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3, 2012

조사선

조사선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 시계가 있다. 이것을 시계라고 말하면 이름과 모양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시계가 아니라고 하면 공함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또 우주의 본질은 하나이므로 '시계는 나무에고 나무가 시계이다'라고 답할수도 있다. 이것은 의리선과 관련된, 단지 개념적인 설명이다. 아니면 '구름이 희색이다'. '눈동자가 검다'와같이 대답할 수도있다. 물론 이들 역시 어떤 진실의 영역을 표현한다. 하지만 조사선에서 이런 대답들은 옳은 것이 아니다.
한 개의 질문에는 한 개의 대답만이 있다. 시계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시계를 보면된다. 그리고 '아, 지금이 2시 15분 이구나' 하고 답하면 된다. 그것이 조사선이다. 그것이 조사선이다. 아주 쉽다. 실체, 진리, 기능이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순간순간 바른 실천이고 바른 삶이다. 조금 전에 나는 조사선은 형이상학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두가지 표현 형태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 둘 다 «반야심경»의 가장 높은 가르침을 표현한다. '모양은 모양이고 공은 공이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벽은 하얗다. 밖에 개가 짖는다. 우리 마음은 크고 둥근 거울 같다. 오로지 비추고 비추고 비추기만 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 즉 여여[如如. truth like-this]이다.
그러나 진리를 반영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도울 수 없다. 물론 우주처럼 맑은 거울같은 마음을 가져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춰야 한다. 하얀공을 비추면 하얀 것이 비춰진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단지 같이 배고파하면 되는가. 슬픈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저 같이 슬퍼하면 되는가. 단순히 진리를 비추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좀더 완벽한 답이 필요하다.
조사선은 아주 신중한 수행이다. 순간순간 실체, 실상을 깨달아 실용을 행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즉여[卽如, truth like-this]라고 한다.
"우주처럼 맑은마음을 지켜라. 그러면서도 바늘 끝처럼 기능하도록 마음을 내버려둬라."
승려 가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가사는 여러조각을 붙여 아주 조심스럽게 바느질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전체 옷을 다 뜯어서 다시 꿰메야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와 같이 맑은 마음을 가져 마음을 바늘 끝처럼 기능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마치 바늘끝에 서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이 진리들을 제대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진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능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않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즉각적으로 순간순간 진리를 올바로 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바른 삶이다. 그것은 우리의 바른상뢍, 주변 살황과 우리와의 비른관계, 미른 기늘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실상을 깨달아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도와주는 실용의 삶이다.
최상승선이 가르치는 자비란 지혜가 결부된 사랑이다. 지혜가 없는 사랑은 순간순간 다른 상황에서 즉각즉각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가 없고, 요구에 응답할 수도 없다. 당신이 진리를 얻어 이해한 것을 경험을 통해 소화하면 지혜가 나타난다. 사랑 플러스 자비가 지혜이다. 각 상황에 대한 각각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이것은 아주높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른사람을 위해 살고 올바른 지혜를 얻기위해서 우리는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오래전 중국에 동산[洞山]이라는 선승이 "부처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삼베 서 근이다"라고 말했다. 질문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하지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그러고는 궁금증을 다른 선승에게 동산 스님의 말에 대해 물었다.
"동산 선사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삼베 서 근' 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선승은 한술 더 떠 이렇게 대답했다.
"북쪽에 소나무가 있고 남쪽에 대나무가 있다."
질문을 한 스님은 더욱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리하여 오랜기간 선 수행을 알려진 또 다른 스님에게 가서 이 두 선사의 말에대해 여쭈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물었다.
"입을 열면 이빨이 노랗게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먼저 너는 너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다음에야 모든게 명확해진다."
조사선은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곧 진리임을 깨닫는 것이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빛이다. 개는 '멍멍' 짖는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볼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한 스님이 한 번은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또 다른 승려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인생이 무엇입니까?"
"차나마셔라."
"불교가 무엇입니까?"
"차나 마셔라."
이런 것들이 진리의 기능, 즉 실용이다. 그 순간에 오직 '------할뿐'이다
이 의리선,여래선, 조사선 세가지 선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나의 큰 스승이신 만공 대선사님은 열세 살 때 출가하셨다. 당시 만공 큰스님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강원으로 알려진 동학사에서 한 강사스님의 시자로 살았다. 전국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들이 붙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기위해 동학사로 왔다. 어느 날 강원 졸업식이 열렸다. 노스님이 연단에 올라가 졸업사를 했다.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걸음걸이는 똑바로 해야 한다. 문을 열고 닫을 때도 소리가 나지않게 애야한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것은 규법과 질서를 알고 이를 행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말은 고운 말만 가려하고 남을 해치거나 거스르는 말은 삼가야 한다.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 말이란 한번 입 밖으로 나가면 주워담을 수 없는 재앙의 씨이다. 나무도 비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쓺모있으며,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은 그릇이라야 쓸 모가있다. 그래야 큰절을 짓는 재목으로 쓰이고, 많은 것을 담는 사발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분들은 큰 나무가 되어 부처님의 법을 담는 큰 그릇이 되어야한다."
이를 듣고있던 만공스님은 큰 감동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스님이 자리로 돌아와 보니 저쪽 끝에 나이 든 승려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기워입은 헌옷에 긴 머리칼과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었지만 눈 만큼은 다이야몬드처럼 빛났다. 다름아닌 경허 스님이었다. 이미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사로 유명해진 그는 마침 전국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경허 스님을 알아본 노스님이 법문을 청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노스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닙니다. 나는 그저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일 뿐입니다. 아무 할 말이 없읍니다." 하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나 노스님은 떼를 쓰듯 졸랐다. 마침내 경허 스님이 노스님의 청에 못 이겨 연단위로 올라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모두 승려입니다. 승려들은 개인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이고 오로지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큰 나무 혹은 부처님의 법을 담는 큰그릇이 도려고 하는 것은 진정 깨달은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큰그릇은 다만 소용이 큰 데 쓰여집니다. 작은 그릇은 작은 소용이 됩니다. 크건, 작건, 그릇들은 각자 그들의 역할이 있읍니다.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읍니다. 어려분들은 목수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목수라면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결코 버리지 않읍니다. 어떤 나무든지 잘 사용합니다. 좋고 나쁜 것은 없읍니다. 좋은 것들은 그들의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면 됩니다. 나쁜것들 역시 잘 사용하면 됩니다. 좋다고 집착하고 나쁘다고 버리지 마십시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사용해서 바르게 쓰면 됩니다. 좋고 나쁜 친구를 모두 사귀십시요. 어느것도 물리치지 마십시요. 이것이 진정한 불교입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제 미지막 말씀은 모든 개념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멀리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만공은 깜짝 놀랐다.
'이분이야말로 나의 스승이다.'
만공은 절을 떠나는 경허 스님을 뛰듯이 쫓아갔다.
"스님 제자기 되고 싶습니다. 받아주십시요,"
"네가 누구냐?"
"저는 모양도 이름도 없읍니다."
"모양도, 이름도 없으면 무엇으로 나를 따르는가?"
"스님의 말씀에 따름니다."
"너는 내 말에 집착해 있구나."
"아닙니다. 저는 결코 큰스님 말씀에 집착한 적이 없읍니다. 단지 스님의 마음을 따를 뿐입니다."
경허 스님은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밀했다.
"너는 아직 어리다. 이이들은 불교를 배울 수 없어."
그러자 만공스님은 이렇게 되물었다.
"인간은 나이가 있지만 본성에는 나이가 있읍니까, 없읍니까?"
경허 스님은 이말에 크게 웃었다.
"아주 버릇없는 아이로구나, 너는 부처님을 죽이고 먹었구나, 누군가 너를 돌봐 주어야만 하겠다. 그래 , 좋다 나를 따라오너라."
마침내 경허 스님의 제자가 된 만공은 경허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던 천장사로 가서 경허스닌의 친형님인 태허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만공은 천장사에서 5년동안 살았다. 그러나 경허 스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느라고 이 제자를 본 척도 안 했다. 그동안 만공은 아주 열심히 수행을 했다. 만공스님은 목소리도 좋아 염불스님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많은 불자들이 행사 때마다 그를 초청했다. 어떤날은 공양도 건너뛰면서 염불을 해주기도 했다.
어느날 저녁, 그날도 염불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법당 문을 나서던 길이었다. 절 뜰을 가로질러 가는데, 마을에 사는 어린 소년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어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순간 만공스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껏 천장사에서 수 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 어린 소년의 질문에 만공스님은 입니 탁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공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소년은 실망하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후 만공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밥을 먹으나 항상 머릿속에 이 화두를 매달고 살았다. '모든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나무도 , 구름도, 산도, 물도, 싫어함도, 좋아함도, 태여남도, 죽음도 하나로 돌아간다. 추위도, 더위도,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도 다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면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모르겠다------'. 계속
숭상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엮음 허문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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