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17, 2011

고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얼룩백이 황소울음...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鄭芝鎔

정지용과 옥천

꿈엔등 잊힐리야, 지용의 옥천 구읍.

가슴에 묻어 둔 첫사랑은 다시 만나려 애쓰지 말 것, 사랑만이 아니다. 그리음의 장소도 가급적 가슴에만 담아둘 것.

고향 찾아가 보면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 해묵은 핏빝 벼술의 장닭과, 마당의 토란잎 아래 징그럽게 큰 두꺼비, 소리꾼의 구슬픈 만가 輓歌 가랑가랑 이어지던 동구, 홍시를 단 들판의 감나무가 서리를 맞고 서 있던 곳, 잠시 강에 나가 투망질을 하면 살진 붕어가 한 양동이씩이나 퍼올려지던 곳.

아무리 찾아가고 찾아가 보아도 우리네 그 옛 고향은 이미 현실의 지도외에는 없다.

정지용 문학을 잉태한 옥천으로 떠나면서도 나는 조마조마했다. 문학 속의 고향을 현실로 찾아가기 위해 신발끈을 매는 순간, 이미 상상의 공간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구나 이 몽당붓은 지용 시인의 시에 세 번씩이나 그림을 그려 오면서 시는 물론 시인과 그 고향마저도 거의 육친스럽게사랑해 버린 처지이다.

그뿐인가, 나와 한집에 사는 여자는 초야의 독서인인데 지용 시인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아들을 낳자 그 이름마저 지용이라고 지었을 정도였다. 같이 사는 남자에겐 한마디 상의없이.

하긴 지용과 그 시를 사무치게 좋아하는 이가 어찌 바단 나나 가인 家人 뿐 이갰는가 지용은 오랫도록 부를 수 없던 이름,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이름이었지만.

세간에은밀히 둘아다니던 〈향수〉는 박인수와 이동원의 노랫가락에 실려 가히 국민적 사랑을 받는 시의 노래가 되었다. 문학적 복권보다 수십 배 더 의미있는 것은 지용의 시가 정치적으로 묶이고 풀리는 것과 관계없이 국민에게 그초록이나 넓게 사랑받아 왔다는 점이다.

〈향수〉가 전파를 타고 흘러 도희사람의 메마른 가슴들을 적셔 주면서, 시인의 고향만은 어쩐지 거센 산업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옛 고향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어온 것이 사실이다.

시인이 ㅊ차마 꿈에ㅔ도 못 잊겠다고 했던 그곳으로 가면서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지용의 시를 좋아하는 것일까.

너나없이 정신적 고향상실 증후군에 빠져 있어서는 아닐까. 이 천박한 무한질주의 속도감에 편승해 있는 우리는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고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이 그립고 하늘의 성근별이 그립다.

지용 시의 맑은 고독과 정적, 바람소리 물소리에 위로받고 싶다. 특히 환 쟁이인 나는 지용의 시에서 그림과 색채를 본다. 무심히 아무 시편을 둘풔도 거기 그림이 있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유채 아닌 가슴으로 번져 오는 수묵의 세계, 고요한 수평이다.

…….무가 순돋아 파릇하고/… 三冬이 하이얗다 (인동차 忍冬茶)

……목화송이 같은 한 떨기 지난해 횐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호랑나비)

가인 家人의 책상 앞에는 오랫동안 마더 테레사와 정지용 시인의 흑백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검은 두루마기 단아한 30대 후반의 지용의 사진은 온통 정신으로 다가왔다. 이육사나 윤동주가 지사적 정신으로 온다면 지용은 선비적 정신으로 온다.

시인이 이처럼 정신으로 올진대 시인은 성직자만큼이나 어려운 직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신없이 욱체만살아 있는 이 새대에 나는 참으로 시인의 정신에 목마르다. 30년대 이 나라 문인들이 가졌던 그 청조하고 카랑카랑한 정신…. 그러나 번번히 느끼는 일이지만 시나 소설의 공간이 상상대로 남아있어 그 속에서 그 정신또한 고스란히 남아있어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옛 초등학교 여선생인의 앳된 모습이 서른해 뒤에도 그모습 그대로 있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무망하다. 더구나 가공할 시멘트가 문화재 보수의 만병통치약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 나라 현실위에서는 말이다.

어쨋든 부질없는 시도를 다시하여 오월 어느 날 경부고솟도로로 차를 몰아간다. 지용이 차마 꿈에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던 그 고향 옥천 구읍을 찾아서, 대전을 지나 옥천 인터첸지를 빠져나와서 수북리 방향으로 채 2 킬로미터도 들어오기 전 옥천 구읍에 닿게된다. 우리나라 여느 시골과 디름없다. 다만 고속도로가 너무 가까워 지용의 고요한 시 적 구도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충청의 소금강으로 불린던 물의 고장 水鄕, 금강 줄기인 군서천, 보청천에는 얼마전까지만해도 강바닥 자갈이 보이는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어름치가 살았다는 곳, 조선의 반가 班家같은 푸른 기와의 옥천 역사 驛舍가 저만치 보인다. 저 역에서 시인은 경성으로 가는 밤기차를 타곤 했을까. 역앞과 지용로에는 며칠 후(5 15,16)면 열릴 열한 번째 지용제의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백일장과 사물놀이 등으로 지용제는 옥천의 가장 큰 축제가 되었다. 오랜 세월 금지된 이름이었고 부를 수 없는 노래였던 지용과 그 시들은 이로써 지난 세월의 한을 얼마간 보상 받을 수 있을지.

비에 씻긴 죽향초등학교 운동장에 사금파리가 햇살을 되쪼고 있다. 저 하얀 운동장을 소년 지용이 걸어 오는 것만 같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배꼽 드러낸 채 풀섭을 달렸을 아이들은 자라 이제는 도회의 희색 빌딩 숲사이로 고단한 삶들이 쏘아놓은 화살들을 찾아 헤메고 있을까.

그가 다녔던 죽향초등학교를 돌아 찾아간 생가는 대문이 자물쇠로 채워져있다. 영화속에 세트처럼 생경한 집뒤로 웬 가요연습실 간판의 붉은 벽돌이 시야를 막는다.

집 앞 실개천은, 재앙이다. 시멘트로 뒤덮여 있다. 넓은 벌판도 얼룩백이 황소의 금빛울음도 없다. 시인이 우년시절 파아란 하늘빛을 좇으며 풀섭이스에 함초롬히 옷을 적시고 마다의 ㅁ명석에 누워 하늘에 성근별을 세었을 그 옥천은 이제 아니다. 그래도나는 실망치 않기로 한다. 『향수」는 이미 지도위의 특정공간이 아니라 우리들 미음에 상상의 공간으로 남아있는 것이기에.

지용의 생가터를 나와 금구리의 한식당에서 구수한 올갱이(다슬기) 국물과 부추김치로 맛깔스러운 점심을 먹는다. 보청천 맑은 물에서 건져왔다는 다슬기의 담백하면서도 쌉쌀한 국물과 부추김치는 흙과 개ㆍ울에서 자란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의 미긱을 사큼하게 일깨워준다. 흡사 고향시 「향수」처럼.

1920년대에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나와 언론사의 부간과 이화여자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이 조선의 지성은 그러나 민족 최대의 비극 625가 그 생애와 문학을 함께 앗기고 만다.

625가 나던 그 해 서울 집에서 모임에 잠간 얼굴만 보이시라는 청년들 권우를 받고 입던 모시적삼 그대로 따라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지용, 청록파의 스승이자 불과 스믈 두 살에 「향수」를 썼던 천재시인은 이처럼 어이없게 우리 곁을 떠나 버렸다.

전쟁중 서대문 형무소에서 평양감옥으로 이감 후 폭사당했다는 등 그의 최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이지러진 역사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상처내고 파괴해 버렸는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못난 역사가 개인에게 상처를 입힌 대표적인 경우다.

문학적 노선이나 신앙, 자별한 제자 사랑과 가족애 등으로 보아 강제 납북이 문명했지만 월북문인으로 분류되어 그와 그의 문학은 해금까지 길고 지리한 세월동안 지하에 묶이는 수난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옥천 구읍을 떠나오기전, 하늘에는 성근별이 떠올랐다. 창 너머로는 흐ㅡ릿한 저녁상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거리는가난한 살림의 모습들이 어른 거린다.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는국도로 방향을 잡는다. 믄득 시인이 떠나버린 이 고장에는 누가 남아 그 시인이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한 이 고향을 지켜줄까 하는 생각이 들엇다.

스년전 이란의 테헤란에서 광야길응 밤새워 달려 시라즈라는 곳에 닿았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이란인여행안내인은 시라즈가 시와 장미의 도시라고, 이란을 대표하는 두 시인이 여기서 태어났노라고, 시라즈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누누히 설명햇다.

그 사막의 도시에서도 시는 그토록 자랑이 되었다. 이곳에도 누가있어 옥천은 이 나라의 위대한 시인을 낳은 땅 이라고 그렇게 증언해줄지ㆍㆍㆍ

선큼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는 어느새 성근별이 떠오른다. 그리고 보니 저 밤하늘 만은 그래도 지용의 시적 공간으로 남아잇는 셈이다. 초여름, 옥천의 바람에는 향기가 묻어있다. 비로서 지용시의 구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정지용(1902~~)

1902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출생한 시인은 휘문고보와 일본동지사대학 영문과를 마쳣으며 이화여전 교수를 자내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그는 소설의 이태준과 함께 격조높은 시어와 빼어난 감성으로 우리시단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후에 월북시인으로 오인되어 38년동안이나 그의 문학이 공개되지 못했다. 1988년 해금과 함께 『정지용 전집』이 간행되고 지용회와 지용문화상이 제정되었다.

그의 고향 옥천에서는 해마다 지용제가 열린다. 전국 백일장과 지용로 달리기, 연주회, 미술, 사진, 공예 작품전과 문학강좌, 강변 페스티발 등 핵사가 다채롭다.

향수 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희돌아 마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_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바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및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뿔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구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7. 3 朝鮮之光65호에 발표)

지용시인의 남과 북에서의 복권

북한에서 방송기자로 활동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는 지용시인의 3

구인 求寅,65 . 625당시 배재중학생 이었으나 625때 행방불명 되었던 사람이다.

구인씨는 통일신보 1995 10 2일자의 기고문에서 김정일 장군께서 일제시기에 진보적 작품을 창작한 몇몇작가와 함께 저의 아버지 정지용 이름을 드시면서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공정하게 평가하는 크나큰 온정을 베풀어주시었다고고 썼다.

단 이후 남북 양쪽의 문학사에서 그 이름이 삭제되었다가 실로 반세기만에 남에(1988)이어 북에서도 정지용 시와 시인의 이름이 복권된 것이다. 이 기고문을 통해 죽은 줄로 알았던 동생 구인씨의 소식을 들은 정시인의 장남 구관, 70 씨는 꿈만 같다고 했으나, 이를 빌미로 새삼 또다시 일각에서 월북설등이 제기될까 우려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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