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27, 2011

만행 8 예일 대학 입학

만행 8 예일 대학 입학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의 영적인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또 하나 부담이 있었는데 그것은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처럼 명문대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우리 부모님은 워낙 자식들 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는 분들이라 학교 실적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 철학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각종글짓기 대회에나가 상도 많이 탓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갖게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수도사혹은 교수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했지만 나는 그 분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진리와 나의 존재에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1993 9, 드디어 예일 대학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매우 기뻐 하셨다. 입학식날 아버지는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행사가 끝나고 학교앞 매장에 들려 예일 대학 마크가 찍힌 것은 모조리 사주셨을 정도였다. 티셔츠, 가방, 공책, 손수건, 하다못해 냅킨까지 명망있는 교수님들과 뛰어난 학생들, 미국, 아니 세계지성의 요람인 예일대학에서 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다니, 나는 꿈과 기대에 부풀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인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을 비교하고 넘어가 보자. 하버드나 예일이나 모두 본래 신학대학에서 출발했다. 하버드가 먼저 세워졌는데 1636년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른바 종교난민들이 건립했다. 처음에는 신대륙에 포교할 목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후 하버드는 세속화되었다. 초반에는 신학만 가르쳤으나 점점 철학, 수학이 교과과목으로 도입되었고, 여기에 성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과학까지 도입되었다. 그러자 일부 보수적인 목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하버드가 본래의 설립목적에서 벗어나고 있다며 새로운 대학의 신설을 주창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예일대학이다. 예일은 하버드보다 60여 년 뒤인 1701년에 설립되었다.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역사는 미국의 독립(1794)보다 훨씬 전의 일이니 미국역사보다도 더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보스턴 바로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였던 뉴헤이븐에 예일 대학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예일역사는 성장하면서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가르침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신학대학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일반 대학으로 성장했다. 읿부 목사들이 또다시 반발했다. 그리고 역시 새로운 대학의 신설을 요구했다. 그렇게 만든 대학이 프린스턴이다.

어쨋든 하버드와 예일대학 이야기로 다시 넘어오면, 우선 규모면에서는 하버드가 더 크다. 건물도 큭고 학생들도 더 많다. 그런데 두 학교는 교육방싱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하버드가 대학원 교육 중심이라면 예일은 학부교육 중심이다. 하버드는 학부강의를 안하는 교수들도 있는데 예일에서는 아주명망있는 교수님이라도 학부강의를 해야한다. 또한 하버드 학부강의는 주로 조교들이 맡아 한다.

하버드는 크기 때문에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우선많다. 예를 들어 헨리 키신저갗은 유명한 강사의 강의가 있는 날에는 강의실이 터질 듯 가득찬다..그러나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도 강사을 만날 수 없다. 최소한 대학원 학생이나 박사과정 학생정도는 되어야 개인적으로 강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일은 완전히 다르다. 우선 학생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 입장에서는 보다 집중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공부잘하는 미국학생들은 학부는 예일에서 대학원은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싶어한다.

! 나의 대학생활 4.

대학생활은 나의 삶에 가장 큰 자그과 영향과 충격을 가져다준 기간이었다. 그리하여 더욱더 치열하게 나의 매면으로 돌아홀 수 있는 수많은 경험을 하게해준 기간이었다. 먼저 수업방법부터 파격적이었다. 예일대학의 모든수업은 모두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교스님들은 교과서 내용을 암기하거나 당신들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경험과 결합되어 학생을 각자의 시각으로 소화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철학이나 문학수업에서 플라톤, 세잇스피어, 소크라테스, T.S 엘리엇, 소펜하우어 등의 삶과 사상을 배운다. 두 번정도 수업 후 세번째 시간에는 소그릅으로 나뉘어 학생들끼리 세미나를 한다. 세미나에서 우리들은 각자배운내용에 대해 서로 질문하고 토론한다. 세미나가 끝나면 강의 내용을 우리 것으로 완전히 소화할 수 있게된다.

철학자나 작가가 태어난 연도를 외우게 한다든지 그들의 저작내용을 외운다든지 하는 교육이 절대 아니다. 교수들 역시 암기위주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높은 점수를 주지않는다. 물론 암기를 하는 것도 뛰어난 능력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교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것이다.

그래서 예일에서는 모든수업에서 에세이를 아주 중요한 과제로 강조한다. 나는 학교다닐 때 수없이 많은 에세이 과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흰머리가 다 날 정도였다.

우리;는 적어도 1주일에 두 번 정도는 A4 용지로 10페이지 정도의 리포트를 제출해야 한다. 제목도 내가 스스로 정해야하고 수업에서 배운내용도 분석하고 결론도 내가 내려야 한다. 교수님들은 학생이 얼마나 주제에 대한 팩트fack를 많이 알고 있는가에 따라 점수를 메기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얼마나 수업내용을 잘 소화하고 그들 자신의 독창적인 시각을 표현하는가를 중시한다. 그러한 예일의 수업방식은 탐구하기 좋아하고 과학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나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1학년 1학기 때 나는 〈영문학 125〉 강의를 수강했다. 〈영문학 125〉란 예일 대학이 세워진 해부터 매년 개설된 강의로 노교수님들이 영문학 고전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예일대학에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강의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수업에 첫번째로 제출한 에세이 과제에서 C를 받고 충격을 받았다. 항상 A만 받아온 나에게는 평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예일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나는 생각을 좀더 깊이하고 고민을 좀더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 공부하는게 만만치 않구나.

차츰 학교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나는 학교와 학교주변을 둘러싼 이상한 부조화를 발견했다. 예일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이다. 고딕형식의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아름다운 켐퍼스, 세계적으로 내노라하는 수재들이 모이는 곳, 그리고 헌신과 열정을 다해 가르티는 교수님들.

그러나 대학 담장만 벗어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예일대학은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무유한 코넥티컷 주에 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예일대학이 있는도시 뉴헤이븐은 미국 내에서 일곱번째로 가난한 도시다. 대학정문을 나와 길 하나만 건너면 포화를 맞은 듯 쓰러져 가는 건물, 또는 낡은 텐트나 판자집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흑인들이다 우리가 따뜻한 기숙사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침을 튀겨가며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모순적 환경은 나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왜 이같은 모순적 상황이 생겨났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미국 역사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노예해방이 이루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미국남부의 목화농장에서 일하던 흑인노예들이 산업이 발달해 공장이 밀집되어있는 미국 북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자리를 찾기위해 디트로이트, 인디에나폴리스, 뉴욕, 뉴헤이븐, 보스턴, 뉴아크 같은 대도시로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세계인들은 전쟁의 참화에 신음했지만 미국의 공장들은 무기와 생필품을 만들어 내느라 쉴새없이 돌아갔다.

점점 더 많은 흑인들이 북부로 몰려들었고 더 나은 삶과 기회를 찾아 전세계 사람들의 미국으로 이민이 계속되었다. 도시는 복잡해졌다. 사람들로 붐볐고 공해와 소음이 늘어갔다. 그러자 백인들이 도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집을 교외로 옮기고 직장만 도시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다국적 기업공장들이 보다싼 노동력을 찾아 이시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주로 전문직업에 종사하던 백인들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흑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집을 교외로 옮긴 백인들은 이참에 직장까지 교외로 옮겼다. 그들은 새로운 곳에서 하이테크 회사를 만들고 컴퓨터 관련공장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흑인들은 그야말로 시내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백인들의 도시탈출은, 비지니스의 도시탈출, 교육의 도시탈출이 되었다. 왜냐하면 좋은 학교의 우수한 선생님들도 다 같이 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부자 백인들이 도시를 떠나자 세금이 줄었고 도시는 가난해졌다. 경제, 정치, 교육등 모든 힘이 도시를 떠난 것이다. 도시는 완전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배경의 결과가 바로 뉴헤에븐의 슬럼이었다.

그곳에는 오직 세상에대한 분노와 적의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밤에는 온갖범죄를 저지르고다녀 거리에 어둠이내래면 아예 학교 바깥출입을 하지않는 게 관례였다.밤거리를 다니다.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고 남학생들이 지감을 털리고 칼에 찔렸다는 소문들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사정은 더욱심각해져 심지어 켐퍼스 안에까지 강도들이 난입, 밤늦게 켐퍼스안 교회에 가던 대학후배 한 명이 흑인 강도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나는 졸업후에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빈민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투쟁이었다. 우리가 좋은 건물, 좋은 환경에서 이른바 진리를 추구한다며 한가롭게 논쟁할 때 그들은 바로 길 하나 건너편에서 삶에대한 한오라기 희망이나 목적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신입생 때 기숙사에서 살았다. 예일대학 기숙사는 중세 요새처럼 디자인되어있다. 둘레에는 물이 흐르는 해자 垓子가 둘러쳐져 있었다. 예일대학 캠퍼스 전체가 그렇지만 기숙사에 들어서면 마치 유럽의 멋스런 중세 건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다.

그런데 기숙사 둘레에는 아주 높은 담장이 쳐져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나중에 그 담장이 어떤 세계를 가르는경계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미치 대륙과 대륙을 나누는 건널 수 없는 바다 같기도 했고 감히 건너가는 것을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할 어떤 금기 같있다. 뉴저지 주 중신층 가정에서 태어나 고만고만한 사람들을 만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예일대학의 주변환경은 충격이었다. 나야말로 어떤 경계안에 갇혀 좁은 세상만보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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