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22, 2012

견성성불

견성성불· 見性成佛 See Your True Nature Become Buddha

버들은 푸르고 꽃은 볽다 柳綠花紅 The willow id green, the flowers are red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烏黑鷺白 The crows are black, the cranes are white
보이는가? 들리는가? 還見ㅁ 還聞ㅁ Do you see? Do you hear ?

견성성불이란 자기의 본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본성품이라 무엇인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것이 부처님의 본성이다. 모든것이 자기의 본성품이다.
마음과 우주가 일체라면 자기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꽃은 붉으며, 까마귀는 검고 백로는 희다. 이벽은 흰색이다. 책상보는 황색이다. 그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방 안은 밝게 빛나고 밖은 어둡다.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어떤 생각도 하지말라. 그러면 우주는 이미 너의 것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다는 것은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비춰질 뿐이다. 붉은 공을 비추면 붉은 것이 비춰지고 하얀 공을 바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밖에서 개가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본성이고 진리이고 불성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하고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아주 명쾌하다.

고칙공안· 古則公案 Kong an and All Cases
1천 7백 공안 千七百公案 (拈頌)
One thousand seven hundred kong-ans 조계종曹溪宗

벽암록 碧岩錄 The Pi-yen Lu 百則 one hundred cases 임제종 臨濟宗
종용록 從容錄 The Tsung-jung Lu 백측 one hundred cases 조동종 曹洞宗
무문관 無門關 The Wu-men-kuan 48 칙 forty-eight cases 諸般

관청에서 띄우는 공문서 같은 중요한 서류에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이 있다. 서류의 진본과 복사본이 함께 섞어있어 구별해내기 힘들때 서류에 찍힌 붉은 도장을 보면된다. 서류의 진위여부를 알려면 도장과 맞춰보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입문한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이다. 공안 수행이라고도 하는데, 공부가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 제자들이 스승에게 와서 자신이 이해한 한쪽을 스승이 제시한는 한쪽과 맞추는 것이다. 공안은 일종의 시험문제인 동시에 자기 성찰에 좋은 도구이다. 스승과 학생이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전법[傳法]'이라고 한다.
본래 불교에는 공안 수행이 없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만물이 무상하다고 가르쳤다. 욕심, 분노, 무지가 고통을 만들고 이 모든것들이 '생각'에서 나온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어떤글도, 토론도 필요 없었고 오직 禪 수행만이 있을 뿐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은 여러차례모임을 통해 부처님 생전의 가르침을 적어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제자들은 갑론을박을 벌렸다. "내가 들은 게 옳다." "아니다. 그때 내 기억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이러다 보니 부처님 밀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천5백 년 전에 인도의 달마 대사는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으로 넘어왔다. 불교는 그전부터 이미 3백여 년 동안 중국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학문적이고 복을 비는 기복 불교였고, 禪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달마 대사는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똑바로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벽하는 달마 대사 앞에 혜가[慧可]라는 이름의 스님이 찾아왔다.
"대사님, 부디 저를 가르쳐주십시요."
"내가 진리를 얘기한다 해도 그대는 나를 믿지 않을 것이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혜가는 대뜸 그 자링에서 칼로 자기 팔을 잘랐다. 그러나 달마 대사는 한 치의 놀람도, 움직임도 없었다. 혜가는 아픔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ㅂ부디 저의 마음을 편히 해주십시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면 편히 해주겠다.
"마음이 어디있는지 찾을 수 없읍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를 이은 2조가 된다. 바야흐로 禪의 가르침이 달마 대사로 부터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중국 선불교[禪佛敎] 역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분이 6조 혜능 대사이다. 혜능은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과도 없다. 그러니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어느 날 길을걷던 그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두고 다투는 두 명의 승려와 마주쳤다.
"지금 펄럭이는 것은 깃발이다."
"아니다, 바람이다."
두 승려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주장이 옳다고 우기고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지나가는 혜능 대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혜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부끼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바로 너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서부터 온갖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또 이런 질문들이 각자 수행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또 다른 형태로 나오기 시작했다. 한 제자가 혜능 대사를 찾아왔다.
혜능은 "너는 어디서 왔느냐. 무엇이 여기에 온것이냐?"라고 물었다. 제자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내가 무엇인가?'라는 공안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6년 동안 부처님이 수행하면서 물었던 똑같은 질문이다. 부처님, 달마 대사, 6조 혜능 대사 모두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것이 공안수행의 원조이다. 6조 혜능 대사가 나타날 때까지 따로 불경을 가르치는 교파가 없었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있었다. 혜능은 많은 위대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큰 비가 내려야 나무들도 크고 버섯들도 잘 자란다. 제자들은 각각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혜능의 가르침을 꽃피웠다.

이렇게 해서 뻗어나온것이 다섯가지 선의 갈래이다. 임제선사의 선풍을 이은 제자들이 임제종[臨濟宗]을 만들고 법언선사의 제자들은 법안종[法眼宗을 만들고, 운문선사의 제자들은 운문종[雲門宗]을 만들고, 위산, 앙산의 문하에서는 위앙종[僞仰宗]이, 조산·동산의 문하에서는 조동종[曹洞宗]이 나왔다. 이것이 중국 선종의 5가[家]이다
이들은 각기 서로다른 면을 간조하고 있지만 뼈대는 같다. 禪은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 번성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깨달음의 경험, 법문들이 쓰여져서 문집으로 만들어졌다. 선사들의 경험이 제자들의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어떤 제자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스승은 그에게 앞선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험들 중 한 사례를 내놓고 묻는다. 진정 깨달음을 얻은 승려라면 즉각적으로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 했을 것이다. 만약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공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스승은 법을 전해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람이 운문선사에게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운문스님은 '마른 똥막대기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스승이 이렇게 물었을 때 제자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면 공안의 참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공안수행의 본질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마조[馬祖]선사는 "무엇이 부처입니까?"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몇 년 후에는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옛날 공안들은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도 지적인 요소들과 수많은 비유들이 끼어들어 말싸움이나 법문 논쟁으로까지 나타났다. 이러다 보니 선은 일반사람들에게 점점 더 신비한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나무 닭이 운다." "돌사자가 하늘을 난다." "토끼 뿔을 보았느냐?" 같은 공안들은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뜬금없는 얘기일 것이다. 상대방이 황당한 대답을 할 때 '선문답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선문답'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얘기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이러다 보니 禪 수행은 점점 일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수행이 되어버렸다.
어쨋든 공안에 나온 말들이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춰진 의미를 찾아 진땀을 흘려야 했다. "불교가 무엇이냐?" 고 물을 때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자란다"라는 식으로 대답하는것이다. 이런 형태는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비록 선문답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고, 서로다른 禪의 전통이 때로 서로다른 공안들을 사용한다해도 진리는 하나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인 것이다.
공안들을 어떻게 써서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그들을 도울 것인가, 단지 이것만이 핵심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의 생각하고 따지고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말과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것은 낚시대에 미끼를 다는 것과 같았다. 물고기가 너무 배가 고프면 미끼와 함께 바늘까지 먹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서 생각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 미끼는 잡되 바늘은 잡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운 물고기는 결코 바늘을 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문답에 나오는 말이 논리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안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생각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을 치료하기위한 것일 뿐이다.
공안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조주의 '무'[無]'자 공안이다. 어느 날 한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개에게도 물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조주선사는 '무[無]', 즉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니, 만물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실까. 조주선사가 깨달음이 앝아 실수를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조주는 제자의 분별하는 마음을 치료하기위해 일부러 실언을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 제자 역시 부처님의 말, 책에 기록된 말에만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도 부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마음속에 이것 혹은 저것, 예스 혹은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들만이 불성을 가지고 있고 다른 것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을 구분하고 따지는 이원론적인 발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조주는 그 마음을 바로 알아보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공안은 아주 유명해서 오늘 날 까지 계속 희자되고 있다.
"왜 조주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왜------. 부처님이 옳은가, 조주선사가 맞는가, 잘 모르겠다."
조중의 '무'자 공안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치료해 주는 '말과 단어로 된 약'이다. 이것은 아주 유명한 공안이다. 스승이 이 공안을 줄 때 우리는 조주선사의 '실수'를 사용하여 그것을 비로 잡는다. 그러나 실제 이 공안은 '실수'인것도, 실수가 아닌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 이 공안은 상식에 맞지않는다. 조주 선사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끊으면, 집착을 끊으면 이공안은 맑다. 틀린것도 맞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공안의 목적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공안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오늘 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무'자 공안에 집착해 있다. 이것저것, 예스 노, 불성 혹은 불성아닌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해 있다.
조주선사는 이공안을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약을 먹는 환자가 약에 집착해 있으면 본래 가진 병보다 훨씬 더 나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현재 여러불교 종파는 각각의 불교전총에 따라 다양한 공안들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1천 7백 가지를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선문염송[禪文捻頌]이라고 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이것을 禪의 지침서로 쓰고있다. 벽암록[碧巖錄]에서는 1백칙을 들고 있는데, 현재 임제종에서 쓰고 있다. 종용록[從容錄]에서도 1백칙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조동종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무문관[無門關]에서는 48칙을 쓰고 있는데 이는 여러선종에서 함께 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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