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2, 2012

만행 무량스님

만행 무량스님

무량스님은 내가 평생 동안 만났던 사람 중에서 몇 안 되는 아주 인상적인 분이시다. 나는 그가 큰스님 다음으로 ‘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강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아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잘 생기고 머리도 좋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 한 가지 그를 덮친 불행이 있었다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 일은 생각이 깊었던 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그의 얼굴은 흡사 조각처럼 말고 아름답다. 특히 그의 크고 푸른 눈은 정말 ‘예술’이다 그 푸르고 맑고 깊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젠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무량스님의 맑은 눈만 보고도 ‘수행을 하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냐’며 감탄한다. 스님의 맑은 눈은 그 어떤 백 마디의 가르침보다 확실한 것이다.
무량스님은 미국에서 가장 좋은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일 대학에 입학해 지리학을 공부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 우주에 대해서 탐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지리학은 이과적인 상상력과 문과적인 상상력을 둘 다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그는 학과 공부 이외에도 요가수행에 심취했다. 그는 나에게 “만약 스님이 안 되었더라면 히말라야에서 요가수행을 하는 요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량스님은 1978년 예일 대학에 강연 왔던 숭산 큰스님을 만난 뒤 큰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인근 뉴헤에븐 젠센터에서 참선수행을 시작했다. 1980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변호사로 성공한 아버지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을 바랐지만 큰스님을 따라 한국으로 와 버렸다. 그리고 1983년 출가를 했다.
무량스님은 서울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만든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84년 화계사에 최초로 국제성원을 만든 뒤 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다. 그 동안 연세어학당에서 한국말 공부도 열심히 하셔서 한국말도 아주 유창하다.
무량스님은 한국에서 첫 번째로 유명해진 외국인 스님이기도 하다. 88 올림픽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방송국 기자들이 당시 미국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한 큰스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무량스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도왔다. 최초로 한국 불교를 미국에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하신 것이다.
무량스님은 또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이다. 한국에서 큰스님의 비서로 있을 때 큰스님이 해외 강연으로 국내를 비우시면 지체 없이 암자로 들어가 홀로 수행하셨다. 수덕사 인근의 한 암자에서 1년 동안 혼자서 수행하시기도 했고 미국으로 가기 전 1년 동안은 남한 땅 전체를 도보로 여행하기도 했다.
무량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가 LA에 있는 큰스님의 절인 달마 젠센터(Dharma Zen Center)의 주지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국 몇몇 주에서는 운전자 마음대로 자동차 번호판에 문자를 새길 수 있는데 스님은 자동차 번호판에 ‘Y ALIVE’(“Why do you live? For what?)를 쓰고 다니셨다. 즉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는 화두를 자동차 번호판에 새기고 다닌 것이다.
그가 주지로 있었던 달마 젠센터는 아주 낡은 건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전기가 나가기 일쑤고 겨울이면 파이프가 터지고 바람이 불면 창문이 부서져 나가고 화장실 변기도 자주 막혔다.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그는 심하게 말해서 망치 다루는 법도 제대로 몰랐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무량스님은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느끼셨다. ‘사찰’은 돈을 쓰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신도들의 보시 (사실, 미국 절은 한국처럼 보시가 아니라 젠센터에 같이 사는 신도들의 생활비로 운영되지만, 어쨌든……)를 이렇게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무량수님은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집안수리를 혼자 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창문도 고치고 타일도 붙이고 시계도 고치고 끊어진 파이프도 잇고 화장실 변기도 뚫고 벽지도 바르고…….
달마 젠 센터는 그의 힘과 노력으로 완전히 새집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덕분에 건축분야에 전문가가 되어, 이제 캘리포니아에 절을 혼자서 짓고 계시다.
무량스님의 또 하나 위대한 점은 쉼 없이 노동하신다는 것이다. 달마 젠센터 주지 때는 승복도 벗어 던지고 더러운 작업복 차림으로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주지 정도면 얼마든지 편하게 생활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한번도 ‘나는 주지이다’라고 내세운 적이 없이 말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하셨다. 그 모든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LA 주정부에서는 한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물의 사용량을 제한한적이 있었는데 스님은 아예 정원을 다시 꾸며 선인장 정원으로 만들어버렸다.
무량스님은 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분이시다.
그는 한번도 새 승복을 입어본 적이 없다. 항상 낡고 여기저기 기운 승복을 입었다.
나는 때로 승복을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얼마나 한복을 좋아하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이다. 아름다운 승복을 받을 때마다 나는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건 참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무량스님을 생각하면 새 승복을 입는다는 일이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운지.
처음에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새 승복을 받을 때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런데 자꾸 거절하다 보니 선물하시는 분들이 언짢아하셨다. 또 낡은 옷만 입고 다니니까 거의 강제로 옷 가게에 가서 옷을 사 입히시곤 하셨다. 나는 그분들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하지만 무량스님을 생각하면 그 새 옷들을 도저히 입을 수 없어 그저 사과 상자에 넣어놓고 있었다.
“아니, 스님, 제가 사드린 옷, 왜 안 입으시는 거예요?”
섭섭한 듯한 그이 표정에 나는 너무 미안했다. 생각 끝에 나는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승복을 꺼내 몇 번이고 빨았다. 헌 승복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량스님을 본받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나는 새 옷을 선물 받으면 항상 몇 번이고 빨아 좀 헌것으로 만든 다음 입었다. 옷을 선물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무량스님의 훌륭한 삶을 따라 배우고 싶다.
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이제 서서히 무르익고 있다. 그 꿈은 다름아닌 미국의 아름다운 산에 완전히 한국적인 전통 사찰을 세우는 것이다. 이미 몇 년 전 큰스님의 풍수 조언에 따라 캘리포니아 땅을 사서 한국 사찰을 세우는 일에 착수하셨다.
스님이 캘리포니아 땅을 산 얘기도 거의 신화에 가깝다. 스님은 미군들이 쓰는 지도를 사서 샅샅이 훑은 뒤 좋은 곳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현장 답사를 갔다. 그리고 큰스님께 풍수를 여쭌 뒤 마침내 마음에 드는 땅을 고른 것이다.
그는 큰스님과 중국 • 인도 • 대만 • 홍콩의 절을 다니면서 큰스님으로부터 풍수를 배웠다. 한국에 있으면서는 전국의 사찰을 다 도보로 다니며 익혔기 때문에 그 분야에 관한 한 전문가다. 풍수란 땅과 하늘과 물과 바람 에너지의 조화다. 어떤 땅은 양(+)의 에너지가 강한데 비해 어떤 땅은 음(ㅡ)의 에너지가 강하다. 무량스님은 특히 사찰은 풍수가 중요하다며 명당 자리에서 수행을 해야 우주의 맑은 기운과 하나가될 수 있다고 하신다.
일례로 애리조나주 세도나 같은 곳도 미국에서 알아주는 명당 자리인데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명상 단체들이 자리잡고 있어 관광지 역할도 톡톡히 한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찾아 다녔건만 마음에 드는 명당 자리가 안 나타나 무량스님이 수심에 잠겨 있을 때 큰스님이‘하루 네 번씩 기도를 하라’고 하셨다. 무량스님은 그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1년여가 다될 무렵 바로 그 캘리포니아에 땅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그가 찾던 땅이었다. 그곳은 L A에서 북쪽으로 차를 두 시간쯤 달리면 닿는 거리인데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산맥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이어져 있는 해발 1천 미터의 산이다. 산 아래는 오래된 카우보이 마을인데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부츠를 신고 산다.
나는 1994년에 그곳을 처음 방문했는데 너무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놀라 티벳에 온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곳은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천연의 땅이었다. 머리에 큰 뿔을 가진 야생 양떼와 매와 독수리, 퓨마, 살쾡이, 곰, 토끼, 노루 등등 동물들도 없는 게 없다. 방울 뱀도 산다.
그 이듬해인가 나는 다시 그곳을 찾아 무량스님이 기거하는 곳에서 며칠 묵었다. 이튿날 새벽 어스름에 화장실을 갔다 나오는데 한 50미터쯤 뒤에서 퓨마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완전히 발이 땅에 붙어 옴짝달싹 못했다. 다행이 퓨마는 그대로 뒤돌아 달아났다. 그럴 정도로 그곳은 아직 태초의 신비가 가득한 천연의 땅이다.
큰스님은 그 땅을 보시더니 99퍼센트 다 좋은데, 절을 세울 땅 앞에 흐르는 강의 흐름이 산의 에너지를 분산시킨다는 것을 한 갖지 지적하셨다. 무량스님은 그 말을 듣고는 강물이 마르는 여름까지 기다린 뒤 혼자 포크레인을 작동시켜 아예 물줄기를 바꿔버리셨다. 무려 2년 동안 그는 순전히 혼자서 강가에 자라고 있던 그 수많은 나무며 바위들을 그대로 옮기고 강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틀어놓은 것이다. 그는 진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다.
내가 다시 그 산을 찾았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산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사찰이 착착 세워지고 있다. 이미 기와지붕을 얹고 온돌도 깐 요사채(스님들이 거주하는 곳)가 완성되었다. 이모든 일을 혼자 하셨다니 거의 기적에 가깝다.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건축가들도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으로 지어야 하며 지붕에 무거운 기와까지 얹어야 한다’ 무량스님의 주문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량스님은 일단 캘리포니아가 지진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겉모양은 한국식으로 하고 내부 철근이나 구조는 미국식을 따르기로 했다. 한국식 대중 목욕탕도 만들기로 했다.
남은 문제는 대웅전.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인 대웅전만큼은 안팎 모두 완전히 한국식으로 짓겠다고 하신다. 미국에는 기술자들이 없어서 한국 가술자와 같이 일하고 싶은데 한국사람들을 데려오려면 먹이고 재우고 하는 비용까지 만만치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나마 돈도 부자 아버지한테 사정사정해서 유산울 미리 달라고 거의 강탈하다시피(?)받은 것이데 사찰을 짓기에는 역부족이다.
스님은 아예 한국에서 대웅전을 지어 다 분해한 후 공수를 하는 것이 싸다면 그 방법도 진지하게 고려중이시다.
그는 외아들이다. 그이 출가에 충격을 받으신 그의 아버지는 아예 그와 의절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몇 년 뒤 아버지 역시 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화해했다. 그는 아버지한테 “미국에 전통적인 한국 절을 세우는 게 나의 꿈인데 내가 한 살이라도 더 젊어 힘이 남아 있을 때 일해야 한다”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조른 것이다. 그는 유산의 단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현재 한국 절을 세우는데 쓰고 있다. .
지금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캘리포니아 산에 작은 간이 텐트를 세워 혼자 먹고 자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 저녁예불과 참선을 잊지 않고 낮에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하신다.
그는 또 완전히 환경친화적 건축방법을 쓴다. 산에서 쓸 모든 동력은 태양열과 풍력 등 자연력을 이용할 예정이다. 전기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스님은 이미 이를 위해 전시에나 사용가능한 베터리들을 사 모아 지하에 묻어 태양열로 충전을 하면서 쓰고 계신다. 현재 공사중이기 때문에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도 오로지 태양열만 이용하고 있다.
나는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로 있을 때 나흘 동안 거기 가서 공사를 도운 적이 있었는데 한번도 전기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지 않았다.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스님은 이처럼 캘리포니아 사찰 내 모든 자원을 재활용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수행처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절 앞에 흐르는 강 위에 다리 하나를 지었다. 그 다리는 한국의 전통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돌로 만든 아주 아름다운 다리이다.
요즘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국 이민자들이 알음알음으로 무량스님이 한국 절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마다 가서 스님을 돕는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곳에 가면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 같다며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까지 흘린단다. 무량스님은 그들을 상대로 한국 문화를 가르치기까지 한다는데 상상해보라. 한국사람들이 푸른 눈의 미국인 스님으로부터 한국 문화를 배우는 모습을.
스님은 이처럼 단지 불교만을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통을 미국에 널리 알리는 위대한 분이다.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우스갯소리를 잘해 웃음이 끊이지 않는 무량스님. 만약 내가 지금 한국에 살지 않는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캘리포니아로 달려가 그의 일을 도우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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