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24, 2012

불교의 목적 숭산 큰스님 가르침

불교의 목적 • 佛敎 目的 The Purposes of Buddhism
보리의 지혜를 구하고 닦는다 上求 菩提 First attain enlightenment.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한다. 下化 衆生 then instruct all beings.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
“그러시는 선생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 아십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바로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걸핏하면 나, 나, 하지만 실상 이‘나’라는 것이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우리는 왜 사는가? 돈? 아니면 사랑? 혹은 명예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면 내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그저 행복하게,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소망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먹고 자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은 진정한 삶의 목표가 아니며, 다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인도에서 태어난 부처님은 2천5백여 년 전, 싯다르타 고타마라고 불리던 왕자였다. 왕궁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곧 이어받을 왕위까지,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진정한 자기자신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끝 모를 의문만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란 결국 병들어 늙고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허무감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모르겠다.”
그 당시 인도의 지배계층들은 브라만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가르침은 이 젊은 왕자의 의문에 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의문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 나왔는가? 왜 우리는 매일 먹어야 하는가? 왜 병마에 시달리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가?”
그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왕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홀연히 왕궁을 떠났다. 긴 머리를 다 깎고 수행자가 되어 산으로 올라간 것이다. 오로지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화두를 안고 열심히 수행했다.
그렇게 6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그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동쪽 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의 존재가 무한대의 시공간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도, 죽음도, 결국 따로 없다는 것을, 오고 가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른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무명의 눈을 떠 本性을 발견 한 것이다.
그는 무지가 나타날 때 ‘마음’이 나타남을 깨달았다. 또 마음이 나타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욕망에서 삶과 죽음, 오고 감, 행복과 불행 등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오로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지켜감으로써 부처님은 이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世世生生 거듭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덫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것이며, 바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른다.
당시 부처님이 얻었던 이 깨달음은 아주 높은 경지였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눈에는 무지 속에서 욕망과 분노를 쫓으면서 나고 병들고 늙고 죽으며 끊임없이 방황하는 중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순간순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내가 깨달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어떻게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내 말을 믿어줄 것인가? 아니, 누구 한 사람이라도 내 말에 귀 기울여줄까?’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비웃을지도 모르고, 이교도라 하여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아주 맑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가르침을 포기하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상태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해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 대한 깊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한한 열락의 자리인 부리수나무를 박차고 나와 인간들의 고통의 현장인 속세로 나온 것이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의 상태인 열반의 세계를 떠나 시끄럽고 더럽고 경쟁과 투쟁이 가득한 인간의 세상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속세의 왕위를 버렸듯 다시 한번 조용하고 안락한 열반의 상태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깨달음의 경험을 혼자만 간직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 大慈大悲’이다. 위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 거룩한 깨달음의 사랑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역사적 聖人의 가르침만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인가? ‘깨운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부처, 즉 ‘붓다(Buddha)’라는 말은 우리가 본성품을 깨달아 고통의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
자, 그럼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다. “당신은 누구인가? 태어났을 때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간절한 삶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다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책이나 지식은 답을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돈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나 하느님(하나님)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오직 모를 뿐’만이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답을 찾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종교적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들은 결국 ‘주체 종교’와 ‘객체 종교’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주체 종교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을 믿는 것이고, 객체 종교란 바깥의 초월적인 힘, 즉 이 세상과 우리 삶을 통제하는 어떤 강력한 힘, 즉 신을 믿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외부의 힘 혹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믿으면 뭔가를, 이를테면 행복이나 특별한 에너지,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명상 수행도 이를 방편으로 이용한다. 어쨌든 하나되고 싶은 어떤 대상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것은 모두 ‘객체 종교’이다.
그러나 불교는 주체 종교이다. 자기 자신, 내가 이미 갖고 있는 本性品 바로 ‘나’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나我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태어났을 때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언제 죽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질문을 절실하게 파고들면 모든 생각은 완벽히 끊어진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며,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된다.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는 분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란 것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하여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책을 통한 배움이 아니며, 어던 절대자 혹은 외부적인 힘에 의존하지도 안는다. 불교가르침의 진수는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깊이 함으로서 ‘오직 모를 뿐……’ 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우리의 본성, 참 나(眞我)를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불교는 단지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길(道)이다. 그 길의 이름이 ‘ 오직 모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
그 순간 우리 자신과 우주는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참선수행’이라는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른 길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불교 역시 진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참 나를 깨닫고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진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참 나를 얻을 때 우리는 우주적 존재가 된다. 우주와 나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실용, 實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그러나 이 두가지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깨닫고 가르치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와도 같은 것이다. 한쪽이 고장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홀히 안다면 진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게 된다. 한편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부처가 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두 가지 수레바퀴로 나아갈 때, 우리는 佛國土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8만 4천 경전이나 성경을 줄줄이 왼다 하더라도 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으며 그 모든 이해와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눈감고 죽는 순간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낫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보살도(菩薩道), 그리고 위대한 자비는, 다름 아닌 우리마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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