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rch 4,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이야기

만행 무심스님

다음으로 소개할 분은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미국인 스님인 무심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큰스님과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큰스님의 모든 이정을 짠다.
앞서 소개했던 대봉스님처럼 무심스님도 필라델피아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교수이고 동생은 미국에서 유명한 해양 생물학자다. 그 역시 1981년 미국의 명문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가했다.
국제선원 스님들 중에는 비록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를 하긴 했지만 한국과 별로 인연이 없어서 음식이나 생활방식이 잘 안 맞아 생활하는 데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무심스님은 나 만큼이나 전생에 한국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정말로 한국 사람 이상으로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 음식도 무엇이나 잘 드신다. 속담도 모르는 게 없다.
무심스님은 숭산 큰스님 제자들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으셨다. 이것은 외국인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이라는 큰 우산 아래 들어간 일이어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미국 관음선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무신스님 이후로 대성스님, 청안스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무심스님은 출가한 직후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이 만들어지면서 총무일도 맡고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 등에서 안거수행도 많이 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를 다 잘하기 때문에 숭산스님의 모든 사무적 일정을 헌신적으로 맡아보고 있다. 무심스님은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기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이나 큰스님을 옆에서 모시고 있다. 그의 성실성과 치밀함은 정말 대단하고 컴푸터에도 굉장히 능하다.
화계사 국제선원에서도 지도법사이기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정말 한시도 제대로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큰스님이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는데 그때마다 무심스님은 24시간 큰스님곁에서 간호를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미국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심스님의 정성에 탄복하여 큰스님께 ‘누구냐’고 여쭌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큰스님은 선뜻 ‘내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셔서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고 한다.

만행 명행스님

명행스님은 미국의 명문 코넬 대학교에서 그리스와 라틴 등 고전문학을 공부한 수재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아직도 자유롭게 쓰고 말할 줄 안다.
그는 천재에 가까운 암기력을 갖고 있으며 꼼꼼한 성격에다 두터운 신심을 갖고 있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잘생겼으므로 결혼도 해서 마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고전문학에 심취한 이유는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 진리냐’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그는 수많은 그리스, 라틴 고전들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옛날 고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양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동양을 여행하기로 하고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한국에서 영어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 즉시 자원을 했다. 그는 4년동안 한국에서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대전, 공주 일원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고 보면 명행스님 역시 한국과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도시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지방에서 살았는데 겨울에 우연히 공주로 여행을 갔다가 당시 계룡산 신원사에서 동안거 수행을 하는 외국 스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신원사에서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스님이 바로 무심스님이다. 무심스님은 그에게 화계사 국제선원을 소개하며 꼭 한번 오라고 초청했다. 그는 신원사에서 며칠 묵으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듣는 사찰의 종소리가 그렇게 친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원사 몇몇 외국인 스님들로부터 숭산 큰스님과 벽암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서울을 오가며 국제선원에서 수행을 하고 큰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한 것이다. 그는 출가하면서 그때까지 읽고 있었던 그리스, 라틴 책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는 매일 1천배 수행을 하는 스님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부드러워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경을 받고 있다.

만행 청안스님

나는 지금 유럽에 한국 불교를 포교할 스님 한 문을 소개하려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청안스님이다.
청안스님의 고국은 헝가리, 청안스님은 특히 자신의 고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하며 고색창연한 헝가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 두 나라 모두 오래되고 자랑스런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웃 강대국으로부터 수 차례 침략을 받았으나 조상들의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헝가리 국민이나 한국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유럽에서도 특이하게 헝가리 국민들만 매운 음식을 즐긴다고 한다. 어떤 음식은 유럽사람들이 도저히 입에도 못 댈 정도로 맵다고 한다. 또한 두 나라는 언어의 구조와 형태까지 비슷하다고 한다.
청안스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헝가리어가 몇 천 년 전에 동일한 언어의 뿌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헝가리인 들이 본래 아시아 땅에서 살다 지금의 헝가리 땅으로 이주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헝가리는 유럽 안에서도 가장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래서인지 청안스님은 한국말도 유창하고 한국 음식도 잘 드신다. 그의 아버지는 국제적으로 존경 받는 심장병 전문의다. 어머니 역시 의사다.
그는 자랄 때부터 영어, 연극, 스포츠에 만능 재주꾼이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대학 다닐 때는 ‘실험연극’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도 중여한 예술 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실험연극은 대본을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이 즉석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전에 계획된 말보다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시 그 경험을 통해 청안스님은 순간에서 순간, 상황에서 상황, 말이 필요없이 현실을 인식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1990년 헝가리에 법문을 하러 온 숭산 큰스님을 만나게 된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형 강의실은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청안스님은 이미 헝가리의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창업한 번역회사를 열심히 운영하고 있었다.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해 헝가리도 바야흐로 개방의 물결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많은 회사들이 헝가리 시장을 놓고 경쟁적으로 자본참여를 할 때였다. 그때 청안스님은 그 회사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큰돈을 벌었다. 어떤 때는 그의 한달 벌이가 아버지의 4개월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은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부다페스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순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미국을 서너 차례 방문 한다. 또 1993년 10월에는 3년마다 한 번씩 미국에서 전세계 큰스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세계일화’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미국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3개월간 안거수행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가득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헝가리에서 돈을 벌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출가를 했다.
부모님은 거의 혼절을 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던 아들에게 부모님이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래도 나는 형제가 여덟이나 되었기 때문에 출가하면서 부모님의 노후 걱정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청안스님의 출가는 곧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자식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속 깊은 고통 속 에서도 출가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부모님 곁을 떠나 5년간이나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한 수행자다.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해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청안스님은 화계사 국제선원의 총무 및 재무스님으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청안스님은 지난 여름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고, 곧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가 젠 센터 주지를 맡을 예정이다. 그는 한국 불교를 유럽에 알리는 선구자가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