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13, 2012

만행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 까지 2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재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기 될 수 없다. -누가 복음 14장 26절 ~ 28절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 무엇을 들었다고 쉽게 행동하지 말고, 그것이 사실인지 깊이 생각하여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히 행동하라.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임금처럼 말하며, 눈처럼 냉정하고 불처럼 뜨거워라. 태산 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 역경을 참아 이겨내고, 형편이 잘 풀릴 때를 조심하라. 재물을 오물처럼 볼 줄도 알고, 터지는 분노를 잘 다스려라. 때로는 마음껏 풍류를 즐기고, 사슴처럼 두려워 할 줄 알고, 호랑이처럼 무섭고 사나워라. 이것이 지혜로운 이의 삶이니라. -잠보심경 제 3:4~436상

현각
1964년 미국 뉴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 하버드 대학원 재학중 화계사 조실 崇山 대선사의 설법을 듣고 출가해, 1992년 선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한국 선불교의 본부격인 참선 전문 사찰 홍법원의 주지를 지냈으며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불교경전의 영어 번역에 힘쓰고 있다. 숭산스님의 설법집 「선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과「세계일화 The Whole World is a Single Flower.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 을 영어로 역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현재 화계사와 계룡산 국제 선원에서 구도자로서 수행정진하고있다. 1999년 10월
나는 한국 문화에 빚진 사람
1991년 9월 나는 하버드 대학원에 다시 복학했다.
나의 여자친구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 마음상태를 금방 알아차렸다. 이미 하버드를 졸업하는대로 한국으로 다시 갈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았는데 그녀는 이미 여자의 육감으로 눈치챈 듯했다.
나는 한국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한국 사찰에서의 수행생활도 잊혀지지 않았다. 학교에 복학한 후 젠센터를 나와 아파트를 따로하나 빌려 살았는데 방에 큰 석굴암 불상 사진을 걸어놓기도 했다.
어느 날 하버드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교수님 한 분이우연히 내 아파트에 왔다가 그 사진을 보시더니 너무 아름답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는 한국 미술을 처음 접했다며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다고 기회가되면 한국에 가복 싶다고 까지 하셨다. 그는 미술을 보는 안목이 세계적인 분으로 하버드 안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ㄴ나는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한국가게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김치. 깍두기, 김 등 각종 반찬을 사다 먹었다. 내가 그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주인이나 손님들은 흘끗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가게 손님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이었는데 웬 껑충한 미국인이 들어와서 김치, 고추장 등 매운 것을 사가니까 매우 신기한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호박죽이었는데 인스턴트 가루이긴 했지만 틈날 때마다 사다가 만들어 먹었다. 친구들에게도 가끔 해주었는데 참 좋아했다. 돈이 좀 생기면 케임브리지 젠센터 옆에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되장찌게, 돌솥비빔밥을 사먹곤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 나는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의 ‘뽕짝’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고속도로 휴계소, 택시 안, 편의점 가게에서 그런 가락의 노래들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서야 나는 그것을 ‘뽕짝’ 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흐느적 거리는 가락이 너무 좋아서 테이프 몇 개를 사갔다. 가사도 모르는 채 그냥 가락만 듣고 있어도 마냥 좋았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운전할 때나 청소할 때마다 그 테이프를 틀어놓았다. 미국인 찬구들도 아주 재미있어 했다. 심지어 자기들도 듣겟다며 복사를 해간 친구들도 있다.
뽕짝은 아주 순수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은 좀 슬프기도 했기만 너떤것은 아주 기분이 좋아지게도 했다.
나는 아중에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의 ‘한’ 恨이라는 정서에 대해 듣게 됐는데 그 한이라는 말에 담긴 한국인들의 마음이 내 가슴에도 깊이 전해져왔다. 어쨋든 뽕짝이 한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얘길 듣고 내가 왜 그렇게 뽕짝에 반했는가. 신비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돌아온 직후 마음속에 큰 다짐 하나를 했었다. 바로 한국말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하버드에 복학하자마자 한국어 강좌에 등록을 했다.
교수님은 김남희 선생님니신데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의 부인이셨다. 와그너 교수는 하버드에, 아니 미국학계에 처음으로 한국학을 소개하신 분이다. 와그너 교수는 당시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치고 계셨다.
내가 신청한 한국어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수업이 있는 집중강의였다. 수강생은 약 40명 가량 됐는데 미국인은 나와 다른 여학생 단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재미교포 2세, 혹은 3세 글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미국인이었다. 자유분망했고 어른들 앞에서도 거리낌는게 없었다. 완전히 마국 신세대였다. 겉은 한국인 이었지만 속은 미국사람 같다고나 할까.
나는 사실 한국어 강의를 신청하면서 말은 물론이고, 내심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수업시간에 만난 한국인들은 나처럼 까막눈들이 많았다. 어떤 학생들은 듣는 것은 좀되는데 쓰기난 말하기는 업두도 못 냈다.
학생들 중에 한국말을 배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몇명이 안 됐다. 대부분 학생들은 그저 부담이 안 가는 가벼운 강좌를 듣겠다는 의도로 수강하고 있었다. 또 일부 학생들 중에는 부모님의 간청에 못 이겨 억지로 ㅂ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수강생들 대부분은 아예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거나 갔더라도 어릴 때 잠깐 다녀와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이목구비는 한국인이었지만 전형적인 미국인이 도고 싶어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스타일을 지니치게 쫓는다든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곧바로 따라하고 싶어한다든지, 부모와 할아버지ㆍ할머니 세대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모습들이 엿보였다. 수업시간빼고는 그들이 하는 대화는 한국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미국의 속어와 비어들을 섞어가며 오직 영어만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국 교포들 중 많ㅇ은 학생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치 몸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상실감을 갖고 살고 있었다. 좀 슬펐다. 다만 나는 그들이 한국어 감좌에 올때마다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갖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교포자녀라는 동류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마치 한가족이라는 느낌이 들 전도로 수업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여느 강좌에서 보여지는 경쟁이라든지 하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예일대 법대, 하버드 법대나 의대 등 내로라 하는 대학을 다니는 수재들이었는데 한국말을 배우는 시간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듯했다.
어쨋든 나는 1년 동안 하버드를 한국말을 배우는 재미로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 공부는 더이상 흥미가 나지 않았다. 일단 이학은 했으니 학위를 따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만 있을 뿐이었다.
김남희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한국에 대한 다큐멘타리 영상물과 시진을 많이 가져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학교안이나 밖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행사도 마련하셨다.학생들 각자가 집에서 준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김 교수님이 직접 미역국, 된장국, 두부, 잡채 등을 만들어서 우리를 먹이기도 하셨다.
교수님은 학생들ㅇ에게 “조상의 나라를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나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는냐”면서 그들에게 한국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가르쳐주고 싶어하셨다.
어느 날 교수님이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테니 준비를 해오라”고하지 남학생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건 여학생듦만 하면 되지요? 순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남학생은 한국말 수업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좋아 인기가 좋았다. 교수님도 함께 웃으시더니 이렇게 받아 넘기셨다.
“아니, 평소에는 완전히 미국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갑자기 전형적인 한국남자가 되었네요.”
그러자 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학생들이 종이를 무쳐 그에게 던지면서 놀려대기도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교수님이 그에게 물었다.
“학생은 한국 남자예요? 미국 남자예요?”
진지한 선생님 물은에 그 남학생 얼굴이 빨개졌다.
교실안에 잠시 침묵이 흘렸다.
선생님은 우리들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게 우리들의 고민이지요.”
사실 외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더라도 좀 이상할 정도로 그들은 한국문화와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나부다도 관심이 넚었다. 어떤 학생들은 애써 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소홀하게 여기기도 했다. 한국에 관한 한 그들은 나와 똑같은 외국인 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경험을 통해 이런다짐을 했다. 내게 그렇게 소중하게 다가온 한국 문화, 그리고 숭산 큰 스님이 가르쳐주신 한국의 정신, 이것이 얼마난 소중한 것인지 그들에게 알려주리라. 이미 내 삶은 큰스님을 통해 구원을 얻었으므로 나는 한국 문화에 일종의 빛을 진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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