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3, 2012

좌선

좌선· 坐禪 Sitting in Zen Meditation

조신[調身] To control body
조식[調息] Breathing
조심[調心] Mind

좌선[坐禪] Sitting in meditation
행선[行禪] Walking Zen
와선[臥禪] Lying-down Zen

참선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참선할 때 우리는 몸, 호흡, 마음을 통제할 어떤 기술들을 사용해서 모든 생각을 끊고 본성을 깨닫는다. 참선하면 흔히 방바닥에 양다리를 반쯤 혹은 완전히 꼬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자세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참선은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매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앉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다. 어떤상황, 조건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자세를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으면 먼저 몸을 지배해야만 한다. 앉아있는 동안 일정하게 어떤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능하면 다리는 꼬고 등과 머리는 일직선에 놓는다. 눈은 반쯤만 열고 45도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손은 단전앞에놓고 부처님 자세로 오른손을 왼손 밑바닥에 깔고 양 엄지손가락을 맞닿아 둥글게 만든다. 그리고 배꼽아래 단전으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한다.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쉰다.

호흡을 통제할 수 있으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쉼에 따라 생각도 천천히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다. 에너지가 천천히 배꼽아래 단전에 모이기 시작하면 생각도 덜 복잡해진다. 참선 수행에서 마음을 두는 곳은 항상 우리의 중심, 즉 단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너지가 머리에 있거나 가슴에 모여있다. 머리는 지성의 중심이고 가슴은 감정의 중심이다. 머리에 중심을 두는 것은 생각을 복잡하게 하고 에너지를 올라가게 한다. 생각을 머리와 가슴에서 내려놓아라. 단전의 의지와 행동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천천히 단전에 모여 안정되면 생각과 감정도 맑아진다.

그러나 참선이 무조건 이렇게 앉아서 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순간순간 우주처럼 맑으면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참선이다. 운전하는 것도, 테니스를 치는것도 다 참선 수행이다. 모든것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 있는 그대로 맑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직 모를 뿐'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생각을 끊는다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우리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하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다. 안과 밖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운전할때 그냥 운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운전 참선이다. 먹을 때 그냥 먹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운전하거나 먹을 때 오로지 그것만 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마음은 여기저기를 떠돈다. 여자 친구생각, 남편, 마누라, 시어머니와 싸운 생각, 직장에서 해고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마음은 제주도에서 부터 백두산까지 야생마처럼 떠돌아 다닌다. 입으로는 음식을 씹고 있지만 생각은 천리를 달린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그것이 바로 생각에대한 집착이며 고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순간순간 생각에 매이지 않고 그냥 할 때 모든 것은 이미 참선 수행이다.

사람들 중에는 몸이 불편해서 참선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허리 디스크 때문에 5분이상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남들처럼 90일 참선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나는 물론 허락했다. 그는 누워서 수행을 했다. 다른사람들이 모두 벽을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동안 그는 천장을 처다보며 참선수행을 했다. 다만 나와 면담할 때만 몇분간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뒤 다시 선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참선수행이란 이처럼 꼭 반듯하게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앉아 있을 수 없다면 의자를 써도 좋고 서서해도 좋다. 어떤 자세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선수행의 진정한 자세이다.

대오· 大悟 The Great Enlightenment
천지지천천지전 天地地天天地轉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 하늘과 땅이 함께 구른다.
Sky is earth, earth is sky, sky and earth revolve

수산산수수산공 水山山水水山空
물이산이고 산이물이며, 물과산이 다 비었다.
Water is mountain, mountain is water, water and mountain are empty.

천지지지하증전 天天地地何曽轉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언제 일찍이 구른 바가 있었던가?
Sky is sky, earth is earth, when did they ever revolve?

산산수수각완연 山山水水各琓然
산은산, 물은 물, 각기 완연하여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다.
Mountain is mountain, water is water, earth is already complete.

대오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얻는것이다. 자유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를 깨달아 대보살행[大菩薩行]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난 우리가 매 순간 진리속에서 얹제나 중생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 말은 너무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대붑분 사람들은 그저 흘려듣기 쉽다. 그
러나 실제 우리는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각자 상황에 집착애 욕심, 분노, 무명을 갖는다. 생각이란 언제나 변하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이 변하는 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괴로워 한다. 지니리를 따르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번씩 바뀌는 생각을 쫓기 때문에 진리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다.
선불교는 무명과 방황의 세계에서 걸어나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자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그 점을 깨닫고 싶으면 먼저 각자의 견해, 조건, 상황을 놓아버려야 한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다음 단계는 실천이다. 순간순간 올바른 상황, 상황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인식해 찰라마다 올바른 실천을 하느것이다. 이것이 '대오[大悟]' , 말 그대로 큰 깨달음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깨달아 이 세상을 돕느냐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그러나 머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 모양이 '공'하고 '공'이 모양이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마음(thinking mind)' 으로 지구가 하늘이고 하늘이 지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이다. 같지만 또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모든것은 언제나 움직이니다. 돌고돈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모든것이 공허하므로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요",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요------"이다.

그러나 이 관점 역시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여전히 생각일 뿐이다. 여전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상태이므로 개념적인 상태이며,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완벽한 공에서는 가는것도, 오는 것도 없다. "하늘은 단지 하늘이고 땅은 그저 땅일 뿐"이다. 우리늬 마음은 변하지 않고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것도 없다. 이것이 완벽한 정적의 상태이다.
진정한 공을 깨달음에따라 우리의 마음은 완전하게 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있게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늘이 하늘이고 땅은 땅이다." 이것이 또 다른 이름의 순간의 세계이다. 찰라찰라가 다름아닌 세계가 진리이며 실상의 세계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기능이 없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옳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진리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이 진리를 통해 나와 중생, 이 세계를 연결시킬 것인가.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답은 아주 쉽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것 중의 하나는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승에 집착해서는 안 되지만, 에리한 눈을 가진 선사를 찾을 때 까지 이 스승, 저 스승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지만 첫눈에 스승을 알아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여러 해 선 수행을하면서 많은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곧 어떤것이 옳고 그른지 알게 될 것이다. 섩탕을 맛보지 않으면 단맛을 알수 없고, 소금을 맛보지 않으면 짠맛을 모른다. 아무도 당신의 경험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당신 스스로 해야한다.

많은 스승들은 자기들이 깨달았다고 주장하지만 깨달음애도 수준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이 있고 본래 깨달음이 있고 마지막 깨달음이 있다. 첫 번째 깨달음은 '공'을, 본래 깨달음은 '여여[如如]' 를, 마지막 깨달음은 '즉여[卽如]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 사과가 하나있다. 우리가 그것을 사과라고 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과가 이니라고 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과인가, 아닌가. 만약 여러분이 바닥을 "탕!" 치거나 '할' 하고 소리치면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이다. 혹은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거나 '사과는 붉고 벽은 하얗다'라고 하면 '여여[如如]'의 대답을 준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한 입 깨물어 먹으면 바로 '즉여[卽如]'가 된다. 깨달음의 수준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이다.

'즉여' 야 말로 완전한 대답이다. 형이학상적인 진리가 아니다. 예리한 눈을 가진 선사는 이 세가지 깨달음을 구별해낼 줄 안다. 자유롭게 가르침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깨달음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깨달음'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나는 깨닫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선 수행을 한다. 부처님은 '모든것은 이미 깨달았다'고 설파했다.

한 유명한 선사의 말대로 '생각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을 가지면 어떤 행동도 바로 '즉여'가 된다. 깨달음을 얻었더고 말하는 것조차 혹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조차 생각이고 욕심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만든다.

남전 선사는 "평상심이 도" 라고 말했다. 매일매일의 마음이 이미 대오[大悟]이다. 뭔가 다른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뱀을 그리면서 다리를 그려넣으려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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