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9, 2012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만행 나는 불교로 개종 했는가
돌아켜보니 어느새 스님 생활 10년이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카톨릭 신자가 불교신자로, 그것도 수행자가 되었느냐고묻는다. 이른바 개종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참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한번도 내가 종교를 바꿨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물론 기독교나 카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분명 개종을 한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너무 바보같고 불쌍한 인간이다.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를 버리고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데 아주 열정에 찬,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찬 기독교 신자들이 나에게 다가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가끔 일깨워주곤 한다. 그들은 내가 잿빛 승복을 입고 절에 가서 금불상 앞에 절을 한다면 죽어 지옥에 갈 것이 뻔하다고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한번도,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참선수행을 하고 경전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내 자신이 놀라곤 한다. 나는 매일 열심히 맑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결코 나 혼자만의 안일을 위해 살지않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빌고 또 빈다. 이런 마음은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학창시절에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러나 지하철에서 내게 안타까운 말을 던지는 그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보지 못한다. 나의 미음이 비록 평화롭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오직 그들은 내 겉보습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만 행복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지례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 마포에 있는 ‘법화정사’라는 절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강의를 했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지하철을 탓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내가 탄 지하철 칸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열차 가운데 서서 열심히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시작했다. 아주 우렁차고 열정적이며 힘이 넘치는 목소리여서 처음에 나는 그가 펜이나 우산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읽던 책을 마저읽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점점 더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귀에 바짝대고 뭔가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다. 처음엔 그 사람 말이 워낙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뿔사, 우산 파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잠시 후 나는 그가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들어보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직 성경만 읽어라. 오직 예수님만 믿어라. 예수님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 하도 놀라 온몸에 전율을 느껴졌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전으로 숨을 싶게 들이쉬고 내쉬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전에도 이런글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 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가까이 와서 소리치는 경우는 없었다. 좀 당혹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솟 얘기를 해댔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흥분에 가득찼다.
“조심하라, 사탄들이 권하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 마라.”
그는 내 귀에 똑바로 서서 쉬지않고 퍼부어댔다. 나는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나 지하철문 유리창에 안경이 닿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는 결코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고 나서 내가 다짐한 것은 그런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그 사람들은 더 화를 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무관심에는 아랑곳없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를 믿지 마라. 그것들은 악마의 가르침이다.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귀를 귀울이면 당신은 지옥으로 간다.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의 전부다. 온 힘을 다 바쳐 예수를 믿어라 오직 예수만이 당신을 구한다. 금불상에 절하지 말라. 금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 그것은 악마의 길로 빠지는 길이다. 신은 결코 이것을 허락하지 읺을 것이다. 우리가 IMF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고 우리나라에 금불상이 하도 많아 하느님이 우리를 벌주셨기 때문이다. 제발 그렇게 하지마라. 오직 예수만이 우리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사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평온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내 주의 사람들은 내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계속 내 뒤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
나는 속으로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십번도 더 읽었는데요.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성경을 따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는 이해해줄까. 마침내 그는 내 옆을 떠났다. 그리고는 이내 열차안에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한국에 사탄의 종교가 판을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함니다.”

이런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내겐 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화계사 국제선원 스님들 모두가 겪는 일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미국인이면서 승복을 입은 내가 정작 자기 동포들보다 더 안타까운지 나를 향해 아주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곤 한다. 어서 빨리 하느님을 찾아 천당에 가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기교회 팸플랫을 내 주머니에 찔러놓기도 하고 자기 네 교회에 나와 예배를 꼭 보라고 간곡하게 권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내 팔목을 잡아 끌기까지 하면서 소리를 지른다.
“당신 미국에서 온 것 맞지요. 미국 아저씨. 미국은 예수님 나라 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사탄의 가르침을 믿읍니까?”
그리고 아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지하철에 탄 사람들을 향해 “악마의 말을 전하는 사탄”이라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성경만이 진리를 담고 있고 불경은 지옥으로 이끄는 죄의 말이라고 성토한 뒤 일일이 성경구절을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예수님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지 성경책에서 글귀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한번 시도 했다가 큰 모욕을 당한 적이 있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무슨 대응이라도 할라치면 ‘어찌 감히 이런 옷(승복을 가리키며)을 입고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느냐’고 따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나를 따라 내려 내 앞길을 막으며 나와 논쟁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얘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입니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베푸셨듯,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부모님 같은 사랑으로, 아니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못나고 어리석고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지하철 내 옆자리에 아기를 안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 아기는 눈이 파란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자꾸 내 얼굴을 보고 방실방실 웃어댔다.(나는 한국의 아기들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들을 이 세상 어디서도 모지 못했다.) 나는 아기가 웃을 때마다 같이 웃어 주었다. 그렂자 그 아기는 더욱더 활짝 웃으면서 이윽고 그작은 팔을 쭉 뻗어 내 옷을 만지작 거리면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기엄마가 아기의 팔을 확 낚아채더니 말도 아직 제대로 못 알아들을 것 같은 아이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떼끼, 안돼, 이 아저씨는 사탄이야, 나쁜 사람이야.”
그러더니 아예 자리를 털고일어나 다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가슴이 쿵쿵거렸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기독교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한번도 개종했다는 생각을 안 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나 개종자일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참진리의 길을 떠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성경에 쓰여 진 말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며 그 외외 모든 것은 惡의 일이라고한다.
이것은 진정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일이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를 만든 적이 없다. 교단을 만든적도 없다. 제자들 둥 네가 옳다, 너만 내 진정한 제자다 하신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항상 매춘부들과 세리들과 범죄자들과 소외자들과 함께하면서 당시 이스라엘 성직자들에게 ‘내침’이 아니라 ‘포옹’의 삶과 정신을 증거하셨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는 모든 위대한 스승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자비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세상에 나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위대한 가르침은 아주 좁은 소견을 가진 일부 사람들로 인해 오염되고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지혜의 가르침을 증오의 독트린으로 변질시켰다.
한국에는 예수님의 이 위대한 자비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심지어 수많은 절들이 파괴되고 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절은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곳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절이란 귀중한 문화적 유산이자 재산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절이 훼손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경험할 때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이 현대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기가 막혀한다.
1996년, 내가 묵고있던 화계사에 세 번이나 불이 났다. 경찰은 기독교인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화계사는 불탄 절을 다시 세우고 개 보수하느라 1억여 원을 들여야 했다. 나를 비롯한 국제선원 스님들은 그 공사 때문에 며칠 밤낮을 매달려야 했다. 일을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놀람과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까지 일었다.
‘이곳은 우리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들이 믿는 신념과 우리가 믿는 신념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사는 집에 그것도 세번씩이나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닫힌나라다.
미국에는 수잭 개의 사찰이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나라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불교 사찰에 불을 지른다든지 탱화를 훼손한다든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이처럼 다른 문화, 전통에 대한 파괴 행위가 일어난다면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할 것이다. 각자가 믿는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미국사람들은 상대방이 신성한 공간이라고 믿는 곳을 훼손하는 일은 바로 자기들이 믿는 신성한 공간을 훼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그것도 오랜 불교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불교사찰에 대한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계속 일어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는 종교간의 불신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남남통일부터 해야 한다.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분노와 탄식을 쏟아내며 불에탄 법당을 수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절망을 한꺼번에 씼어준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
물탄 법당을 쓸고 닦고 정신이 없었는데 이웃 한국신학대학에서 한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갑작스럼게 화계사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도는 흉물이된 법당을 둘러보시더니 주지스님께 깊은 사죄의 뜻을 전달했다. 신성한 법당에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깊은 사죄를 하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놀랐다. 한국에는 온통 닫힌 생각과 행동을 하는 기독교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분도 계셨구나. 우리가 아직 한국을 제대로 모르고 있구나.
그 교수님은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의 김경재 목사님이셨다. 목사님은 함께 온 학생들과 법당을 둘러보셨다. 우리는 너무 기뻤다.
그닐 그 목사님과 학생들의 방문은 당장 수행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울분에 찬 비애를 터뜨리기도 했던 우리 국제선원 스님들에게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그 일로 완전히 친구가 되었다. 일주일 후 김 교수님은 그의 화계사 방문이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입증하셨다. 주지스님을 다시 찾아오셔서 국제선원 스님 한 분에게 불교 강의를 좀 맟아 달라고 하신 것이다. 비록 한국신학대학과 화계사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런 일은 개교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건 정말 ‘사건’ 이었다.
나는 최근 한국에 이런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15년 전 선철 큰스님은 영어로 번역된 법문인 《가야산의 울림》 (Echoes from Kaya Mountain) 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존경을 표현하셨다.
작년 겨울 남원 실상사에 갔다가 “성탄절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고 너무 기뻤다. 그런데 올해 부처님 오신 날에는 더 기쁜일이 있었다. 한국신학대학 총학생회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석가탄신일을 경축합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교문앞에 걸어놓은 것이다. 참으로 기쁘고 기쁜일이다.
숭산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얘기들은 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방법으로 구전되어오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神과 인간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버려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신이 있다면 아직 신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워싱턴에 살고 있는 성공회 목사님 한 분이 우리와 함께 참선을 하기위해 종종 젠센터로 오십니다. 나는 그 목사님 초대로 가끔 워싱턴 성당에서 법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神을 죽일 수 없다면 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은 이름도 형태도 없으며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신을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을 죽여야 진정한 신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독교와 선불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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