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3, 2011

6 만 행 죽음에 대한 기억

죽음에 대한 기억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그 일은 그때까지의 내 삶을 완전히 180도 바꾸어 놓았다. 나는 그 일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절망과 고통이 어떤 것인지 경험했다. 완전히 세상이 거꾸로 서는 경험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일은 나에게 결정적으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경험이었고,

내 가족 모두에게도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우리 어머니의 형제는 모두 세분이다. 그중 외삼촌은 아주 인텔리고 성공한 출판사 사장이었다. 결혼 전에 카톨릭 수도사였던 외삼촌에게는 모두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외사촌들과 우리 형제들은 같이 자랐다. 집이 불과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여섯 명의 형제 자매들이나 다름없었다. 사촌형제들은 외삼촌을 닮아 아주 똑똑하고 모든일에 호기심이 많았다.특히 우리 남자형제들과 사촌 폴, 브랜든, , 3형제는 정말 우애가 좋았다. 함께 공부하고 놀고 잠자며 24시간을 붙어 지낼 정도였다.그중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폴은 나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 동갑내기 친구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너느 형제들보다도 가까웠다.당시 우리 부모님들은 메사추세스 케이프가든에 여름별장을 갖고 계셨다. 그곳은 케네디 대통령家가 있는 곳으로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양지다. 부모님들은 1백 년 된 호텔을 사들여 이를 개조해 별장으로 만드셨는데 그 집에는 침실만해도 열두 개가 있었고 거실이 세 개나 되었다.

별장은 해변바로옆에 위치해, 우리는 낚시나 수영을하다 지치면 책을 읽었다. 별장에는 당구대와 탁구대 등 없는게 없었고 테니스 코트까지 있었다. 완전히 천국이었다. 내가 대학 들어기기 전까지 여름방학이면 우리 식구들과 외삼촌네 식구들은 모두 그곳에서 함께 여름을 지냈다.

1980년 어느 날, 외삼촌네 식구들이 우리와 열흘간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때 우리는 너무 너무 재미있게 놀았다. 1, 2년만 지나면 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바빠질 게 뻔했기에, 그해 여름이 우리 형제들이 실컷 놀 수 있는 마지막 가회나 되는 것 같아 유난히 아쉬웠다.

그들이 차를 타고 떠날 때 나와 남동샌들은 차를 따라잡기라도할 것처럼 달려가며 손을 흔들어 댔다.나는 그때 창 밖에 비친 폴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까지 보았다. 그런데 사흘 후 나는 청천 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 폴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하루종일 우시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 역사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불과 사흘전만 해도 며칠뒤에 보자며 헤어지지 않았나.

폴과 동생 브랜튼은 그날 집으로 가자마자 마침 찾아온 큰누나의 약혼자와 함께 드라이브를 나갔다고 한다. 그 남자친구는 미래의 처남에게 새 차를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누나도 함께 드라이브나 하고 오라고 동샌들에게 권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차를 탔다. 브랜든은 앞자리에, 폴은 뒷자리에 탔다. 운전기사인 누나의 약혼자는 약간 술에 취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들은 안전벨트도 매지 않았다. 짐을 나서면 곧바로 90도 각도의 골목이 나오는데 그 약혼자는 빠른 속도로 달리다 휘어진 골목을 보지 못하고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차는 완정히 칼에 잘려진 빵처럼 두 조각이 났다. 차체는 한 번 들렸다가 내려앉으면서 차 지붕이 폴의 머리를 강타했다. 브랜든의 몸은 창 밖으로 던져져 차로부터 6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나동그라졌다. 브랜든 얼굴은 완전히 피로 법벅이 됐다. 그는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차로 기어와 차 안을 들여다 보았다.

형 폴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폴은 차체에 완전히 끼여 죽어가고 있었다. 목이 부러진 채로 폴은 차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다. 브랜든은 폴이 죽어가는 모습을 남김없이 지켜본 것이다. 차를 몰았던 누나의 약혼자는 가벼운 경상만 입었다

폴의 죽음은 나에게 매우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며칠 동안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식음을 전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폴이 죽다니.......우리 형재들은 모두 그 일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의 가족이나 우리가족 모두에게 악봉같은 일이었다. 누구보다 피해가 큰 사람은 브랜든이었다. 그 사고에ㅔ서 부랜든의 몸은 비록 살아났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은 그날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부랜든의 삶은 투쟁 그 자체였다. 브랜든은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 큰 충격 속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의 삶은 평온하지 못했다. 그날사고 이후부터 그는 형이 죽고 자기혼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옆에서 가족들이 차마 눈 뜨고 못볼 정도엿다. 또한 그날의 교통사고는 아름다운 그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유명하다는 성형외과는 다 찾아다녔지만 흉터는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흉터가 왜 생겻는지 묻고 관심을 가졌다.

그는 더욱더 자기만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겉모습은 직업을 갖고 그런대로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얼굴은 늘 일그러져 있었고 어두웠다. 22년 동안 알코홀에 절어 살았으며 최근에는 마약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외삼촌과 숙모는 브랜든을 위해 매일 가도했다. 우리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랜든 역시 교회에 열심히 나가 무릎을 꿇고 제발 제 마음에 드리운 죄책감을 씻어주세요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날 사고이후 죽음을 향해 천천히 굴러갔다. 그랬다. 그는 하루하루 죽어갔다. 형 폴이 죽어가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 그를 무참히 괴롭힌 것이다.

그일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했다. 왜 이런 일이 그 착한 폴과 브랜든에게 일어난 것일까. 왜 착한 사람들에게 그런 형벌이 내려졋을까. 이 일은 나를 세상의 고통이라는 것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했다. 신이 계시다면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도대체 신이 계시기나 한 것일까?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보모님, 신부와 수녀님, 성경, 신 모든 것을 믿었었다. 물론 마음속 깊은 곳에 의문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랑아리고 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호한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천재야하느님은 너에게 아주 많은 재능을 주셨구나. 너는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신이 주신 것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사름을 왜 나와 다른가? 그들의 모든 고통역시 신이 주신 것일까?

사촌동생 폴의 참혹한 죽음 역시 하느님이 주신 것인가? 또 사촌동샌 브랜든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고통과 상처를 주시고 얼굴에까지 흉터를 남겨 영원히 죽을 때까지 가져가라고 하신 것인가?또 열심히 기도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모든 고통을 그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겪은 사촌동생의 죽음이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격었던 것보다 더한 고통에 사달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한국에 살면서 많은 죽음을 접한다. 특히 올해 여름 경기도 씨랜드 수련원에서 뜨거운 불길에 타죽은 아이들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뿐인가. 삼풍백화점 사고 때 가족들에게 작별인사 한마디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마무걱정없이 학교에 갔다가 친구들에 총에 맞아죽는 미구 콜로라도 컬럼바인 고등학교의 착한학생들.

이 사람들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사랑이란 무엇인가. 만약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왜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물을 그토록 쉽고 간단하게 파괴하는가.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말아다.

사촌 폴의 죽음을 떠올리니 옛날 기억 하나가 생각난다.

미사 복사직을 맡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오후 수업을 받고 있는데 누가 교실 문을 두드렷다. 한 신부님이 들어오시더니 곧 성당에서 장례식이 있을텐데 일을 도울사람이 없다며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수업을 빠지고 장례식 일을 돕게 되었다.

미국의 장례식은 한국과 약간 다르다. 한국은 병원에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병원영안실로 옮겨 장례시을 치르지만 미국은 장례식만 전담하는 개인회사들이있다. 이 직원들이 사체를 병원에서 인수받아 썩지않게 방부처리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얼굴에 화장까지 해서 유리관에 안치한 뒤 성당으로 옮겨와 장례식을 치른다.

나는 그때 그런회사 사람들을 보면서 참 슬픈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들의 얼굴은 종일 굳어 있었으며 꼭 다문 입은 도무지 평생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넌데 그날, 성당에서 나는 그들을 좀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제단 옆문하나만 열면 그들이 잠시 대기하던 방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무언가 가지러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넥타이도 풀어제치고 와이셔츠 단추도 배까지 풀고,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다리는 길게 책상에 걸어놓은 뒤

농담 따먹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전날 밤 미식축구 얘기, 여자친구 얘기로 정신이 없었고 심지어 한쪽에서는 카드판까지 벌여놓고 있었다. 게다가 간혹 신부님들까지 가세해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가. 밖에서는 유족들이 거의 정신을 잃고 통곡을 하고 있느데……. 문 하나만 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장례식이 시작되자 그 직원들은 옷을 갖춰입고 나와서는 유족들 앞에서 흡사 자기 아들이 죽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슬픈표정을 지었다.

어린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어른들의 감정적 표현과 표정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 살면서 미소조차 한번 내보일 것 같지 않앗던 그 아저씨들이 커튼 뒤에서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수다를 떨면서 장례식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세상에서 가장 슬픈얼굴이 돼 버리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아니라 그런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좀 흥미로웠다.

나는 그때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인간이란 상황에 따라 혹은 개인적 필요에 따라 감정을 조종할 수 있는 동믈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전까지만 해도 죽음이란 누구의 것을 막론하고 무조건 슬픈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라는 느낌이었다. 그경험은 인간의 감정에대해, 그리고 죽음에대해 객곽화시켜 생각해볼 수있게 했다.

어쨋든 나는 그날 일을 도와준 대가로 신부님으로부터 무려 5달러( 당시로서는 어린이가 만져볼 수 있는 돈 치고는 큰 돈이었다)라는 거액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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