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28, 2011

만 행 9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ㄱ가???

만행 9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독특한 룸메이트, 네드

예일대학은 나에게 많은 인간관계의 경험을 가져다준 곳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 모이는 예일대학의 입학생들은 첫 1, 2년간을 기숙사에서 보내는데 1학년 때 룸메이트는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따라야 한다. 그러나 2학년 때부터는 선택할 수 있다. 기숙사 자취방으로 옯기는 경우가 왕왕있어 룸메이트가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1학년 때 무려 네 명의 룸메이트와 번갈아가며 한방을 썼다.

첫 룸메이트는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정부에서 요직을 지내고있던 사람이었으며 대대로 4대째 그 집 아들들이 모두 예일대학에 입학한예일대학패밀리였다. 그는 용돈이 많았는지 풍족하게 먹고 쓰며지냈다. 여자친구도 심심하면 갈아치우는 프레이보이 스타일이었다. 두번째 룸메이트는 뉴욕에서 온 유태인이었는데 수학과 역사에 천재적이었다. 나도 천재소리깨나 듣고 자란사람이었는데 그 아이의 연산능력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앞에서 번번히 탄성을 내질러야 했다 세번째 룸메이트는 시리아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으로 뽑혀 정부장학생으로 온 친구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친구는 1학년 때 마지막 룸메이트였던 테드다. 그는 유태인 어머니와 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국적은 태국이었다.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평소에는 영판 틀림없는 남자인데 일주일에 한두번씩 여장 女裝을한다. 태국에는 동성애자가 많고 성전환 수술을하는 남자들이 많다고 듣긴 했지만 그것을 옆에서 확인한 것은 처음이였다. 네드가 수염은 물론 팔다리 털을 다 깍고 우아한 드레스에 화려한 메이크업을 바롯, 귀거리에다 팔찌, 목걸이까지 하고 교실에 나타나는 날이면 교수님과 학생들은 경이에 찬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드의 애인들은 모두 남자였는데 인종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우와! 앞으로 어떻게 지내나. 나는 당시만 해도 나중에 신부나 수도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주 신심이 두터운 카톨릭신자였기 때문에 동성애자는 신의 뜻을 어기는 자이므로 죽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굳게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마치(솔직히 말해)더러운 벌레 대하듯 했다. 그와 얘기하는 것은 물론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칫솔, 타월등도 혹 그의 것과 섞일까 두려워 목욕탕에 두지않고 내 책상 서럽안에 넣어놓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러던 내가 차츰 그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의 솔직함과 착한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한 친구 사이로서이니까 독자 여러분들은 이상한 상상을 하지 말아주시길 바란다.)

그는 숨기는게 없었다.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여장하는것을 좋아하는 자기성격을 애써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가 화장을 하고 면도를 할 때 어찌나 정성스럽게 하는지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자기몸에 저렇게 정성을 드리는 시람도 있구나 놀랄정도였다. 그는 나에게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몇 번씩 제안했지만 나는 싸늘하게 거절했다. 그런데도 그는 나에게 변함없이 친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심한 독감에 걸려 한 발짝도 움직이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네드가 나에게 약과 음식을 사다주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는 나 때문에 수업까지 빠졌다고 했다.

그 일이 계기가 돼 나는 그에게 점차 마음을 열었고 인간의 품성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기독교적 잣대에 따르자면 그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러 삶의 모습에서 그는 나보다 훨씬 사랑이 많았으며 착하고 관대했다. 그는 악마가 아니라 모두에게 친절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지닌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였다.

단지 그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나? 그 당시 내주위 친구들중엔 처음만난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내친김에 사랑없는 잠자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단지 남자와 잠자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으로 가야하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그의 사랑은 남녀간의 일회적인 사랑보다 오히려 더 지지하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의 관계가 아니라 관계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그와 친해졌고 2학년 때 우리는 다시 룸메이트가 되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입시에만 몰입해 있다 대학에 들어가 자유를 만끽하며 수많은 경험을하게 되는 한국학생들처럼 미국학생들에게도 대학은 자유와 도전의 장이며, 학문적ㆍ인간적ㆍ사회적인 여러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다.

예일대학은 내 삶을 키워준 비료와도 같은 곳이었다.

2 나는 미국의 386세대

1983년에 대학을 들어갔으니 굳이 한국식으로 학번을 따지자면 나는 83학번이다. 80년대에 대학교에 들어갔고 60년대에 태어난 30대이니 미국의 386세대라고나 할까. 한국의 386세대가 학교다닐때 데모도 많이하고 419세대와는 또 다른 정치적 관심이 높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386세대인 나 역시 학교다닐때 데모를 했던 운동권 학생이였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80년대 미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졋을 극에 달했던 학생운동과는 이슈가 달랐다. 레이건 정부에대한 반대데모가 주로 많았다. 로널드 레이건은 1980뇬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는 첫 임기가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미소간에 군비경쟁이 극에 달했던 때라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주했다. 또 미국의 경제적ㆍ정치적이득을 관철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개발도상국의 독재정부를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 니카라과의 콘트라 스캔들, 엘살바돌의 온두라스 사건 등 중남미 독재자들에게 돈과 무기를 주면서 통제하고 그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정부군과 벌린는 내전을 북돋는 한편, 한국과 필리핀의 군사독재자들을 도왔다.

지난 여름에 나는 전남 광주에 갈 일이있어 들렀다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갔었다. 평소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는데 여의치 못하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곳을 들러보며 충격을 받았다. 내 또래 젊은이들, 아니 나보다 어린학생들이 아무죄도없이 군인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는 사진들을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광주항쟁에 대한 기사를 〈뉴욕 타임스〉에서 읽은 가억이있다. 그때도 한국군사독재 정부의 야만성에 대해 혀를 찼었는데 직접 현장에 와서보나 마치 내 형제라도 죽은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광주학살에 미국이 개입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그것과 관련한 증거가 나와있다.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럽다.

대학 재학당시 나는 미국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접하면서 나의 이 아름다운 생애, 내가 누리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좋은 삶의 조건은 다른나라 수백만 사람들의 고통뒤에 세워진 것이라는 생각을 해게 되었다. 내가 속한 사회는 수많은 가난한 나라사람들의 희생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예를들어 미국에서 내가 사먹는 바나나와 오렌지는 풍부했고 질 좋는 청바지는 매우쌌다.

그 이유는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은 남미독재정부가 자국농부들에게 저물가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은 오로지 그들의 고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삶이었다. 물처럼 펑펑 마셔대던 코카콜라에 사용되는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알고보니 중남미의 자메이카나 도미니카 공화국 농부들의 저임금노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쩌면 내가 하는 모든행동, 나를 둘러싼 모든 경제적행위가 이처럼 다른사람의 고통에서 비롯되었고 갈수록 그들의 삶은 더 비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싼 콜라를 마시면서 갈증을 해소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뺨을 때리고 있는 것 같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한국의 광주항재은 1980 5월이었는데 당시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철이었다. 지미카터와 로널드 레이건이 맞붙었는데 당시 한국의 상황은 아주 격렬했다. 카터는 아주평화롭고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대통령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고 사회가 불안해져 남북관계까지 여파가 미칠까 걱정했다. 그래서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정책을폈다.

반면 다음해 1월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대통령은 아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중남미 개발도상국들의 독재정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힘을 키워나갔다. 비단 대외적인 문제에만 힘의 정치를 편 것이 아니었다. 레이건정부는 빈민계층에 대한 관심이 전혀없었다.

오직 부자를 더 부자가되게 만드는 정책,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하는 정책을 폈다. 부자들의 세금은 깎아주는 한편 그동안 케네디ㆍ존슨ㆍ카터정부 때까지 이어졌던 보조금은 줄이고 사회보장제도를 없앴다. 이 정책으로 가장피해를 본 계층은 흑인 하층민들이었다.

또한 미국 역사상 유례없는 무기생산경쟁을 벌렸기 때문에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라는 쌍둥이적자에 시달렸다. 이 가운데 가장 혜택을 많이본 계층이 군산 복합체를 위시한 부자들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정부정책에 대한 바판의 말이 나올 때마다. 빈민계층을위한 정책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게을러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들에게 정부가 그동안 너무많은 혜택을 주어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대학재학 당시 가난한 뉴헤이븐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층민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정부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않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 있었으며 하루하루 회망을 잃고 자포자기하며 절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뉴헤이븐은 범죄만이 판치는 무서운 도시가 되었다.

슬럼기의 칙칙하고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만이 도시를 감쌌다.

3 공부를 하는 이유

대학생활은 이처럼 모순과 의문의 연속이였다. 교과서와 다른현실, 여기에 최고의 지성이라는 교수님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괴리는 열정과 이상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하나의 거대한 모순더어리였다. 철학ㆍ문학수업을 들을때면 교실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말들에 들러싸여 마치 진리라는 산을향해 마음껏 질주하는 항해사들처럼 들떠 있었지만 학교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가 높은 담장안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말의 성찬을 떠벌리고 있을 때 뉴헤이븐 슬럼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퀭한 눈으로 휴지통을 뒤지고 있었다. 교수님들은 한결같이 진리를 설파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수업시간마다 정의,

올바른 삶, 자비, 봉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수업이 끝나면 귿들의 고민아란 누가 다음총장이 될 것인지, 교과목을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 전부였다. 그들이 진리를 설파하는 그 순간에도 바로 학교 담 너머 이웃들은 갈수록 열악해지는 생활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교수님들은 주말이 되면 가족과 함께 멋진 차를타고 도시를 서둘러 벗어났다. 정부관료들은 또 어떤사람들인가, 하버드,예일, 프린스턴, 스텐퍼드 등 하나같이 내노라 하는 대학을 나왔으며 전직교수이기도 했던 그들이 펴는 정책이란 또 무엇인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더 힘겹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교수나 정부관료들의 삶이 비도덕적이라거나 나쁘다고하는 가치판단을 넘어 결국 내가 교실에서 그들에게 배우는 지식이란 것이 뭔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의에 사달렸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었인가.

철학을 공부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공부를 열심히해서 노벨상도 받고 훌륭한 학자도 될 수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에게 안정된 직업을 가져다줄 수는 있어도 진정한 삶은 가져다주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같은 회의와 의심은 젊은 나와 우리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미국의 학생운동은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70년대 초반에 극에 달했다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잠잠해진 뒤 1980년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과 방송을 통해 반전ㆍ반정부 데모에 접하고 자란 나의 세대는 부모님 세대와는 또다른 반항아들이었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다른나라들이 미국에 대해 갖고있는 반미감정을 읽을 수 있었고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전부란 믿어서는 안되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당국이 남아프리카에 투자를 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백인들의 상상을초월하는 흑인인권침해(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고 있었는데, 자유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정부와 명문대학재단들이 이를 도와주고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남아프리카에 있는 미국의 금ㆍ다이야몬드ㆍ철광ㆍ화학ㆍ석유회사들은 흑인들의 값싼 노동력과 본국에서 들어오는 자본을 바탕으로 돈을 쓸어담고 있었다. 오직 이득만 남는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였다. 예일대학뿐 아니라 미국전역의 대학교에서 그와 관련한 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중 몇명은 생활비를 한두 푼씩 모아 남아프리카에 보내기도 했다.

한국의 야학처럼 뉴헤이븐 슬럽가에서 가난한 흑인학생들에게 공부를 다르쳐주기도 했다. 몇몇 학생들이나 교수님들은 우리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걱정했지만 우리는 진정한 길, 바른 길을 찾아 진리의 삶을 살기응 원했다. 예일대학의 교훈은 Lux Veritas. 럭스는 라틴말로 이라는 뜻이며 베리타스는 진리라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학교가 이 세상의 빛과 진리가 되기를 바랐다.

한국의 데모는 최류탄과 다연발탄이 오가고 돌과 화염병이 난무해 격렬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고 구호를 외치건나 대형집회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 경찰들은 우리주위를 에워싼 뒤 으르기도하고 때로는 협박도 하면서 집회를 방해한다. 나는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핸드 마이크를 붙잡고 연설을 하기도 했고 시위대를 자휘하기도 했다.

3학년이 되던 1986년부터 학생운동에 꽤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 했는데 그해는 레이건 대통령의 재선3년째가 되던 해였다. 레이건 행정부는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부추켜 여전히 선동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홈리스와 거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빈부격차는 더욱심해지는 것 같았다. 1학년 때 뉴 헤이븐 거리를 걸을 때와 3학년 때는 확실히 달랐다. 대낮부터 술에취해 거리에 그냥 누워있는 사람들이 눈에띄게 많이 늘었다.

남아프리카의 상황도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흑인들이 백인정부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 시절 남아프리카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자 넬슨 만델라는 예일대학 학생들에게 마틴루터 킹에 이은 또 하나의 영웅이었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