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19, 2012

교외별전

교외별전·敎外別傳 The Special Transmission

삼처전심 三處傳心 세곳에서 마음을 전함.
Three occasions of transmission from mind to mind
다자탑전분반좌 多子塔前分半座
다자탑 앞에서 마하가섭과 방석을 나눠 같이앉다.
Sharing cushion with Mahakashyapa in front of the Pagoda of Many people
영산회상거고화 靈山會上擧枯花
영선에서 꽃을 들어보이다
Holding up the flower on Vulture Peak
니련하반시쌍질 泥蓮河畔示雙跌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오다.
Buddha's feet appear through the coffin

이심전심이라는 말이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동시에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고 치자. 그 두 사람은 단어나 말이 없어도 이해하고 웃을 것이다.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이는 것,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이심전심이다.
여기 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둘은 부부 사이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생일 선물을 준다. 이내 포장을 뜯고 상자안에 담긴 선물이 아름다운 스카프라는 것을 알게 되고 아주 행복해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이처럼 두 마음이 완벽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한 순간에 두 마음은 똑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말도, 단어도 필요없다. 설명이나 이해도 필요없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본성품이 어떻게 말과 단어를 넘어 왔는가에 대해 얘기 했다. 언어는 본성품을 설명할 수 없다. 생각과 언어는 우리 세계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나눈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생과 사, 오고 감, 행복과 슬픔 등등, 그러나 우리의 본성품은 우주적 실체이며 절대이다. 절대의 세계에서는 말도, 언어도 없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절대를 얻었다는 뜻이다. 절대란 말과 단어 이전의 세계이다. 부처님은 이 세계란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므로 좀더 직접적인 전달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제자들에게 전할 때 말과 단어를 사용하지않고 세 가지 행동으로 전했다. 이를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이 세 곳에서 우리에게 실체(substance), 실상(truth), 실용(correct function) 을 가르치셨다.
다자탑 앞에서 마하가섭과 방석을 나눠 같이 앉다.
예날 인도 사람들은 여러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양반들은 첩을 데리고 살 수 있었지만 인도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마누라를 5~6명, 많을 때는 20~30명씩 데리고 살기도 했다. 그런데 20명의 마누라를 데리고 살던사람이 죽으면 그 식솔들이 150명이 넘는다. 남편이 죽으면 화장을 한 뒤 가족회의를 통해 명당 자리를 정해 그곳에 죽은 남편을 기리는 아름다운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을 다자탑[多子塔]이라 한다. 그런데 이 탑의 도량이 넓고 크다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이 탑 앞을 공원처럼 이용했다.
어느 날 부처님은 설법을 위해 한 다자탑 앞에 앉았다. 1천2백 명 대중들이 앉아서 그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부처님께서 하실 법문은 어떤 가르침일까?"
모든 사람들이 이제나 저제나 부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부처님보다 나이가 20세나 늙은 '마하가섭'이라는 바라문이 걸어 들어왔다.
당시 그는 80세가량이나 됐지만 늦게 출가를 한 풋내기 스님이었다. 출가 전 그는 인도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불가에서는 출가한 순서대로 앉게 되어있다. 세속의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또 속세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와 계급에 속해 있었다 하더라도 출가 순서대로 앉아야 한다. 이것은 집과 가족을 떠나 출가한 슬려들의 뜻을 높이 기려 부처님시대에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서양 절에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날, 다자탑 앞에서 대중들은 법문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마하가섭이 걸어 들어오는 순간 부처님은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 역시 부처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마하가섭과 부처님의 마음이 서로 한꺼번에 이어졌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을 향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금방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아니, 출가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풋내기 승려가 어떻게 감히 무처님 바로 앞에 앉으려 하지?"
심지어 미하가섭은 무처님 바로 앞도 아니고 바로 옆자리로 가 앉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랄 일은 그 이후 벌어졌다. 부처님은 아무 말없이 당신이 앉았던 방석을 반쯤 나눠 같이 앉게 해준것이다. 모든 대중들은 깜짝 놀랐다.
"풋내기 승려이다보니 자기가 가서 앉을 자리도 잘 무르는 모양이군."
"어떻게 감히 부처님 옆자리에 앉는다는 말인가?"
그들은 아주 화가 났지만 부처님의 법은 마하가섭에게 이미 전해진 뒤였다.
이 얘기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처음 법을 전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의 마음은 완전히 열려 하나가 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완벽하게 똑같은 생각을 나눈 것이었다. 이 일을 통해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탑 앞에 모인 이들에게 모든 물질의 실체가 동등함을 가르친 것이었다. 인간, 태양, 달, 별, 나무, 개, 고양이, 바위, 산, 강, 등이 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이미 똑같은 우주적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부처님의 실체도, 마하가섭의 실체도, 이 책상의 실체도, 마루의 실체도 무두 똑같은 우주의 실체이다. 니의 본성과 부처의 본성이 다르지 않고 다 똑같다.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탑 앞에서 행한 그의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실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것이었다.

영산에서 꽃을 들어 보이다
부처님이 «법화경» 을 설하신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대중들이 영산 앞에 모여 들었다. 이날 역시 1천2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날도 부처님은 산꼭대기에 앉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부처님께 무슨일이 생긴게 아닐까?"
"오늘 편찮으신 모양이야."
잠시 후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집어들었다.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대중에게 높이 처들어 보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아는이가 없었다. 저 멀리 오직 마하가섭 혼자만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제야 부처님이 입을 열었다.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가르침을 넘어선 특별한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한다."
이것으로 마하가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처님의 법맥을 잇는 첫 번째 법제자가 된다. 부처님은 왜 연꽃을 들어 보이셨는가? 가섭은 왜 웃었는가? 부처님은 간단한 몸짓을 통해 우리가 진리에 대해 알아야할 모든것을 가르쳤다. 부처님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복잡한 철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사학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 진리란 말이다.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 우주가 이미 진리이기 때문이다.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전 우주가 이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냥 보라. 그냥 들어라. 그냥 냄새를 맡아라. 순간순간 우주는 언제나 우리에게 진리의 본질에 대해 아주 훌륭한 법문을 준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파랗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부터님은 오직 침묵으로서 그것을 말해주었다. 모든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것도 진리이다. 무처님은 꽃을 집어들었다. 그것도 진리이다. 마하가섭이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것 역시 완벽한 진리이다.
어떤 진리도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처님은 우리에게 '실체'의 본질에 대해 가르쳤다. 이 영산에서 바로 '진리' 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 영산에서의 가르침은 약간의 문제를 보인다.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고 단지 꽃 한 송이만을 집어들었다. 마하가섭만이 그것을 보았고 미소지었다. 모든것이 끝났다. 부처님과 마하가섭은 어떤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진리를 보여주었다. 훌륭한 법을 부처님과 함께 편 것이다. 하지만 그때 아마 부처님은 이 같은 말을 함으로서 약간의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진정한 법을 전하노라."
왜 이런 '말'이 필요했을까. 마하가섭은 미소로서 이미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표현했다. 꽃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말을 전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마치 뱀에 다리를 그려넣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이었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내가 너에게 진정한 법을 전하노라"라고 했을 때 마하가섭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치자. "부처님, 나는 이미 법을 모두 이해했읍니다. 당신의 법은 필요없읍니다."
만약 당신이 부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는가. 부처가 꽃을 집어들었을 때 마하가섭의 미소는 그가 이미 깨달았고 부처의 마음을 나누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미 부처님의 법을 모두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부처님이 말을 더한것은 아주 큰 실수였다. 만약 당신이 부처였다면 이떻게 하겠는가 또 마하가섭이 '나도 이미 법을 이해했으므로 부처님의 법이 필요 없다'는 말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하하하)

관 밖으로 부처님 발이 나오다
부처님은 여든 살에 돌아가셨다. 당시 인도에는 1백 살이 넘어서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요가 수행을 주로 하는 요기들이나 영적인 수행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따라서 부처님이 생각보다 일찍 열반하시자 많은 제자들이 당혹했다.
"아니, 부처님은 신비하고 특별한 에너지를 가지셨던 분인데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셨을까?"
"어쩌면 그는 성인[聖人]이 아니었을 지도 몰라."
지금으로 치면 이 여든에 돌아가시는 것도 장수한 편에 속하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부처님의 이른 열반을 두고 몇몇 제자들은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부처님은 생도, 사도 없다고 하셨는데, 정작 당신께서는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
이런의심들이 승가 공동체를 뒤흔들었고,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런가운데에도 다비식 준비는 차례차례 진행되고 있었고, 큰 장작더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른 나무들이 높이 쌓였고 부처님의 몸을실은 관이 꼭대기에 놓였다. 장례식은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인 마하가섭이 주도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작 다비식 날 마하가섭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자꾸 흘렀다. 사람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마하가섭은 어디 있느냐?"
"도대체 어디가서 안 오는 것이냐?"
그 무렵 마하가섭은 아주 먼곳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접한 즉시 짐을 꾸려 출발했지만 1백살이 훨씬넘은 노인이었던 마하가섭이 제때에 당도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는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다비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비식장에 들어섲자마자 마하가섭은 도반들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승려들은 아예 부처님 가르침마져 송두리채 의심하고 있었다.
마하가섭은 관으로 다가가 세 번 절하고는 장작더미 둘레를 돌기 시작했다. 그는 노쇠하여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한 번 도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람들이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빨리 불을 지펴야 하는데."
그러나 마하가섭은 계속 걷고 있었다 관 주위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돈 후 마하가섭은 부처님 발아래 세 번 절했다. 그러자 이게 무슨 일인가. 부처님의 발이 관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 의심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와, 부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구나 단지 그의 몸만이 사라졌구나. 부처님의 본성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구나."
모든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비록 그의 몸은 생과 사를 가졌다 할지라도 본성은 결코 죽거나 태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우리 본성품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순산순간마다 일체중생을 위해 기능한다.
그러므로 이 '삼처전심'은 아주 맑고 명확한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부처님은 실체, 실상, 실용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첫 번째, 마하가섭이 부처님과 방석을 나눠 앉은것은 실체, 즉 우리의 본성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가르침을 주기위해서였다. 모든 우주적 실체는 완벽히 똑같다. 계급사회였던 인도에서 상류층에 속한 사람들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보다 우수하며 영적으로도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모두 똑같이 부처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급진적이고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두 번째,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데 말이나 어떤 더 높은 수준의 지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말이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에게 '침묵이 진리이다. 이 꽃이 진리이다. 너회들의 의심도 진리이며, 마하가섭의 미소도 진리이다. 잠을 깨라' 고 했다. 이 전 우주는 이미 완벽한 진리의 세계이다.
세 번째, 부처님은 살아생전 올바른 수행법에 대해 가르쳤다. 그러나 열반 후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렸으므로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행동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것은 큰 실천이다. 모든 것이 똑같이 우주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 우주 안의 모든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있다. 이것들을 알면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진리(실상)를 어떻게 맑고 자비롭게 쓸 수 있는 지(실용)를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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