소리에 빠졌다. 만공 스님은 기쁨에 넘쳤다. 그는 법당으로 들어가 앉아있던 스님을 발로 찼다.
"깨달음을 얻었소, 이 전 우주가 하나다. 나는 부처다 나는 하나다."
이듬해 만공스님은 전국의 스님들을 발로차고 때리면서 두루 여행했다. 그의 기행[奇行]이 소문나면서 그는 아주 유명한 승려가 되었다. 만공스님은 자신을 강하게 믿게 되었고 많은 승려들도 그를 두려워 했다.
"만공은 자유로운 사람이야."
"그는 완전히 무애의 경지에 들어섰어."
이듬해 부처님 오신 날 만공 스님은 마곡사에 들르기로 했다. 전국에서 도반들이 몰려들 것이었다. 마침 경허스님도 그곳에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달려갔다. 그는 경허 스님 방에 찾아가 옷깃을 다듬고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깨닫고 스승님도 깨달았으니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절을 올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큰스님은 내 첫 번째 스승이므로 다른스님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절을 올리겠다.'
그는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경허 스님은 만공의 절을 받으면서 미소만 띠고 있었다. 큰스님은 이 젊은 제자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네가 깨달았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예 그렇습니다."
"오, 훌륭하구나, 내가 질문을 한 두 개 하겠다."
경허스님이 몇개 공안에 대해 묻자 만공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경허스님은 묵묵히 부채를 부치면서 만공의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듣고 있었다. 만공의 이야기가 끝나자 경허 스님은 등을 가르키며 질문을 하나 툭 던졌다.
"이것이 무엇이냐?"
때는 무더운 복중이어서 경허는 옷 속에 등토시를 입고 있었다. 땀이 배지않고 옷 속으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든 토시였다.
"토시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이번에는 부채를 가르키며 물었다. 만공이 대답했다.
"부채입니다."
"그러면 이 토시와 부채가 다르냐, 같으냐?"
만공은 주저하지않고 "토시가 부채이고 부채가 토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한마디에 경허님은 만공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음을 간파했다. 경허 스님은 만공의 깨달음의 경지를 한 순간에 꿰뚫어보고, 그를 골탕먹이기로 작정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기양양해 있는 제자의 미망을 벗겨줄 충격요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다비문[茶毘文]을 아느냐?"
다비문이라면 사람이죽어 장례를 치를 때 외우는 제문이다.
"다비문 마지막 두 문장에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는 말이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눈 달린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말입니다."
"그것 말고 또!"
"------"
만공은 스승의 벼락같은 소리에 깜짝놀라 말을 잃었다. 절망에 빠진 만공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 뜻도 모르면서 어찌 토시를 부채라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나냐. 만법이 하나로 동아간다는 화두는 진척이 없으니 새화두를 주겠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갖고 잇다고 햇다. 그런데 스님 한 분이 조주 스님에게 개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여쭈자 '무[無]'라고 하셨다. 네게 묻겠다. 게에게 불성이 있는냐, 없느냐?"
"------ 잘 모르겠읍니다."
"바로 그 모르는 마음이 너의 진짜 스승이다. 언제나 이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만공은 이듬해 3년동안 통도사 위 백운암에서 조주의 이 '무'자 화두를 붙잡고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문을 걸어잠그고 참선 삼매에 빠져있던 만공은 예불을 알리는 새벽종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께우침을 얻었다. 단 한올의 미혹도 없이 마침내 도를 이루고 부처가 된 것이다. 만공은 곧바로 일어서 당시 스승 경허가 머무르던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절을 세 번 올렸다. 그리고 2년 뒤 스승 경허를 천장사에서 만났다. 만공은 스승에게 그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보림한 것을 낱낱이 아뢰였다. 마침내 경허는 만공이 깨달았음을 인가하고 법을 전했다.
이 만공 스님의 일화는 '노력하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한 출가 수행자의 진리에 대한 큰 의문(Great question), 진리를 깨닫겠다는 큰 용기(Great courage)에 대해 가르쳐 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깨달음의 수준에 관한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깨달음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가. 얼마나 완벽한가. 벽면 정진하던 만공 스님이 눈앞에 있던 서쪽벽이 사라지고 텅 빈 허공이 되었다는 첫 번째 경험은 완벽한 공[空]과 자유의 영역을 얻었다는 것이다. 벽과 천장을 보았을 때 오로지 맑은 공간이 있었다. 어떤 경계도 없이 자신 앞에 오고갖는 모든 것을 드대로 볼수 있었다. 이것은 자유를 얻고 모든 우주적 실체의 상호 연관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아주 대단한 일이다. 대게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수행을 멈춘다. 그리고 그 결과 신비한 힘이나 특별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것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공과 자유의 영역을 깨달았다면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모양은 모양이고 공은 공이다' 를 얻는 것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는 밖에서 짖는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수행을 열심히 한 뒤 얻는 공의 영역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주와 내가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된다. 하늘은 단지 푸르다 설탕과 내가 하나가 된다. 설탕은 달다. 개와 내가 하나가 된다. 개는 짖는다. 완벽한 세계, 하나로 돌아오는 세계이다. 먼저 실체와 실상을 얻고 그다음에 순간순간 실용을 얻는것이 올바른 삶이다. 이것이 부처와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침이고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이것을 일컬어 조사선이라 한다. 끝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Wednesday, June 13, 2012

조사선

조사선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 시계가 있다. 이것을 시계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시계가 아니라고 하면 공함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우주의 본질은 하나이므로 '시계는 나무에고 나무가 시계이다'라고 답할수도 있다. 이것은 의리선과 관련된, 단지 개념적인 설명이다. 아니면 '구름이 희색이다'. '눈동자가 검다'와같이 대답할 수도있다. 물론 이들 역시 어떤 진실의 영역을 표현한다. 하지만 조사선에서 이런 대답들은 옳은 것이 아니다.
한 개의 질문에는 한 개의 대답만이 있다. 시계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시계를 보면된다. 그리고 '아, 지금이 2시 15분 이구나' 하고 답하면 된다. 그것이 조사선이다. 그것이 조사선이다. 아주 쉽다. 실체, 진리, 기능이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순간순간 바른 실천이고 바른 삶이다. 조금 전에 나는 조사선은 형이상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두가지 표현 형태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 둘 다 «반야심경»의 가장 높은 가르침을 표현한다. '모양은 모양이고 공은 공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벽은 하얗다. 밖에 개가 짖는다. 우리 마음은 크고 둥근 거울 같다. 오로지 비추고 비추고 비추기만 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 즉 여여[如如. truth like-this]이다.
그러나 진리를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도울 수 없다. 물론 우주처럼 맑은 거울같은 마음을 가져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춰야 한다. 하얀공을 비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단지 같이 배고파하면 되는가. 슬픈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저 같이 슬퍼하면 되는가. 단순히 진리를 비추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좀더 완벽한 답이 필요하다.
조사선은 아주 신중한 수행이다. 순간순간 실체, 실상을 깨달아 실용을 행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즉여[卽如, truth like-this]라고 한다.
"우주처럼 맑은마음을 지켜라. 그러면서도 바늘 끝처럼 기능하도록 마음을 내버려둬라."
승려 가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가사는 여러조각을 붙여 아주 조심스럽게 바느질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전체 옷을 다 뜯어서 다시 꿰메야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와 같이 맑은 마음을 가져 마음을 바늘 끝처럼 기능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마치 바늘끝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이 진리들을 제대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진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능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않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즉각적으로 순간순간 진리를 올바로 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바른 삶이다. 그것은 우리의 바른상뢍, 주변 살황과 우리와의 비른관계, 미른 기늘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실상을 깨달아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도와주는 실용의 삶이다.
최상승선이 가르치는 자비란 지혜가 결부된 사랑이다. 지혜가 없는 사랑은 순간순간 다른 상황에서 즉각즉각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가 없고, 요구에 응답할 수도 없다. 당신이 진리를 얻어 이해한 것을 경험을 통해 소화하면 지혜가 나타난다. 사랑 플러스 자비가 지혜이다. 각 상황에 대한 각각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이것은 아주높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른사람을 위해 살고 올바른 지혜를 얻기위해서 우리는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오래전 중국에 동산[洞山]이라는 선승이 "부처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삼베 서 근이다"라고 말했다. 질문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궁금증을 다른 선승에게 동산 스님의 말에 대해 물었다.
"동산 선사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삼베 서 근' 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승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대답했다.
"북쪽에 소나무가 있고 남쪽에 대나무가 있다."
질문을 한 스님은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오랜기간 선 수행을 알려진 또 다른 스님에게 가서 이 두 선사의 말에대해 여쭈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입을 열면 이빨이 노랗게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먼저 너는 너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다음에야 모든게 명확해진다."
조사선은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곧 진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멍멍' 짖는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볼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한 스님이 한 번은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또 다른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인생이 무엇입니까?"
"차나마셔라."
"불교가 무엇입니까?"
"차나 마셔라."
이런 것들이 진리의 기능, 즉 실용이다. 그 순간에 오직 '------할뿐'이다
이 의리선,여래선, 조사선 세가지 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나의 큰 스승이신 만공 대선사님은 열세 살 때 출가하셨다. 당시 만공 큰스님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강원으로 알려진 동학사에서 한 강사스님의 시자로 살았다. 전국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붙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위해 동학사로 왔다. 어느 날 강원 졸업식이 열렸다. 노스님이 연단에 올라가 졸업사를 했다.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걸음걸이는 똑바로 해야 한다. 문을 열고 닫을 때도 소리가 나지않게 애야한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것은 규법과 질서를 알고 이를 행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말은 고운 말만 가려하고 남을 해치거나 거스르는 말은 삼가야 한다.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말이란 한번 입 밖으로 나가면 주워담을 수 없는 재앙의 씨이다. 나무도 비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쓺모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은 그릇이라야 쓸 모가있다. 그래야 큰절을 짓는 재목으로 쓰이고, 많은 것을 담는 사발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분들은 큰 나무가 되어 부처님의 법을 담는 큰 그릇이 되어야한다."
이를 듣고있던 만공스님은 큰 감동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스님이 자리로 돌아와 보니 저쪽 끝에 나이 든 승려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기워입은 헌옷에 긴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었지만 눈 만큼은 다이야몬드처럼 빛났다. 다름아닌 경허 스님이었다. 이미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사로 유명해진 그는 마침 전국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경허 스님을 알아본 노스님이 법문을 청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노스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닙니다. 나는 그저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일 뿐입니다. 아무 할 말이 없읍니다." 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노스님은 떼를 쓰듯 졸랐다. 마침내 경허 스님이 노스님의 청에 못 이겨 연단위로 올라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모두 승려입니다. 승려들은 개인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오로지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큰 나무 혹은 부처님의 법을 담는 큰그릇이 도려고 하는 것은 진정 깨달은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큰그릇은 다만 소용이 큰 데 쓰여집니다. 작은 그릇은 작은 소용이 됩니다. 크건, 작건, 그릇들은 각자 그들의 역할이 있읍니다.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읍니다. 어려분들은 목수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목수라면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결코 버리지 않읍니다. 어떤 나무든지 잘 사용합니다. 좋고 나쁜 것은 없읍니다. 좋은 것들은 그들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면 됩니다. 나쁜것들 역시 잘 사용하면 됩니다. 좋다고 집착하고 나쁘다고 버리지 마십시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사용해서 바르게 쓰면 됩니다. 좋고 나쁜 친구를 모두 사귀십시요. 어느것도 물리치지 마십시요.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제 미지막 말씀은 모든 개념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멀리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만공은 깜짝 놀랐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스승이다.'
만공은 절을 떠나는 경허 스님을 뛰듯이 쫓아갔다.
"스님 제자기 되고 싶습니다. 받아주십시요,"
"네가 누구냐?"
"저는 모양도 이름도 없읍니다."
"모양도, 이름도 없으면 무엇으로 나를 따르는가?"
"스님의 말씀에 따름니다."
"너는 내 말에 집착해 있구나."
"아닙니다. 저는 결코 큰스님 말씀에 집착한 적이 없읍니다. 단지 스님의 마음을 따를 뿐입니다."
경허 스님은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밀했다.
"너는 아직 어리다. 이이들은 불교를 배울 수 없어."
그러자 만공스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인간은 나이가 있지만 본성에는 나이가 있읍니까, 없읍니까?"
경허 스님은 이말에 크게 웃었다.
"아주 버릇없는 아이로구나, 너는 부처님을 죽이고 먹었구나, 누군가 너를 돌봐 주어야만 하겠다. 그래 , 좋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침내 경허 스님의 제자가 된 만공은 경허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던 천장사로 가서 경허스닌의 친형님인 태허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만공은 천장사에서 5년동안 살았다. 그러나 경허 스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느라고 이 제자를 본 척도 안 했다. 그동안 만공은 아주 열심히 수행을 했다. 만공스님은 목소리도 좋아 염불스님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많은 불자들이 행사 때마다 그를 초청했다. 어떤날은 공양도 건너뛰면서 염불을 해주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 그날도 염불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법당 문을 나서던 길이었다. 절 뜰을 가로질러 가는데, 마을에 사는 어린 소년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어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순간 만공스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껏 천장사에서 수 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 어린 소년의 질문에 만공스님은 입니 탁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공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실망하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만공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밥을 먹으나 항상 머릿속에 이 화두를 매달고 살았다. '모든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나무도 , 구름도, 산도, 물도, 싫어함도, 좋아함도, 태여남도, 죽음도 하나로 돌아간다. 추위도, 더위도,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도 다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면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모르겠다------'. 계속
숭상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Monday, June 11, 2012

우리가 잊고있는 입양인

우리가 잊고있는 입양인 삶의 향기 김기택 시인

4년여 전 작가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버클리에 머물 때 입양인 세미니를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가정에서 자라는 해외 입양아들에대한 연구 발표와 토론 자리였다.

주제 발표를 보고 입양아 문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느낄 수 있었고, 입양인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청중의 웃음과 탄식에서 세미나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100명이 넘는 청중 대부분이 해외에서 입양한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라는 것과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들의 진지한 눈빛과 오랫동안 참았다가 쏟아내는 듯한 많은 질문이었다.

한국계 입양인 예술가들이 가족과 친구들을 초청해 오클랜드의 한 한국식당에서 여는 공연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공연은 물론이고 한국인,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으로 이루너진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과 응원도 볼만 했다. "당신이 한 밤, 이광수라는 한국이름을 기억하는/ 그시간에 부를 구있는 하나의 노래, 광수는/ 밝게 빛나라는 뜻, 뭔가를 비출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지." (리 헤리, '구원') 입양인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의 목소리도 기억에 남아있다.

50년 넘게 수많은 아이들이 미국에 보내지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는동안 그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미국에서는 해외 입양인 문제가 새로운 문화가 되고있었다. 해외 입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만한 연령으로 성장하면서 입양인 문화는 미국의 일상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해외 입양인 문제는 과거의 일이고 남의 일이다. 전후 혼란기에 굶즈리고 헐벗은 고아들을 위해 시작된 해외 입양이 60년간 20만 명에 이르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도 그렇다. 미국과 유럽으로 간 많은 입양인들이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날아와 한국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좌우충돌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데도 그렇다.



피부색 다른 이이를 맡은 양부모의 사랑•헌신 앞에 내면의 상처가 있다 해도 차마 드러낼 수가 없다.



해외 입양인들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신이 정장과정에서 겪은 인종차별주의, 상실감, 전신적 충격의 가혹한 경험을 말하지 않는 데 익숙하다고 한다. 그들은 백인사회에 동화되어 침물속에 살다가 중년이후에 이르러서야 외로움과 소외감이 주는 고통을 깨닫고 치유하게 된다고 한다('인종간 입양인 사회학')

인종이 다른 아이를 기꺼이 맡아 키우는 양부모의 깊은 사랑과 헌신 앞에서 입양인은 내면의 상처가 있어도 차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은 잠재해있고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국계 임양인 작가 제인 정 트렌카의 자전적 소설 '피의 언어'는 이런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근 프랑스에서 장관이 된 한국계 입양인 플뢰르 펠르랭이 화제다. 피부색이 누런 입양인이 온갖 어려움과 편견을 이겨내고 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계 입양인이란 것이 우리가 열광할 만한 일일까? 한국인의 우수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해외 입양아라는 주홍글씨와 상처는 우리가 준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고 오늘의 영광스러운 자리애 오르게 한 것은 그와 양부모의 노력이다. 그는 더이상 한국인도 버려진 아이도 아니며 여느 프랑스인과도 다르지 않는 프랑스인이다.

성공한 소수의 입양인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해외 입양의 그늘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상처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국에 가서 헤메며 고민하는 입양인들에게도 정책적인 배려와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느 프랑스인과도 다르지 않은 프랑스인

"난 세계에서 자존심 강하고 자부심이 센 자랑스런 프랑스인
--- 내년방한, 가족 아닌 한국문화 찾기--"

올랑드 정부 장과 된 한국계 팰르랭--- 한국언론 첫 인터뷰
"거울에 비친 내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나는 프랑스인이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39) 장관은 자신이 프랑스인임을 강조했다. 서울에서 한국인 부모의 딸로 태어난 그는 생후 6개월만에 프랑스로 입양됐다.
그리고 지난달 대선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을 물리치고 집권한 프랑수아 올랑드(58) 프랑스 대통령에의해 중소기업•혁신•디지털 경제 분야의 담당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올랑드 대선 캠프에 경제분야 참모로 참여했다.
펠르랭 장관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장관 취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기자들과 만났다. 한국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잇따르자 파리의 경제 관련부처가 모여있는 정부청사에서 회견형식의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다른나라에서 장관이 된것을 신기해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많은 관심에 놀랐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다소 의아한 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자란곳을 중시 나에대한 한국 관심 놀라워
삼성•LG 세계기업 된 비결 한국의 경험 공부하고 싶어

그는 "입양인, 아시아계 인종이라는 사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은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혈통을 중시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태어나고 자란 곳을 읨미있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에서 이민자 통합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번진일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는 말도 했다.
펠르랭 장관은 길러준 프랑스의 부모와 편견없이 자신을 받아들여준 프랑스 사회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부모님의 세심한 보살핌 때문에 지적 호기심을 기를 수 있었고, 동양인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며 환하게 웃었다.
원자물리학 박사의 딸로자란 그는 프랑스 고위 관료의 산실인 국립행정학교(ENA) 를 최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하고 감사원에서 한동안 일했다. ENA 임학은 한국에서의 고등고시 합격에 해당된다.
펠르랭 장관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과 관련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내년쯤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내가 한국에 간다면 그것은 다른 관광객들처럼 한국 문화를 알기위한 것일 뿐 생물학적 가족을 찾기위한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한국의 기업혁신 비결을 배우고 4세대(4G) 이동통신 기술을 프랑스에 도입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프랑스의 초고속 통신망 구축에 한국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삼성과 LG가 어떻게 제품 혁신을 이뤄 세계일류기업으로 성장했는지를 공부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펠르랭 장관은 옆에서 지켜본 올랑드 대통령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확고히 지키는 일관성 있는 정치인이며, 개인적 욕심을 앞세우지 않는 도덕주의자"라고 평가했다.

Sunday, June 10, 2012

60년 분단 조국의 영도자는!!!

분단 60년, 한민족의 대통령 자격

오는 12월 19일에 있을 한국대선은 아직도 갖가지 변수에 둘러싸여 있다. 여권에서는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독주속에 동기를 알 수 없는 몇몇 사람들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반면 야권에서는 문재인, 손학규, 김두관, 안철수씨 등의 잠룡들이 앞으로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 전혀 안개속이다.

한인 중에서도 미국 시민권자로서 유권자 등록을 마친 사람은 이미 오바마 대통령이나 공화당의 롬니냐 하는것은 어렵지 않게 마음속에 정해놓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대선에 재외국민으로서 투표자격이 있는 동포들은 하루속히 대선후보가 확정돼 후보들을 검증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후보가 선출돼 나가는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미주 동포들로서는 어떤 인물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를 냉철하게 판단해 보기 바란다.

첫번째로는 누가 과연 글로벌 새대에 적합한 소통의 리더쉽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700만 해외동포를 참으로 사해동포[四海同胞]의 개념으로 포옹하면서동포들의 권익향상과 한민족의 정체성 보존에 실질적인 공약을 제시하는 사람을 지지해야한다.

그 다음으로는 누가 과연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적임자인가 하는점을 살펴야 한다. 내년이면 우리는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한다. 1953년7월 이래 실로 60년 동안이나 한반도는 전쟁상태를 끝내지 못하고 지금이 시간에도 분쟁과 갈등과 반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제와 민주주의도 일으켜 세워야 하지만 민족화합의 경륜과 고뇌를 쌓아온 통일 대통령도 세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때아닌 색깔논쟁이 한창이다. 야당 인사들이 북한에 관해 발언한 것이나 그들의 과거경력을 가지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종북으로 몰고가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워낙 실정만을 거듭한 끝에 물러가는 대통령이라 그의 말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음 대권후보로 유력시되는 박근혜 전 비대워원장마저 여기에 가담하는 것은 금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위원장을 향해 과거 평양방문을 거론하며 당신도 종북 아니냐는 야당의 반론은 억지주장이다. 남북간에는 더 활발한 왕래가 있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이 북한과 화해 하면서 남북이 자연스럽게 민족공조의 길을 열고 그것을 통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자는 것이 바로 햇빛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지난 두 정권의 평화통일 정책을 무위로 돌려놓고 말았다. 남북간 통로를 꽁꽁 얼어붙게 해놓고 이제와서는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며 색깔론 공세를 펴고 있다니, 그러나 역으로 보면 종북 주장과 탈북자 문제가 크게 대두된 것 자체가 통일을 해야 될 시기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역사의 신호다.

통일 한국은 주변 4대국과 함께 동북아의 5대국이되어 태평양시대의 당당한 주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100년 전과 같은 무력한 민족이 아니다. 국내외 동포들이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룩하고 영광된 조국을 만들어감 으로서 7000만 한민족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위대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

과거 독일을 통일로 이끌었던 헬무트 콜 총리같이 통일에 대한 강한 신념과 깊은 전략을 가진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없는지 아쉬어 진다. 분단국가에서 대권을 꿈꾸는 지도자라면 당연히 분단 극복과 통일의 비젼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분단국가 대통령 후보의 중요한 자격이다.

이대로 괜찮은가?

"빚더미 대한민국, 이대로 괜찮을까?" (타운뉴스 Vol. 907 기획)

국가부채 774조, 공기업 부채 합하면 1,225조

기획재정부가 지난 31일 국가부채가 774조원이라고 수정 발표했다. 기재부는 이날 감사원의 결산검사를 거펴 국회에 제출한 2011 회계년도 국가결산보고서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한 국가부채 774조원은 기존에 발표했던 국가부채 402조 8천억원(지방정부 제외)보다 무려 370조원이나 폭증한 수치로, 이처럼 부채가 폭증한 것은 국가채무에 충당부채, 미지급금 등 발생주의 복식부기 회계기준에 따라 모든 부채를 종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도입한 새 회계방식은 OECD 등 선진국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여기에 국민연금이 포함됐으나 지방정부 부채와 공기업 부채는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기재부는 앞서 지난 4월 30일 '2011 공공기관 경영공시' 발표를 통해 중앙 및 지방정부 부채 함한 국가부채가 420조 7천억원 이라고 발표한바 있다. 지반정부 부채가 17조 9천억원에 달한다는 얘기다.

또한 286개 공공기관의 2011년말 현재 부채는 463조5천억으로 전년도보다 61조8천억원(15.4%)이 폭증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에 새 기준에 따라 발표한 중앙정부 국가부채 463조 5천억원을 단순 합산하면 실질적으로 정부가 떠맡아야할 국가부채는 1천255조 4천억원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한국은행이 잠정집계한 작년 명목 GDP는 1천237조1천억원으로 이미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GDP대비 100%를 넘었다는 충격적 의미다.

한편 앞서 4월 30일 기재부는 참여정부 마지막해인 2007년 약 249조원에 머물던 공공기관 부채가 MB정권 4년간 86%(약 214조원)이나 폭증했다며 MB 집권후 공공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음을 토로한 바 있다.

여기다가 1천조원을 돌파할 실질 가계부채도 부동산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부동산거품이 본격 폭팔할 경우 금융부실이 급증, 재차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하고 그러면 국가부채 급증으로 전이될 게 분명해 스페인 등 유럽 재정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닮았지만' 너무 다른 유대인과 한국인

'닮았지만' 너무 다른 유대인과 한민족

지난 31일과 1일 LA의 고급주택지 벨에어의 럭스호텔에서 '이스라엘 컨퍼런스.가 열렸다. 올해 4회째를 맞는 이스라엘의 벤처기업과 미국의 투자자본을 이어주는 유대계 커뮤니티행사다. 중앙일보는 한인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참관했다.
호텔 입구에서 기자를 가장 먼저 반긴사람은 '높으신 분' 이었다. 지난 8월에 부임한 데이비드 시걸 LA이스라엘 신임총영사이다. 인터뷰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먼저 이야기좀 하자며 소매를 끌었다. 20녀분 계속된 대화 중간중간 시걸 총영사는 VIP들을 기자에게 소개했다.
그중 한명은 주미이스라엘 대사관의 경제차관이다. "이스랑엘 커뮤니티와 한인언론간의 네트워트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이날 첫 강연자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연설은 단 10분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는 이날 밤 9시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한사람 한사람 악수하고, 서로 소개시켜주고, 격려했다. 상대방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날아온 젊은 벤처사업가들이었다. 장래 유망주들엑게 시걸 총영사는 '자국민을 보호하는 외교관'이기 전에 '형님'이자 '멘토' 였다.
컨퍼런스 창립자 샤로나 저스트먼씨에게서도 총영사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뿌리내린 1.5세로 우대계 커뮤니티의 마당발이다. 마케팅 전략 전문가인 그녀는 생업보다 이 행사에 더 시간을 쏟는다.
정부와 현지 커뮤니티의 찰떡궁함이 만든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해 행사에서 2개 이스라엘 벤처사를 미국계 회사가 6억 달러에 샀다. 저스트먼씨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더니 맥 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국심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유대인이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했을 뿐"이라고 했다.
취재 후 돌아오는 차안에서 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성공모델이 눈앞에 있는데 벤치마킹 시도조차 '안 하고' 있는 우리네 현실이 갑갑하기만 했다.
쉼없이 서로 싸운다. 한국 정치판은 온통 막말 뿐이다. 나꼼수로 시작돼 최근 민주당 임수경 의원까지 그들의 입에서 '금배지의 무거움'은 찾아볼 수 없다. 항상 그렇듯 한국 의회는 '식물 국회'가 됐다.
무대를 LA 로 옮기면 더 가관이다. 노인복지회관 운영을 놓고 한인회, 노인회, 회관 재단이사회가 다투고있다. 유대계는 억달러 단위의 벤처 먹거리를 위해 1년간 매진하는데, 한인 선관위는 고작 20만 달러 선거자금 조차 제대로 관리 못하고 있다. 올해 창립 40주년인 LA한인상공회의소도 그 많다는 네트워크를 도대체 어디다 쓰려는지 둥금하다.
한국 정부를 대변한다는 LA 총영사관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이날행사에서는 한국 정부가 구매의사를 밝힌 미사일방어체계 '아이언 돔'의 정수가 공개됐다. 강사는 제작업체인 이스라엘 방산기업 라파엘사의 CEO다. 삼성전자와 제휴한 무선충전 기술사 '파워메트' CEO도 자리했다. 직접 이스라엘로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고맙게도 한자리에 모였는데, 우리정부는 그곳에 없었다.
시걸 총영사는 우리가 남같지 않다고 했다. "이스라엘과 한국은 많이 닮았다. 땅은 좁고, 자원도 부족하다. 적과 대치해 있어 젊은이들은 군대에가야한다. 정부와 국민이 똘똘 뭉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한인들도 비슷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나?"
마땅한 대답을 못했다. 부럽다가, 갑갑해졌다가, 창피해졌다.
중앙컬럼 기획추재팀 편집자 정구현 기자

Saturday, June 9, 2012

혈관 청소하고 살 빼주는 팔방미인

혈관 청소하고 살 빼주는 팔방미인

'차이니스 패러독스' <중국여성 기진 요리 즐겨도 날씬몸매 비결은---> 혈관 씻어주는 양파덕분

기름진 음식을 많아먹는 중국인이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심장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이니스 패머독스' 라고 부른다. 점문가들은 그 비결로 양파를 꼽는다.
양파의 건겅에 좋은 대표적인 성분은 무엇일까. 먼저 양파에 들어있는 케르세틴(quercetin)을 들 수 있다. 케르세틴은 혈중 지질상태를 최적화 한다. 케르세틴은 양파의 항산화물질인 플라보노이드계 일종이다. 혈액속에 좋은 콜레스테롤(HDL) 은 높이고 나쁜 콜레스테롤(LDL)은 낮춘다.
케르세틴은 혈관의 건강을 도와준다. 영국 식품연구소(IFR)의 폴크룬 박사팀은 양파의 케르세틴이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만성염증을 예방한다고 2007년 발표했다. 크룬 박사팀은 양파를 먹은 사람의 혈액을 분석했다.
지금까지 케르세틴은 소화기와 간에서 흡수•분해돼 혈액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혈관 세포에 케르세틴이 남아 지방과 코레스톨이 쌓이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했다.
크룬 박사는 "케르세틴을 비롯한 플라보노이드는 동맥을 튼튼히 한다"며 "동맥벽이 두꺼워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선 하루에 양파 1개전도인 100~200g만 섭취해도 된다." 고 덧붙였다.
양파는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양파는 장에서 지방이 흡수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 케르세틴은 피하지방에 체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막는다. 결국 양파를 먹으면 칼로리 섭취량이 줄면서 체중이 빠진다. 목포대 식품공학과 박양균 교수는 " 중국여성이 기름진 요리를 즐겨 먹는데도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비결은 양파를 함께 먹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정심교 기자

Friday, June 8, 2012

삶의 향기 잘 죽는다는 '웰 다이잉'

삶의 향기 잘 죽는다는 '웰 다이잉'

원불교 미주서부교구장 양윤성 교무

지금은 일상화 되었지만, '노후대책'이나 'Well-dying'(잘 죽는것)이란 말의 역사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아마도, 먹고 살기에 바빴던 과거에는 한가롭게(?)노후나 죽음에 대해 생각할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탓일 겁니다.

대종사께서는, "보통 사람들은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죽는 일도 크게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고,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는 이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고 하셨읍니다.

추모의 달 6월을 맞아 현대인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Well-dying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갖추어야 할 보물을 흔히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공덕이고, 둘은 상생의 좋은 인연들, 셋은 청정한 일념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청정일념입니다. 아무리 공덕을 쌓고 , 선연을 맺었다 할 지라도 청정일념이 아니면 약간의 복이 오히려 죄업으로 변하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생사를 '잠을 자고 깨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최후일념이 곧 최초일념'이란 말이 있듯이, 잠들기 전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그대로 납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잠이들었다면 바로 그사람 생각이 납니다. 최후 순간의 청정일념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세상에서는 장수하면서 객사하지않고 자기 집에서 하루 이틀 아프다가 잠자듯 가는 사람을 죽을 복을 잘 타고 났다고 하지만, 불가에서는 임종의 순간을 당하여 최후 한 생각을 청정히하고 아무런 착심이 없이 따나는 사람을 잘 죽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소에 마음을 챙기지 않고 동동거리며 정신없이 살다가 '이제 마지막 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착심없이 떠나야지'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이제부터 나라는 존재는 없다' '나는 이 시간부터 죽었다.' 이렇게 죽는 연습을 하고 아침이면 다시 태어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착심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최후 순간 우리가 챙겨야 할 청정일념 입니다.

착심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마음입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린 것이지요. 한국 대기업 이사들 중 2/3가 신경 안정제가 없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고, 미국성인의 50%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비우고 내려놓으면 편안해 질 수 있읍니다.

'Somebody로서의 나' '남보다 좀 더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인증받고 싶은 나'를 다 놓아버리면 No-body가 되고, 따로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나가 되어 생사를 떠난 세계, 생사에 자유로운 세계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어느 선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은 사람이 되어라. 온전히 죽으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대로 행동하라.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코미디 같은 끔찍한 진실

코미디 같은 끔찍한 진실
환경신학 이상명 목사 미주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3분의 1명이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잃고 있다. 또 세계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는 120억명의 사람들에게 하루 2,400~2,700Kcal 정도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는 농업생산력을 갖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필자가 최근에 읽었던 책, '세계의 절반은 왜 긂주리는가' 라는 이시대의 코미디 같은 불편하고 끔찍한 진실을 다루었다. 이 책의 저자인 장 지글러(Jean Ziegler)는 2000년부터 2006년 4월까지 유엔인권위원회의 식량 틀별조사관으로 활동한 이 시대 기아문제의 권위자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 세계에서 생산되고 있는 식량은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생산된다. 하지만 하루에도 10만 명의 사람들이 먹지 못해 굶어죽는다고 한다. 식량은 남아도는데도 굶어죽은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은 어찌 된 영문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의 육식소비용 소를 먹이는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나아가 최저가격을 보장하기 위하여 곡물을 대량으로 폐기처분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 반대쪽에는 소보다도 못한 가난한 나라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참혹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다.

세계에는 8억 5천만 명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권력자본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어느 누군가 지적하면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 이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심지어 이러한 끔찍한 메커니즘을 방치하는것이 과포화 상태의 지구촌 인구를 쉽사리 조절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식량이 제대로 분배만 되어도 모두가 충분히 먹고도 남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유엔이나 다른 구제기관들의 요원들은 가뭄, 홍수,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하여 남민 캠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 구제해 줄 수 없어서 선별해야 하는 가슴아픈 상황속에서 일해야 한다.

세계 절반의 가난은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로 인해 구호가 무색해지는 현실이나, 국제기구의 활동이 지닌 딜레마, 사막화의 영향으로 생겨나는 환경난민의 문제, 불평등을 가중시키는 금융자본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냉혹한 국제질서와 급속한 자연파괴의 원인도 모른 채 굶어 죽어나가는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퀭한 눈망울속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슬프고 참혹한 역사을 본다.

이러한 참혹한 충격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형태의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다. 과체중에서 벗어니기 위한 다이어트 열풍과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코미디가 그것이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것이 필요하다. 이 끔찍한 현실을 변화시키기위한 희망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인식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실행으로 옮기는 우리의 변화가 절실하다. "너회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 니라."(마태복음 25: 40)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모두의 깨달음이 될 때, 지구촌에 진정한 살롬(shalom, peace, 평화)이 깃들 것이다.

Tuesday, June 5, 2012

최상승선

최상승선•最上乘禪 Utmost Vehicle Zen

의리선;義理禪 Theoretical Zen
모양이 공이며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여래선 如來禪 Tathagata Zen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無色 無空 , Ne form, no emptiness
조사선 祖師禪 Ptriarchal Zen
모양은 모양이고, 공함도 공함이다.
色卽是色 空卽是空 Form is form, Emptiness is emptiness.

의리선 義理禪: 모양이 공이며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의리선은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론적•개념적 선이다. 모양과 공함의 본질에 대한 단순히 지식적인 이론이다. '모양ㅇ이 공하며 공함이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것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여기 연필이 있다. 당신과 이 연필이 같은가, 틀린가?"하고 물으면 그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같다."
우주 안의 본질이란 모두 똑같다고 알고 있다.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기 땜문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경지가 아니다. 여전히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화계사로 나를 찾아왔다.
"스승님, 제가 깨달았읍니다."
"오, 그래, 무엇을 깨달았느냐?"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아주 훌륭하구나, 그런데 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단 말이냐?"
"누군 누굽니까, 바로 접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팡이로 어깨를 딱 하고 내리쳤다.
"아이쿠."
순간 제자는 입이 탁 막혀서 대답을 못했다.
물론 그는 원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에 대한 어떤것을 이해한 것 뿐이다. 이것이 의리선, 즉 이론적 선, 개념적 선이다. 모양이 공하고 공함이 모양이다라는 것이 단지 매마른 인식(dry cognition)에 머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할 수 없다.
어느 날 또 한 제자가 갑자기 찾아와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큰스님, 저는 똑바로 서 있는 겁니까, 아니면 거꾸로 서있는 겁니까?"
"무슨 말이냐?"
"지구는 둥급니다. 제가 여기 서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 서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꾸로 서있는게 아닙니까. 그들이 바로 서 있으면 제가 거꾸로 서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겅야 네가 더 잘 알것아니냐, 너는 바로 섰다고 생각하느냐, 거꾸로 서 있다고 생각하느냐?"
"모양이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입니다. 바로 서 있는 것이 거꾸로 이고 거꾸로가 바로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알았느냐?"
"제 마음이 알았읍니다."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내게 보여달라."
제자는 순간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어느 날 그는 버스를 타고 가다 지게꾼이 지게를 받쳐놓고 있는데, 옆사람이 잘못해 작대기를 발로 차 지게가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순간 그에게는 큰 의문이 생겼고, 상사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앞서 내게 물었던 생각에 까지 미친 것이다. 지구는 둥근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똑바로 서 있을까,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의문이었다. 머릿속의 혼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 제자는 그 일을 겪은 후 불교를 접했고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양도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면, 바로 서 있는 게 거꾸로 서 있는 것이고, 거꾸로 서 있는 것이 바로 서 있는것이 아닌가? 그는 선을 단지 개념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말에 집착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개념적인 깨달음은 나쁜 병과 같다.
여래선 [如來禪] :모양도 없고 공도 없다 무색무공[無色無空]
«열반경»에서는 '모든 형태가 무상하다. 이것이 나타남과 사라짐의 법칙이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지는 정적의 상태가 더없는 기쁨의 경지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마음속에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없으면 마음은 완벽한 정적이고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이다.
오직 모를 뿐.
여기에 연필이 있다. 당신과 이 연필이 같은가, 다른가? '같다' 라고 해도 나는 당신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때릴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탕!"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의리선에서는 '같다'가 맞는 답이겠지 여래선에서는 그것이 답이 아니다. 여래선에서는 이 '마음' 바로 그 지점이 포인트다 "탕!"
우리는 말로 그것을 표현랗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법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고, 빛도, 어둠도 없고, 하늘도 없고, 딸도 없고, 같은것도 없고, 다른것도 없다. "탕!" 이것이 진짜 공한 마음이다. "탕!" 공한 마음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이 아니다. 이것이 여래선으로서 열반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탕!" 말과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제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보면 항상 '할'이라고 소리를 쳤다. 덕산 스님은 항상 방망이로 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구지 스님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런 행동들은 아주 높은 경지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본성 혹은 절대를 보여주기 위해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물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실체이고 이 실체에는 이름도 모양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도 않다. 단지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것 뿐이다. "탕!" 연필이 너와 같으냐, 다르냐 했을 때 '같다'는 말도 단지 생각일 뿐이고 메마른 이해일 뿐이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연필과 내가 같으냐, 다르냐' 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한다. "탕!" 말이나 생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래선이다.
조사선 祖師禪 :모양은 모양이고 공은 공이다.色卽是色 空卽是空
우주 만물이 똑같은 실체이므로 실체에는 모양도, 이름도 없다. "탕!" 그러나 이 모든 것이는 또한 특정한 기능(用, function)이 있다. 모든존재는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존재이게끔 하는 어떤 기능에 의해 존재 가치가 결정된다. 오로지 그 존재가 지니는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순간순간 사물의 올바른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순간 '바른 기능'을 깨닫는 것이 조사선이다.
조사선은 우리 마음과 우주에 대한 올바른 '기능'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스타일에서는 여여진리 (如如眞理, truth like this)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좀더 완벽하게 말하면 즉여진리 (卽如眞理, truth just like this)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가 "무엇이 부청입니까?" 하고 물으면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설탕은 달다, 소금은 짜다 등등 수없이 많다. 법,마음, 자연, 하느님, 자아, 참 자아, 절대, 에너지, 의식, 실체 모든것이 부처이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아주 넓다, 모든것이 진리이며 모든것이 부처이다. 형이상학적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신중하고 명확하게 답해야만 하는 다양한 종류의 일상에 부딪힌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번영이나 섦명보다는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상황은 완벽한 기능이나 행동을 요구한다.
여기 흰 컵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이것의 본질이 무엇이냐?" 만약 당신이 "컵이다"라고 얘기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컵이 아니라고 하면 공함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만물은 하나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답할 수도 있다. "하늘은 프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배고플 때 먹는다" 등등. 그렇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배고플 때 먹는다. 이 모든 표현이 어떤 우주적 진실의 표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좀 느닷없기도 하다. 이 대답들은 그 순간, 그 상황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컵의 본질이 무엇이냐 했을 때 제대로 답을 하고 싶으면 그냥 컵을 들어 안에있는 물을 마시면 된다 아주 쉽다. 한 질문에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 있다. 그 답은 바로 실용의 세계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기능이다. 계속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선의 분류

선의 분류•禪의 分類 The Classification of Meditation
외도선[外道禪] Outer Path Meditation
범부선[凡夫禪] Common People's Meditation
소승선[小乘禪] Hinayana Meditation
대승선[大乘禪] Mahayana Meditiation
최상승선[最上乘禪] Utmost Vehivle Zen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명상법들이 있으며, 종교마다 독특한 수행법들이 있다. 심지어 불교 안에서조차 많은 종류의 수행법이 있다. 허지만 그것들은 단지 기법에 불과하다 제자들이 가끔 내게 이렇게 묻는다.
"비파사나 명상과 참선, 티베트 불교 수행의 다른점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밥 먹을 때 일본에서는 젓가락으로 먹는다. 한국에서는 숟가락도 함께 쓴다. 서양ㅇ에서는 낭이프와 포큰를 쓴다. 인도에서는 손으로 밥을 먹는다. 방법은 모두 다르며, 도구도 다 다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가 부르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수행을 선택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왜 수행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수행과 명상을 한다. 아마 마음의 평화 같은 좋은 감정ㅇ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수행을 통해 어떤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인간관계를 얻기위해 계속 염불을 외우고 명상이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나쁘지 않다. 그러나 참 수행의 목적은 수행을 통해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자신의 본성품을 발견하고 중생을 돕기 위해서다 진정한 공부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수행할 때 무언가 원하는 마음으로 하면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오히려 지옥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그런 수행은 참 자아를 찾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선 수행법은 마음을 닦는 사람들에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와도선[外道禪]
요즘에는 종교에 상관없이 명상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유럽이나 미국에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수행 방법에도 예수교 명상 수행, 이슬람 수피 수행, 뉴에이지 수행, 요가 수행이 있고, 건강을위한 단정호흡 수행도 있다. 유교, 도교, 힌두교도 나름대로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얻고 싶은 어떤 대상에 혹은 마음의 어떤 상태에 집착해 있으므로 몯두 외도선이다.
몇 년 전 미국의 아주 유명한 명상 센터에 들른 적이 있다. 모든 학생들이 들이 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호흡 수련을ㄹ 하고 있었다. 아주 평화로워 보여서 마치 잠을 다고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수련생ㄷ들은 자신들디 지금하고있는 것이 '기분이 아주 좋은 수행법' 이라고 말했다. 이 수행을 하기만 하면 평화롭고 행복해질 것이라며 나에게 권하기도 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고 행복해 보였다. 수행이 끝나는 날엔 함께 손을잡고 서로 어깨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아주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좋은 감정을 얻어 일종의 평화로운 사랑의 마음을 함께 느껴서 만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즉, 어떤 좋은 감정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호흡수행을 통해 얼마나 큰 행복을 얻었는가에 대해 얘기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감정이라도 언제 변할지 모른다. 좋은 감정상태에 집착하는 수행은 나쁜 감정이 생기면 수행을 하기 전보다 더욱 슬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약과도 같다.
행복이나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의 반대인 불행도 함께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분법적인 세계가 나온다. 어떤 대상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면 언제나 그렇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어떤 바깥 세계나 감정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이런종류의 수행은 으례 어떤 감정이나 대상에 의존한다. 그것은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 그리하여 이런 대상을 간직하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 행복한 감정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떤 대상, 감정, 관념에 집착해 있는 이런 수행을 외도선이라 부른다.
범부선[凡夫禪]
범부선은 일상 활동에 집중하기 위한 명상 수행으로, 요즘 아주 유행하는 것이다. 집중명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수행을 하면 머리가 좋아지고 글씨를 잘 쓰게 되고 건강이 좋아지고 인간관계는 물론 사업도 잘된다고 하는 것이다.
글쓰기, 그림, 회화에서도 명상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다도[茶道]라든가 서예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혹은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명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에 그림도 잘 그릴 수 있고 피아노도 잘 칠 수 있다. 다도에도 더 집중할 수 있다. 정신과 치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종류의 수행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본성을 찾는데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즉, 삶과 죽음이라는 수레바퀴를 벗어나도록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가르침이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런 종류의 명상 수행은 중생을 돕겠다는 서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 '나, 나의, 나를(I, my, me)'이라는 이기적인 마음만을 키울 뿐이다. '나는 내 감정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내 몸이 좀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음악이나 미술에 일인자가 되겠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나'라는 것음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원한다는 것은 수행할 때마다 어떤 대상을 갖는다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면 그것은 실수이다. 어떤 주제나 대상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고통의 뿌리를 없애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 무언가를 원하는 명상은 항상 주제나 대상을 만들고 이것 저것 좋고 나쁨을 만든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마음에 이런저런 대상을 만드는 수행은, 그것이 설사 좋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나, 나의, 나를,'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태의 마음으로 수행을 한다면 범부선 수행을 할 뿐이다.
소승선[小乘禪]
소승선은 소승불교의 수행이다 즉, 앞서, 소승불교에서 얘기한 무상, 무아를 관하고 부정관을 얻어 열반에 달하는 선이다. 최근 서구에서 소승선은 아주 인기를 끌고있다. 이른바 비파사나 명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수행은 부정관, 무상과, 무아관을 얻는데 도움을 준다. 이런 수행은 계(sila)를 지키고 균형잡힌 마음 (samadhi)을 유지하고 지혜(prajna)를 얻는 것을 강조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완벽한 정적과 소멸,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대승선[大乘禪]
대승선은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기반ㅇ을 둔 수행이다. 여섯가지 대승ㅇ불교의 가르침에 기본을 두고 있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통찰, 공허함에 대한 통찰, 중도에 관한 통찰, 현상의 본질에대한 통찰, 모든 현상의 상호침투, 그리고 현상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등이다 이 여섯가지 통찰에 대한 수행은 «화엄경»의 가르침으로 표현된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 모든 부처님과 만물의 실체, 실상을 남김없이 알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마음으로 만들어진다는 법계의 본질을 관하라.
[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최상승선 [最上乘禪]
이 세상에 모든것이 오로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 마음을 만드는가? 직접적으로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최상승선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 깨달은의 경지를 간과하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개념적, 학문적, 지적인 측면의 의리선[義理禪]이다. 그다음 단계는 공허함과 마음과 우주의 실체에 대해 인식하는 여래선[如來禪]이다 마지막 최상의 단계인 조사선[祖師禪]은 있는 그대로 만물이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아[大我], 즉 큰 나를 깨닫는 것이다. 큰나[大我]란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앞서 언급한 깨달음의 세가지 경지는 하나이다. 다만 설명을 위해 단순화 시키고 분류한 것일 뿐이다 봄더 자세히 들어가보자.

Sunday, June 3, 2012

5월에 생각하는 두 대통령

5월에 생각하는 두 대통령
박정희와 노무현 대통령 삶의 행로는 정반대였지만 성품에는 공통점이 많아
박정희와 노무현,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듯한 '극과 극'이다. 총칼로 민주주의 를 무너뜨려 권력을 거머쥔 고 박정히 전 대통령, 그의 말대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시민운동에 힘입어 권좌에 오른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검은 선글래스기 박 대통령의 아이콘이었다면 노 대통령의 그것은 배 속이 훤히 보이는 노란 돼지저금통일 것이다. 밖 대통령은 권력의 마력에 빠져 결국 헌법을 페기하고 긴급조치를 발동시켜 영구집권을 꾀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그의 거친 고백대로 권력에 대한 희의가 컸다.
이렇듯 삶의 내용에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지만 박• 노 두 대통령은 성품에 있어 공통점이 적지않다. 나는 이들의 공통점을 A•B•C•로 정리한다.
먼저 이들은 '분노(Anger)'의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허약함과 궁핍의 원인을 무력한 지도층에서 찾았다. 목적의식과 허례허식을 심어주었다고 믿었다. 박 대통령은 이것으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겠다고 결심한다. 무인[武人]인 그가 손수 동요와도 같은 노래를 지어 국민이 부르도록 했다. 이렇게 그에겐 아이러니한 면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기득권자들에 대한 분노가 넘쳤다. 그는 보통사람들이 세상을 밝고, 맑고, 푸르게 하는 주체라고 파악했다. 이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며 좌절케 하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시국사건재판, 국회첨문회, 그리고 노동자들의 시위현장에서 터져나왔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그의 분노는 그를 소위 '스타'로 만들었다. 역시 아이러니였다.
이 두 대통령은 나라의 '기본(Basics)'을 바꿔야 산다고 믿었다. 박 대통령은 '조국근대화'를 외쳤다. 그가 꿈꾸는 나라는 '새마을'이었다.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노랫말이지만 이보다 더 정확히 나라의 기본을 요약한 문장은 찾기어렵다.
노 대통령은 '원칙과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의 틀을 만들려 했다. 이런사회를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의 애창곡 '상록수'는 그 어느 명 연설보다 그의 생각을 더 잘 정리해 준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맞고 눈보라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도전의식(Challenge)'도 공유했다. 이들은 제도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틀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들의 도전의식은 또 하나의 'C'를 낳는다. Confidant, 즉 가슴속을 들어내 보이고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동지를 뜻한다. 박•노 전 대통령 모두 이들의 이름을 딴 '교[敎]'의 '전도자' 로 불릴 만큼 동지의식과 충성심이 강했던 젊은 측근들이 있었다.
박 대통령과 노 대통령은 죽음(Death) 의 순간에 서로 공유한 성품을 잘 드러냈다. 총상을 입은 박 전대통령의 마지막 말은 "난 괜찮아" 였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부엉바위로 향하기 전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고 적었다.
풀어보면 "난 괜찮다"와 같은 맥락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철저하게 주변을 의식한 두 전 대통령,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일로 존재 이유를 삼았던 이들은 자기희생적 에고이스트들은 아니었을까.
박 대통령의 등극과 노 대통령의 서거는 모두 5월의 역사다. 한국사에 있어 참으로 숨가빴던 5월을 보내며 떠올려본 난상[亂想]이다

Saturday, June 2, 2012

나는 왜 이 길을 걸었나?

나는 왜 이 길을 걸었나?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 800km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모두 걸었다. 정확히 43일 걸렸다. 남들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정직하게 한발한발 내닫은 결과다. 그러고 보면 발이 참 무섭다. 생장피에드포르를 출발 해 피레네산맥을 넘고 바스크와 나바라, 그리고 라 리오하 지방을 거쳐 황량한 메세타 지역을 가로질러 다시 칸타브리아의 주도이자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기까지 '카미노 데 산티아고'라 불리는 그 길은 분명 고통의 연속이었다. 단 하루도 쉬운 날이 없었다.

며칠씩 계속된 비와 눈보라, 심지어 우박과 세찬 바람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불꽃같은 스페인의 태양마저 겹쳐지며 정말이지 더는 못 걷겠다는 탄식이 나올 즈음에야 그날의 걷기는 끝이나곤 했다. 그 덕분에 발에 물집이 잡혀터지고 응어리져 만신창이가 되기 일쑤였고 막바지에는 발을 땅에 디디기조차 고통스러울 정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어린애를 등에 짊어진 듯 무거운 배낭을 시종일과 지고 다니다 보니 허리를 곧추세우기도 쉽지 않았다.

# 하지만 이 길은 내게 그 고통 이상의 것을 선물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심지어 내 가장 깊은 곳까지 뒤집어 놓았다. 씨앗을 뿌리려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밭고랑을 몽땅 갈아엎은 것이 바로 이 길이었다. 그것도 바닥이보일만큼 깊이! 깊게 갈아엎엉야 삶의 진짜 속살이 나온다. 덕분에 산티아고 가는길을 걷는 동안 나는 실컷 울었고 내 마음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한번은 밤을 새우며 걸은적이 있다.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다. 걷고, 먹고, 자다 다시 걷는 반복된 생활이 자칫 또 하나의 매너리즘을 만드는 것 같아 그걸 한번 흔들기로 작정한 거였다. 인생이란 때로 흔들어줘야 제 맛을 낸다. 가만히 놔두면 침전물이 생기는 생과일주스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이국에서 초행길을 그것도 산길을 밤에 오르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서둘지 않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뜻하는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그것을 따라 걸었다.

밤이긴 했지만 내가 지나는 길이 광활한 밀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오르고 있읍을 알았다. 드디어 새벽 미명에 790m높이의 페르돈고개에 닿았다. 순례자들의 철동상이 늘어서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나는 페르돈고개에서 침낭으로 몸을감싼 채 한시간이상 동트기를 기다렸다. 정말 추웠다. 온몸이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더는 견디기 힘들만큼 돼서야 비로서 동이텄다. 더 이상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바로 그 아슴프레한 순긴에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찍은 것은 언덕 위에 길게 늘어선 순례자들의 철동상이었지만 정작 진짜로 찍힌것은 나 자신의 마음바닥이었다. 그 순간 나와 순례자들의 철동상도 하나가 됐다.

# 40일 넘게 절대고독 속에 홀로 걸은 산티아고 가는길은 누구와 경쟁하며 가는 길이 아니다. 여럿이 함께 가든 혼자가든 자아를 찾아가는 고독한 길이다. 고독은 사람을 숙성시킨다. 마치 산티아고 가는길을 걸으며 즐겨 먹었던 하몽처럼! 그것은 아마도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만들기 힘든 거대한 고독의 시•공간이리라.

그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가장 밑바닥이 드러났다. 그런 가운데 가족의 소중함과 기본의 절실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했다. 진짜 소중한 것은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산티아고 가는길은 높고 높은 교회의 첨탑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다. 낮고 낮은 바닥으로,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진짜 소중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 나는 다시 산티아고를 떠나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니스테레를 향해간다. 말 뜻 그대로 거기는 종점이다. 삶에서 최고의 매력은 끝까지 하는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따로 없다. 끝까지 하면 모두 이기는 것이다.

"산티아고 가는길은 바닥까지 낮아지는 길이었다. 그릭은 내 인생의 밭고랑을 밑바닥까지 뒤집었고 그때 비로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뭔지를 깨닫게 했다."

논설위원 atonbit@joongang.co.kr

Friday, June 1, 2012

화날 땐 걸어라

화날 땐 걸어라, 들숨•날숨에 세 걸음씩

얻울한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억지로 참다가 생기는 병이 있다. 바로 화병이다. 반복해 분노를 참다가 분노가 누적돼 발병하는 스트레스성 질환의 일종이다. 초기엔 분노가 폭팔하는 증상을 봉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온몸이 화끈거린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심리적으로 우울•불안 같은 증상을 함께 겪기도 한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화병연구센터에 따르면 화병의 유병률은 3~5% 정도다. 예전에는 고부간 갈등으로 며느리에게 생겼다면, 요즘엔 며느리 눈치에 시어머니가 앓는 경우도 많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남성도 화병에 걸리기도 한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교수로부터 화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대해 들어봤다.

화병은 무슨 병인가

"가족간 갈등, 사업 실패,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등으로 사람들은 스트레스기 쌓인다. 이런 스트레스로 생긴 울화를 속으로만 삭이다가 생기는 병이 화병이다. 6개월 이상 장기간에 걸쳐 증상이 누적된다. 한국인 특유의 감정인 한[恨]을 떠올리면 애해하기 쉽다. '참는 것이 미덕' 이라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에서 많이 나타난다.

미국 정신의학회에서도 1995년 화병을 'hwabyung'(화병)이라는 병명으로 그대로 표기했다. 화병 환자가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ㅁ많다는 게 이유다. 한국인은 20묭 중 1명은 화병을 경험했다는 통계도 있다.

" ㅡ어떤 증상을 보이나.

"한의학에서 화[火]는 불의 성질이 있다고 본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치솟아 오른다. 불길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병에 걸리면 가슴부터 시작해 머리위로 화가 올라온다. 화가나면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증상을 보이는 이유다. 감정적으로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중심으로 불안 • 우울 증상을 호소한다. 사소한 일에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조절하기 힘들거나 삶이 허무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뚜껑이 닫혀있는 주전자에 불(스트레스)를 계속 가할 때 나타나는 반응과 비슷하다."

ㅡ요즘엔 남성도 많이 걸린다던데

"생존경쟁을 부추기는 치밀한 사회 분위기에 개인파산 • 이혼 등이 영향을 많이 끼쳤다. 예전에는 화병환자의 10%에 불과했지만 요즘엔 30% 수준으로 남성 화병환자기 많이 늘었다.

남녀간 화병의 원인은 조금 다르다. 여성은 가족 간 갈등등이 화병의 주요 원인이다. 반면 남성은 직장이나 동료간 갈등이나 실직이나 장래에 대한 두려움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화병의 패턴도 남녀가 조금 다르다. 여성은 분노를 참은 상태에서 가슴이 답답하거나 열이 치밀어 오르는 신체적 증상을 호소한다. 기간도 길다. 하지만 남성은 분노를 참지않고 화를 분출해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급성화병 증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ㅡ우울중우로 착각하기도 한다던데, 화병과 우울증은 서로 다른가.
"화병과 우울증은 서로 다르지만 연관이 많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화병을 않고 있다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우울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다가 화병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조사 결과 화병 환자의 44%는 우울증을 함께 겪고 있다. 화병이 악화되면 우울증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화병과 우울증은 서로 다른 병이다.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화병이 치료되지 않는다.

중년 여성의 경우에는 갱년기 증후군과 유사해 갱년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면 병원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

ㅡ명상으로도 치료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치료하나.

"우선 전문의와 상담을 통해 화병의 원인인 분노를 풀어내야 한다.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 마음속에서 정리한다. 이 과정만 잘 해도 어느정도 증상이 즐어든다. 그 뒤엔 침•약물로 화병증상을 치료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화를 다스리는 것이다.

화병에서 벗어나기위해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마음속 어디엔가 숨어있는 자애로운 마음을 끌어내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우선 화가 났을 때 화를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화를내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또 다른 화를 불러오는 분노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이 도움이 된다. 명상은 몸전체 근육을 이완하고 뇌에 산소를 공급해준다. 이를통해 일과 공부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뇌 활동이 촉진돼 창의성을 높이기도 한다. 화병치료 효과도 임상시험으로 입증됐다. 4주간 임상시험 결과 신체적 심리적 증상이 이전보다 큰 폭으로 줄어들고 신체적•심리적 증상이 이전보다 큰 폭으로 줄었다. 화병환자들 역시 예전보다 화를 내는 회수가 줄어들고 신체적 증상도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화병이 재발하는 것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ㅡ화병의 예방법은.

"화병과 스트레스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균형을 찾아야한다. 무작정 걷는것도 한 방법이다. 걸으면서 자신의 리듬을 찾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찾기도 한다. 명상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다. 일반적으로 세 걸음에 한 호흡 정도를 추천한다. 숨을 들이수면서 세 걸음, 그리고 내쉬면서 세 걸음을 걷는다. 등산, 화초 가꾸기, 노래부르기 같은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도 스트레스를 줄여 화병 예방에 도움이된다.
주간중앙 권선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