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19, 2012

직지인심

직지인심· 直指人心 Pointing Directly to Mind
동산선상의 삼서근 洞山先師 麻三斤
Master Dong Sahn "Three pounds of flax"
운문 선사의 마른 똥 막대기 雲門禪師 乾屎橛
Master Un Mun "Dry stick on the shit place
조주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趙州禪師 庭前栢樹子
Master Joju "The cypress tree in the garden"

禪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더 이상 분석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마음으로 길게 들어가 잠을 깨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누군가가 한 위대한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의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어렵지요?"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아주 어렵지."
누군가 또 질문을 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아주 쉽지요?"
"그럼, 아주 쉽지."
누군가 또 물었다.
"본성을 찾는다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지."
누군가 또 물었다.
"참선은 어떻습니까,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선사가 이렇게 말했다.
"물을 마실 때 찬지, 더운지는 네 스스로 안다."
이 이야기는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쉽지도 어렵지도 않다. 물 마실 때 찬지 뜨거운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어렵거나 쉬운것을 만들지 말라.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뭔가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그것이 禪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든 삶에대한 의문들을 가지고 있다. '부처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 부처님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으면 먼저 우주와같이 깨끗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을 뜻한다.
볽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것이 진리이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해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한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가리키는가? 다음 세 가지 이야기는 禪의 가르침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지 보여준다.
동산 스님의 '삼베 서근 麻三斤'
옛날 중국에서의 얘기다. 어느 날 아침, 동산 스님이 삼베 무게를 달고 있었다. 저울이 딱 서 근을 가르키고 있었다. 순간 그는 어떤 생각도 없었다.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았다는 것이다. 단지 삼베 서 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그가 '삼베 서 근'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마침 한 스님이 그에게 와서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삼베 서근이다."
그 말에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비추는 것이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을 비추고 횐것이 오면 힌것을 비춘다. 삼베 서 근이면 그냥 마음의 거울에 삼베 서 근만 비추는 것이다. 진리는 아주 쉽다. 생각을 하면 이런가르침은 어려울 것이다. 생각이 없으면 모든것이 이미 부처인 것이다.
운문 스님의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
옛날 우리농촌도 그랬지만 중국 절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분뇨를 퇴비로 만들어 밭에 뿌렸다. 스님들은 화장실에 큰 통을 갖다놓고 거기서 볼일을 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긴 똥막대기로 저은 뒤 오물을 재에다 굴려 말리고, 똥막대기는 볕에 내놓았다.
어느 날 운문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바지춤을 올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때 성급한 스님 한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 다가와서 운문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님, 부처가 무엇입니까?"
운문 스님은 지체없이 이렇게 말했다.
"마른 똥 막대기니라."
운문 스님은 질문을 받았던 그 순간 단지 볕아래 긴 똥막대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라고 대답한 뒤 가던길을 계속 걸어갔던 것이다. 순간 스님의 마음은 단지 마른 똥막대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볕 아래 똥막대기가 그의 생각의 전부였던 것이다.
조주 스님의 '뜰앞의 잣나무 庭前柏樹子'
달마 대사는 禪의 초조[初祖]이다. 그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 불교는 이미 중국에 융성해 있었다. 많은 절들이 세워졌고, 스님들도 많았으며,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불교는 몇몇 왕조에서 국교로까지 인정되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에 도착한 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참선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부처님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드믈다는 것을 파악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원 성취를 위해 불교를 이용하고 있었다. 달마 대사는 중국 불교에 충격을 주어서 그들의 잠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중국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양무제도 개인적으로 달마대사를 초청해 법문을 듣고 싶어했다. 양무제가 그에게 은근한 자랑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사람의 승려에게라도 옷을 주고 음식을 주면 극락왕생한다고 했읍니다. 그동안 저는 수없이 많은 승렫들에게 음식과 옷을 주었읍니다. 경전간행도 많이 했고 절도 많이 세웠지요. 자, 제가 얼마나 공덕을 받을 수 있겠읍니까?"
그러자 달마 대사는 일어지하에 "공덕이 하나도 없읍니다."라고 잘라말했다. 양무제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잘못 들었는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내쳐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주신 가장 신성한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달마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스러운 것은 없읍니다. 오직 '공[空]'이 있을 따름입니다. (廓然無聖)"
양무제는 완전히 기가 꺾였다.
"어떻게 감히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읍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달마 대사는 "모르겠읍니다"라고 말했다.
그 길로 달맏대사는 소림사 위 어둡고 축축한 토굴로 가서 면벽 수행을 시작했다. 무려 9년 동안 '오직 모를 뿐' 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단지 벽만보고 앉아있는 참선 수행을 한 것이다.
달마 대사는 진리를 가르치러 중국에 왔다. 어떻게 하면 바른 수행으로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중국불교라는 선의 출발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설명이라도 깨달음의 경험은 나누어줄 수 없다. 배고플 때 음식 사진 1천여 장을 보여준다해서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무언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 禪 수행이 나온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입을 벌려라. 이것이 음식이다. 이것이 물이다."
禪은 비록 훌륭한 말로 가르치지 않지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직접 닿아있다. 그래서 본성을 직접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달마 대사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조주 선사가 살아 계실 때 禪 수행은 질문과 대답안에 감춰진 의미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승려들은 비밀스런 가르침과 이상한 설명만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조주가 절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한 스님이 다가와 물었다.
"달마대사가 왜 중국으로 왔읍니까?"
이것은 '불교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이나 같은 말이다. 이때 조주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라고 대답했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조주 선사는 뜰 앞에 잣나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란 어떤 비밀스럽고 신비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앞에 이미 '있는 그대론의 진리'라는 것을 조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에 뜰 앞의 잣나무가 바로 진리였다.
달마의 가르침과 모든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침도 바로 이와 같다. 제자가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며 진리에대한 배고품을 호소했을 때, 조주는 그에게 음식이 그려져있는 사진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 말한 것이다.
"입을 열어라,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다. 배고프면 먹어라."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