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9, 2012

용성 진종 대선사

용성 진종 대종사 龍城 震鐘 大宗師

龍城스님의 行狀
스님의 관향貫鄕은 수원백씨이며 고려조에 이부전서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고 이태조와 태종의 부름을 거역하여 유배된후 그곳에서 죽은 정진제靜愼齊 백장白壯선생의 후예로 부친의 이름은 백남현이요, 모친은 신라육부촌장의 한분인 구레미공의 후예인 밀양 손씨이다.
어느날 손씨부인의 꿈에 법복을 입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후 태기가 있어 조선조 제 26대 고종왕 1년1864 갑자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출생하셨다. 태어나자 울지도 않았으며 냄새와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 하였다. 스님의 속명은 상규相圭이고 법명은 진종震鐘이며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스님은 어린시절 6세때 부친이 낚시를 가는데 따라가서 낚은고기를 바구니에 담기가 바쁘게 놓아 주었고 또한 가난한 이웃이 끼니를 잇지 못하고 굶주릴 때는 광속에 곡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니 그 성품이 얼마나 자비스러운가를 알 수 있다.
7세부터 한학을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9세때 1872년 서당에서 합죽선이란 시제詩題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대요합죽선大撓合竹扇 합죽선 부채를 크게 흔들어서
차구동정풍借求洞庭風 동정호 바람을 빌려 오리라.
적화수리동춘심摘花手裏動春心 꽃을따서 손에 잡으니 봄 마음이 동하는구나.
스님이 14세 때 1877년 어느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授記를 받았다.
얼마뒤 스님께서는 남원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 하였는데 그 곳 덕밀암의 부처님이 지난번 꿈속에서 본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879년 16세 때 스님은 합천 해인시 극락암의 화원화상을 은사로 혜조율사를 계사로 하여 득도 하였다.
스님은 그 당시 주력성도呪力成道한 水月장로님을 친견하기위해 의성 고운사로 찾아가 生死大事와 견성에 대해 물었을 때 수월스님께서 다음과 같은 계송으로 답하였다.
거성시요 去聖時遙 부처님이 가신지 오래된 때라
마강법약 魔强法弱 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하며
성례삼보 誠禮三寶 지나간 세상업이 장애가 무거웁고 선은 약해 물리치기 어려우니
근송대비주 勤誦大悲呪 불법승 삼보전에 예경을 정성스럽게 하며 부지런히 대비주를 염송하면
자연업장소멸 自然業障消滅 자연히 업장이 소멸되어
심광투루 心光透漏 마음의 광명을 뚫어 통하리라.

스님은 지극정성으로 천수대비주와 옴아니반메홈 육자주를 9개월동안 지송하고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6일동안 참구한 결과 의심을 풀고 계송을 지어 이르시기를
일념자여통저탈상시 一念子如桶底脫相似하여 일념자가 마치 통밑빠진 모양과 같아서
불가구의심사야 不可口議心思也러라 가히 말로 의논할 수 없고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도다.
그 뒤 스님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무융無融 대선사를 친경하고 조주무자홛두趙州無子話頭를 참구하는 것을 지도 받았다.
스님은 대은大隱율사의 전통을 계승한 초의初衣 율사, 범해梵海율사의 계맥을 이은 선곡禪谷율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 후 송광사 삼일암에서 전등륵 황벽법어를 보시다가 크게 깨치셨다.
1885년 22세 때 해인사에서 2차로 悟道하시고 그 다음해에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경북 선산 아도모례원에서 3차의 오도를 하시었다.
스님께서 병술년 서기 1886년 8월에 낙동강을 건너시면서 한 글귀를 지었다.

金烏千秋月이요 금오에 천추 달이요
洛東萬里波로다 낙동에 만리 파로다.
漁舟何處去오 고기잡는 배가 어느 곳으로 갔는고
依舊宿蘆花로다 의구히 갈대꽃에서 자더라.

용성스님은 이 오도송悟道頌을 뒷날 대각교를창설하였을 때 종지宗旨의 구句로 삼았다.
용성대사께서는 석가여래 부촉법 제 67세이신 환성당지안喚醒堂志安대사의 법을 원사遠嗣하여 석가여래 부촉법 제68세가 되시었다.
1905년 9월 42세 때 강원도 철원 보개산에서 관음전을 건립하고 선문요지禪門要旨 1권을 저술하다.
1907년 44세 때 무주 덕유산에 선원을 건립, 법천사法泉寺라 이름하고 그 해 9월에 중국의 큰 사찰을 순례하던 중 통주通州 화엄사를 방문하셨다. 그때 한 중국선사가 용성스님이 조선에서 온 것을 알고 심히 얕보고는 계를 어디에서 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스님은 조선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받았노라고 하였더니 중국선사가 말하기를
『우리 중국의 정계淨戒가 언제 조선에 들어 갔는가. 내가 듣기에는 그대의 나라에는 사미계沙彌戒뿐이지 비구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조선 불교를 완전히 무시하고 정통불교가 아니라고 하는 뜻이었다.
용성스님께서 크게 웃으시면서 대답하기를
『공중에 해와 달이 그대 중국나라만이 해와달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 법도 이와같이 천하의 공도인데 어찌 그대의 나라 것이라고 하는가. 나라는 대국이나 사람은 소인이구려.』하며 조선 전통 용맥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에 어떤선사도 용정스님과의 문답에는 더 이상 말을 못하였다.
스님은 2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셨다.
1920년 47세 때 지리산 칠불선원 종주로 계셨는데 하룻밤 꿈에 또 부처님께서 부촉을 받고 저술과 역경사업에 뜻을 내시었다.
스님께서는 다른 종교가 불교를 바방하고 배치하는 것을 논박하는 내용의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였다.이때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주의 수하에 들어가고 나라 안팎이 어지럽고 민중이 고난에 처해 허덕이고 있었다. 더구나 외세에 힘을 얻어 물밀듯이 천주교ㆍ기독교 등 서구 종교가 온 나라 안에 예베당을 세우고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스님께서는 다음 해 신도 집에 계시면서 선회禪會를 개설하고 선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 48세에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 초막을 짓고 그해 4월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건립하시고 다시 1913년 뜻있는 선지식과 힘을 합하여 안국동에 있는 선학원을 세우셨다.
1918년 55세 때 백제불교 초전법륜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초당에서 만해 한용운스님을 불러 불교ㆍ천도교ㆍ기독교계의 지도자와 호국으로 상교相交하도록 지도하시고 3ㆍ1운동정신의 씨앗을 키우셨다.
1919년기미년 56세 때 3ㆍ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제1번 서명에 천도교대표 손병희, 제2번 기독교 장로회대표 김선주,제3번에 북감리교파 대표 이필주, 제4번 서명에 불교대표로 백용성스님께서 서명하셨다. 이로인하여 민족대표와 같이 그당시 국가보안법 제7조에의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루셨다.
1922년 59세 때 만주 간도성에 땅 70정보를 확보하고 대각교당을 세운다음 독립운동을하는한편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릐고 신역대장경을 비롯한 우리말 금강경ㆍ신역금간경ㆍ스능엄경을 번역 간행하였으며 수심정로修心正路원고를 탈고하고, 팔상록과 선문찰요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 감행하였다.
1924년 4월 24일 봉익동 대각사에 계실 때 좌치佐齒에서 사리舍利 1과가 나왔는데 현재 합천 가야산 해인사 용탑에 모셔져 있다.
1940년 경진년 음력 2월 24일 관음제일에 용성스님께서는 목욕제계한 뒤 수하의 대중을 모아놓고 「그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ㆍ라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시니 세수는 77세요 법랍은 61세이었다.
현재 서울 종로 봉익동도 대각사에 모셔져있는 용성대선사의 영정影幀에 다음과 같은 계송이 기록되어있다. 이 계송은 당신님의 영정을 바라보시면서 스스로 찬讚한 것이다.

수수산산이형 水水山山爾形 물과물 산과산은 부처님 모습이요
화화초초이의 花花草草爾意 꽃과꽃 풀과풀은 조사의 뜻이로다
등한래등한거 等閒來等閒居 한가로움을 가다려 왔다가 한가로움을 가다려 가는데
명월조청풍불 明月照淸風拂 달이밝게 비침을 맑은 바람이 돕는도다
구자무불성 狗子無佛性 개새끼에게 물성이 없다 함은
조주망분별 趙州妄分別 조주선사의 망령된 분별이요
동호춘수록 東湖春水綠 동호의 봄물은 프르른데
백구임부침 白鷗任浮沈 백구는 뜨고 잠김을 임의로 하는구나
아시여야 我是汝耶 내가 이 너인가
여시아야 汝是我耶 네가 이 나인가
초당춘일애 草堂春日曖 초당의 봄 햇살이 따뜻하니
백화난만개 百花爛慢開 백화가 익어 방자하게 피었도다.

용성대사께서 경전번역간행을 위하여 삼장역회를 만들어 저술하시고 번역한 경전은 다은과 같다.
저술은 선문요지,귀원정종, 심조만유론, 수심정로, 팔상록, 선문찰요편집의역, 불일지 창간, 대각교의식, 무아지 창간, 각해일지,청공원일, 수심론, 臨終訣, 오도의 진리, 오도는 각, 불자일송 대각교원류, 입교문답, 대각교 아동 교과서 등이고
번역간행 및 번역본은 사십이장경, 신역대장경, 성한문금강경, 신역금간경, 수방엄졍선한연의 금비라경, 각정심관음정사총지경, 대방광원각경, 詳譯과해, 금강경, 천지팔양신주경, 팔십화엄경을 조선글 화엄경 12권으로 간행, 조선글 방엄경, 대승기신론, 각설범강경 상중 하 번역. 석가사, 육자영감대명왕경, 천수경, 지장보살본원경, 금강삼매경, 쟁토삼부경,인 금광명경,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과 약사여래본원경, 대보부모은중경과 능엄신주 등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리고 묘향산 상비로암 보개산 성주암, 도봉산 망월사, 덕유산 호국사, 지리산 칠불선원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선회를 개설하고 대각일요학교를 창설, 가야산 해인사 원당에서 미타회를 개설 하였다. 2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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