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9, 2012

만행 나의 도반들

만행 나의 도반들
우리 국제선원 승가 안에는 재미있는 스님들이 많다. 전세계에서 오신 분들이고 대부분 자유로운 서양에서 나고 자라 속세 경험도 다양하다. 그 지난한 삶의 역경 속에서 진리의 길, 도의 길을 찾아 떠만 그들의 삶은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어떤 때는 솔직히 피를 섞은 나의 가족들보다 더 깊은 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부모님.
숭산 큰스님은 나의 또 다른 부모님이시다. 부모님은 내 몸을 주셨지만 큰스님은 내 정신을 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아니, 이미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찾게 해주신 분이다. 그의 가르침,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그의 대자대비심은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사랑보다 값진 것이다.
내가 큰스님께 드리는 존경과 사랑은 신격화나 미화가 아니디. 그의 고단했던 삶과 그 고통 속에서 행했던 무서운 수행정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워 올린 위대한 깨달음, 그리하여 살아 있는 언어로 쏟아져 나오는 지혜……
나는 숭산 큰스님 때문에 수행을 시작했고 비로소 내 삶의 나침반을 가진 것이다. 만약 큰스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고통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큰스님은 나를 비롯한 모든 수행자들을 하루하루 깨여 있도록 만드는 위대한 수행자이시다.
1993년 어느 날, 뉴욕에서 내 동생 그랙에게 숭산 큰스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첫 장면에서 모든 승려들이 큰스님께 삼배를 올리는 모습이 나왔다. 그랙은 다짜고짜 나에게 “아니 어떻게 똑 같은 사람에게 저렇게 몸을 숙여 절을 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런데 그랙은 다큐멘터리 내내 숭산스님 법문을 다 듣더니 “이제서야 삼배를 올리는 심정을 알겠다”고 말해 나를 흐믓하게 한 적이 있다.
나는 한쪽 어깨에 숭산스님을 또 다른 어깨에 내 부모님을 짊어진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나의 아름다운 형제들은 소개하겠다.
무상스님
그는 나의 도반들 중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스님이다. 그는 진정 살아있는 보살이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도 비슷하고 걸어온 길이 비슷해서 서로 만나자마자 친한 친구가 되었다.
무상스님은 196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그의 전공은 고대 문학으로 그리스철학은 물론 러시아 문학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는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러시아어는 물론 불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독일어에다가 한국어까지 안다. 그는 걸핏하면 고대 시나 소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인용, 우리 모두를 즐겁게 한다. 쇼펜하우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물론 고대 희랍 비극, 세익스피어의 시와 소설 등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무상스님은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는 흑인 인권운동을 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의 남부인 앨러바마와 미시시피로 내려가 흑인 인권운동을 했다. 그 당시 이슈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그 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 몇몇은 백인 자상주의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무상스님은 그때 그곳에 계셨다. 독자들 중에도 〈미시시피 번닝〉이라는 미국 영화를 보신 분이 있을 텐데, 이 영화가 바로 당시 이야기를 재연한 것이다.
무상스님은 1년 동안 흑인 인권운동에 헌신한 뒤 예일 대학 법대대학원(law school)에 입학했다. 약자를 보호하고 돕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우선 법을 공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님이 예일 대학원이었을 때 지금 미국 대통령 부부인 클린턴과 힐러리가 1년 후배로 학교를 같이 다녔다고 한다. 최근에 나는 무상스님에게 요즘 클린천 대통령이 왜 그렇게 많은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예일 대학원에 있을 때 클린턴은 한번도 나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없었거든”(하하하)
무상스님은 정말 재치가 있으면서도 지혜가 많은 분이다. 그의 머리는 고성능 컴퓨터 그 자체다. 한번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적이 없는 탁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데다 숫자에 관해서도 거의 無不通知다. 우리는 그를 ‘걸어 다니는 계산기라고 부른다.
나는 그와 함께 한국, 홍콩, 중국, 폴란드 등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할 때 제일 골치 아픈 게 돈 계산이다. 환율이 나라마다 다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무상스님은 환율 계산하는데 거의 천재적 이었다. 우리는 무상스님에게 우리가 바꾸고 싶은 달러 액수만 얘기하면 그는 1, 2분 안에 그나라 돈으로 계산을 해낸다. 그것도 그날 그날 바뀌는 시세를 고려해서 말이다. 놀라 자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 계산기처럼 완벽한 실력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깨나 듣고 자란 나도 ‘워든지 못하는 게 없다’고 자부하지만 계산만큼은 자신이 없다.
나는 무상스님의 암산실력이 하도 신기해서 장난기를 발동해 몇번이나 그를 테스트한 적이있다. 그는 그때마다 순식간에 계산을 해냈고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정말 걸어다니는 컴퓨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리라. 그의 삶은 오직 진리를 향한 끝없는 구도의 길이었다.
예일 대학 법대를 졸업한 후 그는 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법을 공부하면서 오히려 더욱 큰 의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법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법이야말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라 확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니 법이란 것이 약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통제하는 강력한 방편에 불과했고 명예나 돈벌이 같은 개인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법을 공부하는 것이 정의나 진리의 삶과는 거리가 먼, 힘과 엘리트주의를 구현하는 삶의 다름 아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삶과 진리와 정의에 대해 수많은 교수님들, 지식인들을 쫓아다니며 물었지만 어느 누구로부터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침내 1975년 예일 대학으로 법문을 하러 오신 숭산 큰스님을 만난 것이었다. 그때 강의실에는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과 교수님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해는 큰스님이 미국포교를 시작한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이미 미국에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자리에 모인 교수님과 학생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졌다. 숭산스님은 아주 쉽고 생생한 언어로 대답을 했고, 게다가 앚주 유머러스하기까지 하셨다. 무상스님은 그때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는 그때 일을 떠올릴 때면 항상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큰스님 법문을 들은 그날 밤, 나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환생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졌다. 큰스님의 가르침 방식은 완전히 소크라테스식이었다. 큰스님의 언어는 책에 있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지혜의 언어였다. 나는 너무 감동을 받았다. 그때까지 살아 오면서 결코 그 누구에게도 그런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답은 주지 않았다.
그 다음 날로 그는 숭산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무산스님의 부모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백만장자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예일이라는 인생의 성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증서들을 모두 팽개치고 스님이 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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