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0, 2011

7 만 행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만행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수폰지처럼

나는 1979 6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성요셉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 역시 카톨릭 사립학교로 내가 살고 있던 뉴저지 주에서 가장 훌륭한 고등학교였다. 카톨릭 수도사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역사가 깊은 학교로 남자고등학교였기 때문에 내 형들 모두가 그곳을 졸업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선생님들은 수도사엿는데 우리는 그들을 브러더’Brother라고 불렀다. 선생님들은 학생들 각자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가장 깊은 역점을 두었고 엄하게 우리를 대했지만 우리의 상상력과 생각을 깊고 넓게 열어주기 위해 노력하셨다.

수업방식도 독특했는데 토론을 가장 중요시했다. 역사, 문학, 철학등 모든 수업시간마다 우리는 주제와 과련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다. 아와 함께 학교는 학생들을 향한 열린 교육을 몸소 실천했다 예를 들어 채풀시간에는 수도사님들이 성교육을 사키기도 하셨다. 그것도 단순히 성에대한 선임견이나 편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콘돔을 갖고 와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가르치는 산 교육이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성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욕은 더럽거나 나쁜 것이 나니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성을 누릴 자유 이전에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강조하셨다.

손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이셨다. 개인상담 시간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얘기를 잘 받아주셔서 아주 솔직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수도사 선생님들은 우리들이 넘어가는 고빗길마다 든든하게 지켜서서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 주시던 중요한 상담자였다. 나는 몇 년 전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한〈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본 적이 있었는데 그 학교가 흡사 내 고등학교 생활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해 진한 감회에 젖었었다.

나는 학교생활에 아주 활동적으로 참여햇다. 공부도, 운동도 열심히 했다. 수도사님들은 내가 영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차리고는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다. 당시 나는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수펀지처럼 외부의 모든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모든일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런 내가 질문을 할 때마다 수도사님들은 내 고민을 함께했다.

나는 수도사 선생님들에게 장차크면 수도사나 신부가 될 것이라고 알햇다. 그럴 때 마다 수도사님들은 정말 훌륭한 생각이라며 격려 해주셨다. 그리고 어떤 때는 나같이 어린 학생을 수도사님들만이 참여하는 특별수련에도 참석하게 해주셨다. 산에서 며칠동안 선생님들과 생활하면서 묵언하고 기도를 올리는 수련이었다. 선생님들은 나의 독립적인 생각을 존중해주었고 내가 의문스러워하고 고민할 때도 뭔가 해결책을 주려 하기보다 내 생각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셨다. 이전의 학교생활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조건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고, 내 생각을 막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신들조차 같은 의문을 갖고 있음을 토로하며 같이 고민하자고 말했다. 당신들 역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며 젊었을 때는 그저 무모님이나 선생님들이 믿어야 한다고 해서 그저 신심이 부족한 자기 탓을 하며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하셧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은 내게 많이 고민하고 고민햇지만 결국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교등학교 시절에 만난 두 분의 스승을 잊을 수 없다. 리지스 수도사님과 로버트 수도사님이다. 리지스 수도사님은 나에게 아주 혹독한 글짓기 훈련을 시켰다. 그는 나에게 영어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아주 엄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글짓기 담당 선생님이었는데 나에게 특별히 많은 글을 쓰게하고 체크해서 ㅗㄹ려주시면서 내 생각과 글쓰는 능력에대해 조언을 해주셨다.

라지스 수도사님은 고등학교 내내 뉴저지와 미국전역의 글짓기 대회에 기회만 나면 나를 학교대표로 보냈고, 나는 그때마다 소설이면 소설, 시면 시, 장르를 가리지않고 1등을 해 선생님을 기쁘게 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아주 자랑스러워 하셧고 더욱더 나에게 헌신 하셨다.

그분은 종종 나에게 35년 교직생활 도안 너깉이 훌륭한 제자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너는 장차 많은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하게 될 것이다라며 자신감을 키워주셨다. 그리고 내가 힘들고 어려워할 때마다 훌륭한 조언자가 되어주셨다. 나에게 또 한 분의 아버지셨던 셈이다.

내가 출가해서 지금 한국에 살고있다는 것을 아시게되면 어떤 표정을 지우실까, 아마 깜짝 놀라실 것이다.

리지스 수도사님이 나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분이셨다면 로버트 수도사님은 맏형과도 같은 분이었다. 로버트 수도사님은 아주 재미있는 분이다.그는 학교에서 터프 가이로 불렀다. 젊었을 때 권투 선수를 하가도 했던 그는 선수로 활동할 당시 손가락이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아 인상도 우락부락했다. 무릎이 불편해 갇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의자에 앉고 설 때마다 우드득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또 수도사 시절 초기에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기도 하셨다는데 활동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로버트 수도사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전해지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수도사님이 살고 있던 미을 흑인들이 선교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그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워낙 평소에 펼친 헌신적인 활동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우리들에게 무엇을 배우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배우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셨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려 애쓰셨던 분이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가 너무 무섭다며 두려워했지만 나는 그를 아주 잘 따랐다. 선생님은 아주 열성적인 사람아었다. 그 선생님 역시 내가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사람이었다.

그이 소개로 나는 세익스피어와 만났다. 선생님은 젊었을 때 적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았다며 세잇스피어를 소개해주시면서 나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다. 나는 세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져 집이고 학교고, 시간날 때마다 세익스피어 작품을 읽어댔다. 나는 세익스피어를 통해 언어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았다.

그는 자기 삶에 아주 엄격한 분이셨다. 학교에는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나는 시간이 나면 혼자 그곳에가 기도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어두운 성당안에 무릎을 꿇고 두 손에 얼굴을 파 묻은채 아주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로버트 수도사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아주 겸손하고 성스러운 모습에 혼자 감탄한 적이 많았다.

로버트 스도사님은 때로 와일드하고 열정적이었으며 힘이 넘쳐 흘렀다. 다혈질적인 면도 있어서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나 화가 났을 때 가끔 정신이 나갈 정도로 학생들을 때리곤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곧 후회했고 깊이 사과를 하셨다. 일면 거칠어 보이기도 하자만 동정심이 많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수도사님은 또 농담도 잘하셨다. 심지어 가벼운 음담패설도 즐기셨다. 나는 그가 영적으로 성실한 수행자이면서도 남의 눈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썼는데 어느 날 수십권의 일기노트를 로버트 수도사님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다.그분은 내 일기를 건네받으며 아주 기뻐하셨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셨다. 일기를 다 읽고 나에게 돌려주면서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언젠가 너는 네 길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짧게 말씀해주셨다.

선생님은 진정으로 내가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다. 내가 예일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가끔 편지를 보내셨다. 살뜰히 안부를 묻는 내용과 함께 수도사가 되고 싶다면 언제라도 찾아오라고 하셨다.

이재 내 길을 찾은 지금, 두 분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나는 과연 그분들처럼 훌륭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게을러질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분의 치열한 삶의 모습은 나에게 훌륭한 채찍이 된다.

고등학교시절 나의 삶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평일에는 열심히 공부를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열심히 놀았다. 특히 주말이면 친구집에서 돌아가며 열리는 파티가 아주 재미있었다. 나이트클럽도 많이갔다. 그러나 열심히 놀고 온 다음날이면 왠지 허무감이 일기도 했다. 나는 가끔 떠들석한 파티장을 혼자 빠져나와 산책을 했다.서늘한 공기를 들이쉬며 까만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런 삶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게 뭐지? 이게 다야?

당시 실존주의, 특히 카뮈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내가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노라면 친구들이 파티장에서 사라진 나를 찾아 나왔다.

, 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다들 너를 찾고 있잖아.”

그래그래 들어가자.”

,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마음 한구석, 밀려드는 외로움은 막을 수 없었다.

친구들은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 전개될 자유로운 삶, 사회적 안정, 부모님처럼 가지게 될 부 富, 좋은 직업등등에 관해 얘기했다. 이혼, 별거 등으로 정작 부모님들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들은 부모님의 삶을 닮고 싶어했다. 마치 어떤 목적지를 향해가는 기차에 탄 승객들처럼 내릴 생각도 않고 이미 결정된 프로그램대로 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사는가, 무었이 진리인가.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없었다. 때로 그런고민에 혼자 빠져 사는 내 자신이 두렵기도 했다. 나는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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