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33 영원한 자유 맺는 말

33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 하겠읍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재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읍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한 종교는 새롱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읍니다.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 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읍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읍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읍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 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명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응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읍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구불멸永遠不滅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읍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玉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둡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엇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읍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만드는것도 아닙니다. 원래 娑婆세계 이대로가 極樂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中道에 두고 있읍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을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無涯自在한 생활을 하셨읍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읍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읍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 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롣 자우자재로 쓸 수 있읍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던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 힙니다.

만일 어느 집에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읍니다.

역은이의 말

이 법어집은 성철 큰스님께서 일찌기,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에 대하여, 대학생 밑 대중에게 몇차례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책입니다.

큰 스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 전인 1967년 가을에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시고서, 그해 겨울 동안거의 백여 일 동안 대중들을 위해 선-교禪-敎에 걸친 부처님의 일관된 사상은 중도사상中道思想임을 밝히는 설법을 하셨던 바, 산문山門에서는 큰 스님의 백일법문百日法門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의 하안거에서는, 전국대학생불교 연합회 하기수련대회가 해인사에서 개최되어, 큰 스님께서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하루 두 시간씩 한 주일 동안 설법하셨읍니다. 1980년 하아거, 동안거 동안에 인과因果에 대한 확실한 신심信心을 갖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하여 보름에 한번씩 윤회법문을 하셨읍니다.

이 법아집은 1968년의 대학생수련법회에서 하신 설법을 큰 줄기로 삼고, 백일법문의 일부와 윤회법문 등의 부분을 첨가하여 엮었읍니다.

그런데 이 책 「영원한자유」를 펴냄에 있어, 이미 발간된 큰 스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그 내용이 더러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는 큰 스님 법문 내용을 단편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하게 다 닦으면서 그 내용의 줄기를 일관되게 꾸미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불교를 좀더 현실적으로 이해시키고 인과의 원리를 합리적으로 납득시키어 중생들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게 하여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의 길을 깨우치고자 하여 고구정녕하게 설법하신 큰 스님의 뜻을 얼마나 잘 정리 하였는지 모르겠읍니다. 정리와 편집이 큰 스님 뜻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누를 끼치는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 뿐입니다.

이 책을 가까이 하여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길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읍니까. 1968 하안거 결제일 圓澤 和南

Saturday, February 26, 2011

32 영원한 자유인 유안


32 영원한 自由人 十四 유안劉晏

유안劉晏은 당나라의 大宗 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 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읍니다. 한 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웬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왕십팔王十八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였읍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되어 남중南中으로 가서 형산현衡山縣을 지날 때 그 현청縣廳에서 쉬었읍니다. 때는 봄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읍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王十八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번 가서 만나보자하였읍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말리고 자기가 직접 가서 보았읍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니 겁을 내며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읍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었읍니다 더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읍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 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읍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 배 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읍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만은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읍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읍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읍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또 형산현에 들렸더니, 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리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후 돌아와서 도로 가라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 가 보니,빈 집뿐이었읍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예날에 그를 장사지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뿐이요 아무것도 없었읍니다.그 말을 전해 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읍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알을 먹이자 배 속에서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읍니다. 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 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읍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년은 더 살것이다. 삼십 년 뒤에 만나자.”

그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않고 가버렸읍니다.

그 후 유안은 재상宰相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 사람의 중상으로 대종岱宗황제의 마움을 받아 충주忠州땅에 귀양을 갔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웬 약을 주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읍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읍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하여졌읍니다.

十五 법수法秀

법수法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玄宗 개원開元 26’738’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袈裟 오백벌만 지어 회향사廻向寺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 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하루는 길애서 꿈에서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읍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읍니다.

가사는 되었으나 회양사를 찾지 못하겠읍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 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壇이 나왔읍니다.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 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스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읍니다.

건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훌룡한 것들이었으며, 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읍니다.그 스님은 가사를 전부 나누어 주고나서 한 빈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방은 본래 지금의 당나라 천자의 방인데, 여기 있으면서 항상 음악을 좋아하던 탓에 인간으로 귀양가서 임금이 되었다.”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더니 옥통소를 하나주며,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다 주라.” 하였읍니다. 하룻밤도 더 못 자게 해서, 그 이튼날 산을 내려와 처다보니 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었읍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통소를 올리고 그 연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 소리가 잘 났읍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없이 뛰어난 문장가인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통소를 불며 노래하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 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읍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十六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읍니다. 남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 스님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 이었읍니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질 똑똑 치면서 돈 한닢 달라 하곤 하였읍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읍니다.

, 예를 들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 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 포대에 넣고 다녔읍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띄기만 하면 달라고 했읍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읍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읍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실 때916에는 명주明州 옥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채로 입적했읍니다 그 때 이런 게송을 남겼읍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천만억 몸을 나투는구나 分身千萬億 분신천만억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구나.時人自不識 시인자부식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全身을 그대로 절 동당東堂에 모셔 두었읍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이었읍니다.

十七 배도杯渡스님

배도杯渡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 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띄우고는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건넌다는 뜻의 배도杯渡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사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 까닭이 있겠읍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읍니다.

十八 지공誌公스님

지공誌公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읍니다. 그래서 梁나라 무제武帝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우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가 있었읍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이야기르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읍니다. 무제는 지공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읍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닉고 대궐로 모시겠읍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주십시요하고 청하였읍미다.

지공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하며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읍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 시켰읍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읍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읍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읍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장사지내려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읍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읍니까?

그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급한 생각에 목조탑을 세우게 하였읍니다. 드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서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머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읍니다. 바로 그 때 후경喉剄이 처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읍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아렇게 물은 적이 있읍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읍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르켰읍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하고 의아해 하였읍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서 그 뜻을 알 수 있었읍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 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자, 목벨 경剄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十九 사명대사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읍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 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읍니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 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 大斗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각 신문에서 이 사실을 많이 보도하였느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했읍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믿기는 어려워 직접 가 보았읍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읍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 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읍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 비각을 만들어 놓았읍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비각 주변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나 채 있고 구연이라는 노스님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읍니다. 그 노장스님이 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게 이니고 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비석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읍니다.

그래서 그 노장스님에게 세상의 어느 돌에서도 물이 안 나오는데 이 산중의 비석에서만 물이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 이닙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은 딱하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읍니다. 비석에서 물이 나오면 수백명의 사람이 몰려오고 순경들이 와서 밤새 지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물 한 방울을 더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과 순경이 지켜보고 있으니 거짓말일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니다. 내가 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 왔읍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모두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읍니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려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읍니다. 그래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십년 검사 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 재판 안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읍니다. 수백 명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명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 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님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큰스님들 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永劫不忘이니, 곧 영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永劫不忘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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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25, 2011

31 영원한 자유인 달마스님

31 영원한 自由人 九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보겠읍니다. 불교인 이라면 거의 알고있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운데 척리서귀履西歸 라는 것이 있읍니다. 신짝 하나를 들고 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슨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읍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宋雲아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에 총령葱嶺 ; 파밀고원에서 쉬고 있었읍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 한 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읍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 그 분은 달마스님 이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회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 효명제曉明帝 ; 516~528’는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읍니다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입금은 죽고 새임금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가 천자가 되어 있었읍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읍니다.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 해가 자났다고 했읍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읍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 묘를 파 보기로 했읍니다. 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짝만 놓여 있었읍니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자 않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읍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趙州南石橋北 조주남석교북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觀音院裏有彌勒 관음원리유미륵.

조사가 신 한짝 남겨두었으나 調師 遺下一 조사유하일척리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直至如今否得 직지여금멱부득

조주스님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읍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 한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읍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도, 달마스님이 신 한짝만 들고 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읍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읍니다

승가僧伽스님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읍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읍니다.

스님께서 710 3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 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읍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랍이 일며 시체 썩는 냄세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읍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강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하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읍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읍니다.”하자, 잠간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읍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읍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띄우고 자바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읍니다.

779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읍니다. 이 일로 대중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읍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읍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읍니다.

869,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처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읍니다. 당시 의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읍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읍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를 하였읍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읍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가지 보기를 든 것일 뿐으로, 그박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르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본듯 한다〔사주인견대성 泗州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은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十 一 보화普化스님

보화普化 스님은 반산보적半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읍니다. 그 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없이 잘 지냈읍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 해달라.”

하며 졸랐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읍니다.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

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읍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읍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애서 떠나겠다.”고 하였읍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읍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분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읍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마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이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읍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하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읍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속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

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질을 하고 떠나갔읍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읍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데 간데 없었읍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느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데에 대해 통탄하였읍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十二 왕가王嘉 ...

왕가는 후진後秦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道安 스님과 친하였읍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님이 말하였읍니다.

나와 같이 가지 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읍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읍니다.”

그 뒤에 요장姚長이 장안長安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는데, 요장이 물었읍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畧得〕.”략득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읍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字가 자략子畧이었읍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략득畧得〕란 말은 자략子畧이가 요장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상壟上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十三 동빈거사洞賓居士.

동빈거사洞賓居士 여순양呂純陽은 당나라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742~755 때 하양河陽에서 났읍니다. 그 무렵 신선도神仙道를 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鐘離權이 동빈을 보고

세상에 영화榮華는 잠간 동안이니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읍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鐘離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읍니다. 한 곳을 지나다가 조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했읍니다.

자네가 도道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道 닦는 밑천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모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그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읍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데 금덩어리 하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道 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道人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 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읍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금던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읍니다.

그제서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읍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가서 무슨 약을 캐어오라 하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보니 아주 잘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읍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고하는 의아심이 나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믄 예쁜여자가 반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대단히 적적하더니 마침 잘오셨읍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었읍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차며 꾸짖기를, “이 요염한 년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읍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여자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려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 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읍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재물과 여자인데 네가 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고향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읍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놀라더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워 모으라하였읍니다. 동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읍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 얼굴을 조금도 찌푸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하였읍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 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읍니다. 그때야 비로서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읍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읍니다. 그리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산黃龍山에서 희기晦機 선사의 도력道力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 크게 깨쳐 불법佛法으로 돌아왔읍니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徽宗 선화宣化 원년元年 1119에 휘종徽宗 황제가 임영소林靈素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와 모든 것을 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짖고 황제에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읍니다.

Tuesday, February 22, 2011

30 영원한 자유인 3 불도 징 스님

30 영원한 자유인

3 불도 징 佛圖 澄스님

신승 神僧 불도 징佛圖 澄은 인도 사람입니다. 道를 통한 후 중국으로 와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켰는데 그 가운데서 후조後趙의 황제 석호石虎가 제일 신봉하며 지도를 받았읍니다. 불도 징스님이 349 12 8일에 석호에게 하직하고 입적하니 석호가 통곡하며 크게 장사 지냈읍니다. 그 후 얼마 있지않아서 옹주雍州에서 스님들이 왔는데 불도 징 대사를 보았다고 하기에 탑을 헐고 보니 정말 아무 것도 없고 큰 돌덩이 하나뿐이었읍니다.

석호가 그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읍니다.

돌石은 나의 성인데 쿤수님이 나를 묻고 갔으니 나도 오래 살지 못하리라.”

그 뒤에 과연 황제 석호가 죽고 그 나라까지 망하였읍니다.

4 智者스님

수나라의 양제煬帝 대업大業 元年:605 11 24일 천태산 지자대사智者大師 제삿날에, 양제가 그 신하 노정방蘆正方을 보내어 천승재千僧齋를 올렸읍니다. 사람 수를 엄밀히 조사하여 정돈하였는데 나중에 보시를 돌릴 때 보니 한 사람이 더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한사람이 더 있었읍니다. 어떤 사람이 더 있는지는 모르나 확실히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다들 말하였읍니다.

지자 대사가 몸이 변하여 재齋에 참여한 것이다.”

모두들 가서 지자탑의 문을 열고 보니 과연 빈 탑이었읍니다.그런데 그 이튿날 다시보니 지자 대사의 육신은 여전히 탑속에 앉아 있었읍니다.

5 은봉隱鋒스님

당나라의 헌종 원년憲宗 元和 12 817년 은봉隱鋒 선사가 채주蔡州를 지나가는데, 그때 오吳의 원제元濟가 난리를 일으켜 관군과 채주에서 크게 싸우고 있었읍니다. 은봉 선사가 그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육화장을 타고 몸을 공중에 날리니 양군이 보고 감복하여 싸움을 그쳤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오의 원제가 항복하였읍니다.

은봉 선사는 이러한 신통을 부린것이 부끄러워 오대산으로 가서 금강굴金剛窟 앞에 거꾸로 서서 죽으니 옷자락까지 전부 몸을 따라 거꾸로 드리워져 있었읍니다. 화장을 하려고 몸을 밀어도 쓰러지지 아니하여 모두들 더욱 탄복하였읍니다. 선사의 여동생으로 출가하여 공부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는 스님을 보고 꾸짓어 말하였읍니다.

몸이 생전에 돌아 다니며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을 속이더니 죽어서도 또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한다.” 이렇게 소리지르며 손으로 미니 마침내 죽은 몸이 쓰러졌읍니다

6 혜숙惠宿스님

혜숙惠宿은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 597~631 때 스님으로 적선촌赤善村에 이십여 년 동안 숨어 살았읍니다. 그때 국선國仙인 구담이 그 근처에 가서 사냥을 하니, 혜숙도 같이 놀기를 청하여 구담과 함께 사냥을 하였는데, 많은 짐승을 잡이 삶아서 잔치를 하였읍니다.

혜숙은 고기를 잘 먹다가 구담에게 문득 물었읍니다.

더 좋은 고기가 있는데 드시렵니까?”

그말에 구담이 좋다고 하자, 혜숫이 한 옆에가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어다 구담 앞에 놓는 것이었읍니다 구담이 깜짝놀라니 혜숙이 꾸짓었읍니다.

내 본래 그대를 어진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렇듯 살생함을 좋아하니 어찌 어진 군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겠소?

말을 마치고 가버린 뒤에 그가 먹던 쟁반을 보니 담았던 고기가 그대로 있었읍니다.

구담은 이 일을 매우 이상히 여겨 진평왕에게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그를 청하고자 하였읍니다. 사신이 가보니 혜숙은 술집에서 술이 많이 취하여 여자를 안고 자고 있었읍니다. 그것을 본 사신이 나쁜 놈이라고 만나지 않고 궁중으로 되돌아가는데 얼마 안 가서 또 혜숙을 만났읍니다. 혜숙의 말이 신도 집에가서 7일재를 지내고 온다는 것이었읍니다

사신이 놀라 완에게 가서 전후사를 말하여 왕이 신도 집과 술집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다 시실이었읍니다.

수년후 혜숙이 죽으니 마을 사람이 이현耳峴 동쪽에 장사를 지냈읍니다. 장사지내는 바로 그 날 마침 이현 서쪽에서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길가에서 혜숙을 만나게 되어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곳에 오래 살았으니 딴 곳으로 간다고 하였읍니다.그렇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돌아보니 혜숙이 공중에서 구름타고 가는 것이 뚜렸이 보였읍니다. 그는 크게 놀랐읍니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급히 이현의 동쪽에 와서 보니 장사 지낸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었읍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묘를 파헤쳐보니 묘 속에는 과연 아무 것도 없고 헌신 한 짝뿐이었읍니다.

7 혜공惠空스님.

혜공惠空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6 때 사람인 천진공天眞公의집 종의 아들로서, 아명兒名은 우조憂助였읍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의 생각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아맟추는 등의 신기한 일이 많았읍니다. 그래서 천진공은 그에게 예배하며 지극한 성인이 내 집에 계신다고 크게 존경하였음니다.

그가 자라서 스님이 되어서는 항상 술을 많이 먹고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미친 사람 깉이 돌아다녔읍니다. 또 번번히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곤 하였읍니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에 있었는데, 그때에 원효元曉대사가 경전의 주해註解를 지으며 어렵고 의심이 나는 것은 혜공에게 물었읍니다.

하루는 원횽와 같이 강에 가서 고기를 잡아 먹고
똥을 누는데 산 고기가 그대로 나왔읍니다. 그러자 혜공이 원효를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 여시오어汝屎吾魚라고 히니, 그 뒤로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로 고쳐 불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구담 公이 많은 사람들과 산에 놀러 갔다가 길에 혜공스님이 죽어서 그 시체가 썩어 있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읍니다. 그런데 성중城中에 돌아와 보니 혜공스님은 여전히 술에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읍니다. 그 무렵 진언밀종眞言密宗의 고승 명랑明朗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짓고 낙성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 승려가 다 왔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이 오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명랑이 향을 꽂고 마음으로 청하자, 혜공스님이 그것을 알고 그렇게 간절히 청하므로 할 수 없이 온다:하며 그곳에 왔읍니다. 그 때에 비가 몹시 왔으나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을 뿐더러 발에 흙도 묻지 않았읍니다.

혜공스님은 승조僧肇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전생에 지은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그 말은 자신이 전생에 승조 법사였다는 말입니다. 승조 법사도 깨달음을 얻어 자유자재한 분이었읍니다. 혜공스님이 배운 바 없어도 이처럼 원효스님이 모르는 것을 물어볼 정도이며 또 신통이 자재하여 분신까지 하는 것을 보면, 스님의 말을 거짓말이라 하여 믿지 못 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혜공스님은 죽을 때에 공중에 높이 떠서 죽었는데, 나중에 화장을 하니 사리舍利가 수없이 많이 나왔읍니다

8 법연法演스님

임제종의 증흥조라고 하는 오조五祖 법연法演선사는 오조산五祖山에 살았다고 해서 오조 법연 선사라고 불렀읍니다. 이 스님 밑에 불감佛鑑. 불안佛眼. 불과佛果의 세 분 스님이 있었는데, 이 분들을 삼불三佛이라고 하였읍니다. 이 세분 스님의 자손이 천하에 널리 퍼져 그뒤로 불교는 선종 일색이 되었고, 또 선은 오조 법연 선사의 법손 일색이 되었읍니다.

그 오조 법연 스님이 오조산에 처음 들어가면서 오조 홍인弘忍 선사의 탑인 조탑祖塔에 예배를 하였읍니다.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륙백 년이 지났지만 육신이 그대로 탑에 모셔져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조탑에 예배를 드리면서 오조 법연 선사가 이렇게 법문을 하였읍니다.

엣날 이렇게 온몸으로 갔다가 昔日與마全身去 석일여마전신거

오늘에 다시 오니 기억 하는가 今日重來得否 금일중래득부

무엇으로 증거 삼는고 以何爲驗 이하위험

이로써 증거 삼노라 以此爲驗 이차위험

이것은 오조 홍인 선사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곧 그전의 오조 홍인 선사가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조 법연 선사가 돠어 돌아왔는데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 아것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조 홍인 선사는 시조 도신道信 선사의 제자입니다. 도신 선사는 나이가 많도록 제자가 없었읍니다. 그런데 그 이웃에 산에 소나무를 많이 심은 사람〔재송도자栽松道者〕이 있었는데, 나이 많은 노인이었읍니다. 하루는 그 노인이 도신 선사에게 와서 스님께서 연세가 맣은데 법法제자가 없으니 제가 스님의 제자가 되면 어떻겠읍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래서 도신 선사가 당신도 나이가 많아 나와 같이 죽을 터인데 제자가 되어도 마찬가지 아닌가하고 대답했더니, 그 노인은 그럼 몸을 바꾸어 오면 어떻겠읍니까?” 하고는 사라졌읍니다.

그 노인이 산 밑에 있는 마을의 주周 씨 집의 아들로 태어나 사조 도신 선사를 찾아와서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오조 홍인 선사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조 홍인 선사는 재송도자의 후신이고, 오조 법연 선사는 오조 홍인 선사의 후신인 것입니다. 이 삼대三代, , 재송도자에서 오조 홍인 선사로 이어지는 삼대의 전생은 모두 밝혀져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영겁불망하는 열반묘심을 성취한 증거인 것입니다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정신적으로만 어떤 작용이 있다고 생각 하지만, 그러나 육체적으로도 뛰어난 작용이 있어 분신도 하고 또 불사의不思議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성상불이性相不二라 하여 성과 상이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 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라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열반묘심을 성취하면 육체적으로도 그만큼 자유자재한 활도잉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신일여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읍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면, 물질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색자재色自在를 얻을 수 있고, 심리적인 것에 자유자재한 심자재心自在를 얻을 수 있으며, 또 모든 법에 대한 자유인 법자재法自在를 얻을 수 있읍니다. 이 세가지 모두에 대해 자재를 얻게 되면 여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진여위에서 자유자재하게 분신分身도 하고 화신化身도 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유자재, 영겁불망의 크고 작은 마음은 누구든 열심히 수도하여 자기 자성自性을 확철히 깨침으로써 성취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성취하면 자기 해탈 곧 색자재 심자재-법자재는 자연히 따라오게 미련인데, 이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이며 또 불사의不思議 해탈경계解脫境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9 달마스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