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 2010

고승법어집 운허 용하 대선사편

耘虛 龍夏 大宗師

耘虛스님의 行狀
운허스님은 1892년 2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안흥동에서 출생하셨다.
스님은 평양 대성중학교를 수료하고 만주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14년 봉천에서
오동학교와 1917년 배달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9년 원포에서
신한족이라는 독립기관지를 발행하여 일본경찰에 쫓기는 몸이되어 강원도의 봉일사에
숨어 지내다가 1922년 5월에 경송선사에 의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하였다.
스님의 속명은 이학수이고 법명은 용하, 법호는 운허이다.
1963년 동국역경원을 창설하고 초대원장에 취임하여 열반하실 때까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1982년 종교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고,
1978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11월 18일 세수 89세, 법랍 59세로 입적하다.

太子瑞應經에 이런 말이 잇다.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나' 혼자만이 가장높다.
삼계가 모두 고통인데 무슨 즐거울 것이 있겠느냐.' 하셨다.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처음 탄생하였을 때에 하신 말씀이다.
석가모니의 '나'가 하늘위에나 하늘아래에 가장 높다면 우리의 '나'도 가장 높을 것이다.
그 이유는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우리의 '나'가 가장 높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란 무엇인가 ?
이 '나'라는 것은 부처님이나 우리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 까지 제각기 '나'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생각하면 이세상에는 '나'만치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나'라는 것을 따지고 보면 내몸과 내 마음 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우선 내 몸으로 말하며 맨 처음 부모가 낳아 주셨고 어릴적에는 어머니 젖을 먹고,
조금 자라면 음식을 먹으면서 지금까지 살고있다.
그리고 이 몸은 가죽과 살과 뼈와 5장 6부와 귀, 눈, 코, 입 등의 감각 기관으로 되였는데
생리학에서는 열 몇가지의 원소로 되었다 하고 불교 즉 고대 인도에서는
네 가지 大種 (地 水 火 風) 으로 화합하여 된 것이 중생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몸은 사람에 따라서 크기도 하고 완전한 이도 있고 불구의 몸을 가진 이도 있다.
그 다음에 내 마음은 무엇인가 ?
우리의 주먹구구식으로 말하면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성내고 기뻐하고 잘 잘못을
따지고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當體라 하겠다.
불교에서는 심리의 작용을 ' 受 想 行 識 ' 의 넷으로 구별했다.
受는 감각기관으로 외계의 사물에 접촉하여 감수 하는 것이니 예를 들면 밝다, 어둡다,
차다, 덥다, 달다, 쓰다는 등이요,
想은 감수한 사물에 대하여 괴롭다, 즐겁다, 좋다, 나쁘다는 등의 생각하는 것이며,
行은 흘러서 옮아 간다는 뜻이니 생각하는 자체가 잠깐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라 찰라로 변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識은 인식하는 자체니, 모든 마음의 本體를 말함이다.
그런데 이마음은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이 없으니 크다, 작다, 하나다, 둘이다,
할 수도 없겠고 오고 가고 한다고 할 수도 없다.

'나' 와 마음과는 분리 할 수가 없다.
'나' 가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곧 '나' 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도 부모가 낳아 주신 것일까 ?
부모가 낳아준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세상 사람들은 뇌 세포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몸이 생기고야 마음이 있을 것이요,
이 몸이 죽으면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몸이 생기면 마음이 있고 몸이 죽으면 마음도 없어진다 하고,
몸은 부모가 날아준 것으로 백년 안팎에 늙어서 죽고야 마는 것인 즉,
우리의 존재는 금생의 일생뿐일 것이며 우리의 존재가 일생 뿐이라면
앞 뒤를 고려할 것 없이 어떻게 해서라도 목전의 쾌락을 즐기는 것만이 능사일 것이다.
그리고 보면 현세 인류의 불량배들이 말하는 '짤막하게 잘 살자.'는 주장이 제일의가 될 것이다.

불교의 이론은 어떠한가 ?
대승기신론에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眞如==우주의 진리)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무명==망상)과 화합하여
아뢰야식(장식==인식의 본체)이 된다.'고 하였다.
생기지 않으니 비롯이 없고, 없어지지 않으니 나중이 없다.
비롯과 나중이 없다는 것을 초월하였다.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우리의 마음의 본체란 것인데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사려하는 마음은
그 본체가 동작하여서 생기고 없어지고 해서 되는 것이니
본체는 眞如요 동작함은 無明이다.

비유하면 물은 본래 맑고 고요한 것인데 흔들려서 파도가 되는 것인 즉
우리의 마음도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는 작용은 파도와 같고 아무 작용도 없이 맑고
고요한 본체 돋 명경지수와 같이은 식심의 당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서
우주의 진여이다.
마치 거울의 본체는 밝기만하고 영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데 밝은 작용에 의지하여 각색의
영상이 비치우는 것이 아닌가.
영상이 없는 것은 거울의 본체요 영상이 비친 것은 거울의 현상이다.

그와같이 우리 마음의 본체는 무사무려한 진리인데 보고 듣고 좋아하고 슬퍼하는 것은
마음의 현상이다.
우리는 현상으로는 중생이요 본체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불'이다.
다시 말해서 물의 현상인 파도 그대로가 고요한 물의 본체라 할 것이다.
위에 말한 것을 요약하면 마음은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인데
몸은나고 죽고 하는 무상한 것이다.

영원한 마음이 무상한 몸과 부즉불이한 것을 우리 는 '나' 라고 한다.
이 '나'가 마음인 면으로는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것인데
몸인 면으로는 나고 죽는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마음은 중요시 하지 않고
무상한 몸만 끔찍하게 여겨서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가벼운 의복을 입히고
고루거각에 있게 하느라고 죽을지 살지모르고 분망하게 살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마음은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입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택이 필요한 것도아니다. 이것을 모르고 취생몽사 하는 것이 중생이다.

화엄경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일체 중생이 저마다 여래와 꼭 같은 지혜(마음)와 덕상(몸)이 있지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써 증득(체득)하지 못한다.
이것은 중생이 여래와 꼭 같은데 허망한 생각과 고집하는 애착이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거울의 본체는 여래와 같아서 밝기만 한데 영상이 비친 것은 중생의 망상과 집착 뿐이다.
다시 말하면 영상이 비쳤다고 해서 거울이 아닌 것이 아니며 한 걸음 나아가서
영상이 비처야 거울이다. 영상이 비치지 않으면 그것은 목석이다.
그와 같이 망상이 있다고해서 여래가 아닌 것이 아니며 또 보고 듣고 깨닫고 알아야
여래이니 만일 보고 깨당고 하는 작용이 없으면 그것은 목석이다.

따라서 우리는 중생 이대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그런데 여래의 唯我獨存과 우리의 유아독존은 어떻게 다른가,
여래는유아독존을 철저하게 깨달은 유아독존이요
우리는 유아독존인 줄을 모르는 유아독존이다.

부처라는 뜻은 깨달은 사람이란 말이니 '나' 곧 우주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요
중생은 깨닫지 못한 이를 말하는 것이니
부처님과 중생의 경계선은 나를 깨닫고 깨닫지 못한데 있다.
그래서 '깨달으면 佛 이요 미혹하면 중생이라' 한다.

'나' 란 무엇인가 ?
'나'의 몸은 무엇이고 '나'의 마음은 무엇인가. 이것이 佛道를 수행하는 최고의 목적이다.
처음에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따져보고 도리에 맞게 관찰하다가
그 관찰하는 공부가 성숙하여 최후의 일념에 투철하게 되면
그때에는 '나'의 몸과 마음이 철두철미하게 목전에 전개될 때만 '나'를 본다.

삼라만상의 일체사리가 豁然하게 관통되어 끝이 없는 시간과 공간이
*昭昭靈靈하게 내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피안이며 見性이며 열반의 경지이다.
또한 석존이 보리수 아래서 大覺하신 내용이며 우리의 眞面目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나'를 모르고 깨닫지 못할까 ? 화엄경 말씀과 같이 妄想과 集着 때문이다.
妄想이란 무엇일까 ? 우리가 환경의 사물을 오관으로 접촉하고 감수하여 이것은 밝다,
이것은 어둡다, 차다, 덥다, 달다, 쓰다 이렇게 분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망상이라 하는 이유는 그 환경들이 영구불변하는 진실한 존재가 아니고
일시적으로 因과 緣이 화합하여 나타나는 가상인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진정한 존재로 잘못 생각하는 탓이다.
마치 거울에는 밝은 본체 뿐이고 별개의 영상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린애는 거울을 보고
그 속에 다른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불러보고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
현상만을 감수하고 본체를 깨닫지 못한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래서 중생의 사고방식을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集着은 무엇일까 ?
어떤 사물에 대하여 고집하고 애착하는 것이니 가령 명예나 財利나 주택 처자등에 대하여 '
이것이 내게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내것이다.'
하여 거기에 애착하고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다.
우리는 한번 인정한 이상에는 다시 내버리지 못하고 꼭 집착한다.
집착하기 때문에 생사를 걸고 싸우려는 것이다.
아무리 애착하고 원수시 하다가도 한번 웃어버리고 方下着하는 때에 우리는
애욕의 수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요, 벗어만 나면 통쾌하고 막힘이 없이
환하게 터져서 시원하게 된다.

그런 곳에 장부의 기상이 있으며 범부가 속박에서 해탈할 수있는 것이다.
부처님과 범부차이는여기에 있다.
부처님은 세상의 塵累를 훨 훨 벗어버리고 시방삼세에 大解脫 大自在 하시는데
우리는 산간 초가와 수백원의 재물에도 혈안이 되여 싸우다가 필경에는
인명까지 살해하는 죄과를 범한다. 실로 애석하기 짝이없다.

부처와 중생의 경계선은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거리가 멀다.
부처님과 범부와는 차멸이 없으면서도 알고 모르는데 천양의 차가 난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은 불과 중생의 차를 좁히는 방법을 입이 쓰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두 사이가 원래 현격하다면 아무리 노력하여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차별이 없는데서
거리가 멀어진 것은 실로 애닯은 일이다.

석존이 태자의 영화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출가 수도 하시어 마침내 정각을 이루시고
그 후부터 사십여년을 각지로 다니시면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설법하신 것은
그 노파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2500년 후인 오늘에 다행히 정법은 만나게 되었으니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를 살펴보고 '나'를 깨닫고 小我에서 해탈하여
대자재한 大我를 체득해야 하겠다.

Thursday, October 14, 2010

죽음의 모든 것

불교에서의 죽음의 이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중의 하나가 죽음이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다.
때문에 '죽음' 이라는 현상에 대해 설명한 모든 것들은
다른 이를 통한 간접적인 것이며 직접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불가피한 현실로 철저하게 인식되고
있지만 정작 부처님 자신의 사후 (死後) 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무기(無記)" 라 하여 논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당장에 실체에대한 탐구에 도움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는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 를 모두 고(苦)로
보고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고(苦) 에서 해탈(解脫) 하게
하고자 하였다. 부처가 확연하게 깨달은 진리(法)는 다름이
아니라 '삼라만유란 인연생기적 현상' 이며 마음이라고
부르는 청정한 고요한 바다위에 일어난 하나의 물결파문
이라고 본 것으로 , 결국 상대적인 인간 개념과 경험의
현상으로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현상도 삼라만유 중의
한가지 현상일 터이니 두말할 것도없이 그 삶과 죽음 역시
인연생기적 현상일뿐 그것 자체로서의 실체나 실체로서의
불변적 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생(生)과 사(死)가 같다고하며 언제나 생사
(生死)라고 함께표현한다. 이것은 불교의 죽음관을 설명
하는데 있어 중요한 열쇠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
라는 것인데,다시말해서 산다는 것은 곧 죽고있다는 뜻이며,
죽음을 향해서 가고있다는 뜻도 된다.
삶의 편에서보면 살고있다고 말하지만 죽음의 편에서 보면
아직 죽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보면 늙음과 병들도 마찬
가지이다.산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요 늙는다는 것은 병든
다는것이다.말하자면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벗어나려면 삶도 벗어나야 한다.
생(生)이 있는 한 사(死) 는 필연적인 것으로 그 어떤경우도
사(死)를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이같은 생노병사(生老病死) 는 인간고(苦)의 근본으로
인간의 살려는 의지를단절시키고 죽음을 가져온다.
인간의 존재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다섯가지 요소가 인연
에 의해 임시적으로 결합되어있는 존재인 것으로 경전에서
죽음의정의와 시기에 관계되는 내용을 찾아보면 다음과같다
잠아함경(雜阿含經 )에 "어떤것을 죽음이라 하는가,
저러한 중생들이 저러한 종류로 몰라하여 옮겨가되 몸이
무너지고 수(壽)가 다하면 더운기운(火)이 떠나고 목숨이 멸
하여 음(陰)을 버리는 때에 이르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죽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저 중생의 무리들이 목숨을 마치는 것은 정한 바가
없어서 흩어져 멸하고 목숨이다하면, 부서져 명근(明根)이
닫힌다.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수명과 체온과 의식은 몸을버릴 때 함께버려진다. 그 몸은
무덤 사이에 버려져 나무나 목숨이 분리된 것을 죽음이라
한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어떤 것을 죽음이라 하는가,
저러한 중생들이 윤회하여 받은몸에 온기가 없고 덧없이
변하여 오온이 나누어져 오음의 몸을 버리고 목숨과 기관이
끊어지고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중아함경(中阿含經)에 "세 가지 법이 있어 산 몸이 죽은
후에는 몸은 무덤사이에 버려져 미치 나무처럼 무정해진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쩨, 수(壽)이고 둘째, 난(暖)이며
셋째,식(識)이다...죽음이란 수명이 다 소멸하고 따뜻함이
이미 사라지며모든 기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승만경에는 "죽음이란 모든 근(根)이 무너지는 것이요,
생이란 새로 모든근이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나타나있다.
'모든 감각기관의 기능이 멈춘다'는 의미로, 죽음이란
수 (壽; AYUS ;수명의 수로 들숨과 날숨 즉 호흡을 말함)
난(暖 ; USNS ; 체온을 말함)과 식(識 ; VUNANA ; 의식을
말함) 이 몸을떠난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경전내용에서 수(壽)란 영혼이나 개별적자아[個我]
같은 실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대방등대집경(大方等
大集經)에서 "수명이란 들숨과 날숨이다. "(息入出者名爲
壽命) " 라고 말하고있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 즉, 호흡을
의미하는 것이고, 화,난,온 은 모두 체온을 의미하며,식은
정신 현상으로서의 의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오온(五蘊)이 화합
해서 이루어진 '거짓된 나 [假我]' 가 인연을 다해서 호흡이
정지되고 체온이 상실되고 그리고 의식이 없게된 상태"
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며,불교에서의 죽음은 기관의
통합기능이 희복 불가능한 상실에 처했을때를뜻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생사를 유전 (流轉) 하는 과정으로
신(身),구(口),의(意)를 통한 선악의인(因)에 따른 과(果)로
사유(四有)라 하여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
(中有)로 4분하여 중생이 무명(無明)의 세계에 윤회하는
한기간의 상태를 뜻하는데 여기서 유(有)는 중생의 생존을
의미한다.생유(生有)는 각각의세계에 생을받는 결과의 찰나
본유 (本有)생을 받은 뒤 임종직전까지 생유와사유의 중간을
말하며,사유(死有)는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
중유(中有)는 죽은 뒤 디음 생을 받을 때까지---
사유와 생유의 중간으로 죽은 영 (靈 )이 다음 생에 태어나기
중음(中陰)의 상태인49일 동안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일반적 죽음의 상태인 중유를 또 다른 생존의
형태로 인식하고 있디.
이는 죽음을 단멸(斷滅)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다른 연장선으로 인식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대불교미디어센터 C 2005 >

Saturday, February 6, 2010

은퇴후, 아내는 '진화' 하고

은퇴후, 아내는 '진화' 하고 권정희 논설위원

"나이 들면 집 줄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로 그런 일이 아니에요.손송바닥만 한 집에서

부부가 하루 종일 마주 보고 있으려면 속에서 불이 나요. 갑갑헤서 못 견뎌요."

몇 달 전 어느 댁을 방문했을 때 60대후반의ㅣ 여주인이 말했다. 은퇴 후 부부가 집에 있게

되면서 바늘에 실 가듯 붙어사는 노년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었다.

날아면 날마다 함께 지내려면 공간이 좀 넓어야 숨통이 트인다고 그 부인은 말했다.

성품이 온화한 그 남편은 옆에서 웃고만 있었지만 '갑갑하다'는 부인의 말에 아마도 서운했을 것이다.

60대 부부를 만나보면 대게 아내는 갑갑해 하고 남편은 섭섭해 한다. 평생 남편이 일이다,

출장이다, 친구다 하며 밖으로만 돌던, 그래서 아내에게 남편은 하숙생이나 다름없던

부부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 뚜렸 한 것같다.

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이제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한 지인이 있다. 그분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들고 보니 여성들의 마음을 좀 알겠어요. 젊어서는 일에 정싱이 팔려서 아내가

뭘 원하는지 신경도 못 썼지요. 여성들에게는 가족이나 관계가 제일 중요한데, 남성들은

야망이나 성취가 우선이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부부가 서로 다른 지향점을 향해 분주하게 살다가 꼼짝없이 마주앉게 되는

계기가 은퇴다. 수심년을 일, 그리고 일로 맺어진 인간관계들을 축으로 살던 남편들은

은퇴를 하고나면 갑자기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게 된다, 게다가 평생 아내에게

무심했던 데 대한 자책도 있고, 여성호르몬 증가로 감상적이 되다보니 남편들은 자꾸

아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90년대 일본에서는 '젖은낙옆' 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황혼이혼이 갑자기 늘던

그 즈음 아내들이 은퇴한 남편을 두고 붙인 별명이다. 물에 젖어 딱 달라붙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24시간 붙어 지내는 남편을 말한다. 요즘 이곳에서도 그런 남편들이 보인다.

한 주부의 말이다.

"남자가 나이가 드니 의존심이 많아져요. TV를 봐도 꼭 옆에서 같이 보자고 하고,

집안에서도 내가 조금만 안보이면 찾아요."

어쩌다 외출응 하면 남편이 어찌나 자주 전화 하는지 친구들도 마음 놓고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나이에 웬 시집살이!" 하며 아내들은 갑갑해 한다.

젊은 시절, 어쩌다 일찍 귀가하면 그렇게 반기던 아내, 주말에 집에서 지내면 그렇게

좋아하던 아내는 어디갔을까. 남편들은 의아할 수도있다

생물이 외계의 영향에 적응하면 변화하도 발전하는 것을 빈화라고 한다면 아내들은

그동난 '진화' 를 한 것이다.

유전체 분석기술이 발달하면서 생물의 진화역사가 점점 구체적으로 밝혀지고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척추동물들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 분류되였지만

현대 유전체 정보에 기초한 분자 계통도로 보면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는 모두

어류의 한 계열아라는 것이다. 공중을 새가 수십억년 전에는 물고기였다는 말이다.

이민 1 세로 60대 전후 세대는 집에서 남편 얼굴을 별로 못 보며 산 아내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은 밖으로 나돌수록 유능하고, 집안일은, 직장이 있건 없건 오로지

아내의 몫이던 세대이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은 '하숙생' 이 되고 ,그런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으로 속 끓이던 아내는 결국 '진화' 를 시작한다.

자녀가 태어나면서 자녀를 축으로 삶을 재정비하고, 자녀가 성장하고나면 친구둘과의

교유에서 삶의 재미를 것이 보통이다.

남편은 옛날 생각하고 물가를 서성이는데 아내는 이미 새가되여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격이다.

은퇴 후 부부사이가 좋으려면 시간의 안배가 중요하다.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과 따로

하는 시간의 균형이다. 그러려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젊어서부터 직업과는 무관한 친구들,

몰입 할 수 있는 취미를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서정주, 국화 옆에서> '누님'

처럼 은퇴한 부부가 마주 앉는다.

두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온갖 번잡한 요소들이 다 사라진 이 때가 어쩌면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평생 같이 산 이 여자 (남자) 가"사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Wednesday, February 3, 2010

"꿀벌이 사라지는 것은 셀폰 전자파가 주범"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의 주범이 셀폰 타워에서
발사되는 전자파라는 연구서가 발표돼 주목을 받고있다.
인도 연구팀은 실험에서 벌집 근처에 셀폰을 두었을 때 꿀벌들이 벌집
으로 들어오지 못했다며 벌집에 여왕벌과 알들만 남아 군집 전체가
열흘만에 붕괴했다고 발표했다.
연구를 실시한 사이누딘 파타지는 셀폰 타워의 전자파가 벌들의 항법
능력을 저해한다면 셀폰과 타워가 계속 늘어날 경우 10년안에 꿀벌들이
멸종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도의 케랄라에서는 10만명 이상이 양봉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꿀벌이
감소해 생계에 위협을 받고있다. 그외 농작물 수분을 벌에 의존하는
농업도 이로인해 영향을 받고있다.
꿀벌들이 몰사하는 군집 붕괴현상(CCD)의 원인을 놓고 그동안 학자들
은 바이러스와 진드기, 살충제, 진균류등 각종 가설을 제기해 왔다.
지난 8월에는 미국 연구팀에서 벌들이 바이러스에 걸려 단백질을 만드는
리보솜이 파괴됐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바있다.
미국에서도 2007 - 2008년 겨울철에 전국 꿀벌의 3분의 1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일보 우정아기자

Wednesday, January 27, 2010

영혼 갉아 먹는 치매 앞엔 속수무책

월요일 아침 상담소의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기역력을 상실해 가시는 아버님에 관해 상담하려고 전화했다.
그 다음 주일에 아드님이 상담소를 찾아 왔다.그가 어렸을 때 아버님은 항상
엄격하시고 완벽하셔서 삼 형제가 꾸지람도 많이 들었으며 감히 아버님을
가까이 할 수 없어 아버님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퇴근길에 어느 노인 한분이 어께를 축 늘어트린 슬픈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집에 계시는 아버님 생각이 났고 걸어가시는 모습이
어딘가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따라가서 차를 세우고 가까이 보니 자기아버님인 것을 알았다.
아버님 하고 불러 보았지만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계속 앞으로 걸어
가셨다. 승강이 끝에 차로 집에 모셔 온 때도 있다.
한번은 당신의 시계를 누가 훔쳐갔다고 화를 내셔서 찾아 드렸더니
그 시계는 본인의 시계가 아니라고 고집을 부리셔서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위의 아야기는 증상의 일부 예이지만 다른 많은 어려운 증상들로인해
본인이나 가족들이 매우 어려운 살황에 놓이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돌아가는 날까지 정신이 맑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만 미국 레이건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영혼을 갉아먹는
치매 앞엔 권력도 부귀도 속수무책이다

치매는 보통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잊어버린다던가. 일상으로 해왔던
일을 기억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서서히 시작 된다.
정상적인 육체에 기억력과 성격이 딴 사람처럼 파괴된다. 기역력 혼란.성격과
행동의 변화나 판단력 상실 등으로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점차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되고 결국 치매 환자는
자기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가족 중에 치매현상이 보이면 곧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치매를 완치 시키거나 중단 시킬 수 있는 의료적 치료는 없다.

연방 식품 의약청FDA 이 승인한 네가지 약- 타크린 Tacrine; Cognex,
도네폐즐 Donepezil Hydrochloride; Aricept 리바스티그만 Rivastigmine;
EXelon,갈란타민 Galantamine Reminyl> 만이 이 병에 과련된 증상을 완화
시키고 병의 진전 속도를 늦을 수 있다
이러한 약물 치료는 치매에 따라오는 우울증. 불면증 초조감등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증상도 감소시킬 수 있다.

식생활개선도 침해에 걸릴 확률을 줄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한다.
과일 채소 시리얼 감자 bean, nuts, seeds 를 드시면 도움이 된다고 한다.
red meat<고기> 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치매협회는 치매환자와 그 가족과 간병인들을 지역 사회 내에서 돕고 있다.
전화상담,교육 세미나와 치매에대한 다양한 연구와 간병 방법등을 포함한
프로그람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매년 연말이 되면 그해를 돌아보고 다음해에 할 것을 결단한다.
그중에 올해는 건강을 위하고 치매를 예방하는 식생활과 건강생활 방법으로
바꾸어 사랑하는 가족과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고 즐가운 나날이 되시길
빌어본다.

기고 한미 가정 상담소 지니 최 문의 714-892-9910,9920

Monday, January 4, 2010

홀로사는 줄거움 법정스님

홀로사는 줄거움
봄에 책을 내며 꽃이 지나간 자리에 초록이 눈부시다. 온천지가 살아있다는 소식
으로 생명의 물감을 마음껏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은 (( 오두막 편지 )) 이후 각과 삶의 모습을 담은 것들이다.
2004년 5월 법정
산방에 지친 달빛에 잠이 깨어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쌓인 눈에 비친 달빛이 방 안에까지 훤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 방 안에 들어온 손님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자리에 일어나 마주앉는다.
천지간에 아무 소리도 없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 이 적막 강산에 어쩌다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리고 때로는 내 기침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머리맡에 벗어 놓은 누더기를 걸치고 앉는다.
기침이 한밤중에 나를 깨운 까닭을 헤아린다.
한낮의 좌정보다 살아온 날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바춰주고 싶다.
이 겨울 아침나절, 산중에 피어난 눈꽃은 환상적이다. 언뜻 달밤에 피어있는
벗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는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조화를 간직하고있다.
그 어떤 화가일지라도 이처럼 완벽한 설경산수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자연은 어떤 분별도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무심히 드러낼 뿐이다.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니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였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이런 일이있었다.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백만 불에 팔렸다.
그림을 갖고 싶은 한 귀부인은 그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인다.
한 미술평론가가 그녀에게 말한다. "이 그림은 진품이 틀림없읍니다. 이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귀부인은 그림을 산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림을 들고 직접 피카소를 찾아간다. "선생님, 저는 이미 이 그림을 화상에게서
샀으므로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 미술평론가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와 동거하던 애인도
그곳에 있었는데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님니다."
그러자 피카소의 젊은 애인이 말한다. "아니 여보,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평론가 선생도 그자리에 있었구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한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리지날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전에도 그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읍니다. 그 시절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오리지널은 지금 파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피카소의 참 면목이 있다. 누가 만들었느냐는 주요하지 않다.
설사 화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진짜가 아니고 모조품일 수 있다는 겄이다.
그에겐 맨 처음에 그린 그림이 오리진날이었다. 그 그림은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탄생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잡념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위대한 창조는 무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고 텅 빈 충만인 공( )의 경지다.
오늘 ((금강경 오가해 (( ))를 펼쳐 야보신사의 시를 디시 읽었다.
오두막 이숙한 밤 홀로 앉아 있으니
고요하고 적적해
본래의 자연 무슨 일로
서녘 바람 숲을 흔드는고
외기러기
먼 하늘에 울고 간다.
아보선사의 노래처럼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맞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였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그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드리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칭찬에 인색한 놀부심보

칭찬에 인색한 놀부심보 정권영/ LA 플러톤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39세나이에 갑작스럽게 소아마비에 걸렸다.
정치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을때였다. 불구가 된 그는 어느날 아내에게 물었다.
"나는 장애자로 당신을 더 많이 힘들게 할텐데 그래도 날 사랑한단 말이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때 그의 아내 엘리노어는 손을 꼬옥 잡으며 대답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그럼 그동안 내가 당신 다리만 사랑 했단 말인가요?
"이 말 한마디가 열등의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후 그는 그후 미국 대통령에 연이어 네번이나 당선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격려와 사랑의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꾸게 된다.
오늘도 내 자신 에게, 나의 아내와 남편,그리고 가족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칭찬을 해보라.좌절과 어려움에 처해있을 땐 더욱 그렇다.
먼 훗날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칭찬일지라도
상대방의 인 생을 변화 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특이한 심보가 있다.
그게 바로 놀부 심보다.
'초상난데 춤추기, 불 난데 부채질,
애 호박에 말뚝박기, 비 오는 날 장독 열기,
똥 누는 애 주저 앉히기....
.' 흥부전에 등장하는 놀부의 못된 심술 백태 다.
이러한 맘보가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칭찬에 인색하게 만들어 준다.
잘한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잘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게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한다. 타인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하려고 노력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삶 속에 칭찬이 몸에 배도록 해야한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나를 살리고 가정을 희복시키 고 나의 믿음을 성장 시킨다.

중도와 실용

중도와실용
이명박 정부가 친서민 행보를 펼치며 표방한 중도강화론 을 둘러싸고 말이 많다.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중도의 실세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인 정책을 성급하게 내놓고 있다며' 며 포풀리즘을 비판한다.
'일식집에서 비빔밥을 내놓는격' 이라는 비아녕도 들린다.
반면 민생 챙기기의 수헤 계층인 서민들은 성이 차지 않는 표정이고 정부
보수우의 성향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진정성을 의심한다. 친서민정책 진실성
보여야 정부가 제시한 '취임 후 상환 학자금 대출재' 는 대학생들의 등록금
고민을 해소해 줄 매력적인 정책이다.
이 대통령은 '이제 대학 등록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사실입니다.' 라고 외쳤다.
그러나 재장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인기 영합주의라는 비난과, 비싼 등록금이
문제의 근원임을 외면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반발이 엇갈린다.
그러나 비싼 등록금을 정부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또 새로운 학자금 대촐제의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마냥 생색내기라고 헐뜯을 일도 아니다.
그런 정책 아이템을 구상한 것만도 가상하지 않은가. 정권의 성향을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방식이다. 그러나 좌와 우를
양쪽으로 좀 더 팽팽히 잡아당기면 나오는 극좌파 극우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영향력이 약하다. 모든 정권이나 정당,정치세력은 대개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과거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가 중간에서 왼쪽에 자리했다면,문민정부와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오른쪽 어딘가에 위치하고있다.그곳이 중간에서 얼마나 왼쪽인지,
얼마나 오른쪽인지는 정부정책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대 정부 가운데 순전한 좌파 진보정권은 없었고
정책 수준에서는 이른바'골통보수' 극우정권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역대 정권은 대부분 중간에서 얼마간 오른쪽 또는 약간 왼쪽에 자리 잡았다.
또 모두가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흔히 포플리즘으로 흐르곤 했다.
결국 역대 정부는 대부분 중도, 퓨전, 비빔밥이었다.` 다만 좌우로 조금씩 편차를
보였을 뿐이이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정치의 우익보수 선회를 상징했지만,
그실체는 뉴라이트란 명칭이 시사하듯 절충형이다. 다시말해 뭔가 다른
우익이고 좀 모호한 보수이다. '강부자'와 '고소영' 정부의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그기조를 굽히지 않던 이명박정부가 민생 캠페인을 벌이며
'중도실용을 내세운것은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그래야만 학 이유가 있었던 것일가. 뒤늦게나마 어떤 이념과 정첵도 정치에
성공하지 못하면 실현하기 어렵다는것을 깨달았기때문일까. 별반 새로울 바 없는
그런교훈을 몰랐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절감하지 못했던 것일 게다.
그러다 촛불과 조문 정국을 거치며 민심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나마 감을 잡은 것이다.
정권 출범 초부터 '정치 기피'' 여의도 혐오'에 치우친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이제
국민을 상대로 본격적 대통령 정치를 시작한 셈이다.
국민의 신뢰를 쌓아야 성공 대통령은 인기에 연연해서도 포플리즘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러나 정치에 성공해야 한다. 중도 실행은 퇴행이라기보다는 진화론적
적응이라고 평가할만하다.
그 진정성 논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틈만나면
시비하던 재산 헌납 약속을 지켰고,
거듭 되풀이한 인사 실책도 큰 줄긴는 바로잡은 모습이다 그러니 국민도 이제
좀 지켜 봐줄만한 시점이다.
지금 이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더욱더 진지하고 부드럽게 민심을
어루만지고 '중도 실용'과 '친서민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샇는 일이다.
자신의 정치이념과 정책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도 이런 실용적 정치에
성공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실용이다.
폄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