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31, 2012

한국인의 홧병

현정일 칼럼 한국인의 홧병 2

홧병을 앓고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랜 세월동안 억눌러온 억울함이나 분노, 화 등을 공통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힘들게 살아왔는가를 전문가에게 충분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또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많은 스트레스도 있는데 전형적으로 잘못된 두 가지 인간관계 유형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려 무조건 참는다는 타입과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타입 두 가지다. 나 스스로 바뀌기를 노력하지않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애쓰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렇다고 무조간 내가 참는다는 것은 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심리적인 증상과 스트레스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한다면 자신 스스로 건강하게 적응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가슴앓이 홧병을 예밯하기 위해서는 가슴의 통증을 유발하는 위산의 역류현상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동맥경화증의 원인인 담배나 술을 끊고, 고혈압과 당뇨, 고지혈과 심장병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ㅇ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규칙적인 식습관이다. 아침을 먹지않고 점심은 대충먹고 저녁에 폭식을 하는것이 가장 나쁜 식습관이다.

특히 밤늦게까지 술과 안주를 먹고 그대로 자면 위산의 역류현상은 더 빈번하고 강력하게 나타난다. 담배는 위산의 분비를 증가시키고 위장관의 운동을 저하시키며 하부식도 괄약근을 떨어뜨려 위산역류를 악화시킨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위장과 운동을 활성화시켜 위장을 튼튼하게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과가있다. 언제나 골고루 알맞게 제 때 식사하는 습관과 규칙적인 운동이 모든 질환을 예방하는데 기본이 된다. 는 것을 반듯이 기억해야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도 편하고 남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점을 찾기위한 노력도 해야한다. 다음에 말씀드리는 증상 중에서 5가지 이상이 자신의 증상과 같다고 생각이 든다면 화병의 가능성이 있다.

1. 밤에 잠을 못자고 자주 깨거나 자고나도 개운하지 않아서 멍하다.

2. 입맛이 없다.

3. 예민하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난다.

4. 머리가 아프다.

5. 소화가 잘 안된다.

6. 숨찬 기운이 올라오거나 숨이차다.

7. 악몽을 꾼다.

8. 손이 뻣뻣하고 굳어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9. 심장이 멎을 것 같다.

10. 화가나면 얼굴에 열이 오르거나 온 몸에 열이나면서 발끝까지 끄겁기도 하다.

11. 가슴이 두군거리거나 벌렁거린다.

12. 화가 나면서 식은 땀이 난다.

13. 가슴에 모호하게 통증이 있다.

14. 내 마음을 뜻대로 조절할 수 없다.

15.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다.

16. 배에 가스가 차 있는것 같다.

17. 명치끝에 돌덩이가 뭉쳐있는 것 같다.

18. 정신이 깜빡할 때가 있으면서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19. 혓 바늘이 돋고 음식을 삼키기 어렵다.

20. 갑자기 불안할 때가 있다.

21. 아랫배가 고추가루 뿌려진 듯 따갑고 아프다.

22. 얼굴이 따갑다.

23. 기운이 쭉 빠지고 힘이 없다.

24. 목안에 뭔가 가 꽉 차 있거나 걸려있는 것 같다.

이 중에서 5가지이상이라면 홧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현정일 한의원 전화 213 386 3367

현정일 칼럼 웃음의 효과 3

현정일 칼럼 웃음의 효과 3
오늘은 웃음요법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례를 말씀드린다.
노만 커즌스라는 사람은 경직성 척추염에 걸려서 뼈 마디마디에 염증이생기고 손가락이 굽혀지지않는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현대의학으로서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부정적인 사고나 감정은 육체에 화학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부신호르몬을 마르게해서 많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 웃음요법을 실시해 보기로 했다.

진통제와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잘 수 조차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한 상태였는데 10분정도 폭소를 터트린 후에는 2시간 전도 편안하게 잘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모이면 33배 더 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들을 초청해서 같이 웃었다.

웃음요법의 '자가 치료'를 통해 8일 후에는 엄지손가락이 통증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통증없이 테니스나 골프를 칠수있게 되었고 승마도 즐겼으며 손을 떨지않고도 카메라의 샤터를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구 소려의 반체제 인사인 사란스키도 웃음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를 체험한 사람이다. 사란스키는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9년동안이나 지냈고 그 중에 16개월동안은 사형선고를 받고 독방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소련비밀경찰에게 총살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괴롭힘을 당했다.

이런 인생의 가장 어두운 골방에서 그가 발견한 유일한 무기가 바로 웃음이었다. 자유로울 때 유머는 하나의 사치스러운 것이짐만 감옥에서는 유일한 무기다. 그들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순간 당신은 자유롭다고 그는 말했다.

크리스틴이란 여성은 30살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의 어머니도 유방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크리스틴은 절망과 두려움속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은지 4주일이 되던 날 그는 한밤중에 일어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낮에 찾아온 친구와 실컷 웃은 덕분에 몸과 마음이 편안해 진 것이다. 수술 뒤 이웃들이 따뜻하게 대해줬지만 크리스틴은 웃어본 적이없었다.

그 때부터 그는 웃음과 유머로 암을 이겨내기로 했다.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화학요법과 살에 물집이 생기는 방사선 요법을 웃음욥법으로 견뎌내고 끝내 암을 물리쳤다. 암 환자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항암주사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스트레스는 면역체계를 무너뜨리지만 편하고 맑은 마음은 면역체계를 강하게 해준다.

편하고 밝은 마음이 좋은 치료방법과 어우러지면 암도 물리칠 수 있게 된다.
크리스틴은 현재 미네소타주 에디나에서 암클럽을 운영하면서 웃음과 유머로 암을 이겨내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웃게 해주는 유머는 사치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역동적인 수단이다. 위험아래서 유머는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고 가장 나중에 다시 찾는 특성이다.

유머감각이없는 사람은 스프링없는 마차와 같다.
길위의 모든 조약돌마다 삐걱거린다고 헨리화드 비쳐는 말했다. 윌리엄 섹익스피어는 그대의 마음을 웃음과 기쁨으로 감싸라. 그러면 1천 해로움을 막아주고 생명을 연장시켜 줄 것이다 라고 했다.
진정 건강을 위한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건강칼럼 효소로 비우고, 효소를 채우고

건강칼럽

효소로 비우고, 효소로 채우고

황성주 암면역전문의, 통합의학자, 사랑의 클리닉 원장

멋진 자동차에 최고급 기름을 가득 채우고, 깔끔하게 세차까지 마친 자동차가 있다 하자. 만일 배터리가 방전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것이 완벽해도 시동은 걸리지 않는다. 이동수단이라는 자동차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

인체에서 마치 자동차의 배터리와 비슷한 것이 바로 효소이다. 어떤 사람이 6대 영양소와 물을 잘 차려먹고, 모든 장기가 건강하다고 해도, 만일 효소가 없다면 움직이는 것은 물론 생명유지자체가 불가능하다. 효소가 없다면 우리 몸은 그저 섭취한 음식을 저장해둔 '저장탱크'일 뿐이다. 그렇다면 효소는 정확히 무엇이고, 왜 중요할까?

효소는 물질 대사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반응을 촉매하는 복합단백질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반드시 에너지를 만드는 정교하고 복잡한 대사작용을 거치게 되는데, 이 대사 단계마다 각기 다양한 효소들이 작용한다. 흔히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용되나, 반응 후 촉매 자신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체 내 효소는 매일 땀과 소변, 대변, 타액 등과 함께 줄어들고 있고, 특히 질병이나 노화등에 의해 급격히 고갈된다. 그래서 효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 몸에 충분한 효소를 확보하는 것이 건강유지에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효소(酵素, Enzyme)는 그 기능과 공급원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학창시절부터 배워 온 소화효소(Digestive enzymes)'.그리고 자연식품에 존재하는 '식품효소(Food enzymes)가 그것이다.

소화효소는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데 이용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반면 대사효소는 소화효소와같이 인체내에 존재하지만 소화외의 다양한 기능을 하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동맥 내에만 해도 98개의 효소가 작용하고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심장, 뇌, 폐, 신장 등에서도 또 다른 작용을 하는 수천 종류의 대사효소등이 발견되었다.

윌스타터 박사 Dr. WILLSTATTER 에 의하면, 백혈구 내에도 아밀라제가 존재할 뿐 아니라, 췌장에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효소가 백혈구내에 있어 이들을 통해 이물질을 제거하고 면역기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식품효소'는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음식에 존재한다. 우리몸은 외부로부터의 효소를 많이 섭취하면 섭취할수록 췌장에서 배출되거나 다른 대사과정에서 일하는 내부의 효소들을 절약할 수 있다. 과거에는 효소가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외부로부터 섭취된 효소는 위에서 불활성이되어 기대하는 기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위산에 의해 잠시 불활성이 되였다가 소장의 알칼리 조건에서 다시 활성을 희복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 효소에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미국에서는 '효소치료 Enzyme Therapy' 를 통해 좋은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고, 일반인들 역시 효소가 많은 음식을 섭취하고자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주변에는 효소식품에 대해 잘못된 상식도 많다.

가장흔한 것이 '발효 = 효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醱酵, fermentation 는 포도당같이 에너지를 내는 분자들이 효소에 의해 분해가 촉진되어 에너지가생성되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세포에 그러한 효소가 존재한다. 디시말해 발효는 효소에의해 일어난 것이지 발효와 효소가 같은 것이 아니며, 특히 발효했다고 해서 무조건 효소가 많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효소를 통해 섭취한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내고 다시 소모된 효소를 채워주는 식습관, 바로 이러한 식습관이 우리의 삶을 좀 더 건강하고 젊게, 그리고 더욱 활력있게 해 줄 것이다.

Saturday, March 24, 2012

불교의 목적 숭산 큰스님 가르침

불교의 목적 • 佛敎 目的 The Purposes of Buddhism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다 上求 菩提 First attain enlightenment.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한다. 下化 衆生 then instruct all beings.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걸핏하면 나, 나, 하지만 실상 이‘나’라는 것이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사는가? 돈? 아니면 사랑? 혹은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면 내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소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먹고 자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아니며, 다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인도에서 태어난 부처님은 2천5백여 년 전, 싯다르타 고타마라고 불리던 왕자였다. 왕궁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곧 이어받을 왕위까지,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진정한 자기자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끝 모를 의문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란 결국 병들어 늙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허무감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그 당시 인도의 지배계층들은 브라만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가르침은 이 젊은 왕자의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 나왔는가? 왜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는가? 왜 병마에 시달리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가?”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왕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왕궁을 떠났다. 긴 머리를 다 깎고 수행자가 되어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화두를 안고 열심히 수행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공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 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른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명의 눈을 떠 本性을 발견 한 것이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世世生生 거듭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른다.
당시 부처님이 얻었던 이 깨달음은 아주 높은 경지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눈에는 무지 속에서 욕망과 분노를 쫓으면서 나고 병들고 늙고 죽으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순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 아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줄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을지도 모르고, 이교도라 하여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주 맑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가르침을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상태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한한 열락의 자리인 부리수나무를 박차고 나와 인간들의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온 것이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세계를 떠나 시끄럽고 더럽고 경쟁과 투쟁이 가득한 인간의 세상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속세의 왕위를 버렸듯 다시 한번 조용하고 안락한 열반의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 大慈大悲’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역사적 聖人의 가르침만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인가? ‘깨운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부처, 즉 ‘붓다(Buddha)’라는 말은 우리가 본성품을 깨달아 고통의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
자, 그럼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당신은 누구인가?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간절한 삶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책이나 지식은 답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나 하느님(하나님)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오직 모를 뿐’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답을 찾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들은 결국 ‘주체 종교’와 ‘객체 종교’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주체 종교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고, 객체 종교란 바깥의 초월적인 힘, 즉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통제하는 어떤 강력한 힘, 즉 신을 믿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외부의 힘 혹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믿으면 뭔가를, 이를테면 행복이나 특별한 에너지,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명상 수행도 이를 방편으로 이용한다. 어쨌든 하나되고 싶은 어떤 대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객체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주체 종교이다. 자기 자신, 내가 이미 갖고 있는 本性品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我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언제 죽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을 절실하게 파고들면 모든 생각은 완벽히 끊어진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며,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것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하여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책을 통한 배움이 아니며, 어던 절대자 혹은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도 안는다. 불교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서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불교 역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참 나를 깨닫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참 나를 얻을 때 우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실용, 實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그러나 이 두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안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佛國土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8만 4천 경전이나 성경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이해와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눈감고 죽는 순간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낫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보살도(菩薩道), 그리고 위대한 자비는, 다름 아닌 우리마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Friday, March 23,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반
하긴 요즘에는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없다. 동물들은 아주 단순하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하지만 인간은 만족을 모른다. 배가 아무리 불러도 또 다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 옛날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동물을 잡아먹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재미를 위해 혹은 몸에 걸치고 다닐 장신구들을 만들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라. 물고기가 걸려 올라오면 좋다고 박수를 치고 서로 칭찬을 해주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물고기의 얼굴을 한번 자세히 보라 살려고 파닥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물고기들은 웃어대는 인간들 옆에서 “물 어디 있어. 물 어디 있어”라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한줌 연민의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겠는가.
알다시피 요즘 이 세계에는 눈만 뜨면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기상이변, 환경오염, 식량부족 문제…… 따지고 보면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개, 고양이, 사자, 뱀, 그 어떤 동물들도 인간만큼 많은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사고를 오직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 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일부 종교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불교에서는 ‘종말’이라기보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본다. 마치 과일처럼 말이다. 과일이 열리려면 처음에 가지에서 꽃이 핀 후, 꽃에서 싹이 나고 점점 열매가 되어 익는다. 열매는 처음엔 보통 푸른색을 띠지만 점점 아름다운 색으로 변한다. 햇빛을 받는 쪽의 색채가 먼저 변하고 시간이 더 흐르면 열매 전체가 완전히 아름다운 빛깔이 된다. 거기다 향긋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이제 다 익은 것이다.
무슨 과일이든지 꽃에서 열매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러 달에 걸쳐 뿌리에서 뻗어나온 에너지는 잎으로 모아지고 다시 열매로 이동한다. 그러고 차차 무르익는다. 재미있는 것은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려 맺힌 열매가 일단 완전히 익으면 그 다음 변화는 매우 빨리 진행 된다는 것이다. 단 며칠 새에 향기와 빛깔이 사라지고 열매는 썩기 시작한다. 반점이 생기고 며칠이 지나면 아예 썩어 버려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열매가 익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썩기 시작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이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인간의 역사는 한쪽만 햇빛을 받은 과일과 같은 형상이었다. 햇빛을 먼저 받은 쪽이 자본주의이고 나머지 부분이 공산주의이다.
과일은 이제 한 가지 색깔로 변했다. 공산주의라는 빛깔이 없어지고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색깔만을 가지게 됐으며, 인간의 에너지도 모조리 이곳으로만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성숙의 단계를 지난 과일이 썩으면서 반점이 생기듯 자본주의 세상 곳곳에 반점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중동, 르완다, 유고, 북한,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국가간, 민족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념 대립이 끝났는데도 군대는 오히려 늘어났고 대량 살상을 위해 생산된 무기들이 매일매일 거래되고 있다.
과일이 익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익기 시작한 과일은 빨리 썩는다. 어떤 과일도 썩으면 먹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라는 과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미래는 없는가? 썩으면 그만인가?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말세’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썩어가는 과일 안에 들어있는 ‘씨’이다. 씨는 이미 과일 안에 들어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원천이다. ‘씨’란 달리 말하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루빨리 무지에서 잠을 깨어 우리 본래의 ‘씨’인 우리의 본 성품을 발견해야 한다. 이 ‘씨’야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원천이다.
부처님은 본성을 찾는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최초의 인물이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올바른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변호사, 의사, 택시기사, 학생 혹은 누구누구의 남편, 아내, 딸, 아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 바깥의 모습일 뿐이다.
이제 우리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참 삶을 살아야 한다. 진정한 삶이란 바로 대자대비의 삶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중생들까지도 고통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본성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죽기 전에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올바른 삶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책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라도 우리 자신의 본성을 모른다면 소용이 없다. 본성을 찾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수행이다.
바른 수행은 우리자신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이 참선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질문을 깊이 하게 되면 모든 생각이 끊어지고 생각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하여 ‘오직 모를 뿐’을 깨달아 우리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라야만 우리는 우리자신을 찾을 수 있고 다른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눈뜸’이다.
이 책의 제목을 왜 ‘선의 나침반’이라고 지었는가? 부처님은 우리 인생이 ‘苦海’라고 가르쳤다. 모든 사람들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나고, 우리의 욕망과 집착 때문에 우리는 고해에 빠지기를 반복한다. 산스크리트로 이것을 ‘삼사라(Samsara, 輪回)’라고 부른다. 돌고 돌고 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지혜(projna)의 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배에는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나침반이 필요하다.
배를 타고 미국LA에서 한국부산으로 간다고 가정해보자. 충분한 옷, 식량, 약도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 방향이 확실치 않으면 바다 한가운데서 떠돌아야 한다 어쩌면 길을 잃어 영원히 헤맬지도 모른다. 나침반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배, 지도, 기상조건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제 방향을 찾아갈 수 없다. 지혜의 배에 필요한 나침반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찾고 싶다면 참선수행을 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깊이 하면 나침반을 발견할 수 있다. 참선 수행에도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다. 티베트식도 있고 중국식도 있고 한국식도 있고 일본식, 비파사나 식도 있다. 또한 소승불교의 언어로, 대승불교의 언어로, 선의 언어로 혹은 중국말로, 산스크리트로, 한국말로, 일본말로, 미국말로, 폴란드 말로도 나와 있다. 어떤 것이 가장 옳고 명확한 가르침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하나의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3대 주요 영역으로 나눠 설명한 이 책은 진리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만약 누군가 소승불교의 가르침이야말로 제일이다라고 한다면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또 대승불교가 최고다라고 하는 순간 본래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보다 더 큰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다. ‘선’도 마찬가지다. 선이야말로 최고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 화살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이 큰 의문을 어떻게 깊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슴속 깊이 이 질문을 품는다면 ‘오직 모를 뿐’이라는 질문에 도달할 것이다. 이러한 생태에서는 어떤 말이나 단어가 필요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얻으면 소승불교를 얻은 것이고, 대승불교를 얻은 것이고, 선을 얻은 것이다.
동양에는 ‘이열치열 이한치한 (以熱治熱 以寒治寒)’이라는 오랜 속담이 있다. 말과 생각이 만든 병은 일단 말과 생각으로 된 약을 먹어야 한다. 내가 《선의 나침판》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 책에 나와있는 말과 단어를 참고하되 이에 집착하지 않고 참선수행을 열심히 하여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한다면, 모든 생각을 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길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말과 단어에 집착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당신을 지옥에 빠뜨릴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되 부디 말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 또 다음 생 쉬지 않고 계속 정진, 또 전진, 수행하고 마침내 우주의 대 진리를 찾아 고통 속에서 헤매는 많은 중생들을 구해내기를 바란다
2001년 3월 1일 서울 삼각산 화계사 조실.(祖室)
숭산 행원 합장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禪의 나침반 The Zen of Compass

숭산 행원 대선사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제의 압제아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불안한 사회를 보며 자신의 정치적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참된 진리를 구하기 위해 1947년, 충남 마곡사로 출가하여 行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9년 예산 수덕사에서 당시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던 고붕 대선사로부터 傳法戒와 嵩山이라는 幢號를 받아 이 법맥의 78대 祖師가 되었다. 당시 고봉스님은 ‘너의 法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66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외 포교에 앞장서 1972년 미국에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32개국에 120여 개 선원(Zen Center) ,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生佛로 추앙받은 숭산스님은 만년까지 세계를 누비다 04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를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래도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진리를 발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누군가 배가 고픈 사람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순간순간의 상황과 관계,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는 마음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진리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부처님과 법을 통해 순간순간 바른 삶을 갈고 닦으십시오

우리는 자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은 참으로 단순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너무도 복잡해졌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총인구는 20억 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불과 50여 년이 지난 지금 총인구는 60억 명에 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30년 안에 30억 인구가 새로 추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구가 갑자기 늘면 사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진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고 생각과 삶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기 위한 새로운 방식과 무기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기, 물, 풀, 나무 등 이 땅의 모든 것들에게 상처를 주고있다. 숲을 파괴하고 녹지를 없애고 물과 공기와 땅을 오염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자유’를 원한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인간이야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유일한 독재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지만 사실 인간만큼 어리석은 동물도 없다. 스스로에게 한번 이렇게 물어보자. 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는 어디로 가는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당신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이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동물이라고 자부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작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개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잘 안다.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일을 ‘오직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과 바른 길을 알지 못한다.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그러면서 늙고 죽어간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우리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삶의 고통에서부터 벗어나려면 먼저 이 세상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모든 것은 우리마음에서 생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원인과 조건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결과에서 온다고 했다.
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일까?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왜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양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제 2차 대전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다. 동양사람들은 1년 가야 한두 번 명절 같은 날이나 겨우 고기구경을 했지만,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기를 먹을 때가 있다. 이에 비하면 서양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과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옛날에는 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숲에서 사냥한 동물을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과 함께 먹곤 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의식(에너지)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그 고기를 먹는 인간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때 형성된 관계, 즉 당시 그들의 업(Karma)은 간단했다.
활이나 창에 찔려 죽게 된 동물들은 죽으면서 자신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 나쁜 사람이 지금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아마도 다음 생애에서는 내가 그를 잡아먹으리라.” 당시에는 오직 한 사람과 한 동물 사이의 관계로 끝나게 되므로 비교적 단순한 인과의 고리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동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도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만 동물들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 세계에서 미일 도살되고 있다. 공장에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멀리 떨어져 있는 동물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도 있다. 느닷없이 살해된 동물들의 의식(Consciousness) 역시 육체에서 분리된 채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시 태어날 새로운 몸을 찾게 된다. 어디로 갈지는 그들 자신도 모른다.
그들 중 몇몇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인간으로 환생한 동물이 0.00001퍼센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한편 요즘 사람들 중에는 겉은 인간의 형상이면서도 의식은 동물의 그것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즘 인간들을 자세히 보면 비록 얼굴과 몸은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의식은 온전한 인간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개, 고양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토끼, 소, 돼지, 닭, 사자, 호랑이, 뱀의 의식들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사랑과 자비라는 본래 인간의 본성 대신에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동물적 의식만 있는 것이다.
물론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섞여 있으면 좋지않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족번식을 위해서만 살지, 다른 종족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개는 개만 좋아하지, 고양이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뱀, 사자, 토끼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새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종들끼리만 몰려다니고, 다른 종이 공격해오면 떼거지로 반격한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 세계도 점점 이와 비슷해지고 있다.
오늘날 정치상황도 이와 똑같다. 이 세계에는 정치적, 종교적 신념에 따라 쪼개진 수많은 나라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 군대를 갖고 있고 서로 싸운다. 이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자라면서 점점 총과 폭력에 익숙해진다. 10년이나 20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사랑, 협력, 남을 돕는 마음 같은 인간 본래의 마음대신에, 기회만 나면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다.
1970년대 미국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선원(禪院, Zen Center)에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너무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고, 심지어는 옆에 두고 잘 정도였다.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이번 주 3일 동안 선원에서 먹고 자며 집중 참선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자, 그녀가 말하길 “사랑하는 내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고양이와 함께 있을 개인 방을 내주고 부득이한 경우 선원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이 고양이를 돌보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자, 그녀는 그제야 응낙했다.
수행 첫날, 그녀의 오빠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위독 하시니 급히 병원으로 달려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전화통에 대고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 병문안을 가면 내 사랑스런 고양이들은 누가 돌보죠? 내가 없으면 그들은 죽을지도 몰라요. 고양이는 무척 예민한 동물이예요. 설사 다른 사람이 돌봐준다 하더라도 그 동안 뭐라도 잘못 먹이면 큰일나요
그녀의 오빠는 평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설득도 하지 못하고 그냥 전화를 끊는 눈치였다. 며칠 후 그녀의 이런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애완용 고양이들 중 한 마리가 병이 났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웅크려 있기만 했다. 그녀는 너무 걱정이 됐는지 참선수행도 끊고 수의사들에게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는 아예 아픈 고양이를 데리고 나가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다녔다. 자기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에는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프다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년의 얼굴과 몸은 비록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의식의 일부는 이미 동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툰 대신 고양이와는 아주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인가!

Monday, March 19, 2012

만행 진라의 길 구도의 길 끝편

진리의 길, 구도의 길 지은이의 말
나는 어린시절부터 줄곧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왜 사는 지, 왜 태어났는지, 이 생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더욱 풀리지 않는 의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왜 사람은 죽어야 하는가? 왜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과 함께 내가처한 사회ㆍ문화적 환경속에서 ‘나’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철이 들무렵 텔레비전과 신문의 뉴스를 접하며 왜 다른나라 사람들은 우리처럼 안락하고 안전하게 살지못하는 것일까? 풍요와 기회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데 왜 다른 나라 아이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과 폭력과 싸움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야 할까? 내게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왜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걸 누리고 있는 것일까?
만약 내가 그런 혜택을 누릴만한 그 어떤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고, 다른나라 아이들 역시 그런 불행에 상응하는 어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논리나 합리성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이 생이란 아무의미가 없는 것알지도 모른다.
그 의미 없는 태어남과 의미없는 죽음사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일들 역시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이 새상이란 무엇인가?
많은 종교들이 이러한 질문들에 쉬운 답을 제공했다. 오랫동안 나는 그러한 쉬운 답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종교에서 주는 답이란 결국 ‘무한히 善한 존재가 이 우주를 창조했으나 어떤 무한히 惡한 존재가 이 우주를 파괴해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선과 악의 관념을 믿었다. 신이 이 세상의 선하고 성스러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믿었으며, 악과 괴로움과 고통과 전쟁등은 ‘다른 어떤 외부의 존재’로부터 왔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권의 책만이 절대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비록 우리의 생이 상상하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신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신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가르침을 주시기위해 한편에서는 전쟁과 병과 싸움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아기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아니, 믿기를 바랐으며, 믿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믿을 수가 있었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었던 의문들에 대해 보다 명확한 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한 것도 그를위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원의 모토는 ‘VERITAS’ 이다. ‘진리’라는 뜻이다. 예일대학의 모토는 ‘LUX et VERITAS’이다. ‘빛과 진리’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의 도처에 있다. 건물에도 벽에도, 길에도 씌여있으며 게시판과 학교 버스에도 씌여있다. 교과서에는 물론이고 펜, 샤츠, 바지, 커피잔, 메모장, 모자, 양말, 넥타이, 장갑에도 나타나고, 심지어 속옷에도 씌여있다.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진리’ ‘빛과 진리’.........
나는 공부를 계속하면서 마음속에 갖고있던 질문들이 어떤 답을 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를 나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애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해야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직 진리, 즉 베리타스를 찾기만 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었다. 또 다른 어떤 것에서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면, 그것 여기시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찾는 것의 바깥모양에는 개의치 않았다. 진리를 찾는 일만이 중요했다. 베리타스 를 찾기만을 원했다. 그것을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내가 찾는 것의 바깥모양에는 개의치 않았다. 진리를 찾는 일만 중요했다.
그런던 1987년 어느 날.
예일대 신학대학교에 다니는 개신교 목사인 한 친구가 나에게 책을 한 권 주었다. 《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불교서적이었다. 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89년 겨울.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희색옷을 입은 한 키 작은 한국사람을 만났다. 그는 말했다. 자기는 아주 멀고 조그만 나라 한국의 수도 서울에 있는 ‘화계사’라는 절에서 살고 있다고,
그의 가르침은 나를 완전히 충격에 빠뜨렸다. 그의 가르침은 내가 평생들어온 말 가운데 유일하게 참되고 정직한 말이었다.
그분은 현재 서울 화계사 큰스님이신 숭산 행원 대선사님이시다.
느는 큰스님의 가르침이 진실로 귀하고, 진실로 참된 가르침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나의 전 생을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했다.
이 책은 내가 어떻게 이 같은 진리의 도정을 걸어왔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뉴저지 주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파리, 보스턴,을 경유하여 결국 한국의 절들 ㅡ 서울 화계사, 충남 계룡산 신원사, 그리고 지리산에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 ㅡ 에서 수행하는 삶을 택하기까지 나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책을 내는 일이 주저된다. 수도승이 더군다나 아직 풋내기인 내가 살아온 여정을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건방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 일이 이루어졌다.
지난 봄, 나는 한국의 한 친구와 함께 숭산 큰스님의 영어 법문집인 《선의 나침판》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었다. 내가 출판하고 싶어한 책은 바로 이 책이다. 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나의 스승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책은 너무 방대했다. 그리고 애초에 미국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사가 출판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들었다. 책이 매우 유익하다 할지라도 분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책을내면 출판사로서는 적자를 보게 될 뿐일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말했다. 그런 가운데 한 출판사에서 고맙게도 《선의 나침판》을 출판하겠노라고 제안해왔다. 이와 함께 현재 숭산 큰스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그리고 현재 수많은 서양사람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리고 있는지 나 자신의 삶을 통해 얘기하면 한국불교를 세계화하고 경제위기로 실의에 빠져있는 한국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도반들의 조언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먼저 이 책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나의 스승의 위대한 책인 《선의 나침판》이 내년 하반기중 한국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위해 이일을 했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램이다.
나는 마국인 스님인 내가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의 불교전통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영 이상하고 쑥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이 요즘처럼 미국사회를 교과서나 되듯이 쫓아가려고 하는 마당에 한국인들에게 바깥이 아닌 바로 자신들 안에 위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현재 대단히 많은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단히 많은 외국인들 ㅡ 대부분 교육 수준도 높고 경제적 어려움도 없이자란 중산층 인텔리들이 많다. ㅡ 이 한국에 와서 이 전통을 배운다음, 자기네 나라로 가지고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우선 숭산 행원 대선사님께 한없는 깊은존경과 감사를 표시한다. 또한 계룡산 신원사 주지인 성광스님, 선덕스님과 도관스님을 비롯한 화계사의 모든 위대한 스님들과 신도들, 전남곡성 관음사 지인스님께도 머리숙여 감사한다.
이 책은 허문명씨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더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도반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수없이 많았던 우리의 영어대화를 구술, 변역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에 실었다. 우리는 한국사회, 미국사회는 물론 종교, 사회, 문화, 삶과 죽음 등 모든 것을 같이 이야기했다. 그의 열정적인 작업과 마르지않는 실험정신은 나의 아둔하고 재미없는 삶과 생각들을 훌륭한 솜씨로 다듬어 주었다. 그는 앞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훌륭한 믾은 일을 펜으로 이루어낼 위대한 지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책에서 잘된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친구인 그에의한 것이며, 모든 실수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몫이다.
수덕사 주지이자 서울포교당인 강남구 논현동 무불선원 이사장인 법장스님과 마포구 법화전사 도림 큰스님, 그리고 지난 여름과 가을 이 두 곳 사찰에서 내 강연을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이 책의 집필은 서울 인사동 〈지대방〉이라는 찻집에서 전부 이루어 졌다. 주인 오영순 보살님의 친절한 도움과 후원에 감사한다. 그리고 수년동안 끊임없이 나를 도와주고계신 김영현씨에게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중모 사장님과 정은숙 주간님을 비롯한 〈열람원〉 편집부와 사진작가 김홍회님께도 감사한다.
이 책의 판매를통해 얻은 수익금은 모두 숭산선사의 많은 서양학생들을 통해 한국불교 ㅡ 한국불교의 가르침과 예술적 전통과 문화 ㅡ 를 전세계에 전파하는 일을 지원하는데 쓰일 것이다. 한국의 고대 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일이 다른나라들로 하여금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을 보다 깊이 깨닫게 하는 데 기여하기를,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평화 통일을 앞당기는 데도 기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1999년 10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 현각 합장

Sunday, March 18, 2012

에필로그

에필로그
최근에 동양과 서양사회를 특징짓는 기본적인 가치들에 대해 논쟁이 일고있다. 유명한 싱가포르의 이광요 총리, 말레지아의 마하티르 총리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 서양학자들까지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를 규명하려고 노력한 바 있다.
한때 아시아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지배적이었던 아시아적가치는 최근 아시아 경제위기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마치 곧 쓰레기통에 벌려야 할 폐기물로 전락된 느낌마져든다.
그러나 나는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아주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편에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이 갑자기 불어닥친 경제위기를 두고 자책감과 의기의기소침에 빠져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물론 아시아 나라들의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도 고칠 것들이 많다. 오죽했으면 얼마전 한 일본인 기자가 쓴 한국인 비판이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모든일이 그리하듯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당면한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아야하고 그럴 때 올바른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비판이 지나쳐 자책으로 이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각종 사회문제는 동양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쳐 그들 자신이 갖고있는 엄청난 보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고 5천 년 문화전통을 버리고 싶어하며 전 사회 시스템을 미국 스타일로 바꾸고 싶어한다. 그로벌 스탠다드가 곧 아메리칸 스탠더드로 인식될 정도다.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일이다. 요즘 서양사람들은 자기들 고민의 해결을위한 단서를 동양에서 실마리를 찾고 있는데 말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아시아를 지배해온 서양 군대, 문화, 종교, 금융, 정치적 지배력은 심각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낳고있으며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가 서양보다는 뭔가 뒤쳐졌다고 느끼고 있다. 특히 나는 한국사람들이 이른바 ‘IMF’의 집중포화를 맞은 뒤로는 그들 자신의 문화적 기반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아왓다. 물론 엄정한 자기비판과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에 대한 개방은 언제나 필요하다. 만약 한국인들이 성장하길 원한다면 그들 자신의 사회 문화적 약점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상황을 자세히보면 많은 한국사람들은 자기비판이 지나쳐 자가학대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전도다. 이것은 곧 치명적인 자기파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나의 걱정이다.
신문 방송에서는 한국에 지금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환부가 있는지 들추어내기 바쁘다. 그러면서 해답의 실마리를 서양적 가치에서 찾는듯하다
나는 지니친 서양 따라잡기의 구호들이 한국의 5천 년 문화전통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을 쓰는동안 나는 여러 번 그만두고 싶었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책을 내고 한다는 일이 옳지않은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을 굳게닫고 깊은 산속에서 조용히 살아야하는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책을 내려고 하는지 나 자신조차도 설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왜 내가 스님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는 때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왜 스님이 되었느냐” “왜 하필이면 한국불교를 택하게 되었느냐”고 물어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철과 거리에서, 식당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딫치는데 적어도 열 명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면 으레 내게 와 꽃히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나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고맙긴 하지만 그들의 질문 뒤에는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내가 예일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원한다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갖는다는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 낯선 사람들과 그것도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일이 언뜻 아해가 안 된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럴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이젠 무언가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의무감같은게 있었다. 더구나 작년(98년) 겨울 조계사 사태를 겪으면서 이런 나의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그즈음 지리산 상선암이라는 암자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있어 나는 서울로 돌아와서야 그 소식을 들었는데 얼마나 슬폈는지 모른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뉴욕 타임스〉를 통해 한국의 조계사 사태를 알고있다”고 하시면서 “네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한국불교가 이런 것이냐”고 편지로 물어오셔서 당황하기까지 했다. 무엇이 라고 설명을해야 할지 대답을 못 찾았다.
나는 물론 한국불교를 잘 모른다. 한국을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내 감정이고 어쨋든, 나는 외국인이고 손님이다. 따라서 내가 한국에 대해, 한국불교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건방진 일이고 무례한 일이다.
어떻게 감히 ,내가……..
그러나 나는 그동안 많은 한국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들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정작 손님인 나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땅에 너무 익숙해져서 싫증을 내고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경제위기가 가져다준 그들의 절망은 “한국은 더 이상안 돼” “한국은 가능성이 없어” 하는 자기비하로 이어졌다.
아니, 이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데, 그리고 지금껏 그들이 흘려온 피와 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한꺼번에 헐값에 도맷금으로 평가절하할 수 있을까.
내 비록 푸른 눈을가진 客이지만, 내가 얼마나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큰스님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죽을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린다면 절망과 실의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한가닥 희망이 될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의 산천을 비교적 많이 돌아다녔다. 사찰들도 꽤많이 가보았다. 사찰들 앞에는 예외없이 영어로 된 안내판이 서 있다. 이절은 언제 누가 세웠고 절의 역사는 어떻고 하는 간략한 설명이 들어있다. 그런데 한국의 절들은 하나같이 고난과 파괴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중건되었다.’
‘이 절은 몽고군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이 절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었다.’
이러한 문구들을 읽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다.
어떻게 다른 민족을 한번도 침략하지 않은 이 나라 백성들이 이렇게 외침에 의한고난에 찬 역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들은 어김없이 ‘다시 세워졌다’는 것이다.
파괴와 소실에도 아랑곳없이 절은 언젠가 반드시 중건되었다는 것이 외국인인 나에게는 감동과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바로 그것은 한국인들의 불굴의 정신, 끈기라는 위대한 정신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무수한 전쟁속에서도 전쟁이 끝나면 다시일어서는 한국인들의 용기, 그리고 그들의 정신 속에 내려오는 5천 년 문화유산을 나의 친구들에게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정신문화는 숭산 큰스님이라는 용광로에 녹여져 미국에서 서서히 꽃을 피우려 하고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미국사람들이 얼마나 한국문화를 좋아하고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려 하는지 여러분은 잘 모른다. 그런 와중에 터진 조계사 사태나 경제위기에 따른 한국인들의 절망은 사실 내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내 삶에대한 부끄러운 이야기를 지루하게 털어놓기로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얼마나 한국문화에 빚을 진 사람이며 이제 그 빚을 갚으면서 살기로 했다는 것을 좀 알려드리고 싶었다. 불가전통에 따르면 스님이 된다는 것은 곧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가 이전의 ‘나의생활’이란 없어진 것이다.
나의 나쁜 업 때문에 이렇게 출가 이전의 나를 털어놓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이유는 바로 육체를 주신 내 부모님만큼이나 가르침을 주신 부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불교와 정신에 눈뜨게 해준 큰스님을 비롯한 모든 한국인들에게 죽는 날까지 깊이 감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큰스님이 푸른 눈의 우리들을 가르치는 동안 전세계로 다니시다보니 많은 한국사람들이 큰스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특히 그 위대한 가르침도 접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큰스님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희생을 통해 이제 전세계 사람들은 삶의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나의 일이란 바로 그 위대한 가르침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알리는 일이다. 그것이 내가 큰스님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위대한 불교전통을 가진 한국에는 살아있는 부처님들이 많이계신다. 내가 믿는 가르침만 옳고 내 스승만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얘기하다보면 이 불안과 혼돈의 세기말 시대에 진정 우리가 가야할 길이 어떤 길인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바램이 있다.

Saturday, March 17, 2012

만행 버릴 때 얻는 것

만행 버릴 때 얻는 것
어찌보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부터 철학자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니체, 플라톤, 소크라테스, 음악 베토벤과 밀러에 이르기까지 나는 정신적 난민이 되어 진리를 찾아 헤메였다.
그런데 정작 나에게 진리의 길을 안내해준 사람은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야 있는 작은나라 한국, 그것도 남북이 분단된 땅에서오신 숭산 큰스님이었다. 그의 영어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그분의 말과 행동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수식어로 나열된 영어책, 이 세상의 훌륭한 말은 다 쏟아내는 존경받는 교수님들의 가르침보다 더 강하게 내 영혼을 이끌었다.
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가.
거기다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와 맑은 눈동자를 가진 키가 작고 땅딸막한 보통한국 남자의 얼굴을 한 사람이 바로 나의 스승이라니……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다.
나의 스승 숭산 행원 대선사님, 이 살아있는 부처는 현재 서양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적인 스승 중 한 분이다. 전세계 5만 6천여 명의 푸른 눈 제자들이 큰스님과 함께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199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교수팀은 세계 불교의 전통에 관한 책 한권을 출간했다. 그 책의 제목은 《브처의 비전》 (The Vision of the Buddha).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을 설명하고 아시아 불교의 다양한 전통을 소개했다. 이 책은 당시 서양에서 동양불교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을 한 책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울 교보문고 외국서적 코너에 가도 구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인도, 중국, 스리랑카, 일본 등 각 나라의 불교 전통이 모두 스록되어 있는데 정작 한국 불교에 대한 설명은 단 한 줄도 없다. 2년 전 이 책을 접했을 때 얼마나 슬프고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나마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것은 이 책의 맨 뒷부분이었다. 저자들은 이 책 마지막에 ‘현존하는 4대 생불’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바로거기에 숭산 큰스님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현재 서양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영적인 스승 달라이라마 바로 다음에 말이다.
달라이라마, 숭산스님과 함께 소개된 나머지 두 분은 베트남의 틱 낫 한(Thich Nhat Hahn). 캄보디아의 마하 거사난다( Maha Ghosananda) 스님이다.
저자들은 책에서 큰스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선불교의 달마대사 숭산은 현재 가장 유명하고 능력있는 불교계의 큰스승이다. 선불교의 최고 원로격이면서도 정통 참선불교를 도전적이고 참신한 방법으로 지도한다. 숭산이 신도들과 나눈 편지와 대화록에는 살아있는 선불교의 가르침들로 가득하다. 〈반야심경〉 〈금강경〉 같은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숭산스님의 가르침 안에서 자연스럽게 현대언어와 현대의 가르침으로 탈바꿈한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서 부처님 가르침의 진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불교를 영어로 펴낸 유일한 책으로는 인도의 학자 무 성(Mu Soeng)이 1987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천 개의 봉우리 ; 한국의 선 전통과 스승들》 (Thousand Peaks ; Korean Zen ㅡ Tradition and Teachers)란 책이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 와 살면서 깜짝놀란 것은 숭산스님이 외국에서 평가를 받는 것만큼 한국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예 큰스님의 업적이 과소 평가되는 것은 물론, 어떤 스님들은 ‘큰스님이 한국불교를 버려놓았다. 고 내앞에서 드러내고 혹독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아연실색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그 비판의 중심 내용은 주로 큰스님의 포교 스타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도와 승려가 젠센터에서 같이 먹고자고 생활하며 비구와 비구니가 격의 없이 한방에서 수행하고 비구니가 비구대신 지도법사가 되어 법문을 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한국불교의 전통 포교방식과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큰스님에 대한 비판은 종교가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옮겨질 때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 비난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이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불교 전통중에는 아직도 부처님이 살아계실 당시 인도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이있다.
예를 들어 1년에 여름 3개월, 겨울 3개월 집중해서 참선수행을 하는 안거수행은 본래 인도의 날씨 때문에 나온 수행법이다. 인도는 4계절이 뚜렸하지않고 대신에 일년 중 비가 많이오는 우기와 그렇지않은 건기로 나눠진다. 우기는 비가 너무많이 내리고 건기는 너무 덥기 때문에 나다니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기와 건기에 몇 개월씩 집중 수련을 하도록 한 것이다.
본래 스님들은 탁발을 해야한다. 음식을 구걸해 먹어야 하는 것이다 또 세 벌 이상의 가사와 한벌의 발우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된다. 또 한곳에서 3일이상 머물지 못하며 사는 거처도 지나치게 커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당시 전통이었다.
불교는 히말리야를 넘어 티벳,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모습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중국이나 티벳은 인도보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승복을 더 가질 수 있다든지 탁발수행도 좀 유연성이 첨가되었다.
어떤 것이든지 한문화가 다른문화에 전파되면 그 나라 특유의 토착문화와 섞여 고유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듯이 불교도 마찬가지다.
중국불교는 기존의 도교나 유교와의 충돌도 경험해야 했다. 본래 인도 불교전통에서는 조상들을 위한 염불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중국에 오면서는 유교와 결합되어 승려들이 조상을 위한 염불기도를 한다.
불교는 또 티벳이나 한국에 오면서 토착 샤머니즘 문화와 접목되었다. 승복의 색깔과 디자인에서부터 탁발문화, 승가조직, 승려와 신도들간의 관계 이 모든 것이 각자 그 나라 특유의 문화와 결합되어 새로운 얼굴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래 문화를 전파한 쪽에서 우리문화를 왜 그렇게 변질시켰느냐고 따지지 않는다. 인도승려들이 중국승려에게 따지지 않듯 그리고 한국승려들이 일본승려에게 따지지 않듯 말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불교가 기독교의 전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전파는 ‘전쟁’을 수반한 것이 많았다. 토착 전통을 억압하고 없애는 방식 때문에 피를 부르기도 했다.
미국의 초기역사 역시 ‘신의 이름으로’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원주민들이 살해되고 축출되었다. 단지 그들이 믿고있는 신이 백인들이 믿는 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전쟁의 역사가 없다. 그 이유는 바로 불교 가르침의 유연성에 있다. 부처님께서도 살아 생전 가르침을 펴실 때 제자들의 조건과 상황, 경험에 따라 아주 융통성있게 가르침을 설명하셨다. 가르침의 기본 방향만 옳다면 모양이 어떻게 변하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게 불교전파의 특색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불교는 어떤 모습인가.
중국 불교가 한국에 전해진 시기는 서기 372년으로 고구려 시대라고 하는 게 학자들의 추정이다. 백제를 거쳐 신라로 간 게 528년 이다. 한국불교도 제대로 한국불교다운 모양과 틀을 갖추는 데 최소한 5백 년, 6백 년이 걸렸다.
중국, 일본, 티벳 승려들이 서양에 불교를 전한 시기를 대략 1800년대라고 본다. 아무리 거슬러 가도 서양의 불교역사는 고작 200여년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파고든 것은 1950년대이다. 그때에는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관심을 가졌지 미국인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미국인들에게 불교가 신사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게 맞는 얘기다. 따라서 현재 서양의 불교를 보고 ‘저건 불교가 이니다’고 얘기하는 것은 억지다.
당연한 얘기자만 서양사회는 동양과 문화가 다르다. 우선 서양사회는 동양보다 덜 권위적이다. 동양에서 불교전통은 아무래도 유교전통과 맞물려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사찰문화도 유교적 질서가 강조되어왔다. 신도와 승려와의 위계질서가 명확하고 승려들 사이에도 비구와 비구니, 출가 햇수에 따라 엄격한 규율이 있다.
그러나 서양은 그런 권위적 전통이 약하다. 또 서양사회는 남녀평등사회다.
큰스님이 미국포교를 시작했던 1970년대는 이미 미국에서 ‘성의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었다. 여성의 지위는 급격하게 향상되었고 ‘성’과 무관하게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었다. 큰스님도 처음에는 비구, 비구니를 구분하는 한국 전통적 방식을 도입하셨다. 그러나 곧장 반발이 왔다. 큰스님은 이들의 말을 경청했고 미국적 상황에 맞게 바꾼 것이다.
큰스님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스즈키 로쉬, 사사키 로쉬, 마에즈미 로쉬를 비롯해 티벳의 달라이라마, 촉얌 트롱파(Chogyam Trungpa) 등등 포교를 위해 미국으로 온 불교 선사들 모두 가르침 공동체안에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이 법을 받아 가르칠 수 있으며 공동체안에 리더로 활약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 살아 생전, 여성은 한때 출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에는 여성이 그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버리고 심지어 ‘섬기고’ 있던 남편을 버리고 혹은 결혼조차 하지않고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불교 공동체에 속했던 남성들은 여성이 출가를 하면 공동체는 곧 문란해 질 것이라며 이제히 반대했다. 남성들의 출가역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는 큰 충격이 될 수 있지만 이미 바깥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출가라는 것도 그 바깥 생활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가정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 여자들이 출가를 하게 되면 가정은 누가지키느냐 하는 문제 제기였다.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면서 많은 문제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불제자가 되어 출가를 했지만 ‘내 딸을 돌려달라’ ‘내 아내를 돌려달라’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분노한 가족들과 남성들은 불자들의 공동체를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부처님은 이 같은 상황에서, 여성들에게는 좀더 않은 계율을 주어 인도 사회가 급격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불교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지금은 그때와는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이 내일 아침 뉴욕의 거리에 나타나 ‘비구니는 비구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면 아마 데모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질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에서 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는 비록 불교가 나를 찾게해주는 큰 가르침이긴 해도 그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마치 내가 어렸을 적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큰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신부, 수녀님, 목사님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교회공동체를 보고 약간의 실망을 했듯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 불교를 접하고 젠센터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옳아도 그 포교방식이 낡고 뒤떨어진 어떤 계율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뛰쳐나오려고 생각했다. 특히 위계나 규율을 강조하는 동양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더군다나 미국인들이 누구인가. ‘자유’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사람들 아닌가.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자기의 삶을 옥죈다든지 하는 생각이 들면 가차없이 버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모든 불교전통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온통 의문투성이이다. 염불은 왜 하는지, 법당에 왜 하려한 금불상이 있어야 하는지, 왜 발우공양 같은 것을 해야하는지 꼬치꼬치 따지고 캐묻는다.
하다못해 앞에서도 잠깐 내 경험을 통해 설명했지만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것조차도 동양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우리 같은 서양인들에겐 납득하기 힘든 전통이다. 그것은 예날 고대시대 노예가 주인에게 복종을 맹세할 때 했던 동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 특히 미국에 불교를 포교하러 온 사람들은 우선 미국인의 의식, 그들이 어떤 문화적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우선 알아야한다. 좋은 의사란 환자의 상태를 우선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오직 자기식대로 포교를 한답시고 와서는 실패를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한국만 예로 들어본다면 숭산 큰스님을 제외하고는 한 분도 미국에와서 제대로 포교를 하신분이 없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런데 어떻게 큰스님이 한국불교를 버렸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내가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티벳불교가 미국에서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티벳은 지금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세계에 퍼져 포교를 하고 있는 티벳승려들은 난민들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는 ‘우리나라’ ‘우리불교’ 하는 사고방식이 없다. 나라가 없다보니 온 나라가 그들의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고 티벳문화가 죽고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전 세계에서 꽃피고 있다. 중국정부가 티벳을 침공하면서 사원 6천여개를 파괴했지만 티벳사찰은 전세계에서 세워지고 있다.
‘버릴 때 얻는것’ 아리는 역설은 여기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회고

만행 도울 김용욱선생의 회고
큰스님의 초기 미국생활시절 큰스님을 직접만난 철학자이자 한의사인 김용욱선생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나는 김용욱선생을 지난 2월 화계사에서 처음 만났다. 김선생과 큰스님의 관계는 아주 돈독하다 김용욱선생이 펴낸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에 묘사된 숭산스님이 얘기를 저자의 허락을 빌려 여기에 적는다. 그의 말은 격해서 때로 제자인 내 입장에서 볼 때 숭산 큰스님에 대한 표현이 무례하다고까지 느껴지지만 솔직한 고백이라 생각되어 독자여러분께 소개한다.
최근세 조선 禪宗의 宗脈을 따지자면 경허鏡虛 ㅡ 만공滿空의 거맥巨脈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 우리나라 20세기에 우리 귀에 익숙한 고승들 대부분이 이 경허 ㅡ 만공 맥의 문하에서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만공문하 고봉의 수제자로 숭산嵩山 행원行願이라는 인물이 있다. 내가 다녔던 한국신학대학 뒤켠의 물 건너 수유리 우이기슭에 있는 화계사의 조실스님으로서 참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숭산스님을 하버드 재학시에 케이브맂지 어느 허름한 미국집 안방에서 만났다. 숭산스님이라하면 우리나라 승려들에게는 조선불교를 세계만방에 선교한 가장 성공적스님으로서 그 고명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스님이 개척한 사찰만해도 지금 세계각국 도처에 공산권까지 포함해서 없는 곳이 없다시피 하다. 그리고 지금 행원스님이 문자 그대로 인간세의 願을 行하고 다니는 長征의 반경이란 혜초慧超(704~ ?)의 왕오천축국의 기행보다 더 방대한 것이요, 마오쩌둥의 장정보다도 더 처절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원스님을 만나뵈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분은 그리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었다. 선교개척의 초창기는 이미 지난 시점이었다 하더라도 그리 융성한 시기는 아니었다.
그라나 그분의 명성은 뉴잉글랜드 지역, 특히 예일 대학과 하버드 대학권 내에서는 좀 시끌시끌한 것이었다. 내가 숭산의 이름을 들은 것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들이 代講을 하고 있을 때 내 학생중에 한국불교전공을 지망하는 어느 참하고 예쁘장한 미국 여학생으로부터였다.
내 기억으로 그 여학생의 이름은 베키라 했고, 그 여학생은 하버드 대학학부를 졸업할 때 하버드 대학 통틀어 전체수석을 했으니까 무지하게 머리가 좋은 학생이었다.
그런데 베키는 당시 한국 불교사를 가르치고 있었던 나를 만날 때마다 ‘쑹산쓰님’ 운운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베키는 나보고 자기가 존경하는 학자인 당신이야말로 꼭 한번 ‘쑹산쓰님’을 만나보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한국의 학인이 쑹산쓰님을 안 뵙는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베키가 아무리 나에게 쑹산쓰님을 만나보라고 권고했어도 나는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는데 어느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오셔서 달마 토크(Dharma talk, 법문을 이렇게 영역)를 하시니깐 그때 꼭 한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쑹산쓰님’의 달마 토크때는 하버드 주변의 학ㆍ박사들이 수백명 줄줄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내가 사실 불교의 인맥을 파악한 것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때만해도 누가 누군지를 전혀 몰랐다.
실상 속마음을 고백하자면나는 ‘쑹산쓰님’을 순 사기군 땡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인즉슨 나에겐 다음의 명료한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저 베키를 쳐다보견데, 저 계집아이를 저토록 미치게 만든 놈, 즉 계집아이가 숭산이라는 개인에게 저토록 절대적 신앙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사교邪敎적 권위의식을 좋아하는 절대론자일 것이고 따라서 해탈된 인간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자기는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타인에게 절대적 복속과 부자유를 안겨주는 놈은 분명 사기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달마토크’의 사기성에 있었다. 숭산이 다 늙어서 미국엘 건너온 사람인데 무슨 영어를 할 것이냐? 도대체 기껏 지껄여봐야 콩글리쉬 몇마딜 텐데, 영어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 무적인 도사 김용욱도 하버드에선 벌벌 기고 있는데, 지가 무슨 달마 토크냐 달마토크는? 하버드 양코배기 학박사들을 놓고 달마토크를 한다니 아마도 그놈은 분명 뭔가 언어 외적 사술邪術을 부리는 어떤 사기성이 농후한 인물일 것이다. 正道는 言語속에 내재할 뿐이다.
그런데 베키에 간청에 못이겨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한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숭산의 달마토크를 듣는 순간, 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나의 식識의 작용속에서 집적해왔던 ‘객기客氣’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인간의 수도를 통해 쌓아올린 경지는 말과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될 뿐이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은 언어가 없는 것이기에 거짓이 끼어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그가 해탈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얼굴 속에는 위압적인 석굴암의 부처님이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동네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땅꼬마’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해탈의 최상의 경지는 바로 어린애 마음이요, 어린애 얼굴이다.동안童顔의 밝은 미소, 그 이상의 해탈, 그 이상의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숭산은 결코 거구는 아니라 해도 작은 덩치는 아니다. 당시 오순중반에 접어든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 얼굴 그대로였다. 그의 달마토크는 정말 가관이었다. 방망이를 하나들고 앉아서 기끔 톡톡 치며 내밷는 꼬부랑 혀 끝에 매달리는 말들은 주어 동사 주어 술부가 막구 도치되는가 하면 형용사 명사 구분이 없고 전치사란 전치사는 다 빼먹는 정말 희한한 콩글리쉬였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어도사인 이 도울이 앉아 들으면서 그 콩글리쉬가 너무 재미있어 딴전 볼 새 없이 빨려들어갔다는 것이다. 그의 콩글리쉬는 어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언어의 파워를 과시하고 있었다. 주부 술부가 제대로 틀어박힌, 유려한 접속사로 연결되는 어떠한 언어형태도 모방할 수 없는 원초적인 마력을 발하고 있었다.
그의 달마토크가 다 끝나갈 즈음, 옆에있던 금발의 여자가 큰스님께 질문을 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여자는 하버드 대학 박사반에 재학중닌 30세 전후의 학생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왓 이즈 러브 (What is Love)?”
큰스님은 내처 그여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었다.
“아이 애스크 유, 왓 이즈 라브(I ask you, what is love)?”
그러니까 그 학생은 대답을 잃어버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다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디스 이즈 라브(This is love).”
그래도 그 여학생은 뭐라 할말을 찾지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학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동안의 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 것이었다.
“유 애스크 미, 아이 애스크 유, 디스 이즈 라브 (You ask me, I ask you. This is love)”
인간에게 있어서 과연 이이상의 언어가 있을 수 있는가? 아마 사랑 철학의 도사인 예수도 이 짧은 시간에 이짧은 몇마디 속에 이렇게 많은 말을 담기에는 재치가 부족했을 것이다. 나는 숭산 큰스님의 비범함을 직감했다. 그의 달마토크는 이미 언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국경도 초월하고 있었다. 오로지 인간, 그것뿐이었다.
나는 베키와 같이 이층 선사가 머무는 방으로 올라갔다. 케임브맂지 젠센터라고 해봐야 뉴잉글랜드 전형의 목조 주택건물 좀 큰 것을 개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층 한 방은 한국 온돌 안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냥 한식으로 넙죽 절을 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맞절을 했다. 나를 하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때 나는 매우 신비롭게 생각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버드 대학 박사고, 이 도울 김용옥 이래봐야 당시는 매우 보잘것없는 초라한 박사반 학생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사전에 알았던 것도 아니다. 난 밝은 동안의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는 그 앞에서 멋젓게 방안을 빙 둘러봤다. 이것이 바로 1981년 3월 19일 밤 열 시 반경의 일이다…….(중략)……어느 날이었다. 나는 숭산 행원스님과 함께 앉아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 받다가, 도대체 어떻게 미 미국땅에 와서 보시를 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불법을 전파하여 이 방대한 조직을 그것도 미국의 지적 심장부인 동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시킬 수가 있었는가? 하는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게 되었다.
(숭산 큰스님 이야기) 아…… 내가 뭐 미국에 와서 포교하구 뭐 그런생각 꿈에나 해봤나? 전혀 우연이여, 생각두 안 했든 거여. 내가 인연이 닿아 일본에 몇 년 있었는데 그때 뉴욕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차표를 보내주면서 한번 놀러왔다 가라는 거여. 아 그때만 해도 미국구경 한번하기 힘드니께 얼씨구나 좋다 하고 동경에서 뉴욕가는 비행기를 탓지. 그런데 그때만 해도 비행기 속에서 한국사람 만나기가 참 힘들었거든, 내가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뒤켠에 창가에 있는 어느 중년신사가 한국말로 한국 스님이 아니시냐구 말을 거는 겨여. 나두 깜짝놀라 비행기칸에서 참선만 하구 앉었기두 지루하길래 그 사람 옆 빈 자리에 가 앉어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미국사정두 듣고 갔질 않았겠나? 알구 보니까 그 사람이 로드아일랜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던 교수였는데 거 동양문화에 대한 향심이 보통이 아니더라구. 뉴욕에 가걸랑 로드아일랜드가 얼마 안 되니깐 꼭 놀러 오라면서 전화번호랑 주소를 적어주는 거여. 뉴욕에 있는데 어느 날 그 분 김교수님 생각이 나드라구, 그래서 전화하구 그 집엘 놀러갔지. 그런데 그집에 내가 온다해서 김교수가 불러다 놨는지 불교에 관심있는 미국청년들이 서너 명 와 있더라구. 무슨 예일대학 학생들이래나. 내가 그때만해도 예일대학이 뭔지나 알았어? 그런데 이 녀석들이 자꾸만 물어보는거여. 내가 뭘 불교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김교수 통역으로 어쩌구 저쩌구 얘기해봐야 개갈이 나야지.
그래서 내가 뭘 직접 보여줄 생각을 한 거여, 그런데 내가 최면술을 좀 하거든. 그래서 내가 너회들한테 최면을 걸겠다 하니깐, 이 예일 대학 학생녀석들이 자기들은 그 따위 최면엔 절대 안 걸린다는 거여. 자기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그런 덴 걸릴 수가 없다는 거여.
요시, 한번 맛 좀 봐라! 하구 내가 최면을 걸었지.
수리술 마수리 하고 주문을 외면서 이놈들 최면을 거니깐 아 이놈들이 최면에 어떻게 잘 걸리는지. 조금있단 앉은채로 천장까지 부응붕 뜨는거여, 이놈들이 번갈아 가면서 하늘 높이 붕붕뜨는거여, 아이 이 지랄을 하고 나니깐 이놈들이 엎드려 절하드라구, 그리구 내소문이 쫘악 퍼진거여. 그리군 계속 몰려들기 시작하는거여. 그래서 그 길로 김교수님도 붙잡구 그래서 미국을 뜨지 못하구 프라비던스에 절을 세우게 된 거여. 프라비던스엔 지금 아주 큰 절이섰지 그게 내 본터여, 그게 바루 최면에서부터 시작한 거라구…….
서기 1972년 빈털털이 숭산의 체험을 털어놓는 이 아주 진솔한 어구들은 인류종교의 발달사 그리고 선교역사의 가장 보편적 패턴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고등ㆍ하등을 막론하고 고금을 통해서 이 숭산의 말은 가장 진실한 종교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고구考究하고자 하는 ‘호국불교’의 본질도 바로 이 숭산의 체험세계에 내제하는 보편적 구조로부터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민중이나 이방의 대중에게 고등한 언어 체계나 고도의 사유체계가 처으부터 먹혀 들어갈 수가 없다.
숭산스님에게는 언어(영어)가 없었고 재격이 없었으며 또 폭력(대사관 같은 것)의 뒷 받침이 없었다. 그에게는 대중에게 과시할 일체 권위라든가 위력이 없었다. 이러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숭산은 처음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행하는 괴승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는 영력을 소유한 선승으로 이미지가 순화되어갔고 지금은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터는’ 것을 가르치는 젠 마스터 철인이 되어있다.

Friday, March 16, 2012

만행 큰스님이 미국속으로

만행 큰스님이 미국 속으로

큰스님이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간 해는 1972년이었다. 나이 마흔 여섯 살 때 일이다. 당시 큰스님은 한국 근대사의 큰 스승 경허스님의 맥을 잊는 고봉 대선사으로부터 1949년 법을 전해받은 뒤 조계종 청담 종정스님과 함께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는 한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큰스님은 그 모든 명예와 지위를 다 버리고 서양인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해 훌쩍 미국으로 간 것이다. 큰스님은 미국에 도착해 로드아일랜드 프라비던스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웃들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이었다. 작은 불상, 목탁, 죽비, 향 만을 들고 미국으로 간 큰스님은 아파트에 작은 법당을 꾸미고 혼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참선수련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존경받는 스님이었다. 그를위해 요리도해주고 빨래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는 그러나 미국에선 철저히 혼자였다. 게다가 영어도 전혀 못했다. 미국 가서 고생할 거라며 신도들이 주는 보시도 마다하고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미국에서 스님이 첫번째로 한 일은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 큰스님은 본래 기계에 관한 한 전문가다. 아침예불과 참선이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탁소로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고장난 세탁기계들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고된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저녁밥을 짓고, 저녁예불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한국에서 추앙받는 큰스님의 지위를 훌훌 다 벗어 던지고 미국에서 맨바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의 머리깎은 한국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의 숭산스님 아니십니까?”
그는 근처 부라운 대학에서 동양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르덴(Leo Pruden) 교수였다. 불교문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그동안 숭산스님을 사진에서만 뵙고도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작은 키에 삭발한 머리, 기름때 묻은 작업복, 가슴에는 ,미스터 리’(Mr. Lee)라는 명찰뿐이었지만, 프르덴 교수는 그가 숭산스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르덴 교수의 놀라움에 큰스님은 “잉글리쉬 노노”(저 영어 못해요.)만 연방하셨다고 한다. 프루덴 교수는 큰스님 말씀을 알아듣고 일본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본말이라면 큰스님도 유창했기 때문에 드디어 두사람간에 말문이 트였다.
“제가 한국에서 온 숭산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이런 차림으로 일하고 계십니까? 스님ㅇ에 관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 알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불교를 좀 알려주고 싶어 2년 전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들에게 불교를 알려주려면 우선 그들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미국인들을 접하려 한 것이지요. 말은 젼혀 안 통해도 눈빛과 태도만 보아도 되니까요.”
큰스님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을한 게 아니었다 미국인들의 의식과 문화를 알기위해 수행을 한 것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제스처하는지 빠짐없이 관찰해 그들 의식의 본질과 속성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가 갖고있는 뷸성이란 서로 다른얼굴, 서로다른 외모, 서로다른 표현방식, 서로다른 문화속에서도 하나라는 것을 큰스님은 굳게 믿었던 것이다.
프루덴 교수는 너무 감동했다. 이어 곧 자신의 제자들을 큰스님께 소개했다. 큰스님 이야기를 전해들은 학생들은 너도나도 큰스님의 아파트로 찾아가 가르침을 듣기 원했다. 큰스님은 항상 큰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고 손수 된장찌개와 칼국수, 김치를 만들어 대접했다. 재미있게도 그들의 만남은 프루덴 교수의 통역으로 일본어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큰스님이 왜 굳이 세탁소에서 일을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큰스님은 “불교의 진정한 실천은 나를 죽이는 下心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이 하심의 실천은 달라이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전세계에서 추앙받는 영적 지도자이지만 대통령을 만날 때나,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날 때도 표정과 모습이 한결같다.)
그렇게 2년여가 흘렀다. 믾은 힉생들이 큰스님과 함께 정례적인 예불과 강연을 원했으며 예일 대학 졸업생 두 명이 승려가 됨으로서 비로서 큰스님의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야흐로 한국 선불교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큰스님과 한 나이 든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이 일화는 서양, 특히 미국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일화다.그리고 큰스님의 가르침 스타일이 얼마나 폭넓고 유연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느날처럼 큰스님은 법당으로 들어 오셔서 높은 연단에 앉으셨다. 막 법문을 시작할 무렵, 큰스님은 한 나이 많은 지도법사가 나이어린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지도법사는 큰스님의 오랜 제자 중 한 분으로 관음선종 패밀리안에서도 나이가 많은 축에 드는 분이었다.
“아니, 법사님, 왜 그렇게 뒤에 앉아 계세요? 이리 앞으로 나와 앉으세요.”
큰스님의 제안에 선뜻 자리를 옮기리라 생각되었던 그는 의외로 고집을 피웠다.
“큰스님, 저는 이 자리가 좋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같이 앉아야 그들과 어울리지요, 언제나 앞줄에 앉아 있으면 저는 그 사람들 얼굴을 보기가 힘듭니다.”
“하하하, 당신은 존경받는 지도법사입니다. 여기 보세요, 다른 지도법사님들은 모두 앞에 앉아 계시잖아요. 이게 우리 전통입니다.” 그러자 대뜸 지도법사님의 입에서 항의성 언사가 튀어나왔다.
“큰스님, 그건 그저 오래된 낡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건 큰스님이 세우신 전통이지 우리의 본래전통은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과연 큰스님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다들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세운 전통이 아닙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앞에 앉고 젊은 사람들이 뒤에앉아야 젊은 사람들이 앞에 앉은 스승들을 보고 ‘아 나도 열심히 수행해서 앞에가 앉아야지’ 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소리덕택에 냉랭했던 법당 분위기가 이내 누구러졌다. 큰스님 말씀이 이어졌다.
“이건 우리가 가르침을 받기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에요, 알겠어요?”
“큰스님은 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그러고 보니 무리 법사님은 무형식에 집착하고 계시군요.”
두 분의 질문과 대답으로 법당 분위기는 다시 싸늘해졌다. 법당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충 이쯤에서 지도법사님이 고집을 꺾으시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법사님은 막무가내였다.
“큰스님께서 강조하는 전통은 그저 오래된 한국 스타일에 불과합니다 그건 미국 스타일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먼저 온 사람이 앞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에 걸맞는 수행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은 손을 훼훼 내저으셨다.
“이건 한국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그저 자연법칙입니다. 숲에 한번 가보세요. 큰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지요? 큰나무는 키가 커서 했빛도 잘 받고 빗물도 잘받습니다. 뿌리도 크고 단단합니다. 하지만 어린 나무들은 이 큰 나무들에 가려 햇빛도 별로 못 받고 비도 흠뻑 못 맞읍니다. 뿌리는 작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오랜시간이 흐르면 이 어린 나무들이 점점 자랍니다. 열심히 살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더 강해지지요. 노력하지 않는 나무들은 자랄 수 없습니다. 이건 자연법칙입니다. 동양 전통도, 한국 전통도, 불교 전통도 아닙니다. 알겠읍니까?”
그제서야 법사님 입에서 “예”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머리숙여 깊이 절한 뒤 큰스님 말씀대로 앞줄에 가 앉았다.
큰스님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법문을 시작하셨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일화다.
불교를 처음 접한 미국인들은 이처럼 모든일에 의문을 갖고 도전을 한다.
‘이것을 여쭈어보면 큰스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고해서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니까 무조건 따라해라’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뭘 몰라서 그렇다고 따지거나 꾸짖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환자에게 약을 먹이겠다고 나선 의사가 먼저 환자를 이해하고 포옹하고 설득해야 한다.
큰스님은 우리 서양인들의 의식구조를 꿰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처방을 내린다. 이것이 바로 서양인들이 그를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다.
큰스님은 우리와 다른나라에 태어났고 나이도 많지만 우리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안다. 어떤 때는 정작 우리보다 더 잘 우리 마음을 꿰뚫어보기 때문에 놀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나이를 넘어, 국적을 넘어, 성을 넘어, 종교를 넘어 큰스님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훌륭한 의사다.
또 한 편의 일화는 숭산스님의 초능력에 대한 것이다. 큰스님의 말씀을 빌려 소개하겠다.
어느 날 뉴헤이븐 젠센터에 다니는 학생 한 사람이 큰스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선사님께서는 초능력을 행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가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사가 있다면 위대한 사람로 칭송받을 것입니다. 마음의 병뿐 아니라 육체의 병도 고친다고 말이지요. 왜 선사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눈먼사람의 눈을 뜨게 한다든지 앉은뱅이를 서게 한다든지 미친사람을 제정신이 돌아오게 한다든지 물 위를 걷게 한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까? 혹은 기적을 행하시기위해 노력하시지는 않나요? 만약 선사님께서 그런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선사님의 가르침이나 불교에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될 텐데요.”
큰스님이 이렇게 답하셨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스승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단지 어떤 ‘기술’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스승이 기적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려 한다면 사람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기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신도들은 바른길을 배우려하지않고 쉽게가는 길만을 배우려 하지요. 의사가 아픈환자에게 병을 고쳐줄 약을 준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또 다른 병을 준다면 그 의사를 명의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사람들이 어떤 선사가 물위를 걷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 선에 입문한다면 실제 참선수행에 들어가서는 선수행이 아주 어렵고 지루하고 심지어 기적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선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그만둘 것입니다.
훌륭한 선사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아니라 사람들의 업을 바로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세세생생 만들어 놓은 업을 녹이려면 오직 우리 자신이 그것을 원할 때만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의 병을 치료할 많은 명약들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을 우리 입에 직접넣을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눈먼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뭔가 쉽고 빠른길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기병을 고치기위해 자기가 노력하는 것이아니라 남이 해주길 바랍니다. 그건 마치 아이를 기르는 엄마의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준다면 아이는 엄엄마에 모든 것을 의존할 것입니다. 훌륭한 엄마는 ‘아이가 혼자하는 법’을 가르치는 엄마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라서 강해지고 독립적이 됩니다.
여기에 자기자신을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칩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심지어 그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은 물을 영험하다고해서 약으로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말 그들의 병이 그 물을 마시고 나았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그병을 고치신 것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는 마음이 그들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믿는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초능력이란 사람의 나쁜 업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술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나사렛을 일으켜 세우셨다 하더라도 나사렛의 나쁜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사렛은 죽습니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 제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느 명상에 잠겼다가 카필라 왕국이 전쟁으로 곧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 달려갑니다.
‘헉헉, 부처님 이주일만 지나면 카필라성에 전쟁이나 폭삭 무너집니다. 알고 계십니가?’
‘물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을 구허려 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할 업이다.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그제자는 부처님께 아주 실망을 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계시다니……. 제자는 초능력을 발휘해 카필라성을 작은 밥그릇에 담아 이른바 도솔촌이라고 하는 천국에 갖다 놓았읍니다.그곳은 아주 평화롭고 고요한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위험하리라 생각했던 일주일이 아무일 없이 지났습니다. 제자는 그제서야 안심을 하고나서 다시 밥그릇을 지구 카필라성에 갖다놓았읍니다. 그런데 제자가 밥뚜껑을 열자, 그안에 담아두었던 카필라성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전쟁을 일으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이렇습니다. 초능력이란 단지 기술입니다. 여러분들은 카드놀이를 할 때 도사처럼 카드를 감추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술의 하나입니다. 초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누군가 기적을 행하고 싶다면 그것을 어떻게하는지 배우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눈이 예리한 진정한 스승이라면 초능력을 가르쳐주는것이아니라 제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제자들이 나쁜 업을 녹여내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없읍니다. 오직 바른 관점 바른 수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Thursday, March 15, 2012

만행 숭산 큰스님

만행 숭산 큰스님

숭산 행원 큰스님은 1927년 평양남도 순천에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건축가였다. 넓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손꼽히는 부자였다. 큰스님은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과학과 엔지니어링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식민지 상태였던 데다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으로 매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민에 대한 통치와 억압정책도 한층 강화되고 있었다. 대부분 학교 선생님들은 일본인 이였고 모든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일본 어린이들은 한국 어린이들보다 모든면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1944년 큰스님은 지하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다. 거기서 일본군대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하여 단파 라디오를 만드는 놀라운 솜씨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집에서 돈 5백 원을 훔쳐내어 경계가 삼엄한 국경을 넘어 만주에서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주 국경선 지대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던 순찰대에게 들키고 말아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해방을 맞았다.

큰스님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로 와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당시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찬반도의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 남한과 북한사이의 모든 의사소통과 왕래가 어렵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6ㆍ25로 분단이 영구화되면서 큰스님도 북한에 계시던 부모님과 연락이 두절되어 다시는 부모님을 뵐 수 없게 되었다.
대학시절은 그에게 격변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한편으로는 그의민족과 조국을 위하여 그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기였다.
소년시절 그는 일본에 저항하는 활동에 동참했었다. 당시에는 대항해야 할 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모든상황이 불분명하고 유동적으로 변했다. 남한의 공산주의 당원들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전복하려고 시도하였으며, 남북한 모두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결국 남북한은 갈등이 격화되어 동족간에 6ㆍ25라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큰스님은 이 같은 격동의 현장을 지나오면서 정치적인 활동이나 학문적인 연구가 조국을 위하는 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책을 파고들었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었다. 마침 그때 친구 한 사람이 《금강경》한 권을 선물해주었다. 큰스님은 그 책을 읽다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것은 곧 지나가는 것이다. 만일 지니가는 모든것들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면 그때 진정한 당신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읽는순간 큰스님은 마음으로부터 모든혼란과 갈등을 씻어낼 방도를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불교경전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간다. 큰스님은 1948년 10월 마곡사라는 절에서 계를 받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수행뿐이라는 생각에 가득찼던 큰스님은 계를 받은지 10일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원각산 부용암이라는 곳에서 1백 일동안의 은둔 수련을 하였다. 그는 하루에 20시간 동안 “신묘장구 대다리니”를 암송하고 식사로는 솔잎가루만 먹으며 지냈다.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새벽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하루 두 차례에 걸쳐 두시간씩 모두 네 시간만 자면서 혹독하게 수행했다. 때로는 얼음물에 알몸으로 들어가 몇 시간씩 견디면서 배고품과 잠의 유혹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곧 의심과 번민이 엄습해왔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가? 지금이라도 조용한 마을의 작은 절로 내려가서 일본승려들처럼 결혼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짐을 쌋다 풀었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내일은 떠나야지, 내일은 떠나야지,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이내 머리가 맑아져 그는 다시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행 50일이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매우 약해져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다. 매일 밤 무서운 환상이 나타났다. 호랑이와 악마들이 그의 앞에 서서 울부짖고, 귀신들이 나타나 그를 삼킬 듯 달려들면서 차가운 발톱으로 목을 할켜댔다. 매일 밤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렸다. 그 뒤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즐거운 환상이 나타났다. 무처님이 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멋진 옷을입은 보살이 나타나 스님에게 극락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80일이 끝나갈 무렵 스님은 몸과 마음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살갗도 솔잎처럼 파랗게 변했다.
드디어 마지막 1백일이 되었다. 스님은 암자 밖으로 나와 목탁을 두두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자신이 몸을 떠나서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저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자신의 음성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깨달았다. 바위, 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고 있고 들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고 참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깨어나서 한 사나이가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나무위로 까마귀들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원각산하 한길은 지금 길이 아니건만 圓覺山下非今路
배낭메고 가는 행객 옛 사람이 아니로다. 背囊行客非古人
탁, 탁, 탁, 걸음소리는 옛과 지금을 꿰었는데, 濯濯履聲貫古今
깍, 깍, 깍, 까마귀는 나무 위에서 날더라 可可鳥聲飛上樹,
그 후 선사는 산을 내려와 만공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봉선사를 만났다. 고봉선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사였으며, 또 가장 엄하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당시 그는 거사들만 가르쳤는데 평소 그의 입버릇이 “중 들이란 다 도둑놈”이라는 것이었다. 숭산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고봉선사로부터 점검받고 싶어서 목탁을 들고 찾아갔다. 고봉선사 앞으로 간 숭산스님은 “이것이 무엇입니까?”하면서 목탁을 디밀었다. 이물음에 고봉선사는 목탁채를 집어서 목탁을 쳤는데, 이런 행동은 스님이 예상한 대로였다. 숭산스님이 질문을 했다.
“어떻게 참선을 해야 합니까?”
고봉선사가 말하였다.
“옛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달마대사기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더니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숭산스님은 알 것도 같았으나 어떻게 답을 해야 될지를 몰라 “모릅니다”라고 했다.
고봉선사는 “모르면 의심 덩어리를 끌고 나가라, 이것이 바로 참선수행법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해 봅과 여름동안에 숭산스님은 행선(行禪, 각처로 돌아다니며 선을 닦는 일)을 하였다. 가을이되자 스님은 수덕사로 옮기고100일간 결제에 들어가 선과 법거량을 배웠다. 겨울이 되었을 때 숭산스님은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않는다고 생각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지 다른스님들의 공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승산스님이 불침번을 서는 어느 날 밤에 (당시는 도둑이 많았다)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놋사발과 냄비를 모두 꺼내 앞마당에 둥그렇게 늘어놓았다. 다음날 밤에는 법당 안 불단 위의 부처님을 벽을 향해서 돌려놓고, 국보였던 향로를 내와서 견성암 마당 위 감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절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 왔따갔다고도 하고 또 산신이 내려와 스님들 공부열심히 하라고 혼을 냈다고 하는 소문이 쫙 퍼졌다.
셋째 날에 그는 비구니들 처소로 가서 방 밖에 고무신 70켤레를 집어다가 덕산선사의 방 앞 댓돌위에 고무신 가게 진열장같이 늘어놓았다. 바로 그때 비구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가 신발이 없어진 것을 알고 잠자는 다른 비구니들을 모두 깨웠다. 결국 그는 붙잡히게 되었다.
다음날 그느 대중들 앞에서 대중공사를 받았다. 거기에 참가한 스님들 대부분이 숭산스님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여(비구니들은 그르 미워 했지만) 스님은 수덕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맨 처음으로 그는 전월사의 덕산스님을 찾아가 절을 올렸다. 덕산스님은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비구니 큰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젊은 사람이 산중을 이렇게 시끄럽게 했느데, 이럴 수가 있는가?”라며 숭산스님을 꾸짖었다. 그때 숭산스님은 웃으며 “이 세상이, 온 우주가 시끄러운데 견성암만 시끄럽겠습니까?”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 다음으로 숭산스님이 찾은 사람이 바로 거친행동과 상소리로 유명했던 춘성선사였다. 숭산스님은 절을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스님, 제가 어잿밤에 삼세제불(과거 ㆍ현재 ㆍ 미래에 나타나는 모든 부처)를 다 죽여서 장사를 지내려고 도반을 구하는 중입니다. 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성선사는 “아! ”하고 감탄하며 숭산선사의 눈을 그윽히 들여다 보았다. 그런다음 “네가 본 것이 뭐냐?” 하고 물었다.
숭산스님이 말했다.
“밖에 눈이 하얗지 않습니까?”
“아하 이사람 큰일날 사람이네, 그래 밖에 눈이 하얀데 그 눈속에 불이 붙는 소식을 아느냐?”
“왜 구멍없는 젓대소리를 하십니까?”
춘성선사가 웃으며 “아하!”하고 감탄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더하자 숭산스님은 하나도 막힘없이 술술 답하였다. 드디어 춘성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숭산스님 주위를 돌며 춤추면서 외쳤다.
“행원이가 견성을 했다! 견성을 했어!”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그 다음날 모든 사람들이 전날에 있던 일을 소상히 알게 되었다.
1월 15일, 해제한 뒤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숭산스님은 금봉, 금오, 두 선사를 만나서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숭산스님은 누더기를 입고 걸망을 진채 고봉선사의 절을 찾아갔다. 그가 고봉선사 앞에 절을 올리고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녘에 삼세제불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는냐?”하고 고봉선사가 말했다.
숭산스님은 걸망에서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송장을 치우고 남은 것이 있어서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한 잔 따라라.”
“잔을 내주십시요.”
이 말에 고봉선사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스님은 술병으로 고봉선사의 손을 치우고 장판위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게 스님이 손이지 술잔입니까?”
고봉선사가 빙긋이 웃고 말했다.
“나쁘진 않다. 네가 공부를 좀 하긴 했다만 몇가지를 더 묻겠다.”
고봉선사는 1천7백가지 공안중 어려운 것을 골라물었는데, 숭산스님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다. 이를 본 고봉선사가 말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였다. 얼굴이 벌게져서 또 다른 “如如한” 답을 말했다. 고봉선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참다못한 숭산스님은 화가났고 또 실망했다.
“춘성 ㆍ 금봉 ㆍ 금오 선사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하라.”
50여분간 고봉선사와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했다. 그때 감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卽如’의 답인 것이었다.
고봉선사는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1949년 1월 25일, 숭산스님은 고봉선사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이법맥의 78대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고봉선사가 주었던 최초의 傳法아었다.
전법식이 끝나고 고봉선사는 숭산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3년간을 너는 묵언하여라. 너는 이제 무애한 대자유인이다. 우리 5백년 후에 다시 만나자. 네 법이 세계에 퍼질 것이다.”
숭산은 이렇게 해서 선사가 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다.
큰스님은 이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왜곡시켜놓은 한국의 불교전통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조계종의 총무원 부장을 지내면서 조계종의 개혁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러는 중에도 모교인 동국대학교에 창설된 선 명상센터에서 참선을 지도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정진하고있는 보문사를 비롯하여 서울에 있는 다섯개의 절에서 참선지도자로 초빙되었다.
1966년, 큰스님은 일본에 건너간다. 그곳에서 불교와 종교의 해악에대한 북한의 선전에 의하여 끊임없이 현혹되며 정신적 안내자 없이 생활하고있는 재일교포에게 종교적인 구심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위하여 동경에 절을 건립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1972년, 일본에서의 포교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될 즈음, 미국에서 참선에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더군다나 자유로운 정신적 토양위에서 히피들도 많이 생기고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미국이야말로 참선불교를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홀 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Tuesday, March 13, 2012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만행 과학적이기 때문에

불교가 서양인, 특히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한마디로 얘기하라고 하면 ‘과학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세기의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아니였지만 불교야말로 어떤 경지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세계를 부정해왔다.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한다는 생각에 가반을 두어야한다. 자연세계와 영적인 부분의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이러한 내 생각과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불교는 물론 과학은 아니다. 불교는 인간의 동정심, 착한마음 등 인간의 지혜에 대한 가르침에 더 중점을 두지만 그 기본 교리는 과학적 논리성과 정합성에 맥이 닿아있다.
현대인들은 ‘종교는 죽었다’고 말한다.
속도와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리고 인간복제까지 논의되는 마당에 종교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지 모른다. 신과 진리를 숭배하기에는 이 세상에 숭배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전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가져다 준 인간생활의 흭기적인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테크롤로지 과학에는 ‘영혼’이 빠져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이 세계를 모두 과학과 테크놀로지로만 가득채우게 될 때,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워크맨, 노트북 컴퓨터, 게임기, 호출기, 휴대폰으로 무장(?)하고 서울 명동과 신촌, 압구정동, 신사동을 걷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그 안에서, 절저히 자기만의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삶이 이전 부모세대들의 삶보다 발전되고 행복해졌는가? 어쩌면 부모 세대들보다 더 큰 소외와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유익한 생활도구를 얻고 보다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채워지지않는 것이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 장 프랑수와 르벨은 “과학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닿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이 인간의 의문들에대해 해답을 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냉정하게 사고 서로를 더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다.
과학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모든문제를 해결해 줄 도깨비 방망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이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빚은 뒤틀림 현상은 세계곳곳, 특히 서구사회에서 속속 나타나고 있다.
서구의 역사는 과학발전의 역사다. 좀더 나은거, 좀더 편리한 것, 좀더 빠른 것을 위해 오직 앞으로 나아갔다. 끝도 없는 전진을하다 어느 순간 ‘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앞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 우리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어떤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학은 그저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이나 숟가락, 혹은 자동차 같은 ‘도구’일 뿐이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과학이주는 유익성과 해악성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한다. 우리가 만일 진정한 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때 참된 자유를 얻게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자유를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다른사람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해답이 나오는 것이다.
최근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저명한 과학자 한 분이 재미있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이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실천에 옮긴다면 현재 이 세계기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 예를 들어 환경파괴, 희귀동물의 멸종, 쓰레기 처리, 폭력문제, 존족간 전쟁, 과잉 인구문제, 묘지 증가에 따른 토지 낭비 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다. 불교의 인과론, 일체중생이론 등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는 과학보다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한다.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마음과 생각의 실체를 표현하는 단어나 말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오직 수행을 통한 경험으로 찾을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물질의 근원점을 모색해도 실체의 성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닿아있다. 거기에 인간의 영혼이 불어넣어져 비로소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숭산 큰스님이 불교와 과학에 대해 하신 말씀을 적어본다. 이 글은 최근〈물병자리〉출판사에서 변역되어 나온 큰스님의 편지글인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에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 한 제자가 큰스님께 이렇게 물었다.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과학 연구와 참선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군요 과학자들은 영속적이고 반복이 가능하며 의사전달이 가능한 경험을 토대로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을 끊어야 한다고 하시지만 과학자들이 만드는 세계관이란 어차피 개념적일 수밖에 없읍니다. 물리적으로 인과 관계가 뚜렸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고도로 이론적인 세계관과 참선의 관점을 하나로 절충할 수 있습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과학을 공부하면서 의문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이 우주가 115가지 원소로 생성되였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115가지 원소는 어디서 왔을까. 선생님께 여쭈었더니 그것은 無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무극이란 끝이없어 텅 빈 상태입니다. 나는 선생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무극을 어떻게 볼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무지개를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햇빛은 아무 색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물방울과 접촉해 무지개를 만든다. 만일 1백명의 사람들이 무지개를 보았다면 1벡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요. 아부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다. 네가 무지개를 보고 있다면 네 앞에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이어 선생님은 갖가지 색이 배열된 희전판 하나를 가지고 오신 뒤 원판을 돌리셨읍니다. 원판에는 아무 색도 보니지 않았지만 원판이 멈추자 많은 색이 보였읍니다.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입니다.
이 세상 만물도 이와 같읍니다. 모든 것이 공에서 생겨나 공으로 돌아갑니다.
초보수준의 과학자라면 1+2=3 수준에 멈춥니다.’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과학자라면 1+2=0 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바로 이 단계가 색즉시공 공즉시공의 단계이지요.
그러나 좀더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1, 2, 3,과 0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색과 공을 만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數라든지, 色이라든지, 空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그리고 개념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이 있기 전엔 너도,나도, 색도, 공도, 없읍니다. 생각이 있기 전에는 모든 것이 眞空속에 있는 그대로 있을 따름입니다. 색은 색이요,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인식 세계는 컴퓨터와 같습니다. 컴퓨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식 또한 ‘무언가’가 조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체계를 세웠읍니다. 그 ‘무언가’가 우리의 인식을 조종하고 과학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무언가’를 찾는 것이 禪입니다.
하나 묻겠습니다.
1+2=3과 1+2=0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만일 이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면 ‘오직 모르는’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요.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읍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가도 확인하지 마십시요. 억지로 인식하려고 하지도 마십시요.
어떤것도 억지로 만들려 하지말고 올바른 인식과 올바른 과학을 터득해 생사윤희를 뛰어넘어 중생을 번뇌에서 제도하시기 바랍니다.

Monday, March 12, 2012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1985년 초 숭산스님은 미국에 있는 한 카톨릭 수도원으로부터 법문과 함께 참선수행을 지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수도원은 켄터키주에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미국 카톨릭 교단 안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곳이다. 아마 천주교 신자분들들은 그 이름을 익히 다 아실 것이다.
겟세마니 수도원은 그 유명한 토마스 머튼수사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토마스 머튼은 미국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은 지금까지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스테디 셀러다.
머튼 수사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겟세미니 수도원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든 1950년대 초반 장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수도원안에서 혼자 참선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에 심취한 머튼 수사는 나중에 불교와 참선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카톨릭 교단에서 아주 존경받는 수도사이자 미국 지식인들 중 영향력 있는 인사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양사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는 철학자, 문인 등 미국 지성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그전부터 작은 파문을 던지며 미국 지식인 사회에 물결을 만들었던 불교가 비로소 파도처럼 폭발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머튼 수사는 그 파도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분이다. 벌써 그때부터 동양의 선사들은 물론 달라이라마와도 편지 교류를 했다. 수도사들은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점점 불교와 참선수행에 몰두한 그는 마침내 수도원장님께 동양을 여행해보고 싶다며 몇 년 동안 수도원을 떠나 있겠다고 청한다. 오랜 숙고 끝에 원장은 마침내 허락을 내리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동양구경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인도로가 달라이라마와 조우 했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머튼수사는 인도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시아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1969년 대만을 여행하는 도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뜰 당시는 베트남 전쟁의 절정기였는데 머튼 수사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존경받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는 아주 영향력이 높았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의 견해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을 아직까지 갖고있다.
어쨌든 머튼 수사는 미국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 특히 카톨릭ㆍ기독교 신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후 겟세미니 수도원에는 새 원장이 취임하는데 그는 수도사들에게 불교 공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머튼 수사의 영향으로 수도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젊은 수도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수도사들은 하는 수 없이 잠시 불교공부를 접고 있다가 1984년 새 원장이 취임하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원장에게 불교 공부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의 선사들을 초청해 참선수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겟세마니 수도사들은 미국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수행을 열심히하는 훌륭한 수도사들이다.
그 유명한 머튼수사의 똑똑한 후예들이 참선수행을 하겠다며 고른 불교선사가 바로 숭산 큰스님이다. 당시에는 미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뒤라 일본의 유명한 선사도 많고 티벳의 고승들도 많았는데 이들 모두 제치고 바로 한국인인 숭산 큰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었다.
1984년부터 6년 동안 그들은 매년 일주일간 큰스님을 초청해 법문도 듣고 공안인터뷰도 하고 참선수행도 햇다. 큰스님은 참선수행 때 수도사들에게 ‘하느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하느님과 우리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하는 화두를 주셨다.
더욱 특기할 만한 일은 큰스님께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당미사를 같이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카톨릭 역사에서 엄청난 일이 아닐 수없다.
1991년 8월 겟세마니 수도원 벤지민 수사님은 숭산 큰스님에대한 수필을 하나 써서 발표했는데 큰 스님의 가르침에대한 존령심과 고마움이 곳곳에 베어있다.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좋을 듯해 여기에 옮겨 적는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숭산 대선사님께서 이곳 겟세마니 수도원에 오신다 우리수도사들은 선사님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은 이니다.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참선할 때 쓰기위한 큰 방석을 갖다놓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사님을 뵙기위해 미국 전역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 겟세마니 인근 운둔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멀리 테레사와 풀로리다에서 온 참선수행자들,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한국인들까지 모여들어 조용한던 수도원이 모처럼 시끌벅적하다.
대선사님이 이곳 수도원에 매년 이렇게 오셔서 참선 지도를 해주신게 벌써 5년째다.
그의 방문은 항상 맑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도전과 그것을 얻고 나서 얻는 기쁨의 절묘한 결합 그 자체이다.
왜” 그는 애 이곳에 오는가?
왜 카톨릭 수사인 우리가 불교승려인 그의 설법에 참여하며 몇시간씩 안자 참선수행을하고 생전처음듣는 공안문답과의 처절한 투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매년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대선사님을 처음 뵙던 날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왜 선사님은 이곳에 오셨습니까?”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정말 걸작이었다.
“하하하 당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수도사이므로 수도원을 떠날 수 없으니 내 젠센터에 오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당신들이 오는 것보다 내가오는게 쉽지요 안 그래요? 하하하.”
이 간결함, 이 단순함, 이 진실함,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우리 수도사들의 생활이야말로 진실함과 간결함 그자체가 아닌가.
그날 참선수행이 끝나고 묵으실 숙소로 안내하면서 나는 대선사님께 “수도원 수사들과 처음 생활하셔서 약간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대선사님께서는 “우리 스님들 생활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세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경정을 읽고 밥을 먹은 뒤 묵언하고 그리고 일하는 생활 아니겠어요” 우리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이렇게 잿빛 승복을 입는 대신에 수사님들은 긴 예복을 입고있고…… 겉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답하셨다.
새길수록 훌륭한 말씀이다.
4세기경 기독교 신앙을 견결히 디지기 위한 정신무장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사막으로 가 혹독한 수행을 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는 시편이나 회고담 형태로 전해 내려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 수사가 쓴 《사막의 지혜》(The Wisdom of Desert)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대수도원장 마크는 또 다른 대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소유의 삶이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지요. 우리 수도원이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을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 수도원의 한 수사님은 자기 방 앞에 싹을 내어 핀 야생화를 보고 야생화 뿌리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아르세니우스는 이렇게 응대했다
글세요, 제 생각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적인 방식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꽃이 없이 살 수 없다면 무소유라고 해서 야생화를 꺾어버릴수는 없겠지요.’”
대선사님께서 쓰신 영어법문집 《세계일화》(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야말로 우리 수도원 골방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싹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가 아닐까. 우리가 이 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대선사님께서는 내 방에 들르셔서 내 책상 앞에 싹을 틔우고 있는 당신의 저서 《세계일화》를 발견하시고 아주 기뻐하셨다. 대선사님은 내 수도생활에 한 송이 야생화 꽃 을 피우기 위한 씨를 뿌리셨으며 이제 그 꽃은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대선사님은 우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미사드리고 하는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셨다.
만약 여러분이 대선사님께 불교수행자가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선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따지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저 노래하십시요. 기도하십시요.”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사막의 수도사가 발견한 꽃이 새로운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가르침은 항상 우리 주변에 널려 있으며 우리 마음안에 있다.
매일 우리는 찬송하고 일하고 음식준비하고 마릇바닥을 닦으면서 진리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을 돕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목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내가 마실물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수사들의 일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대선사님, 여기서 얘기하는 ‘나’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대선사님 고맙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는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불교 선사들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사람도 있다. 미국 예수회 신부인 요셉 게네디는 일본선사밑에서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몇 년 전 ‘선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도복을 벗은 게 아니었다. 그는 현재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날수가 있다. 어떤 수녀님들은 기도의 일환으로 절 (108배, 1천80배, 3천배)수행을 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몇몇 카톨릭 수녀님과 이태리 수녀님들이 계룡산 신원사와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하시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수녀복을 벗고 말이다. 진리를 찾기위해 과감한 용기를 갖고 도전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우리 스님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때때로 한국의 동안거 ㆍ하안거에 스페인 ㆍ영국 ㆍ 독일의 카톨릭 신부님들도 참여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거나 위대하다고 강조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나 카톨릭 신자들이 요즘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 종교를 넘어 참선수행을 통해 신앙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자기가 믿는 신념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베네딕토 카톨릭 수도원의 수녀로서 ‘국제 수도사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한 메리 미가렛 핑크 수녀는 1997년 10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미국 불교도들은 교회나 성당 같은 구조적 도움없이도 각자 개개인이 자신이 딛고있는 현장에서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점은 우리모두가 배워야 할 점”이라며 “이 같은 점에서 참선수행은 어느 졸교인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참선수행은 종교간에 대립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종교를 있는 그대로 더욱 깊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만 을 보고 판단한다면 진정한 내면의 진리는 잃어버린다. 내면의 진리란 모든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위대한 분이다. 당신 자신을버린 사랑과 자비로 헌신하신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겨우 33년을 살았을 뿐인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발전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예수님은 나를 길러준 분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그의 가르침 안에서 살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내가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으며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나 자신과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만들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위대한 인간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만큼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석가모니 가르침을 배우고 숭배하고 그것을 생활에서 녹여내기 위해 수행하고있다.
나는 기독교의 목표가 다른 종교와 싸워서 독자적인 교단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가장 하찮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바로 나에게 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교수님들로부터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그의 가르침을 글로옮기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교단을 만들거나 기존교단에서 분리하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지니치게 강조했다는 것을 배운 적이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언제나 넓은 길, 위대한 길, 그리고 열린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노래하는 새소리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얼굴레 스치는 바람, 밖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왜 부처님의 대자 대비심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사랑과 자비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Sunday, March 11, 2012

만행 스님과 신부님

만행 스님과 신부님

미국에서 불교가 얼마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널리 퍼지고 있으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이 참선을 얼마나 배우려 하는지 내 경험을 들려드리겠다.
나는 1997년 가을 일주일 동안 노스캐롤리나의 랄레이란 곳에있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으로부터 불교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웨이크 포리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침례교 대학이다. 아주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있음며 남주 침례교 전통을 잘 따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권위있는 대학이며 매년 수많은 목사들이 그학교에서 배출된다. 그런 학교가 불교 승려, 그것도 한국 승려를 초청해 불교에 대한 기르침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비행기표는 물론 호텔방과 식사 제공에 높은 강연료까지 주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이 위치해 있는 미국 남부는 지금까지도 북부 사람들이 너무 자유분망하다는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자기들이 기독교적 전통을 아주 잘따르는 지역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토종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까지 이어져 외국인이나 외국 문물에 대해서는 좀 까다로운 성향까지 있다.
그런데 그런 대학이 불교 승려를 초청했다는 것은 대단히 흭기적인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웨이크 포리스트 대학의 몇몇강죄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로 했다. 대학당국은 나에게 참선에 대해 세번에 걸쳐 워크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학 학장님은 목사이면서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중인 빌 레너드씨로 아주 신심이 깊은 침례교 신자였다. 빌 학장님은 미국에서 침례교 이론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가장 존경받는 학자로서 나처럼 하버드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편 그 학교 校牧은 토마스 크리스트만 이라는 분이었다.
아주 나이가 많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만큼이나 유명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과 판단은 미국 침례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토마스 목사님은 선교를 위해 전세계 안 가본 곳이 없는 분이다. 빌 학장님과 토머스 목사님은 내 불교 강좌에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참여했다. 수업시간 시작 전에 정확하게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으며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실제 참선 실습에 들어가서는 어찌나 열심히 참여하는지 내심 무척 강동을 받았다. 특히 토마스 목사님은 정말 다정다감하고 종교적 신앙심이 두터우며 따뜻한 분이었다.
참선 실습하던 첫날, 목사님은 “태어나서 처음 참선이라는 것을 해보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어린아이처럼 설례셨다. 실습이 끝나고 각자 소감을 말하는데 토마스 목사님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선수행을 하기 전에는 목사로서 불교 수행을 한다는 주위의 이목에 약간 신경쓰였는데 실제 참선을 해보니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문제인지 여쭈었다.
“아니, 참선하려고 앉아 있기가 이렇게 여려운 줄 몰랐어요. 나는 10분도 앉아 있기가 힘든데 스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30분, 한 시간씩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계십니까. 정말 놀랍습니다.”
학생들과 우리들은 모두 파안대소를 했다.
일주일 동안의 불교강의와 참선수행 갈의가 끝날 무렵 목사님은 내게 참선수행이야말로 목회생활을 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면서 매년 대학 전직원과 교수들이 한꺼번에 특별 수련을 받도록 도와줄 수 없는지 청해왔다.
나는 그 제안에 너무 기뻤다. 하지만 불행이도 청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동안거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가회로 미뤄달라며 그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와 참선수행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은 이처럼 자주 법문 및 참선강의 요청을 받는다. 미국에서 주지로 있을 때 내 법문의 거의 60 퍼센트는 교회나 성당에서 이뤄졌다. 어떤때는 아예 주일날 교회 예베당에 가서 짧은 법문을 하고 오기도 했다.
머리를 깎고 잿빛승복을 입은 불교 승려가 교회나 성당에서 법문을 하는 일은 미국에서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주지로 있기도 했었던 프라비던스 젠센터 홍법원 옆 도시에는 아주 큰 교회(The First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가 하나 있다 미 교회는 부라운 대학 근처에 있어서 그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오는 교회다. 로드아일랜드에서는 제일 오래되였고 큰 교회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인 톰 목사님은 항상 불교 경전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해오셨다는 것이 아니가.
톰 목사님은 신도들 중에서 참선에 관심을 갖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예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찾아가라고 세세하게 약도까지 그려줘 가면서 설명을 한다.
마침 그렇게 해서 젠센터에 온 사람이 하도 목사님 얘기를 하길래, 내가 먼저 톰 목사께 전화를 해 신도들에게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 됐다. 우리는 서로 교회와 젠센터를 오가며 차를 마시고 좋은 대화를 나눴다.
톰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매순간 예수님의 기르침에 따라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분이며, 신도들을 사라과 자비로 이끌기위해 매진하는 분이다. 그리고 아주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익히고 실천하려고 햇다.
너느 날 톰 목사님은 농반진반으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같으면 내가 도대체 기독교 신자인지 불교 신자인지 구분이 안 갈때가 있답니다. 교회에 살긴 하지만 매일 불경을 일고 참선수행을 하고 시간날 때마다 현각스님이나 티벳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의 말씀을 얘기하고 심지어 주일날 설교때도 불법을 전하니 이것참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땅에서 일어나는 현실이다.
미국 개신교 교단에서 이처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불교에 대해 매우 열린 마음을 갖고 배우려 하고 있고 참선수행도 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의 주지일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나는 두 개의 유명한 개신교 교회로부터 법문 초청을 받았다.
이 두 강의 모두 일요 예배시간에 이루워졌다. 한 교회는 미국 뉴포트에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Newport)였다. 그곳은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시에 위치해 있는데 뉴포트는 미국의 부자가 모여서 사는 최상류층 동네다. 록펠러, 벤더빌트, 제이피 모건 기업의 창업자 일가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 교회에 다니는 신도들도 미국의 최상류층 사람들이다.
또 다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샤론시에 있는 교회(The Unitarian Church of Sharon Massachusetts)였다. 이 교회는 보스턴과 가까워서 많은 하버드 동문들이 다니고 있었으며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다니는 교회다.
두 교회 모두 법문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이 반응이 너무 뜨거워 나도 놀랐을 정도였다. 교회 사람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한번 법문을 해달라고 청했다. 그들은 심지어 교회안에 정규적인 참선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요즘은 대학교에 별도의 참선 프로그램이 마련되기도 한다. 내가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대학원에 있는 작은 성당인 앤도버 채풀에서는 매일 불교식 참선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었다. 일본스님이 지도를 하셨는데 매일 아침여섯 시부터 점심시간 이후까지 진행되였다. 그 프로그램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많은 하버드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참석했다.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까 대학원 측에서는 아예 참선 방석도 사고 불교 경전도 갖다놓고 향까지 피어놓아 제법 근사한 법당까지 꾸며놓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캠퍼스 다른 한켠에서는 하버드 대학원의 메인 강당인 메모리얼 홀에서 불교 강의가 열렸다.
아마 KBS에서 방영한 일요스페셜 〈만행〉을 보신 분들은 뒷부분의 한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나의 도반인 폴란드 스님인 현문스님과 내가 기독교 교회에서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그곳은 부라운 대학안에 있는 성당 매닝 채풀이었다. 십자가와 마리아상이 있은 성당에서 승복을 입고 삭발한 내가 참선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큰 대학에는 교회나 성당이 있고 학교안에서 가장크고 조용한 공간이 그곳이다.
브라운 대학 학생들은 총장님과 목사님께 예베당을 참선룸으로 써도 되는지 여쭈었고 총장님과 목사님은 허락을 내렸다. 아니, 허락을 넘어서 참선수행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항상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참선할 때 쓰는 방석, 향, 염불책, 심지어 한국에서 목탁과 죽비까지 수입해 주셨을 정도다.
나는 또 뉴욕에 있는 컬럼비야 대학옆 연합 신학대학원 강좌에 자주 초청돼 법문을하고 참선수행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미 한국인 비구니이자 한국인인 정현경 박사가 낸 것이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미국 학생들이 아주 존경하는 교수 중 한 사람아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는 카톨릭 신자와 불교 신자들이 아예 함께 선방에 앉아 참선수행을 한다.
그 프로그램은 대광스님과 켑빈 훈트 신부님이 함께 주도를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에 너무 참여하고 싶어해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떤 때는 뉴잉글랜드 지역 신부님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한다.
대광스님은 미국은 물론 한국의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에서 수년동안 참선수행을 하신 분이다. 그는 네브라스카의 장로교집안에서 태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모님들은 장차 대광스님이 목사가 됐으면 하고 바랐다고 한다.
그는 대학 졸업 후에도 전공인 사회학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1979년 숭산스님을 만나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것이다.
케빈 훈트 신부님은 25년동안이나 참선수행을 해오신 분이다.
대광스님보다도 더 오래됐다. 신부님은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시곤 하는데 특히 카톨릭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대광스님과 케빈훈트 신부님은 법문도 함께하시고 불교의 참선수행과 기독교적 믿음에 관한 질문에 함께 답한다. 이 수행 프로그램은 금새 유명해져서 이제 대광스님과 케벤 훈트 신부님은 케임브리지 젠센터와 시카고 젠센터 등에서도 참선지도를 하고 계신다.

Friday, March 9, 2012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 했는가
돌아켜보니 어느새 스님 생활 10년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카톨릭 신자가 불교신자로, 그것도 수행자가 되었느냐고묻는다. 이른바 개종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내가 종교를 바꿨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기독교나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분명 개종을 한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너무 바보같고 불쌍한 인간이다.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데 아주 열정에 찬,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찬 기독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가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가끔 일깨워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잿빛 승복을 입고 절에 가서 금불상 앞에 절을 한다면 죽어 지옥에 갈 것이 뻔하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한번도,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참선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 자신이 놀라곤 한다. 나는 매일 열심히 맑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결코 나 혼자만의 안일을 위해 살지않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빌고 또 빈다. 이런 마음은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학창시절에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게 안타까운 말을 던지는 그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보지 못한다. 나의 미음이 비록 평화롭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은 내 겉보습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행복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지례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마포에 있는 ‘법화정사’라는 절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강의를 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지하철을 탓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내가 탄 지하철 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열차 가운데 서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시작했다. 아주 우렁차고 열정적이며 힘이 넘치는 목소리여서 처음에 나는 그가 펜이나 우산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읽던 책을 마저읽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점점 더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귀에 바짝대고 뭔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처음엔 그 사람 말이 워낙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뿔사, 우산 파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잠시 후 나는 그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들어보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직 성경만 읽어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라.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하도 놀라 온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전으로 숨을 싶게 들이쉬고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전에도 이런글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가까이 와서 소리치는 경우는 없었다. 좀 당혹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솟 얘기를 해댔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흥분에 가득찼다.
“조심하라, 사탄들이 권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마라.”
그는 내 귀에 똑바로 서서 쉬지않고 퍼부어댔다. 나는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나 지하철문 유리창에 안경이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는 결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내가 다짐한 것은 그런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사람들은 더 화를 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무관심에는 아랑곳없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지 마라. 그것들은 악마의 가르침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귀를 귀울이면 당신은 지옥으로 간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의 전부다. 온 힘을 다 바쳐 예수를 믿어라 오직 예수만이 당신을 구한다. 금불상에 절하지 말라. 금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은 악마의 길로 빠지는 길이다. 신은 결코 이것을 허락하지 읺을 것이다. 우리가 IMF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고 우리나라에 금불상이 하도 많아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셨기 때문이다. 제발 그렇게 하지마라. 오직 예수만이 우리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사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평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내 주의 사람들은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계속 내 뒤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
나는 속으로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십번도 더 읽었는데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이해해줄까. 마침내 그는 내 옆을 떠났다. 그리고는 이내 열차안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한국에 사탄의 종교가 판을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함니다.”

이런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내겐 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화계사 국제선원 스님들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면서 승복을 입은 내가 정작 자기 동포들보다 더 안타까운지 나를 향해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곤 한다. 어서 빨리 하느님을 찾아 천당에 가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교회 팸플랫을 내 주머니에 찔러놓기도 하고 자기 네 교회에 나와 예배를 꼭 보라고 간곡하게 권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내 팔목을 잡아 끌기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 미국에서 온 것 맞지요. 미국 아저씨. 미국은 예수님 나라 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탄의 가르침을 믿읍니까?”
그리고 아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불경은 지옥으로 이끄는 죄의 말이라고 성토한 뒤 일일이 성경구절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지 성경책에서 글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한번 시도 했다가 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대응이라도 할라치면 ‘어찌 감히 이런 옷(승복을 가리키며)을 입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느냐’고 따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나를 따라 내려 내 앞길을 막으며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베푸셨듯,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부모님 같은 사랑으로, 아니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고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눈이 파란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나는 한국의 아기들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들을 이 세상 어디서도 모지 못했다.) 나는 아기가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 주었다. 그렂자 그 아기는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이윽고 그작은 팔을 쭉 뻗어 내 옷을 만지작 거리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기엄마가 아기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말도 아직 제대로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아이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떼끼, 안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그러더니 아예 자리를 털고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한번도 개종했다는 생각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나 개종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참진리의 길을 떠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성경에 쓰여 진 말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며 그 외외 모든 것은 惡의 일이라고한다.
이것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를 만든 적이 없다. 교단을 만든적도 없다. 제자들 둥 네가 옳다, 너만 내 진정한 제자다 하신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항상 매춘부들과 세리들과 범죄자들과 소외자들과 함께하면서 당시 이스라엘 성직자들에게 ‘내침’이 아니라 ‘포옹’의 삶과 정신을 증거하셨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자비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나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위대한 가르침은 아주 좁은 소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지혜의 가르침을 증오의 독트린으로 변질시켰다.
한국에는 예수님의 이 위대한 자비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지어 수많은 절들이 파괴되고 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절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곳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절이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자 재산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절이 훼손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경험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이 현대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혀한다.
1996년, 내가 묵고있던 화계사에 세 번이나 불이 났다. 경찰은 기독교인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화계사는 불탄 절을 다시 세우고 개 보수하느라 1억여 원을 들여야 했다. 나를 비롯한 국제선원 스님들은 그 공사 때문에 며칠 밤낮을 매달려야 했다. 일을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우리가 믿는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집에 그것도 세번씩이나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닫힌나라다.
미국에는 수잭 개의 사찰이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나라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른다든지 탱화를 훼손한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이처럼 다른 문화, 전통에 대한 파괴 행위가 일어난다면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할 것이다. 각자가 믿는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사람들은 상대방이 신성한 공간이라고 믿는 곳을 훼손하는 일은 바로 자기들이 믿는 신성한 공간을 훼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그것도 오랜 불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불교사찰에 대한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계속 일어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는 종교간의 불신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남통일부터 해야 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분노와 탄식을 쏟아내며 불에탄 법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을 한꺼번에 씼어준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
물탄 법당을 쓸고 닦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웃 한국신학대학에서 한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갑작스럼게 화계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도는 흉물이된 법당을 둘러보시더니 주지스님께 깊은 사죄의 뜻을 전달했다. 신성한 법당에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사죄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랐다. 한국에는 온통 닫힌 생각과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계셨구나. 우리가 아직 한국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그 교수님은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의 김경재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함께 온 학생들과 법당을 둘러보셨다. 우리는 너무 기뻤다.
그닐 그 목사님과 학생들의 방문은 당장 수행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울분에 찬 비애를 터뜨리기도 했던 우리 국제선원 스님들에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 일로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교수님은 그의 화계사 방문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셨다. 주지스님을 다시 찾아오셔서 국제선원 스님 한 분에게 불교 강의를 좀 맟아 달라고 하신 것이다. 비록 한국신학대학과 화계사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런 일은 개교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사건’ 이었다.
나는 최근 한국에 이런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15년 전 선철 큰스님은 영어로 번역된 법문인 《가야산의 울림》 (Echoes from Kaya Mountain) 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존경을 표현하셨다.
작년 겨울 남원 실상사에 갔다가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너무 기뻤다. 그런데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더 기쁜일이 있었다. 한국신학대학 총학생회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석가탄신일을 경축합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교문앞에 걸어놓은 것이다. 참으로 기쁘고 기쁜일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얘기들은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법으로 구전되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神과 인간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신이 있다면 아직 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워싱턴에 살고 있는 성공회 목사님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참선을 하기위해 종종 젠센터로 오십니다. 나는 그 목사님 초대로 가끔 워싱턴 성당에서 법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神을 죽일 수 없다면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은 이름도 형태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신을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을 죽여야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와 선불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Thursday, March 8, 2012

만행 미국 불교의 열풍

미국의 불교 열풍

현재 미국에는 무려 1천 5백여만 명이 참선이나 비파사나 명상, 요가수행 등 동양식 수행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중 스스로 불교 신도를 자임하는 사람은 약 5백만 명 선으로 추산되고 비아시아계는 약 1백50만 정도이다.
미국은 서구의 불교붐은 달라이라마의 개인적 인기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의 ABC방송의 인기 높은 프로그램인 피터 제닝스의 ‘나이트 뉴스’는 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미국의 ‘불교 인구’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면서 1994년 현재 미국 인구의 4백만에서 6백만 명이 불교신자라고 밝혔다. 이는 미국 내 수 많은 기독교 종파들 중 그 어떤 종파보다도 많은 숫자라고 덧붙였다.
1994년 6월과 11월 사이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 〈USA 투데이〉 〈뉴스위크〉 〈뉴욕메거진〉 등 저명한 잡지에서도 당시 일기 시작한 불교붐을 주요기사로 다루었다.
1997년 10월 〈타임〉지는 유명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표지 사진으로 한 커버 스토리로 ‘불교에 매혹된 미국’ 이라는 기사를 다루었다. 불교에 관심있는 지식인들과 할리우드 배우들을 소개했다. 이 기사는 프랑스 유명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서양에서 불교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1997년 10월 당시 미국의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은 무려 1천2백 권의 불교서적을 판매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1천 3백여 권 정도로 늘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한편 1998년 돈 모리알이라는 미국 사회학자는 《미국의 불교신자》라는 책을 내면서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불교센터, 수련원, 명상센터의 리스트와 전화번호를 작성했는데 그 페이지 수가 무려 350페이지나 됐다. 미국 내에서 불교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수개월 동안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랐었다. 발간 당시 책에 수록된 불교 사찰과 참선수련센터는 총 429개였는데 1995년 개정판에 따르면 1천62개로 7년 만에 무려 세 배가 넘게 증가했다.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999년 현재 1천6백 개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요즘 미국에서는 이 같은 열기를 반영하듯 매년 불교 잡지가 새로 창간되고 있으며 수백 개의 불교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불교 잡지는 〈트리사이클〉(Tricycle)로 매달 20만 부가 팔린다. 이 잡지는 미국의 영향력있는 지식인들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 알렌 긴즈버그 (Allen Ginsburg). 독일의 위대한 지성 위르겐 하버마스 (Jugen Habermas) 등 당대의 논객들이 주요 칼럼니스트이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지적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호세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강의록도 발췌되어 실린다.
이 잡지 창간과 발간의 ‘돈줄’은 그 유명한 록펠러 일가이다. 록펠러 일가는 이뿐 아니라 지난 35년 동안 미국의 불교 포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특히 뉴욕시 북쪽에 거대한 일본식 사찰을 건축하는 데 거금을 냈다. ‘대보살사’라 명명된 이 절은 일본에 있는 대형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지어져 유명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일본 목재를 들여와 일본인 목수의 손으로 직접 지었다 또한 록펠러 일가는 리처드 기어가 뉴욕시에 건립한 티베트 불교 포교 밑 티베트 난민지원센터인 〈티베트 하우스〉의 운영도 돕고 있다.
록펠러 일가의 한 사람인 스티븐 록펠러는 보스턴 북쪽에 있는 미들베리 대학의 불교학 교수로서 달라이라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돕는 미국인 중의 한 사람이다.. .
지난 몇 년간 베스트 셀러가 된 책 중에는 불교 신자들이 쓴 책이거나 유명한 작가들이 쓴 불교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미국의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 목록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집계로 정평이 나 있다. 소설 부문과 비소설 부문으로 나뉘어 열 종씩 총 스무 종의 베스트 셀러가 매주 선정돼 소개 된다. 이중 비소설 부문에는 소설을 제외한 모든 장르의 책이 포함되기 때문에 특히 학자들은 너나할것없이 비소설 부분 베스트 셀러에 관심을 갖는다. 이 비소설 무문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야말로 요즘 미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인들이 무엇을 생가하며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 8월말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비소설 부문 10대 베스트 셀러에는 달라이라마의 책 두 권이 나란히 순위에 올랐다. 《행복의 기술》(The Art of Happiness)과 《새천년의 윤리》(Ethics for the Millennium)가 그것들이다.
2년 전에는 《티베트 경전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1위를 차지, 미국 전역에서 무려 1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
지난해 비소설 부문 1위는 《승려와 철학자》 (Monk and Philosopher)였다. 저자는 부자 관계로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승려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Jean Francois Revel)은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중 한 사람이고 그의 아들 마티유 리카르( Mattieu Ricard)는 장차 프랑스 노벨상 기대주였다. 미티유는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프랑스 과학자 자크 모노(Jacque Monor) 의 조교를 지냈으며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파스티르 연구소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그러다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삶도 값진 것 아니었겠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마티유는 이렇게 대답했다.
“운이 좋게도 저는 이 세상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들도 사귀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만나면서 ‘저것이 내가 열망하는 것인가?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은가? 라는 의분이 생겼습니다.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비록 그런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발휘하는 천재성을 빼면 가장 소박한 인간적인 완성, 예를 들자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든가 선량함 혹은 진실함이 동반되지 안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다 인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티베트의 우대한 스승 칸규르 린포제를 만났습니다. 단 3주일 동안 그를 만났을 뿐인데 저에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그저 선량함이 흐르는 70세의 노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분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면서 저는 소위 ‘명상’이라는 것을 하는 듯한, 다시 말해 그분의 면전에서 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제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바로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읍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깊이, 힘, 고요함이 제 정신을 열었던 것입니다.
영화에도 불교적 상상력을 도입해 흥행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작년에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불록버스터 〈매트릭스〉는 곳곳에 불교적 세계관이 잘 녹아 있는 영화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올해 여름, 한국에서도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는 요즘 미국인들이 동양 사상, 특히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급기야 불교적 세계관을 대중문화까지 접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영화의 주인공인 네오는 컴퓨터 해커인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닐 것 같다는 의심을 안고 산다. 그러나 스승 모피스를 만나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이를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다만 문을 열어주었을 따름이다.
모피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는 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꿈을 현실이라고 믿으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감각에 집착하며 흔들려 살고 있는 것이다.”
네오는 모피스외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전까지 살아온 모든 일들이 헛된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꿈에서 깨어나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고통의 잠에서 깨우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피스는 네오에게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영화는 불교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를 비롯하여 감독, 시나리오 작가 모두 독실한 불교 신자이다.
또 지난 여름 전 미국에서 6주 동안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 〈식스 센스〉는 죽은 사람의 의식을 볼 줄 알고 그 사람들돠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 역시 한국에 개봉돼 화제가 됐었다. 이 영화는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개념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 계층이다. 엘 고어 부통령이 불교 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특정종교를 믿고 있다고 얘기하진 않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불교 교리에 감동과 존경을 보내고 있는지는 환경문제에 대한 그의 베스트 셀러인 《Earth in the Balance》에 잘 나와 있다고 보고 있다.
고어는 이 책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중생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지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어 부통령이 읽은 수많은 불교책, 그리고 불교 학자들, 환경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 연유한 것들이다. 그는 또 달라이라마와도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불교는 미국에서만 인기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독일, 영국, 네덜란드에서는 불교신자들의 숫자가 가하학적으로 늘고 있다. 프랑스 학자들은 향후 2,3년안에 프랑스에서 불교가 카톨릭과 회교에 이어 세번째로 신자가 많은 종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 경은 죽기 2,3년 전에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들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왔다.
“미래 역사가들이 만약 20세기 역사를 쓴다면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었다고 쓸 것 같습니까?”
그들은 토인비의 입에서 제2차 세계대전, 원자폭탄 발명, 히틀러의 등장, 공산주의 확산, 비행기의 발명,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 등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서양에 전파된 것이지요.”
그 자라에 있었던 대부분 사람들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토인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Wednesday, March 7, 2012

만행 서양의 불교 바람

만행 서양의 불교 바람

세계적 농구스타인 마이클 조던, 세계적 연화배우인 리처드 기어, 카아누 리브스, 해리스 포드, 톰 행크스, 브래드 피트, 윌리엄 데포, 맥 라이언, 스티븐 시걸, 에디 머피, 우피 골드버그, 우마 서먼, 가수 마돈나, 티나 터너, 레너드 코헨,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이름만 듣고도 아하 그 사람! 하고 탄성을 내지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요즘 하나같이 참선수행과 불교에 심취해있는 세계적 스타들이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니 사실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마이클 조던이 참선수행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타임〉지는 1999년 1월 그의 은퇴를 다룬 커버 스토리 기상에서 조던이 선수시절 매일 참선수행을 해왔는데 그로 인해 경기에서 더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소개했다. 〈타임〉지는 참선수행이 개인플레이가 강하던 조단을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선수로 변모시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소속한 시카고 불스가 우승했을 때였다. 그의 옆에 몰려든 수백 명의 기자중 한 기자가 “상대편 유타 재즈 선수들은 시카고 불스 선수들보다 젊고 빠른데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느냐”고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조던은 “참선수행의 힘”이라고 잘라 말했다.
“참선수행이 우리 팀을 한마음으로 만들었다. 필 잭슨 감독은 지난 28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시카고 불스에 신인선수가 들어올 때마다 스즈키 로쉬의《선의 마음 ,초발심》이라는 책을 권한다.그리고 참선수행 프로그램 참여를 권유한다. 나 역시 감독의 권유로 참선을 시작했다. 참선은 나의 급한 성격을 열정과 자신감으로 뒤바꿔놓았다.”
리처드 기어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불교신자이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고 현재 티벳 불교의 잔파와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수 백만 달러를 기부해 인도와 티벳에 있는 티벳 사찰을 지원한다. 또 미국에 티벳 불교 전파와 티벳 독립 운동을 지휘하는 뉴욕 ‘티벳 하우스’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미국 국회에도 초청돼 티벳의 실지 상황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증언했다.동료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포교를 하고 기금을 모아 전세계 티벳 난민과 스님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서 공식 만찬이 열리던 날 리처드 기어는 미국의 수많은 티벳불교 신자들과 티벳 해방을 외치는 큰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중국 정부의 미음을 사, 그는 현재 중국 입국이 금지된 사람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미국 ABC 방송의 ‘오프라 윈프리 쑈’에 출연, 불교에 관한 특별대담을 가져 전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리처드 기어는 영화배우로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왔다고 한다. 지난 25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 시간 이상은 참선을 했다고 하니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엔 일본승려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8, 9년 전 우연히 티벳 여행을 갔다가 티벳 불교에 반해 지금은 열렬한 티벳 불교 신자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언론 매채와의 인터뷰 때마다 “출가를 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리처드 가어는 1998년 1월 그동안 티벳과 네팔, 인도의 티벳 망명자 거주지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인 ‘쑨례자”라는 전시회를 달라이 라마의 대만 방문에 맞춰 열었다.
그는 대만에 도착해 기자회견에서 “나는 기독교인이었으나 항상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허털감을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달라이 람말를 통해 ㅂ불교를 만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게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미돈나는 요즘 요가에 심취해 있다. 그녀는 스타가 된 뒤 인터뷰할 때마다 한상 남자친구나 섹스 이야기뿐이었는데 최근에 자신이 영적인 수행의 하나로 요가를 하고 있다고 밝혀 관심을 모았다.
어렸을 때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이제 전생이나 내생에 대해서도 강하게 믿는다고 했다.
헤리슨 포드, 스티븐 시걸 역시 독실한 불교 신자다. 특히 티벳 불교에 심취해 있다. 그들은 기회가 나면 티벳이나 네팔, 인도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온다.
팝송 ‘I’m your man’으로 유명한 가수 레너드 코헨은 지금 63세인데 지난 30년 동안 일본 선사 밑에서 참선수행을 해왔다. 그는 현재 출가해 일본 불교를 포교하는 스님으로 살고 있다.
티벳 불교
미국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티벳 불교와 한국 불교는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둘 다 大慈大悲心과 智慧를 강조 한다. 스승들은 아주 힘이 넘쳐흐른다. 또 두나라 불교 모두 사머니즘 색채가 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각자의 나라에 뿌리깊게 박혀 있던 사머니즘 전통과 불교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두 불교 모두 수행 스타일이나 가르침 스타일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 사찰에서 같이 수행하기도 한다.
미국 내에서 달라이 라마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에반스톤에 있는 ‘세계 新思考협회’의 이사 바바라 필즈 번스탄인은 달라이 라마를 가르켜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이래 인종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유일한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올해 여름 한국의 광복절인 8월 15일에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서 열린 달라이 라마 강연에는 무려 4만여 청중이 운집했다. 연예 공연 흥행집회를 빼면 교황말고 이처럼 많은 사람을 모은 집회는 없다.고 한다. 미언론들은 현재 미국에 세번째 아시아 사상붐이 일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달라이 라마와 티벳 불교가 이 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두 차례 있었던 아시아 열풍은, 19세기 불교와 힌두교에서 영향받은 초월주의 열풍과 60년대 자본주의와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각광받았던 불교붐이었다. 현재 달라이라마가 주도하고 있는 세번째 열풍은 티벳 불교와 일본 불교, 선 등의 아시아 사상으로 이들 사상은 물질문명에 신물이 난 미국인들의 정신적 도피처로 광범위한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 언론인들의 분석이다. 여깅에 리처드 기어, 스티븐 시걸, 줄리아 로보츠, 해리슨 포드, 미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티벳〈 불교의 홍보에 나서면서 달라이라마 붐을 형성해가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뉴욕 센트럴 파크 강연뿐 아니라 8월 한 달 동안 미국을 여행하며 강연했다. 특히 이중에는 인디아나주도 포함되어 있었다.인디애나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적 문화가 강한 곳인데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경청했다.
지난 8월 17일터 달라이라마가 방문중인 인디애나주의 불루밍턴에서는 오래 전부터 행사준비를 해왔다고 한다. 현지 티벳 문화센터는 행사 장소에 수 천명을 수용할 텐트를 세우고 에어컨 시걸을 완료했다. 행사기간 12일 동안 투입되는 예산은 2백만 달러, 8월 28일 시카고 자연사 박물관에서 열렸던 달라이라마 강연회의 125달러짜리 입장권은 사전에 거의 매진 됐다.
달라이라마와 가까운 서양의 수도승 니콜라스 브리랜드 뉴욕 티벳 센터 소장은 달라이라마의 미국방문을 준비하고 수행하는 총책임자다.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은 1979년 인도에서 그의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됐다. 당시로선 드믈게 명상과 수행에 관심을 가진 벽안의 청년에게 달라이라마는 첫 미국행의 공식 카메라맨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뉴욕 대학 출신의 사진작가 니콜라스는 이후 티벳 불교에 심취, 수도승이 되기로 결심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의 할머니 다이애나는 패션잡지 〈하버스 바자〉의 편집장을 지낸 패션계의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손자의 결심에 실망하여 의절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외교관, 어머니는 시인, 동생은 최고급 남성복을 만드는 아르마니의 수석 부사장이다.
니콜라스는 티벧센터 초대소장인 키용라 아토 린포체를 만나 다시 태어났다. 14년간 인도 사원에서 고행을 한 그는 이제 “전기도 전화도 뜨거운 물도 없는 인도의 사원 생활보다 맨해튼 생활이 더 힘들다”고 토로한다.

Tuesday, March 6, 2012

만행 나의 도반 세번째 이야기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명공스님

명공스님 역시 재미있고 특별한 스님이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에 소련에서 태어났다. 소련에서 아주 유명한 생물학박사였다. 러시아에서 가장 명문인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 그 나라에서 일반 사람은 만질 수 없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학 엘리트 중 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는 일단 모스크 바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만 하면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다.
그의 연구 결과는 매번 훌륭한 것이어서 그는 아주 잘 나가는 생물학자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공산주의 사회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일거수일투족을 옥죄는 시스템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는 나은, 아니 정치적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완전히 부패와 강압만이 가득한 곳이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동료학자들은 그를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제발 마음을 다시 고쳐먹고 사회에 순응해 살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연구원에서 쫓겨나 국내 추방을 당하게 된다. 시베리아의 황량한 버려져 텐트를 치고 사냥을 하는 원시인과도 같은 삶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소련 정부는 능력 있는 과학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 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공 들여 연구한 생산물들이 국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에 비판적이다 싶은 과학자들은 그런 식으로 격리를 했다.
춥고 외로운 곳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명공스님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옮겨 살게 되었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그즈음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방정책을 펴 소련의 빗장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때마춰 마침 큰스님의 강연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개방 분위기와 전통적으로 불교에 대해서 만큼은 상대적인 관대함을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 사회의 특성 때문에 큰스님은 1980년대 후반 러시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법문을 하셨고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 젠센터를 개설하기에 이른다.
명공스님은 큰스님을 만나자마자 큰 감명을 받고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큰스님을 만났을 때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큰스님은 간단한 대답으로 그의 복잡한 생각을 끊어놓았다. 그는 그날로 페테르부르크 젠센터로 가서 수행을 시작했다. 경전도 열심히보고 공부도 많아하고 숭산스님의 책도 많이 읽었다.
그는 소련 체재가 무너진 뒤 1996년에 서울 화계사로 와서 동안거를 시작하면서 출가를 했다. 당시 50대 후반이었는데 행자생활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화계사에서 아주 유명했다. 특히 작년 화계사에 수해가 났을 때 나는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큰 바위를 옮기고 더러워진 가재도구를 쉬지 않고 정리하는 그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했다.
화계사 신도들은 그를 아주 존경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소련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이빨이 거의 남지 않았는데 신도들이 그가 일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이빨까지 다 해줄 정도였다.
러시아 민요와 비슷하다며 틈날 때마다 한국 뽕짝을 듣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이다.
만행 치린스님
이분은 싱가포르 출신인 중국계 스님이다. 그는 최근 3년동안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치린스님은 나의사제舍弟 이지만 나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없다. 내가 그에게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는 스님이 되기 전에 싱가포르에서 스쿠터를 몰고 다니며 안다닌 데가 없을 만큼 자유분망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은 허무감과 삶에대한 의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처음에 점한 불교는 중국 불교로 경전도 많이 읽었고 예불도 직접 주도하면서 열심히 절에 다녔다. 그러다 1996년 싱가포르 젠센터에서 큰스님을 만나 큰스님 밑에서 출가를 했다. 그리고는 아예 한국으로 와 살고 있다. 그는 아주 순수하며 온화한 마음을 가졌다.
또 차茶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다. 어떤 차든지 한 모금만 마시면 이 차가 어느 나라 것인지는 물론 차의 성분이 무엇이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금2방 알아차린다. 심지어 찻잎을 언제 어느 철에 땃는지 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니, 스님 언제 그렇게 차에 대해 연구를 하셨어요?” 하고 물으면 그는 하하하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중국인입니다.태어나면서부터 차를 마셨으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차린스님은 앞으로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 전역에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알릴 스님이 될 것이다.
만행 도관스님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하고 싶은 스님은 화계사의 도관스님이다. 그는 한국인 스님이다. 내가 감히 한국인 스님들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몰라 여러 번 고민했지만 개인적으로 도관스님께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마지막으로 적기로 했다.
그는 진정한 수행자다. 화계사 총무 스님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면서도 매일 참선과 수행을 빼놓지 않는 수님이다. 나는 도관스님의 삶을 보면서 저런 수행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의 많은 스님들이 되도록 신도들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신도들과 수행을 같이하고 싶어하지 않는 스님들도 보았다. 그러나 도관스님은 매일 하는 모든 수행을 신도들과 그리고 다른 스님들과 항상 나누려 하신다.
그는 지난 3년동안 화계사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해온 3천배 행사를 빠지지 않고 지도하신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매달 3천배 행사 때마다 화계사에는 3백여 명이 몰려드는데 도관스님은 몸이 아프건 말건 일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매달 거르지 않고 3천 배.수행을 하곤 하는데 병이 났을 때도 신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천 배를 계속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곤 했다.
저녁 일곱 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50분 절하고 10분 귀는 식으로 진행되는 3천 배, 도관스님은 그 10분 쉬는 시간에도 온전히 당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지 않고 신도들 곁으로 간다. 그러면서 힘들지는 않는지 염려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들을 격려한다
모든 일상을 수행과 접목시키려는 그의 삶이야말로 참다운 수행자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Monday, March 5,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현문스님
현문스님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생과 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분이다. 그는 폴란드 스님이다.
화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음악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를 우리는 또 ‘황금의 손을 가진 스님이라고 부른다. 고장 난 것은 뭐든지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장차 폴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현문스님은 지금도 피아노만 있으면 바흐, 헨델, 모차르트 곡을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폴란드에서 유명하다는 음악 선생님들을 찾아 다니며 작곡법과 지휘 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를 새장 속 새처럼 가둬놓았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자기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자라면서 조국 폴란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으나 점점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폴란드 정부가 외부 강대국인 소련의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조국 폴란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과학자가 되기로 한다. 당 간부나 엘리트 당원을 위한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화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조국에 더 유용하게 쓰여지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큰 경험을 했다.
폴란드 국민들의 98퍼센트는 가톨릭 이다. 폴란드에 가면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성당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학생이 되자 현문스님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견진성사 (영아세례 다음에 받는 칠품성사 중 하나로 주교가 성신의 은총을 주기 위하여 그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마르는 성사)를 받기 위한 교육에 참여한다. 추기경이나 주교로부터 은총을 받는 이 행사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그때 현문스님이 다니던 성당의 주교님은 폴란드에서도 가장 존경 받는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었다.
이분이 후에 교황 요한 바울 2세가 되신 바로 그분이다. 현문스님은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 1, 2년 전에 견진성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이었겠는가.
수련 마지막 날, 추기경님은 학생들에게 그 동안 가르침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현문스님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일찍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에 휩싸였다. 세상의 많은 불공평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견진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이 의문을 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문스님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면 왜 장애인들을 만드셨을까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가 나뿐 일을 하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지.”,
현문스님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신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신부님 말씀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난 뒤 성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현문스님은 청년 시절 폴란드의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반정부 지하단체에 가입한 뒤 가열찬 투쟁정신(?)으로 운동권의 대표가 된다. 명석한 머리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그는 운동권의 스타였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하는 이론가였으며 화학물질 제조 기술도 갖고 있어 각종 시위용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당시 폴란드 반정부 운동의 신화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급기야 정부에 체포돼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는 석방돼서 다시 저항하다 또 붙잡혀 들어갔다. 석방과 구금을 반복했다. 그 당시 그는 완전히 쫓기는 신세가 되어 부모 형제들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반독재 반정부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아주 커다란 조직을 만들려다 체포된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제 살아서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졌다. 당시 그가 도모한 일이 워낙 큰일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할 것이고 고문의 고통과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반정부 투쟁을 하다 잡힌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죽어갔다. 혹은 중노동을 하는 수용소로 옮겨져 과로로 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 달랐다. 워낙 반정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잘못되면 성난 민중들이 어떻게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부 역시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죽인다면 그의 명성과 활약상을 들어온 폴란드 국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문은 면하게 되고 대신 악명 높은 교도소에 장기형을 받고 수감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 교수가 어느 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폴란드 안에서 현문스님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프로잭트를 맡아 연구중이었다. 정신적인 신념과 정치적 행위에 관한 연구였다고 한다.
인터뷰는 3일간 지속되었다. 인터뷰 마지막 날 그 교수는 현문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니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문스님은 일말의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교수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만약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고통에서 허우적댈 수 있습니까? 도대체 신이란 어떤 분이시길래 우리가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 내신다는 말입니까?”
그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폴란드 대다수 국민들은 카톨릭을 믿고 있었고 투쟁은 대부분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물론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간부들은 당연히 무신론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무신론자’들은 그들과 적어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운동권 인사는 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2주일 뒤 현문스님은 뜻밖에 석방을 통보를 받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산당이 현문스님을 사면한 것이다. 자신의 사면이 그 여교수의 인터뷰 보고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석방 훨씬 뒤의 일이었다.
오랜 저항운동과 감옥생활, 그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서는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문과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이 가져다 준 변절이 아니었다. 그는 감옥을 나온 뒤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아! 나는 누구인가.’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토록 열심히 반정부 투쟁을 해왔건만 마음속은 허전했다. 당시 그와 투쟁했던 동지 몇몇은 티벳 불교에 심취하고 있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카톨릭을 탄압하는 대신 불교에 대해서는 무신론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티벳불교의 대선사인 카투 린포체에게 그를 소개했고 현문스님은 그의 지도아래 명상수행을 했다. 현문스님은 아주 열심히 수행에 참여했다. 이틀에 한 번씩 불교경전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문스님은 불교신자인 한 친구로부터 녹음 테이프 한 개를 선물 받는다. 그것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 녹음이었다. 그는 테이프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이 그제야 끝나는 듯한 환희에 휩싸였다. 며칠 뒤 현문스님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큰스님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운영하고 있던 젠센터를 방문하게 된다.
바르샤바 젠센터는 1978년에 문을 연 것으로 당시 큰스님의 가르침은 삶에 환멸을 느낀 폴란드 젊은이들 사이에 점점 파고들고 있었다. 현문스님은 이곳에서 용맹전진을 마치고 다시 고향 크라콥으로 돌아갔다.
불교는 그들에게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티벳 • 중국 • 일본의 불교 서적들이 서구를 거쳐 폴란드로 몰래 수입되고 있었고 학생들과 지성인들은 너도나도 그것을 복사해다 읽었다. 현문스님 말에 따르면 어떤 책을 너무 여러 번 복사를 해 읽기가 어려운 것도 많았다고 한다.
현문스님은 1년 후 드디어 숭산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당장 바르샤바 대학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그는 가장 아끼고 있던 로큰롤 음반을 모두 내다팔았다. 책과 옷가지까지 다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여비로 바르샤바 대학으로 간 스님은 깜짝 놀랐다. 이미 선방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에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큰스님의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그날은 폴란드 내의 유명한 지성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큰스님은 바르샤바 대학에서 돋장 강의를 마치고 바르샤바 젠센터로 가셨다.
젠센터 선방은 이미 완전히 만원이었다. 현관과 복도에까지 빼곡히 주저앉아 너도나도 참선을 배우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엌에까지 주저앉아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스님과 인연을 맺은 현문스님은 본격적으로 큰스님의 일을 돕는다. 우선 고향 크라콥에 젠센터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숭산 큰스님이 좀더 자주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 때마다 쌍수를 들고 반대를 한 것은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폴란드 사람들이 혹시 남한 사상에 물들까 하고 매우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큰스님의 뒤를 미행하고 몰래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큰스님의 설법을 적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폴란드에 ‘한국 불교 문화전시회’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거리에 붙인 포스터를 모두 찟고 전시장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방해는 오히려 폴란드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큰스님을 더욱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현문스님은 바르샤바 젠센터에서 생활했지만 오랜 기간 출가를 주저했다. 결혼도 않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였가 때문에 출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자만 출가보다는 돈을 볼어 큰스님을 자원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석사업을 시작해 돈을 꽤 많이 번다.
나는 언젠가 현문스님께 “왜 하필 보석가공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여자들이 보석에 돈 쓰기를 좋아하니까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의 무대도 넓어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싱가포르를 제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하며 사업을 발전시켰다.
수익금의 대부분은 각 나라에 세워진 큰스님의 젠센터에 송금했다.폴란드 사람들이 한국의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행기표와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한번도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다. 출가를 안 했어도 출가한 스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 날 큰스님이 그에게 “이제 출가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때가 안 됐읍니다. 한 몇 년 더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태어날 때 자기 자신에게 “내가 태어날 준비가 되었느냐” 하고 묻고 태어났습니까? 또 죽을 때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가” 하고 죽습니까?”
현문스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자 이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십시오. 당신은 이미 오래 전 출가한 수도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문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출가를 했다. 그 역시 지금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신다. 한국 문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는 한국의 전통예술, 그중에서도 목공예와 도금공예에 관심이 많다. 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시는 현문스님. 그에게 존경을 보낸다.

Sunday, March 4,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이야기

만행 무심스님

다음으로 소개할 분은 현재 화계사 국제선원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미국인 스님인 무심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그는 현재 숭산 큰스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스님이다. 큰스님과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큰스님의 모든 이정을 짠다.
앞서 소개했던 대봉스님처럼 무심스님도 필라델피아의 유태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교수이고 동생은 미국에서 유명한 해양 생물학자다. 그 역시 1981년 미국의 명문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가했다.
국제선원 스님들 중에는 비록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를 하긴 했지만 한국과 별로 인연이 없어서 음식이나 생활방식이 잘 안 맞아 생활하는 데 고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무심스님은 나 만큼이나 전생에 한국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정말로 한국 사람 이상으로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 음식도 무엇이나 잘 드신다. 속담도 모르는 게 없다.
무심스님은 숭산 큰스님 제자들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으셨다. 이것은 외국인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조계종이라는 큰 우산 아래 들어간 일이어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미국 관음선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는데, 무신스님 이후로 대성스님, 청안스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 한국 조계종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무심스님은 출가한 직후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화계사 국제선원이 만들어지면서 총무일도 맡고 수덕사, 신원사, 화계사 등에서 안거수행도 많이 했다.
그는 영어와 한국어를 다 잘하기 때문에 숭산스님의 모든 사무적 일정을 헌신적으로 맡아보고 있다. 무심스님은 아주 세심하고 꼼꼼하기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이나 큰스님을 옆에서 모시고 있다. 그의 성실성과 치밀함은 정말 대단하고 컴푸터에도 굉장히 능하다.
화계사 국제선원에서도 지도법사이기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정말 한시도 제대로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큰스님이 몇 차례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는데 그때마다 무심스님은 24시간 큰스님곁에서 간호를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미국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의사와 간호사들이 무심스님의 정성에 탄복하여 큰스님께 ‘누구냐’고 여쭌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큰스님은 선뜻 ‘내 아들이다’라고 대답하셔서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고 한다.

만행 명행스님

명행스님은 미국의 명문 코넬 대학교에서 그리스와 라틴 등 고전문학을 공부한 수재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아직도 자유롭게 쓰고 말할 줄 안다.
그는 천재에 가까운 암기력을 갖고 있으며 꼼꼼한 성격에다 두터운 신심을 갖고 있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훌륭한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잘생겼으므로 결혼도 해서 마름다운 아내와 아이들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고전문학에 심취한 이유는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 진리냐’ ‘삶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던 그는 수많은 그리스, 라틴 고전들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옛날 고어로 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동양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동양을 여행하기로 하고 우연히 신문을 읽다가 한국에서 영어선생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 즉시 자원을 했다. 그는 4년동안 한국에서 전라북도 전주와 충청남도 대전, 공주 일원의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고 보면 명행스님 역시 한국과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그는 도시생활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지방에서 살았는데 겨울에 우연히 공주로 여행을 갔다가 당시 계룡산 신원사에서 동안거 수행을 하는 외국 스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신원사에서 그와 처음 대화를 나눈 스님이 바로 무심스님이다. 무심스님은 그에게 화계사 국제선원을 소개하며 꼭 한번 오라고 초청했다. 그는 신원사에서 며칠 묵으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듣는 사찰의 종소리가 그렇게 친근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신원사 몇몇 외국인 스님들로부터 숭산 큰스님과 벽암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서울을 오가며 국제선원에서 수행을 하고 큰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한 것이다. 그는 출가하면서 그때까지 읽고 있었던 그리스, 라틴 책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그는 매일 1천배 수행을 하는 스님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부드러워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경을 받고 있다.

만행 청안스님

나는 지금 유럽에 한국 불교를 포교할 스님 한 문을 소개하려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청안스님이다.
청안스님의 고국은 헝가리, 청안스님은 특히 자신의 고국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하며 고색창연한 헝가리 문화와 역사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헝가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한국을 아주 좋아한다. 두 나라 모두 오래되고 자랑스런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웃 강대국으로부터 수 차례 침략을 받았으나 조상들의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헝가리 국민이나 한국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유럽에서도 특이하게 헝가리 국민들만 매운 음식을 즐긴다고 한다. 어떤 음식은 유럽사람들이 도저히 입에도 못 댈 정도로 맵다고 한다. 또한 두 나라는 언어의 구조와 형태까지 비슷하다고 한다.
청안스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헝가리어가 몇 천 년 전에 동일한 언어의 뿌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헝가리인 들이 본래 아시아 땅에서 살다 지금의 헝가리 땅으로 이주해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헝가리는 유럽 안에서도 가장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문화를 가진 나라다.”
그래서인지 청안스님은 한국말도 유창하고 한국 음식도 잘 드신다. 그의 아버지는 국제적으로 존경 받는 심장병 전문의다. 어머니 역시 의사다.
그는 자랄 때부터 영어, 연극, 스포츠에 만능 재주꾼이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대학 다닐 때는 ‘실험연극’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에서도 중여한 예술 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실험연극은 대본을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이 즉석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전에 계획된 말보다는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시 그 경험을 통해 청안스님은 순간에서 순간, 상황에서 상황, 말이 필요없이 현실을 인식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1990년 헝가리에 법문을 하러 온 숭산 큰스님을 만나게 된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대형 강의실은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당시 청안스님은 이미 헝가리의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창업한 번역회사를 열심히 운영하고 있었다. 헝가리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해 헝가리도 바야흐로 개방의 물결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많은 회사들이 헝가리 시장을 놓고 경쟁적으로 자본참여를 할 때였다. 그때 청안스님은 그 회사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큰돈을 벌었다. 어떤 때는 그의 한달 벌이가 아버지의 4개월 월급을 합친 것보다 많은 때도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출가를 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했더라면 지금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부다페스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순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미국을 서너 차례 방문 한다. 또 1993년 10월에는 3년마다 한 번씩 미국에서 전세계 큰스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세계일화’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미국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서 3개월간 안거수행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가득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헝가리에서 돈을 벌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출가를 했다.
부모님은 거의 혼절을 했다 그는 외동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던 아들에게 부모님이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래도 나는 형제가 여덟이나 되었기 때문에 출가하면서 부모님의 노후 걱정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청안스님의 출가는 곧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질 자식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속 깊은 고통 속 에서도 출가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부모님 곁을 떠나 5년간이나 한국에 살고 있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한 수행자다. 자신이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해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청안스님은 화계사 국제선원의 총무 및 재무스님으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신다.
청안스님은 지난 여름 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고, 곧 고국인 헝가리로 돌아가 젠 센터 주지를 맡을 예정이다. 그는 한국 불교를 유럽에 알리는 선구자가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