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12, 2012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만행 사랑과 자비는 하나

1985년 초 숭산스님은 미국에 있는 한 카톨릭 수도원으로부터 법문과 함께 참선수행을 지도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 수도원은 켄터키주에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미국 카톨릭 교단 안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곳이다. 아마 천주교 신자분들들은 그 이름을 익히 다 아실 것이다.
겟세마니 수도원은 그 유명한 토마스 머튼수사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토마스 머튼은 미국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은 지금까지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스테디 셀러다.
머튼 수사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겟세미니 수도원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든 1950년대 초반 장자를 비롯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경전을 읽으면서 수도원안에서 혼자 참선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에 심취한 머튼 수사는 나중에 불교와 참선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카톨릭 교단에서 아주 존경받는 수도사이자 미국 지식인들 중 영향력 있는 인사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양사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1950년대는 철학자, 문인 등 미국 지성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그전부터 작은 파문을 던지며 미국 지식인 사회에 물결을 만들었던 불교가 비로소 파도처럼 폭발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머튼 수사는 그 파도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분이다. 벌써 그때부터 동양의 선사들은 물론 달라이라마와도 편지 교류를 했다. 수도사들은 평생 수도원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점점 불교와 참선수행에 몰두한 그는 마침내 수도원장님께 동양을 여행해보고 싶다며 몇 년 동안 수도원을 떠나 있겠다고 청한다. 오랜 숙고 끝에 원장은 마침내 허락을 내리고, 그는 생애 처음으로 동양구경을 하게 된다.
그는 먼저 인도로가 달라이라마와 조우 했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좋은 친구 사이였다. 머튼수사는 인도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아시아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런데 1969년 대만을 여행하는 도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뜰 당시는 베트남 전쟁의 절정기였는데 머튼 수사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존경받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한마디는 아주 영향력이 높았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그의 견해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을 아직까지 갖고있다.
어쨌든 머튼 수사는 미국에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 특히 카톨릭ㆍ기독교 신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가 비명횡사한 후 겟세미니 수도원에는 새 원장이 취임하는데 그는 수도사들에게 불교 공부를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머튼 수사의 영향으로 수도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젊은 수도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수도사들은 하는 수 없이 잠시 불교공부를 접고 있다가 1984년 새 원장이 취임하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원장에게 불교 공부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그러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불교의 선사들을 초청해 참선수행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겟세마니 수도사들은 미국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수행을 열심히하는 훌륭한 수도사들이다.
그 유명한 머튼수사의 똑똑한 후예들이 참선수행을 하겠다며 고른 불교선사가 바로 숭산 큰스님이다. 당시에는 미국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린 뒤라 일본의 유명한 선사도 많고 티벳의 고승들도 많았는데 이들 모두 제치고 바로 한국인인 숭산 큰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역사적인 일이었다.
1984년부터 6년 동안 그들은 매년 일주일간 큰스님을 초청해 법문도 듣고 공안인터뷰도 하고 참선수행도 햇다. 큰스님은 참선수행 때 수도사들에게 ‘하느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하느님과 우리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하는 화두를 주셨다.
더욱 특기할 만한 일은 큰스님께서 수도사들과 함께 성당미사를 같이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 카톨릭 역사에서 엄청난 일이 아닐 수없다.
1991년 8월 겟세마니 수도원 벤지민 수사님은 숭산 큰스님에대한 수필을 하나 써서 발표했는데 큰 스님의 가르침에대한 존령심과 고마움이 곳곳에 베어있다.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면 좋을 듯해 여기에 옮겨 적는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숭산 대선사님께서 이곳 겟세마니 수도원에 오신다 우리수도사들은 선사님을 맞을 준비에 바쁘다.그렇다고 해서 뭐 특별한 준비를 하는 것은 이니다.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가구들을 모두 치우고 참선할 때 쓰기위한 큰 방석을 갖다놓는 게 가장 큰 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사님을 뵙기위해 미국 전역 수도원에서 온 수도사들, 겟세마니 인근 운둔지에서 수행하는 사람들, 멀리 테레사와 풀로리다에서 온 참선수행자들, 그리고 캐나다에서 온 한국인들까지 모여들어 조용한던 수도원이 모처럼 시끌벅적하다.
대선사님이 이곳 수도원에 매년 이렇게 오셔서 참선 지도를 해주신게 벌써 5년째다.
그의 방문은 항상 맑은 통찰력을 얻기 위한 도전과 그것을 얻고 나서 얻는 기쁨의 절묘한 결합 그 자체이다.
왜” 그는 애 이곳에 오는가?
왜 카톨릭 수사인 우리가 불교승려인 그의 설법에 참여하며 몇시간씩 안자 참선수행을하고 생전처음듣는 공안문답과의 처절한 투쟁을 하는가? 왜 우리는 매년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오는가?
대선사님을 처음 뵙던 날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왜 선사님은 이곳에 오셨습니까?”
머릿속에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그의 대답은 정말 걸작이었다.
“하하하 당신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들은 수도사이므로 수도원을 떠날 수 없으니 내 젠센터에 오실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당신들이 오는 것보다 내가오는게 쉽지요 안 그래요? 하하하.”
이 간결함, 이 단순함, 이 진실함,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우리 수도사들의 생활이야말로 진실함과 간결함 그자체가 아닌가.
그날 참선수행이 끝나고 묵으실 숙소로 안내하면서 나는 대선사님께 “수도원 수사들과 처음 생활하셔서 약간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대선사님께서는 “우리 스님들 생활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세벽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경정을 읽고 밥을 먹은 뒤 묵언하고 그리고 일하는 생활 아니겠어요” 우리 스님들은 머리를 깎고 이렇게 잿빛 승복을 입는 대신에 수사님들은 긴 예복을 입고있고…… 겉은 달라도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답하셨다.
새길수록 훌륭한 말씀이다.
4세기경 기독교 신앙을 견결히 디지기 위한 정신무장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사막으로 가 혹독한 수행을 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는 시편이나 회고담 형태로 전해 내려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 수사가 쓴 《사막의 지혜》(The Wisdom of Desert)라는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날 대수도원장 마크는 또 다른 대수도원장 아르세니우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소유의 삶이란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지요. 우리 수도원이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을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기쁨을 느끼지 않을까요. 우리 수도원의 한 수사님은 자기 방 앞에 싹을 내어 핀 야생화를 보고 야생화 뿌리까지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아르세니우스는 이렇게 응대했다
글세요, 제 생각엔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영적인 방식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꽃이 없이 살 수 없다면 무소유라고 해서 야생화를 꺾어버릴수는 없겠지요.’”
대선사님께서 쓰신 영어법문집 《세계일화》(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야말로 우리 수도원 골방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싹을 피우고 있는 야생화가 아닐까. 우리가 이 꽃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대선사님께서는 내 방에 들르셔서 내 책상 앞에 싹을 틔우고 있는 당신의 저서 《세계일화》를 발견하시고 아주 기뻐하셨다. 대선사님은 내 수도생활에 한 송이 야생화 꽃 을 피우기 위한 씨를 뿌리셨으며 이제 그 꽃은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대선사님은 우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미사드리고 하는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셨다.
만약 여러분이 대선사님께 불교수행자가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선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따지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저 노래하십시요. 기도하십시요.”
대선사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게 아니다. 사막의 수도사가 발견한 꽃이 새로운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가르침은 항상 우리 주변에 널려 있으며 우리 마음안에 있다.
매일 우리는 찬송하고 일하고 음식준비하고 마릇바닥을 닦으면서 진리와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을 돕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목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내가 마실물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수사들의 일이라고 하셨지 않은가.
대선사님, 여기서 얘기하는 ‘나’란 도대체 누구입니까!
대선사님 고맙습니다.
수도사들 중에는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불교 선사들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사람도 있다. 미국 예수회 신부인 요셉 게네디는 일본선사밑에서 참선수행을 열심히 해 몇 년 전 ‘선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수도복을 벗은 게 아니었다. 그는 현재 신부님과 수녀님을 만날수가 있다. 어떤 수녀님들은 기도의 일환으로 절 (108배, 1천80배, 3천배)수행을 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는 몇몇 카톨릭 수녀님과 이태리 수녀님들이 계룡산 신원사와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하시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수녀복을 벗고 말이다. 진리를 찾기위해 과감한 용기를 갖고 도전하시는 수녀님들의 모습에 우리 스님들은 큰 감동을 받는다. 때때로 한국의 동안거 ㆍ하안거에 스페인 ㆍ영국 ㆍ 독일의 카톨릭 신부님들도 참여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거나 위대하다고 강조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나 카톨릭 신자들이 요즘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 모두 종교를 넘어 참선수행을 통해 신앙의 질을 높일 수 있고 자기가 믿는 신념에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며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베네딕토 카톨릭 수도원의 수녀로서 ‘국제 수도사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한 메리 미가렛 핑크 수녀는 1997년 10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미국 불교도들은 교회나 성당 같은 구조적 도움없이도 각자 개개인이 자신이 딛고있는 현장에서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 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점은 우리모두가 배워야 할 점”이라며 “이 같은 점에서 참선수행은 어느 졸교인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참선수행은 종교간에 대립이나 갈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종교를 있는 그대로 더욱 깊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물의 겉모습만 을 보고 판단한다면 진정한 내면의 진리는 잃어버린다. 내면의 진리란 모든종교를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위대한 분이다. 당신 자신을버린 사랑과 자비로 헌신하신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겨우 33년을 살았을 뿐인데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발전되어왔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사랑과 자비로 가득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예수님은 나를 길러준 분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그의 가르침 안에서 살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이렇게 내가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으며 이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나 자신과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만들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위대한 인간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만큼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다름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석가모니 가르침을 배우고 숭배하고 그것을 생활에서 녹여내기 위해 수행하고있다.
나는 기독교의 목표가 다른 종교와 싸워서 독자적인 교단을 만드는데 있지 않다고 본다.
“가장 하찮고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바로 나에게 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일대학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교수님들로부터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그의 가르침을 글로옮기는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교단을 만들거나 기존교단에서 분리하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첨가하거나 지니치게 강조했다는 것을 배운 적이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은 언제나 넓은 길, 위대한 길, 그리고 열린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다. 노래하는 새소리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로 표현되는 것이다. 얼굴레 스치는 바람, 밖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이며 부처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왜 부처님의 대자 대비심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여러분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사랑과 자비로 이끄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자비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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