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5, 2012

최상승선

최상승선•最上乘禪 Utmost Vehicle Zen

의리선;義理禪 Theoretical Zen
모양이 공이며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여래선 如來禪 Tathagata Zen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無色 無空 , Ne form, no emptiness
조사선 祖師禪 Ptriarchal Zen
모양은 모양이고, 공함도 공함이다.
色卽是色 空卽是空 Form is form, Emptiness is emptiness.

의리선 義理禪: 모양이 공이며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의리선은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론적•개념적 선이다. 모양과 공함의 본질에 대한 단순히 지식적인 이론이다. '모양ㅇ이 공하며 공함이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것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게 "여기 연필이 있다. 당신과 이 연필이 같은가, 틀린가?"하고 물으면 그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같다."
우주 안의 본질이란 모두 똑같다고 알고 있다.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기 땜문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경지가 아니다. 여전히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화계사로 나를 찾아왔다.
"스승님, 제가 깨달았읍니다."
"오, 그래, 무엇을 깨달았느냐?"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읍니다."
"아주 훌륭하구나, 그런데 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단 말이냐?"
"누군 누굽니까, 바로 접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팡이로 어깨를 딱 하고 내리쳤다.
"아이쿠."
순간 제자는 입이 탁 막혀서 대답을 못했다.
물론 그는 원가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에 대한 어떤것을 이해한 것 뿐이다. 이것이 의리선, 즉 이론적 선, 개념적 선이다. 모양이 공하고 공함이 모양이다라는 것이 단지 매마른 인식(dry cognition)에 머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구할 수 없다.
어느 날 또 한 제자가 갑자기 찾아와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큰스님, 저는 똑바로 서 있는 겁니까, 아니면 거꾸로 서있는 겁니까?"
"무슨 말이냐?"
"지구는 둥급니다. 제가 여기 서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 서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거꾸로 서있는게 아닙니까. 그들이 바로 서 있으면 제가 거꾸로 서 있는 것이고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겅야 네가 더 잘 알것아니냐, 너는 바로 섰다고 생각하느냐, 거꾸로 서 있다고 생각하느냐?"
"모양이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입니다. 바로 서 있는 것이 거꾸로 이고 거꾸로가 바로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알았느냐?"
"제 마음이 알았읍니다."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내게 보여달라."
제자는 순간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어느 날 그는 버스를 타고 가다 지게꾼이 지게를 받쳐놓고 있는데, 옆사람이 잘못해 작대기를 발로 차 지게가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순간 그에게는 큰 의문이 생겼고, 상사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앞서 내게 물었던 생각에 까지 미친 것이다. 지구는 둥근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똑바로 서 있을까, 어린아이 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의문이었다. 머릿속의 혼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 제자는 그 일을 겪은 후 불교를 접했고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을 들었다. 모양도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면, 바로 서 있는 게 거꾸로 서 있는 것이고, 거꾸로 서 있는 것이 바로 서 있는것이 아닌가? 그는 선을 단지 개념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말에 집착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개념적인 깨달음은 나쁜 병과 같다.
여래선 [如來禪] :모양도 없고 공도 없다 무색무공[無色無空]
«열반경»에서는 '모든 형태가 무상하다. 이것이 나타남과 사라짐의 법칙이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지는 정적의 상태가 더없는 기쁨의 경지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마음속에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없으면 마음은 완벽한 정적이고 축복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이다.
오직 모를 뿐.
여기에 연필이 있다. 당신과 이 연필이 같은가, 다른가? '같다' 라고 해도 나는 당신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때릴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탕!"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의리선에서는 '같다'가 맞는 답이겠지 여래선에서는 그것이 답이 아니다. 여래선에서는 이 '마음' 바로 그 지점이 포인트다 "탕!"
우리는 말로 그것을 표현랗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처님도 없고, 하느님도 없고, 법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고, 빛도, 어둠도 없고, 하늘도 없고, 딸도 없고, 같은것도 없고, 다른것도 없다. "탕!" 이것이 진짜 공한 마음이다. "탕!" 공한 마음은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이 아니다. 이것이 여래선으로서 열반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탕!" 말과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제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보면 항상 '할'이라고 소리를 쳤다. 덕산 스님은 항상 방망이로 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구지 스님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런 행동들은 아주 높은 경지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본성 혹은 절대를 보여주기 위해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물이 본질적으로 똑같은 실체이고 이 실체에는 이름도 모양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포함하고 있지도 않다. 단지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것 뿐이다. "탕!" 연필이 너와 같으냐, 다르냐 했을 때 '같다'는 말도 단지 생각일 뿐이고 메마른 이해일 뿐이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연필과 내가 같으냐, 다르냐' 라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한다. "탕!" 말이나 생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래선이다.
조사선 祖師禪 :모양은 모양이고 공은 공이다.色卽是色 空卽是空
우주 만물이 똑같은 실체이므로 실체에는 모양도, 이름도 없다. "탕!" 그러나 이 모든 것이는 또한 특정한 기능(用, function)이 있다. 모든존재는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존재이게끔 하는 어떤 기능에 의해 존재 가치가 결정된다. 오로지 그 존재가 지니는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순간순간 사물의 올바른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간순간 '바른 기능'을 깨닫는 것이 조사선이다.
조사선은 우리 마음과 우주에 대한 올바른 '기능'에 대한 통찰이다. 이것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스타일에서는 여여진리 (如如眞理, truth like this)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좀더 완벽하게 말하면 즉여진리 (卽如眞理, truth just like this)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가 "무엇이 부청입니까?" 하고 물으면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많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설탕은 달다, 소금은 짜다 등등 수없이 많다. 법,마음, 자연, 하느님, 자아, 참 자아, 절대, 에너지, 의식, 실체 모든것이 부처이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 아주 넓다, 모든것이 진리이며 모든것이 부처이다. 형이상학적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신중하고 명확하게 답해야만 하는 다양한 종류의 일상에 부딪힌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번영이나 섦명보다는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상황은 완벽한 기능이나 행동을 요구한다.
여기 흰 컵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이것의 본질이 무엇이냐?" 만약 당신이 "컵이다"라고 얘기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컵이 아니라고 하면 공함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만물은 하나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답할 수도 있다. "하늘은 프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배고플 때 먹는다" 등등. 그렇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배고플 때 먹는다. 이 모든 표현이 어떤 우주적 진실의 표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좀 느닷없기도 하다. 이 대답들은 그 순간, 그 상황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컵의 본질이 무엇이냐 했을 때 제대로 답을 하고 싶으면 그냥 컵을 들어 안에있는 물을 마시면 된다 아주 쉽다. 한 질문에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 있다. 그 답은 바로 실용의 세계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기능이다. 계속

숭산 행원 대종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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