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1, 2012

만행 고뇌의 밤들

萬行 고뇌의 밤들
친구들은 졸업을하고 대학원에 간다, 취직을 한다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공부를 더 할 생각이었다. 우선 쇼펜하우어를 더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나는 졸업식을 마친 후 내 가장 친한 친구 스티브와 함께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스위스 극경과 가까운 불랙 포리스트 프라이부르트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어학연수원에 등록해 독일어를 배웠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그대고 간직한 프라이부르크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교육 도시인데 철학자 하이데거가 살면서 그의 가르침을 편 곳이기도 하다.
나는 하루종일 학교에서 독일인 친구들과 함께 온갖 철학적 이슈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밤에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면 뭔가 손에서 빠져나간 듯한 허무감이 들었다. 비록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진지하게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제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건만 가슴에는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나는 다시 ‘불교를 만났다. 철학과 학생 엔츠라는 친구와 아주 친해졌는데, 그는 그 대학 불교동아리 회장이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독일의 명문학교다. 그런데 그 학교의 학생들은 불교에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기위해 일본이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일부는 일본, 태국, 스리랑카 등지의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엔츠는 그들의 리더격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엔츠의 아파트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엔츠의 방에는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부좌를 틀고앉아 명상에 잠긴 모슴이었는데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정도로 아주 큰 것이었다. 엔츠는 얘기를 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항상 그 사진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그자리를 ‘엔츠의 자리’ 라고 불렀다. 그의 자리에는 넓고 큰 방석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참선할 때 앉는 방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참선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엔츠는 불상 사진 앞에 항상 향을 피워 놓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데 한 때 스리랑카 절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티벳과 스리랑카의 승려들을 동아리 세미나에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 그의 왼쪽 팔에는 인도에서 산 듯한 염주가 항상 끼워져 있었다.
엔츠의 아버지는 종교개혁을 주창했던 루터교의 목사이자 그 대학교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행동에 대해 한번도 꾸짖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주 사이가 좋아 나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엔츠를 통해 불교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속해잇는 불교동아리는 그 대학에서 머리가 좋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친구의 모임이었다. 다들 공부도 잘했고 삶의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햇다. 마는 엔츠의 권유로 대학 구내서점에가서 참선에관한 독일책을 샀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은 카톨릭 신부님이 쓰신 책이었다.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핫 교수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참선수행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카토릭 신부님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버금가는 위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불교라는 게 무엇이길래 저들이 저렇게 심취해 있나. 신부님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참선수행을 추천하다니…….’
차츰차츰 진리에 다가가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갈수록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그 안개가 걷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년간 독일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갔다. 마침 대학 친구들 몇몇이 파리 아파트를 빌려놓았으니 놀러오라고 초청한 것이다. 나는 파리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며 1년여를 보냈다. 그곳에서 음악방송 dj에서부터 모델, 대학생,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재미있던 것은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참선과 요가에 심취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파리생활이 값졌던 것은 그곳에서 철학자 에머슨을 만난 것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파트에 놀러갔다가 에머슨 수상집을 발견하곤 집어들었다.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은 미국의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 철학운동의 주창자였다. 에머슨은 원래 보스텅의 유명한 교회 복사였다. 보스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귀 미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가 되었다. 또 뛰어나 수필가이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에머슨을 접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의 가르침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는 그가 새롭게 보였다. 에머슨이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초청돼 축사를 하게 되었다. 그가 그날 한 연설은 나중에 ‘신학대학원 축사’ Divinity School Address라는 고유명사로까지 명명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신이 아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각자가 갖고 있는 본성, 진리, 지혜다. 인간들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즉 우리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만들어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지만, 그는 단지 인간이다. 나와 여러분들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것은 당시 교단에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에머슨은 그날 연설 이후로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출입이 금지되었을 정도엿다. 그러나 그 이후 에머슨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초월주의 운동을 이끄는 주창자가 되었다. 그는 1800년대에 미국과 유럽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미국 철학의 기초자라고 할 수있다. 결국 에머슨은 생애 말엽 하버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하버드 철학관 홀은 ‘에머슨 홀’로 명명되기에 이른다.
에머슨은 ‘진리란 우리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속에 진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바깥에있는 어떤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림자……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이라는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초월주의의 기초다.
나는 출가한 오늘날까지도 쇼펜하우어와 에머슨을 탐독한다. 나중에 일있는데 에머슨이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도 쇼펜하우어였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무릎을 쳤다.
“진정한 사람, 진정한 철학, 진정한 제도, 진리는 바로 마음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파리에서 에머슨의 책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았다. 에머슨은 미국인의 목소리로 참다운 사상을 얘기한, 내가 만난 첫 미국인 이었다.
나는 학원, 지하철, 버스, 카페 등 어디가든 그의 책을 끼도 다녔다. 쇼펜하우워 이후 더 이상 높은 경지를 발견할 수 없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디어 미국인의 목소리를 통해 그것을 찾은 것이다. 그건 너무나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느 더욱 나를 놀라게 한 에머슨이 유명한 에세이를 읽게 되었느데 다름아닌 〈초월주의란 무엇인가〉였다. 그는 초월주의란 “다름아닌 자기자신을 발견해 믿는것”이라고 말했다.그리고 모든 순간에 모든 경험에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이닌가!
“예를 들면 불교신자들이 초월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읽는순간 너무 놀라 의지에서 나자빠질뻔 했다.
다시, 또다시, 이 불교라는 말과 마주쳤다. 도대체 이 불교라는게 뭐야? 아니 에머슨 조차도 불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다니…….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수도사나 신부가 되겠다는 어릴 적부터 항상 갖고 있었던 열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 있을때 아주 유명한 여러 카톨릭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나를 받아들여 달라고 불어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들은 흔쾌히 오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 수련 시간표도 보내줬다. 그러나 정작 그들로부터 답장을 받았을 때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과연 수도사들의 수련에 참여한다 해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루종일 예배와 기도, 그게 전부이지 않을까?
그 동안에도 나는 계속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점점 그 복음의 의미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신에게 진리를 찾아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 예수님에게 더 이상 지혜를 가져다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배나 기도같은 종교적인 활동도 잘 할 수 없게 되었다.그것들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지만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는 나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내 속에서 찾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수많은 번뇌의 밤을 보낸 끝에 수도사행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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