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rch 5, 2012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만행 나의 도반 스님들
현문스님
현문스님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생과 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분이다. 그는 폴란드 스님이다.
화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음악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를 우리는 또 ‘황금의 손을 가진 스님이라고 부른다. 고장 난 것은 뭐든지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장차 폴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현문스님은 지금도 피아노만 있으면 바흐, 헨델, 모차르트 곡을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폴란드에서 유명하다는 음악 선생님들을 찾아 다니며 작곡법과 지휘 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진 그를 새장 속 새처럼 가둬놓았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자기생각을 솔직하게 얘기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자라면서 조국 폴란드에 대한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으나 점점 그런 일들을 접하면서
폴란드 정부가 외부 강대국인 소련의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조국 폴란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과학자가 되기로 한다. 당 간부나 엘리트 당원을 위한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는 화학이나 생물학을 공부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조국에 더 유용하게 쓰여지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 종교적 신념과 관련된 큰 경험을 했다.
폴란드 국민들의 98퍼센트는 가톨릭 이다. 폴란드에 가면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성당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학생이 되자 현문스님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견진성사 (영아세례 다음에 받는 칠품성사 중 하나로 주교가 성신의 은총을 주기 위하여 그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마르는 성사)를 받기 위한 교육에 참여한다. 추기경이나 주교로부터 은총을 받는 이 행사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그때 현문스님이 다니던 성당의 주교님은 폴란드에서도 가장 존경 받는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었다.
이분이 후에 교황 요한 바울 2세가 되신 바로 그분이다. 현문스님은 카를 보티라 추기경이 교황이 되기 1, 2년 전에 견진성사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니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얼마나 영광된 일이었겠는가.
수련 마지막 날, 추기경님은 학생들에게 그 동안 가르침에 대해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현문스님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는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일찍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문에 휩싸였다. 세상의 많은 불공평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견진성사를 받기 전에 반드시 이 의문을 풀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문스님이 입을 열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면 왜 장애인들을 만드셨을까요?”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건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가 나뿐 일을 하면 그렇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이지.”,
현문스님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러한 신이라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간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신부님 말씀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성당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난 뒤 성당에는 아예 발길을 끊었다.
현문스님은 청년 시절 폴란드의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반정부 지하단체에 가입한 뒤 가열찬 투쟁정신(?)으로 운동권의 대표가 된다. 명석한 머리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그는 운동권의 스타였다.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하는 이론가였으며 화학물질 제조 기술도 갖고 있어 각종 시위용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당시 폴란드 반정부 운동의 신화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급기야 정부에 체포돼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는 석방돼서 다시 저항하다 또 붙잡혀 들어갔다. 석방과 구금을 반복했다. 그 당시 그는 완전히 쫓기는 신세가 되어 부모 형제들과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반독재 반정부 투쟁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아주 커다란 조직을 만들려다 체포된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이제 살아서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졌다. 당시 그가 도모한 일이 워낙 큰일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할 것이고 고문의 고통과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죽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반정부 투쟁을 하다 잡힌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죽어갔다. 혹은 중노동을 하는 수용소로 옮겨져 과로로 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약간 달랐다. 워낙 반정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잘못되면 성난 민중들이 어떻게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부 역시 그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를 죽인다면 그의 명성과 활약상을 들어온 폴란드 국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문은 면하게 되고 대신 악명 높은 교도소에 장기형을 받고 수감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심리학을 전공하는 여 교수가 어느 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폴란드 안에서 현문스님을 비롯한 반정부 인사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프로잭트를 맡아 연구중이었다. 정신적인 신념과 정치적 행위에 관한 연구였다고 한다.
인터뷰는 3일간 지속되었다. 인터뷰 마지막 날 그 교수는 현문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니오,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문스님은 일말의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 교수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만약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처럼 고통에서 허우적댈 수 있습니까? 도대체 신이란 어떤 분이시길래 우리가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만들어 내신다는 말입니까?”
그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당시 폴란드 대다수 국민들은 카톨릭을 믿고 있었고 투쟁은 대부분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물론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간부들은 당연히 무신론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단 ‘무신론자’들은 그들과 적어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운동권 인사는 신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2주일 뒤 현문스님은 뜻밖에 석방을 통보를 받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산당이 현문스님을 사면한 것이다. 자신의 사면이 그 여교수의 인터뷰 보고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석방 훨씬 뒤의 일이었다.
오랜 저항운동과 감옥생활, 그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정치적인 행동을 통해서는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문과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이 가져다 준 변절이 아니었다. 그는 감옥을 나온 뒤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아! 나는 누구인가.’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그토록 열심히 반정부 투쟁을 해왔건만 마음속은 허전했다. 당시 그와 투쟁했던 동지 몇몇은 티벳 불교에 심취하고 있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카톨릭을 탄압하는 대신 불교에 대해서는 무신론이라 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티벳불교의 대선사인 카투 린포체에게 그를 소개했고 현문스님은 그의 지도아래 명상수행을 했다. 현문스님은 아주 열심히 수행에 참여했다. 이틀에 한 번씩 불교경전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문스님은 불교신자인 한 친구로부터 녹음 테이프 한 개를 선물 받는다. 그것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 녹음이었다. 그는 테이프를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이 그제야 끝나는 듯한 환희에 휩싸였다. 며칠 뒤 현문스님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큰스님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운영하고 있던 젠센터를 방문하게 된다.
바르샤바 젠센터는 1978년에 문을 연 것으로 당시 큰스님의 가르침은 삶에 환멸을 느낀 폴란드 젊은이들 사이에 점점 파고들고 있었다. 현문스님은 이곳에서 용맹전진을 마치고 다시 고향 크라콥으로 돌아갔다.
불교는 그들에게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티벳 • 중국 • 일본의 불교 서적들이 서구를 거쳐 폴란드로 몰래 수입되고 있었고 학생들과 지성인들은 너도나도 그것을 복사해다 읽었다. 현문스님 말에 따르면 어떤 책을 너무 여러 번 복사를 해 읽기가 어려운 것도 많았다고 한다.
현문스님은 1년 후 드디어 숭산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당장 바르샤바 대학까지 갈 차비가 없었다. 그는 가장 아끼고 있던 로큰롤 음반을 모두 내다팔았다. 책과 옷가지까지 다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여비로 바르샤바 대학으로 간 스님은 깜짝 놀랐다. 이미 선방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에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큰스님의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그날은 폴란드 내의 유명한 지성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거대한 시간이었다고 한다.
큰스님은 바르샤바 대학에서 돋장 강의를 마치고 바르샤바 젠센터로 가셨다.
젠센터 선방은 이미 완전히 만원이었다. 현관과 복도에까지 빼곡히 주저앉아 너도나도 참선을 배우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엌에까지 주저앉아 참선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스님과 인연을 맺은 현문스님은 본격적으로 큰스님의 일을 돕는다. 우선 고향 크라콥에 젠센터를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숭산 큰스님이 좀더 자주 폴란드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큰스님의 폴란드 방문 때마다 쌍수를 들고 반대를 한 것은 폴란드 주재 북한대사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폴란드 사람들이 혹시 남한 사상에 물들까 하고 매우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큰스님의 뒤를 미행하고 몰래 비밀요원을 파견하여 큰스님의 설법을 적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큰스님이 폴란드에 ‘한국 불교 문화전시회’를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거리에 붙인 포스터를 모두 찟고 전시장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방해는 오히려 폴란드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큰스님을 더욱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현문스님은 바르샤바 젠센터에서 생활했지만 오랜 기간 출가를 주저했다. 결혼도 않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였가 때문에 출가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자만 출가보다는 돈을 볼어 큰스님을 자원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석사업을 시작해 돈을 꽤 많이 번다.
나는 언젠가 현문스님께 “왜 하필 보석가공 일을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여자들이 보석에 돈 쓰기를 좋아하니까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그의 무대도 넓어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싱가포르를 제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하며 사업을 발전시켰다.
수익금의 대부분은 각 나라에 세워진 큰스님의 젠센터에 송금했다.폴란드 사람들이 한국의 동안거와 하안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행기표와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한번도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쓰지 않았다. 출가를 안 했어도 출가한 스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느 날 큰스님이 그에게 “이제 출가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 때가 안 됐읍니다. 한 몇 년 더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태어날 때 자기 자신에게 “내가 태어날 준비가 되었느냐” 하고 묻고 태어났습니까? 또 죽을 때 “내가 죽을 때가 되었는가” 하고 죽습니까?”
현문스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자 이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십시오. 당신은 이미 오래 전 출가한 수도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문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는 출가를 했다. 그 역시 지금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생활하신다. 한국 문화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그는 한국의 전통예술, 그중에서도 목공예와 도금공예에 관심이 많다. 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웃음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수행하시는 현문스님. 그에게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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