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4, 2011

내 마음의 글판

내 마음의 글판

정진홍의소프트파워

#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는 철 따라 글판이 내걸린다. 이른바 광화문 글판이다. 1991년 시작했으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우리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찾자”(91년 정초),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92년 정초),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94년 정초)는 식이 다소 딱딱한 교훈적 문구였다. 그나마도 연초에 한달 정도만 내걸렸다. 하지만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故 신용호 회장이 구호나 교훈이 아니라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글귀를 담자고 제안한 다음부터 광화문 글판은 뭇사람들의 마음의 글판이 됐다.

#”떠나라 앝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 부터.”은 나라가 외환위기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98 2광화문 글판에 오른 글귀다. 본래 고은 시인의 시 낯선 곳에서 따온 구절이었지만 시 자체가 주는 감동보다도 더 큰 울림이 있었다. 그해 9월까지 반년 넘게 내걸린 이 글귀는 감동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잖은 사람들의 인생마저 흔들고 바꿔 놓았다. 나 역시 그랬다.

# 20년 넘게 광화문 글판에 내걸린 글귀 중 사람들을 가장 많이 감동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감동을 순위 매긴다는 것이 어색한 면도 없진 않지만 얼마 전 시민 1600여 명이 참가한 온라인 투표 결과 1위는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였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의 글귀다. 사람 값이 추락하고 점점 더 하찮게 여겨지는 이 시대를 향해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잔잔하지만 호소력 있게 웅변한 결과이리라.

2위는 2000 5월에 게시됐던 고은 시인의 가운데의 한 구절인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였다. 그렇다 삶의 막다른 길앞에서도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희망만 있다면 새 길은 열린다. 반드시!

3위는 일본의 100세 된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의 글로 있잖아, 힌들다고 한숨 짓지마/ 햇살과 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였다. 세상이 제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내 편 돼줄 바람도 불고 햇살도 있으리란 기대와 희망을 결코 버리지 말라는 얘기다.

#굳이 순위를 메기지 않아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마음의 옷을 갈아입고 다가온 광화문 글판은 우리 안에 숨죽인 희망을 깨우며 다시 일으켜 도전하게 하고 이 거칠고 황량한 시대 속에서 위로 받게 했으며 끝끝내 끌어안고 사랑해야 함을 일깨워 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2004년 봄).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 봉오리인 것을”(2005년 봄).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2005년 여름).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오늘을 사랑하게 하소서(2006년 가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2007년 가을)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2006년 겨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2009년 겨울)……,

정말이지 구절 구절마다 기슴을 때린다.

# 며칠 전 광화문 글판에 새로 내걸린 글귀는 이렇다. “프른 바다에는 고래가 있어야지/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정승호 시인의 시 고래를 위하여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그 글판을 보면서 갑자기 겨울 바다로 달려가 고래를 보고 싶어졌다. 물론 그 바다에서 고래를 보기는 쉽지 않을 게다. 하지만 내 마음의 바다에서는 고래를 볼 수 있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희망, 열정의 고래를 나이 들어도 이것이 있으면 청년이고 청년일지라도 이것이 없으면 애늙은이 아니겠나!

논설위원 atombi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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