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27, 2012

만행 케임브리지 젠센터

케임브리지 젠센터

다음날, 나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었다. 다들 전날 저녁의 숭산스님 강의가 화재였다. 문득 한 친구가 숭산스님의 절이 하버드 옆 어디쯤 있다는 말을 얼핏흘렸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깜짝 놀라 그에게 그 절이 어디 있는지 당장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친구는 그저 하버드 옆 어디쯤 있는 ‘캐인브리지 젠 센터’라는 이름만 들었지 잘 모른다고 했다.
조바심 끝에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지기로 했다. 케임브리지 젠센터, 케임브리지 젠센터 ~~~ 마침내 찾았다. 하버드대학과 MIT 대학 사이에 있는 주소였다. 나는 지도까지 사들고 저녁강의도 빼먹은 채 자전거를 타고 그곳에 갔다.
케임브리지 젠센터를 찾아가면서 갑자기 예일대학에 다닐 때 보았던 한 건물을 떠올렸다. 예일대학 4학년 때 기숙사를 나와 학교에서 좀 떨어진 조용한 곳에 아파트를 빌려 살았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살았던 맨스필드 191번가를 지나면서 언젠가 흘긋 보았던 뉴헤이븐 젠센터’라는 팻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당시 그것이 불교사찰이라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클래스메이트 몇몇이 그곳에 다녔다는 말은 들은적은 있다.
아하~~~ 그러고보니 언젠가 그 건물앞을 지날 때 희색옷을 입고 머리를 삭발한 미국남자가 빌딩앞에 흔들의자를 놓고 책을 읽엇던 장면도 기억난다. 나는 그 당시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 역시 내 눈길을 느꼈는지 책에 묻고있던 고개를 들어 내쪽을 바라보았었다. 그는 나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낸 뒤 이내 다시 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만해도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완벽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런사람들은 그저 나와는 다른삶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뉴헤이븐 젠센터는 바로숭산스님이 운영하는 사찰이였다. 집에서 바로 코앞에 있었던 숭산스님의 사찰을 그때는 그냥 모르고 지나다녔던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을 노크하자 젊은 미국여자가 부드러운 미소로 문을 열었다.
“여기가 한국의 숭산스님이 운영하시는 젠센터인가요?”
“그런데요.”
“저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인데요, 어제 저녁스님의 강의를 듣고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참선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녀는 어서들어오라며 반갑게 나를 안으로 맞이했다..
“마침 오늘 신입회원들이 참선하는 날인데 잘 오셨네요.”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 문 앞에 섰다. 사진에서 본 적이 있는 종이를 덧댄 나무문 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앞서 걷던 그녀가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는 모습이 보여 나도 따라했다.
내키보다 훨씬 더 큰 신발장, 처음보는 것이었다. 모든칸에 운동화 하이힐 부츠~~~ 신발이 가득했다. 미국에서 집이나 사무실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것은 아주드믄 일이다. 더군다나 그때는 엄동설한 한 겨울이었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된듯 완전히 다른세계에서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젠센타에 가면 온통 동양사람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는 사람부터 선방이라는 곳까지 모두 서양인들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희색옷을 건네주면서 어떻게 입는지 알려주었다. 모두 끈으로만 된 옷이어서 묶는데 시간이 오래걸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이 한복의 옷고름 매는 것이었다.(물론 나느 지금 한국 신세대들보다 능숙하게 옷고름을 맬 줄 안다.
선방에 들어가니 큰 불상이 먼저 눈에 띄었다. 내 앞에 걷던 사람이 불상앞에 두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얼떨결에 나도 따라했지만 좀 거부감이 일었다. 교회나 성당에 갈 때도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이렇게 허리를 굽힐 정도는 아니잖아. 나는 지금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를 부정하는 불교 절에 와 있는데, 이것은 또다른 우상을 섬기는 일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을 하면서 선방에 들어섰다. 약 서른다섯 명 정도가 큰 방석을 깔고앉아 벽을 바라보며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처음으로 본격적인 참선을 하고 저녁예불까지 참석했다.

예불시간에 들리는 목탁과 염불소리.
염불은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읊어졌다. 나중에야 그때 읊어진 염불이 〈반야심경〉 〈천수경〉 〈관음경〉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 듣는 염불소리였는데도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는지 모른다. 이윽고 예불이 끝나고 사람들이 선방을 나갔다. 나갈 때 부처님 불상앞에 반배를 했는데 다들 익숙해 보였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법당앞에 서로마주앉았다. 약간어색한 침묵이 끝나고 지도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 한 사람이 가운데 앉아 서로자기소개를 하자고 했다.
“저는 피터이고 MIT대학 3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제 이름은 수지이고 보스턴 법률회사에서 일하는 변호사 입니다.”
“저는 해리이고 보스턴 증권회사에 다닙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입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미국에서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 중산층이라는데 놀랐다. 그리고 한결같이 좋은대학에서 공부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참선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나 스스로도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 중 누구도 나처럼 불교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없었고 그렇게 열심히 진리를 찾아 헤메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미국내에서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저 동양사상에 심취한 히피 정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선에 열중하고 있었다니, 나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왜 참선을 시작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기독교 신자였는데 싦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서 참선을 시작 했읍니다. 나를 찾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음을 못 잡고 있읍니다. 나는 고통 스럽습니다.”
“얼마전 아내와 이혼한 뒤 아이들이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 있읍니다.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마약에 손을대고 있읍니다. 아버지로서 매일 그들과 싸우고 논쟁하지만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싶어 이곳에 왔읍니다.
나는 이른바 불교신자라는 사람들은 나와는 뭔가 다른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와 똑같은 내 나라 사람들이 아닌가. 하나같이 일상에 예기치 못했던 고통과 피곤함과 건조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거기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나는 점점 더 어떤 확신의 길로 들어섯다는 환희를 느꼈다. 그토록 고통에 신음하며 밤을 지새던 날들~~~ 이제야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인지도 몰라. 아 !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내 다리였다. 평생 책상에만 앉아 버릇했던 나에게 20, 30분씩 가부좌를 트는 참선자세는 완전히 고문이었다. 그전에 참선수행을 시도하긴 했지만 기껐해야 5분에서 10분 사이었다. 그것도 한 달인가 하다 그만둔 지 오래였다. 다리가 너무아파 몇 분못가 무릎을 내내 세우고 있어야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도 몇몇 눈에 띄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쩌면 다리 때문에 成佛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져버릴 수가 없었다.

미국식 참선수행

숭산 큰스님이 미국절을 운용하는 방식은 아주재미있다. 오랜 불교의 전통을가진 한국에서는 불교신자들 중에 나이드신 분들이 많은데 미국에서는 완전히 딴판이다. 미국에 불교가 도입된 것에는 젊은 사람들의 관심이 우선 쏠리게 마련이다. 따라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이것은 요즈음에도 마찬가지다. 오랜 불교전통을 가진 동양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교는 미국의 신세대 문화다. 미국의 부모님들은 불교에 관심있는 젊은이들을 히피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숭산 큰 스님이 미국에 오셔서 첫 포교를 시작하신 해가 1972년이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젊은이들이 한국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되어있고 여행이나 교재등 많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으므로 비구, 비구니가 될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단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청년들은 자유롭긴 했자만 자유에 집착하는 경향이있어서 오직 몇몇 사람만이 출가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절 운영방식도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미국식으로 운영되었다. 미국에서는 사찰문화가 달리 있었던 것도 아니였으므로 숭산 큰스님은 미국문화에 맞는 새로운 미국식 불교문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다.
우선 미국에서는 출가한 비구, 비구니나 그렇지 않은 신도들이 함께수행을 한다. 숭산 큰스님이 미국의 뉴헤이븐, 프라비던스, 케임브리지 등에 세우신 한국 절(젠센터)에서는 신도와 스님들이, 남자와 여지가 한방에서 함께 참선수행을 한다. 학생, 변호사, 회사원, 공장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가진 남녀노소가 스님들과 함께 수행한다. 그리고 희망자들은 월세를 내고 절에 함께 머물면서 스님들과 생활할 수도 있다.
스님과 신도들은 매일 새벽네 시 반이나 다섯 시에 함께 일어나 108배를 하고 염불하고 참선한다. 같이 아침 발우 공양을 마친 뒤 스님들은 절의 일터로, 신도들은 각자 직장으로 흩어진다.그리고 저녁이면 다시 젠센터로 모여 저녁공양을 같이하고 저녁예불과 참선을 한다. 신도들 모두에게는 각자 방이 있고 또 각자 모두 절에서 맡아해야하는 일이있다. 청소나 빨래, 쓰레기 버리기 등 공동생활에 필요한 모든일을 나눠서 한다. 한 달에 약 1인당 480달러를 내는데 음식등 모든것을 젠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다.요리도 각자 사정에맞게 돌아가면서 만든다. 설거지도 같이한다.
젠 센터 스님과 신도들은 한 달에 한 번씩은 적어도 주말을 이요한 사흘간의 용맹정진 참선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사정이 있으면 하루나 이틀만 참여해도 된다. 그 기간 동안에는 모두 묵언한다. 만약 사정이생겨 용맹정진을 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 안에서 마주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 아침저녁의 예불시간에는 절에사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인근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참가한다. 숭산 큰스님이 만든 이런 사찰문화는 참선과 생활을 접목시키려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잘 맞았다.
큰스님 책에는 아런 말씀이 있다.
미국사람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때때로 자유에 너무 집착한다. 다른사람들이 손끝만큼이라도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절에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새벽 네 시반이나 다섯 시에 일어나야 하고 108배도 함께해야 하고 염불도해야하고 참선도 해야한다. 같이 밥목고 함께 일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단체수행을하면 여러분들의 업은 녹아 사라져 다른사람들을 도우며 살 수 있다.
나 자신만의 상황, 의견을 고집하지 않게 된다. 단체수행은 다른사람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의 업을 보는 것이다. 마치 감자를 깎는 것과 같다.미국사람들은 감자를 하나하나 깎는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는 큰 고무내야에 감자를 담아놓고 마구 비벼서 감자들이 서로 껍질을 벗겨내도록 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감자의 행동으로 자기의 껍질이 벗겨지게 하는 것이다. 감자를 하나하나 깎는 것보다 쉽고 빠르다. 이것이 바로 다른사람의 거울로 내 업을 녹여내는 것이다.
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신입회원으로 등록하고나서 한 달 뒤 아예살림을 젠센터로 옮겨 단체수행을 시작했다. 고무대야에 섞인 감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예불과 참선을 함께하고 저녁에 다시 예불과 참선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면벽참선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양다리를 꼬고 앉아 벽을 바라보며 아무일도 안 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것이다. 머릿속에 획획 지나가는 그런 생각들은 오랫동안 객관화 시켜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오는 것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가.
난생처음 나는 내 마음의 본질, 내 생각의 근원에대해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말 신비한 경험이었다.그 어떤 책이나 수업으로부터 받은 가르침보다 깊은 경험이었다.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긴 했지만 앉았다가 일어설 때마다 가슴깊이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케임브리지 젠센터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안돼 나는 3일 용맹정진 특별수련에 함여했다. 사흘동안 매일 여덟시간씩 앉아 참선수행을 했다.
젠센타에서의 단체생활은 여러가지 배울 점을 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만 함께 살앗다. 그런데 젠센터에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니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과도 만나게 된다. 견해가 서로 다르니 싸우기도 하고 반대로 큰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점차 단체생활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정말 큰스님의 말씀대로 거울 같았다.다른사람이라는 거울을통해 나 자신을 모든 것이다. 이,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무엇보다 나의 단점이 아주 뚜렸하게 보였다. 내가싫다, 좋다는 가치 판단을 놓아버리면 나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 잘 살아갈 수 있지만 내 견해, 내 상황에 집착하면 내 주변의 조건과 상황은 금새나빠졌다.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매일아침, 저녁으로 스행하고 어디서나 마주치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나의 삶은 금새 최악의 상황으로 바끠었다.
자기견해와 상황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이가는 우리 몫이었다.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버리지 않으면 스트레스와 고통이 나타났다. 스님은 스님대로 신도는 신도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자의 상황을 고집하면 싸움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하나를 깨달았다. 미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자기가 처한 모든 생각과 견해를 버린다면 세계평화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작은 공간에서 세계평화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테스트 한다고 농담했을 정도였다.
만약 내 조건과 상황 견해를 버리면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내 미음이 평화로워지면 젠 센터가 평화로워진다. 그리고 그걸 안 이상 이미 세계평화는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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