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anuary 21, 2012

만공 월면 대종사

만공 월면 대종사 滿空 月面 大宗師
민공스님의 行狀
스님은 1871년 3월 7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읍 살일리에서 아버지 송신통宋神通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岩이요, 법명이 월면月面이며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13세에 충남 서산군 천장사天藏寺에서 그 해 12월 8일 봉허泰虛스님을 은사 로, 경허鏡虛스님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고 득도 하였다.
온양 봉곡사에서『萬法歸一하니 一歸何處요』하는 화두로 밤잠을 자지않고 열심히 공부하시다가 1895년 7월 25일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니 마음 머리에는 오직 일원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되어오던 의심을 조금도 흐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나던 중에 새벽 쇳송을 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를 외우다가 문득 법계성法界性을 깨달아 화장찰해華藏刹海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은 무엇에 비길데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리기고심외 空山理氣古今外
자운청풍자거래 白雲淸風自去來 힌구름과 맑은 바람은 가고 오고
하사달마월천래 何事達磨越西天 무슨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계명축시인일출 鷄鳴丑時寅日出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뜨네

다시 스님이 26세 되시던 해에 경허 1849~1912 선사께서 스님의 토굴에 오시니 화상을 뵙고 지금까지 공부해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니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화중생연 불속에서 연꽃이 핌이로다.』하시고 묻기를
『등나무로 만든 토시 하나와 아름다운 부채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하거늘
만공스님이 대답하기를
『등토시를 미선이라고 하여도 옳고 미선을 등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한즉
경허스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일찌기 다비문을 보았는가?』하거늘
만공이 어찌할 바를 몰라
『모르겠읍니다.』하였다.
경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유안석인제하루 有眼石人齊下淚 를 모르고 어찌 등토시를 미선이라 하고 미선을 등토시라 하는 것을 알겠느냐.』하며,다시 이르되
『萬法歸一이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다시 조주778~897스님의 무자화두無子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 그리고 원돈문을 짓지말고 경철문經截門을 지으라.』하고 화상이 떠난뒤에 스님은 무자화두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통도사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쉬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으니 百千三昧와 무량묘의無量妙義를 걸림없이 통달하였다.
1904년 7월 15일 경허화상이 함경북도의 갑산으로가시면서 만공이 공부하고있던 천장사를 잠시들렀다.
그 때 만공의 나이 34세였다. 경허화상께 그동안 공부한 내용과 보림保任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화상께선 기꺼이 허락하며 전법계를 주셨다.
雲月溪山處處同인데
水産禪子大家風이라
慇懃分付無文印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이로다

그리고만공滿空이라는 호號를 주시고 다시 이르되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자네에게 이어가도록 부촉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하고 주장자를 떨치고 길을 떠났다.
그때부터 스님은 모든 산천을 여행하다가 서기 1905년에 덕숭산에 이르러 조그만 초당을 짓고 금서대金仙臺리 이름하고 수년동안 보림保任을 하던 중 제산諸山의 납자들이 구름 모이듯하여 높이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니 이것이 곧 개당보설開堂普說아었다.
그 뒤로 스님의 문하에서 용상대덕龍象大德이 무수히 배출하였다.
그 뒤로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여 많은 사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에 가서 삼하三夏를 지낸 후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군 안안면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고 말년에 한간 초옥을 지어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달을 희롱하다가 어느날 목욕단좌하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 그림자를 보며 허허 웃고 문득 입적入寂하니 서기 1946년 10월 20일 이었다.
다비茶毘를 모시던 날 백학白鶴이 배회하고 광명이 하늘에 뻗쳤다
다비를 마치고 영골을 모아 석탑에 봉안하니, 세수世壽는 75세요, 법랍法臘은 62세며 석존후 76대 釋尊後 七十六 代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번 내리치고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이 말하가를 법문을 들을 때에는 얇은 어름을 밟는 거와같이 하라.』하였으니, 아것은 청법請法을 할 때에 눈으로 다른 경계를 반연하지 말고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으라는 말이다.
법문을 혼침으로도 듣지 못하고, 산란으로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청법의 자세를 갖추어야 되는 것이니 일체 망상을 고요히 하고 청법하려는 마음이 성성星星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만 헛된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혼침에 빠진 마음이나 산란에 떠도는 마음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비록 백천만겁을 두고 청법 할지라도 조금도 이익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듣고 실행하면 일언일구가 다 좋은 법문이 될 것이나 듣는 분들이 듣고 실행하지 아니하면 비록 좋은 법문이라도 헛되게 돌아가고 말 것이니, 오직 원컨데 대중은 듣고 실행하여 주기 바란다. 세속 사람들도 말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함이 세 가지가 있는데 무후절손無後絶孫이 가장 크다고 하였다. 우리 불법도 또한 그러하여 불자ㆍ법자의 몸으로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불법중에 큰 죄라 하겠다.
부처님의 혜명慧命이란 무엇인가?
세존이 설산에 들어 가시어 육년동안을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섣달 초여드렛날 새벽 밝은 별을 보시고 견성대오見性悟道를 하시었으니 그 때에 세존은 바로 부처의 혜명을 중득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중은 이 부처의 혜명을 받았다고 보는가?
이 혜명이야말로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않고 모난 것도 아니요 둥근 것도 아니요 짧은 것도 아니요 긴것도 아니요 나는 것도 아니요 시작함도 없고 마치는 것도 없는 것이다.
비록 우주는 괴멸할지라도 여래의 혜명은 마침내 멸하지 않는 것이니,어떻게 하면 가히 이 혜명을 이을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 꿈도없고 깸도 없는 경계를 아는자가 있는가?
세계와 내가 모두 적멸하여야 남과 나라고 하는 사상이 끊어지리니, 마땅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나의 주인공이 어떤 곳에 있어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가?
이 경계를 깨달은 자라야 곧 이것이 부처님의 맏 아들인 적자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인공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을 깨닫지 못한 자이며 부처님의 혜명을 이은 자가 아니다.
이와같이 자기의 마음을 깨닫지못하고 부처의 혜명을 잇지못하면 머리를 깍는 것 뿐만 아니라 눈섭까지 깍는다 하여도 불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의 혜명을 잇지 못한 자라면 천상천하에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인이라 할 것이니 마땅히 불자라면 항상 부처님의 혜명을 이을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혹은 이러한 생각은 세속 사람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삼계의 대돗사大道師이시므로 사생육취四生六趣가 다 부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즉 비록 세속의 사람일지라도 자기 주인공의 안신입명처를 깨달은 자라야 가히 사람가운데 사람이라 하겠다.
만약 구렇지 않다면 사람가운데 있어도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혜명을 얻은자는 참으로 사람이요, 혜명을 얻지 못한자는 사람이아니라 육취에 윤희하는 일분자의 사람이라 하겠으니 어느 때에는 말과 소가 되고 오느 때에는 비금주수飛禽走獸가 되어 육취 가운데 왕복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도의 윤희를 명하고자 하려면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에 자기의 주인공이 어느곳에 안신입명하는가를 깨달은 자라야 바로 참된 사람이니 비로서 육도 윤희를 면하는 참 사람이라 하겟다.
우리 불법의 선문가운데 벽을 바라보고 마음을 관하는 것도 또한 다른일이 아니라 안신입명처를 깨달아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이 참된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다만 출가한 승려만 하는 일이요 세속사람에게는 할 일이 아니라면 불법이 어찌 바른 정법이라 하겠는가?
백 천 만겁에 다시 동물이 되지않고 사람이 된다면 妄이 곧 진이요, 진이 곧 망이며, 俗이 眞이요 진이 곧 속이라 진과 속이 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이 불법을 보는 소견으로는 의복을 입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보면 승속이 다름이 없거늘 「무슨 까닭으로 세상에 불법이 있어 세상사람을 번거롭게 하느냐.」고 말하는 이가 있잇으나, 그것은 실로 그렇지 않다.
불교는 세상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생육취가 다 각성覺性을 가지고 있으니 각이 아닌자는 없는 것이다.
이 覺이란 깨달음 곧 불교이니 불법은 본래 이와같건만 천만가지의 근성이 있는 까닭으로 불법도 또한 첨만가지의 방편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근기로서 논한다면 곧 이것이 다 부처인지라 깨치면 성인이요 부처이나, 미하면 곧 범부요 중생인 것이다.
그러나 깨닫는 것이란 또 어렵기도 하고 또한 쉽기도 하다. 어렵다는 것은 석가세존과 같은 성인도 설산에 들어가시어 육년이나 고행을 하시고 깨달았으니 범부의 업신業身으로는 수행의분이 없이 어찌 쉽게 깨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쉽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쉬워서 터럭 한 오리 만큼도 간격이 없는 자기의 마음을 깨달음이라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으며 행하고 주하고 앉고 눕고 하는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체가 다 마음의 작용이다.
또 세상에는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얼마 아니가면 반드시 불교가 멸망하는 때가 있으리라.」고 하나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말이다.
불교는 멸망 시킬 수도 없고 번창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불교를 멸망시킨다면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멸망시키는 것과 같으니 혹 세상 사람으로서 자기의 마음을 멸망 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기의 마음이 곧 불법이요 자기의 몸이 이미 불자이거늘 어찌 감히 불교를 멸망시킨다고 하겠는가.
이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 말이라 하겠다.
또 나 뿐 아니라 성현께서 이구동음異口同音으로 「마음이 곧 부처니라.」하시었으니, 이것을 어찌 헛된 말이라 하겠는가.
불법을 없애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곧 무처인 것이니 自心의 부처는 멸망시킬 수 없는 것이다.
만약 法要의 의식과 형상으로 불법을 삼는다면 혹 멸망시킬 수가 있을지 모르나 곧 마음이 이 부처인 이상에는 멸망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이름이 높은 스님들이 없어서 불법을 비방 할지라도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요, 혹 사원을 헐고 불산을 철거하다 할 지라도 이것은 자기를 속이는 행위라 하겠다.
왜냐하면 비록 불상을 없앤다 할지라도 사람의 佛心은 오히려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불법은 천 겁을 지날지라도 옛건이 아니고 만세를 뻗어도 새롭지 아니하여 항상 이제와 같으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여 대지의 많은 중생이 다 이 가운데 윤희한다.
불법은 본래 이와같으며 이렇게 알고 지극한 마음으로 믿으면 마침내 自他의 속임을 받지않고 장래에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불법은 입을 열기전에 그릇침이라, 입을 열면 곧 어긋나고 생각만 동하여도 곧 어김이라 하였으니 힁설수설로 종일 설할지라도 이 근본 無言의 불교에 대해서는 다 마군의 業인 것이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 이르되 名相도 마업魔業이요 문자도 마법이며 부처님의 말씀에 이를지라도 역시 마업이라 하시었다. 왜냐하면 우리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나는 사십구년간을 설법하였지만 한 글자도 한 말도 설한 일이 없느니라.」하시었다.
그러므로 열반경 40권이 다 마설魔說인 것이다.
그러면『어떤 곳을 향하여 마업이라 이를 것인가?』
이 도리를 중득한다면 석가여래께서 다시오신 것이라 하겠다.

妄無妄妄是眞이오 眞有眞眞是妄이로다
如是眞忘外에 達磨渡西來로다.
망령된 것이 망이 아니면 망이 곧 진리이요
진실이 진에 있다면 진이 곧 망이로다.
이와같은 眞, 妄 밖에
달마가 서쪽에서 오셨도다. 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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