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16, 2012

만행 큰스님이 미국속으로

만행 큰스님이 미국 속으로

큰스님이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간 해는 1972년이었다. 나이 마흔 여섯 살 때 일이다. 당시 큰스님은 한국 근대사의 큰 스승 경허스님의 맥을 잊는 고봉 대선사으로부터 1949년 법을 전해받은 뒤 조계종 청담 종정스님과 함께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는 한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큰스님은 그 모든 명예와 지위를 다 버리고 서양인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훌쩍 미국으로 간 것이다. 큰스님은 미국에 도착해 로드아일랜드 프라비던스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웃들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이었다. 작은 불상, 목탁, 죽비, 향 만을 들고 미국으로 간 큰스님은 아파트에 작은 법당을 꾸미고 혼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참선수련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존경받는 스님이었다. 그를위해 요리도해주고 빨래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는 그러나 미국에선 철저히 혼자였다. 게다가 영어도 전혀 못했다. 미국 가서 고생할 거라며 신도들이 주는 보시도 마다하고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미국에서 스님이 첫번째로 한 일은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 큰스님은 본래 기계에 관한 한 전문가다. 아침예불과 참선이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탁소로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고장난 세탁기계들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고된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저녁밥을 짓고, 저녁예불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한국에서 추앙받는 큰스님의 지위를 훌훌 다 벗어 던지고 미국에서 맨바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의 머리깎은 한국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의 숭산스님 아니십니까?”
그는 근처 부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르덴(Leo Pruden) 교수였다. 불교문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그동안 숭산스님을 사진에서만 뵙고도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작은 키에 삭발한 머리, 기름때 묻은 작업복, 가슴에는 ,미스터 리’(Mr. Lee)라는 명찰뿐이었지만, 프르덴 교수는 그가 숭산스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르덴 교수의 놀라움에 큰스님은 “잉글리쉬 노노”(저 영어 못해요.)만 연방하셨다고 한다. 프루덴 교수는 큰스님 말씀을 알아듣고 일본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본말이라면 큰스님도 유창했기 때문에 드디어 두사람간에 말문이 트였다.
“제가 한국에서 온 숭산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스님ㅇ에 관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 알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불교를 좀 알려주고 싶어 2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들에게 불교를 알려주려면 우선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을 접하려 한 것이지요. 말은 젼혀 안 통해도 눈빛과 태도만 보아도 되니까요.”
큰스님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을한 게 아니었다 미국인들의 의식과 문화를 알기위해 수행을 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제스처하는지 빠짐없이 관찰해 그들 의식의 본질과 속성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갖고있는 뷸성이란 서로 다른얼굴, 서로다른 외모, 서로다른 표현방식, 서로다른 문화속에서도 하나라는 것을 큰스님은 굳게 믿었던 것이다.
프루덴 교수는 너무 감동했다. 이어 곧 자신의 제자들을 큰스님께 소개했다. 큰스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학생들은 너도나도 큰스님의 아파트로 찾아가 가르침을 듣기 원했다. 큰스님은 항상 큰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고 손수 된장찌개와 칼국수, 김치를 만들어 대접했다. 재미있게도 그들의 만남은 프루덴 교수의 통역으로 일본어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큰스님이 왜 굳이 세탁소에서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큰스님은 “불교의 진정한 실천은 나를 죽이는 下心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이 하심의 실천은 달라이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세계에서 추앙받는 영적 지도자이지만 대통령을 만날 때나,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날 때도 표정과 모습이 한결같다.)
그렇게 2년여가 흘렀다. 믾은 힉생들이 큰스님과 함께 정례적인 예불과 강연을 원했으며 예일 대학 졸업생 두 명이 승려가 됨으로서 비로서 큰스님의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야흐로 한국 선불교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큰스님과 한 나이 든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이 일화는 서양, 특히 미국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화다.그리고 큰스님의 가르침 스타일이 얼마나 폭넓고 유연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느날처럼 큰스님은 법당으로 들어 오셔서 높은 연단에 앉으셨다. 막 법문을 시작할 무렵, 큰스님은 한 나이 많은 지도법사가 나이어린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지도법사는 큰스님의 오랜 제자 중 한 분으로 관음선종 패밀리안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분이었다.
“아니, 법사님, 왜 그렇게 뒤에 앉아 계세요? 이리 앞으로 나와 앉으세요.”
큰스님의 제안에 선뜻 자리를 옮기리라 생각되었던 그는 의외로 고집을 피웠다.
“큰스님, 저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같이 앉아야 그들과 어울리지요, 언제나 앞줄에 앉아 있으면 저는 그 사람들 얼굴을 보기가 힘듭니다.”
“하하하, 당신은 존경받는 지도법사입니다. 여기 보세요, 다른 지도법사님들은 모두 앞에 앉아 계시잖아요. 이게 우리 전통입니다.” 그러자 대뜸 지도법사님의 입에서 항의성 언사가 튀어나왔다.
“큰스님, 그건 그저 오래된 낡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건 큰스님이 세우신 전통이지 우리의 본래전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과연 큰스님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다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운 전통이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앞에 앉고 젊은 사람들이 뒤에앉아야 젊은 사람들이 앞에 앉은 스승들을 보고 ‘아 나도 열심히 수행해서 앞에가 앉아야지’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소리덕택에 냉랭했던 법당 분위기가 이내 누구러졌다. 큰스님 말씀이 이어졌다.
“이건 우리가 가르침을 받기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에요, 알겠어요?”
“큰스님은 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그러고 보니 무리 법사님은 무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두 분의 질문과 대답으로 법당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다. 법당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충 이쯤에서 지도법사님이 고집을 꺾으시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법사님은 막무가내였다.
“큰스님께서 강조하는 전통은 그저 오래된 한국 스타일에 불과합니다 그건 미국 스타일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먼저 온 사람이 앞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 걸맞는 수행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은 손을 훼훼 내저으셨다.
“이건 한국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그저 자연법칙입니다. 숲에 한번 가보세요. 큰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지요? 큰나무는 키가 커서 했빛도 잘 받고 빗물도 잘받습니다. 뿌리도 크고 단단합니다. 하지만 어린 나무들은 이 큰 나무들에 가려 햇빛도 별로 못 받고 비도 흠뻑 못 맞읍니다. 뿌리는 작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오랜시간이 흐르면 이 어린 나무들이 점점 자랍니다.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더 강해지지요. 노력하지 않는 나무들은 자랄 수 없습니다. 이건 자연법칙입니다. 동양 전통도, 한국 전통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알겠읍니까?”
그제서야 법사님 입에서 “예”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머리숙여 깊이 절한 뒤 큰스님 말씀대로 앞줄에 가 앉았다.
큰스님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법문을 시작하셨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화다.
불교를 처음 접한 미국인들은 이처럼 모든일에 의문을 갖고 도전을 한다.
‘이것을 여쭈어보면 큰스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니까 무조건 따라해라’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뭘 몰라서 그렇다고 따지거나 꾸짖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환자에게 약을 먹이겠다고 나선 의사가 먼저 환자를 이해하고 포옹하고 설득해야 한다.
큰스님은 우리 서양인들의 의식구조를 꿰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처방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다.
큰스님은 우리와 다른나라에 태어났고 나이도 많지만 우리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안다. 어떤 때는 정작 우리보다 더 잘 우리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나이를 넘어, 국적을 넘어, 성을 넘어, 종교를 넘어 큰스님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훌륭한 의사다.
또 한 편의 일화는 숭산스님의 초능력에 대한 것이다. 큰스님의 말씀을 빌려 소개하겠다.
어느 날 뉴헤이븐 젠센터에 다니는 학생 한 사람이 큰스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선사님께서는 초능력을 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가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사가 있다면 위대한 사람로 칭송받을 것입니다. 마음의 병뿐 아니라 육체의 병도 고친다고 말이지요. 왜 선사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눈먼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든지 앉은뱅이를 서게 한다든지 미친사람을 제정신이 돌아오게 한다든지 물 위를 걷게 한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까? 혹은 기적을 행하시기위해 노력하시지는 않나요? 만약 선사님께서 그런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선사님의 가르침이나 불교에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될 텐데요.”
큰스님이 이렇게 답하셨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스승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단지 어떤 ‘기술’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스승이 기적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려 한다면 사람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기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신도들은 바른길을 배우려하지않고 쉽게가는 길만을 배우려 하지요. 의사가 아픈환자에게 병을 고쳐줄 약을 준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또 다른 병을 준다면 그 의사를 명의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어떤 선사가 물위를 걷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선에 입문한다면 실제 참선수행에 들어가서는 선수행이 아주 어렵고 지루하고 심지어 기적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그만둘 것입니다.
훌륭한 선사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아니라 사람들의 업을 바로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세세생생 만들어 놓은 업을 녹이려면 오직 우리 자신이 그것을 원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많은 명약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을 우리 입에 직접넣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눈먼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 쉽고 빠른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병을 고치기위해 자기가 노력하는 것이아니라 남이 해주길 바랍니다. 그건 마치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준다면 아이는 엄엄마에 모든 것을 의존할 것입니다. 훌륭한 엄마는 ‘아이가 혼자하는 법’을 가르치는 엄마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라서 강해지고 독립적이 됩니다.
여기에 자기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심지어 그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은 물을 영험하다고해서 약으로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그들의 병이 그 물을 마시고 나았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그병을 고치신 것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는 마음이 그들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초능력이란 사람의 나쁜 업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술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나사렛을 일으켜 세우셨다 하더라도 나사렛의 나쁜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사렛은 죽습니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 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느 명상에 잠겼다가 카필라 왕국이 전쟁으로 곧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 달려갑니다.
‘헉헉, 부처님 이주일만 지나면 카필라성에 전쟁이나 폭삭 무너집니다. 알고 계십니가?’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을 구허려 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업이다.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그제자는 부처님께 아주 실망을 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계시다니……. 제자는 초능력을 발휘해 카필라성을 작은 밥그릇에 담아 이른바 도솔촌이라고 하는 천국에 갖다 놓았읍니다.그곳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위험하리라 생각했던 일주일이 아무일 없이 지났습니다. 제자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나서 다시 밥그릇을 지구 카필라성에 갖다놓았읍니다. 그런데 제자가 밥뚜껑을 열자, 그안에 담아두었던 카필라성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전쟁을 일으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초능력이란 단지 기술입니다. 여러분들은 카드놀이를 할 때 도사처럼 카드를 감추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술의 하나입니다. 초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누군가 기적을 행하고 싶다면 그것을 어떻게하는지 배우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눈이 예리한 진정한 스승이라면 초능력을 가르쳐주는것이아니라 제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제자들이 나쁜 업을 녹여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없읍니다. 오직 바른 관점 바른 수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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