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23,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禪의 나침반 The Zen of Compass

숭산 행원 대선사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제의 압제아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불안한 사회를 보며 자신의 정치적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참된 진리를 구하기 위해 1947년, 충남 마곡사로 출가하여 行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9년 예산 수덕사에서 당시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던 고붕 대선사로부터 傳法戒와 嵩山이라는 幢號를 받아 이 법맥의 78대 祖師가 되었다. 당시 고봉스님은 ‘너의 法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1966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외 포교에 앞장서 1972년 미국에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32개국에 120여 개 선원(Zen Center) ,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生佛로 추앙받은 숭산스님은 만년까지 세계를 누비다 04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를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래도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진리를 발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누군가 배가 고픈 사람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순간순간의 상황과 관계, 올바른 실천을 가르쳐주는 마음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진리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부처님과 법을 통해 순간순간 바른 삶을 갈고 닦으십시오

우리는 자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은 참으로 단순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너무도 복잡해졌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총인구는 20억 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불과 50여 년이 지난 지금 총인구는 60억 명에 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30년 안에 30억 인구가 새로 추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인구가 갑자기 늘면 사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진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강해지고 생각과 삶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기 위한 새로운 방식과 무기들을 만들어내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기, 물, 풀, 나무 등 이 땅의 모든 것들에게 상처를 주고있다. 숲을 파괴하고 녹지를 없애고 물과 공기와 땅을 오염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자유’를 원한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인간이야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유일한 독재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지만 사실 인간만큼 어리석은 동물도 없다. 스스로에게 한번 이렇게 물어보자. 왜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는 어디로 가는가?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당신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이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동물이라고 자부하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작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개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잘 안다.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일을 ‘오직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과 바른 길을 알지 못한다.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그러면서 늙고 죽어간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우리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삶의 고통에서부터 벗어나려면 먼저 이 세상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모든 것은 우리마음에서 생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원인과 조건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낸 결과에서 온다고 했다.
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일까?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왜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양은 매일매일 늘어만 가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즘 인간들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제 2차 대전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고기를 즐겨 먹지 않았다. 동양사람들은 1년 가야 한두 번 명절 같은 날이나 겨우 고기구경을 했지만,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고기를 먹을 때가 있다. 이에 비하면 서양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고기를 많이 먹는 것과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것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옛날에는 고기가 먹고 싶어지면, 숲에서 사냥한 동물을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과 함께 먹곤 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는 의식(에너지)이 있기 때문에 동물과 그 고기를 먹는 인간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때 형성된 관계, 즉 당시 그들의 업(Karma)은 간단했다.
활이나 창에 찔려 죽게 된 동물들은 죽으면서 자신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 나쁜 사람이 지금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아마도 다음 생애에서는 내가 그를 잡아먹으리라.” 당시에는 오직 한 사람과 한 동물 사이의 관계로 끝나게 되므로 비교적 단순한 인과의 고리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간의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다. 동물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특별한 도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만 동물들이 단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 세계에서 미일 도살되고 있다. 공장에서 단추 하나만 누르면 멀리 떨어져 있는 동물들을 한꺼번에 죽일 수도 있다. 느닷없이 살해된 동물들의 의식(Consciousness) 역시 육체에서 분리된 채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시 태어날 새로운 몸을 찾게 된다. 어디로 갈지는 그들 자신도 모른다.
그들 중 몇몇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 인간으로 환생한 동물이 0.00001퍼센트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한편 요즘 사람들 중에는 겉은 인간의 형상이면서도 의식은 동물의 그것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즘 인간들을 자세히 보면 비록 얼굴과 몸은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의식은 온전한 인간의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개, 고양이,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토끼, 소, 돼지, 닭, 사자, 호랑이, 뱀의 의식들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사랑과 자비라는 본래 인간의 본성 대신에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동물적 의식만 있는 것이다.
물론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섞여 있으면 좋지않다. 동물들은 오직 자기들의 종족번식을 위해서만 살지, 다른 종족과는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개는 개만 좋아하지, 고양이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뱀, 사자, 토끼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새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종들끼리만 몰려다니고, 다른 종이 공격해오면 떼거지로 반격한다. 바로 그것이 동물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 세계도 점점 이와 비슷해지고 있다.
오늘날 정치상황도 이와 똑같다. 이 세계에는 정치적, 종교적 신념에 따라 쪼개진 수많은 나라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 군대를 갖고 있고 서로 싸운다. 이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그런 모습을 보고자라면서 점점 총과 폭력에 익숙해진다. 10년이나 20년 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사랑, 협력, 남을 돕는 마음 같은 인간 본래의 마음대신에, 기회만 나면 서로 싸우지 못해 안달이다.
1970년대 미국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선원(禪院, Zen Center)에 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애완용으로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너무 좋아해서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고, 심지어는 옆에 두고 잘 정도였다.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이번 주 3일 동안 선원에서 먹고 자며 집중 참선 수행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자, 그녀가 말하길 “사랑하는 내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고양이와 함께 있을 개인 방을 내주고 부득이한 경우 선원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이 고양이를 돌보도록 하겠다고 제안하자, 그녀는 그제야 응낙했다.
수행 첫날, 그녀의 오빠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가 위독 하시니 급히 병원으로 달려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전화통에 대고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 병문안을 가면 내 사랑스런 고양이들은 누가 돌보죠? 내가 없으면 그들은 죽을지도 몰라요. 고양이는 무척 예민한 동물이예요. 설사 다른 사람이 돌봐준다 하더라도 그 동안 뭐라도 잘못 먹이면 큰일나요
그녀의 오빠는 평소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는지 더 이상 설득도 하지 못하고 그냥 전화를 끊는 눈치였다. 며칠 후 그녀의 이런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애완용 고양이들 중 한 마리가 병이 났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웅크려 있기만 했다. 그녀는 너무 걱정이 됐는지 참선수행도 끊고 수의사들에게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는 아예 아픈 고양이를 데리고 나가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다녔다. 자기 엄마가 아프다는. 소리에는 꿈쩍도 안 하던 그녀가 기르던 고양이가 아프다니까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엄마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그년의 얼굴과 몸은 비록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의식의 일부는 이미 동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툰 대신 고양이와는 아주 쉽게 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상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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