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5, 2012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만행 김치 한입 베어물고

미국내에 있는 숭산스님의 모든 젠센터는 순전히 한국식으로 운영된다. 식사 때마다 김치 깍두기는 물론 된장찌게, 두부, 김 등 한국 음식이 많이 나온다. 물론 미국음식도 나오지만 말이다. 일단 젠센터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채식주의자인 탓도있고 사찰에서는 술,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채식 위주로 된 한국음식은 정말인기가 좋다. 특히 두부는 인기 ‘캡’이다. 식탁에 나오기 무섭게 동이난다. 매일 옥수수차, 보리차를 마신다. 김치도 인기가 좋다. 김치는 매일 모자란다. 특히 라면에 먹는 김치맛은 아주 일품이다.
내가 처음 김치맛을 보던 날, 나는 그때부터 김치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맛보기 전에는 그 시큼한 냄새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감히 맛보기조차 꺼려했다.
케임브리지 젵센터로 처음이사를 해서 도반들과 함께 밥을 먹는 식탁에 김치가 나왔다. 나는 냄새때문에 거둘떠 보기도 싫은데 다른 친구들은 너무 잘 먹는 거였다. 친구들은 나에게 한번 시도를 해보라고 재촉했다. 몇 번 망설이다 드디어 밥을 한 숟기락 가득 입에넣고 김치한쪽을 입에 넣었다. 와! 그때 경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독자 여러분에게 김치에대한 첫경험을 기억해내라고 하면 아마 자신이 없을 것이다. 워낙 오래 전 부터 먹어온 것일 테니 그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 이미 성인이 다 된 다음에 맛본 것이다. 그 느낌이나 그때 맛, 모든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종류의 음식을 먹어보았다.그중에서도 특히 인도 음식을 좋아했다.
그런데 김치를 처음 먹었을 때의 경험은 말로표현할 수 없는 강한 것이었다. 나는 김치를 한입 베어물고 는 너무 맛이있어서 그날 김치 한 접시를 다 비워버렸다. 그 뒤부터는 식사 때마다 김치를 먹었다. 친구들은 내가 김치에 완전히 중독이 되었다며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말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의 매일 김치와 밥을 먹었다. 오히려 빵과 수프는 가끔 먹을 정도 였다.
어느 날 법수스님은 ‘된장국이라는 것을 식탁에 내놓았다. 김치에 이미 자신감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된장국도 과감하게 시도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정말 맛있었다. 김치경험보다 더 독특한 것이었다. 김치가 강한 맛이라면 된장은 깊은 맛이라고나 할까. 독자 여러분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된장국을 먹으면서 마치 고향음식을 먹는듯한, 아주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렀던 동요를 듣는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습관 같은 것 말이다.
나중에 전생에 대해 얘기하겠지만 김치나 된장국의 맛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였다. 나는 한국음식을 먹으면서 어서 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나는 그 해 여름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다시 큰스님을 빕고 싶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해 내내 큰스님은 한국에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숭산스님의 영어 법문집 두 권을 거의 외우다 시피 열심히 읽었는데 하나는 이미 소개한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라는 책이었고 다른하나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이라는 책이었다.《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는 197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숭산스님의 영어법문집으로 큰스님의 책으로서는 고전에 해당하는 책이었다.
하버드대에 다닐 때 마사토시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을 받은 이후 큰스님을 만난 뒤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무렵에는 아예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이 서양에 소개된 동양불교책으로는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 책은 마국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아주 큰 공헌을 한 책이며 보면 볼수록 의미가 새겨지는 책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부분 불교책들은 부처니 마음이니 법문이니 생각이니 의식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큰스님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큰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대로 ‘고통은 생각에서 온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책에서 설명을 해봐야 읽는 이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리하여 더 많은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다. 더 많이 설명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오히려 불교속에서 또 하나의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대신 큰스님은 제자들이 큰스님에게 짊문을 하는 바로 그 순간 제자인 마음속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제자의 고통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순간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진리’ 혹은 ‘부처’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빠진 우리에게 자기마음을 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을 들어미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너의 이 순간 마음이다.
그 맑은 거울이란 바로 큰스님의 깨달음의 거울이다. 혹독한 수행을 통해 그가 얻은 깨달음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베프는 것이다.
큰스님은 ‘마음공부’ 오직 ‘마음공부’ 하는 것만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상조하셨다. 요즘사람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공부하기 때문에 책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했다.
큰스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눈을 감기 바로직전, 죽는 순간에 아무리 1천개의 박사학위가 있어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냐”
나는 그 여름 큰스님의 말씀을 새기다보니 새록새록 감동이 넘쳐흘렀다.
큰스님은 “내 말을 믿지마라, 너 스스로 너 자신을 알아야한다. 오직 수행하라 나는 단지 여러분의 본 성품을 손가락으로 짚어주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것을 찾아줄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쇼펜하우어조차도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는 마음에 대해 ‘얘기’하고 의식에 대해 ‘얘기’하고 생각에 대해 ’얘기’ 하고 삶의 의지WILL에 대해 언급했지만 자기의 가르침으로부터 독립해 그것을 어떻게 각자 자기의 것으로 만들 것이냐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생과 사에 완벽하게 설명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철저히 검토하여 그것의 진리를 재발견하라.”
“나는 너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너회들의 몫이니라.”
부처님의 기르침은 부처 당신이 추구하던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설명하는 가이드 북 같은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불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를 하나의 신이아닌 길잡이로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기고 부터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도그마가 아니라 길道인 그의 기르침, 즉 불법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공동체, 그 길을 따라 여행하는 동반자들의 집단에 귀의 하는 것이다. 불교는 주인의 승낙없이 억지로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하지 않으며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불교에서는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큰스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내 말은 충분하지 않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면 불교 경전이나 성경, 이 세상 진리를 가르친다는 모든 가르침은 악마의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생각과 집착을 끊고스행을 통해 ‘오직 모를 뿐’ 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오면 모든 가르침, 불교경전, 성경이 완벽히 그대로 진리가 될 것이다. 진리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창 밖에 자동차소리, 얼굴에 스치는 바람소리 이 모든것이 진리다. 우주는 언제나 항상 매순간 우리에게 훌륭한 법문을 준다. 말과 언어는 여러분을 가르칠 수없다. 오직수행, 수행하라”고하셨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책을 한쪽으로 치우고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책 없는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내가 여태껏 받았던 어느 가르침보다 귀중한 것아었다.
드디어 서울로
드디어 한국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 절에가서 수행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은(당연히)펄쩍 뛰셨다. 그분들의 실망과 충격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 학교를 휴학했느냐. 그것도 1년씩이나. 뭐? 한국엘 가겠다고? 그것도 절에가서 수행을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들어가자마자 거의 1년넘게 젠센터에서 살았는데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늘 걱정을 하고 계셨다. 부모님은 늘 나의 결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여 주셨건만 그 부분만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역정까지 내시면서 꾸짖으셨다.
그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마침내 “1년 휴학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그것도 절이냐”하고 물어오셨다.
독자여러분들이 좀 깁분 나쁘게 생각하실지 모르겟지만 한국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은 88올림픽 전후였다. 우리 부모님도 구세대이시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별로 아시는 게 없었다. 아니, 동양 전체에대해 잘 모르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마치 달나라나 화성이라도 가는 것처럼 놀란표정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집안의 그 수많은 친ㆍ’인척 중에서 오직 한 분만이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 그분은 외삼촌 즉 내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다.
외삼촌은 군인으로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그것도 한국에 주둔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으로 무기를 공수하는 일을 맡았었다고 한다. 몇 달간 부산에 살았던 적은 있지만 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쨋든 나는 1990년 11월 27일 마침내 뉴욕 존 에프 케네디JFK 공항에서 서울 김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에 대한 부담과 한국에서의 수행에대한 기대감이 섞인 채 말이다.
그때가지도 나는 이 춟발이 내 인생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또다른 출발이 되리라곤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안에서 한국관광 책을 읽다가 잠이들었다. 문득 잠이 깼을 때는 일본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랍고 흥분되었다. 아, 드디어 내가 태어난 곳 지구의 반대편 동양나라에 가까이 왔구나, 이 지구상에서 몇 안되는 오랜역사를 가진나라로 가고 있구나.
비행기가 일본을지나 한국에 가까이 가고있다는 스크린자막을 보면서 흥분에 가슴이 설렜다. 바깥은 어스름 저녁, 나의 온 신경은 오직 한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 창 밖으로 불ㅂ빛들이 보였다. 작은 도시같았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지금 막 부산으로 비행기가 들어섰읍니다. 발 아래 보이는 불빛이 부산 땅입니다.
나는 ‘부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외삼촌을 떠올렸다. 잠시 후 스튜어디스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발 밑에 보이는 곳은 광주 땅입니다.”
‘광주, 광주...... 아하...... 광주...... 바로 광주항쟁이 있었던 곳이겠구나.'
나는 비행기의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항쟁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의 흔적을 그 먼곳에서 찾아내보기라도 해겠다는 듯 비행기 밖 불빛들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한국 절을 지나고 있을까'하고 생각했다. 케임부리지 젠센터 법수스님의 방에서 보았던 그 사찰 사진들, 푸른산, 안개, 그 평화로운 절의 모습.......
나는 밤의 그 어둠의 땅을 내려다 보면서 그때 그 사진에서 본 산들이 어디있을까, 절의 불빛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창 밖이 뚫어져라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탄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너무 설렜다.
시계를 보니 한국시간으로 저녁아홉시 50분.
아마 이 나라 스님들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지금 절에서 주무시고 있겠구니.
"비행기가 곧 착륙하겠으니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요."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비행기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전세계 많은 도시들을 여행하고 수십 번씩 비행기를 타고 내렸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비행기가 점차 고도를 낯췄다. 아, 마침내 큰스님 땅에 닿고 있구나. 그리고 큰스님인 고봉대선사, 또 고봉대선사의 스승이신 만공대성사, 그리고 한국 선승의 위대한 스승 경허대선사...... 그분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가르침을 펴신 이 땅에 드디어 내가 발을 딛는구나. 참선수행의 나라, 아름다운 불상이 있는 나라, 고풍스런 기와집과 깊은 산에 사찰들이 있는 이 나라를 마침내 내 발로 찾는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표정일까. 아마도 모두 부처님의 모습일 거야. 모두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일 테니 말이야. 아, 사람들 표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행기 바퀴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창밖으로 혹시 절 지붕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고 머리를 완전히 창에 박고 있었다. 내눈에 처음 발견되는 절의 불빛은 어느 절 불빛일까.
드디어 차츰 고층빌딩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네온사인이 화려했다. 멀리 희미하게 빨간 점 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가만있자 저게 뭘까. 비행기가 점점 지상가까이 내려가자 그것이 무엇인지 뚜렸하게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빨간 점이란 다름아닌 십자가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 수백 개에 달했다. 오둠 속에 빨갛게 점점이 박혀있는 십자기 네온사인.
나는 그동안 여러나라를 여행했지만 그렇게 십자가가 많은 나라는 처음보았다. 더군다나 밤에 빛나는 네온사인 십자가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 이거 불교의 나라 한국 맞아? 아마 스튜어데스가 안내 방송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필리핀에 도착했는데 서울이라고 잘못얘기한게 아닐까. 어떻게 사찰과 불교의 나라인 한국에 이렇게 십지가가 많을 수가 있어? 그래 아마 비행기가 주유 때문에 필리핀에 들렀다가 서울로 가겠지'
드니어비행가가 땅에 닿으면서 바닥에 뭔가 희끗희끗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알고보니 눈이었다. 필리핀은 눈이 안 내리는 곳이잖아, 서울이 맞긴 맞는 모양이네.......
다음순간 , 안내방송이 나왔다.
"엘컴 투 김포 에어포트 서울 코리아."
내 마음속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는 서둘러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어떤 나라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리면 모든나라에는 그 나라마다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냄새가 있다. 예를들면 몇 년전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릴 때 그 냄새는 좀 이상했다. 그렇게 상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홍콩과 중국에 도착했을 때 그나라 냄새는 나를 좀 불편하게 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코로 들어오는 냄새는 아주 낮익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와본나라같지 않았다. 열다섯 시간동안 좁은 비행기좌석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발을 딛고 선 대지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내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깨우기 시작했다.
몸이 좀 떨렸다. 그건 단지 추워서만 아니었다는 것이 내 오랜 여행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적 직감이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무심스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스님은 숭산스님 밑에서 출가한 미국인 스님으로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는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스님의 차를타고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 도착했다. 창 밖으로 비치는 처음보는 서울의 모습,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때가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가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오후 세 시만되면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보기 때문에 밤에는 거리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 이 많은 학생들이 학교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다니.......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24시간 가게문을 열어놓고 열심히 일하던 뉴헤이븐의 한국수퍼와 식료품점, 한국사람들을 떠올렸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로구나. 학생들까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니.......'
존경심이 일었다.
김포공항에서 수유리 화계사로 가는동안 무심스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말씀을 건넸는데 시실 나는 처음보는 서울 창 밖 풍경에 사로잡혀 그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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