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 2012

만행 하버드란 동굴

만행 하버드란 동굴

큰스님과 면담이끝난 뒤 짐을 꾸려 다시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으로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오직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직 수행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책은 더이상 관심이 없어졌다. 글쓰기나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만약 내 본성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 모든 철학 책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그것으로부터 얻은 그 수많은 지식을 다 어디에 쓸 것인가.
나는 버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비친 내모습, 여전히 혼란 스럽긴 했지만 뭔가 결연해 보였다. 나는 이미 내 남은 인생동안 숭산 큰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스님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나중 문제다. 큰스님은 마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침술사처럼 내가 어디에 병이 있는지 진맥만 짚어보고도 아시는 것 같앗다. 내눈만 보고도 나에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동안 나에게 그런확신을 갖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리하고 직접적이면서도 따뜻했다.
나와 그의 인연은 무엇일까. 어떤 종류의 것일까.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더군다나 그는 내 니라 사람도 아닌, 잘 얼지도 못하는나라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이 아닌가. 혹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과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내 남은 인생은 이제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외에 더 무엇이 나를 만족시킬 것인가.
그때부터 나는 공부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교슈님들의 가르침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건 시간 낭비야. 시간낭비. 이런 생각만 자꾸 일었다.
그전엔 정말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수업 때마다 교수님들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듣고 노트하는 열성적인 학생 이었다. 그런데 숭산 큰스님과의 만남뒤에 접하는 교수님들의 강의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열심히 교수님들의 생각을 받아적는 친구들이 오히려 로봇같아 보였다.. 왜 남의 지식을 복사하는 거야. 우리는 정말 우리자신의 생각이 뭔지 알아야 하잖아.
교수님들도 마참가지였다.
‘진리란 누구누구에 따르면 뭐뭐뭐고 찰학이란 누구누구가 말한바에 의하면 이러이러한 것이고…….”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교수님의 애기를 그대로 적고 있었다. 왼쪽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앞에 앉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뒷자리 친구도 보나마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히는 이 친구들이 단지 지식 복사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베끼고 베끼고 또 베끼는 아주 성능좋은 복시기에 다름아닌 것 아닌가.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생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찾기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경험이 필요하다. 여태까지도 그런 가르침을 찾기위해 책을뒤지고 교수님들을 찾아다녔지만 도움이 안 되었지 않는가. 그런식으로는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들이 동굴에 갇혀있다고 했다. 그리고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진짜 자기모습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큰스님을 만난 뒤 나는 하버드애말로 그 동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칠판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실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누군가 그려놓은 다른그림자를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1년 내내 하버드를 억지로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90년 5월에 기말숙제를 모두 제출하는 동시에 1년동안 휴학계를 냈다. 켐퍼스를 걸어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나는 학교를 휴학하자 마자 공사판으로 뛰어들었다. 공사판일은 내가 여름방학 때마다 간혹했던 아르바이트일이라 익숙했다. 우리 부모님은 대학 1학년 때 내 등록금을 보조해주긴 하셨지만 워낙 형제들이 많아 내게 계속 등록금을 대주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혼자서 돈을벌며 학교를 다녔다.
나는 그동안 식당 종업원, 출판사 일, 사무실에서 자료정리, 복사일, 공사판에서 벽돌을 짊어져 나르고 페인트칠 하는 일 등을 방학 때마다 하면서 등록금을 벌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 가기위한 돈을벌기위해 공사판일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매일아침 저녁으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했다. 나의 수행은 점점 더 깊어갔다. 일 때문에 아주 피곤했지만 곧 한국에가서 집중수행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한편,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으로 달려가 한국에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 관한책은 그리많지 않았다. 읽을만한 책도 없었거니와 겨우 손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책들뿐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국불교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전에 한국에 대해 오직 두 가지 경험만 했다. 80년대 중반 예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해도 한국에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예일대학은 미국에서 일곱번째로 가난한 뉴헤이븐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원래 백인들이 많이 살고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백인들이 모두떠나 가난한 흑인들만 사는 슬럼이 되어버렸다. 예일대학교수들 중에는 뉴헤이븐을 떠나 먼 곳에서 출퇴근하는 분도 계셨다. 이처럼 완전히 죽은도시였기 때문에 활기도 없었고 이렇다할 가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작고 깨끗한 구멍가계와 식료품점들이 눈에띠기 사작했다. 간판도 아주선명하고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비깥에 내놓은 과일, 야채,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들이 신성하고 깨끗했다.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었다.
슬럼가는 밤이되면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상가들은 서터를 내리가 바쁘다. 그런데 유독 한국가게만큼은 밤늦게까지 문을 열었다. 어떤가게들은 24시간 영업을하는 곳도 있었다. 자정이 넘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하다 배가 출출하거나 혹은 파티를하다가 맥주기 떨어졌거나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가게에 가면된다’고 생각하고 새벽 한 시건 두시건 그들은 우리의 가대에 어긋나지 않게 문을열어 놓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기말고사를 준비하다 문득 맥주생각이 나 친구들 몇명과 함께 학교앞에있는 한국수퍼를 찾은적이 있었다. 주인인 듯한 남자와 한 젊은이가 과일과 야채를 다듬고 있었는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나는 주인 남자에게 저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인데도 묵묵히 열심히 아버지의 일을 돕는 아들의 모습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가게는 또 약속을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했으면서도 손님들이 찾는 물건이 없으면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내일 반드시 그 물건을 갖다 놓겠다”고 약속했고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미국에서 그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정이 넘치는 가게를 본적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예일대학교수, 학생들이 모두 한국가게 단골들이었고 한국가게는 나날이 번창했다.
그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변호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1987년 5월 어느 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그날 〈뉴욕 타임스〉를 보다 1면 중앙에 실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는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오기 직전으로 한국에서의 데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중무장을 한 두명의 경찰이 경찰봉으로 누군가를 가로막고 있었다. 상대편은 다름아닌 스님이었다. 당당하면서도 밝고 순수한 얼굴을 한 스님은 경찰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자신이 들고있던 우산을 앞세워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중무장을 한 경찰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스님은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겨우 우산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당당한 표정일 수가 없었다. 누가 막는 자이고 누가 제지를 당하는 쪽인지 얼핏 분간이 안 되었다.
나는 그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것을 오려 네 배로 확대복사해 친구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의 신문에는 한국의 데모소식이 많이 실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한국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비록 광주항쟁을 고등학교 때 신문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 미국의 신문에는 전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내전이 보도된다 — 내게는 광주항쟁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나 같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광주항쟁이 그저 남아프리카나 중남미의 시위와 별다른 게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데모대나 시위대 사진들 중에서 그날 1987년 5월 무장한 경찰에 맞서 싸우던 그토록 당당한 스님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승려의 위엄과 두려움없는 표정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렇다고 얼굴에 적의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당함, 그 자체였다. 정작 온몸을 무장한 경찰들이 멈칫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도 먼저 접했던 책들이 인본 불교 책이었다. 하버드 대학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도 한국불교에 관한 책은 전무했다. 장서보유고가 세계적인 하버드 대학의 도서관만 해도 그 당시 일본 불교에 관한 책이 5천여 권 티벳 불교에 관한 책이 2천여 권에 달했는데 정작 한국 불교에 관한 책은 숭산 큰스님의 영어법문집 다섯권 정도가 전부였다. 원효ㆍ서산ㆍ경허대사 같은 한국의 위대한 고승들의 책은 하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겠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다 숭산 큰스님을 만나면서 비로서 한국과 한국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들은 한국말은 아마도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들었던 한국말 염불이었을 것이다. 뜻도 하나도 모르는 말을 발음기호만 보고 따라했지만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었다.
그러던 내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국인 한 분을 아주 가까이서 뵐 기회를 만났는데 그분은 젠센터에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시던 법수스님이라는 분이다. 법수스님은 하버드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계셔서 내가 영어를 가르쳐드리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해졌다.
그 스님은 아주 선심이 두텁고 친절하고 천진한 분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 닐 스님이 출타한 것을 모르고 스님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어쩌면 남자가 사는 방이 그렇게 깨끗하고 깔끔한지........ 그렇게 정리를 잘하고 사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성격도 깔끔한 분이었다.
방을 나오다 벽에 걸려있는 큰 달력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한국의 사찰들이 사진으로 실린 달력이었다. 열두 장에 담긴 한국의 사찰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한국의 사찰들을 사진을로 접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운문사 쌍계사 등 한국의 유명 사찰들이었다. 한 장 한 장 달력을 넘기면서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아름다운 사진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부끄러운 듰 얹혀있는 기와지붕, 아름답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건물의 선, 아침 안개 사이로 보일 듰 말 듰 엿보이는 절집..........아 저곳에 한번 가보았으면....... 내눈으로 저 아름다운을 꼭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음 한 견에선 반드시 그런기회가 오리라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열두 장의 사진이 끝나자 너무 아쉬웠다. 더 많은 사진이 보고 싶었다.
그날 저녁, 법수스님에게 내가 방안에 있는 한국 사찰 달력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했더니 아주 좋아하시면서 사찰 사진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인쇄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역시 감명깊게 보았다. 그런데 그 책의 글이 모두 한국말이어서 갈증만 더 일어났다.
서점과 도서관에가서 한국문화와 관련된 책을 뒤졌다. 그런데 만족할 만할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는 많은 동양문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일본이나 중국문화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미술이나 한국문화에 대한 소개는 전혀 없었다. 나는 좀 당혹스럽기도 했고 실망감도 들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것을 찾을 수가 없다니, 더군다나 한국불교에 대한 것은 전무하다시피했다.
오직 이 달력? 이 사진집? 이 정도 뿐인가.
얼른 납득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젠센터에와서 그것도 한국 스님이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 달력을 못 보았다면 한국사찰에 대한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영원히 없었을 것 아닌가.
나는 법수스님에게 한국사찰에 대한 사진을 더 찾아내라고 졸라대면서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했다. 법수스님은 나름대로 열심히 나를 가르치려 했지만 영어가 서툴렀던 관계로 그다지 도움이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법수스님의 삶을 통해 살아있는 한국불교의 생생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가난과 청빈의 삶이었다. 법수스님의 짐이라곤 간단한 걸망 하나가 전부였다. 옷도 한두벌에 불과했고 돈도 없었다. 그런데도 스님의 얼굴은 아주 맑았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찬절했으며 뭐라도 생기면 홀라당 남에게 다 줘버렸다.
나는 점점 더 불교에 관심을 갖게되어, 젠센터에 살면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 사실 법수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님이란 직업은 좀 별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카톨릭 수사난 신부와는 완전히 다은세계의 사람, 미국인의 눈으로보면 좀 히피성향의 사람들이 스님이 된다고도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법수스님을 통해 승려생활을 보다 가까이 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무소유이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살아가는 저 충만함, 저 여유로움, 나는 점점 불교 수행자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 스님으로 사는 것도 아주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밤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가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목탁소리를 따라 홀린 듯 소리를 쫓아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인가 세시였던 한밤중이었는데, 법수스님이 혼자 법당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계신 것이 이닌가.
나는 문간에 기대 한참동안이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청아하게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맘아있던 온갖 찌꺼기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태초에 어디에선가 울려퍼지는 원시의 목소리가 물결을 타듯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좀 슬프기도 했다. 오직 두 개의 양초 불빛에 기대어 염불하며 앉아있는 스님의 모습에서 원형질의 순수함이 묻어났다.
그의 염불소리는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고대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 했다.
그때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진한 향수라라까, 내가 태어났으나 기역하지 못하는 어머니 자궁같은 세계, 그런세계로 내 몸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곳은 한국도, 미국도, 아프리카도 아닌, 어쩌면 이 지구에는 없는 어떤 별에서의 여행자 같은 느낌, 언제인지, 어느 곳인지 도대체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없는 그런 곳으로 내가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주 친숙하고 낯익은 곳, 그러면서도 너무 신비한 곳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보니 한 시간 가량을 그 소리에 취해서 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다음낭 아침예불을 위해 기산목탁소리가 울려퍼질 때까지 잠을 아루지 못했다.
그 ㅟ 몇 차례 나는 법수스님의 새벽예불에 초대받지 않은 관객이었다. 그런 날 밤이면 잠자리에 돌아와서도 어김없이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반드시 법수스님을 찾아가 어제하신 염불이 무엇이냐 하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달마 게이트' Dharma gate라는 말이있다. 자기자신을 불가의 세계로 이끈 안내자라고 할까. 부모님은 내 몸을 주신 분이라면 달마 게이트는 내 정신을 새로 태어나게 문을 열어준 문이다. 숭산 큰스님이 법, 즉 달마 그 자체라면 법수스님은 나에게 달마 게이트였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든지 달마 게이트는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작년에 지리산 상선암에서 백일기도를 하던 중 그 법수스님이 경상도 어느 절에선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밤낮을 눈물로 지샌 적이 있다.
그 맑고 고운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오직 극락왕생만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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