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24, 2011

감자깍기

지혜의 향기

감자깍기

이원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열매나 알뿌리 가운데는 씻어서 그냥 통째로 먹는것도 있지만 대개는 껍질을 손으로 벗기거나 칼로 깍아야 먹기에 좋다. 익어서 벌어지려는 방송이 같은 경우엔 가시에 찔리지 않고 그 속에서 고동색 알밤을 발라내자면 상당한 재간이 필요하다. 발라냈다고 다가 아니다. 반질반질한 알밤의 껍질에 칼을 대어서 잘 볏겨 내면 그 다음엔 떫은 맛을 내는 보늬가 보이고 그 속에 비로소 아그작 아그작 씹을 수 있는 맛 있는 밤톨의 맨살이 들어 있다.

고구마는 그냥 깍아서 먹기도 하지만 생감자는 먹을 수가 없다. 굽거나 삶아서 껍질을 벗겨야 한다. 미리 껍질을 벗겨서 삶기도 하는데 양이 많을 때는 이 감자 깍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날카롭게 닳은 놋숫가락 같은 것으로 껍질을 긁거나 작은 칼로 하나하나 깍아야 하는데 절에서 대중공양을 준비할 때는 아렇게 안 한다.큰 고무대야에 감자를 쏟아 넣고 물에 푹 불린다. 그러고선 맨발로 들어가 마구 짓밟는다. 그러면 감자끼리 문질러지면서 다함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승산 스님이 말씀하신 감자 깍기 비법이요 여기서 나온 게 감자 껍질 벗기기식 대중 수행 방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혼자의 힘만으로 스스로 자신의 껍질을 벗겨 내기가 어렵다. 근기가 출중한 큰스님 같은 분이 예리한 칼을 들고 다기앉아 정성스레 깍아 주면 아집과 편견으로 똘똘 둘러싸인 고집스런 보호막이 벗겨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이런 행운을 바랄 수는 없다. 버리고 싶지만 버리기 어려운 우리들의 껍질! 아무리 누르고 갈고 닦아도 숨죽인 채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솟아올라 일을 망쳐버리는 나만의 괴벽,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혼자 숨어 있지만 말고 고무대야 속의 감자들처럼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도반들과 어울리고 대중과 만나 부대끼는 것이다. 배우고 듣고 고치고 달래는 그 모든 인간적인 사소한 부대낌들까지 나도 모르게 우리의 껍질을 동시에 대량으로 벗겨내는 생산성 높은 공정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무엇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ㄴ데 보처님 공부를 할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안으로만 파고들어 사람들을 멀리하고 어울리지 않아서 껍질이 더 단단해지는 분들도 없지 않다. 모이는 것을 천시하며 함께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 없으시다. 비록 혼자서 가슴을 부등켜안고 죽을지언정 나의 당당한 울타리 안을 절대로 열어 보이지를 않는다. 남들이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용서할 수 없다. 그래야만 진정한 불교라고 자위하거나 정말 그렇게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을 돕고 괴로움에서 건지기 위한 것이다.

그러자면 자신이 먼저 깨우쳐야 하므로 출가한 수행자들은 인정 기간 세속과 거리를 두고 고독 속에서 철저한 자기 성찰과 수행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의 길에 있어서도 길을 함께 가는 길동무가 없고 이들을 외호하는 승가가 없다면 홀로 필생의 원을 이루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하신게 부처님 말씀이다. 하물며 세속에 몸담고 있는 재가 불자로서 언제까지나 골방에만 틀어박혀 외톨이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 이제 일어나서 선지식이 계신 곳, 스님과 불자들이 모인 곳을 찾아가자. 외따로 떨어져 썩는 감자가 되지말고 오울려 함께 몸을 비비고 껍질을 벗자.

Sunday, June 19, 2011

6-25 전쟁의 원인-근인

625 전쟁의 遠因 近因

권태영 몬테벌로대 명예교수

6월이다 6월은 625를 회상케 한다 625 전쟁에 참전한 탓일가? 625전쟁을 회상할 적마다 전쟁의 원인을 생각하게 된다.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알아본다. 遠因을 알자면 한미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한미관계는 1882년에 체결된 힌미통상 수호조약으로 시작됐다.한국은 마국의 도움을 받아 외국의 침략을막고 독립을 지탱하는게 주 목적이었고,미국은 통상이 주목적이었다.조약에는 중재구절 (good offices clause)이 들어있었다.

러ㆍ일전쟁(1904~5)에서 일본이 이기자 시오도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 친일 정책을 택했다. 미국은 한미조약을 잊어버리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미국과 일본이 태프트-가쓰라비밀각서를 교환한 사실을 한국정부는 전연 몰랐다. 태프트는 당시 미국국방장관이었고 가쓰라는 일본수상이었다.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이권을 존중하고, 미국이 일본의 한국 이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러ㆍ일전쟁후 미국이 친일정책을 택하지 않고 625전쟁 때처럼 한반도를 수호했다면 2차대전도 피하고 뒤따른 한국전쟁도 피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을 집어먹는 걸 미국은 보고만 있었다.일본은 만주를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손을 뻗폈다. 드디어 1941 12 8일 진주만을 공격해 2차대전을 도발했다.2차대전 중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이기자면 소련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겨울에 얼지않는 한국의 항만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국을 미끼로 소련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이 아직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국을 전후 당분간 국제 신탁통치 하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심한데는 두가지 구실이 있었다.

진주만 공격 2주 후 중경에 있는 미국대사에게 한국임시정부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한국임시정부는 온건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공산당의 지지를 못 받고 있어 인정하지 않는 게 좋다고 보고했다. 당시는 미국이 소련의 협조를 구하던 때였다. 주미 중국대사에게도 한인망명자들의 동향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만 씨와 한길수 씨가 분열돼 있어 희망이 없다고 보고했다. 한길수 씨는 당시 미 국무부의 호평을 받은 인물이었.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을 한국 신탁통치 이사국의 일원으로 초청하고, 그 해 7월 포스탐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소련의 북한점령에 합의 했다. 38선을 경계선으로 결정한 것은 전후 맥아더 장군의 일반명령 제 1호였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토령의 함반도 정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학자들의 해설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펜실베니아 대학교수는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란 책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의 공산주의 위협을 자각하지 못했다고 해석하고,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사학교수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란 책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의 공산주의 위협을 감안했기 때문에 소련을 신탁통치 이사국으로 초청했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야망을 묵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주벨트 대통령이 1945 4월에 서거함으로서 미소간의 협조가 깨어지고 말았다.

625전쟁의 近因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국문제 전문가 셀리그 헤리슨은 Korean Endgame이란 책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말한 것처럼 공산군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지령을 받고 남침을 감행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이것이 세계공산화 계략의 첫 단계라고 생각 했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를 보면 해석이 달라진다.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령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김일성이 단독으로 했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박헌영이 남북통일을 주장하자 김일성이 선수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박헌영은 군정 때 남로당 당수로 있다가 월북한 사람이다.

1955년에 숙청당했다. 1949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제의하자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골격하지 앟는 한 공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1950 1월 김은 다시 스탈린을 조르기 시작했다. 지금 치지 않으면 남한이 너무 강해진다고 했다. 그 해 4월 다시 스탈린을 찾아갔다. 그래도 스탈린은 승낙하지 않았다. 김이 전보를 48통이나 보내 졸라댔다. 드디어 5월에 승낙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전쟁이 단사간에 끝날 거라고 오산했다.

이것이 625전쟁의 遠因과 近因이다 러ㆍ일전쟁 후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이 친일정책을 택하지 않고 한반도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2차대전과 625전쟁을 피했을 것이다. 2차대전 후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북한을 소련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오늘날 북한의 시달림을 받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 하다.

Saturday, June 18, 2011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끝편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끝편

仙道체험기 김태영

성현들의 지혜는 영원하고 완전하지만, 가르침의 전달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옛 성현들의 통로에 불과하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지도자들을 숭배하는 것은 확실한 철학도 없이 교리나 의식을 받드는 것과 같다. 성현들의 길을 따르는데는 영웅숭배란 있을 수 없다.

위대한 성자들은 자신들을 어떤 특정 종교나 교파와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차별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들은 인류 전체에 속한 영혼들이다.

수학에는 숫자 1이 있다. 모든 숫자들은 똑같이 1의 배수이다. 이와 유사하게 이 우주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실재가 있고, 이 우주의 다른 모든 이름은 그 하나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

0 을 먼저 쓴 다음 1을 놓아보십시요. 이렇게 (01) 말입니다. 만일 1이 먼저 나온다면 0은 가치를 지니게 되지만, 만일 1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면 0 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0 (zeros) 과 같은데, 만약 하나 (1) 의 실재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실재를 기억하게 되면, 삶은 보람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삶은 짐이 될 것입니다.

㉲ 물질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물질로 변화될 수 있다네, 이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라는데 있지. 모든 명칭과 형태의 이면에는 현대의 과학자들이 아직 그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일관된 법칙이 숨어 있다네, 베단타나 고대의 과학자들은 삶속에 내재된 그러한 법칙들을 가르쳐 주고있지.

삶의 에너지는 유일한 것이며, 우주 만물은 다양한 것 같으나 본질은 오직 하나 뿐이라네. 즉 물질의 근원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지. 따라서 두 물질간의 관계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네. 물이 얼면 얼음이라 하고, 증발될 때는 수증기라 하지.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똑같은 물질의 세 가지 형태와, 그것들간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형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말이네. 오늘날 과학자들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와도 같다네. 즉 그들은 모든 물질 안에 있는 동일성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옴겨가는 것에 대한 법칙을 알지 못한다네.

근심은 몸을 마비시키고 긴장되게 하지만, 명상은 마음을 느슨하게 플어주고 고요하게 한다. 명상에는 마음의 정화가 필수적이나, 근심에 의한 것은 마음의 정화가 필요 없다.

극심한 근심이 마음을 지배할 때 마음은 마비되고 무감각하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 세상의 불행에 대해서 명상한다면, 그것은 근심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이 경우 개인의 마음은 확장되어 우주의 한 마음과 결합된다. 마음이 개인의 이익에 집중될 때, 그것을 근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불행쪽으로 향할 때, 그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둘 다 마음이 집중되지만, 후자의 경우엔 의식이 확장된다는 점이 다르다.

㉵ 명상瞑想은 확장이요, 근심은 긴장이다.

개아個我 의식이 확장되어 초월 의식과 결합하는 것은 사마디samadi라고 한다.(三昧 無念無想 )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그러므로 잠재된 힘을 일깨울 수 있다면 누구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 무아의 신성을 얻은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고칠 수 있다. 모든 치유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불행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일이다.

개아의식個我意識이 확장되어 우주 의식에 이르게 되면 타인의 병을 대신 앓고자 하는 연민의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고통이라 하겠지만, 성자들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의식이 개아의 테두리에만 제한될 때, 사람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도통을 받지 않는다.다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파할 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감각이 세상의 객관적인 대상에 접할 때 나타나는 서로 상반된 감정이다. 의식이 감각의 수준을 초월한 사람은 이 대립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감각으로부터 임의로 마음을 거둬들여서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의식의 중심을 밝히는 행법이 있다.그런 상태의 마음은 쾌락과 고통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한 곳에 집중된 마음은 치유를 가능케 하는 힘찬 원동력을 낳는다. 모든 치유의 힘은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치료가 개아를 의식하는 순간, 치유의 자연수러운 흐름은 멈추어 버린다. 저급한 마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의지의 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만일 인간이 끊임 없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의식하면서, 모든 행동을 그 목적의 실현을위해 집중한다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불행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법이다.

㉺ 사랑이 없으면 의무는 속박을 만든다. 사심없이 남에게 봉사하면서 迷妄의 언덕을 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복되도다.- 미망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못잡고 헤메임.

㉻ 인간은 필요한 모든 치유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 사용법을 모른다. 그러나 내면이 잠재되어 있는 치유력과 접하는 순간, 자기자신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은 오직 하나의 신에 속한다. 인긴은 단지 그 힘을 나르는 그릇인 것이다.

ⓐ 당신 앞에 와서 나를 숭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믿지말라. 예수도 붓다조차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 영적인 길에는 전혀 무지한 사람이 신비한 지식의 소유자로 추앙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먼 믿음을 반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나는 전에도 그런 광신자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경험했었다.

ⓒ 깨달음을 얻은 스승은 육체적 정신적 부조화를 벗어 버리고 순수하고 밝은 우주의 빛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스승 앞에 서면 스승의 순수한 흐름과 연결되기 때문에 축복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대들이여! 자신의 등불을 밝혀라. 구원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 자신을 깨달아라. 열반을 얻으면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이다.” 하고 석가는 말했지만 오늘날의 라마승이나 불교 승려들은 의식儀式만 행하고 있다.

ⓔ 스승이 당신 앞에 서 있더라도 당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승인줄 모를 뿐 아니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 다이야몬드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다이야몬드가 앞에 있어도 그것을 한 조각 유리로 취급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그리고 다이야몬드와 유리의 차이점을 모를 때 유리 조각을 하니 얻어다가 그것이 다이야몬드인줄 알고 평생 간직할 것이다.

ⓕ 법맥을 받아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은 바탕이 좋은 제자를 찾는다. 그는 특별한 표시나 증상을 보고 누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어떤 제자도 스승을 속일수는 없다. 스승은 제자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쉽사리 간파한다. 만일 제자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스승은 방편을 써서 점차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심지와 기름이 알맞게 갖추어졌을 때 스승은 불을 붙인다. 그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그결과, 성스러운 영혼의 빛이 발해지는 것이다.

ⓖ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창조한다. 죽음과 탄생은 단지 삶의 두 현상 일 뿐 본래의 성품을 잃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자유가 온다.

ⓗ 내적인 불멸성을 자각한 사람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다.

죽음이란 육체의 습관이자, 또한 필요한 변화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 순간을 위해 교육을 받아 두어야 한다. 죽음이라고 부르는 변화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요기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몸의 습관일 뿐이며, 성장 과전 중에 일어나는 변화 가은데 하나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면, 노년이 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을 때라도 지금처럼 비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 현대인들은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을 탐구하여 죽음이라고 하는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 내부 생명의 율동을 배우려면 욕망을 넘어사는 법을 배우고, 율동적인 파동의 정묘한 힘을 느낄 수 있을만한 감수성과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 히말라야 성자들의 첫번째 메시지이고, 두번째 메시지는 내면의 실상實相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고 종교나 문화에 관계 없이 순수한 道를 베풀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갈고 닦아라. 과학에 대한 수용 능력이 있다면 모든 수행법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의 덕을 기르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로 한걸음 깊이 나아가는 것이된다. 겸손으로 해서 잃는 것은 없다. 대신 많은 것이 올 것이다. 기도와 명상은 내면의 덕을 기르는데 필요한 의지력의 발판이 된다.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모두 하나의 진리에서 나왔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종교만 따른다면,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신에 속한 사람은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 사랑은 우주의 종교다. 자비로운 이는 종교의 한계를 넘어 나늼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깨닫는다.

마음은 수많은 힘의 원천이다. 그 속에 숨겨진 자원들을 개발한다면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다 성공할 수 있다. 만일 마음이 훈련되어 한 곳에 집중된채 안으로 향한다면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마음은 인간이 지닌 가장 뛰어난 도구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 박광수 옮김 정산사 펴냄 히말라야 성자들 (부제목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영혼의 순례기) 중에서 유익한구절을 저자가 인용하였음.

Wednesday, June 15, 2011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두째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두번째

仙道 체험기 김태영 지음 중에서

㉮ 최고의 스승은 그의 가르침을 침묵으로써 전한다.

㉯ 초심자들이 명상 수련을 시작하면,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리고는 이 변화무쌍한 이름과 형상의 세계는 거짓이며, 그 뒤에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진리를 알게 되었을때는,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만유 속에 편재해 있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단계에서 구도자는 절대세계와 현상세계 양쪽에 들어 있는 똑같은 단 하나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오직 단 하나의 궁극적 실체만 존재하며 겉으로 거짓인 것처럼 보아는 것도 실제에 있어 서는 절대 유일자의 한 현현顯現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생들만이 이러한 표면적인 모순에 혼동을 겪게 된다. 유능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각기의 수준에 맞는 단계들을 의식할 수 있게 해 준다.

㉰ 지식은 단지 정보에 불과할뿐 오직 실천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체험을 해야 한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것만이 참된 앎이다.

㉱ 질시나 질투는 아집我執이라는 자궁 속에서 자라나며, 이기심과 집착심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 욕망은 불행의 어머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욕망의 에너지를 자각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돌릴 때 욕망은 깨달음의 도구가 된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욕망은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 실현의 도구로 변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촛불은 산들바람만 불어도 꺼져 버린다.그러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다루워서 숲에 불을 붙이면 산불이 된다. 그때, 바람은 불을 끄는 역활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을 세차게 오르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도자가 수행의 도움으로 욕망의 불을 알맞게 지펴가면 그 불은 점점 자라나 크나큰 에네지로 변한다.큰 어려움과 아품은 장애가 되는 대신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의 길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장애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세상 사물에 투영하는 자신의 약점과 가치관이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낼 뿐이다. 집착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가장 큰 장애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린다면 이런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道의 길을 갈때 신은 많은 유혹을 던진다. 그러나 모든 유혹을 걷어찼을 때에야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게된다. 어린애가 울때 그 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처음에 어머니는 아이에게 과자를 준다. 그래도 울움을 그치지 않으면 인형 같은 선물을 주면서 달랜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이번에는 아이를 품에안고 달랜다. 어머니도 아이를 안아주기 전에 몇번 다른 장난감을 주는 법이다. 깨달음이나 자아 실현의 길도 꼭 이와 마찬가지다.

집착과 분노와 자만을 버리면 당신은 명상 그 자체가 되리라. 그러면 굳이 명상하려고 앉을 필요가 없게 된다ㅏ. 삶 전체기 바로 명상이므로

독약은 성인을 죽일 수 없다. 성인은 진리 속에 살고,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을 마친 소크라데스는 미소를 지으며 독약을 마셨다.

때가 되면 지성도 더 이상 우리를 인도할 수 없고, 직관이 앞을 이끌어 주게 된다. 지성은 계산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직관은 생명의 원천인 의식 깊숙한 곳에서 자발적으로 올라오는, 막힘 없는 흐름이다. 마음이 맑고 평온하게 가라앉았을 때 직관의 빛이 동터 온다. 순수한 직관은 의식을 확장시켜 사물을 맑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때 삶 전체가 이해되며 미망이 사라진다. 이러한 일련의 체험을 겪고나면 자연히 직관의 인도를 받게 된다.

나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의 죽음이란 불가피하다. 나는 영원한 존재다. 그런데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다니

이기심이 없고, 진실되며, 말과 핸동 뿐만 아니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에 얽매여 이기적으로 되는 사람은 스스로 많은 장애를 만들어 낸다.

무집착은 자유를 주지만, 집착은 속박을 준다.

자신의 의식을 활짝 열어 우주 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카르마(업장)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라라.

A 도력이 있는 사람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 면에서 모두 사람을 치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의 마음과 의식은 세속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속되고 산란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데 합당하지 않다. 사심이 들어가는 순간 마음은 저급한 곳으로 흐르게 된다.

B 모든 인간은 스스로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 치유력은 모든 삶의 가슴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생동하는 의지의 힘을 알맞게 쓰면 치유력을 육체나 마은의 환부로 보낼 수 있다. 치유력은 환자에게 靈的인 영양을 공급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치유의 열쇠는 사랑, 사심 없는 마음, 생동하는 의지력, 그리고 내면의 신에대한 열렬한 헌신이다.

C 삶과 존재의 예술은 출가하든지 세속에 있든지를 막론하고 인생의 목적과 무집착을 향한 자각에 있다.

D 한 나라의 문명을 말살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선 그나르의 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국인둘은 성공했다. 인도 독립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에서는 영어가 인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단일한 모국어가 없기 때문에 인도인끼리릐 의사 소통에 많은 장애가 있다.

E 불교의 사랑은 기독교의 그것보다 범위가 더 넓다. 기독교가 사랑을 인간에게만 한정했던 반면에, 불교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로 확장시켰다. 기독교는 신학의 도움을 빌어 인생을 분석란 뒤 신앙에서 멈춘다. 불교는 삶의 근원을 따져서 열반에서 멈춘다. 불교의 고행은 평화를 가르치고, 기독교의 고행은 기쁨을 가르치지만, 이 두 종교를 이해 한다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주거나 빼았아 갈 수 없는 평화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의지를 간조한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을 가꿔 나가기 위해서는 수행과 훈련, 훈습을 중요시한다.

F 기독교가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교가 니르바니(열반)를 이야기 할 때, 성현의 길은 진아를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다. 성현의 길에서는 오직 진아의 앎을 통해 궁극의 실재를 깨닫는다 기독교와 불교와는 달리, 성현의 길은 예배의 대상으로 특정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번째 글 계속

Monday, June 13, 2011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첫째

히말리야의 성자들의 지혜

仙道체험기 14 김태영 지음 중에서

아름다움이란 찬미될 것이지 파괴할 것은 아니다. 심미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무렵부터 깨어난다.

부모는 자식을 앟아서 키우고 교육시킨 뒤 유산을 물려주지만, 구르데바(스승)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흘러낭오는 사랑과 지혜를 제자애게 뿌려준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듯이 요가 전통에 관한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다.

이름과 명성은 영적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방해물이자 몰락으로 이끄는 것들이다

이기심과 자비심,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좁은 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 벽을 넘고 나면,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해 일하는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이것는 기쁨 중에서도 최고의 기쁨이며, 수행의 길에서 빠져서는 안될 과정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깨달음의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 자기의 에고에 의해 만들어진 제한된 테두리 안에섬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 없음은 세상의 모든 위인들에게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헌신적인 봉사, 나를 돏보지 않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룩할 수 없다. 사실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 다면, 별별 예배의식을 행하고 경전의 지식을 익힌다 해도 아무소용이 없다.

㉤ 믿음과 결심은 깨달음의 갈을 탄탄하게 걸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디딤돌이다. 그것 없이는 깨달음이란 말은 쓰여지거나 말해질 수 있어도 결코 아루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 나는 외롭지 않다. 외로운 사람은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충만한 생명의 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 자기를 자각하지 못하고, 바깥 세계의 사물이나 사람에게 의존할 때 외로움을 겪게 된다. 깨달음에 관한 모든 탐구는 바로 자신의 내면의 보물을 찾는 것이다. 아니, 달리 말하자면 자신이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는데 있다. 당신은 완전하다. 바깥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나더리도 결코 외로워할 필요가 없다.

㉦ 만남 중에서 지고至高의 만남은 참된 자아와의 만남이다. 자신 속에 있는 진아眞我를 깨닫는 사람은 결코 와로움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누가 우리를 외롭게 하는가? 우리를 알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외롭게 하고, 의존적이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속의 자아를 잊고있다 외적인 관계에 의지하는 것은 미몽이며, 그것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대인관계와 삶은 동의어이자 뗄 수 없는 것이다. 내면의 벗을 발견한 모든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며,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런사람에게는 외로움이 없다. 외로움은 병이다. 편안히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실재 REALITY라는 영원한 벗과의 만남을 즐긴다는 말이다.

참된 자아를 깨닫고 나서 그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인 우주 의식, 즉 대아大我와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의해서만 신을 깨닫을 수 있다.

신은 진리이다. 말과 행동 속에서 진리를 실천해 갈 때, 신과 자아의 본성에 대한 무지가 사라지고, 진아의 밝은 빛이 밝혀질 것아다.

이기적인 사람, 자아 중심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말만 한다. 자신의 이기성이 더욱 더 그를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다. 깨달음에로의 지름길은 아집을 완전히 잘라내는 일이다….. 비 이기선을 기르다 보면 에고 EGO 가 순화된다. 순화되지 않은 에고는 자신의 성장을 막는 일종의 악이다. 그러나 순환된 에고는 가짜자아와 참 자아를 구별하는 연장이다.

이지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한 의식을 확장시킬 수가 없다. 에고의 문제로 해서 자기 두레에 벽을 쌓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괴로움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늘 자기와 다른 사람은 하나라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 삶을 누리면서 아무 드려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겸손하고 사랑이 넘치는 비이기적인 사람이 인류의 진정한 봉사지이다.

㉪ 세계의 역사상 모든 위인들은 몸소 진리를 찾기 위해 큰 고생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견해에 단순히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를 박해하거나 죽음에까지 몰아넣은 소위 정통파 및 도그마 수호자들의 위협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 내면의 진리는 외적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심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알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모든 의심이 눈 녹듯 사라질 때까지 직접적인 체험의 길을 걸어가라. 직접적인 체험만이 참된 지식의 원천이 된다.

㉬ 현대인들은 명상을 하면 곳바로 결과가 나오라라고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심을 품고 있으면 의식 속에서 환영과 상상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는데, 본인은 그것을 위대한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해 버린다.그러나 그것은 사실 무의식의 산물일뿐 대단한 것도, 기뻐하거나 환영할만한 것도 아니다. 그 결과로 인한 좌절감은 마음에 불균형을 가져와 수행자는 수행을 포기해 버리거나 성장에 해로운 비정상적인 길로 빠져 버리게 된다.

㉬ 초능력은 수행 도중에 나타나는 한낱 정표에 불과하다. 그런 능력은 영성靈性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중에 그런 능력을 직접 체험하면서 조사해 본 결과, 그러한 능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발견 하게 되었다. 그러한 능력은 오히려 道에 있어서 큰 장에물이 된다 때때로 심령 능력이 잘 개발되어 다른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힌다거나, 일이 돌아가는 것을 척척 알아 맞히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은 마음을 흐트리게 할 뿐이다. 그런 것이 당신의 길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라. 수많은 사람들이 곁길로 빠져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 초능력은 누구든지 개발할 수 있다. 초자연적 기적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깨달음은 그런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