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2, 2012

만행 어디에 있던지 그리운 한국

만행 어디에 있든지 그리운 한국

어느 날 큰스님께서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서울 화계사 생활이 4년째로 넘어가던 1997년 3월경 이었다. 큰스님께서 개인적으로 나를 부르시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나는 사뭇 긴장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현각스님, 우리 미국 본사인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 자리가 비었습니다. 나는 스님께서 이 주지일을 좀 맡아주었으면 좋겠네요.”
프라비던스 젠 센터는 큰스님이 미국에 세운 첫 번째 절이다. 미국에 큰스님이 세운 젠 센터 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절이다. 커다란 선방이 세 개나 되고 주변에 땅도 아주 넓으며 절 입구에는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크고 높은 7층 목탑이 있다. 아주 아름다운 절이다. 그 절 주지가 된다는 것은 관음선종, 즉 숭산 큰스님 패밀리에서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큰스님의 제의에 깜짝 놀랐다. 내가 그곳 주지 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 우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직을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큰스님은 기쁜 얼굴로 나에게 제안하고 계셨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큰스님,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도해야 합니다.”
“아니에요. 현각스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큰스님, 저는 아직 너무 어려요.”
내가 하도 완강하니까 큰스님은 좀 실망하시는 눈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나는 모처럼 내게 하신 큰스님의 청을 거절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런데 며칠 후 큰스님이 또 나를 불렀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다시 주지일을 권하리라. 아니나다를까.
“현각스님, 프라비던스에는 젊은 스님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현각스님의 에너지가 필요해요. 다른사람은 할 수 없어요. 현각스님만이 할 수 있어요.”
참으로 난감했다.
왜 큰스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하실까. 큰스님께서 나에게 주지 일을 부탁하셨으나 내가 거절했다는 소식이 화계사 국제선원에 쫙 퍼지자 스님들은 저마다 부러움 섞인 한마디씩을 던졌다.
“와, 현각스님 대단하다. 큰스님이 프라비던스 젠센터를 맡겼다고? 와, 큰 스님이 얼마나 현각 스님을 믿고 계신지 알 수 있는 증거야, 좋겠다, 현각스님.”
그런데 정작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두 번째 제의를 받던 날 나는 마치 마음속의 큰 비밀을 털어놓는 듯 비장하게 말씀 드렸다.
“큰스님, 저는 미국에 갈 수가 없읍니다”
마음속은 찢어지는 듯했다. 큰스님의 청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의아해하셨다.
“이건 현각스님에게 큰경험이 될 수 있어요. 왜 안 가려고 하지요?”
그래, 사실대로 말씀 드리자.
“큰스님, 사실은 정말 한국을 떠나고 싶지않읍니다. 제 일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습니다.”
하하하, 큰스님께서 무릎을 치시며 웃으셨다.
“아이고, 그런 일이면 됐어 됐어. 난 무슨 큰 사정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영원히 미국가서 사는 것 아닌데 뭘 그래요. 당분간 떠나 있는 거에요. 당장 짐 싸세요.”
“큰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전 정말 한국을 떠나기 싫어요.”
나는 완강했다. 큰스님은 좀 놀라는 눈치셨다. 잠시 후 ‘알았다’며 나가보라고 하시는데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조용히 방을 물러나왔다.
그 소식을 들은 스님들이 “현각스님, 왜 그런 좋은 제의를 거절하세요? 아주 훌륭한 일이에요. 미국으로 가세요” 하며 재촉했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큰스님이 나를 또 부르셨다. 나는 만약 이번에 큰스님이 제의를 해오시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큰스님이 그렇게 권하시면 갈 수 밖에 없지.
나는 그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큰스님은 다시 나에게 주지직을 맡으라고 권하셨다.
“현각스님,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는 서울 화계사 다음으로 중요한 절이다. 미국에 세워진 숭산스님의 국제교구 본사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 나를 보내려고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간청을 하시는데 어떻게 또 거절한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2년만 하면 안 될까요? (보통 주지가 되면 5, 6년은 일해야 한다.) 2년 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그럼, 그렇게 하세요.”
“동안거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럼, 현각스님이 주지니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
마침내 1997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한국에서 다기섿트, 참선 방석, 서예작품, 한국 미술품 등을 가지고 가 젠센터를 완전히 한국식 전통 사찰로 꾸몄다.
어느 정도 주지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한국가는 꿈을 꾸었다. 가슴속은 너무 슬프고 답답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내게 많은 한국 선물을 보내줬다. 김치는 물론 한국 과자, 뽕짝 ∙ 가야금CD를 비롯해 그림, 염주, 김, 녹차,책, 잡지 등 한국에 관한 것은 모조리 보냈다. 나는 그것들을 읽고 듣고 먹으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 친구가 CD 두 장을 보내왔는데 <서편제>와 <김덕수 사물놀이 패> CD 였다. 나는 CD 플레이어에 그것을 올려놓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의 산하와 사람들이 너무 그리웠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어느 날 조각가인 쌍둥이 동생 그랙이 주말에 나를 자기가 살고 있는 뉴욕 아파트로 초청했다. 동생 친구들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그들 중 몇몇이 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해 저녁에는 그들도 만나보기로 했다.
나는 동생과 시간을 보내다 저녁 약속 시간이 돼 나갈 준비를 하다 갑자기 CNN 방송에서 나온 프로그램 광고를 보았다. 곧이어 아홉 시에 〈 북한의 실상〉 (inside North Korea)이란 제목으로 북한을 취재한 보도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것이었다. 안내 방송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 사진이 지나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랙에게 아홉 시에 저 프로를 꼭 봐야 하니 밥 먹다가 시간이 되면 일어나겠노라고 말했다. 그랙은 친구들이 얼마나 형을 가다렸는데 말도 안 된다며 마음을 바꾸라고 종용했다.
나는 동생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기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일어날 시간이 되자.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서운해하는 눈길이 등뒤에 꽂혀있지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랙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내 TV를 지켜보았다.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아이들, 퀭한 눈들, 몸은 완전히 말라붙어 머리만 기형적으로 큰 아이들, 너무 슬퍼 눈물이 흘렀다. 저들도 한국 사람 아닌가. 그런데 왜 저들에게 저런 천형과 같은 고통이 내리는 것일까.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보았지만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본 적은 없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그랙이 들어왔다. 그랙도 내가 걱정이 됐는지 친구들과 그냥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형?”
“저것 좀 봐라. 저런 고통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
“형, 저건 우리나라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저 나라가 바로 내 나라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형이 완전히 미쳤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뒤부터는 미국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주지 생활도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 해 11월에 화계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 〈아라랑〉 국제방송에서 외국 스님의 만행기를 촬영하고 싶다고 요청이 왔다는 것이다. 여러 스님들이 의논한 결과 현각스님이 적격인 것 같으니 빨리 서울로 돌아와 촬영에 임하라는 말이었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어 좀 당황했지만 일단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내심 너무 기뻤다. 더구나 이번 일이 국제 선원을 홍보하고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해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 또 큰스님께서도 좋은 일이라며 허락하셨다고 하니 금상첨화였다.
나는 드디어 그 해 10월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의 땅 냄새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았다. 아…… 이 그리운 냄새와 공기.
제작진들과 만나 한국의 산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은 한 달간 진행되었다. 힘들었지만 한국에 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에 돌아가 짐을 풀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 IMF가 터져 온 나라가 6∙25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신문, 방송을 끼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틀어놓고 전날 밤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나 점검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날이 갈수록 경제는 약화되고 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뉴욕 타임스〉 1면에 난 사진을 보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기를 업은 한국의 아줌마, 두꺼운 스웨터를 껴입은 할머니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친 사진이었다. 그 사진아래에는 한국이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는 설명과 함께 전국의 한국인들이 아기 돌 반지며 결혼반지까지 내놓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슬픔에 복 바쳐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나라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이 착한 사람들.
미국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너도나도 한마음이 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인 것이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때문이야. 내가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는, 나라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것을 내놓는 사람들, 마음 한 켠에선 자랑스러운 마음까지 일었다. IMF 위기조차도 그들의 이런 순수한 마음까지 빼앗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는 마음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나는 그때부터 시간이 나는 대로 큰스님께 전화를 했다.
“큰스님임…… 돌아가고 싶어요.”
“한국으로 보내주세요.”
아마 내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큰스님에게 이런 어린애 같은 간청도 가능했으리라. 한국의 승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쨌든 나의 간청에 큰스님도 어쩔 수가 없으셨는지 어느 날 미국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좋다, 지도법사를 한 분 구했으니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날로 당장 한국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때가 1998년 1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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