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9, 2012

만행 아! 스님이 되고싶다




만행 아! 스님이 되고 싶다

미침내 90일간 겨울 안거가 끝났다.
깊은 산 깊은 절에서 90일 동안 참선수행 경험에서 얻은 것을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교육받고 주로 도시만 여행했던 내게 계룡산 신원사에서의 그 체험은 너무 큰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경험이 나에게 아주 친숙했다는 점이다.
신원사 법당 앞에는 아주 오래된 감나무가 있는데 그렇게 오래된 듯한 나무는 처음보았다. 그런데 그런 나무하나조차도 내게는 낯설지 않았다. 미국에는 나무들이 다 싱싱하고 쭉쭉 뻗어있다. 그런데 한국 나무들은 다 비틀리고 꺾었는데도 보면 볼수록 애정이 갔다.
90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새로운 획을 그어줄 사건이 될 것임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안거가 끝나고 화계사로 올라왔다., 한 달 동안 화계사에 있으면서 안거수행에 참여했던 미국인 친구와 함께 숭산스님의 법문집을 영어로 편집하는 작업을 했다. 그 미국인 친구는 오랫동안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접한 친구였는데 나에게 좀 도와 달라고 해서 혼쾌히 참여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10여일 전, 나는 그 친구와 함께 한국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 친구도 한국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여서 둘 다 어디를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화계사 스님 한 분이 경주를 가보라고 했다. 무작정 서울역으로가서 경주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금히 따나온 길이라 여행 안내 책자하나없이 내려갔다. 그저 화계사 스님한테 경주에가면 남산에 들렀다가 불국사에가서 자고 오라는 얘기만 듣고 내려온 상태였다.
우리는 물어물어 남산이라는 곳에 닿았다. 남산으로 들어서서 다섯시간, 여섯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나는 남산을 올라가면서 주변마다 곳곳에 새겨진 석불들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깜짝 놀라고 흥분했다. 남산은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같았다. 이탈리아 로마에서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지만 로마는 하나의 도시이기 때문에 남산같은 안온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차원이 다른 것 이었다. 너무나 인상적 이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마침내 우리는 큰 석상앞에 도착했다. 그 웅장함과 장엄함에 놀라 서 있었더니 찬구가 앉아 참선을 하자고 제안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우리는 산속 참선수행을 하고 108배를 했다. 수행을 마치고 산을 더 올라갔더니 작은 암자가 나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니 눈앞에 큰 논이 펼쳐졌다. 저멀리 산능선들이 겹쳐 보이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꼭 한국에 다시 올 거야.”
우리는 그 작은 암자를 한참 둘러보다 산을 내려왔다.
남산을 내려온 우리는 불국사 석굴암으로 향했다. 불국사 석굴암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이 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로마에서 한 달간을 산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수도원을 차례로 방문한 적이 있다. 매일 루브르 박물과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독일에서는 아름다운 고성들도 많이 가봤다.
그런데 불국사 석굴암의 아름다움은 그 세계적인 문화재들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불국사 석굴암을 보면서 나는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로마, 파리의 문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아 들었건만 어떻게 한국의 이토록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서는 한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을까. 도대체 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저 불상과 굴을 만든 사람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드 다빈치에 버금가는 천재적 장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에대해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었을까. (나는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해 나중에 그 불상의 얼굴을 숭산스님 영어법문집 《선의 나침판》의 표지로 썼다.
나는 마치 비밀의 성을 탐사하는 사람처럼 경주의 모든것에 놀라고 가슴이 뛰었다. 이윽고 불국사 대웅전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는 내 마음속에 이번에는 간절한 다짐하나가 피어올랐다.
‘아 ! 스님이 되어 한국 땅에서 살고 싶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 내가 정말 스님이 되어서 마침내 한국에서 살게되었을 때, 어느 해인가 백일기도를 하기위한 토굴을 찾고 있었다. 마침 동국대에서 만나 친하게 된 원각스님이 나에게 암자 하나를 소개해 줬는데 경주 남산에 있는 천룡사라고 했다.
나는 천룡사를 찾아 남산을 걸어올라가면서 매가 그날 그자리에서 기도하고 참선했던 불상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었다. 그런데 천룡사는 그 불상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산등성이에서 멀리 마을들을 굽어보며 한국에 다시오겠다고 다짐했던 그 암자가 바로 천룡사였다. 정말 묘한 인연이였다.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나라에서 세우고 지원한 護法國寺였다.신라시대 때는 중국승려, 학자들까지 합쳐 1천여명이 먹고 자면서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도 소개가 된 절이다.
지금은 절은 불타고 사라진 채 돌기둥만 여기저기 남아 있는 페사지에 작은 암자만 서 있다.
나는 스님이 된 후 백일기도를 위해 천룡사에 들어서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경주방문, 남산 등산, 전혀 계획하자않았던 남산 석불 앞에서의 참선수행과 그곳에서의 다짐, 그리고 몇년 후 다시 예기치 않았던 천룡사에서의 백일 기도, 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불국사 경내를 거닐면서 출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출가를 생각하자 얼른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형제와 누나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니의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백하자면 출가하기 전 나에게는 아주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케임브리지 젠센터에 다닐무렵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숭산스님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젠센터의 지도법사였다. 머리가 아주 좋았다. 그녀의 삶은 온통 참선수행 뿐이었다 모든일에 두려움이 없는 강한 여자였지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나는 어느날 그녀를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소개시켰는데 부모님들은 아주 좋아 했다. 부모님은 우리 두사람이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그동안 나는 남자친구들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지혜와 교훈을 여러 여자친구로부터 얻었다. 사랑이란 내 삶에 많은것을 경험하게 해주었고, 많은 가르침을 가져다준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 중에도 나는 마침내 그녀를 만나면서 완벽한 영적 파트너(soul mate)를 만났다고 믿었다. 우리는 같이 수행하고 삶의 진지한 문제들을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었다.
나는 불국사 대웅전을 빠져나와 스님들이 내준 절 방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이 생각 저생각으로 잠을 못 아뤘다. 나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받아만 왔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받은 것을 다른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 이 고통에 빠진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부터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기위해서 였다.마음 한구석, 늘 진리를 찾고 싶다는 갈망으로 목말라 했다.
그런데 이제 비로서 나의 길을 찾았다. 문만 열고 들어서면 내 앞에 진리의 삶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둘이 걷는 길이아니라 혼자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물론 훌륭한 짝을 만나 같이 수행하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오직 ‘나’만 생각하게된다. 수행과 결혼은 양립하기 힘들다. 젠 센타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보아왔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때문에 예불시간에 빠진 적도 있을 정도인데 결혼을 하면 과연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가족들을 다 버리고 그 살을 저미는 외로움을 감수하면서 출가를 하는 전통이 2천5백 년이나 이어져 오는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생각을 하면서도 무섭게 도리질을 쳤다. 내가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해, 못해.
그러면 또, 나는 어떻게 살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과 일상에 묶여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다시 돌아누웠다. ‘그래, 결혼하지 말자, 출가하자.’
나의 이런 결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까.
내게도 상상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다가오리라. 그러나 내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아니,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갖고있었던 진정한 바램을 이제야 발견한 것뿐이다.
나는 정말 스님이 되고 싶다.
불국사에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몸은 한국을 떠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에 다시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졋다.
미국에 돌아가자 부모님과 친구들은 내 얼굴이 완전히 바뀌였다고 놀라워 했다. 너무 맑아지고 깨끗해졌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 다시등록하자 저으기 안심하시는 눈치였다.
나는 사간 날 때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의 경험에대해 얘길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갖고 내 얘기에 귀를 쫑끗 세웠다.
나는 또한 한국에서 재미있는 선물을 많이 사갔는데 친그들과 부모님은 그것들울 받우며 기뻐하셨다. 그들에게 원앙새 한쌍, 산수화 그림등을 주면서 한국이 얼마나 오랜역사와 문화적 전통응 가지고 있는 나라인지 자랑했다. 불교 신자인 친구들에게는 단주와 불상이 그려진 탱화를 선물했다. 오늘날까지도 내 하버드 친구들 중에는 그때 내가 주었던 염주와 단주를 손에 차고 다니는 친구들이 있다.
그 단시만 해도 미국에는 불교용품 파는 가게가 별로없고 기껏해야 LA나 뉴욕같은 대도시에 가야 겨우 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아주 싼 물건이어도 미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들이 많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강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
이밖에 한국에서의 사찰경험, 고승들을 비롯한 승려들의 생활, 숭산스님 이야기, 벽암스님 이야기, 같이 수행했던 전세계에서 온 숭산스님의 제자들 이야기 휴지가 날아다니는 화장실 이야기, 우리를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던 보살님 이야기등, 하버드 친구들은 내가 이야기 할 때마다 박장대소를 하고 손뼉을 치며 입을 헤에~~벌리고 들었다.
하버드 친구들과 젠센터 도반들 중 몇몇은 내 얘기에 자극받고 이듬해 한국 신원사에서 동안거를 하기도 했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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