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6, 2012

만행 나의 도반 세번째 이야기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명공스님

명공스님 역시 재미있고 특별한 스님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소련에서 태어났다. 소련에서 아주 유명한 생물학박사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명문인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 그 나라에서 일반 사람은 만질 수 없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학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는 일단 모스크 바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만 하면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매번 훌륭한 것이어서 그는 아주 잘 나가는 생물학자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거수일투족을 옥죄는 시스템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는 나은, 아니 정치적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부패와 강압만이 가득한 곳이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동료학자들은 그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제발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사회에 순응해 살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연구원에서 쫓겨나 국내 추방을 당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황량한 버려져 텐트를 치고 사냥을 하는 원시인과도 같은 삶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소련 정부는 능력 있는 과학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 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공 들여 연구한 생산물들이 국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 비판적이다 싶은 과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격리를 했다.
춥고 외로운 곳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명공스님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옮겨 살게 되었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그즈음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방정책을 펴 소련의 빗장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때마춰 마침 큰스님의 강연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개방 분위기와 전통적으로 불교에 대해서 만큼은 상대적인 관대함을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 때문에 큰스님은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법문을 하셨고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 젠센터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명공스님은 큰스님을 만나자마자 큰 감명을 받고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큰스님을 만났을 때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큰스님은 간단한 대답으로 그의 복잡한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는 그날로 페테르부르크 젠센터로 가서 수행을 시작했다. 경전도 열심히보고 공부도 많아하고 숭산스님의 책도 많이 읽었다.
그는 소련 체재가 무너진 뒤 1996년에 서울 화계사로 와서 동안거를 시작하면서 출가를 했다. 당시 50대 후반이었는데 행자생활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화계사에서 아주 유명했다. 특히 작년 화계사에 수해가 났을 때 나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큰 바위를 옮기고 더러워진 가재도구를 쉬지 않고 정리하는 그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했다.
화계사 신도들은 그를 아주 존경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소련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이빨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신도들이 그가 일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이빨까지 다 해줄 정도였다.
러시아 민요와 비슷하다며 틈날 때마다 한국 뽕짝을 듣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이다.
만행 치린스님
이분은 싱가포르 출신인 중국계 스님이다. 그는 최근 3년동안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치린스님은 나의사제舍弟 이지만 나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없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스님이 되기 전에 싱가포르에서 스쿠터를 몰고 다니며 안다닌 데가 없을 만큼 자유분망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은 허무감과 삶에대한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처음에 점한 불교는 중국 불교로 경전도 많이 읽었고 예불도 직접 주도하면서 열심히 절에 다녔다. 그러다 1996년 싱가포르 젠센터에서 큰스님을 만나 큰스님 밑에서 출가를 했다. 그리고는 아예 한국으로 와 살고 있다. 그는 아주 순수하며 온화한 마음을 가졌다.
또 차茶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다. 어떤 차든지 한 모금만 마시면 이 차가 어느 나라 것인지는 물론 차의 성분이 무엇이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금2방 알아차린다. 심지어 찻잎을 언제 어느 철에 땃는지 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니, 스님 언제 그렇게 차에 대해 연구를 하셨어요?” 하고 물으면 그는 하하하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태어나면서부터 차를 마셨으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차린스님은 앞으로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 전역에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알릴 스님이 될 것이다.
만행 도관스님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하고 싶은 스님은 화계사의 도관스님이다. 그는 한국인 스님이다. 내가 감히 한국인 스님들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몰라 여러 번 고민했지만 개인적으로 도관스님께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마지막으로 적기로 했다.
그는 진정한 수행자다. 화계사 총무 스님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면서도 매일 참선과 수행을 빼놓지 않는 수님이다. 나는 도관스님의 삶을 보면서 저런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많은 스님들이 되도록 신도들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신도들과 수행을 같이하고 싶어하지 않는 스님들도 보았다. 그러나 도관스님은 매일 하는 모든 수행을 신도들과 그리고 다른 스님들과 항상 나누려 하신다.
그는 지난 3년동안 화계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해온 3천배 행사를 빠지지 않고 지도하신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매달 3천배 행사 때마다 화계사에는 3백여 명이 몰려드는데 도관스님은 몸이 아프건 말건 일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매달 거르지 않고 3천 배.수행을 하곤 하는데 병이 났을 때도 신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천 배를 계속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곤 했다.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50분 절하고 10분 귀는 식으로 진행되는 3천 배, 도관스님은 그 10분 쉬는 시간에도 온전히 당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고 신도들 곁으로 간다. 그러면서 힘들지는 않는지 염려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들을 격려한다
모든 일상을 수행과 접목시키려는 그의 삶이야말로 참다운 수행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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