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31, 2012

스님은 누구십니까?

구지[俱脂] 큰스님 이야기

"아니, 이 무례한 비구니 같으니라고,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냐?"
구지스님은 이렇게 소리쳤으나 비구니 스님은 아무말도 하지않고 구지스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비구니 스님이 입을 열었다.
"스님은 중국에서 제일가는 강사이십니다. 이 땅에서 제일 경전을 많이 공부하신 스님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불쑥 찾아뵌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스님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자, 스님은 누구십니까?"
순간 구지스님은 깜짝 놀랐다. 이 무례한 비구니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원가 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탁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스님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팔만대장경을 수없이 거꾸로 외고 바로 외었으나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의 말인가. 도저히 모르겠구나.' 구지스님은 완전히 입이 막혔다. 개는 개의 말을 이해하고 고양이는 고양이의 말을 이해한다. 모든 동물들이 그들의 진정한 말을 이해한다.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말이란 무었인가? 무엇이 나의 진정한 말인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구지 스님은 비구니 스님에게 부끄러워 얼굴을 바로 들 수 없었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 아렇게 쏘아붙인 뒤 홱 돌아가 버렸다.
"어떻게 스님의 말도 모르십니까? 그러시면서 부처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읍니까?"
구지스님은 쇠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돌아가려는 비구니를 재빨리 붙들어 세웠다.
"대체 스님의 스승은 누구요?"
비구니는 "천룡[天龍] 스님입니다."하고 짧게 말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구지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 그 비구니 말이 맞아 어찌 내 말도 모르면서 무처님 말씀을 남들에게 가르친다는 말인가?'
구지스님은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읽던 책을 내던지고 가사를 입었다. 그리고 대종을 쳐 절안의 온 승려들을 불러모았다. 들과 산에서 일하고 있던 승려들, 경전을 공부하던 승려들이 놀라서 법당으로 몰려드니 모두 7백 명아나 되었다.
구지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어떤 비구니가 나타나서 나에게 나 자신의 진정한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여러분들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30년동안 부처님 경전을 가르쳤다. 모든 교리를 이해하고 경전에 대해서도 다 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현재 나에게 전혀 도움이되지않고 있다. 나는 지금 비구니의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다."
제자들은 당황했다. 이제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느냐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구지 스님은 단호했다.
"미안하게 됐다.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더 많은 사람이니 더 이상 강원을 열수가 없다. 부디훌륭한 스승을 찾아들 가거라. 아니, 그 이전에 여러분들도 나처럼 선방에가서 이 큰 물음을 가지고 앉아 깊이 생각해 보아라.언젠가 여러분 모두 결국 죽는다. 더 이상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 말라.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질문을 해결해야한다. 본인의 바른 방향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자신의 본래말을 찾을 수 있다."
구지는 이렇게 말한 뒤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승려들 몇몇은 울기도하고 비난을 퍼붓기도 하는 등 큰 소란이 벌어졌다. 방으로 돌아간 구지 스님은 그날부터 하루에 한끼만 먹고 참선 스행에 전념했다. 눕지도않고 그저앉아서 '나의 진정한 말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하며 참구했다. 그동안 절에 남았있던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절 문은 닫혔다. 그러거나말거나 구지는 방에 앉아 벽을 바라보고 깊은 삼매에 빠졌다. '나는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누군가 절 문을 사정없이 두드리며 구지 스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구지 스님의 시봉 일을 맡고 있던 동자승이 참다못해 달려나갔다.
'지금 큰스님은 정진중이오니 만날 수 없읍니다. 부디 돌아가주십시오." 하지만 이 손님은 완강했다. 아무리밀려도 막무가내였고, 소리까자 크게 질러댔다. 거의 한 시간가량 실랑이를 벌였을까. 그지 스님이 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스님은 여차하면 때려서라도 몰아내겠다는 기세로 큰 막대기를 쥐고 나와 일주문에 대고 소리쳤다.
"썩 물러가라. 웬 미친놈이 감히 이 시간에 소란이냐?" 그러나 손님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아주 평화롭고 맑아서 어두운 밤인데도 빛까지 나는 듯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스님. 나는 천룡이라는 사람입니다." 주지 스님은 '천룡'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크게놀라 그만 막대기를 땅에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니, 이분이 바로 그 1년 전 비구니 스님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한 천룡 대선사님이라는 말인가. 스님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이고 스님, 죄송합니다. 제가 스님을 몰라뵙고------." 천룡 스님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문으로 들어섰다. "괜찮읍니다. 사실은 오늘 내가 스님께 사과를 하러 왔읍니다. 제게 '실체'라는 비구니 제자가 한 명 있는데 얼마 전에 여기와서 스님께 무례를 범했다 하더군요." 그지스님은 깜짝놀라 말했다. "사과라니요? 그분은 저의 마음을 깨워주신 분입니다. 저를 바른 방향으로 이끈 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있읍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님을 찾아뵈려고 하던차 였는데 이렇게 직접오시다니, 너무 송구합니다.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구지스님은 천룡 큰스님을 방안으로 모셨다. 잠시 침묵이 흐른뒤 천룡 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제자인 실체 비구니가 아곳에 와서 행패를 하고 간 뒤 강원 문을 닫으셨다고 들었읍니다. 7백 명 대중 스님들이 다 흩어지고 게다가 구지 스님은 아무일도 하지 않으시고 벽만 처더보시면서 앉아 계신다고 하길래 제가 하도 미안해서 이렇게 찾아왔읍니다. 그런데 스님, 저에게 뭔가 물을 것이 있으십니까. 어떤 질문이라도 좋읍니다."
구지 스님은 기디렸다는 듯이 말했다. "큰스님, 저는 어떤 종류의 부처님 가르침도 원하지 않읍니다. 경전을 인용하는 것도 원하지 않읍니다. 스님의 진정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요."
천룡 스님은 구지 스님의 눈을 뚫어져라 처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룡 스님은 구지 스님의 눈앞에 천천히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순간 구지 스님의 마음이 섬광처럼 환하게 열렸다. 천룡 스님의 손가락을 보자마자 여태까지 맺혔던 것이 환하게 풀렸다. 팔만대장경의 소식이 그 손가락 하나에 있고, 대 우주의 실체와 진리가 손가락 하나에 있고, 대보살행이 손가락 하나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구지 스님은 천룡 스님께깊이 삼배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스님은 미소르 지었다. 그러자 천룡 스님이 아렇게 물었다. "그런데 스님은 지금 무엇을 얻었나요?" 구지 스님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천룡 큰 스님은 손뼉을 치면서 기뻐했다. 구지 스님은 모든 생각을 끊고 완벽하게 본성을 깨달은 것아었다. 이것으로 구지 스님은 위대한 선승이 되었다. 그는 절을 떠나 높은 산자락에 있는 암자로 옮겼다. '보림[保任]'을 위해서였다. '보림'이란 밥을 지을 때 뜸들이는 것과 같다. 물이 끓었다 하더라도 뜸이 제대로 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깨달음을 얻는것도 같은 이치이다. 구지 스님은 하루 종일 암자에서 수행만 했다. 그러자 많은 신도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같이 몰려왔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무엇이 법입니까?"

Wednesday, May 30, 2012

불입문자 교외별전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 밖에서 가르치는 진리, 마음만을 전한다. 不立文字 敎外別傳

부처님께서는 48년 섧법 후 열반에 드시면서 ' 나는 한마디도 한 바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에서 가르치는 진리, 즉 마음만을 전할 뿐이다. 그러면 바로 자기를 알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기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成成佛]이다

"나는 누구인가?" 선 수행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가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각에도 집착을 하지 말아라.선 수행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래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그것을 참 자아. 본성품, 부처님, 하느님, 하나님, 에너지, 마음, 의식, 신성, 절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래 이것은 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이다. "탕!"

그래서 생각이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개념적인 생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부르거나 어떤 종류의 이름을 붙여주면 단지 생각과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
위대한 중국 선사이신 남천[南泉] 스님은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은 이해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요. 이해가 아닌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깨달음이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세계와 우리자신의 관계는 생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어떤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선불교의 문을 통과하고 싶으면 먼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오직 모를 뿐'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길은 아주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아주 깊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누구인가' .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맑은 대답이 나타나면 이미 그것이 본성품이다. 말에 좌우되지 않는, 경전밖에 있는 특별한 전달, 바로 마음을 가리켜 견성하는 것이 부처되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부처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경전 밖에 있는 특별한 전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전은 단지 설명하기만 한다. 본성을 설명하는 말만 하더라도 1백개를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모두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자기의 본성을 찾는 사람에게 경전이나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단지 비빔밥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아무리봐도 허기는 채워지지않는다. 그러나 참선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여기 비빔밥이있다. 한입떠서 먹어라." 아무리 불경 전문가가 된다 해도 '자기자신'을 모르면 소용이없다.

오래전 중국에는 덕산[德山]이라는 아주 유명한 조사스님이 계셨다. 그는 스무 살에 출가하여 이미 여러 경전을 꿰뚫었으며, 특히 «금강경» 의 전문가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는 또 «금강경»에 대한 많은 해설서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주 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찍이 학승들에게 말하기를 "한 터럭이 바다를 삼켜도 성품의 바다에는 이그러짐이 없고, 겨자씨를 마늘 끝에 던져도 바늘끝의 예리함에는 변함이 없다. 배움과 배움 없음이 어떤 것인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했다.

그는 전국의 산사를 돌아다니며 스님들이 이 중요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알고 있는지 테스트하곤 했다. 아무도 그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덕산 스님은 모든 논쟁에서 이겼다.

어느 날 덕산은 남중국에 있는 어떤 절의 승려들이 먹고자면서 하루종일 면벽수행을 통해 부처가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겁 동안 경전을 배웓도 성불할까 말까 한데 남방의 마구나 무리들이 감히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이야기한다고? 어떻게 경전 한번 읽지않고 부처가 될 수 있나. 내 마땅히 이들의 소굴을 쓸어내버려서 이들을 소멸시키고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노라."

덕산 스님은 마침내 직접 남중국에 가보기로 하고 «금강경» 과 그가 지은 해설설를 짐 속에 챙겨 떠났다.
"내가 이 책으로 무지로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우리라."

스님은 여러 날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을 걷던 중 작은 주막을 발견했다. 마침 점심 때라 시장하기도 해서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잠간 쉬기로 했다. 주인은 마침 불자로 매일 열심히 수행하는 나이 든 할머니 였다. 그 할머니는 덕산을 금방 알아봤다.

"아니, 그유명한 덕산 큰스님 아니세요.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그리고 그 걸망에 짊어진 큰 짐은 무엇이고요?"
덕산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들이 먹고자고 하루종일 벽만 처다보면서 수행하는 절이 남쪽에 있다고 들었읍니다. 그곳 스님들 중에 그런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된 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읍니다. 아시다시피 내가 «금강경» 전문가 이닙니까. (걸망을 가리키며) 내가 이 «금강경» 으로 무지몽매한 그들을 깨워주려 가는 길입니다."

"아이고, 역시 훌륭하신 스님이십니다. 저는 스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읍니다. 부처님 말씀을 다 이해하시고 가르침도 훌륭하시다고 들었읍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되까요?"
"물론이지요."

"만약 대답을 제대로 하시면 제가 점심을 공짜로 드리고, 제대로 못하시면 스님께서 돈을 내셔야 합니다."
덕산 스님은 순간 화가 났다.

"아니 어찌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금강경»전문가요."
그러나 할머니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내처 물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했는데, 스님은 점심을 드시면서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겠읍니까?"

순간, 덕산 스님은 입이 탁 막혀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릿속에서 «금강경» 의 처음부터 끝을 재빨리 흝어 내려가고 있었지만 도무지 답이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하에졌다가 노래졌다가 정신이 없었다. 입은 완전히 굳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할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계시군요. 단지 부처님의 말만을 이해할 뿐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읍니다. 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면서 남쪽 절에 수행하신다는 스님들을 어떻게 가르치실 겁니까?"

덕산 스님은 너무 부끄러웠다.
"아니, 보살님은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읍니까?
"어디서 배운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마음 안에 다 가지고 있읍니다. 보려고만 하면 보입니다."
"내 얘기는 누가 당신을 지도했느냐 이 말입니다."

"저기 높은 산에 용담[龍潭]이라는 큰스님이 계십니다. 큰스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덕산 스님은 남쪽 절에 가는것을 포기하고 그 길로 바로 용담 큰 스님을 찾아나섰다. 이윽고 스님은 법당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용담에 관한 말을 듣고 이제 와보니 연못{潭]은 보이지 않고 용[龍]도 나타나지 않는구나."
마침내 용담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직접 용담에 왔구려" 하셨다.
덕산 스님은 한동안 절에 머물렀다. 어느 날 저녁 용담 스님을 모시고 섰는데 용담스님이 "벌써 밤이 깊었는데 왜 들어가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덕산스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너무 깜깜합니다."

그러자 용담스님은 촛불을 스님에게 건네 주었다. 덕산 스님이 그것을 받는 찰라, 용담스님은 도로 혹 불어 꺼버렸다. 덕산스님은 다시 '완벽한' 어둠속에 빠저버렸다. 순간, 덕산 스님의 마음이 확 열렸다. 마침내 대오각성 한 것이다. 그는 용담 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용담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덕산 스님은 "이제부터 천하 노화상의 혀를 의심하지 않겠읍니다. 지금부터 저는 모든 선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믿겠읍니다."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여러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용담 큰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나이가 있는데, 이빨은 검수[劍樹.칼숲]와 같고 입은 혈분[血盆. 피쟁반]과 같다. 그는 몽둥이로 때려도 돌아보지 않는다 훗날 고봉정상[高峰頂上]에서 내 도[道]를 드날리고 있을 것이다."

이어 덕산 스님이 법상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갖고 온 «금강경» 과 해설서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현묘한 말씀들을 다 공부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 놓는 격이요. 세간의 중요한 것을 다 알았다 해도 큰 골짜기에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 덕산 스님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무가치가 없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마른 지식[dry cognition]은 도움이 되지않는다. 8만 4천 경정을 읽고 열심히 법회에 참석해도 한 순간 맑은 마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죽을 때 머릿 속에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죽는다. 몸 조차 가져가지 못한다. 그때 학문적 지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식이란 결국 누군가로부터 받은 생각이다. 지식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참선수행을 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물론 지식을 잘 소화하면 지혜가 된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에 구지[俱脂]라는 아주 유명한 큰스님이 한 분 계셨다. 구지 큰스님은 당시 중국에서 제일가는 강사스님으로 요새 말로 하면 대학교 총장쯤 되었다. 그는 20대 후반 무렵부터 8만 4천 경전에 통달해 일찍이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절에는 많을 때는 7백명의 승려가 함께살면서 경전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스님들과 학자들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논쟁에서 그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전에서 아무리 모호한 대목이 튀어나와도 뛰어난 해삭을 내리곤 했다.
어느날 그는 경정공부를 하다가 머물고 있던 암자 뒤 작은 뜰에나가 쉬고 있었다. 그때 감자기 키 큰 비구니 한 명이 큰 삿갓을 쓴채 나타났다. 오른손에는 여섯 개 방울이 달린 긴 막대기를 들도 있었다.

육환장[六丸杖]이라고하는 그런 막대긴는 높은 큰스님이나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거기다 더 가관인 일이 일어났다.

구지같은 큰스님을 만날때는 누구나 삼배를 올려야만 한다. 게다가 비구니는 법랍이 많더라도 반드시 비구스님에게 먼저 인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키큰 비구니는 큰스님에게 인사는 커녕 모자도 벗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비구니는 구지 스님에게 다가가더니 세 번 원을 돌았다. 발자국 소리까지 찌렁찌렁 크게 내면서 말이다. 계속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Monday, May 28, 2012

선불교

선불교 • 禪佛敎

숭산 행원 대선사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제의 압제아래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렸다.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불안한 사회를 보며 자신의 정치적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참된진리를 구하기 위해 1947년, 충남 마곡사로 출가하여 행원[行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9년 예산 수덕사에서 당시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던 고봉 대선사로부터 전법계[傳法偈]와 숭산[崇山]이라는 당호[幢號]를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祖師]가 되었다. 당시 고봉스님은 '너의 법[法]이 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 이라고 예견했다.
1966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외포교에 앞장서 1972년 미국에 홍법원을 개설을 시작으로, 32개국에 120여개 선원Zen Center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수많은 외국인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추앙받은 숭산스님은 만년까지 세계를 누비다 2004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到此門來 莫存知解
To pass through this gate,
do not attach to any thinking that arises in the mind
.선 수행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이는 어떤생각도 붙잡지 말아라.

不立文字 敎外別位
Not depending on words, a special transmission outside the sutras.
문자를 세우지않고 그문자 밖에서 가르치는 진리, 마음만을 전한다.

直指人心 見性成佛
Pointing directly to Mind, see your true nature, become Buddha.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佛說一切法 着度一切心
The Buddha taught all the Dharmas in order to save all minds.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을 구하기 위해 법을 가르쳤다.

者無一切心 何用一切法
When you do not keep all these minds, what use is there for the Dharmas?
마음이 없다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선불교

선[禪]은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무엇이다."
뎈카르트는 "나는 생가한다. 그러나 이 '나'란 무엇인가? 이 "나'란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것들은 우리 존재의 처음과 끝을 꿰뚫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 오로분이 니 '나'를 얻으면 여러분은 모든것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란 결국 이 우주 실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존재, 이 책상의 존재, 이 지팡이의 존재, 태양의 존재, 달의 존재, 별의 존재 모든것의 존재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실체를 얻으면 우주를 얻는 것이고 모든것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본질은 절대이다. 절대의 세계에서는 이분법적인 것이 없다. 말이나 언어가 되어 나오는 순간 분별이 나온다. 절대가 아닌 상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에서 조차 더 이상 그것은 절대가 아니다. '실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니다.
한 유명한 선사가 말했다.

"부처님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리에 똥을 넣는 것과 같다."
우리의 본성품은 이미 말과 단어를 넘어선 것이다. 실체를 설명하는 데에는 말이필요 없다. 입을 연다면 말과 단어와 언어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진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말과 단어로는 우리의 보성품을 설명할 수 없다. 보여줄 수도 없다. 그래서 '침묵은 신성[神聖]보다 낫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것 ㅡ 태양, 달, 별, 산, 강, 나무 ㅡ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다면 본성을 깨닫고 우주적 실체를 얻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1백개의 박사학위도 참다운 본성품을 찾아주지는 못한다. 8만 4천 개의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유명한 선사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했다 하더라도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피나게 공부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품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도움을 줄 수 없다. 본성품은 말과 단어 이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이나 배움에서 찾아질 수 없는 것이다. 생각 이전의 지점에 있을 때랴야 가능하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이 말은 마른지식(dry cognition)적인 철학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생각하지 않을 때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문이 참선수행의 시작이다.

선의 가르침은 말이나 단어없이 우리가 이 지점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으리는 이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살펴보았다. 이들 전통보두 우리가 여행하려는 곳의 지도와 차량을 제공하지만 그 방법이 각각다르다.
소승불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혼자 가는 것과 같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목적지에는 도달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 고통의 세계에대해 가르친다.

우리는 고통을 만드러내는 이분법적 세계인 이름과 모양이라는 영역에 산다. 이분법적 세계를 벗어 던지면 열반이라는 절대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고 가는 것, 삶과 죽음, 행복이나 슬픔이 없다. 모든 것은 그대로 정적이며 소멸이다. 모든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신[神]이나 마음 바깥에 있는 어떤 종류의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이 세상에 나타났던 아주 드물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 수행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일체 중생들과 같이 가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먼저 삶의 고통에대해 가르치는 것에 비해 대승불교는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친다. 본래 고통도 없고 열반도 없다. 우리가 고통을 만들면 고통이 생긴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보면 고통조차 본래 헛되고 공허한 것이다.

육체는 공하여 실제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것을 깨달음으로서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과로움도 없으며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니, 괴로움에ㅔ서 빠져나오려 할 필요도 없고, 얻어야 할 열반도 없다. 모든것이 임미 진리이다.

벽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늘이 푸르다. 그것 또한 진리이다. 바로 지금 바깥에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이것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이 이미 순간순간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위해 말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와 다른 존재들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삶은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언제나 다른 중생들과 함께 행동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우리 수행이 모든중생들과 함께 자유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얘기이므로 마치 버스나 가차를 타고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이길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본성이 무엇이냐?" "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열반이냐?"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그것을 깨닫고 있다 하더러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너무 활홀한 꿈을 꾸어 입조차 열 수 없는 벙어리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주깊고 명확한 것을 이해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전이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말과 언어 이상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다. 깨닫고 느낀것을 다른사람애개 보여주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 "탕!" (책상을 치며) 이것은 깨달음과는 또 다른 범주이기 때문이다. "탕!"

원래 선에는 길이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갈 때는 절대적으로 길이 필요하지만 비행기나 로켓을 타고가게 되면 길이 따로 필요없다. 단지 그 앞이 허공과 같이 툭 터져야 걸림이 없이 끌고가게된다. 이를 당정기여허공[當情其如虛空]이라한다.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같이 맑게 하라는 말이다.

항로는 육로와 같은 길이없다. 지도없이 우리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 의존하지 않는다. 심지어 선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싶으면 순간순간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이미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선의 마음이다.

앞에서는 대승불교에 대한 얘기를 했다. 무상, 무아를 깨닫고 실상을 깨달아 바라밀행을 해야된다고 했다. 그러나 선 불교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백 번 좋은일을 하더라도 자기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므로 자기자신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불교가 어떻다느니, 참과 거짓이 어떻다느니, 육도 만행이 어떻다느니, 업과 윤회가 어떻다느니, «아함경», «화엄경», «열반경»,« 법화경», «금강경»이 어떻다느니, 백 번 이야기 해봐야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마음만 어지럽다.

Sunday, May 27, 2012

육바라밀행

육바라밀행 ␊ 六婆羅蜜行 The Six Paramitas

보시 布施 Generosity
지계 持戒 Precepts (Conduct)
인욕 忍 辱 Perseverance(Patience)
정진 精進 Effort(Energy)
선정 禪定 samadhi(Meditation)
지혜 지혜 Wisdom

육바라밀행은 대승불교로 가는 실천적 지침이다. 소승불교의 실천지침이 무상관, 부정과, 무아관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이다. 육바라밀이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잔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가지이다. 이 여섯가지 덕을 잘 실천하면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고통을 없애고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바라밀을 도피안 到彼岸이라 번역했다. 피안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고통의 세상을 언덕이라한다면 극락의 저 세상은 피안이다. 육바라밀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세세생생 열심히 수행해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맹세이다.
모든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보자. 왜 부를 가지려 하는가? 단지 혼자의 기쁨을 위한 것인다. 아니면 다른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가. 이것이 중요하다. 나 혼자 혹은 가족만을 위해 재산을 모으려 할 때는 집착을 부르고 이 집착은 갈등을 낳게 마련이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이 인생이란다.
기독교 속담에는 '수의엔 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다. 죽을 때는 몸뚱이조차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에 집착하는가. 돈을 버는 것은 좋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모은 돈과 재산을 어떻게 다른 중생을 돕는데 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보시'이다.
그렇다고 보시란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대상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가진 모든것을 다른사람을 위해 쓰겠다고 하는 마음이면 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남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 욕심이 없어진다. 눈, 귀, 코, 혀, 몸, 뜻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줄겁게 해줄 수 있으면 그것이 곧 보시이다.
'지계' 란 윤리적 실천운동으로서,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계율'의 의미를 놓고 볼 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소승불교 수행에서는 보통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위해 계율을 따른다. 마음이 순수하면 언젠가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 고통에서 벗어난다. 계율은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자신을 부호해주는 장벽과 같다. 마치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는 경보장치처럼 계율은 우리마음안에 있는 보물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짓을 하지말라'. '착한 일을 하라'.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라'는 교훈적 종교의식을 강조한다.
그러나 대승불교 수행에서는 계율이 오직 나만을 위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냐를 생각한다. 똑같은 계율이어도 지키는 방법이 약간다르다. 대승불교 수행에서의 계율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중생을 위한것, 즉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사용되어야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계율을 깨는것이 계율을 자카는 것보다 오히려 다른사람을 위한 길일 때가 있다. 마음만 맑고 순수하다면 계율을 지키는것도 올바른 수행이며 계율을 깨는것도 올바른 수행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단지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중생을 위해서인가 하는 점이다. 오직 내 '마음의 순수함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때때로 맑은 수행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 갑자기 언덕 위에서 토끼 한 마리가 겁에 질려 뛰어 내려온다. 잠시 후 사냥꾼이 뒤쫓아와 나무꾼에게 묻는다. "토끼가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자,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만약 이 계율에 충실하고자 나무꾼이 토끼가 뛰어간 방향을 사냥꾼에게 가르쳐준다면 사냥꾼은 뒤쫓아가 토끼를 죽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토끼와 사냥꾼사이에 아주 나쁜업이 만들어지게 된다. 비록 나무꾼은 정직한 일을 했을지는 몰라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율을 지킨셈이 된다. 아주 좁은 의미의 계율 수행이다. 그러나 만일 나무꾼이 토끼가 달아난 방향의 반대 방향을 가르쳐준다면 비록 거짓말을 한 것이 될지라도 그는 중생을 위한 아주 넓은 수행을 한 것이다.
계율이란 바로 이처럼 다른 중생을 돕기위해 존재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계율을 깸으로서 토끼를 살릴 수도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냥꾼과 토끼가 나쁜업을 쌓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계율로서 다른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수행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지않으면 부처님의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어떤 '마음'을 만들경우, 계율을 세워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수행이 된다. 하지만 모든생각을 완벽히 끊고 어떤 마음도 갖지 않으면 계율은 필요하지 않게 될 수 있다. 선과 악을 다른사람을 돕는데 자유롭게 사용하면 이미 보살행이다.
셌째 '인욕'은 잘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게 끼친원한을 참고, 해를 끼쳐오는 것을 참고, 고통을 잘 이겨나가 마음에 동요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평등한 일이나 불평등한 일이나 잘 참고 이겨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살이에 어떤 핍박이 오더라도 고통이 없게 된다. 인욕은 성냄을 참는 일이요, 원한을 용서하는 것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고통스럽든, 그렇지 않든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네째 '정진'은 한마음으로 꾸준히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장애를 부수고 겁내는 마음없이 나의 이 노력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굳건한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오직 노력, 노력, 노력뿐이다. 정진은 이생에서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생애동안 수행을하고 깨달음을 얻어 다른사람을 고통에서부터 구해내겠다는 서원이다. 이의 다른 이름이 대자대비의 길이다.
다섯째 '선정'이란 무엇인가. 선정은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와 세계의 깊은 곳을 붙들고 깊이깊이 생각하여 흔들림이 없게 하는 것이다. 선정이란 단지 선방에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노력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런종류의 방향과 결심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마음은 우주와 같이 맑다. 이것은 거울처럼 맑아서, 붉은 것이 거울 앞에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흰 것이 오면 흰 것을 비춘다. 맑은 거울은 결코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멍 멍 ' 짖는다. 설탕은 달다. 여러분은 배가 고프면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 배가 고프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선정이 단순히 앉아 있으면서 방해받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정은 푹신한 방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순간순간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 불교에서는 사무라이 스타일로 수행을 한다. 폭신한 방석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아주 깊은 명상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수행은 우리의 일상과 연결시킬 수 없다. 어떤 특별한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지는 참선 정진은 선정과 일상의 삶을 분리시킬 뿐이다. 전정한 선정은 앉아있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있거나, 차를 타거나, 설거지를 할 때도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선정이다.
임진왜란 때 황해도 구월산 배엽사 라는 절에 한 노스님이 살았다. 젊은 스님들은 모두 피난을 가 텅 빈 절에서 노스님 혼자 법당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일본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불상을 가져가려고 법당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문을 부수고 들어서려는 찰라, 어둠 속에 앉아있는 한 늙은 스님을 발견했다.
"아니, 이 늙은 중이 겁도없이 도망치지도 않고 뭘 하고 앉아 있는냐?"
그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바로 죽이겠다."
하지만 노스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옆에서 소리를 질러대건 말건 노스님은 흡사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왜놈들은 노스님의 몸을 흔들고 코를 쑤셔보고 눈을 만져보았다.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동요가 없자 마침내 머리위에 총을 세우고 공포를 한 방 쏘았다. 그러나 스님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부대장이 스님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아 이 늙은 중아, 죽는 게 두렵지 않느냐?"
그러자 갑자기 스님은 그 부대장의 얼굴에 대고 '할'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앉아 있던 사람,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뒤로 자빠졌다. 법당 밖에서 이모든 상황을 지켜보고있던 일본인 장군은 온갖위협과 모욕에도 일말의 두려움조차 보이지 않는 노스님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노스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도인을 몰라보고 희롱했읍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다음 장군은 부하들을 모두 철수 시키고 절을 떠났다.
그렇다 . 노스님의 흔들리지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항 선정이다. 어떤상황, 어떤 조건하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지혜가 나타난다.
육바라밀의 여섯 번째인 '지혜"는 무지를 치료하는 약이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지혜가 저절로 나타난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은 지혜로 가는 길이다. 많은 불교수행에서는 항상 우리마음을 어떤종류의 오염도 없는 자유로운 상태로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마음을 만들지 않을 때 마음이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마음이 우주와같이 맑으면 순수하다 혹은 순수하지않다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을 경험하는 것과 이를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갓난아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기의 마음은 아주 순수하며, 집착이나 욕심이 없다. 배고풀 때 먹고, 피곤할 때 잔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이다. 어떤 불교 전통에서는 이 점을 강조한다.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부정을 걷어내고 본래 순수함으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자. 본래의 순수함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한다면 지혜는 자랄 수 없다. 갓난 아기의 마음은 아주 순수해서 어떤 집착도 없고 욕심에의해 오염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모두 갓난아기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이 순수한 마음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쓸것인가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한다.
갓난아기의 마음은 비록 순수하지만 만약 엄마가 아프다고 했을때 엄마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오직 나 혼자만 순수하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중생을 돕는 일이라면 좋은 상황이든, 나쁜상황이든 어디에든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란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맑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 행동과 경험을 소화시켜 지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멍멍'하고 짖는다. 설탕은 달다. 당신이 배가 고프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밥을 먹어야 한다. 또 누군가가 배가 고프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밥을 주어야한다. 고통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가온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지식이 아닌 지혜에서 나온다.

Saturday, May 26, 2012

40평생 집밥오마니에게 드리는 나의노래

열린광장 40주년 결혼기념일의 다짐

맨 주먹 외엔 아무것도 가진것없는 나에게 시집와서 온갖 고초다 격으며 살아온 당신, 그 힘든 세월속에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준 당신에게 진정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소. 당신이 아니었으면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을까 상상이 되질않소.

언제나 당신이 내 곁에 있었기에 힘들고 괴로운 시간도 즐겁고 행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오. 그런데도 그 동안 따뜻한 사랑의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내가 참으로 미안하구려.

난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 같소. 당신에게 도움은 커녕 늘 속만 끓여주었으니 왜 그렇게 살았는지 후회 막급이라오. 오죽 답답했으면 당신이 아이들 셋 앞에서 '나는 아이넷을 키운다고' 까지 했겠소

이 새상 누군들 사랑하는 당신에게 비기겠소. 툭하면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싸우는 것이 요즘 부부들일진대 당신처럼 이해심많고 너그럽고 남편에게 잘하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소.

당신은 반드시 나보다 오래 살아야항오. 나 혼자선 음식도 못해먹고 해 놓은 것 조차 찾아먹지 못하니 하는 말이요. 내 다음생에 만나면 평생 받기만 했던 이 신세는 결코잊지 않으리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당신시키는대로 열심히 잘 하리다.

이제 지난 일들을 훌훌 털고 남은 여생 알콩달콩 두 손 붙잡고 같이 걸어봅시다.

여보, 그동안 고생 많았소. 그리고 사랑하오.
5월5일 결혼 40주년 기념일에 당신의 남편이 두손모아 이글을 드립니다.

김증식 • 수요자연산악회장

Friday, May 25, 2012

시니어에 일자리를 드립니다.

"시니어에 일자리 드립니다."
아태노인센터 55세이상 취업지원 '씨셉' 운영

돈 벌면서 커뮤니티 봉사 영어 • 컴퓨터 몰라도 "OK" 한인 참여 권유 홍보나서
"돈도 벌면서 커뮤니티에 기여할 수있는 좋은 기회에 많이 참여하세요."

센터아나에 닜는 '미주아태노인센터' ( National Asian Pacific Center on Aging° NAPCA) OCㅈ지부가 55세 이상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취업을 돕는 연방정부 프로그램 '씨셉' (SCSEP:Senior Community Service Employment Program)의 한인 참여를 홍보하고 나섰다.

국내 아태지역 출신 장년인구의 복지를위해 1979년 설립된 'NAPCA'는 취업을 통해 아시아계 고령자들이 자칫 생활의 활력을 잃거나, 아시아계로서 주류사회의 이종차별 장벽에 부딪혀 능력을 썩히며 여생을 무력하게 사는것을 방지하기위해 이 씨셉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

저소득층을 대상으로하는 이 프로그램에 들록하면 6개월에서 1년까지 직업훈련 과정을 거친 뒤 보조교사, 사무실 직원, 보조 간호사, 보조 영양사, 리셉셔니스트, 경리, 오락 프로그램 보조, 푸드뱅크 직원, 청소원, 병원 직원등 다양한 직종에 취업할 수 있다.

현재 OC지부의 씨셉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플린 최씨는 "참가자들 대부분이 중국계, 베트남계, 캄보디아계 순"이라며 '퇴직해 갈 곳없어 고민하고있는 한인노인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인 참여가 저조한 가장 큰 이유는 영어 및 컴퓨터 사용능력 부족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일자리중에는 컴퓨터나 영어가 필요없는 곳도 많기 때문에 일단 지원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최씨는 권유했다.

그는 "영어나 컴퓨터 지식이 없어도 지역봉사단체등에서 일 할수 있는 기회는 많이있다"며 "파트타임 수임이 확보되면 경제적 자립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매우좋은 기회"라고 덧 붙였다.

'씨셉' 프로그램의 참가자격은 ㅡ>55세 이상 ㅡ> 총수입이 연방정부 빈곤선의 125% 이하 (4인 가족기준 연 수입 약 2만5000달러) 인 저소득자 ㅡ>미 취업자 ㅡ> 1986년 제정된 이미 개혁법에 따라 미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취업이 가능해야한다.

훈련가간동안에는 NAPCA에서 주 20시간씩 최저임금(시간당 8달러)을 지급하며, 그 후에는 직업훈련했던 직장에 고용돼 일할 수 있다. ㅡ> 문의: 714 560---8877 김정균 기자 kyun8106@koreadaily.com

여보소 동네 어르신들 이말씀들어보소

젊은이의 발언대

유학생센터대회협력팀장 • UCLA 한현민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한지 올해로 6년째,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의 대학 생활중 가장의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비영리단체권익신장을 위해 2년째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작은 우연한 기회로 다가왔지만 이곳에서 대외협력팀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무엇보다 한국동포로서 유학생들이 처한 여러문제점들을 몸소느끼고 풀어가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한인커유니티와 관련된 여러문제들도 접할 수 있었는데 가장 고질적이며 원천적이 문제를 꼽으라면 바로 한인커뮤닡티의 유학생에대한 많은 편견과 무시였다. 이번 제31대 LA한인회장선거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아시다시피 이번선거는 박요한후보의 '후보자격 박탈'로 인해 투표가 무산되고 그로인해 배무한 후보가 무투표 당선됐다. 2년전 30대 한인회장 선거때도 아무런 투표없이 한인회장이 당선되었고, 그때 후보자격을 박탈당했던 같은 후보가 새로운 한인회를 결성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한숨부터 나왔다.

이제막 23살에 접어든 젊은이의 눈에도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이번사태는 LA 한인사회를 포함해 전 세계에 모든 한인사회를 욕보이는 일이었다. 또 어른들이 무책임한 행동과 서로 못 믿고 헐뜯고 타투는 동안 우리 한인학생들의 순수한 참여의사 표시인 '투표의 자유' 마저 증발되고 말았다.

각대학 한인학생회에서는 이번 한인회장 선거에 참여하기위해 SNS와 각종모임등을 통해 LA한인회장 선거투표의 중요성을 알리고 공정한 투표참여를 통해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한인사회에 다시 한 번 묻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많은 한인학생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LA한인회는 학생들에게 빚을 졌고 잘못됨을 당연히 사과 해야한다. 우리는 참여하고싶었다. 그러나 60년의 역사가있는 LA한인회에서는 자신등의 자녀들을 위한, 특히 수많은 유학생들을 위한 정책개발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는지 묻고싶다. 또 한인학생회의 대한 선거관련 홍보는 왜 무시되어왔는지도 묻고싶다.

우리젊은 세대들의 한인사회에대한 의견은 이렇게 절저히 무시되어도 좋단 말인가. 한인회장 선거와 관련한 말 중에 "미국 대통령 후보자 규칙보다 더 어렵다"라는 말이 왜 생겨났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한국의 지방선거를 표본으로 합리적인 후보자 홍보방법 제시와 , 너무 많은 공탁금으로 인해 출마후보를 제한하는 현행 선거법은 한시라도 빨리 개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는 후보자들이 나올 수 있고 그래야 투명한 선거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선거 사태와 관련해 한인회 당사자들의 의견이 모두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2년 전에 있었던 치부들을 왜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느냐는 말이다.그결과 한인사회 화합의 장이 될수도 있었을 한인회장선거가 또 한번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 나아가 투표권이 있는 젊은이들의 기본적인며 고결한 권리마저 빼앗아버린 것에 젊은이들은 분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산물이라 일컺는 '투표의 자유'를 앗아 가버린 한인 커뮤니티 리더들은 미래의 한인 커뮤니티를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과연 본보기가 되고 있는지를 '양심선언' 하기 바란다.

자손에게 몽땅주고 후회마세요

자손에게 몽땅주고 후회마세요

전문가의 조언 김진환 변호사

평균수명이 한참 길어진 요즘은 은퇴 후에도 20~30년은 준비를 해야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노인법 전문 변호사 모임에 참석해 보면 소위 베이비 붐 세대의 노후대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것은 정부혜택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본인의 자산을 보전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합법적인 노년 설계를 위한 것들이어서 필자도 관심이 많다.

상속을 위해 똑같이 리빙 트러스트를 만들더라도 상속법 측면만 고려해 세운계획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상속법원을 거치지않고 절세효과룰 누리며 자산을 자손에게 잘 물려주도록 해야 하는데 그치지않고 정부혜택 수혜및 세금에 대한 대비도 병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모씨는 60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부동산 명의를 자녀에게 이전했다. 그것을 은퇴계획의 당연한 절차처럼 생각했고 본인은 메디캘과 SSI를 신청하고 노인 아파트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게 된 것이 축복이라고 여겼다. 공부도 별로안했고 가진것도 없었지만 이민와 건강한 몸으로 쉬지않고 일해 지금의 아담한 집을 마련하게 된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 안쓰고 힘들게 마련한 집을 이민생활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자녀에게 모든 소유권을 순리처럼 양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집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매디캘 혜택과 SSI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았다. 상속 노년계획을 중간 점검함으로 메디캘과 SSI를 수혜하다가 차후에 그 집을 양도함으로서 여러 세금을 피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가진 것 하나없이 초췌한 모습으로 지내는 것을 익숙하게 보다보면 지갑도 부모의 수준에 맞춰 인색하게 연단고 한다.

부모로부터 목돈을 건네받을 때도 덤덤하다. 심지어 어떤 자녀는 본인의 집이 따로있는데 부모가사는 집을 본인 앞으로 명의를 변경해서 세금만 더내게됐다며 감사는 커녕 투덜대는 경우도 있다. 딸의 이혼소송에 따라나왔던 박 노인은 괜히 모든 걸 일찍 나눠줘서 사위 좋은 일만 시켰다고 울분을 토하던 모습이 쓸쓸히 뇌리를 스친다

지난 달에는 부동산을 하던 김모씨가 부동산은 그냥 놔둔다 해도 노년층 의료비나 소셜싴큐리티 기금이 하루아침에 고갈될수 있다는 예측에따라 62세부터 삭감된 소셜시큐리티 연금을 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꽤 많이 삭감된 액수가 배우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므로 그 아내까지 타격을 받게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자초했다싶어 매우 안타깡웠다.

노인법을 잘만 활용하면 자녀의 영향없이, 본인의 사고능력이 온전할 때 제2의 삶을 철저히 계획함으로 본인의 자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정부혜택 또한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오후 설계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간 못갔던 고국도 열심히 오가며 손자들에게 후한 선물도하고, 가끔씩, 자녀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것이 아예 재산을 몽땅 건네주고 자녀에게 용돈을 타서 써야하는 노인들 보다 얼마나 더 큰 삶의 기쁨을 누리는지 모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했던 이미생활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기나긴 노년기를 정부혜택에만 의존하는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문가의 조언 김잔환 변호사

Thursday, May 24, 2012

KARMA 업

카르마 · 業 Karma
보살업 菩薩業 Bodhisattva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Complete Cpmpassion
선업 先業 Good karma ㅡ> 행복 福 Happiness
악업 惡業 Bad karma ㅡ> 고통 苦 Suffering
적업 積業 Accumulated karma ㅡ>소질 素質 Predispositions
동업 同業 Same karma ㅡ> 동행 同行
만상 萬相 종연생 從緣生 종연멸 從緣滅 모든것은 업을 통해 나타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Everything appears through karma, and disppears through karma.
心生卽法生 法生卽相生 相生卽苦生
마음이 나오면 법이나오고, 법이나오면 모양이 나오고, 모양이 나오면 고통이 나온다.
Mind appears then Dharma appears, Dharma appears then form appears,
form appears then suffering appears.
心滅卽法滅 法滅卽相滅 相滅卽苦滅
마음이 사라지면 법이 사라지고, 법이 사라지면 모양이 사라지고, 모양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진다.
Mind disappears then Dharma disappears, Dharma disappears then form disappears,
form disappears then suffering disappears.
一切唯心造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All things are created by the mind alone.
원인 原因 Primary Cause ㅡ>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ㅡ> 결과 結果 Result

우리가 지금하는 모든말과 행동은 현생과 다음 생, 다음 생에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업이라고 햇다. 우리는 요즘 세계도처에서, 특히 아프리카나 인디아같은 곳에서 기아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한쪽 나라에서는 음식이 넘쳐나느데 그들은 먹을것이 없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간다. 전쟁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도무지 나쁜 업을 지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어린이들까지 에이증에 걸리고 살해당하고 극심한 기아와 가난에 사달린다. 왜 이런일이 일어날까. 그러나 인과관계는 언제나 명확하다.
우리가 하는, 우리가 겪는 모든일들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전생에 지은 습관의 에너지에서 온다. 우리가 품었던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이것이 업을 만들어 어떤 결과로 열매를 맺는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어떤 마음 생태를 갖는가 이다. 아마 우리는 이생에서 많은 복과 돈을 가질지도 모른다. 좋은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상황에만 오직 복을 비는 것에만 집착하면 그것은 좋지 못한 상황, 불행의 씨앗이된다. 왜냐하면 모든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線은 점에서 시작한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다음 순간, 다음 未來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生을 만든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상태이다.
마음의 중심인 단전이 강하지 않으면 바깥조건과 상황은 언제나 우리를 쥐고 흔들어 댈 것이다. ㅇ이것이 바로 업이 우리를 재배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 우리 영혼은 육신이라는 그릇을 떠나 어딘가로 향한다. 악마가 이끄는 지옥으로 갈 지도 모른다. 돈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힌 나쁜 짓을 했다면 아귀가 되어 방황할 지도 모른다. 동물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다시 인간이되어 불법을 만나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중생을 위한 생을 살았다면 천국의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이 세상의 법은 아주 맑다. 순간순간 지금행동이 중생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만을 위한 것이냐. 우리의 망음이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는가, 아니면 평화로 가득차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좋고 나쁜것을 만들지 말아라.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를 얻어 아무곳이나 오갈 수 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한 삶을 산다면 천국과 지옥도 마음대로 아무 걸림없이 오갈 수 있다.
아무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은 없다. 우리 인생은 이미 이전 생에서 만들어진 습관의 힘에의해 상당량 결정된다. 우리의 이 업을 다른 중생을 돕는 데 쓸 것이냐. 아니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쓸 것이냐, 이것이중요하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보살업 菩薩業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선업 善業 ㅡ> 행복 幸福
악업 惡業 ㅡ> 고통 苦痛
적업 積業 ㅡ > 소질 素質
동업 同業 ㅡ> 동행 同行
원인 原因, ㅡ> 연기 緣起, ㅡ> 결과 結果

부처님은 업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마음이 사라지면 업 또한 사라진다. 업은 생각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우리는 업을 만들지 않는 공허한 미음을 갖는다. 제 8식이 공할 때 긍정의 업과 부정의 업이 모두 사라진다. 공한 마음은 업이없는 마음이다. 우리가 얼마나 중생을 도우며 살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음 생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 본성을 찾으면 우리삶의 방향도 찾아진다.
우리는 이미 긍정적인 업과 부정적인 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분이 매일 중생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업을 만들어 행복을 이룬다. 나쁜일을 하면 악업이 되어 고통을 낳는다.
예날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아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한 가지씩 착한일을 해라."
말하고 듣는것은 쉽지만 행하는 것은 어렵다. 시미어 하루 24시간ㅁ만 돌이켜보아도 남에게 착한일한 기억을 더듬는다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인과관계는 넌제나 명확하다. '나는 무엇인가.' 우리 본성을 찾고자 갈구하는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중생을 도와라.
'업' 에대해 좀더 설명해보자. 업, 즉 카르마란 마음의 습習(익힐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아이들은 별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렸을때부터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잘 친다. 혹은 어떤 운동을 잘하거나 그림을 잘그리는 아이들도 있다. 모차르ㅡ트의 이약기를 잘 알 것이다. 그는 부모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교향곡을 쓰고 연주했다. 그런 행동은 그가 전생에 만들었던 강한 습관에서 나온다.
예날에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 관습에 따르면 장례를 마치고 스님의 몸은 돌아가신 지 일주일 안에 와장을 해야한다. 스님의 몸은 훌륭한 수의에 덮여서 관에 넣어졌다. 5일째 되던 날, 승려와 신도들은 관 주위에 모여 긴 염불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안에서 고함소리가 나는 게 아니가.
"문을 열어라. 나 좀 나가게 해다오, 나좀나가게 해다오."
사람들이 뒤로 나자빠졌고, 여자들은 무서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마침내 관을 열어보았더니, 아니 그 스님이 일어나 앉는것이 아닌가.
"아니, 스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이 놀라 묻자 스님이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 물었다.
"왜 나를 관 속에 넣었느냐?"
"스님은 나흘전에 돌아가셔서 지금 장례식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니야,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
"꿈이요, 무슨 꿈이요?"
"아주 재미있는 곳에 갔었지."
스님은 하숨 돌리더니 꿈 이야기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그는 큰 나무아래 있었다. 나무 옆 높은 언덕엔 큰 집이 있었고, 문 앞에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마당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무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마치 빨려들듯 집 안으로 들어깄다. 마치 날아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큰 사자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왜 여기 왔느냐. 돌아가라."
사자는 그 스님을 들어올려서 땅에 내리쳤다. 그는 '쿵' 하고 떨어지면서 잠을 깬 것이었다. 깨어나 보니 좁은 관안에 갇혀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부딛친 곳은 다름아닌 관 뚜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관 문짝을 두둘겨댄 것이다. 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정말 꿈이였나요?"
바로그때 큰스님이 들어왔다. 큰 스님은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밖에 나가 마당에 있는 나무를 보아라."
사람들이 밖에나가 나무를 보니 죽었던 스님 꿈에 본 그 나무가 아닌가. 죽었다가 돌아온 스님은 "바로 저 나무입니다. 나무 위에 새집까지 똑같아요."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큰스님은 그 스님에게 나무위로 올라가 새집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새집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스님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갓 태어난 새가 몸을 웅크린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큰스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사람들도 모두 의아해했다. 그러자 큰스님이 살아 돌아온 스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죽었다. 그런데 너는 사는동안 나쁜 업이 많아 새로 환생했다. 네가 들었다는 음악과 노랫소리는 네가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스님들과 신도들이 염불을 하는 소리였다. 그들의마음이 아주 간절해서 너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들의 강한 에너지가 너의 의식을 끌어 잡아당긴 것이다. 그래서 너는 다행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저 새집속에 있는 갓 태어난 죽은 새는 바로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 너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큰스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다.
"이제 너는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지고 똑바로 수행 하거라. 그러면 너는 본성을 찾아 중생을 돕게 될 것이다. 살아돌아온 스님은 깊이 절을올렸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적어도 5백번 이상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한 부모아래 형, 동생으로 태아난 인연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지 한번 상상 해 보라. 사랑에 빠진 남녀, 결혼한 부부, 절친한 친구, 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전생의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다. 이 모든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전생에서 서로 함께한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법문을 듣기 위해 절에가면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다들 처음보는 얼굴이다. 그러나 법문을 듣는 똑같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중국 사람들은 전생에 대부분 중국인이였을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 또한 다른 업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개라도 어떤 개는 아주 영리하고 어떤 개는 아주 포악하다. 절에 가보면 법당 안팎을 서성이는 개나 고양이가 있다. 어떤 것들은 아예 법당 안에 들어가고싶어 안달을 한다. 내쫓기를 여러번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절이란 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못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배를 곯기가 십상이고 맛있는 고기 반찬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절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들은 전생에 佛緣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생에 인간이었고, 또 불연이 있었건만 나쁜 업 때문에 동물로 환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습관은 계속 이어져 부처님의 가르침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애완 고양이에 집착해있는 제자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가족들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엄마가 병원에서 숨이 넘어간다는 연락을 받고도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병문안 조차 가지않았다. 인간과 동물사이의, 특히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의 업과 관련해서는 두기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전생에서도 주인과 애완동물로 만났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생에 둘 다 인간이었으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서 동물로 태어나 한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경우이다. 그러니 조심하라.(하하하)

모든것은 업을 통해 태어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업에서 나오고 업은 생각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업이 몸을 만들고 몸이 업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모양, 개의모양, 고양이 모양, 그리고 천국의 상태, 지옥의 상태 이 모든 것이 업에서 부터 나온다. 전생에 만들어진 업은 이생에 우리가 받을 몸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업'이 몸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몸에 집착한다. 몸이요구하는 업을 되풀이하고 심지어 그것을 더 깊고 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몸이 업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순환은 돌고돌아 우리 삶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한다. 이름하여 윤회, 생로병사의 끝없는 순환이다.
만물이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마음을 가지면 업을 가지게되고 업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고통을 ㅁ만든다. 그러나 마음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으로 돌아올 때 더 이상 이름도, 모양도 없다. 업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것이다.
엄은 아주 단순하다. 마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이 다음순간, 다음순간, 또 다음순간을 만든다. 이 모든것이 우리의 다음생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구슬이 하나씩 모여 목걸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주의 자연법칙이다. 비가오면 꽃이피고 비가오지않으면 꽃이피지않는다. 태양이 나오면 따뜻해지고 구름이 가리면 추워진다. 인생도 비슷하다. 업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강한 수행이필요하다. 그래야만 중생을 돕는 데 우리 업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업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어도 완벽히 잠든 상태에서 다른사람ㅇ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생각과 욕심을 끊는다면 여러분은 지혜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에 집착하여 안간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쥐려고해도 우리의 일상이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정말 잠들어 꾸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눈을 떠라.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라. 그럴 때에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업을 통제해 중생을 돕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5백 년 전 공부도 많이하고 돈도 많은 유명한 학승이 한 분 게셨다. 그 당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스님들은 재산을 무려받아 제자들이 講院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래서 돈이많은 스님에게는 제자가 많았으나, 가난한 스님에게는 제자가 거의 없었다. 돈이많은 이 학승에게는 1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마지막 제자기 '돌음' 아었다. 돌음은 스님께 학비를 받아 3년동안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경전은 아무 필요가 없어. 경전이란 우리의 마음을 구하기 위한 것일 분이니 이미 내 마음이 비어 있다면 경전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선도량으로 들어가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오로지 경전만을 읽는것은 옳은 공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선방으로 들어가야겠읍니다. 스님은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그때 스님은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스님은 잠자코 돌음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말이 맞다. 그럼 우리 함께 가자꾸나. 그런데 내 땅과 곡식창고, 그리고 재산은 누가 지켜줄까?"
"스님에게는 유능한 제자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모든것을 맡기고 떠나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럼 결정되였다. 내일 바로 떠나자꾸나."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난 부자가 되고 싶어. 유명한 스승이 되고 싶어' 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돌음이라는 제자만 공부를 제대로 했던 셈이다. 스승은 돌음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아 ! 내가 백 번째 제자까지만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더니 부처님께서 이토록 영특한 제자를 보내주셨구나.'
스승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돌음과 함께 길을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그 스님은 자신의 논과 커다란 곡식창고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고는 제자들에게 각각 할 일을 정해 주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두살마은 짐을 꾸려 작별인사를 한 뒤 함께 공부하기로 한 절로 향했다. 산으로 올라가던 그들이 잠시 멈춰섰을 때였다. 계곡사이에 있는 절을 내려다보던 돌음이 놀라 외쳤다.
"스님, 절에 불이 났어요!"
"무라고? 이런! 내 창고에 불이 났구나. 안 되겠다. 너 혼자서 가거라. 나는 절로 돌아가야겠다.!"
"안됩니다. 스님 저까짓 절과 곡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 과연 어디로 가는지 , 이물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돌음의 만류에도 스승은 돌아가고 말았다. 돌음은 재산에 집칙하는 스승의 마음을 ㅂ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떠났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돌음은 스승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뒤 그 스님의 49제가 다가왔다. 수많은 조문객과 제자들이 모여들어 먹고마사며 스승의 재산을 나누어갖기위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돌음도 49제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맏사형을 만났다. 맏사형은 3년 만에 돌아온 돌음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 입적하실 땐 꼼짝도 않더니 이제야 왔어? 그러고도 재산을 나누어 갖겠다구?"
"아닙니다. 제게는 땅이나 돈은 필요 없어요. 주실 수 있다면 죽 두 그릇만 주세요, 부탁입니다."
"고작 그게 다냐?"
"예"
"좋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에는 제사같은 의식을 치르는 곳에서 마을의 혼령들에게 음식물을 바쳐 악령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돌음은 죽 두그릇을 받아들고 큰 맷돌이 있는 넓은 법당으로 들어가 가장안쪽의 가둥을 세 번 쳤다. 그러자 큰 뱀이 나타나 그 맷돌 쪽으로 기어가더니 돌음이 가져다 둔 죽을 모두 마셨다.
돌음이 뱀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뱀의 몸을 빌리셨읍니까?"
"미안하다. 진작 네 말을 듣지않아 뱀의 몸을 빌리게 되었구나."
그 뱀은 다름아닌 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 스승은 왜 뱀으로 태아났을까? 그토록 성대한 49제를 치렀는데도 고작 뱀으로 태아난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의 마음이 바로 뱁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부와 명성만을 좇아 의식과 영혼이 경쟁적이고 욕심으로 가득하게되어 다음생에서 뱀의 몸을 받은 것이었다. 뱁은 눈물을 흘렸다. 돌음은 이렇게 말했다.
' "스님께서는 욕심이 많았읍니다. 그런데 뱀으로 환생하여 그 죽을 다 드셨는데도 족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맷돌에 머리를 찧으셔서 그 몸을 버리십시요!"
"이 몸이 어때서 그러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뱀이된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 그리못하시겠읍니까?"
돌음은 눈물을 머금고 막대기를 세번 내리쳐 뱀을 죽였다. 그러자 뱁의 시체에서 시퍼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허공으로 몰라갔다. 돌음은 그 연기를 따라갔다. 연기는 새의 형상을 빌리기 위해 근처를 날던 새를 쫓아갔다.
"안돼요!"
돌음이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을까. 그연기는 다시 황소의 몸속에 깃들이려고 하였다.
"안돼요!"
돌음이 다시소리쳤다. 그러자 연기는 더 멀리 날아 깊은 산속 한 중년부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가량 지난 뒤 돌음은 그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이신지요?"
"당신 부부가 곧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려드리려 왔읍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가없어 항상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 스님께서 잘못아신 것일 겁니다. 내 아내는 지금 마흔 다섯입니다. 아기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요."
"어쨋든 만약 아기를 가지면 당신 부부는 나에게 그 아기를 주어야만 합니다."
"아기를 갖기만 한다면야 드리지요."
` "좋아요. 1년 후에 다시 오겠읍니다."
그로부터 얼마후 정말 늙은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 붑부는 스님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이어 아주 예쁜 아기가 태아났다. 그들은 너무 행복했다. 1년후 돌음 스님이 다시 나타났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약속한 대로 아기를 나에게 주십시요."
그러나 그 부부는 완강히 거절했다. 돌음 스님이 꾸짖으며 말했다.
"1년 전 저와의 약속을 잊으셨읍니까?"
"하지만 우리 아기예요. 20년동안 기도를 드려 겨우 얻은 자식입니다."
"이 아기를 제게 돌려주지 않으면 아기는 앞으로 3년을 채 살지 못합니다."
돌음은 이렇게말한 뒤 돌아갔다. 아기는 3년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부부는 스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햇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 부부는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때 돌음이 다시나타났다. 부부는 사정을 했다.
"아이가 곧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아이를 나한테 달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저한테 주시면 제가 돌보겠읍니다."
할수없이 부부는 아이를 돌음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아이가 스님의 손으로 넘어가자마자 끓던 열이 내리고 금방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도 금세화기가 돌았다. 부부는 이 아기가 돌음 스님과 아주 강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하느 마음으로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잘 자랐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돌음이 참선을 하는데, 소년이 부엌으로가서 칼을들고 오더니 돌음을 내리치려는게 아닌가. 순간 돌음이 뒤돌아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팔목을 잡았다.
"칼을 내려놓고 이리오너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한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싫어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왜?"
그소년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러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돌음은 그를 창문으로 데리고 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앉아 이 구멍에 큰 소가 올 때깢지 처다보아라. 오직 이것 뿐이다. 어떤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이 구멍만 보아라."
소년은 하루종일 먹고자는 시간만 빼고 창호지 구엉을 쳐다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지나고 1백일이 지나자 어느 날 구멍이 아주 커졌다. 그러자 정말 큰 소가 나타났다.
"음매."
아이가 "와 아아아" 소리를 지르던니 돌음을 불렀다.
"스승님 소가가요."
돌음이 뛰어오더니 갑자기 소년의 빰을 때렸다.
"지금 어디 소가 있다는 말이냐?"
순간 소년은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이해해 깨달음을 얻었다. 소년은 정신을 차려 돌음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전에 나의 제자가 아니었읍니까?"
소년의 말이 끝나자 돌음이 소년앞에 삼배를 올렸다.
전생에 소년은 바로 뱀으로 환생했던 돌음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이 많아 지혜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런 부족한 스승을 돌음은 사랑으로 잘 보살폈던 것이다. 돌음은 업을 잘 볼수 있어서 스승이 뱀에이어 노부부의 아이로 다시 몸을 받아 태아난 것을 알고 푸른연기를 따라갔던 것이다. 돌음과 스승은 서로 아주 좋은 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생에서도 그들은 스승과 제자가 된것이다.
똑같은 업을 갖는다는것은 중요하다. 강하고 맑은 방향을 갖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돌음이 선방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스승과 그의 업을 이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선방에서 수행을 통해 그 자신을 이해하게 됐고 스승의 마음까지 아주 잘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선 진정한 우리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업을 먼저 이해하고 우리가 가진 업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해야 한다. 오직 이 길만이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Monday, May 21, 2012

태아남의 네가지 유형

태어남의 네가지 유형
태생 胎生 . 난생 卵生 . 습생 濕生 . 화생 化生
만물은 각자 만들어내는 업에 따라 태어나고 살아간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선 태어나는 방식이 다르다. 인간과 소와 돼지들은 포유동물이라는 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미의 자궁을 통해 태어난다. 조류, 파충류, 어류는 알을 통해 태어난다.. 정신은 마치 나의 촛불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변형을 통해 나타난다.
중생은 생과 사를 만들어서 모태, 알, 습기, 변화라는 네 개의 문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다. 이것을 태생 胎生, 난생 卵生, 습생 濕生, 화생 化生이라한다. 부처님은 태어남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고 했다. 어떻게 실수를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쓸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당신이 좋아하는 문은 어느 문이냐? (하하하) 우리 의식의 저장고는 일종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몸이 죽으면 에너지는 모태, 알, 습기, 변화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 의식의 저장고에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 업이냐,음악 업이냐, 싸움 업이냐,섹스 업이냐, 아니면 보살 업이냐, 이 업들은 다음 생의 씨와 같다. 인과관계는 언제나 매우 밝다. 초록색씨는 초록 콩을 만든다. 노란색 콩씨는 노란 콩을 만든다.
육도윤회 六道輪廻,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모든 중생은 끊임없이 생과 죽음의 사슬을 돈다. 이것이 바로 윤회(고통의 수례바퀴)이다. 본성을 깨닫지 못하면 이 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천상과 지옥은 우리가 죽은 뒤에 얻을 어떤 세계가 아니다. 부처님은 모든것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가르쳤다.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지금 이 순간 내마음이 어디에 머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업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죽을 때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가지 세계에서 다시 태너난다. 이 여섯가지길은 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업은 전적으로 생각에 의해 만들어 진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오직모를 뿐'을 가져서 어떤것도 만들지 않으면 윤회의 여섯가지 길은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의 수례바퀴에서 자유로워진다.
앞에서 얘기한 여섯가지 길 중'천상'은 성경에서 얘기하는 '천국'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라 더없는 행복의 업을 만든 사람에 의해 창조된 마음의 영역 혹은 상태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있다. 천국이라는 축복의 열매를 단지 즐기기만 한다면 좋은 업은 사라진다. 마치 은행의 예금잔고가 소멸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현실이 천상의 상태라고 해서 단지 그것을 즐기기만 한다면 다음 生에 지금보다 더 낮은 영역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휴양지와도 같은 아주좋은 상황이여서 사실 수행하기가 더 힘들며, 오히려 수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한다. 아무리 좋은 업을 갖는다 하더라도 이 업은 결국 변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곳이 천상이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지옥조차도 천상계가 될 수 있다.
모든인간은 좋은곳에 가고싶어한다. 그러나 업이 변하면 우리는 떠나야한다. 만약 천국에 집착하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름을 돕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천상조차도 그러면 우리는 자유롭다.
부처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 아주 소중한 길이라고 했다. 오직 인간만이 법문을 듣고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들 세계 사이에서 삶과 죽음,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억겹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이 소중한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동물은 '도'를 도저히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보다 낮은 세계이다. 수행할 수도 없고 깨달음 을 얻을 수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 단지 잡혀먹히기 때문에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동물이 되면 끊암없이 먹을 걱정, 잠자리걱정, 또 맹수의 위협에 사달려야 하므로 수행할 시간이 없다. 동물은 그저 동물의 업만을 좇아야 한다.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동물은 그들의 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아수라의 영역은 오로지 투쟁의 영역이다. 분노, 질투를 가지고 있으면 아수라가 된다. 영혼이 싸우는 것이다.
아귀의 세계는 오직 강한 욕망만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아구 영역에 사는 존재들을 '큰 입을 가졌지만 목구멍은 작은 것들'이라고 표현한다. 상상 해보라, 무척배가고픈데도 한 알의 쌀, 작은 빵부스러기조차 넘길수 없는 상황을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결코 만족을 모르는 영역이다. 때로 욕심이 많은 사람을 아귀의 마음을 가졌다고 부른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원한다. 하지만 어떤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요즘 이런 마음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조심해야 한다.
가장낮은 영역은 지옥의 영역이다. 이것은 완벽한 고통의 영역이다. 극도의 고통의 상황이 억겁의 시간동안 계속된다.
거듭말하지만 모든 세계중에서도 인간 세상이 가장 중요하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천상의 세계가 좋으리라 생각되겠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느 마음이 일어나자 않는다. 따라서 수행도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더 낮은 세계로 환생할 것이므로 결코 좋은 것이 아나디. 축생, 아귀, 지옥으로 환생하면 법문도 들을 수 없고 수행도 할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근본원인과 조건을 변화시킬 기회를 갖는다. 변화시킬 수 없는 다른세계의 삶에서는 할상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섯가지 길로의 윤회는 꼭 죽어야 경험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더없는 기쁨의 경지에 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극도의 분노, 갈한 욕심 혹은 나쁜 감정에 사로 잡힐 수도 있다. 이는 가만히 앉아 참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은 온갖생각들이 가득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아...... 밖에 나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싶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1초가 한 시간 혹은 하루같다. 곧이여 머릿속에는 미운 사람이 떠오를 지도 모르고 마음속에서 그와 싸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각이 가고오고, 가고 오고, 쉼이 없다. 행복, 분노, 질투, 욕심, 권태, 두려움이 다가온다.
우리가 생각에 집착하면 언제나 이들 영역에서 오고 간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아귀 혹은 아수라 세계에서 오고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욕심과 증오라는 동물의 마음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죽을 때 비록 육체의 몸이 떨어져 나갈지라도 이런 마음은 계속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동물의 영역이나 지옥의 세계에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육도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면 100퍼센트 '오직 모를 뿐'을 지녀야 한다.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그러면 육도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집착을 통해 육도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

현생. 내생 . 내내생에 맞는 업 (順現業 . 順生業 . 順後業)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산스크리트로 '카르마 karma'라고 하는데,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업은 어떤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얻으면 그 무언가가 우리를 가린다.
업의 결과는 이생에서 그리고 다음 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마 당신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신을 싫어할 것이다. 아미 그들의 친구들 역시 당신이 그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핮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격을 것이다. 당신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생각, 말, 행동을 통해 뿌려진 어떤 업의 씨앗이 열매로 익어가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잘못했는지 기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삶이 무엇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 만난사람인데도 아주 친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났는데도 늘 스쳐지나가듯 어색한 사람도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보면 원인이 있다. 길 가다가 다른 차와 부딪혀서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는데,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런것들은 모두가 그냥 우연히 생기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당신과 그 사람사이에 있었던 어떤 전생의 업의 결과이다. 물론 이생에 뿌려진것일 수도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 갑,을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갑이라는 사람은 현생에서 열개의 좋은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스님들에게도 좋은일을 많이했다. 이 같은 행동은 아주좋은 업을 만든다. 아마 그는 이생에서 혹은 다음생에서 그런 열개의 좋은 행동들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현생에서 다섯 개의 보상만을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또 한편으로 현생에서 다섯개의 나쁜행동을 했다하자. 그리고 세 개의 불행을 겪는다고 하자. 나쁜 병에 걸리거나 아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것 말이다.
열 개의 좋은 행동을 행하여 받을 열 개의 복이 다섯 개의 나쁜행동으로 이제 다섯개의 복으로 줄었다. 그런데 세 개의 불행은 이미 겪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럼면 그가 죽을 때 이 두 개의 복이 그의 삶을 좀더 환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아까 말한 윤회의 여섯가지 형태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0에서 +10까지라고 가정할 때 그는 현생에서 +2이므로 비록 그가 인간으로 환생한다 해도 그리좋은 조건은 아닐 것이다. 가난하게 '업'이라는 것 , 삶에서 행한 인과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업을 만드는 한 계속된다.
이제 을이라는 사람을 보자. 을은 현생에서 아주 착한일을 많이해서 살아있는동안 열다섯 개나 복을 지었다. 그러나 전생에 이미 삼십개의 나쁜 업을 지었던 터라 그가 현생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도 그의 나쁜 '카르마'는 언제나 강력하게 그를 끌어당겨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낸다든지 사람들과 자주 자툰다든지 한다. 우리는 주뱐에서 이런유형의 사람들을 쉽게 발견한다. 성격도 나쁘고 별로 착한일도 하지않는 사람들이 아무걱정없이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씨 곱고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겪는 경우도 본다. 그것은 모두 이전생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별로 착하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덷도 항상 좋은직업, 좋은 집에 많은 돈을 번다. 그는 한동안 늘 좋은 상황에만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전생에 지었던 좋은 업이 무르익어 현생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가 현생에서 짓는 나쁜 업은 아직 무르익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쉽게 설명해보자.
가령 어떤사람이 좋은 일을 몇가지 하였는데 지금 생애 다섯가지를 받고 다섯가지가 남아있다고 가정하자. 또 나쁜 일을 다섯가지 한 가운데 세 가지를 받고 두 가지가 남아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겐 다음과같은 업보의 계산이 나온다.
(+10)-(+5)=(+5)
(-5)-(-3)=(-2)
(+5)-(-2)=(+3)
또 착한 일을 15개 한 사람이 5개만 받았다면 10개가 남는다. 그런데 악한일을 30개 하여 5개만 받았다면 25개가 남는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업보계산은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15)-(-5)=(+10)
(-30)-(_5)=(-25)
(_25)-(+10)=(-15)
앞서 이야기 했지만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어귀, 지옥 등 육도 중에서 천상은 성행이 20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고, 아수라는 선행이 10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며, 인간은 선악의 중간, 즉 0 지대이고, 축생은 악의 10, 아귀는 악의 20, 지옥은 악의 30 이하 되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앞사람은 겨우 사람으로 태어나되 하류층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축생으로 나되 하류층의 축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 분명하여 눈썹하나 속일 수 없는 것이 인과이다.
인간이나 소, 돼지 같은 것은 태어날 때 그의 습관을 따라 태를 빌려나고[胎生], 새나 뱀 같은것은 알로 태어나며[卵生], 박테리아 같은 것은 습으로 나고[濕生], 도깨비 같은 것은 변화하여 난다[化生].
그로므로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무엇보다도 업이 중요하다. 대자대비의 보살업을 지으면 보살로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복옵을 받고, 악업을 지으면 고통을 받되 계속 같은 업을 반복하여 쌓으면 하나의 素質이 형성되어 습관을 이룬다. 나면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다 전생의 소질에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소질이 바탕이되어 연습을 거듭하면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고 천재가 되는 것이다. 적업[積業]으로 소질을 쌓아가면서도 같은 업을 지은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면 동업[同業]이 되어가고 오는 길을 같이하게 되므로 같은 가족, 형제, 보모, 일가친척, 고향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외국에 와서도 금방 사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깝게 있으면서도 잘 사귀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씨앗의 연을 따라 일어나면 결과는 그 가풍을 따라 저절로 수확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상[萬相]은 인연따라 나서 인연따라 멸한다. 마음이나면 곧 법이생기고 법이나면 곧 모양이 생기며, 모양이 생기면 고생을 자초한다. 미음이 멸하면 법이 멸하고 법이 멸하면 모양 또한 멸한다. 모양이 멸하면 고통 또한 멸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든것은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본래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며, 단지 아해를 좁기위한, 가르치기 위한수단일 뿐이다. 업이란 오로지 생각과 욕심에서 비롯된다. 생각하면 업을 만들고 업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으면 어떤 업도 생겨나지 않는다. 한 위대한 선사가 말했다.
"업은 마음에서 나온다. 만약 마음이 사라지면 업도 사라진다. 불이 마른 나뭇가지를 태우듯 말이디."
이 윤회의 사슬을 끊기위한 길은 바로 이 순간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한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상 착한일만하면 다음생에 우리의 업을 변화시킬 수 있읍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좋은 행동과 업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다른 얘기이다. 결론은 좋은 행동은 우리 업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착한 행동은 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 복 역시 업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것을 좋은 업이라 부른다. 하지만 좋은 업도 업은 업이다. 업은 여전히 생각에의해 만들어진다.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그래서 좋은업은 결국 기한이 다 돼서 나쁜 업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업을 바꾸지를 원한다면 좋거나 나쁜것을 만들지 말라.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우리 업을 어떻게하면 다른 중생을 위하는 것으로 쓸 것인가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업을 '바꾸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큰 실수 이다. 우리는 업의 올바른 실천과 기능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이 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에 집착하지 말라. 업을 바꾸고 업을 벗어버리는 것 역시 똑같다. 단지 말이 다를 뿐이다.
수행을 바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제8식, 즉 의식의 저장고에 대해 얘기했다. 의식의 창고 뒤에는 제9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 본질, 순순한 본성이다. 이 본성을 얻으면 우리는 우리의 업을 바꿀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강한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업은 생각' 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완벽하게 공허하다.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밝고 참된 본성을 찾게 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좋고 나쁨을 만들지 않으면 곧 맑아질 것이다. 우리의 본래 면목이 무엇이냐. 본래 실체가 무엇이냐? 부처님도, 하나님도 대신 대답해줄 수 없다. 오직 참선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Sunday, May 13,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과 윤회

업과 윤희 · 唯識論 과 六途輪廻 因果說
The View od Mind -Only and Karma
육근六根SIX ROOTS . 눈眼EYES, 귀耳EARS, 코鼻NOSE, 혀舌TONGUE, 몸身BODY, 마음意MIND
육식六識Six Consciousnesses . 안식 眼識eye-, 이식 耳識ear- 비식鼻識nose-, 설식舌識tongue-, 신식 身識body-, 의식 意識mind-,
육진六塵Six Dusts . 모양 色color, 소리聲sound, 냄새香smell, 맛 味taste, 감각 觸touch, 마음法mind.
18계 十八界 Eighteen Realms ( 육근 . 육식 . 육진)
현보 現報 Results received in this life 현생에 받는 업
순보 順報 Results received inthensxtt 내생에 받는 업
순후보 順後報 Results received in the life after next 내내생에 받는 업

Thinking mind 未那識 我癡, 我見, 我慢, 我愛, 등의 妄識 Discriminating consciousness 분별심
---->Alaya 阿賴耶識, 藏識 Storehouse Consciousness 의식의 저장고---->>
四生 Four Births 태어남의 네가지 유형
胎 Womb 태생, 卵 Egg skstod, 濕 Moisture 습생, 化 Transformation 화생.
六途 Six Ways of Samsara 육도윤회
--->天堂Heaven 천당(+20)
--->阿修羅 Asura아수라(+10)
--->人道 Huaman Route인간 (0)
--->畜生Animals 축생(-10)
--->餓鬼Demons Hungry ghosts(-20)
--->地獄 Hell 지옥
A. (+10) - (+5) = (+5), (-5) - (-3) = (-2) ~~~(+3)
B. (+15) - (+5) = (+10) (-30) - (-5) = (-25) ~~~(-15)

팔자란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게 있는가, 없는가? 인간은 몸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우리몸은 '나'가 아니다. 때때로 내 안에 있는 어떤것이 나의 육체를 지배한다. 그것을 '영혼' 혹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정신, 에고, 자아, 의식, 영혼, 존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것에는 이름과 모양이 없다. 단어 하나로 딱히 얘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일단 나는 이것을'의식' 이라고 부르겠다.
나무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고 곧 죽는다. 인간에게도 뿌리가 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여섯가지 뿌리가 있다고 했는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육근이라고 부른다. 눈은 보고 귀는 들으며 코는 냄새맡는다. 또 혀는 맛보고 몸은 느끼며 마음은 인식한다. 이 뿌리들을 통해 우리는 외부 세계를 경험하며, 안과 밖을 만든다. 이 뿌리로 부터 형태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각觸, 마음法의 여섯가지가 나오는데, 이것을 육진六塵이라 부른다.
또 이 육진 각각이 의식을 갖고 있는데, 눈이 색을 보고 알아보는 마음을 안식眼識이라하고, 귀가 소리를 듣고 아는 마음을 이식耳識이라하며, 혀가 맛을 보고 아는 마음을 설식舌識, 몸으로 느껴 아는 마음을 촉식觸識, 뜻으로 헤아려 보고 아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러한다.
의식이 없다면 육근은 제대로 가능할 수가 없다. 눈으로 말하자면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뜬장님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색맹이다. 눈은 있어도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뜬장님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눈, 귀, 코를 따로따로 가지고 있다면 별 의미가 없다. 각각의 뿌리는 그것들이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위해 서로 연결된 의식이 필요하고, 또 이것들이 조화롭게 기능해야만 한다.
내가 오래전 수덕사에서 겪은 이야기다. 어느가을, 스님들이 겨울 3개월 수행(동안거)에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위해 아주 매운 고추를 따고 있었다. 모두들 굵은 삼베로 된 커다란 자루들을 하나씩 차고 있었다. 물론 채 익지않은 초록색 고추는 그대로 두고 빨간고추만 따야 했다. 다들 열심이었는데, 유독 스님들 중 한 명이 아주 빠른 솜씨로 고추를 따고 있었다. 다른 스님들은 자루에 반도 못채웠는데 이 스님은 어느새 가득채워 자루도 묶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스님들이 "어쩌면 그렇게 빠르냐"고 혀를 내둘렀다. 그 스님은 "내가 서있던 곳에는 붉은 고추라 아주 많아 금새 땃다"고 자랑했다. 옆에 서있던 주지스님도 그 스님이 아주 부지런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밭일을 모두 끝내고 부엌에 돌아와 바구니를 풀어놓은 순간 일이벌어지고 말았다. 이 스님이 따온고추는 모두 채 익지않은 푸른색 고추투성이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채 익지도 않은 고추를 땃단 말이냐?" 그러나 그 스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게 어떻게 푸른 고추입니까? 다 붉은 고추 아닙니까?" 하고 따져 뭇는 것이었다.
아뿔사! 이 스님은 색맹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눈 하나만 가지고있다고 다되는 게 아니다. 그런 눈은 세 개, 네 개씩 가져봐야 소용이 없다. 귀머거리 역시 멀정하게 귀를 가지고 있지만 듣지못한다. 감기에만 걸려도 제대로 맛을 볼 수 없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 쯤 했을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여섯가지 뿌리는 이철럼 의식과 긴밀하게 연경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다면 비록 외형상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내 친구 이선생은 아주 머리가 좋은데 애석하게도 앞을 못보는 장님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보통사람 못지않은 많은 지혜를 갖고있었다.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얘기이다. 그는 방안에서 $#171금강경»을 읽고 있었다. 수년 전에 선물로 받았다는 사본이었는데, 천천히 페이지를 한 장 한장 넘기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장님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정말 손가락 하나한에 힘을 실어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를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이선생, 지금 «금강경»을 읽고 셰시군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책을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
"오! 그래요."
그는 내 말을 듣고 놀란듯이 이내 책 위아래를 바꿨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이었다. 잠시후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 죄송합니다. 조금 전 당신이 들고있던 방향이 맞았어요. 제 실수 였읍니다."
"네, 그래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항상 저는 옳게 들고 있어요. 당신은 장난기가 심하신 스님이시군요, 하하하."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책을 똑바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느낌으로 책을 똑바로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해와 기억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아주 맑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어느날,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김선생이라는 분에 대해 얘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느어느 도시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의 미름은 무엇무엇이며 그는 어떤어떤 학교를 졸업했고 그의 여동셍은 언제 누구누구와 결혼을 했고 등등 아주 지잘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 이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하고 물었다.
"저는 한번들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더욱더 신기한 일은 그에게 손님이 찾아오면 그는 대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누구인지 곧 알아 맞힌다는 점이었다.
손님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반긴다.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닥쳐도 그는 그 사람들 각각의 이름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반기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 수가 있을까? 심지어 두 눈이 정상인 우리도 사람을 확실히 기억하기 힘들다. 겉으로는 아는체를 쉽게하고서도 속으로는 저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어디서 만났더라' 하며 기억을 더듬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이 선생은 달랐다. 한 번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저사람은 우리가 몇 달전에 단 한 번 만나 불과 몇 분간 얘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문을 열자마자, 그의 목소리을 듣기도 전에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읍니까?"
이선생은 대답대신 자기 코를 가리켰다.
"문을 열면 냄새가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나는 금방 '이건 박선생 냄새, 저건 최선생 냄새' 하고 금방알아차려요."
그의 코는 아주 예민했던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감각기관 중 가장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눈'이라고, 눈을 안 쓰면 눈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코나 귀로 옮아간다. 눈을 감으면 바깥 것들이 더 잘들리는 경험을 많이 해보았을 것이다. 아마 우리 감각에너지의 80퍼센트가 눈에서 쓰일 것이다. 이선생의 경우는 눈에 들어갈 에너지가 다른곳에 쓰여 여는 사람보다 더 예민한 코를 갖게된 것이다.
장님 사무라이에 관한 아주 유명한 일본영화 주인공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토이치다. 사토는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지만 필요할때는 거침없이 그의 칼을 사용하곤했다. 싸움을 싫어했지만 누군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즉각 싸움에 개입하는 것이었다.많은 사람들이 그를 옆에서, 앞에서, 심지어 뒤에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토이치는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지만 그의 칼끝은 아주 섬세했던 것이다. 완벽히 장님이었을지라도 그의 劍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한 번에 가장중요한 포인트를 쳤다. 힘을 한번도 낭비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되도록 가벼운 상처를 주는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하곤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까? 그는 상대방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냄새, 바람의 감각으로 모든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에너지만 집중시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말하지만 인간은 육근과 육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이 모두 18계(十八界)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 18계 속을 헤메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과 슬픔, 오고 감, 이것저것을 만든다. 이 19계가 우리가 살고있는 전 우주를 만든다. 인간은 여섯가지 감각들에 묶이고 집착하면서 이것이 만들어낸 18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모든것은 이 18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밤에 우리는 가끔 꿈을 꾼다. 그러나 18계는 꿈이 없는 세계이다. 그것들은 우리감각에서만 나와 우리가 깨어있을 때 기능한다. 꿈은 어디서 오나? 꿈을 꾸는 것은 어떤다른 종류의 의식이 또한 우리 마음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기가 이세상에 태어난다. 아기는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섬세하게 작동하기 전이다. 아기의 인식은 느낌과 감각에 치중돼 있다. 아기는 뱌고프면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우유를 주면 좋다고 웃는다. 오줌을 싸면 기저귀의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운다. 기저귀를 갈아주면 느낌이 좀 좋아진다. 아기는 그저 감각덩어리일 뿐이다. 태어나 처음 2년동안 아기는 단지 감각만을 받아들여 그에 반응할 뿐이다. 태어나 처음 2년 동안 아기는 단지 감각만을 받아들여 그에 반응할 따름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좋고 싫은 감각에 대한 분별심이 생긴다. 마음의식이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가 오면 행복해진다. 다른사람이오면 그렇지 않다. 단지 "나는 엄마, 아빠가 좋아" 하고만 생각할 뿐이다. 만약 엄마가 함께놀면 그냥 그렇게 할 뿐이다. 어떤 낯선 사람이 함께 놀려고 하면 "난 싫어"하며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다음에 엄마가 나타나면 다시 행복해진다. 이것이 제 7식의 시작이다. 나쁜것과 옳은 것, 싫은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해내는 마음이다.
제 7식은"이건 좋다. 저건 싫다"하는 감정으로 변화한다. 제7식은 분별식 分別識, 말라식末那識이라고 한다. 여기서 제7식은 좀더 발전해, 보고 듣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해 더욱 섬세해진다. 이것이 저8식, 즉 기억의 시작이다. 기억이란 의식의 저장고 장식 藏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보고 행했던 모든것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마치 컴푸터와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와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이 기록되는 것이다. 이 인간의 컴퓨터는 아주 섬세해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모든것이 여기 기록된다. 때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해도, 그것이 바로 순기억(pure memory)의 영역이다.
밤에 우리는 더 이상 보지도, 맛보지도, 느끼지도, 듣지도 못한다. 눈, 귀, 코, 혀, 몸, 생각하는 마음이 활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제7식과 제8식은 결코 쉬지 않는다. 순수한 감각을 느끼는 의지의 마음은 기능을 멈췄다 하더라도 감정과 지적인 마음은 여전히 활동한다. 자고있을 때도 이것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여서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과 습관으로 만들어진 모든 이미지와 감각과 감정들을 경험한다. 어쩌면 하늘을 날지도 모르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악당을 만나 싸울 수도있고, 고향에가서 오래전 친구를 만날 수도있다.
참선을 할 때도 뉴욕에가서 옛 친구를 만난다. 또 샌프란시스코나 바르샤바로 간다. 아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와 싸울 수도 있고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18가지 영역은 작동하지 않는 다 그러나 제7식과 제8식은 여전히 깨어서 서로 활동을 한다. 그때 경험하는 것은 이것들의 상호관계를 통한 어떤 강한 기억 혹은 감정이다. 이 느낌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실체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꿈의 본질이다. 결국 꿈이란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것 혹은 우리의식에 저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앞서 소개했던 내 친구 이선생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처럼 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아 어떤사물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꿈을 꾸나요?"
그는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고, 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라든가 산, 바다, 고층빌딩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색깔과 장소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꿈을 꿉니까. 꿈에서 하늘을 본 적이 있읍니까?"
"물론 없지요. 실제로 진짜 하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꿈에는 하늘이 나타나지 않지요. 다만 나는 걷고 먹고 얘기하고 앉고 옷 입고 모욕하고, 이런 꿈을 꿔요."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선생은 꿈의 본질, 즉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꾸는 꿈ㅇ이란 단지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통해 우리 기억에 씌여진 것들 뿐이다. 눈의식이 없다면 우리역시 꿈에서 어떤 대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미친사람을 본다. 미쳤다는것은 마음에너지가 불균형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6. 7. 8.식등도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어떤 강한 욕망만을 좇고 조화롭게 균형을 찾을 수가 없게된다. 6. 7. 8식들이 서로 균형을 찾지 못해서 연결될수 없는 것이다. 종종 길거리에서 혼잦말하는 사람을 볼 수있다. 옆에는 아무도 없느데 옆사람과 얘기하는 것처럼 웃고 떠든다. 마치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듯 자유롭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많은 데서 마구 옷을 벗기도 하고 악마와 싸우기라도 하는 듯 성난표정으로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이런 삶들은 어떤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서 의식이 점점 분리되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각각의 의식들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고 싶어한다. 제6식은 제7식과 이야기할 것이고 이미지와 기억들을 저장한 제9식역시 다른의식과 소통할 것이다. 제8식은 다른 의식들에 의해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제6식에 의해 균형이 흔들린다.
제8식은 모든것을 지배해서 꿈으로 형상화하여 그것이 실제라고밑게 만든다. 왜냐하면 제6식에서 나오는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것, 코로 냄새 맡은 것, 혀로 맛본것, 몸으로 느낀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들은 더 이상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약간씩 미쳐있다. 거의 모든삶의 의식은 약간씩 불균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음 에너지의 균형을 잡는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참선수행의 첫 번째 이익이다. 수행을 열심히하면 절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자석을 음극과 양극에 놓는것과 같다. 누군가 어떤 강한 욕망에 집착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강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마치 두개의 자석을 양극끼리 맞대놓으면 서로를 밀어내는 강력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의식은 분리된다. 그러나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리의 양극 에너지가 우주의 에너지와 연결되어 마음과 삶에 균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뭔가 하고 있을 때 오직 하라. 마음속에 어떤것을 만들지 말고 그냥하라. 감정, 조건, 상황을 점검해서 그것에 집착하면 어떤불균형이 나오게 되어있다. 더 오래, 더 깊이 뭔가에 집착하면 마음에 더 큰 불균형과 부조화가 나올 뿐이다. 그러나 맑은마음을 가지고 어떤것도 옳다, 그르다 분별하지 않으면 이 세상모든것이 우리에겐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아주 유명한 공안이 하나있다. 큰스님 서암 스님은 매일 저 멀리 푸른산을 바라보며 법당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부른 뒤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맑은 마음을 가져라"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뒤 다시 "예" 하고 혼자 대답하곤 했다. 또 "언제 어디에서도 정신을 바짝차려 남에게 속지말아라"고 말하고는 "예" 하고 대답했다. 서암 스님은 자신에게 있는 두 개의 마음과 서로 얘기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약간 미친 행동일 수도 있다. 부르는 스님은 누구인가. 대답하는 스님은 또 누구인가. 스님은 한 명인가, 두명인가. 누군가를 부르는 스님은 제8식이고 대답하는 스님은 제7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공안을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 의식의 기능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 큰스님이 제자에게 매일 걸으면서 하루 종일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라고 시켰다. "누가 이 몸의 주인공인가. 또 어디에 사는 가?" 제자는 이 질문으로 열심히 수행해서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다.
또 다른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주 깊이 잠들면 꿈도 안 꾸는데, 그때 너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디 있는냐?"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주인공, 우리의 본래 주인공, 그놈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이 고통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꿈속에서 경험할 수도 있다. 꿈이 의식의 저장고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이렇게 맟선 것들을 꿈에서 볼 수있을까? 그것들은 어디서 왔나. 우리는 때때로 책이나 영화나 TV를 보다 처음보는 내용이나 장면인데도 아주 익숙한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매일 우리는 지하철, 가게, 학교 등에서 많은 얼굴과 마주친다. 어렸을 적 만화나 잡지에서 어떤사진을 볼수도 있고 그것들로부터 나온 이미지는 여전히 의식의 창고에 저장된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그뿐 아니다. 현생에서 행했던 모든 것 혹은 과거 삶에서 경험했던 모든것이 저장된다. 이 저장고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고성능 컴퓨터는 결코 어떤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것에 관련해서, 앞서 소개한 이선생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또 하나있다.
어느 때인가, 내가 일본의 교토 젠 센터에 머물고 있을 무렵이다. 어느 날 내가 오사카에 있는 한국 절에 급히가야할 일이 생겼다. 그러나 가는 길을 제대로 아는 신도가 한 명도 없었다. 신도들 중 한명이 이선생이 아마 그곳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선생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이선생은 대문을 열어주면서 내가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이고 스님, 어서 오십시요" 하며 흔쾌히 맞았다. 내가 오사카 절 가는 길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며 앞장을 섰다.
장님을 앞세우고 두 눈 멀쩡한 정상인이 뒤따르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얼마나 재미있는 상황이냐. (하하하) 정상의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아주 단순한 것도 제대로 못 보는 데 비해 이 선생의 눈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애 無碍의 눈이었다. 우리는 이선생의 집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택시 정류장까지는 약간걸으셔야 합니다."
이선생은 지팡이도 없이 척척 앞장서 걸었다. 그는 약간 검은 색의 선그라스만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장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걸어 내려와 외쪽, 오른쪽, 왼쪽으로 돈 뒤 길 한가운데 나있는 육교로 길을 건넜다. 그는 육교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육교를 걸어올라갔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선생, 어떻게 육교있는 곳을 이렇게 잘 알아요?"
"아,...... 그건요, 집에서 500미터가량 똑바로 걸으면 생선 냄새를 실은 바람이 불어오지요. 아마 생선가게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50미터쯤 더 가면 주유소가 있어요. 석유내새로 알수 있지요. 그리고 20미터쯤 가면 육교가 나오지요.'' 과연 길 아래를 보았더니 주유소가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선생은 이미 냄새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걸어 지하도를 통과하니 택시 정류장이 나왔다. 일본애서는 택시가 아주 재미있다. 길 오른편에 서 있으면 택시가 온다. 기사가 안에서 자동으로 문을 열기 때문에 승객이 문을 따로 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길가에 서 있었고 이윽고 택시가 다가왔다. 이선생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손잡이를 잡고 안에 들어가 앉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선생은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고 지팡이도 없었기 때문에 택시기사는 그가 장님인 줄 모르고 있었다. 이선생은 유창한 일본어로 기사에게 오사카에 있는 절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줬다.
"고속도로로 들어가서 교차로를 지나 빵집 앞에서 우회전한 뒤, 두 불록을지나 좌회전해 공원 오른편으로 가십시요."
기사는 이선생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정확히 절에도착했다.
"아니, 당신은 한 번도 운전을 한 적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길을 그렇게 잘아세요?"
"아, 몇 년 전 부처님 오신닐 이곳에 한 번 왔었지요."
나는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이건 아주 훌륭한 사례다. 우리 의식의 저장곤는 결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것들은 영원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죽어 몸은 사라져도 우리 의식의 저장고는 일하는 것을 멈추지않고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 준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전생에 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현재 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된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모든것이 우리의 과거 업에서 온다. 우리 의식의 창고안에 저장된 행동과 시고에서 나온다. 같은 식으로 우리가 현생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다음생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몇 년 전 내 제자 중 하나가 아이를 낳았다. 내가 미국 뉴헤이븐 젠 센터에 있을 때 그녀는 그 아기를 데리고 왔다. 태어난 지 4일인가 5일 된 아기였다. 아주 작은 체구에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 엄마나 다른 사람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생태였기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느끼고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자거나 눈을 뜨거나 아기 얼굴은 언제나 커다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변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는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는 듯했다. 항상 웃음 띤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도대체 이것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이 아기는 막 태여났지만 이전 생에서부터의 그의 업이 이 같은 행복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는 무슨일이일어나는가. 그때 우리몸은 '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지수화풍의 살호작용일 뿐이다. 이미 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제7식과 제8식은 결코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었던 업, 그들이 좇았던 습관을 따라 새 몸을 만든다. 살면서 어떤 행동을 했나? 이것이 새 몸을 만든다. '업이 몸을 만들고 몸이 업을 만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요즘 많은 사라들은 그들의 욕망과 몸의 만족만을 좇아 일생을 허비한다. 이것이 동물릐 마음이다. 오직 나, 어직 나뿐이다. "난 다른사람들은 상관안 해." 개나 고양이는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다. 뱀은 새의 조건에 대해 관심이 없다. 요즘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와 같아지고 있다. 이런종류의 삶이 만들어내는 업 때문에 아마 그들은 다음생애에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한번 보라. 모든 사람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있지만 안은 뱀의 마음, 개의 마음,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한 80퍼센트가 뱀, 개, 고양이의 마음일 것이고 20퍼센트만이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생과 현생에 걸쳐 만들어놓은 업ㅂ, 즉 마음의 습관의 결과이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의 업만을 좇는다. 그들의 업은 그들을 항상 지배해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난 이걸 원해." "난 저걸원해." "난 이 사람이 좋아." "난 저 사람이 싫어." 이런 습관의 힘은 제8식에 저장된다. 마음 공부를 하지않으면 모든 중생등레게 갖는 사랑과 자비심이라는 본성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 만들면 뭔가를 갖게된는 이것은 인과 법칙이며, 부처님의 만든 창조적인 생각이아니라 이미 이 세계에 내재되어잇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어떤 종류의 생에서 다른종류의 생(때때로 인간, 동물, 아귀)으로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법칙을 아주 맑게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방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어떻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전 인생을 결정하는 마음을 지키는가. 그것이 또한 우리의 다음 생을 결정한다. 내 업을 통제하고 지배하기위한 것이야말로 수행의 목적이다.

Tuesday, May 8,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성게

법성계 · 法性偈 The Song of Dharma Nature

법 성 원 융 무 이 상 法 性 圓 融 無 二 相
The nature of the Dharmas is perfect. It does not have two differeent aspects.
일체법은 두루 걸림없이 하나이며
제 법 부 동 본 래 적 諸 法 不 動 本 來 寂
All the various Dharma are unmoving and fundamentally still.
본래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
무 명 무 상 절 일 체 無 名 無 相 絶 一 切
They are without name amd form, cut off from all things.
이른과 모양이 없는 일체가 끊어진 자리다.
증 지 소 지 여 경 證 智 所 知 非餘境
This is understood by enlightened wisdom, and not by any other sphere.
아는 주체도 알 대상도 일체 경계가 없다.
일 중 일 체 다 중 일 一 中 一 切 多 中 一
The one is in the many, the many are within the one.
하나 속에 만물이 있고 만물에 하나가 있다.
일 죽 일 체 다 즉 일 一 卽 一 切 多 卽 一
The One is many, the manyare One.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무 량 원 겁 즉 일 념 無 量 遠 怯 卽 一 念
Numberless kalpas are the same as one moment.
억겁은 한순간과 같고.
일 념 즉 시 무 량 겁 一 念 卽 是 無 量 劫
One moment is the same as numberless kalpas.
한 순간은 억겁과 같다.

«법성게» 는 신라 때 의상 대사가 화엄사상을 압축해놓은 詩이다.
32구의 시로 대승 화엄사상을 통째로 담은 철학이다. 이 시들은 대부분의 절에서 요즘에도 매일 암송되고 있다. 여기에는 道의 본질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이란 이것이다. 법이란 저것이다." 그러나 법이란 무엇인가? 본래 진정한 법에는 이름도, 모양도 없다. 심지어 어떤것을 '법'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큰 실수이다. 법은 법이 아니다. '법'이란 말은 절대적인 실체를 일컫는 임시 이름이다.
실체는 둘이아니다. 그렇다고 어떤하나의 모양을 띠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실상이란 이 우주안에 이미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에 사실상 어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치 전기와 같다. 때때로 전기는 선풍기를 돌리고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게 한다. 에어컨도 작동시키고 물도 얼리고 방안도 덥게 한다. 기차도 움직이게하고 우리 몸 속에도 돌아다니다. 이때, 전기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언제나 전기이되 그 작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전기의 본질이 두 모습이아니기 때문이다. 비,눈, 안개, 수증기. 물, 바다, 진눈개비, 얼음 모두 똑같은 물질에서 나온 다른형태에 불과하다.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그것의 본질은 H2O이다.
'법'도 이와같다 여러가지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산, 강, 태양, 달, 별, 컵, 소리, 우리의 마음처럼 조건에 따라 이름과 모양이 달라질 뿐이다. 다시말해 조건이 사라지면 이름과 모양도 모두 사라진다. 법의 본질은 우리의 본성과 똑같다. 사람도 착한사람, 악한사람이 따로있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을 내면 착한것이고 악한 마음을 내면 악한 것이다. 마음의 '꼴'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실체는 변함이없다. 지식은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가져다 줄수 없다. 1백개의 박사학위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도 모든것 속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억겹은 한 순간과 같고 한순간은 억겁과 같다.
티끌이 산이요. 산이 티끌이다. 티끌을 모으고 모으면 태산이되고 태산을 낱낱이 부스러뜨리면 티끌이된다. 물방울도 보이면 강물이 된다. 강물은 물방울이 모여서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이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갸우뚱한다. 언뜻 이해를 못한다. 또한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하나라는 것도 완벽하게 공한 것이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이 대목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것은 하나이며, 하나는 모든 것이다. 두 개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공허한 공간은 나눌 수 없는 오직 하나이지만 공간 안에는 산, 강, 인간, 나무, 개, 고양이, 태양, 달 , 별, 많은 것들이 있다. 니 모든 것들이 공간을 구성한다. 모든것이 우주의 일부이지만 우주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것이 그 안에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과 밖이 없는 것이다.
이 詩는 또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아주 재미있는 가르침을 주고있다. '억겁은 한 순간과 같고 한 순간은 억겁과 같다.'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다. 생가하는 마음이 시간을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길거나 짧아진다. 그러나 참선수행을 하면 실제로 한 순간안에 무한대의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순간안에 무한대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 안에 모든것이 있다. 한 순간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말이 어떤 특별한 영역이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채 한 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언뜻 1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 샐각할수 있다. 카메라고 한번 설명해보자. 아주 빠른 셔터 스피드를 가진 특별한 카메라가 있다고 하자. 이런종류의 가메라는 튀어 나가는 총알도 잡을수 있다. 움직이는 총알은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다. 캄메라 셔터가 아주 빨리 열리고 닫히면서 필름위에 총알을 잡아낸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서 공중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총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총알은 사실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마음도 똑 같다. 우리가 '오직 모를 뿐' (즉, 생각이 일어나기전의 상태)이라는 카메라를 가지고 한 순간을 깊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움직이지않는 총알을 잡아낼 수 있다. 움직이지않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가 똑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본래 모든것은 완벽하게 멈춰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순간의 마음(moment mind)'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없음을 의미한다.
«법성계»는 '법'의 본질과 우주의 실체에 관해 매우 재미있는 詩的인 언어를 담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말에 불과 하다. 부처님의 말 조차 완벽하게 우리것이 되지않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우주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우주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완벽한 정적에서 온다. '만물이 하나 속에 있으며 하나속에 만물이있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탕!" 모든것은 하나에서 나온다. "탕!" 때때로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실체, 에너지, 부처님, 하느님(하나님), 의식, 신성함, 마음, 절대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은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본래 이 완벽한 정적은 생각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이름과 모양이 없다.
선불교에는 아주 유명한 공안이 하나 있다. '만물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서 왔는가? (萬法歸一 歸一何處)'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얻고 모든것을 얻는다. "탕!" 그러나 단지 머릿속으로 아는것은 도움이되지않는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완벽하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 "탕!" 이 경험이 온전히 여러분의 것이 될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법성계»의 가르침이다.

Sunday, May 6, 2012

140년간 70억명이 사랑한 옷에 올인

140년간 70억 명이 사랑한 옷
유대인 이야기 청바지를 발명한 레피 스트라우스

명품은 유럽왕실과 귀족에게 공금되던 귀품있는 복식과 우아한 장신구가 대중용으로 발전한 것이다. 국제명품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명품패션은 이 전통을이어오고있다. 그런데 명품이아닌 실용적 패션도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실례가 있다. 그것도 패션의 본고장 유럽이아닌 미국에서다. 독일 태생 유대인 레비 스트라우스는 가장 오랜 대중패션역사를 자랑하는 '불루진'바지를 발명했다.
소년시절 짝사랑을 못 잊어 평생독신
스트라우스는 1829년 독일 바이에른 지방 밤베르크 인근 조그만 마을의 한 多子女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 주민들은 매년 거듭된 흉년으로 가난에 시달렸다. 행상을하던 아버지는 어린 스트라우스와 자녀들을 남겨둔 채 페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작은아버지와 사촌 몇명이 먼저 뉴욕으로 이민갔기 때문이다. 18세가 되던해인 1947년 스트라우스는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뉴욕으로갔다. 우선 사는게 급해 공부는 포기하고 먼저 정착한 작은 아버지의 옷가게에서 일을 배웠다. 그런데 고된일에비해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당시 미국은 중 .서부 개척기였다. 많은 동부인이 서부로 이동했던 '골드러시' 시대였다. 이 '금 노다지' 행렬은 1950~60년대 많이 나온 미국 서부영화의 단골 주제이기도 했다. 스트라우스도 힁재를 꿈꾸며 이 대열에 끼어 서부로 향했다. 막상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그는 크게 실망했다. 금은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캐가고 남은 게 별로 없었다. 결국 뉴욕에서 배운 옷장사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1853년 '리바이 스트라우스 앤드 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엔 조그만 공장에서 천막 천으로 광부들의 작업복을 주로 만들었다.
당시 광산인부들이 입던바지는 주머니 재봉선이 자주터졌다. 금 등 광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 질긴 바지가 필요했다. 네바다주 카슨시티에서 양복점을 하던 라트라비아 태생 유대인 재단사 제이콥 데이비스가 동업을 제의해왔다. 데이비스는 천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징인 구리 리벳을 바지에 박아 천을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징인 구리리벳을 바지에 박아넣는 아이디어를 냈다. 스트라우스도 한 가지 발상을 떠올렸다. 당시는 미국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는 전쟁 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캘리포니아로 온 남군 패잔병이 입고있던 파랑 색 바지를 유심히 보았다. 그는 이 인디고 불루색이 사람들에게 활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1873년 5월 20일 리벳을 넣은 남청색 바지의 특허가 승인됐다. 140년 패션 역사의 리바이스 불루진 바지가 공식 탄생한 날이다.


19세기 말 본격적인 산업화에 진입한 미국은 스트라우스의 청바지를 위한 좋은 시장을 제공했다. 진 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비지가 조금무겁다는 소비자의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가벼운 면綿 소재인 데님으로 옷감을 바꿨다. 대님은 프랑스 남부도시 님(Nimes)의 특산물이며 고급 면綿 의류를 만드는데 많이 쓰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전선에 참전한 미군등이 진바지를 즐겨입었다. 청바지가 미국을 넘어 세계화 상품으로 발전한 계기다. 전총적으로 배타적인 유럽시장도 청바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890년 청바지의 특허 시효가 만료되자 다른 제조사들도 다투어 진바지를 만들었다.
1934년 여성용 청바지가 처음 등장했다. 66년엔 여러번 반복해 박음질하는 재봉법이 리벳을 대신했다. 70년대 중반엔 미국 유대인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이 명품화된 청바지를 선보였다.
수줍은 성격의 스트라우스는 소년시절 짝사랑하던 한 독일 여성을 잊지못해 평생독신으로 지냇다. 대신 청바지 생산과 판매에 열정을 바쳤다. 그는 성실함과 신용을 신조로 한 창조적 경영에 앞장서다 1902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회사 경영권은 여러차례 바뀌였지만 창업자의 경영신조는 그대로 계승됐다.
청바지는 1950~60년대에 대도약기를 맞았다. 록 가수 엘비스 프레스리는 대표적인 청바지 전도사 였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영화배우 제임스 딘과 명배우 말런 브란도 그리고 비운의 여배우 메리린 먼로도 청바지의 충실한 홍보요원이었다. 실용성과 멋을 모두지닌 청바지는 작업복 . 평상복 . 레저용 등으로 용도가 다양화 되어 전 세계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복장이 됐다.
세계인구와 맞먹는 연인원 70억 명이 입었다는 청바지는 자유 . 평등사상, 계금사회철폐,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또 신분 과시용 명품이아닌 대중의 영원한 가치로 지리매김했다. 교육받지 못한 한 유대인 의류상이 만든 바지가 불변의 세계화 상품으로 발전했다.
청바지 전도사, 엘비스 프레슬리
얼마전부터 우리도 세계화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엔 근본적인 장애가 있다. 우리는 오랜세월 시대별로 힘샌 주변 외세에 의존했다. 그리고는 한반도 내에서 자족하며 배타심만 키웠다. 나라 밖으로 나가 무엇을 개척해 보겠다는 선의의 모험심이 없었다. 여전히 세계화가 채질적으로 익숙하지못한 이유이다. 영어 몰입교육은 기본 전략이 아닌 지엽 전술에 속한다. 다원화된 세계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으로 우리에게 적합한 체계적인 세계화 전략부터 세우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이론이나 학문이든, 인물이든, 상품이든 이것만은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독창적 세계화 상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청바지 외에도 유대인들이 만든 세계화 상품은 무수히 많다. 지적 호기심에 기초한 창의적 교육과 폭넓은 열린 사고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이 세계화를 선도하는 것은 우리에게고 시사하는 바가크다. 박재선 전 외교부 대사

김치나 된장찌개가 어때서?

중앙칼럼 김치나 된장찌개가 어때서??
경제팀 편집자 김기정
우리음식에 대한 자신감이 한식 세계화 앞당기는 전략 뉴욕 유명 레스토랑이 입증
뉴욕에 한인이 운영하는 '단지'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한식당으로 처음으로 '미슐랭 가이드' 별을 받은 곳이다. 미슐랭 가이드는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평가서이다.
최근 '단지'의 주인겸 세프 후니 킴(한국명 김훈)이 한국을 찾았다. 이유는 한국의 장맛을 보기 위해서 란다. 그가 찾은곳은 경북 포항에 있는 장류업체 '죽장인' . 1000여 개의 숨쉬는 항아리에서 1년간 숙성시킨 된장, 간장, 고추장을 전통방식으로 생산하는 업체다. 그는 방문후 죽장연에서 생산되는 장을 식재료로 사용키로 했다고 한다.
후니 킴은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손님들이 된장냄새를 싫어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된장찌개 냄새를 맡은 손님들이 무슨 음식이냐며 주문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답했다. 그는 "한식 본래의 맛을 제대로 내는 게 중요하다"며 "요리사는 손님에게 자기요리를 가르치는 사람"아라고 설명했다.
한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가가 변하고 있다. 음식의 '맛'과 '향'을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그래서 음식은 그 자체의 맛이나 풍미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다. 처음 맛보는 음식에 대한 미국인들의 선입견을 뛰어 넘은 대표적인 음식이 '피클' 이다.
오이를 식초, 설탕등에 담가 만든 피클은 미국의 국민음식으로 물릴만큼 미국인들의 식문화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피클이 처음부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괴상한 음식이라며 수모를 받았고 몸에 좋지 않다는 근거없는 평가를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피클은 야만적인 음식이라는 컬럼이 신문에 등장하기도 했다. 유리병에 담긴 오이가 쪼글쪼글해지는 모습이 너무 비인간 적이고 잔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클이 환영을 못 받는 진짜 이유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피클은 뉴욕에 살던 동유럽계 유대인 이민자들의 즐겨먹던 음식이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부유층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미국에 처음건너 온 동유럽 유대인들은 찢어지게 기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피클은 그런 유대인들이 생존을 위해 빵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밥에 김치 반찬 하나가 달랑 차려진 밥상을 생각하면 될것같다.
더구나 당시 미국 주류사회에서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은 지금보다 더욱 노골적이었다. 뉴욕커들에게 피클은 '가난' 과 '유대인'이라는 선입견이 버무려져있는 음식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 이민자들의 위상과 함께 피클의 위상도 함께 상승했다.
한식에 대한 위상변화도 피클과 유사한 면이있다. 김치나 된장찌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변화는 미국내 한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주류사회의 평가가 바뀌고 있다는 한 증거다.
한류 음악을 대표하는 K팝의 성공에 이어 한식을 전세계에 알리자는 '한식 세계화' 'K 푸드' 작업이 한창이다.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발굴하고 홍보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먹는 음식에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은 더욱 중요하다. 위축되지 않고 자신있게 된장찌개를 미국손님에게 내놓는 '단자' 의 후니 킴에게서 한식 세계화의 성공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간괴해선 안괼 점은 한식에대한 평가와 한인에 대한 졍가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이다. 음식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것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다. 피클이 극복한 선입견을 김치가 넘어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맨 땅에서면 불안감 엄습하는 도시인

김창엽 기자의 歸然日記(20)

"농사짓고 사는 것보다 실은 좋은 것도 없쥬."

3년 전 이 곳 이스트 벨리에 집을 지으면서 동네 어른들에게 조촐하게 음식을 대접했다. 일종의 전입신고였는데. 그 자리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오랜 세월 농사에 이골이 났을 법도 했고, 시골생활에 불편한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터인데 할머니는 농촌에서 삶이 충분히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쎴다.

여든 살이 훨씬 넘어보이고, 오랜 세월힘든농사 일 등으로 몸이 적잖게 상했는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할머니께서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어떤 힘이 느껴졌다.

시골에서 도시로 떠나는 흐름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그 반대로 움직이는건 아무래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귀농 혹은 귀촌의 형태로 시골을 향하는 도시의 청장년층이 최근들어 늘고 있지만, 정작 시골의 할머니 할아버지 대부분은 이를 선뜻이해하지 못한다.

시골살이라는 게 육체적으로는 꽤나 힘드는 노동의 연속이다. 도시에서 공사장을전전하는 막노동과 닮은 측면도 있다. 이런점만보면 '죽을 때까지 공사판'이나 다름없는 시골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야 하는 곳일게다.

그러나 노동의 대상과 목표를 비교하면 도시에서 막노동과 시골에서 농사는 극과 극처럼 서로 다르다. 먹고살기위해 몸을 쓰는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만 농사는 생명을 다루고, 도시에서 노동은 기계나 콘크맅트 등을 대하는 일이다. 이 둘은 또 흥미롭게도 흙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적으로 다르다. 시골에서 흙은 생명을 키워내는 터전이다. 반대로 도시에서 흙은 덮거나 감추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집이나 공장, 사무실이 들어선 자리는 말 할 것도 없고 주차장이며 길까지 흙이 노출된 공간을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에서 평생을 살다시피한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포장된 도로에서 벗어나, 맨 땅을 밟고서면 불안감이 엄습한다."며 내게 "어떻게 시골에서 살 수 있는냐"고 종종 말을 한다.하기야 가로수조차 시멘트 불록사이를 힘겹게 뚫고 나온 모양새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게 도시이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흙이 지니고 있는 '모성본질'을 이해하기 어려운 도시에서 삶을 오히려 안타깝게 생각한다. 흙은 생명을 배태하고 성장시키는, 그래서 사람으로치면, 자궁이요 곧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싱그러운 연두빛이 지배하는 이 계절 신록을 예찬하는 사람들은 많다.

식물들이 펼치는 향연은 말 그대로 눈부시기까지 하다. 푸르름을 만들어내는 작물과 나무들은 그 아름다움은 논외로 차고, 자연계의 생존 질서라는 관점, 즉 다소 냉정하게 바라본다 해도 먹이사슬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다.

너무 뻔한 얘기지만, 식물이 없으면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동물들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또 그 식물들을 키워내는 게 바로 흙이다.

올 들어 본격적인 시골생활을 시작하면서 얼마 전부터 생명의 신비 혹은 경외감 같은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지난해 겨울 심어놓았던 마늘이 겨우내 살아있는 아무조짐도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땅 밖으로 잎사귀를 틔워 놓았다.

감자며, 상추, 케일 등 내손으로 심고 씨를 뿌린 작물들도 잇따라 한두 주 만에 땅위로 여린 물체를 드러냈는데 그게 보고 또 봐도 신기했다. 돈으로는 결코환산할 수 없는 어떤 소중한 가치가 느껴졌다.

평소 고되고, 돈도 안 된다는 이유로 농사일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동네 할아버지 한 분도 "채소같은게 자라는걸 보면 언제봐도 좋기는 혀" 라고 말하는 걸 보면, 자라는 식물들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즐거움을 주는건 틀림없는 것 같다.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는 건 상당부분이 모성 혹은 부성 본능인지도 모른다. 신기하게도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도 마치 내 새끼들처럼 그런 본능을 자극한다.

흙과 그 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삶에 크나큰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시골생활이 해볼만한 것이라면 아마 이런 활력 때문이 아닐까.

'집 밥으로 세마리 토끼 잡는다.

'집 밥' 으로 세마리 토끼 잡는다 식비절약. 건강. 가족화복 가능
한인 주부 송모씨는 주변에서 '극성'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외식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다. 실제로 외식을 하는 경우는 1년을 통틀어봐야 손으로 꼽을 만큼 몇차례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릴 때 건강을 챙겨준다는 생각에서 '집 밥'을 고집했는데, 그게 습관이 된 거예요. 외식을 삼갈 수 있는것은 전업주부인 덕분인데요, 집밥을 먹는 게 가만히 따져보면 이익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송씨와 남편, 대학생이 된 아들, 딸이 지금까지 병원한번가지않은 것은 아침, 저녁만은 가능한 집에서 먹도록 한 게 큰 이유라고 송씨는 믿고 있다.
군침을 돌게하는 맋있는 외식 메뉴들의 공세가 강화되는 요즘, 집 밥을 고집하기란 쉽지 않은게 사길이다. 그러나 집 밥이 가져다주는 장단기적인 이점은 쉽게 지나쳐버리게엔 너무도 크다.
식비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평균적인 미국가정에서 외식은 대쳊적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최근 경제 침체가 계속되면서 외식비 증가는 주춤하는 경향도 있지만, 미국가정의 식비가운데 40%는 외식에 들어간다는 통계도 있는 실정이다. 외식대신 집에서 끼니를 챙긴다면,외식비의 절반수준이면 충분하다는 게 많은 전업주부들의 의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한인 주부 송씨의 예처럼 특히 어린자녀들의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초중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연령대의 자녀들은 어른들에 비해 패스트루드 환경에 더 노출돼 있기 때문에 직장 혹은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에 비해 몸에 좋지않은 음식을 집 밖에서 접할 가능성이 더 크다.
최근 럿거스 대학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외식의 비중이 높은 아동들이 집에서 주로 식사를 하는 아이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비만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역시 집 밥의 위력을 가늠케 한다.
건강증진과 가게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게 눈에 보이는 집 밥의 위력이라면, 가정의 화목은 잘 드러나지않는 집 밥의 힘이다.
일부 주부들은 "남편이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기 시작하면 외도를 의심해 봐야한다고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우스개 소리로 치부하기에는 그 의미가 심장하다. 부부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대화 기회를 늘리는등 집에서 온 가족이 가능한 함께 자주 식사를 한다면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도움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창열 기자

Saturday, May 5, 2012

발언대 My Way, Our Way

발언대 My Way, Our Way
김영목 뉴욕총영사

미국 국립문서 보관소에 소장된 한장의 사진,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에 끌려온 독일군 포로 속에 발견된 한 동양인(조신인)이 모티브가 되어 만들어진 강제규 감독의 한국영화 'My Way' . 지구 반 바퀴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1만 2,000km 전장을 강제로 끌려다니면서 꿈을 생명을 지켜가야했던 1940년대 한 조선청년의 고단한 사람의 여정을 쫒다보니,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한국의 현실이 새삼 마음을 짓눌러온다.
영화 주인공 준식은 손기정 선수와 같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꿈꾸는 청년이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 준식이 올림픽 대표가 된다는 것은 꿈 같은 일, 이런 상황 속에서 준식은 일본인들의 부당한 경기조작에 항의하다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되기에 이른다.
중국과 몽고국경, 시베리아, 동유럽, 노르만디에 이르기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하루하루의 연속, 그러나 한치 앞도 내다볼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준식은 꿈을 포기하지않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이런 준식의 모습을 보며 내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한국을 떠나야했던 다양한 운명의 한인 1세대들이 떠올랐다.
어려운 조국의 현실과 국제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떠밀리듯 국경을 넘고 또 넘으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는, 그러면서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세계각지 이민 1세대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미주사회의 이민 1세대들도 My Way의 준식과 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처절헌 인생유전을 겪으면서 좌절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살아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노력의 결과로 오늘날 김용 세계은행 총재와같은 세계적 영향력을 갖는 롤 모델들을 끊임없이 배출하였다.
이렇듯 미주 한인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면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미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각지로 흩어져 뿌리를 지키려고 몸부림처온 많은 韓민족 동포들의 소설같은 삶과, 지금 중국과 주변 여러나라 사이 수천키로미터를 가로지르면서 내일의 운명을 모른채 숨 막힌 삶을 살아가야하는 탈북동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또한 없을 수 가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7대 무역대국,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 뿐이랴.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있는 문화와 흥의 끼가 K-pop등 한류로 성장하여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어렸을 때는 한국출신이라고 말하기가 창피해서 부모의 나라가 어디라고 얘기하기 싫었지만 지금은 한국,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2세들에게 가끔 듣게되는 가슴뭉클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 한인 2, 3세대들이 韓國의 歷史와 文化를 모르고, 한국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또 다른 불행이고 손실이다. 한인 2, 3세들은 이곳 미국 땅에서 그들 부모의 강인한 유전자와 꿈, 그리고 전체 한국인의 기대를 등에 업고 달리고 있다. 그들의 마라톤에는 전세대가 못다이룬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끈질긴 생명력이 투영되어있다.
"비침하고 강요된 韓 민족의 디아스포라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지. 하루빨리 統一强國을 이루어 다시는 강대국 간에 벌어지는 침략과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아야지. 이제 우리에게는 전 세계를 누비는 빛나는 새 세대들이 있지 않은가." 영화 My Way는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숭산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화엄경

화엄경 · 華嚴經 The Hua-yen (Avatamsaka) Sutra



若人慾豫知 If you wish to thoroughly understand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를

三世一切佛 All the buddha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알고자 한다면

應觀法界性 Then you should view the nature of the whole universe 우주 만물의 본질이

一切唯心造 As being created by mind alone.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화엄경»은 대승불교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화엄경»가르침의 핵심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는 화를 내는 행동은 좋은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엄경»의 시각은 다르다. 화내는 것 또한 그대로 진리이다. 이는 대승불교가 아주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위험한 거리에서 나쁜장난을 한다 치자. 부모들은 이를 보고 매우 화를 낼것이다. 아니들을 꾸짖고 심지어 종아리까지 때린다.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냐."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그대로 진리이다. 그건좋고 나쁜것이 아니다. 부모들의 화도 그대로 진리이다. 역시 좋고나쁜것이 아니며, 꾸짖음과 휘초리역시 나쁜것이 아니다. 그것들 모두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소승불교의 시각에서는 무조건 화내지 말라고 가르치는 반면 «화엄경»에서는 화, 꾸짖음, 희초리모두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사람들에게 해가 되지않게하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이다.

오래전 중국에 아주 욕스님이 한 분 살았다. 다른 절에서 기부한 돈, 신도들이 시주한 돈을 모두 고스란히 자기호주머니로 가져갔다. 그는 돈을 모은다는 그 자체에서 삶의 기쁨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은 돈을 결코 한푼도 쓰지 않았다.늘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자기자신을 위해서 조차 쓰지 않았다."저 탐욕스런 중은 누추한 옷 안에 돈이 엄청많다. 그는 너무 욕심이 많아 자기를 위해서도 전혀 돈을 쓰지 않는다."

신도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마을에 홍수가 났다. 마을은 완전히 비에 쓸려갔다. 집들도 가라앉고 가축도 죽고 논밭은 추수도 하깆전에 다 물에 잠겼다. 마을 전체가 음식도 집도없는 혹독한 겨울을 맞을 위기에 처해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비탄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서 수많은 쌀과 콩, 이불, 옷, 약부대, 쟁기를 가득실은 수레들을 발견했다. 한두 대도 아니고 수심대나 되는 수례들을 네마라 튼실한 암소들이 끌고 있었다. 그런데 수례행렬 중간에는 그 '욕심많은 스님'이 누더기 옷을 걸치고 함께 걷고있는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고보니, 사정인즉슨 이러했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의 절반을 이들 물건을 사는 데 쓴다음 나머지 돈은 그 마을 면장한테 주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면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나는 수행하는 승려입니다. 수년 전 나는 앞으로 이 마을이 아주 극심한 재난을 겪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읍니다. 그 이후로 나는 날마다 돈을 아주 열심히 모았지요, 그리하여 오늘날 이렇게 유용하게 쓰게 되었읍니다."마을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그 스님이야말로 대보살이로구나."

과거 이 스님의 탐욕스러운 마음은 그대로 진리이다. 탐욕심 자체는 좋은것도 나쁜것도 아니다. 순수한 것도 순수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슴불교에서 우리의 행동은 우주와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중생과 함께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항 화, 중생길을 위한 탐욕도 그대로 진리인 것이다. 물론 겉으로 대승의 길을 따른다고 합리화 하면서 우리 자신만을 위한 어떤 욕심을 부린다면 이것은 나쁜길로 접어드는것이다.

«화엄경»은 또 우리 마음이 모든것을 만든다고 가르친다. 아주 간단한 얘기이다. 우리는 이미 우리 마음이 어떻게 시간을 길게도, 잛게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그렇다 우리의 생각이 여기와 저기를, 오르고 내림을, 북과 남을, 동과 서를, 좋고 나쁨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다. 모든것은 생각에서 나온다. 마음을 내면 모든것이 나타난다.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우리마음이 이 우주를 만든다.

원효대사의 일화는 백마디 말보다 극명하게 이것을 설명해준다. 젊었을 때 그는 아주 극심한 내전에 휘말렸다.그는 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것을 보았다. 여자와 아이들이 무자비하게 학살 당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땅은 살육된 시체와 가족들로 뒤범벅이 되었다.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 우리자신과 다른사람들에게 이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줘애 하는가?"

당시 그에게 세상은 혐오 그 자체였다. 그는 진리에 대한 깊은 의문에 사로잡혔고, 그 대답을 찾기를 갈망했다. 급기야 머리를 깎고 스님이 돼 산으로 올라갔다. 절대적 진리와 실체를 깨닫지 않고는내려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으며, 그것을 강하게 믿게되엇다. 그러나 그것도 그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부처님의 말도 그가 일상의 비참함에서 보았던 바위처럼 가슴에 남아있던 삶과 죽음의 깊은 고뇌를 들어올릴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을 지켜보던 도반들이 중국에 있는 큰 선사를 찾아가보라고 제안했다. 그 선사는 큰 깨달음을 얻은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 그분이 나를 도와줄지도 몰라.'

원효스님은 다른 수님들과 함께 짐을 챙겨 중국의 선사가 산다는 산으로 떠났다. 북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여러 달 그는 맨발로 걸었다. 몸도 피곤하고 약해졌음에도 스승을 찾겠다는 그의 결심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너무 피곤해 동굴을 찾아들어가 땅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다 갈증이 일어 한밤중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둠속에서 마실것을 찾아 손을 더둠자 무언가 그릇같은것이 잡혔다. 마치 부처님이 그를 돕기위해 가져다놓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하게도 물로가득채워져있었다. 그는 아주 맛있게 물을 마셨다. 여태까지 맛보았던 어느 물보다 맛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스님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전날마신 물은 다름아닌 해골바가지에 담긴 빗물이었던 것이다. 옆에는 구더기들이 뒤범벅이었고, 뼈 주변에는 여기저기 썩은 살점까지 붙어 있었다. 스님은 완전히 뒤틀리는 역겨움을 느꼈다. 두 팔과 두 무릎을 땅에대고 속엣것을 다 토해냈다. 그리고 한숨을 돌리는 순간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간밤에 마신물과 지금 내가 본 물은 무엇이 다른가. 간밤에는 물에대한 어떤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골에 담긴 물을 보는 순간 아주 나쁘고 더럽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결국 이 생각이란 것이 물의 좋고 나쁨을 혹은 맛있고 엮겨움을 만든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도대체 이 '더럽다'는 생각은 누가 만든 것인가. 그는 더이상 중국으로 스승을 찾아갈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원효대사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것을 알려준다. 모든것은 결국 이 마음이란것이 만든다. 내가 이 우주를 만들었다. 내가 개를 만들고 고양이를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하느님을 만들고 산을 만들었다. 태양과 달과 별도 만들었다. 삶과 죽음, 가고 옴, 과거, 현재, 미래도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개는 결코 '나는 개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수십여 년 전 대사찰 해인사에서 큰 법회가 열렸다.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유명한 강사스님 두 분의 법문을 듣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두 분 강사스님은 1주일 동안 다양한 주제를 놓고 법문을 했다. 스님들은 법문을 듣고 토론을 벌였다. 강사스님 두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읍니다. 그러나 결국 한 가지만을 말씀하셨읍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마십시요."

많은 스님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스님이 손을 번쩍들고 일어섰다. 나이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주 젊은 스님이었는데, 옷차림은 걸인을 연상케 할 전도로 누더기 넝마차림이었다. 게다기 머리도 삮발하지않고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두 눈동자 만큼은 보석처럼 빛났다. 그 스님은 강당안이 쩡쩡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 스님들은 만물이 결국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마음은 누가 만드는 것입니까?"

순간,강당안이 찬물을 끼앉듯 조용해졌다. 감작스런 질문에 정작 당황한 것은 두 강사스님이었다. 두 강사스님은 쉽게 대담을 하지 못했다. 두 강사스님은 쉽게 대담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법문해온 8만4천 경전을 줄줄이 꿰고 있었건만 경전을 아무리 기억해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후, 질문을 한 젊은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어떻게 스승님들은 제가 드린 질문에 대답을 못하십니까? 평생동안 '마음'에 대한 공부를 하셨고 지난 1주일간 오로지 부처님말씀만을 전하신 스승님들 아니십니까? 이것은 썩은 강의 입니다."

강사스님은 젊은 승려의 호통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우주만물은 다 마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단지 마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 가지고는 이것에 답할 수 없다. 책을 읽고 법문을 듣는 것도 건강한 답이 못된다. 진정 도움을 받고 싶다면 경전과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경험'해야만 한다. 우리가 참선수행을 중요하게 생ㅅ각해야 하는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참선이야말로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도, 소승불교에서도 모두 그들의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들 길 중의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자, 내가 하나 묻겠다. 무처님은 모든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다. 어느것이 맞느냐. 입을 열면 그것은 이미 큰 실수이다. 소승불교는 올바른 기르침이다. 대승불교도 바른 가르침이다. 선불교 역시 바른 가르침이다. 예수님 가르침도 바른 가르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가르침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가이다.

오래전 학운이라는 유명한 큰스님이 한분 계셨다.

그는 아주 높고 바위가 많은 산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암자아래계곡에는 서쪽과 동쪽에 비구니 절이 두 개 있었다. 동쪽 절 비구니들이 말했다.

"관세움보살을 염불할 때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러자 서쪽 절 비구니들이 반박했다.

"아니야, '관세으음보살'이 맞아."

두 절에는 250여 명이 넘는 비구니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이것을 놓고 싸워댔다.

"우리가 맞다."

"아니야, 우리가 맞아."

마침내 그들은 어느 날 이렇게 합의를 보았다. 다음날 아침 11시, 스승의 법문이 끝난 뒤 각자 누가 옳은지 따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동쪽 절 주지가 자기전 비구니ㄷ등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음'이라고 하고 저들은 '으음'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틀리면 어떡하는냐, 체면이 말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맞는 쪽으로 결론이 나게 할 수 있을 까?

그러자 한 젊은 비구니가 이렇게 제안했다.

"작년에 나는 큰스님을 모신적이 있었는데 정말 떡을 좋아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밤 특별히 맛있는 떡을 만들어 큰스님께 드린다음 서쪽 절 비구니들보다 먼저 큰스님께 가서 여쭈면 어떻겠는가. 아마 우리가 원하는 좋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자 모든 비구니들이 "참 좋은 생각"이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보통 절에서는 밤 9시가되면 불이꺼져 모든승려들이 잠자리에 들어야만한다. 그들은 서쪽 절 비구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밤 9시가 되자 불을 다 끄고 아주 희미한 촛불아래서 떡을 만들었다. 마침내 두 명이 대표로 뽑혀 떡을 싸들고 큰스님께 가지고 갔다. 마침 큰스님도 깊은 잠이들지는 않았다.

똑똑똑

"누구냐?"

"예, 저 밑에 사는 동쪽 절 비구니 들입니다."

"밤이 늦었는데 무슨 일이냐?"

"예, 오늘 나이 많으신 스님 한 분의 큰 생일 잔치가 있어 떡을 좀 준비했읍니다."

"오, 기특하구나."

떡을 받아든 큰 스님은 아주 좋아 했다. 스님들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잠시 후, 스님 한 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큰스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그래, 무슨 질문이든 하려므나."

그들은 서쪽 절 비구니들과의 논쟁에대해 소상히 이야기했다.

"스님 저희는 염불할 때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데요, '관세음'이 맞나요, '관세으음'이 맞나요?"

큰스님은 잠시후 이렇게 말했다

'물론 '관세음'이 맞지."

스님들은 너무너무 행복했다.

"스승님, 내일 법문 때 서쪽 절 비구니들 앞에서 큰스님께 똑같이 여쭙겠읍니다. '관세음보살'이 확실히 맞는 것이지요."

"물론이지."

동쪽 절 비구니들은 서둘러 산을 내려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 서쩍 절 비구니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종일 동쪽 절 비구니들과 곧 있을 다음날 모임에 대해 얘기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한 비구니가 내일 법회전에 먼저 큰스님을 찾아뵈어야 한다며

"내가 큰스님의 친한 친구분 한 분을 알고 있는데, 그분말씀이 큰스님께서 칼국수를 아주 좋아하신다고 하더리"고 전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 맛있는 칼국수를 만들어서 오늘밤 갖다 드리자. 그러면서 우리의 궁금한 것을 여쭤볼 수 있지 않겠느냐?다들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다. 그들은 칼국수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칼국수 만드는것은 떡을만드는 것보다 어려워서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칼국수가 다 만들어졌다. 두명의 비구니가 뽑혀서 산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다행히 큰스님 방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똑똑.

"누구냐?"

"산 아래 서쪽 절 비구닏들입니다."

"이 한밤중에 웬일들이냐. 들어오너라."

"저녁 때 절에 큰 제사가 있어 칼국수를 좀 준비했읍니다. 큰스님 생각이 나서 좀 가져왔읍니다."

"오------ 좋지."

큰스님은 소리내어 먹기 시작했다.

"아주 맛있구나. 국수를 만들어서 먼 곳에 있는 나까지 생각했다니 참으로 기특하다."

서쪽 절 비구니들도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이윽고 잠시후 한 비구니가 입을 열었다.

"큰스님 여쭐것이 하나 있는데요------."

"무엇이든 물어보아라."

"우리 서쪽 절에서는 염불을 욀 때 '관세으음보살'이라고 하는데, 저 동쪽 절 비구니들은 항상 '관새음보살'이라고 함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큰스님은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그야 물론 '관세으음'이 맞지."

"그렇지요. '관세으음'이 맞지요? 내일 오점 법회 때 우리모두 스님께 여쭙기로 했읍니다. 그때도 '으음'이 맞다고 해주실 것이지요?"

"물론이지."

그들은 안심이 되었다. 두 비구니는 달리듯이 산을 내려와 이 기쁜 소식을 스님들에게 알렸다.

"와, 우리가 이겼다. 큰스님이 우리가 맞다고 했어."

모든사람들은 기뻐했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다음날 아침 11시가 되었다. 5백여 명의 비구닏들이 대웅전에 모였다 큰스님이 도착해 연단에 올랐고, 스님들이 삼배를 올렸다. 그런 다음 각 절의 대표스님들이 앞으로 나왔다. 먼저 동쪽 절의 한 스님이 여쭈었다.

"큰 스님, 우리는 어제 내내 논쟁을 했읍니다. '관세음보살'이 맞읍니다까? '관세으음보살'이 맞읍니까? 우리는 '관세음보살'이 맛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서쪽 절 스님들이 반박했다.

"아닙니다. '관세으음보살'이 맞읍니다."

법당 안은 삽시간에 비구니 스님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며 소리치는 고함으로 시끄러워졌다. "관세음보살이 맞아." "아니야 관세으음보살이 맞아."

큰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깊은 생각에 잠긴듯 했다. 수많은 비구니들이 큰스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디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큰스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주 어려운 질문이로구나."

그러자 동쪽 절 비구니 한 명이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어렵다니요? 어제 저녁에 큰스님께서는 저희에게 '관세음보살'이 맞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서쪽 절 비구니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게 무슨 소리야, 그러면 엊저녁에 큰스님을 따로 뵈었다는 말이야."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큰스님은 소란을 지켜보면서 잠시동안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킨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주 쉬운 질문 이기도 하지."

양쪽 절 비구니들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결국 이길거야.'

이윽고 큰스님이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 나는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런데 내가아는 바에 따르면 떡 경전은 관세음보살이 맞다고 하지만 칼국수 경전은 관세으음보살이 맞다고 하는구나."

큰스님의 입이 닫히기가 무섭게 비구니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떡을 큰스님께 갖다 바쳤구니 나쁜 것들."

"아니, 그러는 너희들은 구수를 만들어 바치다니, 앙큼한 것들."

갑자기 큰스님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할! 다 내려놓아라. 관세음보살할 때 관세음보살할 뿐. 관세으음보살할 때 관세응음보살할 뿐이다 말과 단어에 집착하지 말아라. 염불을 욀 때는 그저 염불을 외우면 된다.네 것이 맞다, 내 것이 맞다 하는 분별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큰스님의 말에 비구니들은 잘못을 깨닫고 더욱 열심히 수행했다고 한다.(하하하) 소승불교 수행도 나쁜것이 아니다. 옴마니반메홈이나 신묘장구대다라니 역시 좋다. 심지어 '코카콜라 코카콜라'하는 것도 각자에 둘러싸인 조건, 상황, 견해를 버리고 굳은결심을 가지고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다. 뭔가 할 때 가장중요한 것은 의심하지않고 따지지않고 100퍼센트 그냥하는 것이다. 말은 중요하지 않다. 깨달음을 얻고 싶으면 무엇보다 필요한것이 노력하는 마음이다. 오직노력하고 실천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Tuesday, May 1,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화경

법화경 • 法華經 The Lotus Sutra

제법종본래 諸法從本來 All phenimena from their very origin. 본래 모든 법은,

상자적멸상 常自寂滅相 Always have the aspect of stillness and extinction 적멸하여

불자행도기 佛子行道己 When the disciple of the Buddha walks this path. 도룰 행하는 불자는

래세득작불 來世得作佛 He will become a Buddha in future lives.

중국말로 «법화경»은 '실상묘법경( 實相妙法經)'이라고 부른다. 실상은 '참'이라는 뜻이고 묘법은 '신비한 법문' 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어떻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법화경»은 완벽한 전적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해 가르찬다. 사실 이것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얻어야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린다.

내 말을 듣고 있는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휙휙 흝고 지나가는 망상들을 좇으면 여러분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을 끊어서 단지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돌아오면 완벽하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내 말과 여러분이 듣고 있는 귀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말하는것과 듣는것이 둘이 아니요, 그것이 이미 부처님이고 예수님이다.

이것은 한국사람만 경험하는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독일, 중국사람만 경험하는것도 아니다. 남자만 경험하는 것도, 여자만 경험하는것도 아니다. "탕!" 나는 때때로 이것을 '원점(primary point)' 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신부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하나가 전날 나의 법문을 듣고 의문이 생겨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원점(primary point)'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지금처럼 테이블을 탕 쳤다. 그게 전부였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신부님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얘기하는것은 단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테이블을 치는것은 생각이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부처님이전입니다. "탕!" 우주 이전입니다. "탕!" 하느님의 창조 이전입니다. 당신이 그 지점을 볼수 있다면 신을 볼수 있읍니다."

그러자 다른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신을 볼 수 있읍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신부님이 입고계신 셔츠가 까만 색이군요."

« 법화경 » 은 바로 이 지점이 "탕!" 어떻게 우리의 본성이고 모든 현상의 본질인지 깨닫게 해준다. 또 이 경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미래생에 부처가 될것아라고 한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나온 구별일 뿐이다. 실제 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이 장소가 아닌 때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간에 되는 것이 아나다. 무처가되고 싶으면 단지 수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수행한다면 '다음 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된다. "탕!" 여러분은 단지 이순간을 가질 뿐이다. '다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을 얻는것은 어렵지 않다. 미래의 어느순간 일어나는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안과 밖이 없이, 주체나 객체가 없는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말한다. 오직 수행하라. 그러면 부처가 된다.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추종자들은 '나무묘법연화경 南無妙法蓮經' 을 암송한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이것이 일본의 «법화경» 제목이다. 그들은 이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아름다운 집과 훌륭한 아내를 얻는다고 믿는다. 그 어떤것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의 진언같다.

그런수행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뭔가 얻고 싶다면 이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불교공부나 참선수행은 어떤것도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아무묘법연화경 뿐만아니라 모든 진언 수행의 최종 목표이다. 어떤종류의 진언도 똑같다. 심지어 '코카콜라, 코카콜라, 코카콜라'하고 계속 열심히 반복 외우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空 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절대의 상태이며, 우리가 원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기본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기본원인이 제거되면 우리의 조건과 행복이 나타날수 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본원인을 제거할 것인가.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하는 마음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그결과 우리는 우주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점이라고 부른다. 원점을 유지하면 천천히 기본원인이 사라진다. 생각이 단지 기본원인을 만들 뿐이다.생각을 끊으면 기본원인은 태양열에 증발하는 물처럼 자연스레 사라진다.

열심히 수행하면 이것은 매우쉽다. 그러나 자꾸생각을 하면 그것은 우리의 업을 만들고 업은 태양을 가려 결국 기본원인인 물은 증발할 수 없게된다. 어떤 수행을하든지 큰 물음을 가지고 그냥 해보아라. 노력하는 마음과 큰 의혹을 가지면 어떤 종류의 수행이든 본성을 얻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래전 한국에는 석두石豆라는 이름의 스님이 계셨다. 돌머리라는 뜻이다. 그는 아주 멍청했지만 대단한 노력가였다. 어느 날 석두는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스승은 '즉심시불 卽心是佛', 즉 마음이 부처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석두는 이를 '짚신시불'이라고 잘못알아들었다. 즉 짚신이 부처라고 잘못알아들은 것이다. (하하하하하!) 그리하여 그는 3년동안 오로지 '짚신이 부처라니, 이말이 무슨 뜻이냐. 도저히 모르겠다.'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행방식에 대해 의심을 품지않았다. 스승에게 따져 묻지도 않았다.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직 매일 이상의 한가운데서 앉거나 일어서거나 먹거나일하거나 오직 집중해서 이질문을 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화두로 삼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덕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다 바위에 발을 찧었다. 지게위 나무가 머리위로 쏟아지고 짚신 한 짝이 멀리 날아갔다. 순간 석두는 깨달음을 얻었다. 날아간 짚신과 그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의 우주가 된 것아었다. 그때 그는 그의 본성을 보았다. 그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부처가 바로 짚신이로구나,"

그는 스승에게달려가 소리쳤다.

"스승님, 스승님, 이제 부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읍니다."

"오, 그래, 네가 깨달은 것을 설명해 보거라."

석두는 갑자기 짚신으로 스승의 머리를 한대 때렸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것뿐이냐?"

" 내 짚신이 다 찢어졌읍니다.

스승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훌륭하다. 네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수행을 해서 오직 하나의 마음을 갖느냐 하는것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오직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수행을 하면 모든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하라.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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