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 2011

10.26, 운명의 날이었다

10.26, 운명의 날이었다

정채환 칼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된 1979 년과 년도는 다르지만

같은 날인 10,26이 다시 큰 관심사로 떠 올랐다.

서울시장에 박원순 시민단체 대표가 당선된 일이다.

여당인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전 대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패배한 것이다.

1979

년 늦가을 한국의 정치상황은 마치 마주보는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듯한 아슬아슬하고도 충돌 일보직전의 위험 상황이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원이 의원직 제명을 당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해 이름 한자 신문에 나오지 않고 재야인사로만 호칭되었다. 일반인들은 신문의 행간을 읽어야 했고 유언ㅂ비어가 은밀히 나돌았다. 부산과 마산엔 부마 사태가 터져 중앙정보부에서도 위험을 감지햇지만 차지철과 같은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300만 정도는 탱크로 뭉개도 문제없더고 떠드는 시점인 10,26에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가수 심수봉과 함께 현장에 있던 여성중 한명은 현재 가디나에서 식당 운영을 하는 신재순씨다. 역사는 일순간 호흡을 정지했고 또 다른 음모가 싹트면서 12.12 사태가 일어났고 이어 그 험악한 광주의 희생이 터지고 만다. 그런가 했더니 드디어 군부가 전권을 장악하여 5.6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게 모두 10,26에서 출발한 일이다.

2011 10.26은 어디로

년도는 다르지만 같은 날인 10.26이 다시 큰 관심사로 떠 올랐다. 서울시장에 박원순 시민단체 대표가 당선된 일이다. 여당인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전 대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도 패배한 것이다. 일개 시민단체 대표가 거대여당을 이긴 것만으로 향후가 주목된다. 궁정동의 10.26처럼 2011 10.26도 그 방향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만큼 정치권의 화두다. 야당이 아번 선거를 계기로 단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기 힘들 것이고 여당도 현재대로는 존립이 어렵다는 사실을 뼈속깊이 깨달아 변화를 추구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에서 출발한 작은 의견차이가 이렇게 큰 후폭풍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젊은이들의 참여로 진보가 숨통을 열어

최근의 선거는 젊은층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한국의 선거풍토 보수당이 아니면 생존이 힘들었다. 오죽하면 물과 기름보다 더 어울리기 힘든 김대중은 김종필의 힘을 빌려 DJP연합을 구성했겠는가.보수층의 표를 얻기 워한 교육지책이었다.

결국 DLP연합은 성공하여 노무현 정권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보수층의 발걸기와 조선, 중앙, 동아등 언론의 악의적 보도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노무현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탓이 더 크다.

이번 성거에서도 20대부터 40대까지의 득표울 차이는 대단했다. 거의 3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데 이는 계층간의 뚜렸한 차별을 드러내는가 하면 진보정당이 향후 생존가능성이 무궁하다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보스언론이 종편방송까지 장악하여 여론의 편중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젊은이들의 의식을 믿는다면 걱적할 일도 아니다. 정말 한국의 젊은이의 힘은 대단하다. 4.19 독재정권을 막아냈고 6.29선언을 이끌어 오늘의 민주화를 이루지 않았는가.

그들의 정열은 현재진행형으로 역사를 이끌고 있다. 10.26도 그들의 힘이 존재하는 한 바르게 흘러갈 것으로 믿는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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