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25, 2012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입학

만행 하버드 신학대학원 입학

19989년 9월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때 나는 하버드에서 비교종교학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신념을 갖고 살다가 진리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방황을 거친 끝에 불교를 만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물교는 나에게 공부를 해보고 싶은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직 인연이 안 닿아서 나를 이끌어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우선 책으로 먼저 불교를 공부 해야만 했다.
겉으로는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학문을 하겠다고 내세웠지만 실제 나의 관심은 불교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내 안에서 조차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수십 년 동안 내 안에서 길러온 신념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에머슨 등을 통해 신에대한 일종의 부담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고통스러워졌다.
연인과 막상 헤어졌을 때 마음속에서는 약간의 해방감마져 느끼지만 결국은 가슴을 칼로 저며내는 듯한 이별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 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밀씀을 쫓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끝이아니라 사작이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뭔가를 더 버려야 했다. 해방된 노예처럼 자유로웠지만 그만큼의 다른 뭔가를 대신 지불해야 했다.
그때까지 나의 모든 철학적 사색, 진리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 진정한 스승을 아직 만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수녀님, 신부님, 수도사님들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에는 어떤 한계가 느껴졌다. 한 단계 더 높은 도약을 원하는 나에게 그분들의 말씀은 성이차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생각, 자기믿음, 자기스승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어느순간,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갈라진 땅의 거대한 벼랑끝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오룻이 혼자서 오직 혼자서 힘으로 이 거대한 틈새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사실앞에서 두렵고 당혹스러웠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철학이나 종교를 폭넓게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절반밖에 안된다. 나머지 절반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거나 무신론자들이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은 전세계의 종교와 인종이 함께 만나는 지구촌 대학원이다. 많은 학생들이 나처럼 교과서나 교수님들의 가르침 이외에 영적인 수행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입학한 첫날부터 대학원 분위기가 열려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랬던것은 학교내에 좋은 불교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생활은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에머슨, 쇼펜하우어에 대해 같이 공부할 수 있었고 무슨 책이든 읽고 교수님과 얘기할 수 있었다. 또 불교를 비롯한 동양철학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마침 학교안에는 노자사상 공부가 유행이었는데 특히 노자의 《도덕경》은 너도나도 읽는 베스트 셀러였다.피어싱 안 하고 《도덕경》 안보면 요새 젊은이가 아니라는 우스겟소리가 있을 정도로 당시 하버드에는 노자열풍이 불었었다.
나 역시 노자와 장자의 저작을 스터디까지 해가며 열심히 읽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확했다.
‘무위자연’ 無爲自然.
나는 그런개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은 여태껏 내가 생각하고 살아온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배운개념속에서의 삶이란 오직 뭔가를 하는 것, 뭔가 얻으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위자연은 삶에서 마무것도 만들려 하거나 가지려 하지 말라고 했다.
장자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에 나무 두 구루가 서 있었다. 한 나무는 아주 오래돼 밑둥부터 썩은 나무였고 다른 나무는 아주 훌륭한 나무였다. 그 나무는 늘 옆의 늙고 못생긴 나무를 업신여겼다. 죽는 날만 기다리는 아무쓸모없는 나무라고 놀려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나무를 하려홨다.
숲을 둘러보던 남뭇꾼은 대번에 훌륭한 나무 한 그루를 알아보고 도끼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고통에 못이겨 문물을 흘리면서 옆의 나무에게 이렇게 물었다.
“넌 어떻게 칼이나 도끼에 상하거나 찍혀 베어지지 않고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니?”
그러자 늙은 나무가 말했다.
“나는 못생기고 늙어서 그들에게 소용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살아남는 거야.”
카아, 이런 역설이 어디 있는 가. 살려면 주고 얻으려면 버려라.
하버드 신학대학원에 개설된 노자 장자 강죄에는 학생들이넘쳐났다. 어떤학생은 책에서 그치치않고 삶에서 노장사상을 구현하려고까지 했다. 학교를 버리고, 여지친구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무위자연의 삶을 산다며 산으로 들어갔다. 수염과 머리칼도 그대로 기르고 옷도 안 갈아입고 심지어 목욕도 잘 하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가 내심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방식은 뭔가 나하고는 어울리지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노자가 말한 자유란 ‘몸의 자유가 아니라 ‘마음의 자유’ 아닌가. 흔히 ‘무위’라 하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상에 올라가 눈 감고 책상다리로 앉아있는 것으로 생각 하지만 진정한 무위란 그런게 아닌 것 같았다.
1995년〈현암사〉에서 펴낸 《도덕경》풀이에[보면 편역자인 오강남교수가 ‘무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붙였다.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읹아서 무위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이에ㅔ서 발견되는 인위적행위, 과장된행위, 계산된 행위, 쓰데없는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어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위, 그런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아런 초월적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그렇다, 나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어떻게 나는 ‘무위’의 경지를 얻을 것인가? 어쨋든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하버드의 인기강좌
하버드 대학원의 첫 학기 때 마사토시 나가토미 교수로부터 불교강의를 들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아주 존경받는 불교학자였다. 그는 20년도안 하버드에서 불교를 가르쳤고 많은 제자들이 미국전역으로 흩어져 유명한 불교학자와 작가로 성장했다.
미국 불교 연ㄱ구에 큰 영향을 끼친 미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하버드에서도 아주 유명해 매강좌마다 수강생으로 붐볐다. 심지어 하버드 법대와 경영대학원 학생들까지 그의 강의를 듣기위해 몰려들었다. 인근 보스턴 지역에있는 MIT, 보스턴 대학교 학생들도 와서 청강을하고 교환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가 개설한 제목은 ‘불교의 자연과’이었다. 마사토시 교수는 아주 스마트하면서도 다정다감했고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늘 앞자리에 앉아 그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럴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는 느낌아었다.당시 하버드에서 가장 인기를 꿀었던 강좌가 인터냇 강좌와 함께 불교 강좌였을 정도로 불교열풍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거의 한 달에 한번씩은 전세계 훌륭한 고승들, 학자들이 와서 강의를 했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는 단골인기 강사였고 인도, 스리랑카, 팁벳, 일본의 큰스님, 학자들이 초청되어 왔다.
이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마사토시 교수의 강의는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는 본래 인도 티벳 불교를 전공했는데 일본불교도 함께 강의했다. 한국 불교강의는 없었다. 나는 그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가 아주 열심히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교수님역시 나에게 많은 관신을 가져주었다. 나는 강의시간은 물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여러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다. 당신이 아는 모든 지식이며 책을 나에게 전해주고 싶어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지않는 교수로 유명했는데 나에게만큼은 무슨 책이든 다 가져다 보라고 했을 전도였다.
나는 미사토시 교수를 통해 禪불교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달마대사, 조주, 마조, 임제, 육조, 혜능 등 중국 선불교와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1989년 가을, 교수님이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셨다.《육조단경》이라는 책이었다.교수님은 그 책이 ‘선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소개하셨다.
나는 점점 선불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책에나와 있는것은 단지 말일 뿐이고, 이곳은 중국도 아니니 절이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성을 얻기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 그냥아무산이나 들어가서 무조건 다리를 꼬고앉아 참선을 하면 되나? 스승이 필요하다. 나를 가르쳐줄 스승은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나는 이렇게 까지 생각했다. 왜 하필 미국땅에 태어나 이 고생을 하는가.
12억 인구의 중국인들은 나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장자, 노자, 혜능에 이르기까지 중국 성인들의 책은 나에게 너무나 가깝게 다가왔지만 그건 단지 책이었다. 책 속에 있는 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는 스승이 필요했다.
물론 내 옆에는 마사토시 교수가 있었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스승이었지만 단지 학자였다. 처음 한동안은 그를 선사처럼 존경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교수님이 나에게 지식은 줄 수 있으나 근원적인 나의 곰민은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아의 생각을 교수님역시 잘알고 계셨기에 내가 뭔가 여쭙고 답을 기다리면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폴, 나는 단지 교수에 불과해, 그 이상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단다” 혹은 “네가 방금한 그런질문은 오직 너의 스승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라고 하셨다.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마치 마라톤 경기에 나가 죽을힘을 다해 뛰어 이제 마침내 저 멀리 종착점이 보이는데 더이상 뛰지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같은 낭패감이 들엇다. 그동안 하버드에 초청되어온 수많은 승려들의 강의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면담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기대를하고 찾아가보면 그냥학교에서 만나는 학자나 종교인 분위기만 느껴질뿐 성에 차지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마사토시 교수로부터 숭산스님의 강의를 들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캠퍼스 몇 곳에서 포스터도 흘긋 본 기억이났지만 그냥 지나쳤었다. 또 한 사람의 그저그런 승려 아니면 불교학자려니 생각했다.
나는 당시 희망이라곤 없었다. 무엇에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날, 내 인생의 축을 바꾸었던 1989년 12월의 그날, 마사토시 교수가 나에게 숭산 큰스님의 강의에 꼭 오라고 하시면서 ‘살아있는 生佛’이라고 극찬하데 대해 약간호기심이 통하긴 했다. 여태껏 수 많은 불교승려들이 학교에 왔다 갔지만 교수님께서 생불이라고 칭한 사람은 달라이 라마를 빼고 숭산스님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날아침, 리포트를 내려 교수님 방에 찾아갔을 때,교수님은 한국의 숭산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책꽂이를 한참 두지셨다. 그러더니 문고판처럼 아주얇은 책을 애게 건네셨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Dropping Ashes on the Buddha, (여시아문 출판사에서 최근 《부처님께 재를 떨면》의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라는 희한한 제목의 책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 책은 선불교책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나는 ㅅㅁ드렁하게 그책을 받아들고 잠깐 뒤적인 뒤 가방에 넣고 교수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숭산스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저녁 숭산스님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나는 미친 듯이 그 책부터 꺼내 펴들었다.
아! 그때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교수나 승려로부터도 이런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불교책의 99.99퍼센트는 불교, 마음, 법문, 의식, 본성품, 불성, 空 등에 대해 ‘그것들은 이러절한 것’이라고 설명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책은 방금 내가 듣고 온 그이 강의처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심지어 어떤 질문에 대해 또 다른 질문을 통해 되물음으로서 명쾌한 답변을 애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존의 불교 승려나 학자들은 남들이 마음에 대한 정의부터 읊기 시작한다. ‘금강경에 따름면 마음은 어떤어떤어떤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미음을 이러이러하게 설명한다’ 고 또 ‘설명’하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단어와 말, 이론, 아이디어를 사용해서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숭산스님은 ‘말이 없는 것’을 설명하려들지 않았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책 말고는 처음 접하는 방식이었다.
숭산스님은 학생들의 질문마다 그의 경험을 섞어서 학생들이 갖고있는 생각으로부터 해답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답이란 질문자의 고통과 어려움을 깨끗하게 해결하는 데 맞닿아 있었다.
‘아 이것이 바로 한국 불교인가.’
나는 그날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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