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14, 2012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만행 출가를 결심하다

나는 마침내 하버드를 졸업했다.
하버드의 졸업식은 아주 대단하다. 전세계 사람들이 졸업식에 온다. 졸업생과 가족 모두에게 하버드의 졸업식은 매우 뜻 깊은 가족행사이다.
3백여 년을 쉬지 않고 매년 치러진 그 졸업식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자신이 지금 미국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자랑스러움을 갖는다. 졸업식장에는 미국은 물론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졸업식사는 언제나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다. 하버드의 졸업식에 참가하는 일은 이처럼 의미 있는 일이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 역시 매우 좋아하셨다.
졸업생 가족들에게는 단지 두 장의 무료 티켓만이 제공되기 때문에 참석을 원하는 사람들은 티켓을 사야 한다. 서로 티켓을 사려고 난리이기 때문에 표는 일찌감치 매진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이미 석사 논문을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졸업식까지 무려 3주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논문 수정작업 때문에 그것도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미 지도교수로부터 통과를 받은 나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 즈음 참선수행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라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논문이 통과하자마자 프라비던스 젠 센터로 달려가 한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식을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7잔 25절~27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에는 불빛이 타올랐다. 예수님은 나를 항상 진리의 길로 이끄는 등불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들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예수님이 납치를 당했다고나 할까. 예수님 가르침을 오직 자신만이 제대로 알고 있고 제대로 된 갈을 걷고 있다고 믿는 인간들에 의해 교회라는 집단, 종교라는 틀, 혹은 제도에 갇혀버렸다.
현실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에 따라 평생 살겠다는 나의 신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나를 철학의 길로, 불교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출가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는 부처님 때문에만 출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진리를 찾고 싶다면 부모와 형제자매를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내 잠재의식 속에 깊이 남아 떠나질 않았다. 나는 예수님 말씀대로 가족이라는 둥지 안에서는 절대로 진리를 찾을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던가, 아니면 한편에게는 충성을 다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신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생명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생명이 음식보다 더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더 중요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새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다.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너희들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치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아라. 그것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솔로몬이 온갖 영광을 누렸으나 이 꽃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마태복음 6장 24절~34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아니 운이 아주 좋았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없는 일이란 없었으며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소위 말하는 인생의 탄탄대로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버드 졸업장이란 내 부모와 친구들에게 그런 내 삶의 하나의 상징이 될 것이다. 이런 어려운 졸업장을 거머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특히 부모님은 얼마나 뿌듯해 하실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졸업식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소중한 수행의 경험을 놓칠 수는 없다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3주 동안 단지 졸업식 참여만을 위해 허송세월을 해야 하는가. 그 동안은 할 일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그 당시 나는 집중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 길에 나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읽고 생가하고 계산하는 일은 그만두자 .나는 위대한 숭산 대 선사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는 살아있는 스승이고 그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지혜는 결국 고통에 신음하는 나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시작이다. 논문 제출을 마쳤으니 이제 액크 교수 보고서를 위한 연구를 하기 전에 집중적인 용맹정진 수행을 통해 큰스님의 가르침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몇 년 전 내가 예일 대학을 졸업할 때 우리 식구들 전부가 그 졸업식에 참석해 출하해주었다. 폴이 드디어 예일 대학 동문이 되었다며 부모님 누나, 형, 동생들이 얼마나 기뻐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떠오른다. 그 화려했던 날의 캠퍼스.
그러나 대학 졸업 후에도 내 마음속엔 늘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하지 않았나. 그리고 결국 숭산 큰스님을 통해 해담을 얻지 않았나.
나는 가족들 생각이 날 때마다 예수님 생전의 일화를 상기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아주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강연을 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서 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불렀다.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어머니와 형제가 누구냐?” 하고 되물으셨다. 그리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보아라,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렇다. 이 땅에 부모, 형제, 자매 아닌 이가 누가 있는가. 이 세상에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보스턴 지하철 역에서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잠자는 사람들, 거리의 거지들, 삶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방황하는 혼란에 빠진 남녀들, 거리의 택시 기사들,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도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 식당 웨이터들, 배달부들, 그리고 변호사 자신들, 이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이고 형제들이었다. 내 어머니고 아버지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쇼펜하우어, 에머슨, 키르케고르, 파스칼, 워즈워즈, 셀리, 키즈, 휘트먼 등등 그 수많은 성인들의 가르침 아닌가. 그것이 바로 음악의 성인 베토벤, 구스타프 말러의 가르침 아닌가.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나는 결국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부모님은 완전히 놀라 자빠지셨다.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느냐. 돌이킬 수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으셨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진리를 찾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딴생각 하지 말고 똑바로 가야 한다,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건 바로 그 다음날 나는 보스턴으로 갔다. 그리고 프라비던스 젠 센터 옆에 있는 다이아몬드 힐 젠 선방에서 한 달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내 남은 인생에 큰 획을 긋는 귀중한 결정을 앞두고 나는 좀더 강해져야 했다.
수행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아주 빡빡하게 하루 일정을 짰다. 매일매일 1천 80배를 하고 열 네 시간씩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에 생식가루만 먹기로 했다. 자다가도 밤에 일어나 절을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그때는 초여름이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수행 첫 주는 아주 힘들었다. 아침에 침대를 빠져 나올 수가 없는 날도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는 부모님 얼굴이 계속 떠올랐고 지금’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형제들과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옆 프라비던스 젠 센터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나는 그녀가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용맹정진 동안 묵언수행을 했기 때문에 그녀와 전화통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출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시간을 그 문제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을 만났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면서 우리는 같이 수행하며 남들을 돕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숭산 큰스님의 제자였고 내가 스님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다. 그러는 한편 내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첫 주 동안 나는 거의 매일 눈물을 흘렸다. 쉼 없이 절을 하면서도 참선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밤에는 어둠 속에서 뒤척였다. 아침이면 베개가 마치 물에 젖은 듯했던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너무 고통스러워 다 때려치우자 결심하기도 했다.
‘그래 지금 그만둬도 괜찮아, 이 전도면 충분하잖아, 1주일 정도 했으니 할 만큼 한 거야. 이제 나는 보통사람들처럼 살면 돼, 여자 친구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밀 수 있을 것이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일하면서 주말이나 휴가 떼 젠 센터에서 틈틈이 수행을 하면 될 거야. 부모님들은 돌아온 아들을 보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반겨 하실까. 그들은 나를 여전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나는 그들 어깨에 지워드린 큰 짐을 내려놓게 하는 효자 노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거의 2주가 흐르자 내 마음이 서서히 맑아지고 잡생각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침안개가 햇살에 걷히는 것처럼 모든 의심과 고통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보다 명확하게 보였다.
‘그래 출가를 하자.’
용맹정진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는 여자친구를 만났다. 그리고는 내 결심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녀는 너무나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기도를 하는 동안 결국은 자기 곁으로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는데 내가 스님이 되겠다는 결심을 더 굳히고 오자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액크 교수에게 보고서를 내야 했기 때문에 수행을 끝낸 뒤 바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나의 미래를 얘기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년동안 내가 결국엔 스님이 되는 것으로 결론 지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녀와 이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상 출가에 대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해봐야 나를 더 약하게 하고 서로에게 실망만 더 안겨다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더욱 집중했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적절한 인연이 나에게 다가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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