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3, 2012


      과감한 한국, 치밀한 일본 ---

                                      그로벌 아이 이상언 런던 특파원


올림픽 축구 동메달 결정전 현장에 있었다. 한국이 일본을 2대 0으로 이긴, 박종우 선수의 독도 세리머니로 10여일이 지난 아직까지도 논란이 분분한 바로 그 '역사적' 장소 카디프 밀레니엄 구장에, 골이 터진 두 차례의 순간, 흥분하지말고 차분히 관찰해야 하는 기자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다가 민망해서 조용히 주위를 살펴보고 얼른 앉았다.


기자석은 구경하기에 가장좋은 경기장 중앙 쪽의 관중석 하단 중심부에 있었다. VIP석 바로 맞은편. 그런데 이 기자석 바로옆에 150명 가량의 일본인이 떼로 몰려 앉아 아주 시끌벅적하게 응원을 했다. '닛폰, 닛폰'을 쉴새없이 외치고,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댔다. 사무라이 복장을 한 일본인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명당 자리에 단체로 앉을 수 있었을까. 그런의문이 들었다. 상당히 조직적으로 준비하지 않고서야 집단적으로 그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일본이 3~4위 전을 치르는 것이 확정되기 한참전에 일찌감치 표를 예매했어야 했고, 인터넷이 아닌 현장 구매로 일사불란하게 이련번호로 표를 샀어야 했다.


반면에 한국응원단은 관중석 여기저기에 산재돼 집단응원에 애를 먹었다. 대부분 좋은자리도 아니었다. 부라질과의 준결승전 패배이후 급하게 개별적으로 표를 구했기 때문이였다.


어쨋든 응원 목소리에서 한국이 밀리지는 않았고, 시합도 시원하게 이겼지만 일본인의 치밀한 준비에 놀랄 때가 있다. 

기자회견장에서 보면 뭔가 잔뜩 적어오는 경우가 많다. 물어보면 회사간부와 사전협의를 거쳐 질문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회견내용과 질문방향이 어긋나 생뚱맞은 분위기를 연출해도 답답해 보일정도로 가져온 질문을 고집한다.


이런 일본인에 비해 축구 응원단과 기자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즉흫적이다 좋게 말해 다이내믹하고 융통성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치밀함에 약점이 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도 다소 즉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의 한국 공무원들에 따르면 대통령은 올림픽 축구 준결승전이 열린 7일(현지시간)에 영국을 방문해 경기를 관람할 계획을 추진했다.


 이후 결승정이나 3~4위전까지도 참관하는 것이 검토됐다고 한다. 이는 10일의 독도 행차가, 장시간 대통령의 심중에 있었던 일이었다 하더라도 D-데이를 포함한 실행계획이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박종우선수의 세리머니 사건 뒤 어설픈 입장 표명과 사과로 논란을 부른 대한체육회나 축구협회의 내응도 한국의 성격을 드러낸다. 서두르다 정확한 의사 표현의 절차나 방법을 점검하지 못했다.


올림픽에서는 한국의 과감한 축구가 일본의 꼼꼼한 축구를 눌렀다. 하지만 국가 간 분쟁이나 외교에서는 의욕이 정교함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
                                              이 아침에 이기희 윈드 화랑 대표

가을이 떠나고 있다. 홀로 선책길에 올라 낙엽을 밟아보라. 낙엽은 아침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제 몸이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떠나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꽃들의 향연이 떠나간 뒤뜰엔 마른 풀잎들이 생명을 품고 내일을 기약한다, 계절은 등 돌리며 빛바랜 정원의 꽃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성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되고 빛바랜, 쿨쿨한 냄새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숫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 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가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맛, 신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힘과 용기를얻는다.

너무 빨리 숫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차고 푸른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마음으로 단단하게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근다. 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 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고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추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그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떠나는 게절의 끝자락 붙잡고 처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깇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참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열치액젓 다진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을 모두 담아 꼭꼭봉해 당신 가슴깊이 묻어 두세요. 

당신이 와로울 때마다 은근하게 잘익은 추억의 묵은지가 오래된 정원에서 늘 당신과 함께 하길 바라요. 

Friday, November 9, 2012

절차의 힘 1




절차의 힘 프롤로그 1
사이토 다가시 지음 . 홓성민 옮김


     절차의 힘 프롤로그 1

사이토 다가시 지음 . 홓성민 옮김
일을 쉽고 편하게 만들어 주는
절차의 힘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단 철저한 훈련을 통해 길러진 절차의 힘은 다른 영역에 효과적으로 응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을 희복하는데 큰 도움이된다. 한 가지일에 탁월한 재능을발휘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잘 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즉 한가지 일에 정통하면 그 내면의 절차가 확실히 이해되고, 어떤 방식으로 절차를 밟아가야한다는 것이 몸에 익혀지게 되므로 다른일에도 그것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절차의 힘을 단련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할 때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절차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한 뒤 일을 시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해도 효율성 면에서 현격히 차이가 난다. --좋은 생각--

절차의 힘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특별한 천재나 예술가를 제외하면 잠재력이나 재능 면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단지 일을 하는 데 있어 차근 차근 절차를 밟아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믾은 사람들은 애초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었다고 한탄하며 절망을 한다. 그러나 실패라는 쓰디쓴 결과를 놓고 자신의 능력부족이나 불우한 성장 과정, 열악한 환경 탓으로 돌려버리면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으므로 노력도 하지않게 된다. 하지만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었다' 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에대한 대처법도 달라진다. 이 점이 중요하다.


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문제를 하나 푸는 데도 아무 생각없이 무턱대고 푸는것과 차근차근 공식에 대입해 가며 푸는 것과는 결과에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시험 점수가 나쁘게 나오면 자신의 안 좋은 머리 탓으로 돌리거나 "원래부터 이 과목은 나에게 맞지 않았어" 하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시험 결과가 나빳던 것은 그에 대비해 준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거나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냉철하게 판단 할 수 있게 되면 실력은 향상된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일을 제대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차가 생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절차를 바르게 인식하면 자신의 실패에대해 질책하는 정도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염두가 나지 않지만,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대로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자신감을 잃지않고 새롭게 도전하여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갈 수 있게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반성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상황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귿이 자신의 인간성 전체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도 단지 차례와 방법을 효과적으로 바꾸는 간단한 일을 통해 흭기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절차의 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절차의 힘이라는 개념을 내것으로 만들면 여러가지 일과 살황을 절차라는 절단면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즉, 모든 일에 절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서 다양한 종류의 활동을 서로 연결해 보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차의 힘이 갖는 효용성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하는 일과 논문을 쓰는 일은 완전 별개의 활동처럼 보이지만, 절차의 힘이라는 칼로 잘라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공통점이 선명하게 들어난다. 이 개념의 편리함을 이해하게 되면 차츰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그만큼 향상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원래 절차라는 단어는 회의 테이블에서 논의되는 아론적인 말아라기보다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말이다. 조각상 같은 예술 작품을 만들 경우에도 절차가 중요하다고 조각가들은 이야기 한다. 어쩌면 예술적 재능은 약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절차를 제대로 알고 익힘으로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 건지도 머른다.


절차를 배우고 익히는 이런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술같은 창조적인 분야에서조차 재능이 아닌 절차의 힘이 중요한 관건이라면, 그 밖의 다른 활동들에서 절차의 함이 갖는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절차의 힘만 익히면 모든 활동이 한결 수월해지고 편해진다는 발상은 무척 흥미롭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또 실패한 일에 대해서 보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안에 잠자고 있는 절차의 힘을 깨워라
절차의 힘에 곤한 이야기를 하다 보년, "내겐 절차의 힘이 없으니 그것을익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사람을ㄹ 자주 만나게 된다. "나느 절차의 힘을 갖고 있읍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을 이제까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 책에서 나는 절차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볻다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절차의 힘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일이다. 절차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처 그것ㅇ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일 처리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지으며 노력핮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절차에도 여러가지 형태가있으며, 자신에게 꼿 맞는 절차 스타일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모리 오가이(군의관 . 소설가) 처럼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함면서 일을 해나가는 탕입이 있는가 하면, 사카구치 안고(소설가 . 평론가) 처럼 방안에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은 채 소설을 쓰는 탕입도 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각품을 많아 남긴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 밟는 절차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가이 경우, 먼저 주변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는 방식의 절차의 힘을 갖고있다.
그에 반해 사카구치 안고의 경우 비록방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지만, 바로 그 난잡함이 그에게는 소설 창작의 핵심 포인트다. 깔끔하게 저리되어 있기보다 오히려 마구 어질러져 있는 편이 훨씬 일이 잘된다면 그 난잡한 주변환경이 그에게는 바로효과적인 방법이자 절차가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부 요시하루(일본 장기의 최고수)라는 장기의 대가가 있는데, 예전에 그는 여관이나 호텔에서 쉽사리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기의 대국은 주로 호텔이나 여관에서 이루어지는 터라 번번이 쉽게 지쳐버려 대국에도 자주 영향을 받곤 했다. 이 문제를 그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우선 여관에 도착하면 방에 짐을 몽땅 꺼내놓는다. 그러고는 자기집처럼 마구 어지른다. 그러면, 자기만의 공간처럼 느껴져 편안한 기분으로 대국에 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부의 경우, 여관에서 방을 어지르는 것이 그가 가진 절차의 힘이다. 정리정돈을 못한다고 해서 일을 할 때 젍차를 제대로 밟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상위에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어디에 무엇이있는지 알아서 실수없이 민첩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맞는 절차의 스타일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절차의 힘이 가진 가장중요한 의의다. 설사 전반적인 일을 아무리 뛰여나게 완수해 낸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절차의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방식을 활용하는 절차의 힘을 체계적으로 기술화 하는것이 이 책의 최종 목표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 첫번째 단계로서 먼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는 절차의 힘을 깨달아야한다. 직장에서 일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른일에서는 확실한 절차로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처럼 특정한 일에 대해서는 뛰어난 절차의 힘을 발휘하면서도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가정적인 타입으로 요리를 잘하면서도 직장일에는 서툰 사람은 요리에 필요한 절차의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업무에 연결하는 회로가 없는 것이다.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을 출발점으로 하여 서툴고 생소한 분야를 차츰 극복해 나가는 것이 바로 절차의 힘을 키우는 핵심 요령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만의 절차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다른일에 적극적으로 응용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제가가각 다른 절차의 힘을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절차의 힘을 발견하여 그것을 차츰 발전시키고 확장시켜가는 것이 중요하다.


죽고 싶으면 죽도로 오라


"죽고싶으면 竹島로오라"
竹島(경남통영)=주정환 기자 jwjoo@joongang.co.kr


지난달 31일 오후 7시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의 작은 섬 竹島. 주민 6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남쪽바다 외딴섬의 밤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폐교 운동장엔 육지에서 찾아온 특이한 방문객 19명이 한줄로 섰다.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체를 경영하다 실패한 '전직 사장님' 들이었다. 이들 앞엔 섭씨 550도의 뜨거운 숯불이 새빨간 불티를 어지러이날리며 타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태워버리겠읍니다. 이제 나의 미래는 불빛처럼 환하게 밝아올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찬 외침이 고요한 섬의 정적을 깼다. 그리고 용기를 내 뜨거운 숯불위로 힘차게 걸어갔다.발바닥은 흙과 재로 더러워 졌지만 놀랍게도 불에 데인곳은 전혀 없었다. 그 뒤를 이어 18명의 동료도 무사히 숯불 위를 걸어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랑하는 동료를 얼싸안고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들에게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숯불 걷기는 낡은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다음날 오전6시 죽도의 동쪽 바닷가.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어둑한 벼랑 위로 19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와 세찬 바람소리를 벗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깊은 명상에 감겼다.


 밤샘 조업으로 고단해보이는 고깃배가 바다가운데를 천천히 지나갔다. 잠시 후 벌건 아침노을이 한려수도의 섬과 섬 사이로 퍼지더니 '말갛게 씻은 얼굴'의 고운 해가 먼 산 위로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노란 아침 햇살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선 번뇌와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새 희망이 솟아났다. 머리위로 두팔을 활짝펴고 야호~ 소리를 질렀다. 오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누군가의 희망찬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의 이름모를 노란 야생화가 새삼 아름다워보였다.


 텐트에서 명상하며 자기반성
지난달 8일 통영 여객선터미널. 19면의 '전직 사장님'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죽도로가는 여객선 '섬누리호'를 탔다. '제4기 재기 중소깅업 경영자 힐링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부도와 폐업으로 막대한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음지로 숨어든 사람들을 돕기위해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연수생들은 폐고를 고쳐 만든 죽도 연수원에서 이달 2일까지 26일간 공동생활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졌다. 기자가 죽도 연수원을 찾아간 것은 캠프 24일째 되는 지난달 31일이었다. 오전 7시 통영항에서 하루 두번다니는 여객선을 타고 1시간이 조금넘게 걸려 죽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5분거리인 연수원 입구에선 '허밀청원(虛密淸圓)' 이라 적힌 현판이 손님을 맞았다.


 '묵은 마음 비우고 맑고 둥군 마음만 가득채워 가는 곳' 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형광빛 점퍼를 입은 연수생들은 운동장에서 아침식사 전 명상을 하고 있었다. 41세에서 63세까지 남자 16명과 여자 3명으로 구성된 연수생중에는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사람도 적잖다"며 "이들에게 '죽고 싶으면 죽도로오라'는 말로 캠프참가를 권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외딴섬에 제발로 찾아올 사람들이라면 그만큼 마음이 절박하고 막다른 곳까지 몰려 있다는 뜻" 이라며 "연수생 들에게 형광빛 점퍼를 지급한 것은 혹시라도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남의 눈에 쉽게 띄도록하기위해서"라고 소개했다. 연수생들은 4주의 교육기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벌렸다. 외부 세계의 편리함을 잊고 자연의 치유력에 의존해 상처받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TV 나 인터넷는 전혀보지못하고 가져온 휴대전화도 연수원에 맡겨둬야 했다. 식사는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끼. 연수원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야채 위주의 식사였다.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것은 기본이고 커피도 마시지 못한다. 구멍가게조차없는 죽도에선 돈이있어도 살 수가 없는 품목들이다. 섬에는 물이 귀해 빗물을 받아쓰는 사정상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만 할 수 있었다.


 캠프 2주차부터는 산 위에 각자 1인용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낮에는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밤에는 한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만한 좁은 텐트속으로 들어갔다. 텐트안에선 희미한 손전등을 비춰 책을 읽거나 명상을 했다. 고라니 등 야생동물이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는 자장가삼아 들었다. 맑은 말이나 흐린날이나 새벽에 잠이깨면 동쪽 바닷가 위에 앉아 일출을 보며 명상에 잠겼다.


 한 원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사업실패우 술과 담배에 절어살면서 불면증, 우울증, 당뇨 등 각종 질병을안고 오는 경우가 많다."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절제와 금기를 요구하고있다." 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프로그램은 특정한 이론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스스로 명상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며 "처음엔 잔뜩 굳어있던 연수생들의 표정이 날이갈수록 밝아지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모든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
정영주(57)는 5년전만 해도 잘나가는 여성 기업인이었다. 중국 지린성 창춘에 진출해 1만 1500(평방미터 약 35000평)규모의 봉제공장을 세웠다. 직원수는 270명을 헤아렸다. 매출의 100%를 의존하는 거래처였던 국내 대기업이 중국 상업을 확장하면서 사원복 주문이 폭팔적으로 늘어난 덕분이었다. 장씨는 30대 재벌에 속하는 이 거래처를 철석같이 믿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2008년 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경기가 급격히 악하됐다. 자재 값과 인건비는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거래처는 '단가를 내리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압박했다. 장씨는 '단가를 후려 치더라도 주문을 받아와야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모든 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나마 납품대금도 제때 받지 못했다.


 봄에 납품한 제품 값을 차일피일 미루다 가을에야 겨우주는 건 예사였다. 5년전 납품한 대금 중 아직 받지못한 돈도 남아있다. 거래처 담당자가 바뀔 때 마다 예전 담당자가 약속했던 사항은 모르쇠로 잡아뗐다. 정부는 '상생'과 '동반성장'을 외쳤지만 현장에선 전혀 딴 세상 얘기였다. 정씨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부처에도 민원을 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공장 자금사정은 급격히 나빠졌지만 복잡한 중국 법규에 따라 공장문을 쉽게 닫을 수도 없었다.


주문 물량이 반토막으로 줄고 공장 가동율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노는 직원들을 어쩔 수없이 집으로 보냈다가 부당해고로 고발당했다. 정씨는 "거래처 담당자가 단가이하로 회사 비용을 절감했다며 성과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피눈물이 났다. 그 성과급이 결국 나 같은 중소기업의 고혈을 쥐어짠 대가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소연 했다. 그러면서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분위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고 울먹였다.


 세상을 원망하며 눈물로 살아가던 장씨는 이번 캠프에 참가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했다. 장씨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하루종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였지만 이젠 다 내려놓고 웃으며 살아가기로 했다." 고 말했다. 그는 "야외에서 혼자 명상하면서 마음의 부자가되니까 모든게 달라 보였다. 아들이 '모든 분노를 죽도 바다에 던지고 오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말대로 실천하려고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익훈(58)씨는 1998년 외환위기 때 부도난 공장을 인수해 14년간 제빵업체를 운영했다. 성실 납세기업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열심히 세금도내고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하루 평균 5t 분량의 밀가루을 빵 기계에 쏟아부으며 장미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비교적 재무상태가 탄탄했던 거래처가 어느 날 인수합병(M&A) 전문가에게 넘어가더니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거래처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빚잔치를 하고 매각되면서 애써 납품한 물건 값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거래처의 새 주인은 10대 재벌에 속하는 대기업이었다. 잠시 희망도 거져봤지만 소용없었다. 새 주인은 납품단가 인하부터 요구해왔다. "지난해 11월 공장 문을 닫고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며 "결국 내가 사업 이이템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반신반의하며 죽도를 찾아온 그는 교육 1주차에는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그러나 2주차에 들어가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매일 해 뜨는걸 보면서 분노하는 마음을 내려놨다. 어느 정신과 의사도 해주지못한 마음의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이곳에서 생전 처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됐다"며 "그동안 무릎과 어깨가 좋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저절로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재기성공하면 같은 처지 사람돕고 싶어
 아항훈(46)씨는 20년전 작은 사진관에서 출발해 한동안 승승장구하며 결혼식 관련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깢지 사업을 키워나갔다. 결혼식이 몰리는 계절에는 하루에만 300만원의 현금을 쓸어담은 적도 있었다. 연매출 10억원대에 직원수는 40명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쳐 예식장 건설에 뛰어든 게 화근 이었다.


  6600평방미터(약 2000평)의 땅을 구입해 건축허가를 신청했는데 담당공무원이 2년이나 질질 끌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간신히 허가는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금융회사의 돈줄이 꽉 막혀버렸다. 할 수 없이 3층짜리 예식장을 포기하고 1층짜리 일반건물로 용도를 바꿔 건출을 마무리 했다. 그런데 경기불황으로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건물을 놀릴 수 없었던 이씨는 직접 고깃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게 장사가 됐다. 하지만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는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내 판단 착오였다."고 했다. TV 한대 남기지 못하고 전 재산이 경매로 넘어갔다. 먹고살기 위해 대리운전 핸들을 잡았던 이씨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손님에게서 재기중소기업개발원에 관한 얘기를 듣고 죽도를 찾았다. 이씨는 "여기서 4주간 지내면서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나 자신을 학대하고 비관하며 미워하기만 했는데, 이젠 나부터 나 자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연수생들은 죽도를 나가는 순간 다시 현실의 벼랑에 서야한다. 죽도의 벼랑에서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란 사실을 연수생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마치는 연수생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중소 제조업체를 경영하다 부도를 냈다는 장만경(56)씨는 "처음 죽도에 들어올 때는 아 자신을 거지나 쓰레기로 여길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며 "지금은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재도전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사업에 성공한다면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와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