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5, 2012

만행 숭산 큰스님

만행 숭산 큰스님

숭산 행원 큰스님은 1927년 평양남도 순천에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건축가였다. 넓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손꼽히는 부자였다. 큰스님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으로 매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민에 대한 통치와 억압정책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은 일본인 이였고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일본 어린이들은 한국 어린이들보다 모든면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1944년 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다. 거기서 일본군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하여 단파 라디오를 만드는 놀라운 솜씨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집에서 돈 5백 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주 국경선 지대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던 순찰대에게 들키고 말아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해방을 맞았다.

큰스님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와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당시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찬반도의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 남한과 북한사이의 모든 의사소통과 왕래가 어렵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6ㆍ25로 분단이 영구화되면서 큰스님도 북한에 계시던 부모님과 연락이 두절되어 다시는 부모님을 뵐 수 없게 되었다.
대학시절은 그에게 격변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기였다.
소년시절 그는 일본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했었다. 당시에는 대항해야 할 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모든상황이 불분명하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남한의 공산주의 당원들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남북한 모두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남북한은 갈등이 격화되어 동족간에 6ㆍ25라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큰스님은 이 같은 격동의 현장을 지나오면서 정치적인 활동이나 학문적인 연구가 조국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책을 파고들었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마침 그때 친구 한 사람이 《금강경》한 권을 선물해주었다. 큰스님은 그 책을 읽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것은 곧 지나가는 것이다. 만일 지니가는 모든것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당신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는순간 큰스님은 마음으로부터 모든혼란과 갈등을 씻어낼 방도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불교경전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 큰스님은 1948년 10월 마곡사라는 절에서 계를 받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수행뿐이라는 생각에 가득찼던 큰스님은 계를 받은지 10일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이라는 곳에서 1백 일동안의 은둔 수련을 하였다. 그는 하루에 20시간 동안 “신묘장구 대다리니”를 암송하고 식사로는 솔잎가루만 먹으며 지냈다.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두시간씩 모두 네 시간만 자면서 혹독하게 수행했다. 때로는 얼음물에 알몸으로 들어가 몇 시간씩 견디면서 배고품과 잠의 유혹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의심과 번민이 엄습해왔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지금이라도 조용한 마을의 작은 절로 내려가서 일본승려들처럼 결혼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쌋다 풀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일은 떠나야지, 내일은 떠나야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이내 머리가 맑아져 그는 다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행 50일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매우 약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매일 밤 무서운 환상이 나타났다. 호랑이와 악마들이 그의 앞에 서서 울부짖고, 귀신들이 나타나 그를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켜댔다. 매일 밤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렸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무처님이 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80일이 끝나갈 무렵 스님은 몸과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살갗도 솔잎처럼 파랗게 변했다.
드디어 마지막 1백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두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자신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깨달았다. 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고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위로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圓覺山下非今路
배낭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背囊行客非古人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濯濯履聲貫古今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可可鳥聲飛上樹,
그 후 선사는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선사를 만났다. 고봉선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 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선사로부터 점검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선사 앞으로 간 숭산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하면서 목탁을 디밀었다. 이물음에 고봉선사는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합니까?”
고봉선사가 말하였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기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숭산스님은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될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다.
고봉선사는 “모르면 의심 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수행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해 봅과 여름동안에 숭산스님은 행선(行禪, 각처로 돌아다니며 선을 닦는 일)을 하였다. 가을이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100일간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산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 왔따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 하는 소문이 쫙 퍼졌다.
셋째 날에 그는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 밖에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선사의 방 앞 댓돌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그는 붙잡히게 되었다.
다음날 그느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았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스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비구니들은 그르 미워 했지만) 스님은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비구니 큰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했느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숭산스님을 꾸짖었다. 그때 숭산스님은 웃으며 “이 세상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선사였다. 숭산스님은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잿밤에 삼세제불(과거 ㆍ현재 ㆍ 미래에 나타나는 모든 부처)를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선사는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선사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보았다. 그런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다.
숭산스님이 말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선사가 웃으며 “아하!”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하였다. 드디어 춘성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선사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숭산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채 고봉선사의 절을 찾아갔다. 그가 고봉선사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녘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냐?”하고 고봉선사가 말했다.
숭산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주십시요.”
이 말에 고봉선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선사의 손을 치우고 장판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이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선사가 빙긋이 웃고 말했다.
“나쁘진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다만 몇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선사는 1천7백가지 공안중 어려운 것을 골라물었는데, 숭산스님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 이를 본 고봉선사가 말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였다. 얼굴이 벌게져서 또 다른 “如如한” 답을 말했다. 고봉선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못한 숭산스님은 화가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 ㆍ 금봉 ㆍ 금오 선사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하라.”
50여분간 고봉선사와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했다. 그때 감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卽如’의 답인 것이었다.
고봉선사는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1949년 1월 25일,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이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고봉선사가 주었던 최초의 傳法아었다.
전법식이 끝나고 고봉선사는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백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큰스님은 이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왜곡시켜놓은 한국의 불교전통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조계종의 총무원 부장을 지내면서 조계종의 개혁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러는 중에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 창설된 선 명상센터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정진하고있는 보문사를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다섯개의 절에서 참선지도자로 초빙되었다.
1966년, 큰스님은 일본에 건너간다. 그곳에서 불교와 종교의 해악에대한 북한의 선전에 의하여 끊임없이 현혹되며 정신적 안내자 없이 생활하고있는 재일교포에게 종교적인 구심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위하여 동경에 절을 건립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972년, 일본에서의 포교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될 즈음, 미국에서 참선에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더군다나 자유로운 정신적 토양위에서 히피들도 많이 생기고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미국이야말로 참선불교를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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