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4, 2012

선의 3요소

참구법· 參究法

조동종 曹洞禪 Perceive silence
지관타좌 只管打坐 조용히 참선하며 앉아있다.
Sitting in silent meditation. (Shikantaza)

타성일편 打成一片 모든 생각을 끊어야 하나가 된다.
Hit all become one.

임제종 臨濟禪 Perceive kong-an
성성적적 惺惺寂寂 말을 들여다 보는것
Illumination, calming, (looking into words)

조계종 曺溪禪 Percieve don't know
'단지불지 시즉견성 但知不知 是卽見性 오직 모를 뿐' 단지 그뿐이다.
If you understand "don't know" just this is enlightenment.

禪의 전통은 달마 대사로 부터 온 것이며, 가사와 발우는 6조 혜능 대사를 통해 내려온 것이다. 6조 이후 禪 전통은 다섯 개의 흐름으로 분류된다. 조동종, 임제종, 법안종, 위앙종, 운문종이 그것이다. 이들은 조금씩다른 스타일과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뼈대는 모두 똑같다. 조동종과 임제종만이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禪이 다섯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6조 혜능 대사는 중국 조계산에서 수 년 동안 가르침을 폈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중국의 위대한 스승들을 찾아 여행했고, 몇 분은 혜능 대사와 함께 수행하기도 했다. 6조의 맥은 혜능으로부터 공식 전법계를 받은 한국 스님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리하여 한국에 조계종이 생겨난 것이다.

조동종에서의 주요 가르침은 시칸타짜라는 것으로, 이것은 앉아 있는것을 강조한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하게 생각을 끊어야 그때 하나가 된다. 그것의 이름이 타성일편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마음은 움직이지않는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지고 거울같이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산이 당신앞에 나타나면 산과 당신은 하나가 된다. 안팎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시칸타짜 수행이다.

조동종의 전통은 요즘들어 몇몇 선사들이 공안을 사용하고 있지만 공안공부는 본래 가르치지 않았다. 임제종파의 가장 큰 차이는 공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동종 수행은 한 순간 모든 생각을 끊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으면 한 시간동안 부처가 된다. 한 시간 동안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우주처럼, 거울처럼 맑게 된다는 것이다. 나무는 푸르다. 벽은 하얗다. 개는 짖는다. 모든것이 하나가 된다. 누군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어라. 목이 마르면 물을 주어라. 그것이 전부이다.

임제종도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는 공안 수행이다. 공안수행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든생각을 끊기위해 '말을 들여다 보는것' 혹은 '말을 사용하는것' 이다. 공안수행에서 중요한것은 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안의 진짜의미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라고 하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안 된다. 공안 그 자테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지적하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친다. 이것은 아주 나쁜 선병이다.

잘 알려진 사례가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조주의 '무'자 공안에 익숙해 있다. 부처님은 만물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냐?"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는 '무'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제자의 생각을 없애기 위해 말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고 하면 머릿속에 '무'를 떠올린다. 아주 강하게 언제, 어디서나 오직 '무'에 괸해서만 생각한다. 그것은 선 수행이 지적하는 바를 완전히 잃어버린 행위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조주선사의 대답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조주는 불성과 불성이 아닌 것을 나누는 제자들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이 '없음'을 단지 사용한 것뿐이다. 그는 달을 가르키기위해 이 '무'를 사용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놓치고 말았다.

'무'는 단지 '무'일 뿐이다. '무'자 공안이 의미하는 핵심은 이미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공안을 이해한다는 것은 공안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왜 조주 선사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을까----- 모르겠다." 공안을 이렇게 사용하면서 생각을 완전히 끊고 생각이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말에 집착하지 말고 특별한 의미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야 바른 방향과 본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공안 수행이다. 조계종의 가르침은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이다. 이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이런경험을 많은 이름으로 말하지만 본래 그것에는 이름이 없다. 오직 모를 뿐' 그 이상도 , 이하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의 부산한 시장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께서는 스승 자신을 아십니까?' 라고 묻자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내가 모를 뿐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 '오직모를 뿐'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다. 생각할 때 '나' '너'가 나온다. 그러나 모든 집착을 끊으면 나의 마음과 너의 마음은 하나가 된다.

내가 하나 묻겠다.(손에들고있는 주장자를 가리키며) 주장자와 여러분은 같은가, 다른가? 주의해서 대답하라. 같다고 말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칠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칠 것이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칠 것이다.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이미 실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하하) 조계선은 모든 생각을 끊고 '오직 모를 뿐'으로 돌아가면 이미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고봉 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 본래 스승'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도 같다.
"스승님께서는 스승님 자신을 아십니까?"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모를뿐을 잘 알고 있다."
조계선은 이런 방법으로 가르친다.

선의 3 요소· 禪의 3 要素 The Three Essential Elements od Zen

큰 믿음 大信心 Great Faith
큰 용기 大奮心 Great Courage
큰 의심 大疑心 Great Question

마음공부를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큰 믿음(Great Faith), 큰 용기(Great Courage), 큰 의심(Great Question)이다.
이것은 마음공부라는 삼각형의 세변과 같다.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형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심 大信心
큰 믿음이란 처한 조건에 관계없이 마음속에 큰 서원을 세워 노력하는 것이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듯이 말이다. 모든 에너지를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매일매일 심지어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멈ㅊ추지 않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마치 너미 닭ㅇ이 알을 품듯 말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는 결코 다른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직 알을 따뜻하게 해서 병아리로 부화시켜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본능적인 생각 뿐이다. 물론 가끔 품는 위치를 바꾸기도 하지만 결코 알이 차갑게 되도록 내버러두지 않는다. 만약 어미 닭이 '좀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혹은 '남자 친구닭이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열심히 알을 품지않거나 아예 알을 내버려둔다면 결코 병아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어미 닭은 움직이지 않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견해, 조건, 상황을 가지지 않고 오직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병아리가 알을 깨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오직 한 방향으로 몰두하는 마음을 큰 마음이라 한다.

대분심 大奮心

대분심이란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력할 때와 비교할 수 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를 본 적이 있는가. 쥐구멍 밖으로 몸을 기대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후 용수철을 늘린 것처럼 뒷다라를 빼고 앉아 쥐가 튀어나오면 언제라도 움켜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가 쥐구멍에 집중해 있다. 온 마음이 한 가지 포인트에 맞춰져 바깥의 조건이 어떤하든 똑같은 자세로 몰두하는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난다. 쥐가 '이 정도면 됐어, 저 멍청한 고양이는 지금쯤 갔겠지' 하고 바깥 냄새를 맡기위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 고양이는 낚아채는 것이다. 그것이 고양이의 마음이다. 고양이는 언제, 어떤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완벽한 집중을 한다. 외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에너지가 한 점에 맞춰진다.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때로는 고양이를 하늘로 던졌다가 떨어뜨리면 고양이는 신기하게도 네 발톱을 탁 세워서 안전하게 앉는다. 사람이라면 팔다리가 부러져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고양이는 하늘에 던져져서도 초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고양이의 큰 용기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이런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럴 때 마음은 바깥 조건의 변화에 따라 출렁댖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충청남도 마곡사라는 절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절 살림을 도맡아 했는데, 음식을 준비하고 모든 생필품에 책임을 져야하는 아주 막중한 일이었다. 한번은 절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음식준비가 큰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두부를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우리는 며칠씩 걸려 두부를 만들어 물속에 넣어두었다. 마곡사에는 창고에 큰 나무통이 있었는데, 나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부를 보관해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창고에 들어가 나무통을 보니 두부가 두 덩이나 없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또 두 넝이가 없어졌다. 그 이후로 매일 두부가 한두덩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창고 문은 항상 잠을쇠로 잠겨져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그 일이 알려지자 서로 의심하는 바람에 절 분위기까지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매일 두부가 많지도 않은 딱 한두 덩이만 없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두부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다 들고 갔으면 될 터인데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아마 나쁜귀신이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며 두려워했다.

어느 날 내가 꾀를 하나 냈다. 창고에 앉아 밤을 새우며 도둑을 잡기로 한 것이다. 나무통 뒤 기둥에 숨을 죽이고 앉아 있었다. '누구소행인지 꼭 밝혀내고 말리라.' 한 시간이 지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가고 세 시간이 지났다. 지루하기도 하고 졸음도 쏟아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윽고 새벽이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창고 구석에서 들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천천히 나무통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옳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군나. 나는 숨죽이며 그림자의 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사람같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그것은 다름아닌 고양이였던 것이다.

고양이는 숨을 죽이고 나무통 가장자리에 앉아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깨를 잔뜩 움추리고 머리는 낮게 숙이고 말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물 속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있던 두부 한 덩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순간 고양이가 물밖에서 재빨리 낚아채더니 입으로 가져가서는 아주 맛있게 먹어버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창고를 빠져나갔다.

고양이는 창고의 나무틀에 난 구멍을 통해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내눈을 의심하지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두부가 움직인다는 말인가. 그러나 에너지를 집중하면 가능한 일이다. 고양이는 물에있는 두부가 떠오를 정도로 온 에너지를 집중시킨 것이다. 고양이의 의식은 오직 한 점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가 이러할진대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무한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것이 고양이의 대분심이다.

이런 고양이의 마음상태만 같으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 수행은 이와 같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나는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애 집중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어느 시점엔가 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엄청나게 폭팔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다.

대의심 大疑心

큰 의심이란 한 가지에 집중해 있는 마음을 오랫동안 계속 간직하는 것이다. 몇 초 혹은 몇 분은 쉬울지 몰라도 오랫동안 한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어머니가 장을 보러갔다 오겠다며 아이에게 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억어라."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는다. 아이는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 네 시간, 다섯 시간이 흘러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는 온갖 생각과 걱정들로 뒤죽박죽이 된다. "무슨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의 모든 의식의 에너지는 '어머니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집중해 있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주 배가고파 하늘도, 땅도, 나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어디에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또 며칠동안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햇빛은 따갑게 내려쬐고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물' 뿐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거의 죽을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족도, 돈도, 섹스도, 명예도, 잠도 다 필요없다.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한 컵의 물을 찾는 사막의 방랑자처럼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수행해야한다.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한 점에 맞춰져 바깥 상황이나 조건에 전혀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원한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한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는다. 본성을 찾고 싶으면 오직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슴깊이 가져야 한다. 이런마음으로 수행을 하면 깨달음은 멀지 않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젊었을 때는 색스, 돈, 명예를 원하고 심지어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욕심을 가지고 한다. 이것저것 가지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닌다.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러다 훌쩍 나이가 들면 한 수간 당혹스러워 진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도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난다. 문득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삶에대한 의문들이 생긴다. 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내 인생은 무엇인가. 허무감을 이기기 위해 '산다는것은 다 그렇고 그런것'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애써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과연 그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말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죽기전에 그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는 무엇인가' 하는 큰 의심이며 '오직 모를뿐' 인 마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또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강하다면 균형을 잃어 문제가 생긴다. 큰 용기만 가지고 있다면 믿음과 의심은 약해질 것이고 , 오직 에너지만 모아질 뿐이다. 무엇보다 조화가 중요하다. 그것이 '오직 모를 뿐'의 다른 이름이다.
긴장을 풀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순간순간 함께 기능한다. 참선한다는것은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를 운전할 때 어깨가 움츠러져 있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변화하는 환경에 순발력있게 대응할 수가 없다. 긴장을 늦추려고 해서 운전할 때 잠을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빨간 뿔이 켜지면 멈추고 초록색 불이켜지면 가면된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일본 선방에서는 에너지를 모으는 방법을 주로가르친다. 즉, 용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사키 로시는 종종 제자들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점검하곤 했다. 그가 강조하는 수행은 중심인 단전에서 얼마나 큰 에너지를 한꺼번에 터뜨려내느냐 하는 것이다.
"무[無]라고 말해보아라."
"무우."
"더 크게, 더 힘을 줘서."
"뭉우우."
"너는 아직도 너 자신을 못 믿는구냐, 다시 무."
"무우우우."
"더 크게."
"무우우우우우."
이것은 사무라이들이 받는 훈련과 유사할 뿐 선 수행이 아니다. 강한 단전을 길러내는 것만이 중요시되는 잘못된 훈련이다. 용기만 강조되면 믿음이나 의심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빨리 갈 수는 있어도 명확한 방향은 분명히 아니다. 여러분은 어느 곳에 도착하고 싶은가. 서울? 전라도? 경상도? 금강산? 아니면 센프란시스코? 도쿄? 뉴욕? 파리?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방향을 제공해 주기때문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을 발견해서 중생을 돕는 것이다. 열심히 수행을 하면 큰 용기가 큰 에너지가 된다. 그러면 어느 날 의문이 풀려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 한다. 거듭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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