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30, 2012

만행 니의 미지막 스승

만행 나의 마지막 스승

다음날아침, 새벽예불에 참가하고 난 뒤 우리는 법당에 안장 큰스님을 가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대부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젠센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스님들, 한 20여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너무 흥분해서 온몸이 떨렸다. 드디어 큰슨님을 더욱 가까이서 뵙는구나.
드디어 큰스님이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큰절을 세 번 올렸다.
나는 당시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맨처음가까이서 보는 큰스님의 얼굴.
나는 여러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그런 피부는 처음 보았다. 도저히 63세 노인의 얼굴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게 완전히 부처님 얼굴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런 얼굴을 본 적이없다. 세계곳곳을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행복이나 슬픔같은 감정이 들어오기 전의 상태와 같았다. 눈은 보석처럼 맑고 깊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저것이 우주라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넓은 우주.
새벽이라 우리의 얼굴은 모두 부스스 했지만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맑았다. 나는 나중에 큰스님께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방에서 매일아침 혼자서 1천배를 하신다는 것도 알았다. 무려 30여년 이상을 그렇게 해오셨고, 새벽무렵에 큰스님 방을 지날때면 창문커튼 너머 그가 절하는 모습이 그립자로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큰스님과 함께 108배와 염불수행을 차례로 했다. 염불수행을 하는 큰스님의 목소리는 맑고 크고 청아했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져나오는 에너지는 한 마리 큰 호랑이 같았다. 염불이 끝나고 우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면벽하고 참선을 했다. 참선하는 40여분동안 나는 마음을 차분히 집중하려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선사와 함께 참선을 한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참선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돌아앉았다. 큰스님께서 간단히 법문을 하셨다.
참선이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 생각,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활하면서 가만히보면 마음과 몸이 따로 놉니다. 먹을 때, 잘 때 걸을 때 우리 몸은 먹고 자고 걸을지 몰라도 마음은 끊임없이 따로 움직입니다. 참선수행을 하면 몸과 마음이 완벽하게 하나가 됩니다. 모든사람들이 각자의 평화를 이룰 때 그것이 세계평화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세계평화를 외치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학자들은 말과 행동이 하나였읍니다. 요즘 학자들은 진리와 정의, 평화, 도덕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돈과 명예에대한 욕심이 있고 이에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정치가들, 종교인들, 사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평화를 얘기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평화를 하겠다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이 세계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관없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났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이 질문을 붙잡고 ‘오직 모를 뿐……’하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수행하십시요. 그러면 모든생각이 끊어지고 집착이 사라집니다. 생각 이전의 본성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조화이고 평화입니다. 열심히 수행정진하는 여러분의 모습을보니 사랑스럽습니다.
이어서 큰스님과 함께 아침 발우공양이 있었다. 현미밥에 김치, 깍두기, 김, 땅콩버터, 과일, 빵, 두유 등 각자 네개의 대접에 담아먹었다. 나중에는 그릇에 묻어있는 것까지 물로씻어먹는 모든과정이 완벽한 침묵속에서 행해졌다. 먹는 것도 참선의 하나였다. 공양이 끝나고 큰스님은 법당을 떠나셨다.
다른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떳지만 나는 한참을 법당에 앉아 있었다. 어린시절 학교다닐 때 생각, 대학에 들어와 학생운동에 열중했었던 생각, 그리도 키르케코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시절, 세계여행……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오직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강열한 열정하나로 하얗게 새웠던 그 숱한 밤들, 아! 그 고통의 시간이 이제야 끝나는가……. 나는 행복했다. 이제야 길을 찾았다는 생각에 울컥 눈물까지 났다.
잠시 후 지도법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큰스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고 면담 신청을 해놓았는데 운좋게도 기회가 닿은 모양이었다.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승산 큰스님이야말로 나의 마지막 스승이시다. 그는 살아있는 부처님이시다. 수십개의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무엇부터 여쭤야하나.
마침내 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얼굴에 하나가득 웃음을 띠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세 번 큰절을 마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너무 어려워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읽으셨는지 ‘이리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가 동양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무게를 잡고 앉아 계실 줄 알았다. 당시 마국인 불교신자들 중에는 일본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았는데 나는 친구들로부터 일본선사들은 아주 엄격하고 권위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말을 듣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비록 큰스님께서 대중들 앞에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해 보여도 개인적으로 뵐 때는 무척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오…… 안녕하세요? 수행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했어요? “두 달 전에 큰슨님 강의를 하버드대학에서 듣고 바로 케임브리지 젠센터로 이사했읍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읍니다. 요즘 참선수행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오 ! 그래요,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무슨일을 하시지요?” “하버드 대학원에 디니면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있읍니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를 접목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주 재미있겠네요, 그런데 당신은 삶에대해 무엇을 알고 계시지요?” 갑작스런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마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치 손자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크게 웃었다. “혹시 소크라테스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예 예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그의 책을 많이 읽었읍니다. 나 역시 대학을 다닐 때 소클라테스는 내가 아주 존경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답니다. 그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했지요, 매일 아테네 시장 거리를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언제나 이렇게 말했읍니다. ‘너 자신을 알라.’이것이 그의 가르침 전부였읍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이론도 없고 설명도 없이 오직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고 다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제자기 이렇게 물었읍니다. “그러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을 아십니까? 그러자 그는 ‘나 역시 나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읍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 아주 재미있읍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당신하테 하나 묻겠읍니다.” 큰스님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물었다.”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폴 입니다.” “그건 당신의 몸의 이름입니다. 누군가, 즉 부모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은 겁니다.” “…… “올해 몇 살이에요?” “ 스물여섯 살입니다.” “그건 역시 당신의 몸의 나이입니다.” 큰스님은 나의 무릎을 탁탁 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진짜 나이를 알고 싶어요.” 나는 완전히 할말을 잃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어떤 교수님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않았다. 나는 큰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으셨다. “아니, 학생은 하버드대학에 다니는데 당신자신을 모른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큰일이군요.” 정말 부끄러웠다.너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이건 무슨 가르침일까? 완전히 다른 세계야. 다른 코드같아.”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히는, 그동안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신념들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그런 경험이었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 아무말도 못했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이해하겠어요? “예예...... 아니,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큰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당신의 컴퓨터는 너무 복잡하군요. 너무 성능이 좋아요”라고 하셨다. 잠시 후 차나 한잔 하자며 녹차를 내놓으셨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기 시각했다. 감자기 큰스님께서 물었다. “자, 이제 알겠어요?”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큰스님은 지금 뭔가를 묻고 있는데 너무 간단한, 마치 어린이들에게나 하는 질문을 저토록 평온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미소로 묻고 있는데,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간것이다. 에머슨, 쇼펜하우어, 플라톤, 까뮤, 키르케고르, 소크라테스를 모두 공부했고 철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정작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진짜 나이는 몇살인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방바닥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큰스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큰스님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내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다는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질문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세요.” 기다렸다는듯 나는 입을 열었다. “큰스님께서는 ‘모르는 마음’(don’t know mind)을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그동안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뭔가 계획을 해야하고, 뭔가 생각을 해야하고, 뭔가 이해해야 한다고 배웠읍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모른는 마음을 어떻게가지며 그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생각할 때 생각할 뿐, 들을 때 들을 뿐, 볼 때 볼 뿐,먹을 때 먹을 뿐, 그게 다 입니다. 생각할 때 샌각하세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면 생각하지 마세요. 먹을 때 오직 먹으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은 이 생각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 누가 만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직 ‘모르느 마음’을 갖고 똑바로 가십시요. 이 모르는 마음이야말로 어떤 철학, 하느님, 부처님, 하버드대학보다 나은 겁니다. 모르는 마음을 간직하면 당신의 진정한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모르는 마음을 찾을 수 없어요.” “나는 이미 당신에게 보여줬어요. 다시 묻겠읍니다.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잘……모르겠읍니다.” 큰슨님은 순간 “옳지”하고 소리를 치셨다. “바로 그겁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 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맑아질 것입니다.생각할 때 생각하세요. 생가하는 시간이 아닐 때 생각할 필요는 없읍니다. 머릿속으로 따지지마세요. 오케이?” “예” “원더풀, 원더풀, 좋아요, 아주 좋아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스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단어가 ‘원더풀’ 이었다.)

Sunday, January 29, 2012

만행 공안인터뷰 공안수행




公安인터뷰, 공안수행

나는 사흘간의 수련동안 처음으로 공안인터뷰라는 것을 했다. 이 공안인터뷰는 숭산 큰스님의 아주 독특한 가르침으로, 비로소 나는 큰스님의 가르침 스타일대로 그를 만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공안방법이 우리들 생각의 집착을 끊게하는 가히 혁명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숭산 큰스님은 학국불교의 수행전통을 서양의식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키셨는데 이 공안인터뷰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公安과 화두가 무엇인지부터 집고 넘어가 보자.
참선에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할 때 그 경지가 어느정도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선종에서 도를 깨치게 하기위하여 내는 과제)이다. 즉 제자들이 수행을 통해 깨달은 한쪽을 스승이 깨달은 한쪽과 맞춰보는 것이다. 마치 깨진 거울을 맞추듯 말이다. 공안은 이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확인하는 것 외에 그 자체가 수행이므로 공안수행이라고도 한다. 스승과의 문답을 통해 제자는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고 모든생각을 끊어 다시수행에 전념하는 것이다.
禪수행을 통ㅎ해 모든생각을 끊고 생각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몇 십년동안 신문, 방송,잡지, 책 등을 통해 내 머릿속에 입력된 온갖지식, 그리고 그것이 빚여내는 망상을 하루 아침에 없애 몸과 정신을 통해 우리 머릿속의 온갖 잡생각을 사정없이 뚝뚝 잘라내 제자들이 쉽ㄱ고 빠르게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셨다. 온갖 복잡한 생각을 모두 끊어 제자들에게 ‘오직 모르겠다’는 본질적인 마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한편 화두수행이란 공안 질문을 통해 스승이 던지신 질문, 그 실마리를 붙잡고 계속 參究스행하는 것이다. 먹을 때나 일할 때나 명상수행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화두를 강하고 맑게잡고 있으면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불교에서는 비구, 비구니들은 스승한테 한 가지 화두를 받아 깨달음을 얻을 때 까지 참구 수행한다. 앉을때나 설 때나 잠을 잘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화두를 잡고있는다. 그런 화두수행을 통해 뭔가 깨달음을 얻으면 스승은 그것을 공안을 사용해 테스트한다.
큰스님은 언젠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있다.
예날사람들의 생각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잡 생각이 지금사람들보다 별로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화두하나를 잡으면 수년 수개월동안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때로 아주 깊은산에 들어가 수행하면 생활은 더 단순해져 깨달음을 얻기가 쉬웠다. 그런데 요즈음은 다르다. 자유가 많아진 만큼 선택할 것도 많아졌고 그에따른 지식이나 정보도 많이 필요해졌다. 사는것이 훨씬 복잡해졌다.
서양은 동양보다 더 복잡하다. 더구나 우리 젠센터에서처럼 각자직업을 갖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아예머리깎고 산에들어가 살며 스행하는 사람들보다 더많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복잡하고 바쁜생활을 한다. 가족이 있고 다양한 것들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자유를 사람들에게 주고있지만 생각과 삶은 더 복잡해졌다.미국의 절므은사람들을보아라. 무옷이든지 할 수 있지않은가. 심지어 인간관계에서의 제약도 없다. 여자가 여자를 사랑 할 수도있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도있다. 이렇게 할수 있는 일은 많아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릴은 더 많아졌다. 따라서 옛날처럼 오직화두하나만 오래들고앉아 있는 수행은 요즘사람들에게 너무어렵다…… 공안인터뷰를 통해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을 탁탁 끊어내야한다.
그래서 숭산 큰스님 절에서는 자주 공안인터뷰 수행이 벌어진다. 주말을 이용한 3일 특별수련 때는 매일, 여름과 겨울철의 3개월 특별수련(보통 안거러고 한다.) 때는 한사람당 일주일에 세 번씩 지도법사들과 공안인터뷰를 한다. 나의 첫번째 공안인터뷰는 1990년 1월경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숭산스ㅡ님의 제자인 무등스님과 이루어졌다. 그는 재미교포였던 한국인이었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그와 마주앉았다. 나는 그에게 먼저 절을 했다.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나에게 먼저 “질문이 있어요?”하고 물었다. 나는 겸연적게 웃으면서 “너무많아 무엇부터 여쭤야 할지 모르겠읍니다.”하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온갖 궁금증으로 머리가 터질지경이었다. 무든스님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드리우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먼저 묻겠어요. 당신은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니 어떤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겠지요. 우선 아주쉬운 질문하나를 하겠읍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고 했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국의 조주선사에게 한 제자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께서는 ‘없다’라고 잘라 말씀하셨읍니다. 자, 이제 제가 묻겠읍니다.(그러면서 그는 왼쪽팔에 차고있던 시계를 풀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시계는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나는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당혹스러웠다. 할말을 잃었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오갔지만 무슨말을 던져야 할지 판단이 서질않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자 잠시후 그는 활짝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버드에 다니는 수재인데 대답을 못하는군요. 아이들도 답할 수 있는 질문인데 말이에요. 당신의 머릿속엔 쓸데없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군요. 하하하.”
그이 방을 물러나와 다시 선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참선수해을 계속했다. 그때는 1월 한겨울이었는데도 내 몸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심장은 쿵쿵거렸다. 내가 그렇게 왜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런 가단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다니……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이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생전 태어나서 그런 질문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에게 한번도 그런유의 질문을 한 사람도 없었다. 부끄러움과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선수행과 공안수행에 대해 강한호기심이 일었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정ㅁ말 내 본성을 찾고 싶었다. 지식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험으로말이다. 지금 이 길에서 과연 누가나를 도와줄 수 있는가. 누가 나의 길을 대산할 수 있는가. 나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진한 외로움 뒤에 순전히 혼자 이 진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일었다. 나를 찾으리라. 반드시 찾으리라…….

나의 마지막 스승

내가 숭산 큰스님을 비로서 개인적으로 만난것은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2월경이었다. 그때 큰스님은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프라비던스 젠센터 ‘홍법원’에 계셨다. 당시 홍ㅂ법원에는 90일간의 동안거가 진행되고 잇었는데 큰스님께서는 전세계를 무대로 강의와 법문을 하시다 잠시 잠간씩 짬을내서 안거 때마다 프리비던스 젠센터에 오셔서 안거 수행자들에게 법문과 공안인터뷰를 하곤 하셨다.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도반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프라비던스로 갔다. 홍법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시간이었는데 무려 5백명이나 모여 있었다. 인근 부리운대학, 차로 두 시간 반이나 떨어진 예일대학, 역시 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보스턴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은 물론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들, 주부등까지 모여 있었다.
그날 숭산 큰스님의 법문은 사전에 별 예고도 없었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며 케임브리지 지도법사들의 놀란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큰스님니 선방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두 달 전 하버드대학 대강의실에서 멀리서 처음 뵌 이후 비로서 가까이서 뵙게 된 것이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고 큰스님 얼굴을 보았다. 온화한 미소와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큰스님은 선방안에 아름다운 공명을 만들면서 법문을 시작했다.

오랜옛날 세상은 단순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복잡해졌읍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사람 때문이에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만 해도 지구상 총인구는 20억에 불과했읍니다.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살기시작한 이래 수백만 년이 지났건만 그전까지만 해도 인구 성장은 그렇게 급격하지 않았읍니다. 고작 많아야 20억정도에서 왔다갔다했지요. 그런데 지금 (1990)은 무려 50억에 달합니다. 제 2차대전이 끝난 지 50여 년밖에 안 지났는데그동안 무려 30억 인구가 늘어난 것입니다.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는 아주 복잡해졌읍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지고 삶이 복잡해졌읍니다. 그러다보니 고통의 종류도 많아지고 정도도 깊어졌읍니다. 이 모든것은 이 지구상의 인구가 너무많은데서 온 것입니다.
뭔가 신비하고 내 가슴에 탕 전율이 올 말을 기대했건만 큰스님은 난데없이 인구이야기를 꺼내셨다. 호기심이 일긴 했지만 별로 신기할 것은 없었다. 그저 당연한 말씀 아닌가.

정작본론은 그 다음부터였다.

왜 인구가 이렇게 갑자기 늘어났을까? 그리고 세상은 왜 이렇게 갑자기 복잡해졋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사람들이 고기를 즐겨먹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기를 별로 잘 먹지 않았읍니다. 심지어 아시아 사람들은 1년 가야 한두 번, 끽해야 명절같은 날ㄹ 겨우고기구경을 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기를 먹습니다. 서양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영혼, 즉 정신의 에너지ㅣ가 있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몸이 죽는다고 함께 죽는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이 세계에서 수십만 수백만 동물이 인간의 먹이로, 혹은 놀잇감이나 장신구용으로 한꺼번에 죽어갑니다. 동물의 몸이 죽으면 그 순간 동물의 의식은 몸에서 떨어집니다.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황상 명확합니다. 이 죽는 동물들에서 0.00001퍼센트가 사람이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아닙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론이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에너지가 다른형태로 바뀌는 물리학입니다.
여러분들 뉴욕이나 보스턴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이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의 마음속엔 인간과 동물의 의식이 섞여있읍니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종족번식을 위해 싸우며 다른종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폭력이 생겨나고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부모와 스승을 죽이고 많은 나라의 독재자들이 군대를 동원해 국민들을 죽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요즘 이런상황은 더 심각해졌읍니다. 오로지 돈을위해서 친구와 부모를 죽이고 동물을 죽이고 바다를 죽이고 지구를 오엽시킵니다.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 보십시요 원래우리마음은 순수하고 맑습니다. 조금욕심이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지배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동물은 욕심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지구는 통제불가능한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읍니다. 우리는 우리 본래의 의식과 마음의 씨인 이 본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나라 아느민족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나 종교 그 자체로는 이 세상을 도울 수 없습니다. 지식인들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노력하면 뭔가 겉모습을 약간 변형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합니다.
쉽고도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한ㅁ마디 한마디 버릴것이 없는 말씀이었다. 나는 큰감동을 받았다.
큰스님늬 말씀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둘러앉아 녹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마침뉴욕대학에서 온 학생들과 얘기했는데 그들 역시 큰스님 말씀에 진ㄴ한 감명을 받은 듯 했다. 그들은 본래 큰스님을 뉴욕대학에 초청하는 문제를 사의하러 왔는데 큰스님의 일정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석자 중에는 예일대학법대를 다니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의말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그는 법대에 들어가자마자 희망에 부풀었섰다고 했다. 법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찼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이상이 헛된 것이었음을 느꼈다고 했다. 법은 단지 비지니스일 뿐 사회를 변화시키자못하며, 법을 바꾼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겉의 변화일 뿐 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예를들어 미국은 남아프리카보다 더 훌륭한 법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폭력지수, 교도소 죄수들의 비율은 남아프리카보다 훨씬 더 높다. 사회를 법으로 바끄겠다는 생각,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것임을 깨달을즈음 숭산 큰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중여한 것은 바깥이 아니라 안, 우리의 마음이라는 큰스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수행에 열심히 참여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미국의 건강한 인텔리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다. 늘 겉과 속이 다른, 생활과 말이 다른사람들만 보며 실망 했는데 그날 밤 그곳에서 만난사람들은 달랐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열심히, 순수하고 겸손하게 ‘빛’을 찾고 있었으며 숭산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이 짙게 깔렸을 즈음 한 미국인 스님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에 3게월씩 집중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안거라고도 합니다. 특히 한국의 ‘신원사’라는 절에서 하는 겨울안거 프로그램은 집중수행을 하고 싶은 여러분에게 아주좋을 것 같읍니다. 관심있는 사람은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읍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신청서를 썼다. 이번겨울은 놓쳤고 내년겨울 프로그램이었다. 당시나는 대학원 1학년 신학기였는데 공부를 잠시 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좋다 내년 1년은 휴학을 하자. 공부보다도 진리를 찾는것이 더 급하다.

Saturday, January 28, 2012

현양매구

현양매구 懸羊買狗

화엄경에 의하면 「만일 사람이 三世에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성을 관하라. 모두가 마음으로 짓는것이다.」하였다.법화경에 의하면 「대토지승불大通知勝佛이 十劫을 도량에 앉았으나 불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하며,,또 원각경에 의하면 「모든 중생의 갖가지 환화幻化가 다 여래如來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왔다.」하며,금강경에 의하면 「만일 모든 상을 보되 상이 아니면 곧 여래를 본다.」하심이 다 이 마음 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란 것은 모든 현인賢人과 성인의 할아비며, 모든 법의 근원이므로 전불후불前佛後佛이 마음으로서 마음을 전하시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시었다.
부처님이 다자탑 앞에서 가섭존자와 자리를 나누시고,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고, 사라수沙羅樹 나무밑 곽 속에서 두 발 바닥을 보이셨다.
이 세곳에서 마하가섭에게 교밖에 따로 전하시고, 가섭이 아란에게 전하여 삼십대에 걸쳐 조사祖師와 조사가 서로 전하다가 덕숭산에 이르러 경술년으로부터 이제까지 삼십회에 달하는데 무슨 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하였는고?
(O) 이것은 바로 부처님과 조사의 心印이며 모든중생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세존께서 설산에서 육년동안을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9년동안을 말이 없으시며, 趙州대사가 30년 동안을 잡된 생각없이 한결같이 마음을 씀이 다 이낱 (O)을 닦아 증득하였다. 요즘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옛 성인을 모범하지 아니하는고 ! 만일 옛성인을 모범하지 아니하고는 자기를 구제하지 못하리니, 어찌 중생을 제도하겠는가.
슬프다 ! 큰 법이 침윤沈淪함에 마군魔群과 외도가 치열하여 살과같이 위태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보존하기 어려움은 실로 오늘의 현상이라. 이에 백가지 페단이 일어나 모든학자가 안으로는 발심의 기틀을 잃고 밖으로는 메마름을 치료할 바탕이없다.
이에 느낀 바 있어 작으나마 조도助道의 자량資糧을 한반도 선림禪林에 향을사르고 바치니, 한국불교의 오늘을 충분히 판단하는 뜻 있는 사람들이 三要를 힘써 갖추고 自利利他의 정신을로 선림禪林을 부흥시키라. 설산의 좌선과 소림의 묵언과 조주의 용심을 모발하여 닦고 깨달아 증함이 옛 무처와 다름이 없이하라.
부처님과 선사의 정맥을, 위로는 영산에 대를 잇고 밑으로는 융화에 이르게 하여 사생과 육도의 마한 중생을 제도하여 함께 부처를 증득하기를 분향하노라.


OOO
대중에게 보이다

스님이 법좌에 올라
『牧牛子가 말씀하시기를, 대지 처음 마음의 사람은 모름지기 멀리 악한 벗을 여의고 어질고 착한 이름을 가까이 하여 五戒와 十戒등을 받아서 잘 갖고 범하고 열고 능히 살리고 또한 놓아주고, 빼앗고 하는 글자가 있으니, 대중은 눈을 바로뜨고 자세히 보아라.』
다시,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세계 가운데 化하여 비추니 소식이 평탄하고 세상밖에 홀로있으니 유령청허幽靈이 대가 끊어지도다. 면밀하여 새지아니하고 넓고 넓어서 모퉁이가 없도다.
淸虛가 한번 바꾸어서 이치에 이름과 말이 끊어지고 원만히 완성하여 道에 모남이 없도다.
모든 선덕善德아 ! 이것이 모든 부처의 열반이니 일체 화연幻緣이 이로쫓아 멸하여 다 하도다.
또 일러라. 이러한 시절에 이르러서는 또 어떻게 밟아갈 것인가?』
잠시후 말씀하시기를
霜天落夜將半하니 서리하늘에 달이떨어져 밤이 깊으니,
誰共澄潭照影寒고 누가 맑은 물과 같이 차가운 그림자를 비출 것인고?

『육근은 근원으로 돌아가서 철저히 신령스럽고 밝아 짝이 없으며, 四大의 성품이 근원으로 돌아가서 온 몸이 정정하여 티끌이 없으면 곧 인연을 끊고 상속을 끊으며 옛과 지금은 혼돈하여 같고 다름을 없애리라. 모든사람은 도리어 체득하여 자세히 아느냐 마느냐?』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露鳥는 不萌枝上夢하고 신령한 새는 싹트지않은 가지위에서 꿈을꾸고
覺花는 無影樹頭春이로다.
깨달음의 꽃은 그림자가없는 나무위에서 봄을맞아 피도다.

다시 법좌에 올라 이르되
『머리를 뚫어 다하고 밑을 뚫어 다하여 철두 철미하며, 뿌리에 사무치고 근원을 사무친 사람이 무엇 때문에 걸어갈 때에 길 머리를 잃고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며 모난데도 합하고 둥근데도 합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문을 감을 때에 처소를 잃는가?
여러, 선덕善德아! 어떻게 밝혀가야 통합을 얻어서 동일하게 꿰어갈 것인가?』

好手猶如火裏蓮이요 他家自有沖天意로다.
좋은손은 마치 불 가운데 연꽃과 같으니,
저에게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도다.

다시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한 티끌에 무량한 세계를 갖추고, 한 생각에 무한한 겂수劫數를 초월하며 한 몸에 끝이없는 중생을 나타내고, 한 몸에 수없는 모든 부처를 합하였다. 그러므로 큰 원갈으로서 나의 가람伽藍을 삼아서 몸과 마음이 평등한 성품의 지혜에 있게 되나니, 이러한 즉 가히 장소로서 한계를 삼지 못할 것이요. 가히 時分으로서 구속할 수가없다. 나와 남과 화합하니 곧 물과 젖이 서로같고 손님과 주인이 같이 참례하니 거울에 형상이 비추도다. 그런즉 生을 보호함을 또한 어떻게 알게 할 것인고?』

心心無量心이요 步步不迷方이로다
마음과 마음이 다른 마음이 없으니 걸음과걸음이 장소를 알지 못하도다
.

또 스님이 법좌에 올라 南泉보원선사 748~834 중국승려 의암자 태운 화두를 들어 말씀하셨다.
남천스님이 젊었을 때에 잠시풀로덮은 암자에 한 선객과 같이 있었는데 그와같이 山田을 매러가서 남천은 그대로 밭을매고 선객은 밥을 하기위해 왔다가 암자에 불을 질러 다 태워버리고 푸른 빛을 띤 풀밭의 따뜻한 햇볓을 향해 누워있었다. 남천도 그것을 알고 같이 기뻐하며 풀밭에 누워서 하는 밀이 『너만 그러할 뿐 아니라 나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으니, 또한 일러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만약 당시 그곳에 있었던들 그들의 생명이 거의 위태로울뻔 하였느니라.』

虛無眞實體이여 人我何所有오
허무하면서도 진실한 몸이여 너와 내가 어찌 있을까 보냐
妄情不休息 하니 卽泛 般若般이로다
어리석은 정연을 쉬지아니하고 반야의 배를 띄웠도다

경허법사의 영찬 鏡虛法師의 影讚

鏡虛無鏡이요 性牛曾非牛라
非無虛路에 活眼酒與色이로다.
거울이 비었으니 본래 거울이 없고
소가 깨달았으니 일찌기 소가 아니로다.
거울도 없고 소도아닌 곳곳의 길머리에
산 눈 자유자재가 술과 다못 색이로다.


영을 자찬하다 影自讚

我不離汝요 汝不離我로다
汝我未生前에 未審是甚麽오. O
나는너를 여의지 않았고 너는 나를 떠나지 않았도다.
너와 내가 나기 전에는 살피지 못한것이 이 무엇인고? O

벽해를 지나며 읊으다 過碧海吟

大天世界呑吐客이 藏身龍角過碧海라
天極金剛法起體요 茫茫河水古佛心이로다.
삼천대천 세계를 삼켰다 토했다 하는 객이
몸을용뿔에 감추고 푸른바다를 지나가니
하늘까지 닿은 금강산은 법기보살의 몸이요
아득한 바닷물은 옛 부처의 마음일세.

踏去踏來是甚麽오 草裡橫身毘盧師로다
適有乾坤呑吐客이 德嵩山上喝三千이로다.
밟아가고 밟아오는 것이 무엇인고?
풀속에 몸을 비킨비로의 스승이요,
때 마침 건곤을 삼키고 토하는 객이 있어서
덕숭산 위에서 삼천 세계를 할喝 하노라.

보덕굴에서 읊으다 向普德窟吟

短筇(공) 不休客이 正當普德窟하니
賓主不相見이로되 親如水水聲이로다
단장을 집고 쉬지않는 객이 바로보덕굴에 이르르니
관음이 주인이고 내가 객인지 서로가 못보나
친함이 물과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네.


백운을 바라보고 읊다 望白雲吟

莫道雲無心客하라 老僧不忘重重來라
雖수然白雲非我親이라 遠村鷄鳴餘知己로다
흰 구름이 무심객이라 이르지 마오 노승을 잊지않고 거듭거듭 오누나
그러나 흰 구름이 나의 친한자가 아니오
먼동네의 닭우는 소리,나를 알려주는구나.

臘랍八上堂示衆

滿天那箇개星이 世尊悟道星고
南面北斗裏에 如是最初星이리라.
온 하늘에 어떤별이 세존께서 깨달으신 별이고
남쪽을 향해 북두를 보는 속이 최초의 별인가 하리라.

世尊見性云道호대 滿空見性迷悟道라
迷悟喝破蠟八夜에 雪裡桃花片紅이로다
세존께서는 별을보고 도를 깨달으셨다 하지만,
만공은 별을보고 깨달은 도를 미했도다.
미와 오를 갈파한 납월팔야에 눈 속의 복숭아 꽃이 조각마다 붉었도나.


解制示衆

結時石女夢이요 解時木人歌라
夢歌都放下하니 望月明如漆이로다.
맺울 때는 돌계집의 꿈이요. 풀 때에는 나무사람의 노래이건데
꿈과 노래를 모두 버리니 보름달이 밝기가 칠과 같도다. 끝

Friday, January 27, 2012

만행 케임브리지 젠센터

케임브리지 젠센터

다음날, 나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다들 전날 저녁의 숭산스님 강의가 화재였다. 문득 한 친구가 숭산스님의 절이 하버드 옆 어디쯤 있다는 말을 얼핏흘렸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 그에게 그 절이 어디 있는지 당장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친구는 그저 하버드 옆 어디쯤 있는 ‘캐인브리지 젠 센터’라는 이름만 들었지 잘 모른다고 했다.
조바심 끝에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지기로 했다. 케임브리지 젠센터, 케임브리지 젠센터 ~~~ 마침내 찾았다. 하버드대학과 MIT 대학 사이에 있는 주소였다. 나는 지도까지 사들고 저녁강의도 빼먹은 채 자전거를 타고 그곳에 갔다.
케임브리지 젠센터를 찾아가면서 갑자기 예일대학에 다닐 때 보았던 한 건물을 떠올렸다. 예일대학 4학년 때 기숙사를 나와 학교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곳에 아파트를 빌려 살았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살았던 맨스필드 191번가를 지나면서 언젠가 흘긋 보았던 뉴헤이븐 젠센터’라는 팻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당시 그것이 불교사찰이라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클래스메이트 몇몇이 그곳에 다녔다는 말은 들은적은 있다.
아하~~~ 그러고보니 언젠가 그 건물앞을 지날 때 희색옷을 입고 머리를 삭발한 미국남자가 빌딩앞에 흔들의자를 놓고 책을 읽엇던 장면도 기억난다. 나는 그 당시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 역시 내 눈길을 느꼈는지 책에 묻고있던 고개를 들어 내쪽을 바라보았었다. 그는 나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낸 뒤 이내 다시 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만해도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완벽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런사람들은 그저 나와는 다른삶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뉴헤이븐 젠센터는 바로숭산스님이 운영하는 사찰이였다. 집에서 바로 코앞에 있었던 숭산스님의 사찰을 그때는 그냥 모르고 지나다녔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을 노크하자 젊은 미국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로 문을 열었다.
“여기가 한국의 숭산스님이 운영하시는 젠센터인가요?”
“그런데요.”
“저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인데요, 어제 저녁스님의 강의를 듣고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참선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녀는 어서들어오라며 반갑게 나를 안으로 맞이했다..
“마침 오늘 신입회원들이 참선하는 날인데 잘 오셨네요.”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 문 앞에 섰다.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종이를 덧댄 나무문 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앞서 걷던 그녀가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는 모습이 보여 나도 따라했다.
내키보다 훨씬 더 큰 신발장, 처음보는 것이었다. 모든칸에 운동화 하이힐 부츠~~~ 신발이 가득했다. 미국에서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것은 아주드믄 일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엄동설한 한 겨울이었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된듯 완전히 다른세계에서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젠센타에 가면 온통 동양사람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는 사람부터 선방이라는 곳까지 모두 서양인들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희색옷을 건네주면서 어떻게 입는지 알려주었다. 모두 끈으로만 된 옷이어서 묶는데 시간이 오래걸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이 한복의 옷고름 매는 것이었다.(물론 나느 지금 한국 신세대들보다 능숙하게 옷고름을 맬 줄 안다.
선방에 들어가니 큰 불상이 먼저 눈에 띄었다. 내 앞에 걷던 사람이 불상앞에 두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했지만 좀 거부감이 일었다. 교회나 성당에 갈 때도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이렇게 허리를 굽힐 정도는 아니잖아. 나는 지금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 절에 와 있는데, 이것은 또다른 우상을 섬기는 일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선방에 들어섰다. 약 서른다섯 명 정도가 큰 방석을 깔고앉아 벽을 바라보며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으로 본격적인 참선을 하고 저녁예불까지 참석했다.

예불시간에 들리는 목탁과 염불소리.
염불은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읊어졌다. 나중에야 그때 읊어진 염불이 〈반야심경〉 〈천수경〉 〈관음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듣는 염불소리였는데도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는지 모른다. 이윽고 예불이 끝나고 사람들이 선방을 나갔다. 나갈 때 부처님 불상앞에 반배를 했는데 다들 익숙해 보였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법당앞에 서로마주앉았다. 약간어색한 침묵이 끝나고 지도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한 사람이 가운데 앉아 서로자기소개를 하자고 했다.
“저는 피터이고 MIT대학 3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제 이름은 수지이고 보스턴 법률회사에서 일하는 변호사 입니다.”
“저는 해리이고 보스턴 증권회사에 다닙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입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미국에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 중산층이라는데 놀랐다. 그리고 한결같이 좋은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참선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나 스스로도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 중 누구도 나처럼 불교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없었고 그렇게 열심히 진리를 찾아 헤메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미국내에서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저 동양사상에 심취한 히피 정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다니, 나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왜 참선을 시작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자였는데 싦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 참선을 시작 했읍니다. 나를 찾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음을 못 잡고 있읍니다. 나는 고통 스럽습니다.”
“얼마전 아내와 이혼한 뒤 아이들이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 있읍니다.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마약에 손을대고 있읍니다. 아버지로서 매일 그들과 싸우고 논쟁하지만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싶어 이곳에 왔읍니다.
나는 이른바 불교신자라는 사람들은 나와는 뭔가 다른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와 똑같은 내 나라 사람들이 아닌가. 하나같이 일상에 예기치 못했던 고통과 피곤함과 건조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거기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나는 점점 더 어떤 확신의 길로 들어섯다는 환희를 느꼈다. 그토록 고통에 신음하며 밤을 지새던 날들~~~ 이제야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인지도 몰라. 아 !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내 다리였다. 평생 책상에만 앉아 버릇했던 나에게 20, 30분씩 가부좌를 트는 참선자세는 완전히 고문이었다. 그전에 참선수행을 시도하긴 했지만 기껐해야 5분에서 10분 사이었다. 그것도 한 달인가 하다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다리가 너무아파 몇 분못가 무릎을 내내 세우고 있어야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도 몇몇 눈에 띄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쩌면 다리 때문에 成佛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져버릴 수가 없었다.

미국식 참선수행

숭산 큰스님이 미국절을 운용하는 방식은 아주재미있다. 오랜 불교의 전통을가진 한국에서는 불교신자들 중에 나이드신 분들이 많은데 미국에서는 완전히 딴판이다. 미국에 불교가 도입된 것에는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우선 쏠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이것은 요즈음에도 마찬가지다. 오랜 불교전통을 가진 동양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교는 미국의 신세대 문화다. 미국의 부모님들은 불교에 관심있는 젊은이들을 히피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숭산 큰 스님이 미국에 오셔서 첫 포교를 시작하신 해가 1972년이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젊은이들이 한국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되어있고 여행이나 교재등 많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으므로 비구, 비구니가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단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청년들은 자유롭긴 했자만 자유에 집착하는 경향이있어서 오직 몇몇 사람만이 출가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절 운영방식도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미국식으로 운영되었다. 미국에서는 사찰문화가 달리 있었던 것도 아니였으므로 숭산 큰스님은 미국문화에 맞는 새로운 미국식 불교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다.
우선 미국에서는 출가한 비구, 비구니나 그렇지 않은 신도들이 함께수행을 한다. 숭산 큰스님이 미국의 뉴헤이븐, 프라비던스, 케임브리지 등에 세우신 한국 절(젠센터)에서는 신도와 스님들이, 남자와 여지가 한방에서 함께 참선수행을 한다. 학생, 변호사, 회사원, 공장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가진 남녀노소가 스님들과 함께 수행한다. 그리고 희망자들은 월세를 내고 절에 함께 머물면서 스님들과 생활할 수도 있다.
스님과 신도들은 매일 새벽네 시 반이나 다섯 시에 함께 일어나 108배를 하고 염불하고 참선한다. 같이 아침 발우 공양을 마친 뒤 스님들은 절의 일터로, 신도들은 각자 직장으로 흩어진다.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젠센터로 모여 저녁공양을 같이하고 저녁예불과 참선을 한다. 신도들 모두에게는 각자 방이 있고 또 각자 모두 절에서 맡아해야하는 일이있다. 청소나 빨래, 쓰레기 버리기 등 공동생활에 필요한 모든일을 나눠서 한다. 한 달에 약 1인당 480달러를 내는데 음식등 모든것을 젠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다.요리도 각자 사정에맞게 돌아가면서 만든다. 설거지도 같이한다.
젠 센터 스님과 신도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적어도 주말을 이요한 사흘간의 용맹정진 참선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정이 있으면 하루나 이틀만 참여해도 된다. 그 기간 동안에는 모두 묵언한다. 만약 사정이생겨 용맹정진을 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 안에서 마주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 아침저녁의 예불시간에는 절에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인근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참가한다. 숭산 큰스님이 만든 이런 사찰문화는 참선과 생활을 접목시키려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잘 맞았다.
큰스님 책에는 아런 말씀이 있다.
미국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때때로 자유에 너무 집착한다. 다른사람들이 손끝만큼이라도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절에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새벽 네 시반이나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하고 108배도 함께해야 하고 염불도해야하고 참선도 해야한다. 같이 밥목고 함께 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단체수행을하면 여러분들의 업은 녹아 사라져 다른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다.
나 자신만의 상황, 의견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 단체수행은 다른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업을 보는 것이다. 마치 감자를 깎는 것과 같다.미국사람들은 감자를 하나하나 깎는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는 큰 고무내야에 감자를 담아놓고 마구 비벼서 감자들이 서로 껍질을 벗겨내도록 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감자의 행동으로 자기의 껍질이 벗겨지게 하는 것이다. 감자를 하나하나 깎는 것보다 쉽고 빠르다. 이것이 바로 다른사람의 거울로 내 업을 녹여내는 것이다.
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신입회원으로 등록하고나서 한 달 뒤 아예살림을 젠센터로 옮겨 단체수행을 시작했다. 고무대야에 섞인 감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예불과 참선을 함께하고 저녁에 다시 예불과 참선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면벽참선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양다리를 꼬고 앉아 벽을 바라보며 아무일도 안 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다. 머릿속에 획획 지나가는 그런 생각들은 오랫동안 객관화 시켜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가.
난생처음 나는 내 마음의 본질, 내 생각의 근원에대해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경험이었다.그 어떤 책이나 수업으로부터 받은 가르침보다 깊은 경험이었다.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긴 했지만 앉았다가 일어설 때마다 가슴깊이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케임브리지 젠센터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안돼 나는 3일 용맹정진 특별수련에 함여했다. 사흘동안 매일 여덟시간씩 앉아 참선수행을 했다.
젠센타에서의 단체생활은 여러가지 배울 점을 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만 함께 살앗다. 그런데 젠센터에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과도 만나게 된다. 견해가 서로 다르니 싸우기도 하고 반대로 큰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점차 단체생활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정말 큰스님의 말씀대로 거울 같았다.다른사람이라는 거울을통해 나 자신을 모든 것이다. 이,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무엇보다 나의 단점이 아주 뚜렸하게 보였다. 내가싫다, 좋다는 가치 판단을 놓아버리면 나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잘 살아갈 수 있지만 내 견해, 내 상황에 집착하면 내 주변의 조건과 상황은 금새나빠졌다.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매일아침, 저녁으로 스행하고 어디서나 마주치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나의 삶은 금새 최악의 상황으로 바끠었다.
자기견해와 상황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이가는 우리 몫이었다.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버리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고통이 나타났다. 스님은 스님대로 신도는 신도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자의 상황을 고집하면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하나를 깨달았다.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기가 처한 모든 생각과 견해를 버린다면 세계평화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작은 공간에서 세계평화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테스트 한다고 농담했을 정도였다.
만약 내 조건과 상황 견해를 버리면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내 미음이 평화로워지면 젠 센터가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그걸 안 이상 이미 세계평화는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Wednesday, January 25, 2012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입학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원 입학

19989년 9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나는 하버드에서 비교종교학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신념을 갖고 살다가 진리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방황을 거친 끝에 불교를 만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물교는 나에게 공부를 해보고 싶은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 인연이 안 닿아서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책으로 먼저 불교를 공부 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학문을 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실제 나의 관심은 불교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내 안에서 조차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수십 년 동안 내 안에서 길러온 신념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에머슨 등을 통해 신에대한 일종의 부담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고통스러워졌다.
연인과 막상 헤어졌을 때 마음속에서는 약간의 해방감마져 느끼지만 결국은 가슴을 칼로 저며내는 듯한 이별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 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밀씀을 쫓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끝이아니라 사작이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더 버려야 했다. 해방된 노예처럼 자유로웠지만 그만큼의 다른 뭔가를 대신 지불해야 했다.
그때까지 나의 모든 철학적 사색, 진리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 진정한 스승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수녀님, 신부님, 수도사님들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에는 어떤 한계가 느껴졌다.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원하는 나에게 그분들의 말씀은 성이차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생각, 자기믿음, 자기스승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어느순간,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갈라진 땅의 거대한 벼랑끝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오룻이 혼자서 오직 혼자서 힘으로 이 거대한 틈새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사실앞에서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철학이나 종교를 폭넓게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절반밖에 안된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거나 무신론자들이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전세계의 종교와 인종이 함께 만나는 지구촌 대학원이다. 많은 학생들이 나처럼 교과서나 교수님들의 가르침 이외에 영적인 수행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입학한 첫날부터 대학원 분위기가 열려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랬던것은 학교내에 좋은 불교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 쇼펜하우어에 대해 같이 공부할 수 있었고 무슨 책이든 읽고 교수님과 얘기할 수 있었다. 또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마침 학교안에는 노자사상 공부가 유행이었는데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너도나도 읽는 베스트 셀러였다.피어싱 안 하고 《도덕경》 안보면 요새 젊은이가 아니라는 우스겟소리가 있을 정도로 당시 하버드에는 노자열풍이 불었었다.
나 역시 노자와 장자의 저작을 스터디까지 해가며 열심히 읽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무위자연’ 無爲自然.
나는 그런개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은 여태껏 내가 생각하고 살아온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배운개념속에서의 삶이란 오직 뭔가를 하는 것, 뭔가 얻으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위자연은 삶에서 마무것도 만들려 하거나 가지려 하지 말라고 했다.
장자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에 나무 두 구루가 서 있었다. 한 나무는 아주 오래돼 밑둥부터 썩은 나무였고 다른 나무는 아주 훌륭한 나무였다. 그 나무는 늘 옆의 늙고 못생긴 나무를 업신여겼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아무쓸모없는 나무라고 놀려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려홨다.
숲을 둘러보던 남뭇꾼은 대번에 훌륭한 나무 한 그루를 알아보고 도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고통에 못이겨 문물을 흘리면서 옆의 나무에게 이렇게 물었다.
“넌 어떻게 칼이나 도끼에 상하거나 찍혀 베어지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니?”
그러자 늙은 나무가 말했다.
“나는 못생기고 늙어서 그들에게 소용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살아남는 거야.”
카아, 이런 역설이 어디 있는 가. 살려면 주고 얻으려면 버려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개설된 노자 장자 강죄에는 학생들이넘쳐났다. 어떤학생은 책에서 그치치않고 삶에서 노장사상을 구현하려고까지 했다. 학교를 버리고, 여지친구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무위자연의 삶을 산다며 산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머리칼도 그대로 기르고 옷도 안 갈아입고 심지어 목욕도 잘 하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가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방식은 뭔가 나하고는 어울리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노자가 말한 자유란 ‘몸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 아닌가. 흔히 ‘무위’라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상에 올라가 눈 감고 책상다리로 앉아있는 것으로 생각 하지만 진정한 무위란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1995년〈현암사〉에서 펴낸 《도덕경》풀이에[보면 편역자인 오강남교수가 ‘무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붙였다.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읹아서 무위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이에ㅔ서 발견되는 인위적행위, 과장된행위, 계산된 행위, 쓰데없는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어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위, 그런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아런 초월적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그렇다, 나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어떻게 나는 ‘무위’의 경지를 얻을 것인가? 어쨋든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의 인기강좌
하버드 대학원의 첫 학기 때 마사토시 나가토미 교수로부터 불교강의를 들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아주 존경받는 불교학자였다. 그는 20년도안 하버드에서 불교를 가르쳤고 많은 제자들이 미국전역으로 흩어져 유명한 불교학자와 작가로 성장했다.
미국 불교 연ㄱ구에 큰 영향을 끼친 미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하버드에서도 아주 유명해 매강좌마다 수강생으로 붐볐다. 심지어 하버드 법대와 경영대학원 학생들까지 그의 강의를 듣기위해 몰려들었다. 인근 보스턴 지역에있는 MIT, 보스턴 대학교 학생들도 와서 청강을하고 교환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가 개설한 제목은 ‘불교의 자연과’이었다. 마사토시 교수는 아주 스마트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늘 앞자리에 앉아 그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럴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느낌아었다.당시 하버드에서 가장 인기를 꿀었던 강좌가 인터냇 강좌와 함께 불교 강좌였을 정도로 불교열풍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거의 한 달에 한번씩은 전세계 훌륭한 고승들, 학자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는 단골인기 강사였고 인도, 스리랑카, 팁벳, 일본의 큰스님, 학자들이 초청되어 왔다.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마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본래 인도 티벳 불교를 전공했는데 일본불교도 함께 강의했다. 한국 불교강의는 없었다. 나는 그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가 아주 열심히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교수님역시 나에게 많은 관신을 가져주었다. 나는 강의시간은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여러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다. 당신이 아는 모든 지식이며 책을 나에게 전해주고 싶어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지않는 교수로 유명했는데 나에게만큼은 무슨 책이든 다 가져다 보라고 했을 전도였다.
나는 미사토시 교수를 통해 禪불교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달마대사, 조주, 마조, 임제, 육조, 혜능 등 중국 선불교와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1989년 가을, 교수님이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셨다.《육조단경》이라는 책이었다.교수님은 그 책이 ‘선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하셨다.
나는 점점 선불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책에나와 있는것은 단지 말일 뿐이고, 이곳은 중국도 아니니 절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성을 얻기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그냥아무산이나 들어가서 무조건 다리를 꼬고앉아 참선을 하면 되나? 스승이 필요하다. 나를 가르쳐줄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나는 이렇게 까지 생각했다. 왜 하필 미국땅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12억 인구의 중국인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장자, 노자, 혜능에 이르기까지 중국 성인들의 책은 나에게 너무나 가깝게 다가왔지만 그건 단지 책이었다. 책 속에 있는 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는 스승이 필요했다.
물론 내 옆에는 마사토시 교수가 있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스승이었지만 단지 학자였다. 처음 한동안은 그를 선사처럼 존경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교수님이 나에게 지식은 줄 수 있으나 근원적인 나의 곰민은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아의 생각을 교수님역시 잘알고 계셨기에 내가 뭔가 여쭙고 답을 기다리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폴, 나는 단지 교수에 불과해, 그 이상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혹은 “네가 방금한 그런질문은 오직 너의 스승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마치 마라톤 경기에 나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 이제 마침내 저 멀리 종착점이 보이는데 더이상 뛰지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같은 낭패감이 들엇다. 그동안 하버드에 초청되어온 수많은 승려들의 강의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면담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기대를하고 찾아가보면 그냥학교에서 만나는 학자나 종교인 분위기만 느껴질뿐 성에 차지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사토시 교수로부터 숭산스님의 강의를 들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캠퍼스 몇 곳에서 포스터도 흘긋 본 기억이났지만 그냥 지나쳤었다. 또 한 사람의 그저그런 승려 아니면 불교학자려니 생각했다.
나는 당시 희망이라곤 없었다. 무엇에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날, 내 인생의 축을 바꾸었던 1989년 12월의 그날, 마사토시 교수가 나에게 숭산 큰스님의 강의에 꼭 오라고 하시면서 ‘살아있는 生佛’이라고 극찬하데 대해 약간호기심이 통하긴 했다. 여태껏 수 많은 불교승려들이 학교에 왔다 갔지만 교수님께서 생불이라고 칭한 사람은 달라이 라마를 빼고 숭산스님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날아침, 리포트를 내려 교수님 방에 찾아갔을 때,교수님은 한국의 숭산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책꽂이를 한참 두지셨다. 그러더니 문고판처럼 아주얇은 책을 애게 건네셨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Dropping Ashes on the Buddha, (여시아문 출판사에서 최근 《부처님께 재를 떨면》의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라는 희한한 제목의 책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 책은 선불교책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나는 ㅅㅁ드렁하게 그책을 받아들고 잠깐 뒤적인 뒤 가방에 넣고 교수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숭산스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미친 듯이 그 책부터 꺼내 펴들었다.
아! 그때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교수나 승려로부터도 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불교책의 99.99퍼센트는 불교, 마음, 법문, 의식, 본성품, 불성, 空 등에 대해 ‘그것들은 이러절한 것’이라고 설명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책은 방금 내가 듣고 온 그이 강의처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심지어 어떤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통해 되물음으로서 명쾌한 답변을 애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존의 불교 승려나 학자들은 남들이 마음에 대한 정의부터 읊기 시작한다. ‘금강경에 따름면 마음은 어떤어떤어떤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미음을 이러이러하게 설명한다’ 고 또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단어와 말, 이론, 아이디어를 사용해서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숭산스님은 ‘말이 없는 것’을 설명하려들지 않았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책 말고는 처음 접하는 방식이었다.
숭산스님은 학생들의 질문마다 그의 경험을 섞어서 학생들이 갖고있는 생각으로부터 해답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이란 질문자의 고통과 어려움을 깨끗하게 해결하는 데 맞닿아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한국 불교인가.’
나는 그날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Tuesday, January 24, 2012

대중에게 보이다, 나를 찾자

大衆에게 보이다, 나를 찾자

스님이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번치고 말씀하시기를
『옛 삶의 말씀에 본래부터 고요하여 동하지 아니한 것이 여여如如한 부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如如라 이르더라도 이것은 벌써 변해버린 말이니 如如라는 것은 곧 우주의 母體이므로 일체 만물이 모두 이 여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겨나도 母體를 모르고 죽어가도 모체를 모르고 있으니 그 어리석음이 축생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 중생들이 모두 이렇게 된 까닭은 모직 탐진치貪嗔痴의 세 가지 독한 것을 가지고 일용에 살림을 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만약 누구든지 이같은 어리석음을 벗어나려고 하거든 이「구래부동여여불 舊來不動如如佛」을 깨닫도록 하라. 이 한 마디를 증득하기만 하면 바야흐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니라」
또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이 돌아오지 아니하여 세간의 상이 항상 주하니라.』
주장자를 세워 일으키면서
『두고보라 ! 삼라만상이 다만 이 한 몸에 항상 홀로 드러나 있으니 이 속에 이르러 도리어 한 법이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비록 이와같으니 꿈에도 설하지 못하니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치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또 법좌에 올라 잠시동안 묵묵히 계시다가 말씀하시기를
『위 없는 보리가 이것으로 쫓아 나니
만길이나 되는 언덕위에 외발로 섰도다.
도과 서와 남과 죽을 묻지 말라.
달마기 曺溪의 길을 알지 못하도다.
나에게 한 비결이 있으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치고 또 이르되

一萬 기틀을 쉬어 파하니
일천 성현이 잡지 못하고
부모도 나와 친한 이가 아니요
모든 부처도 이 道가 아니구나.
산승이 이 속에 이르러 한 가닥 활로를 찾으니 곧 이 생멸에 능히 옮기지 않고, 차별에 능히 구르지 않고, 티끌을 등지고 覺에 합하여 제불諸佛과 중생이 본래 평등하구나. 대중아 ! 이미 평등할 진댄 무엇 때문에 諸佛은 영원히 얻음이 되고 중생은 그렇지 못한고?
또 일러라. 잘못 됨이 어느 곳에 있는고?
밤길을 허락하지아니하니 밝아서 올지어다.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맺을 때에도 맺음이 없고 풀 때에도 풀음이 없도다.
맺고 풀음을 함께 분명히 하면 다녀도 다님을 알지 못하고 앉아도 앉음을 알지 못하여 참으로 걸림이 없도다.』
또 이르되
『세존이 도리천에 올라가시어 어머니응 위해 법을 설하시고 내려 오실 때에 연화색 비구니가 신통력으로서 가장먼저 가서뵈오니 부처님께서 밀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먼저 본것 같지만 바위 밑에 앉아있는 수보리가 가장먼저 부처님을 뵈올 것인고? 각기 대답하여 ㅗ아라 !』하니 대중이 대답하질 못하자, 스님이 잠시 있다가
『만약 곁에 사람이 있으면 여래선如來禪을 면하지 못하고 조사선祖師禪을 얻지 못하였을 것이라 하리라.
고기가 가니 물이 흐르고
새가 날아가니 털이 떨어지도다.』
또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붙일 수가 없고 형상은 의지할 수가 없으며 발로는 걸을 수가 없고 말로는 이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가히 보고 모양을 이름할 수가 없고 가히 얻어서 만져 헤아릴 수가 없다.
삼라만상이 그 用과 같고 태허太虛가 그 體와 같다.
놀매 이르러서는 무리 가운데 신선이요, 잘 응함에는 티끌 가운데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祖師가 아르되
「인연을 응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되 문득 불러서 지혜를 삼는다.」하니 또한 어떠한 것이 인연을 응하여 물체를 교화하는 방 편 지혜인가?
도리어 아느냐 마느냐?
앉아서 자주 술을 권한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별한 뒤로는 보기도 드믈것이다.』

또 법좌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臨濟스님은 항상 喝을 하시고 德山스님은 항상 방망이질을 하시었다 하니, 금일 대중은 임제의 喝을 친할 것이냐 덕산의 방망이를 친할 것이냐?』
이때 벽초대사가 곧 나와서 예배하니 노사가 묻되
『벽초는 임제의 喝을 친랗 것이냐 덕산의 방망이를 친할 것이냐?』
벽초가 대답하되
『임제의 할도 친하지 아니하고 또한 덕산의 방망이도 친하지 않겠읍니다.』
스님이 이르되
『그러면 누구를 친할 것이냐?』
벽초가 스님의 소리가 떨어지자 마자 트게 喝을 하니 스님이 방망이로 한번 때리자 벽초가 절을하고 자리로 돌아감에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는 자라.』하시다.

法紀出草
스님이 금강산으로 부터 정혜사에 돌아와 법좌에 올라 설법하시었다.
『내가 금강산에 있을 때에 법기보살이 설법하신다는 소시을 듣고 곧 가서 들었더니, 법기보살이 큰 소리로 대중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풀이 한 길이아 깊다.』하시더라 또한 일러라, 금일 대중은 어떻게 아는고? 하니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그 뒷날에 한 선객이 와서 붇기를
『법기보살이 이렇게 말한 것ㅇ은 또한 이 풀속의 말이니, 어떠한 것이 풀 속에서 나온 말이겠습니까?』하니, 스님이 답하시기를
『풀 속에서 나온 말을 묻지 마라. 풀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위하는 것이 그 은혜가 커서 갚기가 어려우니라.』
선객이 다시 말하되,
『풀 속에 들어 사람을 위하는 말씀 한 마디를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요 !』하고 청하였다.
『밤길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밝아서 이르러 오리라.』하다.

無子話頭드는 법

한 선승이 趙州스님께 묻기를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조주스님은 「無 」라 하셨는데, 조주스님은 무엇을 근거로하여 「無」라 하였을까? 이 한 생각을 짓되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 닭이 알을 품듯 앞 생각과 뒷 생각이 서로 끊어짐이 없어서 냇물 흘러가듯 하며 아침 일찍 찬물에 얼굴씻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정히 앉아 화두를 들되 개가 佛心이 있단 말인가, 없단 말인가. 있고 없는 것이 다 空하여 참으로 없단 말인가. 이와같은 망상은 옛 사당의 찬 향로와 같이 고요하게 하고 화두話頭는 성성惺惺하게 하여 밝은 달이 허공에 뚜렸하게 들어난 것 같이 하여 망상은 적적하고 화두는 성성하게 하라. 적적함이 달 덩어리와 달 광명이 서로 어김이 없이 지은것 같이 화두를 지어가며 저녁 때에는 살펴보아 화두를 잘못들었거든 自性을 불러 꾸짖되, 주인공아 ! 내말을 들어라. 네가 끊없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공부를 등지고 날로 망상에 합하여 화택수고火宅受苦를 면치 못하는 놈이 금생에도 이와같이 혼침산란 속에 게으르게 사는구나. 만약 오늘 밤이라도 눈빛이 땅에 떨어지면 천당갈지 지옥갈지 아귀될지 마복馬腹을 향할지 우복牛腹을 향할지 모르거늘 어찌 공부를 이와같이 방향없이 하느냐?
수마睡魔를 이기지 못하여 잠을자면 크게 꾸짖고, 부처님이 삼경三更외에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세 시간만 잠을자고 일어나서 또 찬물에 얼굴을 씻고 고요한 마음으로 앉아 생각하라.
요행히 간밤을 살아왔으니 〈오늘은 결정코 공부를 판단내어 훗 근심이 없게 하리라.〉하고, 공부를 그 전날보다 더 지극한 마음으로 날마다 이와같이 하여감면 어찌 10년, 20년을 허송세월이라 하리요.
깨달음이란 어느 한정된 기간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근기根氣에 따라서
고요한 밤, 밝은 달을보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 혹 새벽 종 소리를 듣고 道를 깨닫기도 하며, 혹 원촌遠村의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혹 원곡遠谷의 행상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하며, 혹 이웃집 아기우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기도 한다.
혹 선지식의 설법을 듣고 言下에 도를 깨닫기도 하며, 좋은 인연을 따라 머리 머리의 도를 깨달음에 신기로운 광명이 하늘도 덮고 땅도 덮고 밤도 없고 낮도없는 광명의 세계를 이룬다 하나 월면 月面 = 만공 의 아는 바는 그렇지 아니하여 털끝만치도 밝음이 없고 털끝만치고 어두운 것이 없다.
혹 도를 깨달음에 지혜가 명철하여 일체법을 하나도 무를 것이없이 다 안다하나 만공이 아는바는 그렇지 아니하다. 지혜가 없어 가히 한번도 앎이 없으며 한 번도 가히 모를것이 없으며, 혹 도를 깨달음에 살고 죽는것이 없다하나, 만공의 라는바는 그렇지 아니하다.
혹 살기도 하면 혹 죽기도 하여 죽고삶이 자유로우며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 보림하여 성품이 흰 연꽃같아서 다 물음이 없다.하나 月面이 아는바는 그렇지 아니하다. 배고프면 밥 생각이 간절하고 졸음이오면 자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혹 도를 깨달음에 다시닦고 닦아 중득한다 하나 月面의 아느바는 그렇지 아니하며 본래 잃어버린 것이 없어 다시 중득할 것이 없다.
산과 산 물과 물이 각기 완연한 소식을 뉘라서 변작變作할까.
만약 사람이 이 도리를 잘못알면 지옥가기 화살이요, 만약 이 도리를 명백하게 살려얻으면 모든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어 푸른산 푸른 물을 향하여 불사佛事를 짓고 조각조각 흰 구름을 향하여 불사를 하고, 혹 앉고 눕는것을 향하여 불사를 짓고, 혹 고요하고 움직이는 것을 향하여 불사를 지을 것이다.
홀 밝은 머리가 오면 밝음 머리를 향하여, 혹 어두운 머리가 오면 어두운 머리를 향하여, 푸른 머리가 오면 푸른 머리를 향하여, 누른 머리가오면 누른 머리를 향하여, 붉은 머리가 오면 붉은 머리를 향하여, 둥근 머리가 오면 둥근 마리를 향하여, 긴 머리가오면 긴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짓는다.
착한 머리가 오면 착한 머리를 향하여, 악한 머리가 오면 악한 머리를 향하여, 옳은 머리가 오면 옳은 머리를 향하여, 그른 머리가 오면 그른 머리를 향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머리를 향하여 불사를 지으니 이 무슨 도리인고?
밝고 밝은 조사祖師의 뜻이다.

나를 찾자

사람이 만물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뚯은 나르 찾는데 있다.
나라는 의의가 절대 자유로운데 있는 것으로 모는것은 내 마음대로 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자유가 없고 무엇하나 임의로 되지않는 것은 망아忘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나가는 까닭이다.
망아는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라가 쓰고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眞我는 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妄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은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다
사람이 「나」를 잊어버리면 육축六畜과 같으니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짐승이 본능적으로 食色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메는 것은 조금도 다른것이 없다.
세상에서 아부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도 자기를 모른다면 사생육취四生六趣에 윤희하는 한 분자에 지나지 아니한다.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사는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앞길이 망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인생은 마치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딩굴러가는 죄수처럼 業의 사슬에 끌려 생, 로, 병, 사의 苦의 길을 영겁으로 윤희하고 있는데 그 사슬은 자기의 칼이라야 끊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사슬을 끊어 버리지 못한이상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받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기실 사람의 정신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불교에서 「나」라고 하는것은 아무개야 ! 하고 부르면, 네 !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生死도 없고 불에타거나 물에젖거나 칼에상하는 법이 없어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다.
석가세존이 탄생시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르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하신 그 「我」도 「나」를 가르킨 것이다.
이와같이 각자가 부처(나)가 될 성품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며,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文句는 있으나 문자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참다운 「나」는 보고 들어서 얻는 앎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나 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나」가 아니다.
누구든지, 육신肉身, 업신業身, 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
또한 일체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이닌 까닭의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없는 자리이다.
생사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 디 지녔기 때문에 한가닥 풀의 情이라도 전 우주의 무장으로도 해체시킬 수없다.
끝으로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 쯤은 자유자재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된다.
원돈문 = 모든 사물을 원만히 결함없이 갖추어 대번에 깨달음에 이르는 문.
사생육취 = 생물이 나는 형식의 네가지, 곧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을 사생이라하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을 6취라 함
여여 = 5법의 1. 바른 지혜에 계합하는 이체의 진여여의 뜻이 하나만이 아님으로 여여라 한다. 여하고 여하다는 뜻.
여래선 = 여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모든중생의 본래구족한 부사의한 이치를 깨닫는 선을 말한 것. 또는 여래의 교설에 의거하여 깨닫는 선을 가르킨 것.
조사선 = 달마의 전전인 서가의 마음을 마음으로 아는 참된 선을 말한것. 곧 文字義解에 걸리지않고 바로 이심전심하는 달마가 본래 전한 선법을 말한다.
임제 = ? ~867 중국 임제종의 개조, 계율에 정통하고, 황벽희운선사의 법을 잇다.혜조의현을 가리킴.
덕산 = 782~ 863중국스님 속성 주. 항상 금강경을 강설하므로 주금강이라 부른다. 떡파는 노파가 금강경 뜻을 묻는것을 답변하지 못하고, 그의 지시로 용담 승신에게 가서 크게 깨닫다.
법기보살 = 화엄경 보살주처품에 나오는 보살, 금강산에 있다 한다.
본래면목 = 사람마다 본래 갖추어 있는 심성,육조 혜능대사가 처음한 말.

Monday, January 23, 2012

만행 참선세터는 진리의 문인가

참선센터는 진리의 문인가

이제 정말 수행을 할 젠센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젠센터란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불교의 사찰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불교바람이 아주빠른 속도로 미국에 불어닥치고 있었지만 그 역사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에를 들어 한국같으면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아 ! 해인사나 수덕사나 화계사를 가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불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절’이라는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고 거기에는 대충 어떤전통이있고 무슨 가르침이 있는지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더구나 한국의 불교전통은 아주 오래된 것이어서 고승들이나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책은 물론, 신문, 방송에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아주익숙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상황이 아니었다. 스님이나 절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서점에 나와있는 책을 통해 불교라는 ‘신사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불교책에서는 하나같이 참선수행을 강조한다. 그러면 정말 참선수행을 하러 어디로 가야하나, 또 누굴 찾아가야 하나. 처음부터 길이 탁 막히는 것이다.
미국에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불교전통이있다. 뉴욕같은 도심만 예로 들어보더라도 티벳 절, 중국 절, 일본 절, 베트남 절, 비파사나 절, 스리랑카 절…… 물론 한국 절도 있다. 미국의 각 도시마다 많은 나라들에서 온 각기 다른 불교사찰들이 있고, 한나라 북교전통에도 각기다른 가르침이 있다.예를 들어 티벳 불교만 보더라도 대처승이 있는가 하면 결혼하지않는 승려도 있고, 수행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스승에 따라 염불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전공부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한국불교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진짜 스승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고작 책 몇권으로 불교 가르침에 입문한 나에게 이것은 절실한 문제가 이닐 수 없었다. 어쨋든 나는 일단 참선수행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고 다짐했다. 책에서 읽은 참선수행은 나의 의식에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무엇보다 참선불교는 정직했다. 어떤 미신적인 신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교리나 독단, 혹은 이것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수행을 강조했고 나는 내 마음속 깊이 오직 수행만이 진리를 찾게 해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됐다.
그 당시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 나는 동양문화와 역사에 대해아는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각국의 불교가 서로 어떤차이가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것들이 모두 같은 가르침, 같은 전통, 같은 문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나는 일단 전화 번호부를 뒤져 ‘Z’편을 찾아 펼쳤다.
미국에 현재 도입된 참선불교는 나라와 문화와 가르침에 상관없이 모두 ‘젠 ZEN’이라고 부른다. 젠이란 말은 애초에 일본불교에서 나온 말인데 미국에 처음ㄷ도입된 불교전통이 일본불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젠은 일본불교가 미국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젠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원래 일본불교란 것이 한국불교가 전래되어 만들어진 것인데 전작 서양에서는 참선불교하면 무조건 일본단어인 젠을 사용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어떤 한국스님들은 외국인에게 강의할 때 이 젠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젠이라는 말은 단지 알본불교만을 국한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불교가 미국에 알려진 것은 숭산 큰스님이 가르침을 펴기시작하신 1972년이었다. 이미 젠이라는 말은 참선불교를 뜻하는 외래어가 돼버렸다. 완전히 영어가 된 것이다. 일본불교가 미국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880년이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그들의 영향력을 넓혀 1896년엔 시카고에서 불교를 주제로 한 세계종교회의를 열기도 했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이민이 크게 늘어난 것과 속도를 맞춰 많은 일본 선사들이 미국을 건너왔다. 특히 캘리포니아에 집중적으로 모여들었다.
일봄 선사들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사람이 다이제츠 T. 스스키 선사이다. 학자이기도 한 그는 1950년대에 미국 대학을 무대로 강의를 시작했다. 컬럼비야 대학에 개설됐던 참선수행과 불교에 대한 강의는 당시 영향력있는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호기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책과 가르침은 당시 기성세대에 반발하고 있었던 젊은이들, 소위 ‘비트 운동’ Beat Movement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비트운동은 20세기 아주 중요한 미국 문화운동이다. 알렌긴즈버그 Allen Ginsburg, 잭 케루악 Jack Kerouac, 개리 스나이더 Gary Snyder, 위리엄 S. 버로스 William ss. Burroughs, 필립 웨일렌 Philip Whalen, 로렌스 펠린게티 Lawrence Feringhetti 같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모두 그의 강의를 듣고 참선수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와 수필과 소설에 불교의 가르침을 접목했고 그것은 그 당시 미국문화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비트운동의 기수들은 모두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현대 산업사회의 소외와 무의미에 깊이 천착해 있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종교는 더이상 해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책이아닌 수행을 통한, 남의 경험이아닌 자기자신의 경험을 통한 진리와 자아의 발견은 자의식이 강한 그들에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파고든 것이다.
스즈키 선사의 가르침과 참선불교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 널리 보급되기 아르렀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불교, 특히 참선수행이야말로 영적수행방법중에섣도 아주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형태라고 생각했다.
어쨋든 전화번호에서 ‘ZEN’으로 시작되는 낱말을 계속 따라가다가 내 눈은 드디어 ‘Zen Community of New York’이란 단어에서 멈췄다. 그것은 마침 내가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막상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을 읽어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듯도 했다.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자동응답기에서 녹음된 안내문이 흘러나왔는데 미일 저녁 여섯 시에 참선수행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내요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당장 가보기로 했다. 드디어 내가 그렇게 찾아헤메던 진리의 길로 들어서는 것인가. 길을 찾을 수 없을 만치 뒤얽혔던 내 고통의 어두운 정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가. 내 마음은 설렘과 희망으로 두군거렸다. 드디어 드디어……
정확하게 다섯 시 45분. 나는 젠센터가 있는 건물 정문을 바라보면서 건너편 길가에 서 있었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그곳의 문을 바라보면서 등줄기에는 식은땀까지 흘렀다. 이제 저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동안 내가 그토록 찾아 헤메던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질문들의 해답을 들을 수 있는가.
몇몇 사람들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 문을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의의로 모두 평범해 보였다. 나와같은 캐주얼차림의 학생이거나 아니면 넥타이를 맨 회사원, 주부들 같았다. 좀 이상했다. 적어도 젠센터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뭔가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옷차림일 것 갔았다. 아니면 머리를 삭발 했다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 가슴은 쿵쿵거렸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50분. 이제 길을 건너 저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뉴저지, 예일대학, 독일, 파리, 그리고 지금 뉴욕 시내의 한복판, 참 많은 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발을 옮겨 길을 건너자.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한가. 자전거에서 내려 서둘러 젠센터로 뛰어들어가는 학생이 보였다. 그런데 나는 뉴욕의 한 보도위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제 한 발만 디디면 진리로 향하는 문을 열 수가 있는데 왜 도대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일까. 등과 목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윽고 ‘지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안에서 차오르는 두려움과 용기없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야, 아니야,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거야, 난데없이 젠센터라니, 저런곳은 정신이 약간이상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야, 폴, 너는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거야.
내안에서 울려퍼지는 이런소리들이 내 다리를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길을 건너 저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국 발길을 돌려 지히철로 향했다. 집까지 가는 30분이 마치 3년 같았다.
밤 늦도록 잠을 못 이뤘다.
용기없는 겁쟁이, 바보라는 생각 때문에 완정히 기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갈구했건만 정작 마지막에 가서 주저앉아버리다니, 울고 싶었다.
그리고 두 달여가 지났다. 일상은 여느날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포켓볼을 치거나 파티에 가 열심히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내 안의 나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어 있었다. 절망과 외로움, 수치심, 모욕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다른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나 자신을 모르는데 어떻게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의문들이 나를 점점 더 깊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Sunday, January 22, 2012

만 행 관세움보살을 만나다.

만행 관세음보살을 만나다.

1989년 봄, 피리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미 하버드 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아놓은 새태였기 때문에 준비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학비를 벌어야 했다.
나는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예일 대학이라는 졸업장 때문에 좋은 직장에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법률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이상 부모님에게 더이상 손을 벌릴 수 없었고 대학원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하는 직장생활은 힘들었짐만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뉴욕 생활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의 근본적 방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밤이되면 허무감을 견딜 수 없어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당시 나는 불교를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접했다. 그 당시 불교는 내게 지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머릿속으로는 불교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겉으로 보여지는 내 삶은 그럴듯했다. 미국의 내로라 하는 할리우드 스탇들과 대기업 경영진이 주고객인 법률사뮤소에서 돈도 꽤나 많이 벌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미음속으로는 고민이 쌓여갔다. 견딜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몇 시간 동안이나 간절히 가도를 올렸다.
‘주여, 제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십시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길은 잠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내 마찬가지였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더이상 아무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간절히 기도를 올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쓸데없는 짓’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한 사실이 나를 더욱더 절망에 빠지게 했다..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매일 밤 나는 집에가서 일기를 썼다. 밤을 새워 대학노트에 몇 페이지씩 끄적거렸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내 맘대로 하지 못하겠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더이상 쓸모없는 일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
에머슨, 쇼펜하우어 모두, 신은 우리가 만든 것이며 우리 마음이 신을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신이 넚다면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데카르트는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길을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사람을 만나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모든 교육, 내가 했던 모든 경험들이 마야흐로 한 가지 생각에 모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누구……인가. 누구인가..’…
절망의 바다를 걷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아주 귀한 경험을 하게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그날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날이다.
ㅍ쳥소 사무실에서 친하게 지내던 변호시 돈이 나를 파티에 초대했다. 자기친구들이 나를보고 싶어한다며 일이 끝나면 함께 가자고 했다. 그와 나는 무척 친하게 지냈는데 아마 자기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많이 한 듯 했다. 우리는 그날 일을 마치고 파티가 열리는 카페로 가기전에 몇몇친구들과 먼저만나 포켓볼을 쳤다. 나는 포켇볼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게임이 끝나고 우리는 테이불로 옮겨 술을 마셨다. 내 주위 모든사람들은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넜다. 나 역시 겉으로는 즐거운 척했지만 마음속은 허전하고 외로웠고 절망적이었다. 옆에 읹아있던 돈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거야? 힘내.”
잠시후 으리는 파틱가 열리는 뉴욕시내의 나주 유명한 술집으로 옮겼다. 택시를 타고가ㅏ는 사이에도 내 맘은 너무 허전했다. 창밖으로 연인인 듯한 남녀가 팔짱을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지나가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처럼ㅁ 보였다. 아주 무서운 악몽을 꾸고있는 것 같았다. 사는것이 아무의미가 없었고 모든 것이 헛되었다.
보고 먹고즐길거리가 많은 뉴욕의 한복판에서 하버드, 프린스턴, 버클리 등 명문대학을 아온 동 많은 수재들과 함께 거의 매일 밤을 이렇게 놀고 마시지만 삶이란 그런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친구들의 삶이란 무엇인가. 사회와 그들의 가족들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그들은 사회의 최상층부 진입을 가다리는 대기자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은 무었인가. 오늘은 술집, 내일은 당구장, 카페, 디스코텍, 그들이 관심을 갖는것은 좋은배우자, 좋은차, 좋은집, 좋은직장…….온통 그런것들뿐이었다. 아무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는 수행자의 삶을 꿈꾼다고 하면서도 나를 꼬드기는 세상의 유혹에 쉽사리 넘어갔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결국 그런삶은 동물원에 갇힌 동물의 삶이 아닌가. 평생 쳇바퀴를 돌 듯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둥물원 우리란 무었인가? 내가만든 것 이닌가. 그래놓고 빠져나올 수 없더고?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갇힌 삶을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택시에서 내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걸으면서도 계속 아런생각을 했다.
‘이런 삶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게 뭐지? 모든사람들이 마치 꿈속에서 살고있는 것같이, 뉴욕시의 마천루 같은 꿈,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가. 꿈꾸는 사람은 결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 모든사람들은 각자가 자기들만의 꿈을갖고 그 세계에 갇혀있는 것 아니가. 어떤사람은 변호사의 꿈, 어떤사람은 은행원의 꿈, 어떤사람은 좋은 여자친구를 갖고 싶다는 꿈, 어떤사람은 훌륭한 아버지의 꿈, 그러면 내 꿈은? 종교를 갖지 않은 철학자가 되겠다는 꿈? 더이상 책은 필요없어. 뭔가 행동이 필요해.’
마침내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에 들어가자 이미 도착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반겼다. 자리를 잡고 앉자 아름다운 여자들이 다가와 달콤한 키스세례를 퍼부었다.
돈이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나는 친구들과 악수를 할 때마다 그들의 반응에 놀랐다. 상대방은 내 얼굴을 보고 흠칫놀라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에 내가 더 놀랐다. 내 깊은 마음속을 들키지나 않았나 부끄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나 역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날 밤, 내 마음은 검정 숯검댕이가 얹힌 듯 답답했다. 여러사람들이 나에게 말을걸어왔지만 마무것도 흥미롭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혼자가되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그때였다. 아차! 이리기장을 당구장에 놓고 온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일기장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순간순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을 나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지난 몇 달동안의 나의 모든것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ㅇ[ 얘기했던; 그곳으로 전화해서 내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하짐만 나는 서둘러 술집을 나와 당구장으로 향했다. 일기장도 일기장이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어서 빨리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뉴욕의 아름다운 밤거리를 걸으면서도 허무감에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믿었던 하느님은 그러면 환상이었나.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가. 이모든 고통을 나혼자 고스란히 헤쳐가야 하는가. 지독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는 이제 다음단계로 나아가야 함을 알았다. 그러나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버드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철학책을 파고드는 건 더이상 도움이 안 돼.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아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갑자기 일기장을 찾는즉시 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모든 생각이 적혀있는 일기장이란 나의 고통스런 삶을 대변하는 상징물아닌가…… .오히려 그것을 쓰고 읽을 때마다 고통이 더하는 것 아닌가. 일기장은 쓰레기에 불과해. 그래. 일기장을 찾는 즉시 버리자.
당구장은 브루크린 다리근처에 있었다. 브루클린 다리는 맨허튼에서 브루클린을 잇는 이스트 강에 서 있는 다리로서 뉴욕에서 아주 아름다운 다리다. 나는일기장을 이스트강에 던지기로 작정했다.
일기장을 버리면 마치 나의 고통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뒤를 이어 많은 생각들이 자나갔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나는 그때 환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읽고 있었는데 그가말한 영혼의 불멸설에 관해 심취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이생은 많은 인생시리즈 중 한 막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생은 단지 전생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생에서 내생의 환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강물에 몸을 던져 환생을 경험해 볼수도 있지않을까. 어쩌면 이 끝없는 심연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지도 몰라. 그래, 그들이 말하는 것을 내 행동으로 경험해보자.’
그런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옆에다가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야, 너 돈 좀 있냐?”
웬 뚱뚱한 흑인 거지가 계단에 낮아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주 누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엔 재수없이 걸렸다는 생각을하고 눈살을 찌푸렸는데 잠시후 느의 환한 미소와 눈동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맑았던 것이다. 그 뚱뚱한 흑인거지 주변에는 친구들인 듯한 홈리스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더러운 머리칼, 제멋대로 자란수염, 각종오물로 뒤덮여 있는듯한 악취, 그들은 큰 양주병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었다. 뚱뚱한 흑인은 그 한가은데 앉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에게서 풍겨나온 분위기가 아주 따뜻하고 여유로웠다.
“야, 돈 좀 있으면 내놓고 가지 그래?”
본능적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페다발이 쥐어졌다.
본래 파티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최소한 2백에서 3백 달러는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내 호주머니에는 3백달러라는 큰돈이 있었다.
아무생각없이 그것 모두를 그에게 건넸다.
그 순간 돈이란 나에게 한낱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잠시후면 브루크린다리에 가서 몸을 던질텐데 이 돈이 무슨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지페다발을 건네자 갑자기 그들이 달려와 내 손에서 돈을 낚아채고는 이내 함성을 지르고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뚱뚱한 흑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미소를 머금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터덜터덜 그 옆에 가 앉았다.
누군가 자기들이 먹고있던 양주병을 나에게 건넸다. 한 모금 들이키라는 권유였다. 양주병 주둥아리 주변은 재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너무더러웠다. 평소같으면 손도대지 않았을 텐데 그날 나는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속 나에게 미소만 보냈던 뚱뚱한 흑인이 내게 말을 건넸다.
“야, 아름이 뭐야?”
“ 폴. ” “무슨 일 있어? 왜 얼굴이 그 모양이야?”
“사는 게 재미없어.”
그러자 그는 “하 하 하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뒤 이렇게 물었다.
“오늘 며칠인지 알아?” “글쎄 3월 29일 , 30일?”
그러자 그는 크게 웃으며 두툼하고 큰 손바닥으로 내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아니야, 오늘은 네 생일이야.”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갑자기 어리둥절한 나는 아렇게 대꾸했다.
“내 생일은 11월 달이야.”
“아니야, 오늘이 바로 네 생일이라니까. 나중에 내가 한 얘기를 떠올리면 이해하게 될 거야.”
나는 한참동안 그의눈을 쳐다보았다. 검고 깊으면서도 따뜻한 눈.
“자, 그러면 내가 생일 축하노래 하나 불러주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잔하면서도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로 흑인 영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순수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얼굴은 마치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는 듯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벅차고 회망찬 것이 치밀어오르는 느낌아었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그와 함께 앉아있던 거지 친구들이 내가 준 돈으로 술과 안주거리를 사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에 앉아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셨다.
나는 잠시후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밤에는 어디서 자지?”
“지하철, 길거리 모두가 내 잠자리지.”
“뭐 갖고 싶은 것은 없어?”
“하하하, 이 바람 이 공기 모든 게 내것이야. 더 이상 뭐가 필요해, 하하하.”
그의 상쾌하고 환한 웃음이 너무 부러웠다. 내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일기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내 아파트로 다시돌아왔다.
다음날, 잠이 깨었을 때 마는 뭔가에 쫓기듯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참선센터 zen Center 의 전화번호를 찾기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 젠센터를 찾아 본격적으로 참선수행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둔기로 얻어맞은 충격같은 느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 흑인거지야말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내게 손을 내밀어준 관세음보살이었다.

Saturday, January 21, 2012

만행 고뇌의 밤들

萬行 고뇌의 밤들
친구들은 졸업을하고 대학원에 간다, 취직을 한다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공부를 더 할 생각이었다. 우선 쇼펜하우어를 더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나는 졸업식을 마친 후 내 가장 친한 친구 스티브와 함께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스위스 극경과 가까운 불랙 포리스트 프라이부르트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어학연수원에 등록해 독일어를 배웠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고 간직한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교육 도시인데 철학자 하이데거가 살면서 그의 가르침을 편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온갖 철학적 이슈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밤에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뭔가 손에서 빠져나간 듯한 허무감이 들었다. 비록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진지하게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건만 가슴에는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나는 다시 ‘불교를 만났다. 철학과 학생 엔츠라는 친구와 아주 친해졌는데, 그는 그 대학 불교동아리 회장이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독일의 명문학교다. 그런데 그 학교의 학생들은 불교에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기위해 일본이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일부는 일본, 태국, 스리랑카 등지의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엔츠는 그들의 리더격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엔츠의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엔츠의 방에는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앉아 명상에 잠긴 모슴이었는데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로 아주 큰 것이었다. 엔츠는 얘기를 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항상 그 사진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그자리를 ‘엔츠의 자리’ 라고 불렀다. 그의 자리에는 넓고 큰 방석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참선할 때 앉는 방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참선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엔츠는 불상 사진 앞에 항상 향을 피워 놓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데 한 때 스리랑카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티벳과 스리랑카의 승려들을 동아리 세미나에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그의 왼쪽 팔에는 인도에서 산 듯한 염주가 항상 끼워져 있었다.
엔츠의 아버지는 종교개혁을 주창했던 루터교의 목사이자 그 대학교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행동에 대해 한번도 꾸짖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주 사이가 좋아 나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엔츠를 통해 불교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속해잇는 불교동아리는 그 대학에서 머리가 좋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친구의 모임이었다. 다들 공부도 잘했고 삶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햇다. 마는 엔츠의 권유로 대학 구내서점에가서 참선에관한 독일책을 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은 카톨릭 신부님이 쓰신 책이었다.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핫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참선수행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카토릭 신부님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버금가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불교라는 게 무엇이길래 저들이 저렇게 심취해 있나. 신부님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추천하다니…….’
차츰차츰 진리에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갈수록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그 안개가 걷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년간 독일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갔다. 마침 대학 친구들 몇몇이 파리 아파트를 빌려놓았으니 놀러오라고 초청한 것이다. 나는 파리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며 1년여를 보냈다. 그곳에서 음악방송 dj에서부터 모델, 대학생,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재미있던 것은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참선과 요가에 심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파리생활이 값졌던 것은 그곳에서 철학자 에머슨을 만난 것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파트에 놀러갔다가 에머슨 수상집을 발견하곤 집어들었다.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은 미국의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운동의 주창자였다. 에머슨은 원래 보스텅의 유명한 교회 복사였다. 보스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귀 미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또 뛰어나 수필가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에머슨을 접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새롭게 보였다. 에머슨이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초청돼 축사를 하게 되었다. 그가 그날 한 연설은 나중에 ‘신학대학원 축사’ Divinity School Address라는 고유명사로까지 명명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신이 아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각자가 갖고 있는 본성, 진리, 지혜다. 인간들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즉 우리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만들어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지만, 그는 단지 인간이다. 나와 여러분들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것은 당시 교단에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에머슨은 그날 연설 이후로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출입이 금지되었을 정도엿다. 그러나 그 이후 에머슨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초월주의 운동을 이끄는 주창자가 되었다. 그는 1800년대에 미국과 유럽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미국 철학의 기초자라고 할 수있다. 결국 에머슨은 생애 말엽 하버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하버드 철학관 홀은 ‘에머슨 홀’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에머슨은 ‘진리란 우리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속에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바깥에있는 어떤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림자……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라는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초월주의의 기초다.
나는 출가한 오늘날까지도 쇼펜하우어와 에머슨을 탐독한다. 나중에 일있는데 에머슨이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도 쇼펜하우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무릎을 쳤다.
“진정한 사람, 진정한 철학, 진정한 제도, 진리는 바로 마음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파리에서 에머슨의 책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았다. 에머슨은 미국인의 목소리로 참다운 사상을 얘기한, 내가 만난 첫 미국인 이었다.
나는 학원, 지하철, 버스, 카페 등 어디가든 그의 책을 끼도 다녔다. 쇼펜하우워 이후 더 이상 높은 경지를 발견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디어 미국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을 찾은 것이다. 그건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느 더욱 나를 놀라게 한 에머슨이 유명한 에세이를 읽게 되었느데 다름아닌 〈초월주의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초월주의란 “다름아닌 자기자신을 발견해 믿는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모든 순간에 모든 경험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이닌가!
“예를 들면 불교신자들이 초월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읽는순간 너무 놀라 의지에서 나자빠질뻔 했다.
다시, 또다시, 이 불교라는 말과 마주쳤다. 도대체 이 불교라는게 뭐야? 아니 에머슨 조차도 불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다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수도사나 신부가 되겠다는 어릴 적부터 항상 갖고 있었던 열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 있을때 아주 유명한 여러 카톨릭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를 받아들여 달라고 불어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들은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 수련 시간표도 보내줬다. 그러나 정작 그들로부터 답장을 받았을 때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과연 수도사들의 수련에 참여한다 해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루종일 예배와 기도, 그게 전부이지 않을까?
그 동안에도 나는 계속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점점 그 복음의 의미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에게 진리를 찾아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 예수님에게 더 이상 지혜를 가져다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배나 기도같은 종교적인 활동도 잘 할 수 없게 되었다.그것들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내 속에서 찾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수많은 번뇌의 밤을 보낸 끝에 수도사행을 포기했다.

만공 월면 대종사

만공 월면 대종사 滿空 月面 大宗師
민공스님의 行狀
스님은 1871년 3월 7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읍 살일리에서 아버지 송신통宋神通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岩이요, 법명이 월면月面이며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13세에 충남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그 해 12월 8일 봉허泰虛스님을 은사 로, 경허鏡虛스님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 하였다.
온양 봉곡사에서『萬法歸一하니 一歸何處요』하는 화두로 밤잠을 자지않고 열심히 공부하시다가 1895년 7월 25일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니 마음 머리에는 오직 일원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던 의심을 조금도 흐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던 중에 새벽 쇳송을 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法界性을 깨달아 화장찰해華藏刹海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은 무엇에 비길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리기고심외 空山理氣古今外
자운청풍자거래 白雲淸風自去來 힌구름과 맑은 바람은 가고 오고
하사달마월천래 何事達磨越西天 무슨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 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뜨네

다시 스님이 26세 되시던 해에 경허 1849~1912 선사께서 스님의 토굴에 오시니 화상을 뵙고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화중생연 불속에서 연꽃이 핌이로다.』하시고 묻기를
『등나무로 만든 토시 하나와 아름다운 부채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하거늘
만공스님이 대답하기를
『등토시를 미선이라고 하여도 옳고 미선을 등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한즉
경허스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일찌기 다비문을 보았는가?』하거늘
만공이 어찌할 바를 몰라
『모르겠읍니다.』하였다.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유안석인제하루 有眼石人齊下淚 를 모르고 어찌 등토시를 미선이라 하고 미선을 등토시라 하는 것을 알겠느냐.』하며,다시 이르되
『萬法歸一이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다시 조주778~897스님의 무자화두無子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 그리고 원돈문을 짓지말고 경철문經截門을 지으라.』하고 화상이 떠난뒤에 스님은 무자화두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통도사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쉬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으니 百千三昧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하였다.
1904년 7월 15일 경허화상이 함경북도의 갑산으로가시면서 만공이 공부하고있던 천장사를 잠시들렀다.
그 때 만공의 나이 34세였다. 경허화상께 그동안 공부한 내용과 보림保任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화상께선 기꺼이 허락하며 전법계를 주셨다.
雲月溪山處處同인데
水産禪子大家風이라
慇懃分付無文印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이로다

그리고만공滿空이라는 호號를 주시고 다시 이르되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자네에게 이어가도록 부촉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하고 주장자를 떨치고 길을 떠났다.
그때부터 스님은 모든 산천을 여행하다가 서기 1905년에 덕숭산에 이르러 조그만 초당을 짓고 금서대金仙臺리 이름하고 수년동안 보림保任을 하던 중 제산諸山의 납자들이 구름 모이듯하여 높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니 이것이 곧 개당보설開堂普說아었다.
그 뒤로 스님의 문하에서 용상대덕龍象大德이 무수히 배출하였다.
그 뒤로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많은 사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에 가서 삼하三夏를 지낸 후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군 안안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고 말년에 한간 초옥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달을 희롱하다가 어느날 목욕단좌하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를 보며 허허 웃고 문득 입적入寂하니 서기 1946년 10월 20일 이었다.
다비茶毘를 모시던 날 백학白鶴이 배회하고 광명이 하늘에 뻗쳤다
다비를 마치고 영골을 모아 석탑에 봉안하니, 세수世壽는 75세요, 법랍法臘은 62세며 석존후 76대 釋尊後 七十六 代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번 내리치고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이 말하가를 법문을 들을 때에는 얇은 어름을 밟는 거와같이 하라.』하였으니, 아것은 청법請法을 할 때에 눈으로 다른 경계를 반연하지 말고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으라는 말이다.
법문을 혼침으로도 듣지 못하고, 산란으로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청법의 자세를 갖추어야 되는 것이니 일체 망상을 고요히 하고 청법하려는 마음이 성성星星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만 헛된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혼침에 빠진 마음이나 산란에 떠도는 마음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비록 백천만겁을 두고 청법 할지라도 조금도 이익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듣고 실행하면 일언일구가 다 좋은 법문이 될 것이나 듣는 분들이 듣고 실행하지 아니하면 비록 좋은 법문이라도 헛되게 돌아가고 말 것이니, 오직 원컨데 대중은 듣고 실행하여 주기 바란다. 세속 사람들도 말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함이 세 가지가 있는데 무후절손無後絶孫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우리 불법도 또한 그러하여 불자ㆍ법자의 몸으로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불법중에 큰 죄라 하겠다.
부처님의 혜명慧命이란 무엇인가?
세존이 설산에 들어 가시어 육년동안을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섣달 초여드렛날 새벽 밝은 별을 보시고 견성대오見性悟道를 하시었으니 그 때에 세존은 바로 부처의 혜명을 중득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중은 이 부처의 혜명을 받았다고 보는가?
이 혜명이야말로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않고 모난 것도 아니요 둥근 것도 아니요 짧은 것도 아니요 긴것도 아니요 나는 것도 아니요 시작함도 없고 마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비록 우주는 괴멸할지라도 여래의 혜명은 마침내 멸하지 않는 것이니,어떻게 하면 가히 이 혜명을 이을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 꿈도없고 깸도 없는 경계를 아는자가 있는가?
세계와 내가 모두 적멸하여야 남과 나라고 하는 사상이 끊어지리니, 마땅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의 주인공이 어떤 곳에 있어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가?
이 경계를 깨달은 자라야 곧 이것이 부처님의 맏 아들인 적자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인공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을 깨닫지 못한 자이며 부처님의 혜명을 이은 자가 아니다.
이와같이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못하고 부처의 혜명을 잇지못하면 머리를 깍는 것 뿐만 아니라 눈섭까지 깍는다 하여도 불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의 혜명을 잇지 못한 자라면 천상천하에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인이라 할 것이니 마땅히 불자라면 항상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혹은 이러한 생각은 세속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삼계의 대돗사大道師이시므로 사생육취四生六趣가 다 부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즉 비록 세속의 사람일지라도 자기 주인공의 안신입명처를 깨달은 자라야 가히 사람가운데 사람이라 하겠다.
만약 구렇지 않다면 사람가운데 있어도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혜명을 얻은자는 참으로 사람이요, 혜명을 얻지 못한자는 사람이아니라 육취에 윤희하는 일분자의 사람이라 하겠으니 어느 때에는 말과 소가 되고 오느 때에는 비금주수飛禽走獸가 되어 육취 가운데 왕복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도의 윤희를 명하고자 하려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에 자기의 주인공이 어느곳에 안신입명하는가를 깨달은 자라야 바로 참된 사람이니 비로서 육도 윤희를 면하는 참 사람이라 하겟다.
우리 불법의 선문가운데 벽을 바라보고 마음을 관하는 것도 또한 다른일이 아니라 안신입명처를 깨달아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이 참된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다만 출가한 승려만 하는 일이요 세속사람에게는 할 일이 아니라면 불법이 어찌 바른 정법이라 하겠는가?
백 천 만겁에 다시 동물이 되지않고 사람이 된다면 妄이 곧 진이요, 진이 곧 망이며, 俗이 眞이요 진이 곧 속이라 진과 속이 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이 불법을 보는 소견으로는 의복을 입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보면 승속이 다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세상에 불법이 있어 세상사람을 번거롭게 하느냐.」고 말하는 이가 있잇으나, 그것은 실로 그렇지 않다.
불교는 세상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생육취가 다 각성覺性을 가지고 있으니 각이 아닌자는 없는 것이다.
이 覺이란 깨달음 곧 불교이니 불법은 본래 이와같건만 천만가지의 근성이 있는 까닭으로 불법도 또한 첨만가지의 방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근기로서 논한다면 곧 이것이 다 부처인지라 깨치면 성인이요 부처이나, 미하면 곧 범부요 중생인 것이다.
그러나 깨닫는 것이란 또 어렵기도 하고 또한 쉽기도 하다. 어렵다는 것은 석가세존과 같은 성인도 설산에 들어가시어 육년이나 고행을 하시고 깨달았으니 범부의 업신業身으로는 수행의분이 없이 어찌 쉽게 깨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쉽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쉬워서 터럭 한 오리 만큼도 간격이 없는 자기의 마음을 깨달음이라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행하고 주하고 앉고 눕고 하는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체가 다 마음의 작용이다.
또 세상에는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얼마 아니가면 반드시 불교가 멸망하는 때가 있으리라.」고 하나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말이다.
불교는 멸망 시킬 수도 없고 번창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불교를 멸망시킨다면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멸망시키는 것과 같으니 혹 세상 사람으로서 자기의 마음을 멸망 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이 곧 불법이요 자기의 몸이 이미 불자이거늘 어찌 감히 불교를 멸망시킨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 말이라 하겠다.
또 나 뿐 아니라 성현께서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마음이 곧 부처니라.」하시었으니, 이것을 어찌 헛된 말이라 하겠는가.
불법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곧 무처인 것이니 自心의 부처는 멸망시킬 수 없는 것이다.
만약 法要의 의식과 형상으로 불법을 삼는다면 혹 멸망시킬 수가 있을지 모르나 곧 마음이 이 부처인 이상에는 멸망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이름이 높은 스님들이 없어서 불법을 비방 할지라도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요, 혹 사원을 헐고 불산을 철거하다 할 지라도 이것은 자기를 속이는 행위라 하겠다.
왜냐하면 비록 불상을 없앤다 할지라도 사람의 佛心은 오히려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법은 천 겁을 지날지라도 옛건이 아니고 만세를 뻗어도 새롭지 아니하여 항상 이제와 같으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대지의 많은 중생이 다 이 가운데 윤희한다.
불법은 본래 이와같으며 이렇게 알고 지극한 마음으로 믿으면 마침내 自他의 속임을 받지않고 장래에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불법은 입을 열기전에 그릇침이라, 입을 열면 곧 어긋나고 생각만 동하여도 곧 어김이라 하였으니 힁설수설로 종일 설할지라도 이 근본 無言의 불교에 대해서는 다 마군의 業인 것이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 이르되 名相도 마업魔業이요 문자도 마법이며 부처님의 말씀에 이를지라도 역시 마업이라 하시었다. 왜냐하면 우리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사십구년간을 설법하였지만 한 글자도 한 말도 설한 일이 없느니라.」하시었다.
그러므로 열반경 40권이 다 마설魔說인 것이다.
그러면『어떤 곳을 향하여 마업이라 이를 것인가?』
이 도리를 중득한다면 석가여래께서 다시오신 것이라 하겠다.

妄無妄妄是眞이오 眞有眞眞是妄이로다
如是眞忘外에 達磨渡西來로다.
망령된 것이 망이 아니면 망이 곧 진리이요
진실이 진에 있다면 진이 곧 망이로다.
이와같은 眞, 妄 밖에
달마가 서쪽에서 오셨도다. 2 계속.

Thursday, January 19, 2012

차 한 모금에 인생을 담는다.

차 한 모금에 인생을 담는다.
오묘한 茶道 매력에 빠졌다. 감승희씨
찻 잎 하나에 근심을 우려낸다
뽀얀 연두 빛 물에 진심이 어린다
심심한 끝맛이 나를 적신다.

#.꼿꼿한 자세로 차를 권한다 감승희(78)씨의 말투는 군더더기가 없다. “혹시 왼손잡이는 아니시죠?” 하며 왼손으로 차 주전자를 쥔 나에게 묻는다. 딱 선생님이다. 괜히 조마조마하다.
“차 주전자는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뚜껑을 살짝 잡아줍니다. 차는 세 번에 나눠 마시는데 색과 향기, 그리고 깊은 맛을 음미하죠. 아무 소리없이, 고요하게.”
그가 마시는 차는 따뜻한 연두빛이었다. 어린 새싹처럼 여리여리한색, 차를 만난 그에 인생에 대해 묻자. 그는 단숨에 잘 모르겠다는 말을 내밷는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내가 성공한 인생을 살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확실히 좋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차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요.”
감씨는 다도계의 이름난 명사다. 한국 차생활 문화원장이라는 직함도 달았고 ‘한국차생활총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지금은 다 내려놓고 몇몇 제자들을 교육하는데 온 힘을 쏟고있다. 차에 관해선 알만큼 안다.
“참 질긴 인연이에요. 서른 넘어 첫 눈에 반해 평생을 바쳤죠. 차는 씁쓸하기도 하고, 달기도 해요. 젊을 때는 불투명해 보이더니 지금은 내 유일한 안식처거 됐어요.” 차 한잔에 무슨 의미가 그리 심오할까. 딱딱 끊어지는 말투와 아끼는 말소리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 그가 차를처음 알게된 건 서른이 훌쩍 넘었을 때다. 종갓집 손녀딸로 태어났지만 일찍이 차를 접한적은 없었다. 어른들이 시킨대로 착실히 살았다. 교대에 가서 교사가 됐고, 중매결혼도 했다. 가끔 무료하다고 느낄 정도로 일상은 평범했다. 그 즈음에 차를 만났다.
“ 통영 용화사 절간 마루 한켠에 한 스님이 차 사발을 들고 앉아 계셨어요 뭐, 특별한 모습도 아니데 당시엔 충격적이었어요. 너무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스님은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감씨를 불러 함께 차를 마셨다. 직접우른 야생차에서 신비한 맛이 났다.
수만 가지 차를 마셔본 지금도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다. 차 한 사발에 마음을 송두리채 뺏겼다.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남았지만 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차에 대한 열정은 숨기기로 했다. 어머니로서의 해야할 일이 산덤미였다. 그째부터 10년도 넘게 기다렸다. 기다림은 뜨겁게 차올랐다. “지인이 운영했단 인사동 화랑에 차도구 전시장을 차렸어요. 2층에서 차인회茶 모임도 자주 열었죠.

서른넘어 첫 눈에 반한 ‘차’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

한 때 찻잎 하나 찾아 전국헤매
자다가도 다기 놓는 방법 생각

‘한국차생활총서’ 집필도
현재 제자 교육위해 매진

그땐 전국에 차 동호회가 하나밖에 없어요. 아는 것은 없는데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컸어요. 스업을 진행하려면 교재가 있어야 하는데, 책도 없고요. 매일 박물관에 가서 차 사발 그림 그려오고, 도자기 만드는 장인들과 입씨름 하기를 수 백번했죠(웃음). 책 없으면 쓴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에 박혀 살았죠. 그땐 무슨 힘이 있어서 그랬나 몰라.”
찻잎 하나도 시골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해왔다. 자다가도 다기 놓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누렇게 빛바랜 노트에는 태극무늬로 놓여진디가도 있고, 세로 반듯하게 차려진 것도 있다. 무의미한 낙서처럼 보이는 동그라미와 세모에도 다 뜻이 있다. 1979년, 감씨의 차 인생은 날개를 달았다.
#, 같은 차를 우리기를 두어 번, 감씨의 입은 차 백과사전이다. 밉만 열면 한국다도와 역사가 구구절절 흐른다. 부끄럽게도 지금껏 차례의 뜻을 몰랐다. 차례는 茶를 올리는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다.
“한참 차에 미쳤을 땐, 책을 봐도 ‘차’라는 한 글자만 보였어요. 시간도 많고, 아프지도 않고, 고서를 뒤지다가 차에대한 구절하나라도 있으면 전문가를 쫓아 가는거죠. 고려시대 연등의식때 사람들은 어떤옷을 입었을까. 차를 뜨겁게 마셨을까, 앉아서 마셨을까…….이런 것 들을 생각하면 시간가는 줄을 몰랐어요.”
감씨는 여러번 궁중행사를 재연해왔다. 차에 대한 것은 음악과 복식, 미술과 춤으로 이어졌다. 기왕하는 것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 온 힘을 다썼다. 차생활문화원의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차츰 힘들게 다가왔다.
“전 실리보다 명분을 내세운 사람이었죠. 돈은 못 벌었어도 차가 알려졌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바보였던 걸까요?”
그는 차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깐
깐하다. 차를 철학적 존재로 본다면 누구보다 더 순수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믿는 그다. “차는 오염되기 쉬워요. 화장품 옆에두면 화장품 냄새가 듬뿍 배죠. 사람의 향기도 차와 같다고 생각해요. 한결같을 것 같으면서도 너무 쉽게 변하죠. 다도는 차 한잔에 자신의 마음을 걸러내는 잗업입니다. “차 한잔에 마음이 씻겨 내린다.
#, 한참 듣고 있으니 딱딱했던 말투가 다정스럽게 느껴진다. ‘젊으니까 좋겠다 하며 한껏 부러워한다.
문득 그의 젊은 날이 궁금해진다. “대학다닐 때 한참 6ㆍ25 전쟁중이라 부산에서 공부했어요. 이대, 숙대 할 것없이 산에 천막을치고 학생들을 가르쳤지. 밥 굶고 다니는 건 당연했고요. 그런데 그 전쟁통에도 낭만이 있더라고. 얼마전 앨범속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그 천막촌 문밭에서 해맑게 눈싸움을 하고있지 뭐야. 추억은 참 오래가요. 젊음은 너무 짧고 “차와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하바드대학 교수가 됐을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시 차를 우린다. 이번앤 시간이 좀 길다.
“차를 하면서 배운 것은 기다림이죠. 기다림의 연속이에요. 찻잎을 고를 때부터 우려서 마실 때 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손님에게 먼저 권한 후에야 찻잔을 잡을 수 있고요. 가디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의미죠.진실을 우리고 마음을 받아요.”
철학없이 사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막연하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번뇌 속에 누구나 목이 마르다. 하지만 그 어떤 철학이, 그어떤 번뇌가 진심을 무시할 수 있을까. 진심은 어디서나 통한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구혜영 기자 LIFE 열정인생

Tuesday, January 17, 2012

경봉 정석 대종사

경봉 정석 대종사 鏡峰 靖錫 大宗師
경봉스님의 행장
경봉스님은 1892년 4월 9일 경남 밀양군 부내면 서부리에서 출생하였고 1908년 불찰대본산 통도사에서 성혜性慧스님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스님은 내원사,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통도사, 극락전 선원 등에서 평생을 禪과 더불어 살아오셨으며, 법명은 정석靖錫, 법호는 경봉鏡峰이다.
스님은 75세 때 1966년 윤달에 뜻있는 몇몇 신도들이 경봉 자신의 수의壽衣를 짓는 것을 보시고 깊은 사색에 잠기시다 말씀하시기를
『여러분들이 니의 수의壽衣를 만드는 것을 보니 마음도 이상하고 섭섭한 생각이 든다. 본래는 거래생멸去來生滅이 없지만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가 싶으니 정말 무상無常의 감이 더욱 느껴진다.
금년 병오년에서 무진년까지 39년 간인데 그동안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사람에게서 받은 부고訃告가 무려 6백 40여통이나 된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다 갔는지, 한번 가더니 소식이 없구나.』
75세의 노경老境에 이른 스님의 얼굴 모습에 자비와 와로움이 깃들어 있더니 이렇게 계송을 읊으셨다.
『옛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섰고 녹수는 흘러가니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볼지어다.』
스님은 1982년 91세로 입적하시니 선사의 훤출하고 자상한 모슴을 이제는 대할 길이 없다..
대중에게 법을 보이다
밝은달이 비칠 때 맑은 바람이 불어오고 맑은 바람이 불어올 때 밝은 달이 비친다. 참으로 이러한 때가 좋은 사절이다.
도대체 인생의 진리란 무엇인가? 세삼사람들이 무엇이거니 무엇이거니 하고 부르짓는 진리가 있지만 인생의 生死大事가 참으로 큰 것이다. 나고 죽는 일에 초월하려고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을 고행하셨다. 실은 처음 6년간은 신선도神仙道를 닦다가 그릇된 줄 알고 다시 6년 고행하셨으니 12년을 수행하신 것이다.
참으로 중생들은 인생의 사는 목적도 모르고 인생의 삶의 참된 가치관과 참맛도 모르고 살다가 부지불각不知不覺에 죽고 마는 것이다. 이 몸은 살아 있을 때에나 가치가 칬지 들어갔던 숨이 나오지 않으면 곧 내생이요, 죽으면 공동묘지나 사설묘지에 묻혀서 흙 한줌되고 화장하면 재 한줌되고 마니 이렇게 무상한 것이 인생이다.
중생들은 참으로 생사바다에서 나고 죽는 것이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은 나고 죽는데 물들지 않고 나고 죽는데 초월하며 나고 죽는데 해탈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한다.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이제 부처도 이렇게 가니 중생들은 다만 가고 오는 것이 본래없는 다만 이름 뿐인줄 알아서 빛과 소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空한 것이 곧 빛이요 빛이 곧 공한 것이니 공한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뿌리와 빛 소리 향기 맛 촉감 법 등 여섯 티끌과 여섯가지 뿌리에 대한 여섯가지 알음알이로 분별하는 것을 합하면 십팔계가 되는데 이것과 사대오음이 곧 공한 것이다.
우리 인생이 태어나기 전에 잘못되고 죽은 후에도 잘못되니 태어날 때마다 그릇되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이 땅에 떨어질 임종시에 무생無生의 이치, 즉 본래 태어남이 없는 이치를 알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알면 잘못되고 잘못되는 것이 마침내 그릇치는 것이 이니다.
이러한 도리에 이르러서는 일천 부처도 이 산눈活眼속에는 티끌이되고 이르는 곳마다 보리菩提의 대도량大道場이요 천 백억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도 이러한 도리에는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즉 관하는 것이 자재한 보살이요 또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니 지위가 없는 참된 사람이요 또 자기의 주인공이라 한다.
그러므로 장부가 스스로 충천衝天하는 힘이 있어 부처가 행하는 곳도 가지않으니 이것이 곧 일을 마친 범부요 격에 뛰어난 대장부로다. 이도리를 모든 사람들이여 아는가?
말을 하고저 하나 말이 미치지 못한다. 대중은 동쪽산 하수河水 북쪽에 잘 사량思量해 볼지어다 상위에 팥죽이 반은 푸르고 반은 붉다. 허허…….미소할 뿐……
나의 말 가운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선지식天下善知識의 모든 법문이 여기 다 들어있고 석가부처님의 사십구년간 법문하신 팔만대장경이 여기 다 들어있다.
喝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 오시다.

結制示衆
잠시 계시다가 대중을 둘러보고 눈을 크게 뜨신다음 말씀하시기를,
지극한 도리는 말로서 할 수 없으니 어찌가히 전하며, 가히 전할 수 있다면 무엇을 전할까.
이러한 도리가 비록 물物에 응하여 주나 무물無物이요, 무물이라는 말도 자몰自沒이다. 그러나 소리가 끊어진 말이 도리어 널리 묭응妙應하고, 도가 어둡고 밝음이 아니나 말과 묵묵한데 한가지로 취한다. 이 일을 누가 들어서 말하며, 물물物物이 비고 넓어서 대천세계大千世界에 함께 통하니 티끌같이 많은 품류品類가 하나가 아니요, 설사 동일하다 할자라도 모든것이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원음이 맑고 맑아 범부와 성현이 함께 통하며 천만가지가 지혜의 종자를 훈습하므로 이 一門이 곧 무량한 의지義旨이다.
그러므호 산과 물이 말없는 법을 설하고 초목이 늘 설법함이 끊어짐이 없으니 깊고 깊으며 다시깊다. 그러나 이것도 곧 말과 글이니 비유하자면 뱀을 그리는데 발을 붙이는 격이다.
아, 종두 鐘頭야! 오늘이 선원禪院에 겨울안가冬安居 결제結制하는 날이라 하지? 오늘모인 사부대중四部大衆이여! 탁자위에 밥과 떡 과실과 나물이 많이 놓여 있으니 먹기를 다하고 귀당歸堂하라.
무영안비동윤월 無影雁飛冬潤月
그림자 없는 기러기 찬 시내 달빛에 날고,
석사동주두이서 石獅東走斗移西
돌사자 동으로 달아나고 북두성은 서쪽으로 옮겨가네.

결제시중結制示衆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시고 말씀하시기를,
부처와 조사도 입을 벽위에 걸었으니 이 도리를 아느냐 ?
이 도리를 얻었다 해도 옳지않고 얻지 못했다 해도 옳지않으니 이 도리를 말해 보아라. 법상레 오르기 전과 오른 뒤에 이와같이 설하고 이와같이 설했으니 「이와같다」고 하는 이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일은 그만 두고 지극한 이치를 봄見에 광명을 드리우고 진리를 들음에 메아리가 응함이라. 보고 듣는 법이 진상塵想을 이루면 大千世界에 빛이 흐르고 메아리가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세계에 전하여, 나타남을 대함에 그림자를 전부들어 내어, 있고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소리가 이 소리가 아니요 빛이 이 빛이 아니다. 이것은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나, 산이 높음에 물이 급히 흐르고 봄이오면 꽃이곱게 핀다.
눈으로서 가히 볼 수 없고 귀로서 가히 들을 수 없다. 보는 것도 아니요, 듣는것도 아니나, 분명히 보고 들으니 빛을보고 소리를 들음이 육근과 육진에 벗어난다. 이 법이 보고 듣는데 구애拘碍받는 것이 아니니 남에게 잘못 전하지 말라.
어제는 영축산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산빛을 보았는데,
오늘은 千聖山에서 법상에 오르니,
어제가 옳은가, 오늘이 옳은가? 애닲도다.
여기서 양산길이 삼십리로다.
좌단천차고로두 坐斷千差古路頭 앉아서 온갖 차별을 옛 길위에 끊으면,
해개공안제인주 解開空岸濟人舟 저 언덕 건너는 뱃길을 열어 줄 것이네.
명명일구해군상 明明一句該群像 밝고 밝은 한 글귀가 망상을 꾸려,
선창비성작마구 善唱非聲作麽求 소리 아님을 연설하니 다시 무엇을 구할 것인가.

반산림半山林
동짓달 그믐날 구순안거 절반되는 날 결제와 해제 중간인, 반산림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종사宗師의 설법은 말이 많지 않으니, 법문은 종사가 법상에 오르기전에 있고, 종사의 운과 대중의 눈이 서로 한 번 마주치는데 있는것을, 뱀을 그려놓고 발을 붙이는 것처럼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번 친 것이다.
그런데 간혹 넙자衲子들이 이 도리를 분명히 알지도 못하면서 언어와 문자만 익혀서 어떤것이 禪이고 道이며, 또 무엇이 삼요三要이며 삼구三句라 하기도 하고, 혹은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나무라기도 하는데, 이낱도리這箇道理에는 부딪칠 수가 없는 것이 오늘은 선가에 반삼림인데, 차담과 진수를 잘 차려 먹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한마디 법문을 하겠다.

반반수여백 생시대조홍 飯飯水與白 生枾大棗紅
밥과 떡이 물과함께 희고, 감과 대추는 붉도다.
상두진차색 황흑겸차청 床頭珍差色 黃黑兼次靑
상위에 차린 진수의 빛갈은 누르고 검고 또한 푸르기도 한데
형형물물체 각구육미주 形形物物體 各俱六味住
모든 물물의 당체엔 각기 여섯가지 아름다운 맛 감추었다.
진수일구이 귀처역무흔 盡收一口裏 歸處亦無痕
모두 한 입에 넣으니, 돌아간 곳 또한 흔적이 없네.

풍한빙사옥 설강매토향 風寒氷似玉 雪降梅吐香
바람은 차게불고 어름은 옥같네 눈속의 매화는 향기를 토한다.
진세수행자 호권차경광 塵世修行者 好眷此景光
어지러운 세상 수행자들이여, 이 풍경의 빛을 잘 볼지어다.

결제시중
법상에 오르시어 묵묵히 계신다음 주장잘를 들어 법상을 치시고 말씀하시기를,
산하대지山河大地를 천하노화상天下老和尙이 백번이나 부순다면 어떤것이 이 모든 사람들의 비공鼻空인고?.
일러도 얻지 못하고 일르지 않더라도 또한 얻지 못한다. 이낱這箇는 가희 형용키 어려우며 가희 설명키 어려우니, 마음이라고 하여도 마음이 아니고 부처라고 하여도 무처가 아니며, 물건이라고 하여도 물건이 아니다.
그러면 저개這箇가 무엇인가? 석가노자釋迦老子도 꿈을 설했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꿈을 설했고, 천하 노화상들도 꿈을 설했으니, 또한 묻노라. 대중은 일찌기 꿈을 지었느냐, 마느냐? 만약 꿈을 지었으면 야반을 향해서 一句일러 보아라. 잠시 계시다가 말씀하시기를
인간별유진소식 人間別有眞消息 인간에 별로히 참소식이 있으니
호향치시설몽춘 好向此時設夢春 좋게 이 때의 꿈 설하는 것을 볼지어다.
설법을 하려고하니 할 말이없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진리는 마음 행할 곳이 없고 말 길이 끊어져서 일체 이름과 형상이 없다. 이러한 현현玄玄하고도 묘묘妙妙한 이치를 입으로 아무리 말을 많이 하더라도 말뿐이요, 글로서 태산같이 수 없이 쓰더라도 다만 글 뿐인 것이다.
비유하면 우리가 매일 밥을 먹지만 밥의 참 맛을 말로서 형용하기 어렵고, 장미꽃 향기를 맡고 그 냄새를 글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부처님게서도 사십구년동안 설법하시고 최후에는 다자탑多子塔앞에서 가섭존자와 자리를 나누어 앉아 있었을 뿐이요, 또 영상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존자는 미소하였을 뿐이다. 또한 열반하실 때에는 니연하泥蓮河에서 곽槨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을 뿐이다.
그리고 유마거사維摩居士도 32명의 대보살과 더불어 말로서 문답도 하고 설법도 하다가 구경究竟의 불이법을 설하게 될 때에는 묵언하였을 뿐이다.
이 법은 입을열면 그릇치고, 열지않으면 잃어버리고, 열지도 닫지도 않는다면 10만 8천리나 어긋난다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이 법은 한 생각 일어나가 전에있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쳐보는데 있고, 삼라만상에 다 법이 있으며, 중생의 일상생활에 다 법문이 있다. 우리가 가고 오는데 도가있고, 물건을 잡고 놓는 것이 곧 禪이다.
또 이렇게만 집착하여 알아도 않된다. 설사 현현한 것을 말하고 묘묘한 것을 말하더라도 똥물과 오줌뿌리는 것과 같고, 방망이로 치고 큰소리로 할喝을 할지라도 소금을 가지고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금도 불에 넣어서 단련하고 단련하여 불순물이 다 제거되어야 순금이 되어 세계에 통용하는 보배가 되듯이 사람의 마음도 닦고 수련하여야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의 삼독심이 없어진다.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 菩提로 化하여야 그 마음이 밝고 밝아 불매不昧하고 요요了了하여 마치 밝은 거울이 허공에 달린 것과 같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모든사람이 알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알면 저 법에 자재하고 사리에 통달하는 출격出格대장부가 될 것이다.
行人路上에 望石頭로다.
망석두 망석두여!
宮商의 맑은 노래를
이 세상에 몇이나 알고 듣는고?

불국사 석가탑 사리봉안 법어
법좌에올라 대중을 한번 둘러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설법은 말과 글을 의지해서 하는것도 있고, 말과 문자를 떠나서 하는 것이 있는데 참으로 적실한 설법은 종사가 안장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두 걸음 걸어나와, 여러분들 앞에서 눈으로 여러분들을 한 번 둘러보고, 여러분들은 종사의 얼굴을 한 번 보는데 다 글어있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데 도가 있는 것이다.
말과 글로서 법문을 듣는것을 다문이라하고, 말과글을 떠나서 여래의 비밀장을 아는 것을 구족다문俱足多聞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비밀은 남이 모르게 몰래 숨기는 것이짐만은 부처님의 비밀장은 화반탁출和盤托出로 여러사람 앞에 들어내 보여도 모른다.
종사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좋은 소식이 있고, 종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고? 하는 여러분의 그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 자리가 곧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곳이요, 모든 부처님이 열반에 드는 곳이다.
손바닥을 들어 보이시고, 손가락을 꼽으시며 왼손도 손가락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른손도 손가락이 하나 둘 셋넷 다섯 「5X5=25는 원래로 10이다.」여기에 능히 의심없을 사람이 누구냐? 이밖에 현현玄玄하고 오묘한 것을 구한다면, 第二頭 第三頭에 떨어진다.
오늘은 석가탑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날인데, 부처님은 모시지 않았다. 오늘 이 종사는 여러분들에게 각자 자기를 찾아 자성불自性佛을 발견하여 봉불식奉佛式을 해야하고 사람마다 사리舍利가 있으니, 이것을 봉안하라고 권한다.
석가탑에는 부처님의 사리만 봉안했지만 여러분에게는 산 부처가 들어있어 오고가는데 아주 편리하고 자유자재 한 것이다.』
주먹으로 허리를 치시며 喝하시고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Sunday, January 15, 2012

가슴이 찡 하네요 정말로 !!!

콧등이 짠해진다.
김평식 여행칼럼 ‘미국은 넓다. 캐년 데 첼리 준 국립공원

그들의 애환을 생각하면 푸른반점 하나로 인한 동족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얼굴형태나 두상 피부색갈, 체형, 그리고 음식 선호 등 모든 면을 보아도 형제같은 애잔한 마음이 들게 됨은 아마 초록은 동색이기 때문이리라.
한때는 필자가 인디언 문화에 심취돼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원근을 불문하고 거의 다 헤집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미국의 원주민이라면 누가 뭐래도 이들이 바로 주인인데 캐년 데첼리Canyon De Chelly 준국립공원 National monument 도 바로 인디언들의 자치구역이다.
영화 ‘늑대와 함께 춤ㅇ을’ 에도 과거 그들의 참혹상이 역력히 조명돼있지만 1863년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평화롭게 살던 나바호족들을 원줌민 토벌정책에 따라 아무이유도 없이 대학살을 감행했는데 바로 이곳이 나바호인디언들의 마지막 항전을 피바다로 만든 혈전의 계곡이다.
오죽하면 방문자센터 표시판이있는 목조의 색갈조차 피를 상징하는 볽은 색갈로 도색을 해놓아 보는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종교의 학대를 벗어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순박한 원주민들을 나치나 히틀러가 학살한 숫자보다 더 많은 수천만명의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하여 불문곡직하고 얼굴가죽을 벗겨가며 미구잡이로 두륙을 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백인들의 조상을 청교도들이라고 하면 동양인들의 조상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이니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의식과 긍지를 갖고 살아야겠다.
이들의 후예들이 임진왜란보다 더 혹독했던 과거를 보상받기 위해 잘한다는 수십명의 변호사들이 연방정부를 상대로 투쟁한 결과 그나마 모뉴먼트 벨리나나 캐년 데 첼리, 호피Hopi, 아파치 Apache 등 수없는 곳에 자치구역을 얻어내게됐다.
한국사람들의 성씨 만큼이나 이들도 수많은 종족들이 있지만 같은 종족은 그들끼리 한 구역에서만 살아야지 나바호 인디언이 아파치 인디언 구역에 들어가서 사는 것은 절대로 금지돼 있다.
그리고 일단 살던 터전을 벗어나서 도시로 나오게 되면 모든 수혜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이들의 바참하고 궁핍한 생활은 계속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다는 미국안에 살면서 교육이나 문화생활의 차별을 이토록 혹독히 받으며 마치 이방인들 같이 사는 이들이 참으로 보기에도 안타깝다. 그래서 이들의 얼굴에는 항상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웃음은 없다.

가는길은 애리조나주의 40번 프리웨이 출구 333번에서 내리면 191번 북쪽으로 80마일 정도 올라가면 191번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있는 친레 Chinle로 들어가면 해발 5500피트 높이에 방문자 센터가 나온다.
안내 전화 926 673-5500 등산여행 전문가 김평식 213 736-9090

5 죽은후에 어떻게 새로운 몸을 받는가.

5 죽은 후에 어떻게 새로운 몸을 받는가.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이 육신을 버리고 내생에 몸을 받고자 할 때에 그 형영이 어떠합니까?』
용성이 대답하되,
『사람이 죽을 때에 지ㆍ수ㆍ화ㆍ풍 사대로 조직된 이 육체가 움직여 운전하는 바람 기운과 따뜻한 불기운은 위로떠서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차디찬 몸둥이만 남아 있어서 썩음에, 물이되고 흙이 되는 것이다. 그 때는 신기로운 신식만 남아있는 것이다.
이 신식神識은 비록 형체가 없으니 정묘색근淨妙色根이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범부가 대단히 알기 어렵다. 모든 귀신이 다 정묘색근을 의지하여 보고듣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그대가 필시 꿈을 꾸어 보았을 것이다. 夢중에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듣고, 코ㆍ혀ㆍ몸으로 냄새ㆍ맛ㆍ촉감을 감각하고, 뜻으로 법을 아는것과 언어동작言語動作등 일체가 생시와 어떠하던가?』객이 대답하되
『생시와 다를 것이 없읍니다.』
용성이 말하되,
『그것이 정묘색근을 가자하여 보고, 듣고, 언어동작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精妙色根)보기를 현재에 우리가 사람을 보는것과 같이한다. 이 신식의 자체가 바람과 같아서 문명히 있으되 형체는 없는 것이니 산하석벽山河石壁이 걸림이 없어서 순식간에 천리만리를 가는것이다. 새로 몸을 받기전에는 이 신식이 법계체에 머물러 오직 생각하는 힘만있다. 이 신식이 인연을 따라 몸을 받아 태어나는(受生) 것이니, 이는 십만리라도 몸을 받아 태어날 인연이 있으면 순식간에 당도하는 것이다.
무릇 아는 것을 식識이라 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종자種子가 있음으로 인하여 능히 싹이나는것과 같아서 식이 있음으로해서 육체를 나게 하는 것이다. 지혜로부터 식이나기 때문에 이름을 생각이라한다.
신식神識자체가 뚜렷이 서 있음에 자타의 구별이 있게 된 것이다. 또 고苦와 낙樂과 선善과 악惡과 모든 경계를 아는 까닭으로 식이라고 한다. 종자로 부터 움이나고 싹이 나서 큰 나무가 되는 것과같이, 식 으로부터 사람의 몸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신식이 이 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마치 사람이 거울 가운데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신식神識과 부모의 인연이 합한것은 거울에 비유하고, 신식이 다른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강물에가서 다시 얼굴을 나다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온갖변화가 있는 까닭에 만물이 발생하되 세상 사람들은 식으로 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도에는 지적초知跡草라는 풀이있다. 꽃이피면 크고 아름다우며, 맛이 최상가는 것인데 사람의 발자취 소리를 능히 알아듣는 것이다. 사람이 그 꽃을 꺽으러 가면, 그 꽃이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고 곧 오므라지는 것이니 식이 포함된 것이 아닌가?
또 나무가 있으되, 혹 새나 거미가 그 나무잎에 앉으면 곧 나무잎이 급히 오므라져서 그 물건을 흡수하여 먹으니, 비록 무정한 물건일지라도 아뢰야식이 포함되어 있거늘 사람이야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대저 신식은 분명히 있으나 알수없는 것이, 마치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여 자기 배 가운데 있는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전연할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이가 뱃속에서 꿈실꿈실 노는 것은 알 수 있다. 신식은 더럽고 깨끗한 것이없다. 비유하면 태양광명이 우주에 찬란하여 송장이나 더러운 똥에 비추어도 태양광명은 더럽지 않고, 깨끗한 유리에 비추어도 태양광명은 더 청정한 것이 없다.
식이 인상印象을 잘 받아서 자체안에다가 하나도 유실함이 없이 잘 간직하여 두었다가, 인연을 만나면 모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종자種子를 밭에 뿌리면 그 종자의 업성業性을 따라 형상形相이 나오면 맵고, 쓰고, 단 것이 다른것과 같이, 선업을 지은자는 얼굴이 단정하고, 모든 복이 자연히 이루어지며, 악업을 지은자는 얼굴이 법도法度를 잃어서 단정치 못하거나 혹은 자비덕상慈悲德相이 없어 아름답지 못하며 복이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다.
신식ㅇ이 몸을 버리고 갈 때에 눈구멍이나 귀구멍이나 콧구멍, 입구멍, 털구멍 등 무슨 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요, 나가는 곳이 없이 나가는 것이며, 들어갈 때에도 모든 구멍을 찾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꿈 가운데에서 마치 물건을 보며 사람과 축새의 소리가 역력히 들리고, 천리만리를 다니며 놀다가 잠을 깨어놓고보니 하나도 없으며 식이 옮겨갈 때에도 꿈 가운데서 보는 것과 같다.
그대는 식을 자세히 알라. 아뢰야식 자체가 광대하고도 큰 것이 진성眞性과 비등하며, 허공전체와 같아서 들어가지 아나한 곳이 없으며, 맑고도 항상 유동력流動力이 강하며 모든 만물의 종자를 머금고 있으며 모든 선악과 업을 받아서 印을 쳐서 천진 화학적 작용이 구족하므로, 산하 대지의 삼라만상의 묘용이며, 아뢰야식의 천진화적 작용이다.
그대는 자세히 깨칠지어다.
그대는 계란을 보는가? 그것이 둥글둥글하여 눈도 귀도 코도 없으며, 두리뭉실하여 아무지각도 없다. 그러나 당당히 산 물건으로서 이 계란 전체가 아뢰야식으로 되어있는 것이니, 만일 아뢰야식과 분리되면 곧 썩고마는 것이다.
이 계란을 따뜻한 곳에두면 「꼬끼오 !」하고 우는 산生물건이 그 가운데에서 나온다.
소나무 씨가 비록 작으나 낙락장송이 그 가운데에서 나오며, 고기알이 비록 작으나 장강대해長江大海를 툭툭쳐서 파도를 일으키는 큰 고기가 나오고, 매알鷹卵이 비록 작으나 창공을 능멸히 하는 송골매가 나오니 알로 있을 때에 보면 무정ㅎ한 물건과 같으나, 당당하게 산生물건이 아닌가?
참외眞菰나 가지茄子 등 물건은 비록 무정한 물건이나, 부인이 그 밭 가운데 들어가서 오줌을 누면 딱딱 벌어지니 어찌 단순히 무정한 물건이라고만 보겠는가?
만물엔 상생相生, 상극相克이 있으니 무엇이 있어서 상생 상극 하는가? 다 아뢰야식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은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요, 아직 아뢰야식이 지은 것이다.
인도에 향초가 있는데 이름을 첨바라화라 한다. 그 꽃과 흑임자黑荏子를 한데 혼합하여 잘 쪄서 익힌뒤에 기름을 짜면 향취가 아름다우니 이것이, 옮겨가는 것이 없이 곧 옮겨가는 것으로 식이 옮겨가는 것도 이와같다.』
객이 묻되,
『생시에는 육안이 있는 까닭으로 능히 볼 수 있거니와, 사후에는 눈과 귀와 코가 없으니 볼 수 있는 이치가 만무합니다.』『그대가 칠야삼경漆夜三更에 무엇을 보는가?』객이 답하기를, 『오직 어두운 것만 봅니다.』
용성이 이르되,
『그 어두운 것을 보는것은 장님과 같으니 그것이 곧 보는 것이다. 장님이 밤에 꿈을 꿈에, 꿈 가운데서 일월이 밝고 빛나며, 만물이 분명한 것을보니 그것이 육안으로 보는 것인가? 그 보는 것은 밝은 마음이 보는 것이다. 사람이 비록 몸은 죽을지라도 밝은 마음은 죽는것이 아니다.』
『그러면 신식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용성이 이르되,
『신식은 저장하여 둔 곳도 없고 형체도 없으되 능히 종종 형상을 짓는다. 비유하건데, 종자로부터 움이 나오는 것이니, 만일 종자가 썩어지면 움이나지 못하는 것이다. 종자로부터 움이나서 큰 나무가 된 것이요, 또 다시 나무끝에 꽃이피고, 과실이 맺히며, 종자가 익었으나 그 나무 전체를 해부하여 보아도 그 종자가 어디로 온 곳이 없다.
이와같이 신식으로 부터 사람의 육체가 되었으나, 육체를 해부하여 식을 찾아보아도 식이 있는곳이 없고, 또 식을 여의고는 이 몸이 없다. 또 비유하면 저 과실이 나무로부터 익기를 마침에,과실 가운데에 씨가 있어서 과실과 종자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도 그러하여 명을 마칠 때에 신체 가운데서 식만 뚜렸이 나서서 떠남에 형체를 볼 수 없어, 부모처자 권속과 금은 보화를 다 버리고 오직 식만 홀로가는 것이다.
이 식이 형체는 없으나, 자기는 몸이 분명하게 있는것을 본다. 이 식이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화합하고, 음욕에 연애로서 서로 얽힌 것이며, 생각으로서 서로 집착한 것이다. 착한 인연으로서 반연하여 화합하기도 하고, 악한 인연으로서 반연하여 화합하기도 하며, 지혜훈습智慧薰習한 것으로서 업연業緣을 따라 몸을 받아 태아나는데受生 아버지 될 사람의 식과 어머니 될 사람의 식이, 육체를 서로 교접할 때에 자식 될 자의 신식이 만리 밖에 있더라도 일순간에 당도하여 인연이 화합된 뒤에야 잉태가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거울을 사람이 얼굴에다 댈 때 얼굴이 없거나 거울이 없거나 어느 하나가 없으면, 얼굴을 나투지 못할 것이며 거울과 얼굴의 두 가지 인연이 화합한 뒤에야 얼굴이 나타나되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것과 같다.
으리 신식이 이 몸을 버리고 저 몸을 받음에 혹 복도 받으며, 죄도 받되 마치 꿀벌이 맛을 취하여 꽃위에 앉아서 맛을 탐착하다가 그 꽃을버리고 다른 꽃으로 옮겨가도, 혹 나쁜 꽃을 버리고 좋은 꽃으로 옮겨가기도 하며, 혹 좋은 꽃을 버리고 나쁜 꽃으로 옮겨가기도 하니, 천당 지옥이 다 자기의 신식으로 지은 것이요, 누가 명령적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다.
태胎로 태어나는 중생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중생들이 연애로부터 정욕이 생기고 정과 교합함에, 정은 반드시 찌그러지고 반듯함이 있는데, 치우치는데로 가로 누어서 가는 어지러운 생각이 있고, 반듯한데는 바로서서가는 어지러운 생각이 있다.
서서가는 생각은 사람고 신성이되어 머리는 하늘로 향하고, 발은 땅을 밟아 다니니 그 무리가 세계에 가득하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서서가는 생각에 따라서 태어나는 까닭이다.
가로가는 생각은 모든 축생의 무리가 되는 것이니 머리와 몸이 누워서 다니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가로가는 생각에 따라서 태어나는 까닭이다.
그럼 중생이 태胎에 드는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새상에 태를 받아 나오는 이치를 알면, 반드시 목슴을 마치고 다룬 곳에가서 생을받는 이치를 알 것이다.
무릇사람이 태를 받아 출생하는 것은 비록 부정모혈이 엉켜 서로 합할지라도 그 자식될 사람의 아는 것識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는 것識으로 인연이 화합되지 아니하면 잉태하지 못한다.
본사경本師經에 말씀하시기를, 〈무명無明을 끊지못하고 탐애를 버리지 못하여 業을 짓는 것을 쉬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태장胎藏의 몸을 받는 것이니 업은 밭이되고, 아는것 識은 종자가되며, 연애는 빗물이 되어 이몸을 성취하는 것이다.〉하시며,
유가론瑜伽論에 말씀하시기를,〈부모의 연애정이 가장 극함의 최후에, 각각 농후한 정과 혈을 내어 세가지 연緣이 화합하므로
어머니의 태胎중에 잉태孕胎하게 된다. 마치 젖을 달일 때 엉기는 것과 같아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을 의지하여 태胎를 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의 정혈精血은 水土의 기분氣分과 같다. 아무리 부모의 정혈이 화합할지라도 물水과 바람風이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다.
이것을 네 가지 비유로 말하면,
푸른 풀을 의지하여 벌레가 나기도 한다. 벌레는 푸른풀이 아니지만 풀을 여의고는 벌레가 없는 것이다. 저 풀과 인연이 화합하여 나기 때문에 벌레의 빛이 푸르다. 부정모혈로 이 몸을 성취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쇠똥을 의지하여 벌레가 나기도 한다. 쇠똥은 벌레가 이니지만, 벌레는 쇠똥을 여의고는 없는 것이다.
쇠똥과 인연이 화합하여 벌레가 나기 때문에 벌레빛이 누르다.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여 몸이 출생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또 대추를 의지하여 벌레가 나기도 하는 것이니 대추는 벌레가 아니지만, 벌레는 대추를 여의고 나는 것이 아니다.
대추와 인연이 화합하여 나기 때문에 벌레의 빛이 대추빛과 같이 붉다. 부모와 인연이 화합하여 몸이 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또 양이나 소의 젖인 소락蘇酪을 의지하여 벌레가 생기기도 한다. 소락은 벌레가 이니지만, 벌레는 소락을 여의고 있는것이 아니다.
소락과 인연이 화합하여 나는 것도 이와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ㆍ수ㆍ화ㆍ풍 地水火風이 구족하지 못하면 이 몸을 성취하지 못한다. 땅은 굳고, 물은 젖으며, 불은 뜨겁고, 바람은 동하는 것이다. 땅과 물만 있고 불이 없으면, 5월과 6월에 음굴에 둔 고기가 일광을 쪼이지 못해 곧 썩어지는 것과 같다.
또한 땅과 물만있고 바람이 없으면, 유리병을 제조할 때에 바람기운을 불어넣지 아니하면 그안을 비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지ㆍ수ㆍ화ㆍ풍 四大가 서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아느 것 識이 태에 들어갈 때에 무슨이유로 들어가는가?
아는것 識이 미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을 때에 부모될 사람의 인연을 얻으면, 수 만리라도 눈 깜짝 할 사이에 당도하니 만일 남자의 중음신이면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를 싫어한다.
이와같은 생각을 지어서, “만약 저 남자가 다른 곳으로가면, 내가 저 여인과 관계를 갖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이와같이 생각할 때, 음욕심이 불꽃같이 일어나니, 그 욕심에 가리어 저 남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여자만 있는것을 보고 환희하여 저 여인과 자기가 교합함을 보며, 부모될 남녀가 서로 교합하여 정수가 나온것을, 문득 자기의 정혈로 알아 극히 좋은 생각을 내므로 중음신이 추탁하고 무거워져서 어미될 여인의 태 속으로들어가 오른 옆구리에서 어미를 안고 꿇어 앉는다.
만약 여인의 중음신이라면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를 미워하는 생각을 내어서 여자가 멀리가면 “저 남자와 인연을 교합하리라.”라는 생각이 위에서 말한 남자의 중움신과 같아서 어미의 옆구리에서 어미를 등지고 꿇어 앉는다.
태로 나는것은, 아는 것이 다 음욕으로 화합하여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사랑을 마음에서 흘러내어 종자가 되고, 생각을 根門에 들이어 태가된다.』하신 것이다.
이와같은 법문을 듣던 사람이 용성스님께 묻기를
『부모와 자식이 음욕으로 된다는 것은 지나친 망발이 아닌가요?』
스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그대가 이 세상에서 목숨을 마칠 때 이 육체는 버리고 영혼만 떠나갈 것이니, 그 영혼의 자체에 앉아보면 아무도 나의 부모될 것이 없다. 이 신령하게 아는것 識이, 모두 생의 습기를 이기지 못해서 부모될 자와 자식될 자의 인연이 화합하여, 낳은뒤에 예절로서 부모와 자식의 천륜을 정한것이다. 그대의 몸이 난 뒤에는 부모가 되려니와 몸이 나기전에는 망발이라 할 것이 없다.
혹 성인과 신성이 태중에 드는것은 범부와는 달리 자기의 신력으로 미리 태장에 몸을 머물러 두어 혹 6년만에, 혹은 80년만에 나는 경우도 있다.』하시었다. 끝

Friday, January 13, 2012

4 좋은 화두가 따로있는가.

4. 좋은 話頭가 따로 있는가

어떤 학인이 나에게 묻기를
『화두에도 좋은 화두가 따로 있읍니까?』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런 말을 하지말라. 화두가 어디 좋은 화두가 따로 있단 말이냐.』
학인이 다시 묻기를
『저는 시심마是甚麽는 무자無字만 못한줄로 알고 있었읍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다시는 그런 사견邪見을 내지 말라. 좋고 나쁜것은 사람에게 있지 화두법에는 없다. 내가 40여년 전에 선지식을 찾아 사방으로 다닐 때에 그 행색行色은 걸인과 같이 보잘것 없었으나 나의 직분에 족하여 허공을 나는 학鶴과 같이 흰 구름으로 벗을 삼고 걸림없이 두루다니니 청풍명월靑風明月이 나의 집이었다. 한 선지식을 친견하고 법을 물으니 그 선사가 말씀하시기를 『시심마是甚麽 화두는 사구死句요, 무자화두는 활구活句니라.』하시므로 내가 말씀드리기를 「그럴이치가 만무하므로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읍니다. 시심마是甚麽는 사구死句도 활구活句도 아닌줄 압니다. 시심마 화두가 사구死句로 확정될 것 같으면 .남악회양선사南岳懷讓禪師사 숭산으로부터 왔을 때 육조대사가 묻기를
「네가 어떤 곳으로부터 왔는고?」
회양선사께서 밤잠을 자지않고 8년을 궁구窮究하다가 확철대오하여 육조대사의 적자嫡子가 되시니 도道가 천하에 으뜸이었으니 어찌 사구死句에서 깨치시고 활구문중活句門中에 기둥이 되었겠느냐.
육조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에 기둥이되며, 해와달 같이 밝으며, 철통같이 검으며, 머리와 꼬리 그리고 얼굴과 눈이 없지만 내가 움직이고 내가사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어떤 물건인고?」하였다. 그 때 나이 7세인 하택신회선사가 대중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례頂禮하고 대답하기를 「삼세각三世覺의 본원本源이요 신회의 각성覺性입니다.」육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사관宗師冠을 머리에 쓰고 학자를 제접提接할 지라도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되지 못하리라.」하시니 어찌 활구문중活句門中에서 깨치고 사구문중死句門中에서 지해종사가 되겠읍니까?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하였다.
선지식이 말씀하시기를
『시심마는 병통이 많다.』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무슨 말씀입니까?』하였더니 선지식께서 『근일에 깨쳤다고 하는것이 시심마하는 사람에게 특히 많았다.』하시였다.
내가 말하기를
『시심마를 어떻게 알기에 그렇습니까?』하니 선지식이 대답하기를
『혹 소소여여한 놈이 무엇인고? 혹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고? 혹 생각하는 놈이 무엇인고?』
『그 때 내가 대답하기를
『가탄可歎 가탄可歎이 올시다. 화두를 이와같이 궁구窮究하거든 어찌 병통이 없겠읍니까? 육근의 문 머리에 아는 빛 그림자 식이 경계를 쫓아 감각하는대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또 뜻 뿌리 의근意根에 분별하는 그림자 식을 가지고 이 무엇인고? 하며 또 생각으로 일어나는 뿌리를 들여다 보며 무엇인고? 하며 찾으니 이것으로 부터 병이 많이 납니다. 이 사람은 空한 병이 아니면 맑은 병이요, 그렇지 않으면 소소영영한 것을 지키는 병이 허다 합니다. 이와같은 것으로 어찌 위없는 큰 도를 중득할 수가 있겠읍니까? 천칠백 화두가 그 참구하는 법은 모두 하나이니 어찌 다름이 있겠읍니까? 시심마는 한 물건을 알지 못하여 참구하는 것입니다.』하였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법
어떤 학인이 묻기를
『화두를 의심하라 하니 어떻게 참구하여야 함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화두를 드는 것을 비유하면 어떤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품속에 깊이 간직하고 애지중지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렸다.그 사람은 모르고 있다가 보배가 있는곳을 찾아보았으나 보배가 보이지않자 허겁지겁 찾는것과 같이 화두를 드는 모양도 이와같다. 혹 화두를 할 때에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우물속에 들어가는 것도같고 , 어떤 때에는 뜨거운 물과같이 번뇌가 끓고, 또 찬 어름을 만지는 것처럼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또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술술 잘 풀린다.
그러나 공부가 잘 되든지 잘못되든지 마음에 두지말고 다만 화두만 생각하여야 한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말며, 또 운동하고, 말하고, 동하고, 고요히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지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벽과같이 하여 공부를하지 말라. 이는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흔이 흩어지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부구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내가, 또한 산하대지가 함께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진다.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漆桶을 타파할 것이요.』

또 어떤 학인이 용성에게 묻기를
『망상을 어떻게 없애야 합니까?』
용성이 대답하기를
『망상이 일어나든지 또는 일어나지 안든지 상관하지 말라. 망상이란 본래 없애려고 하면 더욱 일어난다. 비유하면 소가 달아나려고 할 때 고삐를 단단히 잡아당기면 소가 스스로 사람을 따라오는것과 같이 망상이 알어나는 것을 상관하지 말고 화두만을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진다.
또 화두로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말며 또 다만 화두만 들어 의심하여도 망상을 잡지못한다. 그때는 화두를 즉시 놓아버리고 마음도 쉰다음 화두를 들면 다시 새롭게 된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때에는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편안히 하고 화두를 밝게 의심하라. 화두를 너무 급하게 들면 육단심:肉團心 심장을 말함.이 동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며 코피를 흘리게 된다.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히 가진 까닭으로 일어난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잃어버리기 쉬우니 부디 화두를 조급히 들지말고 방심하지 말라. 거문고 줄이 너무늘어져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너무 팽팽하여도 소리가 나지 않으니 공부하는 것도 이와같다.
비유하면 어떤사람이 깊은 산중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산이 앞을 막고 물이 가로 놓여서 진퇴할 수 없을 때에 용단력勇斷力을 다하여 한걸음 더 전진하면 온갖장애가 사라지고 새로운 천지가 보일 것이다.
이 공부는 단지 알지못할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로 알고저 하면 천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화두를 참구할 때에는 어떤 재미를 찾지말고 모기가 쇠로만든 소 등에 앉아 쏘지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身命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심으로 뚫어가면 몸뚱이 마져 쑥 들어가리라. 오직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
따뜻한 봄이 돌아오면 저절로 꽃피고 잎이 피듯이 공부가 익어 가리라.

인과因果란 무엇인가
어떤사람이 묻기를
『금생에 인因을 지으면 다음 생에 과果를 받는다는 인과의 말씀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인과를 이상하게 생각하는가. 천지 만물과 四時ㆍ사철과 인생의 매일의 동정動靜이 모두 인과를 벗어나는 것이 아나도 없다. 봄春을 인하여 여름이 오는 결과가 있고, 여름을 인하여 사르이 오는 결과가 있으며, 사을을 인하여 겨울이 오는 결과가 있고, 겨울을 인하여 봄이 오는 결과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은 자리에 앉으면 일어설 것이며, 섰으면 누을 것이고, 누으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이것이 곧 인과의 이치이다.
또한 내가 남에게 착하게 하면 남들도 선하게 대할 것이며 내가 미워하면 저들도 나를 마워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밭에다 콩을 심으면 콩이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나는 것과 같다.
그대가 세상에 귀신들린 사람을 보았는가? 어떤사람이 묘한 술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혹 천신天神이나 전달바신을 지극히 섬기다가 그 신들이 감응함을 얻은 사람은 눈과 얼굴 빛이 변하고 성격도 달라진다. 또한 깨끗한 것과 좋은 향을 피우는 것을 좋아하므로 음식과 거처와 모든것을 청정히 한다. 그 사람에게 천신이 붙어있는 곳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도저히형적이 없으며 심지어 몸전체를 빠짐없이 해부한다해도 귀신이 붙어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선심을 닦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자연히 심기가 평안하며 얼굴에는 악한기운이 없고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모든사람들이 다 보기를 좋아하며 즐거워 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착한형적이 붙어있는 곳이 없으나 현세에도 아와같이 좋은 것으로 변한다.
이것은 형체없는 심식心識이 스스로 선심을 닦는 것을 因하여 종자를 마음밭心田에 심는 것이니 이사람은 후세에 가서 좋은 과보를 자연히 받는 것은 지혜있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다.
비유하면 정원에 계수나무나 전단향나무가 많아 았는데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맑은 바람결에 향내음이 우리의 콧끝을 스치니 저 형체없는 바람에 형체없는 향냄새를 실어 이곳까지 왔다.
아와같이 형체없는 식이 형체없는 선업을 가져 후세로 옮겨가서 무한한 복락을 받는것도 이와같다. 혹 어떤 사람이 술법을 성츼하가 위하여 주문을 일심으로 외우다가 그 술법을 성취한 사람이 얼굴색을 보면 노란색이나고 몸에서는 누린 냄새가 난다.
또 부다나라는 악한귀신이 붙으면 부패하고 더러운 물건을 좋아하는데 그사람의 몸을 해부하여도 형적을 볼 수 없다.
사람의 심식은 형적은 없지만 그 악업응 인쳐 아뢰야식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후세로 옮겨가는 것을 비유하면 우리는 이곳에 있는데 앞 동산에 더러운 물건이나 썩은 송장의 더러운 냄새가 바람을 타고 이곳까자 날라 오는 것과 같다. 바람은 형체없는 식에 비유하고, 악취는 악업에 비유한 것이니 일생에 지은 악업이 형적은 없으나 형적없는 식이 형체없는 악업을 가지고 후생으로 옮기어 악도에 태어나 고를 받는것도 이와같다.
세계의 성립과 인생의 유래
대체로 보아서 천지天地와 세계가 일어나고 성成, 머물고 주住, 무너지고 괴壞,비여 공空 있으면서 쉬지않고 순환 왕복하는 것은 마치 다람쥐가 체바퀴 도는것과 같다. 이 한 차례의 성ㆍ주ㆍ괴ㆍ공 함을 햇수로 계산하면 61억 7천 2백 만년이나 괴며, 또한 세계가 처음으로 생멸生成하여 무너질 때 까지를 계산하니 1억 6천 8백 만년이란 긴 세월이 된다.
공겁空劫을 지나 성겁成劫으로 옮기려고 할 때 홀연히 허공에서 많은 구름이 일어나더니 큰 비가내리는데 그 빗방을의 크기가 마치 수레바퀴 처럼 컸다. 그 아래는 수없이 큰 바람바퀴가 돌고 있으므로 그 빗물이 아래로 빠지지 못하고 중간에서 큰 물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불자 큰 물거품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점점 굳어져서 지구가 되었다.
우리가 출생하는 것도 父情과 모혈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그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 한방울의 물로 태어난 것이다.
이와같이 천지체계도 그 원인은 또한 물로서 성립되었으며 그 과정을 자세히 말하자면 너무나 넓고 끝이 없어서 다 말할수 없기때문에 약간만 기록한다.
지구가 생긴뒤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 化生으로 된것이다. 화생이란 4생의 하나로 자체가 없으며, 의탁할 데 없이 홀연히 생겨난 것을 말한다. 예를들면 비가많이와서 웅덩이에 물이고이게 되면 얼마동안의 기간이 자난다음에 자연히 그 물에서 물고기나 벌레들이 화하여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구가 처음생긴 후 남녀ㆍ노소ㆍ존귀ㆍ빈부의 차별이 한가지로 나므로 중생이라고 이름한다. 중생이 나면 먹는것은 자연히 생기게 되는데 그 먹는 물건은 이름을 지미至味라 한다. 그 모양은 우유를 잘 정제하여 만든 제호醍醐와 같고 그 빛은 우유색이며, 그 맛은 꿀맛과 같다.
중생들이 시험삼아 손으로 찍어 맛보고 탐심을 내니 그 지미가 점점 굳어져서 뚝뚝 끊어 먹게 되었다. 처음 지미의 냄새만 흡수할 때에는 몸에 광명이나고 신통이 있더니 그 음식을 먹은 뒤러는 둔탁하여 몸이 무겁고 기운이 떠러져서 광채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통까지도 다 잃어버렸다.
지미는 많이 먹은 사람은 얼굴이 추하고 안색이 좋지않았지만 적게 먹은 사람은 얼굴이 윤택하였다. 중생들이 서로 먹으려고 싸우고 시비하므로 그 뒤로는 지미가 전혀나지 않았다.
그러자 중생들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큰일이다. 지미가 다시나지 아니하는구나.」하였다.
그뒤로는 다시〈지피〉가 나오니 그 모양은 엷은 밀떡과 같고, 맛이좋고 향기로웠다. 중생들이 앞다투어 먹다가 그것도 너무 오랫동안 먹은지라 싫증을내며 소홀히 생각한 업력으로 인하여 〈지피〉가 없어지더니 또 다시 〈지비〉라는 것이 생겼다.
중생들이 〈지비〉를 먹고 생활하니 악한 마음이 점점 더하므로 〈지비〉가 없어지고 다시 〈포도〉가 생겼는데 그맛이 매우 달았다.
그 뒤에는 맵쌀이 나니 그 크기는 넷치나 되고 여러가지 맛이 고루 갖추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먹으니 자연히 남녀가 이성에 눈을 뜨게 되어 음욕심이 생겼다. 남녀가 어느 장소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므로 다른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애 닯다. 법 아닌 것을 행하는 구나. 어찌 사람에게 이같은 일이 있으리요.」이같이 말하자 남자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몸을들어 땅에 스스로 던지니 상처가 크게났다. 그의 짝했던 여인이 음식도 보내고 붙들어 도와주니 이때부터 세간에 부부의 이름이 있었다. 그뒤부터 중생이 드디어 음탕하므로 그 행동을 숨기기 위하여 집을 짓고 부부가 함께 살게되니 이로부터 세간에 화생으로 생기든 중생이 갑자기 변하여 모태로부터 출생하게 되었다. 이것이 태성胎成이다.
이때에 세간에 자연히 멥쌀이 나되, 아침에 베면 저녁에 익고, 또 저녁에 벼를 베면 아침에 익으니 베는데 따라 계속하여 벼가 자랐다.
그런데 게으른 중생들이 4ㆍ5일동안 먹을 양식을 미리베어다가 저축하니 이때부터 벼껍질이 점점 두터워지고 어느날 감자기 건조한데만 자랐다.
그러자 사람들은 심히 근심하고 슬퍼하다가 각기 전답을 나누어 너의땅과 나의 땅을 구분하여 소유하였다. 그뒤에 사람들이 자기의 쌀을 창고에 감추어 놓고 다른 사람의 밭에있는 곡식을 훔치는 자들이 많아졌지만 능히 그 죄를 결판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여러사람이 모여 의논한 결과 대중가운데서 훌륭한 사람하나를 대표로 뽑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인민을 잘 보호하되 잘하면 상을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을 지배하는 왕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 왕의 이름이 대인이니 인민들의 왕을 찰제리刹帝利라 하였다.
왕이 천하를 다스리되 법으로서 하며 열가지 착한 법으로 교훈하고 백성을 부모가 자식생각하듯 극진히 하니 백성은 왕을 공경함이 자식이 아비 생각하듯 하였다.
대인왕 시대에는 천하가 다 태평하고 인민이 편안 하더니, 그 아들 지불왕이 다스릴 때는 그렇지 못하였다. 천지가 처음으로 성립된뒤로는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세였으나 점점 감소하여 혹 7ㅁ만이며, 1만이며, 1천이며, 1백이며, 또 더 감하여 열살까지 되기도 하였다. 또한사람이 크기도 백년에 아홉번째 감겁할 때에(인간의 수명이 백세 때) 석가대각釋迦大覺께서 사바세계에 출세하시었다.

Thursday, January 12, 2012

3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

3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부사의한 신통변화
어떤객이 용성께 묻기를
『부처님께서는 부사의不思議한 신통변화가 있다고 하시는데 무슨 도道를 닦아서 그와같은 불가사의한 능력을 얻었는지 저의 얕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시요.』

용성이 대답하기를
『대체로 보아서 부사의한 신통조화를 부리는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천상인간과 유정동물이 그 정도를 따라서 작용하는 능력이 각각 다를 뿐이다.이것은 모두 마음의 작용이니 조금도 다른것은 없다. 까마귀와 까치가 허공을 날고, 노루와 사슴이 뛰는것은 모두 천진묘용天眞妙用이며 무작신통無作新通이니 이 신통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그러나 내가 범부ㆍ성인의 작용하는 신변神變을 말하겠다. 먼저 신변이란 불ㆍ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위하여 초인간적인 신력으로 여러가지 모습이나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무릇 범부에게는 지혜와 우치의 차이가 많지만 우선 지혜있는 사람의 예를 들어 말하겠다. 오늘 날 사람들이 마음으로 과학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기계를 교묘히 만들고 공기와 물과 불을 사용하여 화륜선을 물위에 띄우고 운전하니 날으는 새와같이 빠르더라. 또한 기차는 육지에서, 비행기는 허공으로 번개처럼 날으니 이것은 모두 범부의 심령적心靈的작용으로써 물리적 기계를 사용하는신변이요, 또 우주간에 가득찬 전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라디오로 일체통신과 노래와 연설하는것을 방송하며, 전신,전화,전기불을 사용하니 이것이 모두 심리적 작용이라 할 수 있다.
탐ㆍ 진ㆍ 치 번뇌가 있는 중생도 모든기계사용하는 방법을통달하여 이와같이 광대한 사업을 하는데 하물며 부처님께서는 무량 아승지겁을 닦아서 도행道行이 웬만한 성인이시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어떤 술법術法이나 마술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래의 성품에 구족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이다. 하늘 사람들의 신통을 부처님의 신변작용과 바유하면 부처님은 해와 달 같고 제천諸天은 개똥불과 같아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여섯가지 신통을 간단히 살펴보자. 부처님의 천안통天眼通은 분별상分別相과 작용상作用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허공을 다하고 법계를 다하여 빠짐없이 사무쳐 보시니 그 시력은 멀고 가까움이 없다. 어찌ㆍ하여 그러한가. 부처님의 몸은 본래 자성自性이 광명성체光明性體하다. 그러므로 오고 감이(去來) 없는 몸이여, 전체가 눈이라 법계에 가득하다. 또한 과거ㆍ현재ㆍ미래에 허공을 다하고 법계를 다하여 삼세를 명확히 보신다.
객이 다시 용성께 질문하기를
『현재에 모든세계의 소리를 다 듣는다 하니 그 말이 진실인지 참으로 알 수 없읍니다. 어떻게 형체가 없고 자쥐가 없는 과거 미래사를 모두 볼 수 있읍니까?』
용성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일체만물이 지ㆍ수ㆍ화ㆍ풍 으로 건립된 것을 아는가?』
『예, 그것은 이해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것이 어떤 인연으로 나고 죽는것을 아는가?』
『그것은 성인이 아니면 잘 알 수 없읍니다.』
용성이 말하기를
『하지夏至부터 태양이 점점 남쪽으로 내려감에 따라 햇볓이 지면과 거리가 멀어지므로 양기陽氣가 점차희박하여지고 북쪽의 음기陰氣는 반대로 상승하여 가을이 온다. 이 때가 되면 오곡과 모든과일이 모두 성숙하여 또 따라서 겨울이 되면 초목은 낙엽이되어 말라지고 들과 산에는 흰눈이 쌓이게 된다. 그리고 이 인연으로 죽는 것이다.
또 동지冬至에 이르면 태양이 남쪽으로부터 점차 올라와 지면에 태양광선이 점점 뜨거워지는 인연으로 일체초목들이 꽃과 잎이 돋아나니 이것들은 모두 양기가 오면 나고 양기가 사라지면 죽는 것이다.
그대는 초목들이 말라 썩어지면 아주 없어지는 것으로 아느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무가 썩어 없어질 때는 물기운은 태양열을 받아 공기중으로 흡수되어 혹 바다물이나 혹은 강물이나 냇물에 합하여 억만겁 동안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 둔탁한 바탕은 흙이 되어서 언제든지 없어지지 않으며,바람 기운과 불기운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으나 바람은 바람에 합하여 바람이 일어나기 전에 바람의 성품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과 합하여 불이되기 전에 불의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 지ㆍ수ㆍ화ㆍ풍의 본성이 법계에 두루하여 항상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아는가?
사람의 육체도 그와같고 세계도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가 일어나서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 지수화풍의 본성은 언제든지 법계에 가득하여 변하지 않는다.
세상사람들은 우리의 본 마음과 본 성품이 없어지지 않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죽으면 아주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대는 축음기에 음파를 기록하여두면 그 소리가 없어지지않고 천년이라도 있는 것을 아는가? 또 우리가 일평생 무슨말을 하든지 없어지지 않고 허공 법계에 있으면서 미래가 다하도록 존재하는 것을 아는가?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 적은소리를 막론하고 소리마다 공기와 전기를따라 하나하나 허공에 가득하니라. 비유하면 강물 가운데 돌을 던지면 그 물에 파문波汶이 일면서 사방으로 번져서 가는 것처럼 우리의 말소리가 비록 적을지라도 전파를 따라 법계에 가득하여 없어지지 않는다. 또 다시 바유하면 어떤사람이 평생을 문학에 종사하였다면 마음속에 지식이나 상식 등 문학에 관한 모든것을 넉넉히 간직하여 두었으되 간직하여 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시작이 없는 겁劫으로부터 미래겁未來劫이 다하도록 모든물질형상과 일체차별형상과 모든 유정동물이 마음먹는 것이 분명하여 항상 있는 것을 아는가? 또 그대가 일체동물이 오랜과거부터 마음으로 생각하는것이 영력하게 분명하여 허공과 법계가 다 할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아는가?
저것들이 모두 본래의 설품을 쫓아 일어나지만 일어남을 말하지 않으며, 멸하지만 멸함을 말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에 그름이 일어나고 멸하지만 허공은 조금도 동하지 않는 것과같다.본원성本源性도 이와같이 일체의것이 이것으로 쫓아 일어나지만 본성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말한 모든 물질의 차별과 모든 음성의 차별과 일체 유정동물의 차별이 모두 본원각성本源覺性에 인印을 쳐두는것이 마치 축음기에 소리를 수록하였지만 그 소리응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무런 형적이 없지만 백년후라도 축음기를 돌리면 그 소리가 영력ㆍ분명하게 들리는것 처럼 사람마다 일평생을 보고들은것과 시서백가詩書百家와 종교ㆍ철학ㆍ과학 등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두었지만 형적을 볼 수 없으며 형적이 없으나 인연을 따라 모두 나타나니 이것이 곧 아뢰야식과 법계성法界性에 인을 쳐 둔 것이다.
이 만물의 형체를 성립한 원료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하며 금수화목토金水火木土라 한다. 만물은 이것을 버리고는 어떤 형상도 없는 만물의 성질이요, 그 맛에 잠기는 성질은 음陰이되고 뜨는 성질은 양陽이 된다. 혹 물질이 강하고 유柔하고 바르고 굽은 것은 기운에 관계되는 것이며, 청황적백靑黃赤白은 만물의 빛이되고, 방원장단대소方圓長短大小등은 만물의 형상이되며 청탁淸濁은 음양의 기분으로 된 것이다.
물은 언제든지 흐르고 불은 위로 솟으며 불은 뜨겁고 물은 젖는 성질이 있으니 이것은 우주간에 변하지 않는 이치다.
대체로 보아서, 뜨고 잠기고 강하고 약한 것은 음양의 기운을 표시한 것이며, 불은 마찰력으로 전기가 일어나니 전기는 시방十方허공에 가득하다.
이 전기는 전성을 의지하고 있으며 이것을 사용하는데 따라 선신電信이 되고 전화電話또는 전등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물이나 땅이나 바람 등 모든 것이 그 본래 기운과 그들의 형용이나 체상體相을 갖추기전에 성품이 허공에 가득하여 서로 잡난雜亂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무형적으로 허공 법계에 가득한 것이다. 이것들이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있는데 아뢰야식은 이것들의 종자성種子性을 간직하여 둔 것이니 이 종자성의 수효는 한량없이 많다.
이 종자성에는 각기 업종자業種子를 갖추고 있다. 아뢰야식은 환각幻變이 무상하다. 이것의 환변으로 일체 종자성과 업종자성이 발현하여 화학적 작용으로 만물의 형상이 각각 차별한것과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 등 5색의 꽃이피고 잎이 돋아나는 것이 각각 차별한것과 일체유정동물의 차별한것과 그들의 음성이 각각 차별한 것이 불가사의하니 어찌 입으로 다 표현하리요. 이것은 모두 아뢰야식의 불사의업종차별不思議業種差別에 화학작용化學的作用이니 이것은 우리의 광명체성본각光明體性本覺을 의지하여 건립된 것이다.
우리가 이 식정무명識情無明을 타파하고 본원각성本源覺性에 합하면 손바닥위에 밝은 구술을 놓고 보는것과 같이 허공을 다하고 법계를 다하여 보고듣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술법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구족하였지만 무명의 어둠에 덮인 까닭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범부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성품을 깨달아서 수용하므로 불가사의한 육신통을 중득하신 것이다.
세상사람들으이 미진微塵을 보지못하다가 아침태양이 창문틈으로 들어오면 적은먼지도 밝게 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극히 청정하면 시방세계를 한 생각에 다 보고 듣고 알 것이다.
마음을 닦는 바른길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먼저 공부길을 자세히 살펴 바른길을 걸어야 헛된 고생을 아니하고 넓은길로 걸림없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닦는 사람은 자세히 참고 하여야 한다. 사람 사람마다 한 물건이 있으니 하늘과 땅과 허공을 전부 삼키었고 티끌속에도 적어서 차지 않는다. 밝기는 수 천개의 일월과 견주어 말 할 수 없고 검기는 먹물보다 더 진하다. 이 물건이 우리의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는데 있지만 이름 붙일 수 없고 얼굴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마음도 아니요 마음 아닌 것도 아니며, 생각도 아니요 생각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부처도 아니요 부처아닌것도 아니며, 하늘도 아니요 하늘아닌것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요 귀신아닌것도 아니며, 허공도 아니요 허공아닌것도 아니며, 한 물건도 아니요 한 물건 아닌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가 아니지만 능히 여러가지를 건립建立한다. 또 지극히 밝으며, 지극히 신령스러우며, 지극히 空하고 크며 지극히 가늘고 또한 강하고 또한 부드럽다. 이 물건은 이름과 모양이 없으며, 이름이나 모양없음도 또한 아니다. 이 물건은 마음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고, 마음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또한 말과 글로도 이름 붙일 수 없고, 고요하며 말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의심하고 또 다시 의심하되 어린자식이 엄머니를 생각하듯 간절히 하며, 암닭이 알을품고 앉아 그 따뜻함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면 참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볼 것이다. 마음닦는 사람들은 나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가 마음을 닦는것은 삼장三藏 12부 경전과 상관이 없고, 오직 부처님께서 다자탑多子塔앞에서 반자리를 나누시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보이시며, 사라쌍수沙羅雙樹에서 관棺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도리를 전하여 오는 것이 우리가 믿어 행하는 것이다. 출격장부出格丈夫들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리불같이 지혜있는 이는 온 세상에 가득하고 티끌수와 같이 많은 보살이라도 조금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모든 도인들은 알거든 내어 놓으라. 그러나 알지 못하면 의심하여 궁구하라. 부디 공부하는 사람들은 보는대로 듣는대로 모든경계를 쫓아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고 하지말라. 또 소소영영한 놈이 무엇인고 하지 말라. 생각으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들여다보지 말것이며, 화두를 들 때에 잘되고 못 되는데 잘 잘못을 취하지 말도록 하며, 고요하고 편안함을 취하지 말라. 이 물건은 깨달음의 말로도 미치지 못하고 팖만대장경의 글로도 나타내지 못한다.「이 물건이 어떤 물건인고?」 어떤사람이 용성에게 묻기를『무엇 때문에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말라 하시며, 소소영영한 놈이 무엇인지 찾지 말라 하십니까?』『 육근六根이 경계를 대함에 그 아는 분별이 일어남이 한이 없는데 그 허다한 경계를 쫓아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찾으면 그 마음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그 화두도 일정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다가 혹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아는 놈은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잘 못 알기 쉽다. 그렇지 않으면 고요한 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삼기도 쉽고, 空한 것으로 본성을 잘못 알기도 쉬우며 맑은 것으로 자성을 깨쳤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마음이 스스로 내가 소소영영하다고 하지 않는데 무슨일로 소소영영하다 하느냐.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들여다 모지도 말라. 혹 맑은 생각으로 맑고 밝은 곳을 보아 그곳에 집을짓고 들어앉기도 쉽다. 혹 한 생각 당처當處가 곧 空함을 깨칠지라도 확철대오確徹大悟가 아니니라』
또 용성이 말씀하시기를
『육조스님께서는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괴였으며, 밝기는 해와 달 같고, 검기는 먹물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하시었다. 또 육조께서 회양懷讓: 677~744 중국 당나라 승려 에게 묻기를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스님이 알지 못하고 8년을 궁구하다 확철대오 하였으니 이것이 화두 하는 법이다.
이 물건은 육근으로 구성된 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항상있다. 그리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상관없이 항상 있다. 또 공하고 공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항상있다.
만약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않는다. 밝음은 가히 무량한 해와 달로도 비교할 수 없다. 참으로 크고 커서 천지 세계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곳이 없으며 참으로 적고 작아서 보이지 않는 티끌 속에 들어갔지만 그 티끌속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하고 의심하여 보아라. 추호라도 따로 아는 마음을 내지말고 단지 의심이 큰 불덩이 같이 발 붙이지 못할 곳을 향하여 뚫고 들어가야 한다.』

또 어떤 학인이 묻기를
『천지 허공을 전부 집어먹고 있다하니, 이것이 나의 본원각성이며 혹은 나의 참 마음 입니까?』 하니.
용성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대가 참으로 중득한 경지에서 본 것이 아니며 단지 지혜에서 나온 견해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서울을 가 보지못한 사람이 서울을 가본사람에게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는 남대문이 어떻고 종로와 대궐이 어떻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서울을 직접 본 것과 같겠는가. 성인이 마음이나 성품을 말씀하시니 그 말만듣고 그 말만 옮기면 성인이 되지 않는 것과같다.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들이 명상名相을 지어 「마음이다」「성품이다」하고 여러가지로 말하지만 名相을 짓기전에 〈어떤 물건인고?〉를 궁구하여 바르게 증득하여야 된다.
이 일은 말로써 꾸며 될 수 없고 마음으로도 될 수 없으니 이것이 어떤 물건인고? 궁구하여 보아라.이것은 몯든 성현도 알지 못한다 하거늘 어찌 너의 지해知解로 알 수 있겠는가. 그 의미는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
모든성현이 정말로 몰라서 모른단 말도아니고, 알아서 안다는 말도 아니니 그대가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은 물건도 아니니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다.
이 물건을 아느냐?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깨친자는 분명하다. 비유하면 저기 철로가 있다. 철로위에는 기차가 있고 차에는 화통이 있으며 화통속에는 석탄과 물이 있어서 증기르 내고있다. 그러나 기차는 가지않는다. 그 이유는 가관사가 기계를 조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몸을 가지고 동작하여 움직이는 어떤주체가 있다.
그대는 그대의 몸을 능히 움직이는 주인공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고? 의심하여 보라. 왜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지 부터 찾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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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anuary 10, 2012

2 깨달음의 본원심

2 깨달음의 本源心

우리 불교를 깨달음의 교리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뜻이있다.
첫째는 우리가 보고 가장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허공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크다고 하는 것은 이런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래마음本源心은 천지ㆍ허공ㆍ만물을 상대적으로 크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끊어진 것을 말한 것이요, 覺이라는 말은 능히 깨치고 깨칠바가 없는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大覺의 本源心을 말이나 글로 가르쳐 줄 수 없고 어떤형상으로 보여줄 수도 없다.
허공 가운데에 전기의 성품이 가득하고 바다물에는 짠맛이 가득하나 분명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 이와같이 깨달음의 체성體性도 분명히 있지만 일체의 명상名相이 없어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며 뜻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일체 이름과 형상이 없어 본래 없다고 말하나 분명히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물건도 없어 마음도 아니요, 佛陀도 아니며, 달마도 僧伽도 아니요, 귀신도 이니며 어떤 물건도 아니요, 허공이나 하늘도 아니지만 지극히 크고 지극히 작으며 지극히 신령스럽고 지극히 견고하며, 지극히 굳세고 지극히 부드러워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다.
이 본성은 이름과 형상이 없으되 과거와 현재를 꿰었으며 十方에 가득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주인공이 되며 萬法의 왕이 됨이니 지극히 크고 넓어서 아무 것에도 방해가 되지않고 비교할 것도 짝 할 것도 없다. 또한 천지天地 세계보다 먼저있어 시초始初가 없고, 천지가 끝난 뒤에있어 종말終末이 없다. 이 크고 둥근 깨달음의 체성體性은 천지가 나와 한 근원이요, 삼라만상이 나와같은 체體이다.
이 성품은 성현이라고 더하지도 않고 범부라고 덜하지도 않는다. 또한 생하고 멸함이 없어 방원장단方圓長短 대소명상大小名相등 일체가 하나도 없으되 하늘에 있으면 능히 하늘이되고, 땅에 있으면 능히 땅이되며, 사람에 있으면 또한 능히 사람이되니 이것은 우리 대각大覺의 본원심성本源心性을 말하는 것이다.
또 둘째는 대각大覺의 근본적 심성心性을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치게하며 자각각타自覺覺他가 둘이없어 원만하므로 구경락究竟覺이라 한다. 또한 사람마다 본래 구족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비록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구족할지라도 깨치지 못한이는 범부요, 비록 깨침이 있을지라도 닦지못하면 범부중생이니 어찌하여 그러한가?
비록 본래 金일지라도 여러번 용광로에 단련鍛鍊하지 아니하면 순금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한 번 순금이 되면 다시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지런히 닦아서 참다운 마음을 중득하는 것도 이와같으니 이것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 구경에 둘이 아니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니 앞서 말한 것을 다 깨치면 대각大覺이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된 것
보라! 우리가 말하고 침묵하고 손을 놀리고 발을 움직이며 앉고 눕고 잠자고 오고가며, 보고듣고 깨닫고 아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이 다 하는 것이라면 어찌 죽은 송장은 알지 못하는가. 이것은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 되는 것이다.
눈을감고 깊은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천리만리를 순식간에 왕래하되 산이나 강ㆍ절벽등에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왕래하니 이것이 마음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대는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하니 그대의 마음은 아무상관없고 오직 밖으로 있는 물건이 능히 시빗선악是非善惡과 탐진치貪嗔痴를 내는가?
사람이 침대에 누워 꿈을 꿀 때에 꿈속에 천지天地ㆍ일월과 모든것이 역력분명하니 이것도 물건이 아는 것인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한다고 해서 오직 정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심唯心을 부인하고 유물唯物만 주장하니 그대의 마음은 나무나 돌과같이 아무 분별도 없는데 밖으로 모든 물건이 분별하는가? 마음이 하지않고 오직 물건이 분별한다면 죽은 송장은 어찌 분별하지 못하는가?
세상에 종교ㆍ도덕과 철학ㆍ과학등 모든학문은 누가 제정하였는가? 마음이 아니고는 그 법을 제정하지 못한다. 현재에 전제국專制國과 공화국ㆍ공산국 등을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무정목석無情木石이 하는 것인가? 무정無情이면 목석이라 지각이 없으므로 어떤일도 하지못한다.
나의 생각 같아서는 여러말 할 것 없이 자기의 밝은 성품을 깨달아가는 마음, 공정한 마음, 굳센마음, 진행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본원각성本源覺性을 깨닫고, 큰 눈을 떠서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三世의 일을 깨달어 가며 우주에 모든진리와 고금古今에 흥망성쇠와 미래의 모든일을 밝은 마음으로 관찰하여 영단있게 할 것은 하고 안할 것은 처음부터 간섭치 말아야 할 것이다.
불교의 종지宗旨는 법을 어떠한 틀에 아주정하여 놓고 있지 않다. 비유하면 춘ㆍ하ㆍ추ㆍ동 4계절이 절서節序를 따라 바뀌는 것과 같아서 봄에는 일을하고, 가을에는 가을 일을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일 시대를 거슬러 엳리逆理를 행하여 도를 닦으려고 하는것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법화경에 말씀하시기를 「수 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였다.」하시니 방편이리는 것은 도에 들어가게만 한 것이요 법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큰 바다를 건너는데는 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간지스강의 수 없이 많은 모래알같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할 뿐이요, 추호라도 중생을 속이지 않는다.
모든것은 마음이 주체가 된다. 앉고자 하면 곧 앉고, 눕고자하면 눕고, 가고자하면 곧 떠나니 백만사百萬事가 마음이 시키는데로 육신은 따라움직인다. 그러므로 한 생각을 쉬면 아무일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에 끌리어서 탐ㆍ진ㆍ치 삼독을 내는 것은 본래 사람의 본 성품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다겁생多怯生에 생활하는동안 자연히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발생하여 점점 습관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강물이 얼어서 얼음이 된 것은 추운기운 때문이나 그 물의 본체는 본래 얼음이 아닌 것처럼, 범부 역시 청정한 성품이 그릇된 앞력 때문에 범부가 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악습에 끌리어서 어여뿐 여인을 보면 음심이나고, 황금을 보면 탐심이 나는것을 보고 오직 본질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하고 유심론唯心論을 부인하게 된다.
우리의 본원각성本源覺性은 본래 자연自然도 아니며 자연 아닌 것도 아니다. 또한 인연도 아니며 인연 아닌것도 아닏다. 이는 오직 일체의 형상을 여의면서도 일체 형상에 나타나서 낱낱이 사무친다.
어떤사람이 용성龍城꼐 묻기를
「일반적으로 유정有情동물은 기운이 모이면 나는 것이요,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다고 함니다. 그런데 무슨 물건이 있어 나고 죽는지요?」
영성께서 답하기를
『그내의 말과같이 다만 유정중생이 기운으로 生하고 죽는 것일 뿐 마음은 없는 것이라 한다면 기운이 신령하게 아는것이 있는가 없는가? 만약 있다면 공기든지 전기電氣든지 또는 에너지든지 어떤 기운이 모이는 곳이면 반드시 생명체가 生할 것이며 만일 영지靈智가 없다면 어찌 무정無情한 기운이 영지가 있는 생명체를 낳겠느냐?』
그 사람이 다시 묻기를
『나무가 불에 타면 연기는 날아가고 덩어리는 불에 사라져서 재가되고 마는 것과같이 사람이 죽은뒤에 무엇이 남습니까?』
용성이 답하기를
『우리의 본원각성本願覺性ㆍ광명체성과 아뢰야식이 천지ㆍ허공 법계를 가득히 감싸고 무량한 세월에 세계와 국토를 성립하는 차별과 세계를 형용하는 차별과 세계의 주겁住劫차별과 세계의 괴공壞空 차별과 일체 유정동물의 형형색색과 일체 유정동물의 음성차별과 무엇이든지 광명체성光明體性 아뢰야식 속에 낱낱이 인印쳐두되 그 성품은 바다와 같이 조금도 늘거나 줄지 않으니 그대가 이 불가사이한 이치를 아느가? 그대는 축음기를 보았는가? 축음기는 음파를 기록한 레코드에 홈으로부터 같은 소리를 재생하지만 육안으로는 그 소리의 행적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광명체성 가운데에도 우주만상 일체를 印 쳐둠에 미래가 다하도록 머물러 추호도 없어지지않는 것을 그대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대가 큰 소리를 내든지 적은 소리를 낼지라도 그 음성은 허공의 진성을 쫓아 전파가되어 순식간에 우주허공과 시방세계十方法界에 전파가 가득하니 그 음파가 가득함을 따라서 허공과 법계에 가득한 전성電性으로 붙어 어뢰야식장阿賴耶識藏과 대각본원성大覺本源性에 형적없는 印을 쳐서 그 말소리의 본체가 미래겁을 다 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말소리만 그런것이 아니고 무시겁으로 부터 미래겁이 다 하도록 일체의 유정ㆍ무정 중생의 모든 소리가 분명하여 三世에 끊임이 없고 시방에 걸림이 없다. 그것은 과학시대인 오늘 더욱 증명되고 있다. 어디든지 전파를따라 라디오에 점촉되면 원근없이 소라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시방에 가득하지만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소리만 그런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사람이 아무도없는 깊은 방에서 가만히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만 이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 즉시 모든 성현들은 분명하게 알게된다. 그러므로 세계국토의 형상이나 차별등 일체 유정중생을 막론하고 법계본원法界本源에 印쳐두어 미래겁이 다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
또 용성이 말하기를
『보아라 ! 전기불이 오니 그 불이 어디서 왔으며, 또 가니 어디로 가는냐? 올 때에도 형적없이 오고 갈 때에도 형적없이가니 이것이 인연으로 모임을 따라나고, 인연 흩어짐을 따라 없어지니 그 전성과 전기가 허공계와 법계에 가득히 충만하여 불생불멸한 것을 아느냐? 흙과 물과 불과 바람 등 모든 만물이 모두죽고사는 것이나 그들이 모두 죽지않고 항상 우주와 허공계에 가득한 것을 아느냐? 사람의 몸은 물거품과같고, 마음은 바다물과 같아서 물거품은 없어지더라도 물은 항상있는 것과같이 몸은 없다가 다시 있기도하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아느냐? 허공의 구름은 항상 일어나고 소멸하지만 허공은 언제든지 텅비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유심唯心ㆍ유물唯物이 둘이아니고 하나임을 아느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곧 금강계金剛界라 하시니 금강은 곧 생멸이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물ㆍ유심이 둘이아니다. 비유하면 바닷물이 깨끗하니 그 물이 맑은 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물에는 반드시 짠 맛이 있다. 허공이 텅 비어있으니 빈 허공으로만 생각하느냐. 그 허공의 본원本源에는 대각성大覺性이 있다. 그대는 무엇이든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성품은 비록 형상이 있는 물건에도 포함되어 있짐만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기 어렵다.
불은 뜨겁고 고추는 맵다. 나무의 결은 부드러운 것, 강한것이 있듯이 만물은 모두 형형색색의 자기성질을 가지고있다. 이런 모양있는 물질도 그대로두고는 그 성질을 파악할 수 없다. 일페 만물이 형체없는 기운이 불어나고, 형체없는 기운은 형체없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업종業種으로 불어나며 형체없는 아뢰야식은 일체 명상(名相:귀에 들리는 것을 명, 눈에보아는 것을 상이라함.)이 없는 대원각성大圓覺性으로 불어 난 것이니 대원각성은 곧 우주의 진리는 말길이 끊어졌음으로 말할 수 없고(言語道斷), 마음으로 미칠 것이 아니므로 생각이 멸하여(心行處滅) 일체명상一切名相이 없으니 空하고 有한 것으로 말 할 수 없다.
우리가 본래깨칠 성품이 분명히 있짐만 알지못하는 것은 전기와 전성이 우주에 가득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과같다. 또 비유하면 허공에서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며, 바람이 불다가 쉬며, 산하대지만물이 허공을 의지하여 있으면서 온갖 변화를 일으키지만 허공은 언제든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비유하면 바닷물이 움직여 파도가되니 물이 돋 파도요, 파도가 돋 물이다. 그러므로 물과 파도가 곧 둘이아닌것 ㄱ같아서 마음밖에 깨달음覺이 없고 깨달음 밖에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삼계의 만법萬法이 유심唯心ㆍ유식唯識이라, 유심唯心ㆍ유물唯物을 둘로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