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1, 2012

만행 부모님전 상서

만행 부모님전 상서 萬行 父母任 前上書

나는 지금까지 큰스님에게 두 번 혼찌검이 난 일이 있다. 모두 스님 생활 초창기 때의 일인데, 그대 어떻게나 혼이 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진다.
나는 큰스님 일행과 함께 미국 프라비던스 젠센터로 돌아왔다. 처음엔 스님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 동안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스님이 되니까 사람들이 ‘이것은 안 돼’ ‘저건 하면 안 돼’ 하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기 위해 스님이 된 것인데 사람들의 그런 간섭이 좀 참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만 스님이 되였지 마음속은 아직도 ‘나’ 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났다는 자만심 말이다.
며칠 뒤, 큰스님의 법문이 있던 날이었다. 마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스님들과 같은 줄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이 들어오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는 게 아닌가.
“갓 출가한 승려가 뒤로 앉아야지, 어떻게 감히 다른 스님들과 함께 앞자리에 앉는가.”
어찌나 화를 내시던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뒤로 물러가 앉으면서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스님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느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병을 치료하려면 그 쓴 약도 먹어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나를 죽여야 한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 에게 한없이 되뇌었다.
또 한번 혼찌검이 난 것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과연 내가 스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놀라실까. 어떻게 이 일을 알려야 하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리지 못하고’ 고통에 허우적대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도반스님 중 한 분이 내 고통을 눈치챘는지 큰스님께 여쭈어보면 뭔가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제안하셨다. 나는 용기를 내 큰스님을 뵙기로 했다.
어느 날 밤, 큰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미침 큰스님께서는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 두루마기를 벗고 계셨다.
큰스님은 베개를 제자리에 놓으며 나를 맞이하셨다.
“무슨 일이지요?”
한밤중에 난데없는 방문이기도 했고 내 얼굴이 무척 안돼 보였는지 큰스님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 부모님 문제를 말씀 드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스님은 이렇게 소리치셨다.
“부처님은 가족과 왕궁을 다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 가셨읍니다. 오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케이?”
그리고는 일어서서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런 큰스님의 꾸지람에 당혹스러웠다. 주무시는 시간을 방해한 것도 죄스러운데 잠을 마다하고 방을 나가버리시니 이런 큰일이 어디 있는가 방문 닫히는 소리가 얼마나 무섭고 컸던지 나는 기절할 뻔했다.
큰 스님으로부터 받은 그 꾸지람은 그때 두 번이 다였지만 어떤 말씀, 어떤 위로보다 더 큰 가르침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큰스님의 꾸지람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내 마음속에 주저와 안일한 마음이 일 때면 큰스님의 그때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버텨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다.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나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부모님 가슴을 면도날로 슥슥 긋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받고 고통에 빠질 부모님 머리 위에서 잔인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
저는 지금 중국에서 한 달 동안의 수행을 막 끝내고 돌아온 길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재미있고 신비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을 다시 뵙게 돼 기뻐요. 지난 여행은 아주 행복한 여행이었고 그 수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정말 행운아 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모님께 몇 년 동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저는 스님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미 지난 달 9월 7일 중국 남화사라는 절에서 숭산 큰스님 밑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모님들께서 얼마나 충격을 받고 놀라실지, 두 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의 행동이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저는 출가를 생각해왔으니까요.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평생을 종교 수행자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것을 말이에요. 물론 그러한 제 결정은 때로 흔들리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이제 비로소 저는 제 길을 찾았습니다. 출가를 결정하기까지 제 마음속에 가장 큰 부담은 부모님과 여자친구였어요. 만약 그녀와 결혼을 하면 수도자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생각이 많았던 거지요.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와 결혼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시겠지요.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여자입니다. 지난 3년동안 저희 둘의 관계는 그 어떤 연인 사이보다 완벽한 동반자 관계였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훌륭한 사이라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결국 ‘나’에 갇히고 맙니다. 내 아내, 내 자식들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저의 머릿속에는 지금 결혼을 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삶이 무엇이냐,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가득해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계속 남아 있는 한 결혼을 한다 해도 가족에게 온전히 몰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자신을 모르고서 지금 누군가와 편안하고 따뜻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제가 그녀를 만난 이후 표정이 더 밝아지고 짜증도 덜 부린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녀라고 믿고 계시지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저의 변화는 맑고 강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다름아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하루하루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저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젠센터에 갔던 이유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본성을 깨달아 이 고통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자는 결심에 따라 ‘수행’을 하기 위해 간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물론 저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고 지난 3년간 제 생애 처음으로 가장 편안하고 열정적이며 완벽한 연인 관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생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들은 계속 남아 있었으며 더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지난 며칠 동안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스님이 되겠다는 제 결심을 어떻게 부모님과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저나 그녀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그녀는 지금 강연 차 유럽에 가 있읍니다.
저는 불교나 숭산 스님 때문에만 출가한 게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 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출가한 것입니다.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이냐 하는 점에서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
순수하고 맑은 길은 무엇입니까.
어머니, 아버지. 저는 그것을 찾고 싶습니다. 사회나 남들이 저에게 규정하는 기준이나 잣대에 따라 로봇처럼 살지 않고 제 본성을 찾아 살고 싶습니다.
아마 부모님은 종교 수행자가 되는 것까진 좋은데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를 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한국인 승려 밑에서 불교 수행자가 되느냐고 기막혀하실 것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부나 수도사의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바는 결국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참선수행이야말로 제 마음을 알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가장 강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 수녀님, 목사님들도 참선수행을 하신답니다.
저는 제 스승이신 숭산 큰스님이 저를 가장 잘 알고 제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읍니다. 큰스님은 오직 제가 저의 본성을 찾기를 바라고 계시며 이미 많은 가르침을 주셨읍니다. 제가 오직 참된 나를 찾을 때에라야만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 저의 작은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
‘스님’이란 말을 듣고 당혹스러우시겠지요.
카톨릭 수도사님들이나 신부님들은 속세와는 좀 격리돼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합니다.하지만 불교수행자들은 약간 다릅니다.
불가에서 얘기하는 ‘스님’이란 ‘스승’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교 전통에서는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살며 서로 돕습니다. 스님이란 신도들에게 그저 길을 안내해주고 함께 일하는 동반자들일 뿐입니다. 일반 신도들과 다른 점이라면 매일 보다 열심히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특히 제가 출가하려는 ‘관음선종’에서 스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마다 변호사 ∙의사∙목수∙회사원 등 직업을 갖고 있듯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겉의 직업은 달라도 내면의 직업은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의 본성을 찾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이란 직업은 아주 특별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세속에서 얘기하는 돈이나 사회적 명예,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다른 사람을 돕는 생활에 일평생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생은 물론 다음 생, 다음 생, 世世生生 이 세상의 고통과 함께 부대끼면서 말입니다.
‘참선’이란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입니다. 순간순간에 이런 맑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아주 혹독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미 풋내기 스님으로서 이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바로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집중적인 수행입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속에 가져온 의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평생 깊은 산속에 쳐 박혀 그저 바윗돌에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하늘을 응시하는 일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돕는 거시입니다.
옛 선승이 하신 말씀을 하나 옮겨볼게요.

인간의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을 때, 어디로 가는가?
삶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본래 구름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 우리 인생의 오고 감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맑은 게 하나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순수하고 맑든 게 있다.
그렇다면 맑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

아버지, 어머니. 저는 바로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저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제가 가는 이 길이 두 분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열심히 살아서 저의 본성과 진리를 찾으면 저는 중생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서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안보여 벌써 몇 시간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지 모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두 분 가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제가 가는 이 길이 그렇게 고생해서 저를 키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길이라 하더라도 저의 겉 모습에 너무 괘념치 말아주세요. 저는 죽을 때까지 두 분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살아갈 것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얼마나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시잖아요.
스티브, 존, 태드…….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부모님은 하나같이 이혼했어요. 그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는지 모두 알고 계시지요. 얼마 전에 에이즈로 죽은 조지는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마약에 손대 결국 에이즈에 걸린 거예요.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렇게 화목합니다. 저희 형제들은 커갈수록 더 우애로 뭉치고 있고요. 이 모든 행복은 두 분의 작품입니다. 저희 아홉 형제에게 두 분이 베풀어주신 사랑과 헌신, 희생으로 저희들은 이제 이렇게 사회의 훌륭한 일원으로 성정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다 갚아야 할지요.
방법은 ‘단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평생 사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귀한 존재가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길이기도 하고요.
거듭 밀씀드리지만 겉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안은 하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저는 항상 두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1992년 10월 12일
아들 폴 올림
몇 년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편지 첫 구절을 읽고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다 읽기는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뭔가 이해하고 계셨다. 평소에 내가 종교적인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런 나에게 ‘너는 특별한 아이’라고 격려해주셨다. 만약 수도사나 신부가 되었더라면 어머니는 아주 기뻐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라니, 더군다나 부모님은 내 여자친구를 딸처럼 생각 하셨는데 그녀까지 잃을 생각을 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셨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지금 부모님은 나의 삶에 대단한 격려를 보내신다. 그리고 불교가 점점 더 미국에서 영향력을 얻고 있다 보니 나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신다.
출가 후 몇 년 동안은 집에 가서도 가족들과 불교에 대해 전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엔 나에 대한 배신감이 가득 차 있는데 내 말이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 내가 편집한 숭산 스님의 영어 법문 집 두 권을 보내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읽으시더니 아주 감명 깊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생화학박사다. 그리고 엄청난 독서광이다, 역사, 철학, 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있고 아주 넓은 상상력을 가지신 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아주 높은 가르침이다. 이제야 네가 출가한 이유를 알겠구나. 이 선의 가르침은 모든 종교의 종착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존재에 대해 이렇게 높은 가르침을 몬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나는 애 오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강한 확신이 있다”면서 그러나 “나는 너의 길도 인정하마” 라고 말씀하셨다.
아 ! 위대한 나의 어머니.
빈손으로 가는 게

No comments:

Post a Comment